이근호 목사의 책, 강의, 설교등에 대한 비평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이때에 성경적인 진리가 무엇인지 참 분별하기 쉽지 않다. 각 신학자들이나 목사, 개인마다 다른 시각에서 전개해 나가기 때문에 헛갈릴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시대가 안고 있는 신학적 한계이자 풀지 못할 숙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는 성경을 통해 택한 백성에게 진리의 말씀을 깨닫도록 인도해 가심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이근호 목사 개인 에대한 공 이나 과실을 논지 삼은 것이 아니라 여러 관점중의 하나로서 이근호목사의 신학사상이 뿜어져 나오는 책, 강의, 설교등에 대한 비평을 통해 다른 각도에서의 조명이 필요하다고 여겼기에 졸 필 이나마 적고자 한다.
이근호 목사의 신학의 최대의 강점은 오직 ‘예수십자가의 피’ 외에는 역사세계든 묵시세계든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신학이라고 할 수있다. 특히, 기존신학에서 놓쳐버린 삼위일체론(신론), 예정론, 교회론 등 신학 전반에 걸쳐 본질 즉,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에서 벗어난 난점을 지적하거나 비판 한 점은 획기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삼위일체론, 예정론, 교회론 등에서의 그의 논지가 부정하는 쪽으로 전개 되기는 하였으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 근거를 인간의 관념에서 시작해서 관념으로 전개되는 기존신학을 거부하고 오직 역사에서 시작하여 묵시로 끌어가는 점이 성경적인 원리와도 통일점을 보이는 것은 때로는 매우 신선한 충격으로써 획기적이고 감탄을 자아 나오게 한다.
특히 타락한 인간에 대하여는 인간이 상상하는 것 훨씬 그 이상의 부패를 강조하는데 심지어 하나님께 충성하고자 하는 자아에 대해서도 부패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그것 마저도 죄라는 지적은 선한 일을 하고 있는 자아 마저도 ‘예수그리스도의 피’ 앞에 부정되어야 할 존재임을 지적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부패한 윤리관을 되짚어 보는 의미있는 지적이라 할 수 있다.
강점에 대하여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인정되어 왔고 필자도 다른 글에서 종종 언급을 했기에 문제점에 대해서 더 비중을 두어 언급하도록 하겠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만을 주장하려는 마음이 너무 앞서다 보니 그 부작용으로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 도 엿보인다.
첫째 : 성경본문의 의도가 도외시 된다는 점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 이 말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어떠한 신학 사상도 원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의 인도하심보다는 못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 하기위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는데 성경의 전체의 흐름과 역사적 배경과 문맥을 고려해야만 그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전달하고자 하는 뜻을 올바로 이해 할수 있는 것 인데 원 저자이신 성령의 인도하심 보다는 자신의 신학사상을 지나치게 대입시켜 끌고 간다는 점이 있다. 정작 성경본문이 주는 의미보다는 전달자의 외침이 더 크게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 행함 측면이 무시되거나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에 대한 복음을 올바로 받아들였는가에 대한 검증은 구약에서는 율법으로 신약에서는 성경에 담겨있는 명령문 등에서 기록되어 있는 말씀으로 검증되어져야한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씀을 올바로 이해한 사람은 그 믿음에 상응하는 행위가 동반되는 것이다. 그런데 믿노라 하면서 행함이 뒤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 믿음이라고 할수 없다는 야고보서의 지적은 올바른 믿음인가 아닌가의 검증은 행함으로 가능하다는 점도 포함해서 일러 두고 있다. 물론 행함 자체로 믿음이라 할 수는 없다. 그것을 궁극적으로 판단하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십자가의 피로 거듭난자가 그 은혜에 감격한 어떤 행동이 자연스레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행함이라는 것인데 그 행함으로 믿음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검증하는 기능이 신약성경의 명령문에 고스란히 담겨있데 십자가의 복음을 강조한 나머지 이러한 성령 안에서의 행함 부분이 취약하다는 점이 다분히 있다. 복음 안에서의 자유가 내 마음대로의 자유로써 성도에게도 건덕이 아니라 상처를 주는 흉기로 돌변 할 수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하는 것이다.
셋째 : 모든 신학, 신학자등을 성경적 비평 보다는 비판만 가한다는 점이다
2000년 교회사를 통해 볼 때 수 많은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이 거쳐갔다. 그들의 신학은 시대를 반영하기 때문에 그 시대에는 성경적으로 부합하거나 그렇지 않은 것도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다시 재 조명해 볼 필요는 있다. 하지만 그들의 성과나 오류가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복음이 전수되는 기여는 분명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신학이 성과가 있거나 오류가 있다고 해서 그들이 구원 받았는가라는 평가는 우리 인간의 소관이 아니기에 아무도 알수는 없다. 가령 신학적 주장이 성경적인 내용을 담고있다고 해도 구원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통해 복음을 복음되게하는 수단으로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것 만큼은 인정되어야 하고 그에 따른 비평은 있어야 하지만 모든 신학자들의 신학을 통째로 비판을 가하게 되면 무의식중에 자신의 신학이 최고라는 공식을 만들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가 죄인이기에 비판보다는 성경적 비평에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한다.
넷째 : 자신의 신학적 실수나 과오 등은 전혀 엿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비록 성령으로 거듭난자에 의해 신학이 전개 된다 할찌라도 그도 본질적으로는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얼마든지 오류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근호 목사의 저서나 설교 강의등에서 거의 찿아 보기 힘들 정도로 자신의 과오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은 매우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오류가운데서 책을 출판하거나 설교를 하거나 강의를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시간이 지난 후 그것을 보거나 타인의 충고에 의해서 얼마든지 자신의 오류도 언급되어 져야하는 것은 죄인된 본성을 가진자로서의 당연한 자세여야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러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점은 동일한 잣대로 보지 않는 시각에 있는 것으로 본다.
다섯째: 지나칠 정도로 어렵게 전개한다는 점이다.
설교는 다소 쉽게 전개하는 편이다. 그러나 책이나 강의는 철학이나 기타 여러 학문을 동원하여 매우 어렵게 전개한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이나 학문을 사용하는 자체에 대하여 문제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지식적 식견이 없는 자들도 부담없이 알아들을수 있도록 쉽게할 필요는 있다. 쉽게 한다고 해서 수준이 떨어지거나 복음의 원래 기능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은 아무리 쉬운 말로 써도 허락된 자들만 알아듣게 되어있는 것이다. 이렇게 어렵게 전개하는 것은 여러 의도가 있겠지만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어렵게 할수록 매력을 느끼는 회중을 의식하거나 다른 신학적 도전자들을 의식함도 있는 것 같다. 어렵게 쓸수록 대항할 사람이 그만큼 적기 때문일 것이라는 판단도 있을수 있다.
끝으로 십자가 마을 형제들께 전하고 싶은 말은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한다.(행17:11)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말씀을 받는데 그냥 덮어놓고 받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상고 하였다는 것이다. 날마다 상고 하였다라는 것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맞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 성경을 통해 검증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성경을 통해 검증하는 자세는 덮어놓고 믿는자들이 주의해야 할 대목인 것이다. 따라서 말씀을 전하는 자나 받는 자가 성경을 중심에 놓고 과연 그러하다면 그 말씀에 따라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버려야할 분별력을 갖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