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아

이근호목사 비판 090923 심재성

아빠와 함께 2018. 1. 16. 10:38
2009-09-23 11:18:05조회 : 5256         
이근호 목사의 책, 강의, 설교등에 대한 비평이름 : 심재성 (IP:119.71.214.25)


이근호 목사의 책, 강의, 설교등에 대한 비평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이때에 성경적인 진리가 무엇인지 참 분별하기 쉽지 않다. 각 신학자들이나 목사, 개인마다 다른 시각에서 전개해 나가기 때문에 헛갈릴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시대가 안고 있는 신학적 한계이자 풀지 못할 숙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는 성경을 통해 택한 백성에게 진리의 말씀을 깨닫도록 인도해 가심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이근호 목사 개인 에대한 공 이나 과실을 논지 삼은 것이 아니라 여러 관점중의 하나로서 이근호목사의 신학사상이 뿜어져 나오는 책, 강의, 설교등에 대한 비평을 통해 다른 각도에서의 조명이 필요하다고 여겼기에 졸 필 이나마 적고자 한다.

이근호 목사의 신학의 최대의 강점은 오직 ‘예수십자가의 피’ 외에는 역사세계든 묵시세계든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신학이라고 할 수있다. 특히, 기존신학에서 놓쳐버린 삼위일체론(신론), 예정론, 교회론 등 신학 전반에 걸쳐 본질 즉,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에서 벗어난 난점을 지적하거나 비판 한 점은 획기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삼위일체론, 예정론, 교회론 등에서의 그의 논지가 부정하는 쪽으로 전개 되기는 하였으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 근거를 인간의 관념에서 시작해서 관념으로 전개되는 기존신학을 거부하고 오직 역사에서 시작하여 묵시로 끌어가는 점이 성경적인 원리와도 통일점을 보이는 것은 때로는 매우 신선한 충격으로써 획기적이고 감탄을 자아 나오게 한다.


특히 타락한 인간에 대하여는 인간이 상상하는 것 훨씬 그 이상의 부패를 강조하는데 심지어 하나님께 충성하고자 하는 자아에 대해서도 부패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그것 마저도 죄라는 지적은 선한 일을 하고 있는 자아 마저도 ‘예수그리스도의 피’ 앞에 부정되어야 할 존재임을 지적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부패한 윤리관을 되짚어 보는 의미있는 지적이라 할 수 있다. 

강점에 대하여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인정되어 왔고 필자도 다른 글에서 종종 언급을 했기에 문제점에 대해서 더 비중을 두어 언급하도록 하겠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만을 주장하려는 마음이 너무 앞서다 보니 그 부작용으로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 도 엿보인다.

첫째 : 성경본문의 의도가 도외시 된다는 점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 이 말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어떠한 신학 사상도 원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의 인도하심보다는 못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 하기위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는데 성경의 전체의 흐름과 역사적 배경과 문맥을 고려해야만 그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전달하고자 하는 뜻을 올바로 이해 할수 있는 것 인데 원 저자이신 성령의 인도하심 보다는 자신의 신학사상을 지나치게 대입시켜 끌고 간다는 점이 있다. 정작 성경본문이 주는 의미보다는 전달자의 외침이 더 크게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 행함 측면이 무시되거나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에 대한 복음을 올바로 받아들였는가에 대한 검증은 구약에서는 율법으로 신약에서는 성경에 담겨있는 명령문 등에서 기록되어 있는 말씀으로 검증되어져야한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씀을 올바로 이해한 사람은 그 믿음에 상응하는 행위가 동반되는 것이다. 그런데 믿노라 하면서 행함이 뒤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 믿음이라고 할수 없다는 야고보서의 지적은 올바른 믿음인가 아닌가의 검증은 행함으로 가능하다는 점도 포함해서 일러 두고 있다. 물론 행함 자체로 믿음이라 할 수는 없다.  그것을 궁극적으로 판단하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십자가의 피로 거듭난자가 그 은혜에 감격한 어떤 행동이 자연스레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행함이라는 것인데 그 행함으로 믿음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검증하는 기능이 신약성경의 명령문에 고스란히 담겨있데 십자가의 복음을 강조한 나머지 이러한 성령 안에서의 행함 부분이 취약하다는 점이 다분히 있다. 복음 안에서의 자유가 내 마음대로의 자유로써 성도에게도 건덕이 아니라 상처를 주는 흉기로 돌변 할 수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하는 것이다. 

셋째 : 모든 신학, 신학자등을 성경적 비평 보다는 비판만 가한다는 점이다


2000년 교회사를 통해 볼 때 수 많은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이 거쳐갔다. 그들의 신학은 시대를 반영하기 때문에 그 시대에는 성경적으로 부합하거나 그렇지 않은 것도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다시 재 조명해 볼 필요는 있다. 하지만 그들의 성과나 오류가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복음이 전수되는 기여는 분명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신학이 성과가 있거나 오류가 있다고 해서 그들이 구원 받았는가라는 평가는 우리 인간의 소관이 아니기에 아무도 알수는 없다. 가령 신학적 주장이 성경적인 내용을 담고있다고 해도 구원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통해 복음을 복음되게하는 수단으로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것 만큼은 인정되어야 하고 그에 따른 비평은 있어야 하지만 모든 신학자들의 신학을 통째로 비판을 가하게 되면 무의식중에 자신의 신학이 최고라는 공식을 만들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가 죄인이기에 비판보다는 성경적 비평에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한다. 

넷째 : 자신의 신학적 실수나 과오 등은 전혀 엿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비록 성령으로 거듭난자에 의해 신학이 전개 된다 할찌라도 그도 본질적으로는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얼마든지 오류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근호 목사의 저서나 설교 강의등에서 거의 찿아 보기 힘들 정도로 자신의 과오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은 매우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오류가운데서 책을 출판하거나 설교를 하거나 강의를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시간이 지난 후 그것을 보거나 타인의 충고에 의해서 얼마든지 자신의 오류도 언급되어 져야하는 것은 죄인된 본성을 가진자로서의 당연한 자세여야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러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점은 동일한 잣대로 보지 않는 시각에 있는 것으로 본다.

다섯째: 지나칠 정도로 어렵게 전개한다는 점이다.


설교는 다소 쉽게 전개하는 편이다. 그러나 책이나 강의는 철학이나 기타 여러 학문을 동원하여 매우 어렵게 전개한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이나 학문을 사용하는 자체에 대하여 문제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지식적 식견이 없는 자들도 부담없이 알아들을수 있도록 쉽게할 필요는 있다. 쉽게 한다고 해서 수준이 떨어지거나 복음의 원래 기능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은 아무리 쉬운 말로 써도 허락된 자들만 알아듣게 되어있는 것이다. 이렇게 어렵게 전개하는 것은 여러 의도가 있겠지만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어렵게 할수록 매력을 느끼는 회중을 의식하거나 다른 신학적 도전자들을 의식함도 있는 것 같다. 어렵게 쓸수록 대항할 사람이 그만큼 적기 때문일 것이라는 판단도 있을수 있다.

끝으로 십자가 마을 형제들께 전하고 싶은 말은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한다.(행17:11)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말씀을 받는데 그냥 덮어놓고 받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상고 하였다는 것이다. 날마다 상고 하였다라는 것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맞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 성경을 통해 검증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성경을 통해 검증하는 자세는 덮어놓고 믿는자들이 주의해야 할 대목인 것이다. 따라서 말씀을 전하는 자나 받는 자가 성경을 중심에 놓고 과연 그러하다면 그 말씀에 따라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버려야할 분별력을 갖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인 것이다.

 이상규 (IP:121.♡.224.171)09-09-23 15:02 
안녕하세요, 심목사님. 
비평글 잘읽었습니다. 
이목사님 설교나 강의,책중에서, 
신학적으로,무슨문제가 있는지 
어느성경 본문이 도외시 돼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성령님의 일도) 
특히, 
어떤 행함이 의롭고, 또 예수님 죽인 죄하고 상관이 없는지, 
하나님께,영광이 되는지,하나만이라도 예를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번  논쟁되었던 주제지만,다시 서로 복음에 대해서 알아가는 기회가..... 
(전도사님, 인터넷에서 대해서 잘모르는데,전에 논쟁했던 자료들을 모아놓은 
공간이,있었으면 합니다.반복해서 설명하려니,에너지 (?)낭비하는,것같아서요.)
 이근호 (IP:117.♡.141.96)09-09-23 15:11 
1. “인간은 신이 아니다. 이근호는 신이 아니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오류가 있다”는 이 논리에는 두 가지 측면에서 오류가 끼어 있습니다. 
  
첫째는 논리적 측면에서 오류가 끼어 있습니다. 
 만약에 제가 주장한다거나 남들이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를 “이근호는 신이다. 신은 오류가 없다. 따라서 이근호는 오류가 있다”고 했다면 심목사님의 지적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일 
“이근호는 신이 아니다. 따라서 오류를 따질 수 애초부터 대상조차도 못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다 이루신’ 십자가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게 된 것만 감사할 뿐이다”고 했다면, 저의 신학적 논리의 잘못된 오류에 대해서는 지적할 수 있어도 이런 감사함에는 오류를 지적할 수가 없는 겁니다. 즉 “당신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마!”라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두 번째 측면에서의 오류는 

성도라면 관심사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근호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을 증거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서는 아니됩니다. 그것은 성도로서의  관심사가 될 수 없습니다. 단 이근호가 증거하는 복음이 성경적으로 부합되는지 여부를 살필 수는 있기에 “이러이러해서 성경적 복음은 실은 이런 내용이어야 옳습니다”고 의견을 제시 했어야 했습니다. 제가 칼 바르트나 지젝의 저서 [죽은 신을 위하여]를 비평할 때도 바로 성경적인 견해를 가지고 의견을 제시한 겁니다. 

2. 교회사 신학에 긍정적인 요소가 있다고 하신 주장에 대해서 
 역사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늘 재편집한 겁니다. 예를 들면, 안중근 씨가 하얼빈 역에서 일본의 총리를 살해하는 사건을 비디오로 그대로 찍어도 우리는 결코 그 총 쏘는 순간의 안중근씨의 마음가짐을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비디오를 보는 우리의 심정이 그 광경을 일방적으로 재해석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 재해석하는데 동원되는 힘이란 바로 지금 그것을 보는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 의로워질려는 의욕, 자기 생존의 정당성, 발언의 가치, 대외적인 인지도 발산 욕망 같은 것들이 작용해서 지나간 역사를 재해석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체라는 몸이 있는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보시기에, 교회사 그 어느 구석에서도 십자가 피를 안 믿어도 될 정도로 의인은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죄인이 만들어낸 신학을 가지고 오늘날 우리가 검토하면서, 어떤 논리가 바로 예수님을 죽게 만든 죄인들의 자기 주장들인가 찾아내는 것이 곧 현재 우리들의 죄들을 다시금 파악하는 과정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는 인간들의 ‘떠 밀어낸 악마적 힘’이 담겨있는 사건이기 때문이요 성령께서 그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세상에 대해서 책망하시면서 작렬하시기 때문입니다.(요 16:7-11)  늘 자기를 미워해야 하는 인간이 무슨 긍정적인 것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부정이 나온다고 해서 긍정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죄 지음에 대해서 피 흘려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3. ‘행함’ 주장에 대해서는, 어느 분의 저의 ‘성화론 비판’글에 대한 반박글로 대신하겠습니다. 

(1) 이 분은 '인간'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인간은 없습니다. '죄인'만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권면이 '죄인'의 '죄'와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주어졌는지를 알아야만 했습니다. 
(2) 예수님을 믿는 죄인이 성경에서 '의인'이라고 하는데 이 '의인' 안에 사도 바울의 권면과 명령이 어떤 역할을 해서 이들을 '행함'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공로'를 믿는 것만이 '의'가 되는 지를 설명했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3)이 분은 성령의 행하심과 '죄인'으로서 인간의 행함이 같은 성경 말씀을 놓고서는 어떻게 충돌되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이 분은 성령없는 성도를 염두에 두고 성화론을 전개합니다. 
(4) 이 분은 '성화'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구약 성경부터 근거한 하나님의 거룩의 개념과 연관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들의 윤리와 도덕적인 행위를 '거룩'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이 분이 왜 이런 주장을 할 수 밖에 없는가 하며는 성령을 받지 못해서 '복음의 광채=거룩의 광채'를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후 4:4) 
(5). 이 분은 성화됨을 판정할 기준을 인간의 행함의 결과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에서는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됨' 존재 자체가 새언약의 효과로 뿜어져나온건만 이 분은 그것이 보이지 않기에  성도됨을 그야말로 '거룩된 사람이 이미 되었음'의 차원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따로 윤리적인 성과물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보고서 믿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불신앙이지요. 
(6) 왜 보고서 믿겠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가지고 대외적으로 남들에게 속여가면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자신을 검토하는 순간, 선악과적인 인식이 발동하여 선한 것을 즉석에서 제조해내고서는 그것을 '자아'를 대변해줄 의로움으로 구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의식의 시간은 길지 않아서 몇 초가 지나 기억의 힘이 느슨해지면 조금전에 구성해놓은 자기 의의 긴장도 풀려서 동물적 욕망대로 평소대로 편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타인이 의식되면 다시 선악체제를 가동시켜 자기 의로움 방비에 나서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평생토록 남을 속여가면서 살아갑니다. 성령받은 사람만이 십자가 피 앞에서 이런 습관이 죄인 것을 알지요 
(7). 이 분은, 성령받은 사람은 오직 예수님의 하신 일을 증거하는 사랑의 그릇인 것을 모르고서, 자신의 의를 증거하면서 평생을 살 사람입니다. 즉 "나는 말씀대로 살려고 최선을 다하는 성도 맞다"는 사실을 증거하면서 평생을 살 사람입니다. 곧 '진노이 그릇'입니다. 

4. 성경 본문과 어긋난다는 점에 대해서 

구약을 볼 때는 신약의 사도들이 구약 본문을 어떤 식으로 해석했느냐를 통해서 봐야 하고, 신약을 볼 때는, “다 이루었다”는 그 십자가 복음이 사도 바울이나 사도 베드로나 사도 요한에게 있어 어떤 기본 인식과 해석 전제에 변화를 낳게 했느냐를 살펴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같은 문맥과 문자라도 전에는 이러이러하게 해석했으면 올바르게 전체 문맥에 맞다고 생각했는데, 십자가 복음 중심으로 다시 보니 전의 해석과는 완전히 다르게 이러이러하게 해석을 해야 십자가 복음(새언약)의 의의가 나옵니다”는 식으로 해석 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사도의 견해와 같게 됩니다.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5. ‘자신의 신학적 실수나 과오 등은 전혀 엿 볼 수 없다는 점이다.’의 주장에 대해서는 그렇게 보시는 심목사의 관찰 측면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예를 들면, 시장바닥에서 물건을 사면서, “아주머니 이 콩나물 얼마에요?” 물으니 장사하는 아주머니께서 그냥 무심코 하시는 말씀이 “1000원입니다”라고 하자, 손님이 말하기를 “아주머니께서는 이 1000원이라는 자기 주장에 과오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까?”고 따지니까 

아주머니가 하는 말이 “그러면 ‘100원의 열 배입니다’고 말씀해드릴까요?”라고 답변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인간이 자기 딴에 아무리 겸양과 겸비와 겸손의 용어들을 동원해서 떡칠을 하고 들이붓듯이 부어도 자기 주장을 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리고 남들도 그런 주장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이용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늘 상 자기 증거할 게 따로 있게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예수님 믿어서 다 빼앗긴 인생이 된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야 이런 일은 없겠지요.  

6. ‘어렵다’는 생각되는 것은, 
 (1) 기존에 성경보는 관점과 다른 관점으로 성경을 보기에 그 관점에다 자리를 옮기는 작업부터 먼저 준비되어야 하기에 어려운 겁니다. 즉 “성경을 이렇게 보시면 이 본문에서 이 해석이 도출되는 이 결론은 성경의 어느 구절과 정면 충돌되기 때문에 관점 자체를 이렇게 바꾸셔야 합니다”라는 식의 설명까지 늘 추가적으로 제공되기 때문에 복잡하고 어려운 것입니다. 

특히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라는 구절을 기초로 해서 볼 때, 자신이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적이 없다는 식으로 성경을 한다든지, 정작 그리스도 안에서만 살았다면 필히 ‘그리스도만이 산 상태에서 나와야 될 성경 해석’ 안 나오고 인간이 산 상태임을 인정하는 해석이 나오면 영락없이 잘못된 해석일 것입니다. 

 (2) ‘어렵다’는 말이 실은 ‘못 믿겠다’는 다른 표현일 수가 있습니다. 
(3) 저의 설교나 강해를 듣는 모든 사람들이 각양 각층이라는 점을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저의 강해가 쉽다는 사람이 일반 교인들 가운데서도 의외로 맞습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을 어렵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름대로 조절해서 강의합니다.  


7. 이 사이트를 찾아오시는 모든 분들에게 싶은 점 

이 사이트에는 사람보다 어느 신학자보다, 예수님께서 각자 자신들에게 행하신 바를 글로 남겨서, 예수님께서 각자 인생에 살아있음을 증거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처음 방문하신 분들도 어떤 재미나는 게임을 즐기기 보다는, 예수님의 엄연히 살아계심을 공감할 수 있는 사이트가 되었으면 합니다.
 관리자 (IP:220.♡.176.169)09-09-23 16:45 
지금 보시는 화면 왼쪽에 좌편 메뉴가 있습니다. 자유게시판, 질문과답변, 등등 쭈욱 내려오면 사진첩 밑에 [이전 게시판]과 [이전 질문 답변] 란에 보시면 지난 논쟁들이 수두룩 나와 있습니다. 참고하시면 됩니다. 

정 무슨 소리인지 모르시면 아래 주소 클릭 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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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rossvillage.org/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before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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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마을 행함 문제 바로 나오네요
 조현창 (IP:222.♡.62.231)09-09-23 17:17 
저의 경험으로는... 평신도(?)로 살아오면서 이근호 목사님보다 더 친절한 목사님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설교, 강의를 들어보거나 녹취록을 보면 쉽게 아주 쉽게 하려고 용을 쓰는(?) 모습이 훤히 보입니다. 

저서들(책)은 다소 어렵게 보이기도 하는데 천천히 10번 정도 읽으면 사실 어려울 것도 없더군요. 

덤으로 저 같은 경우에는 인문학에 대해서 일자무식이었다가 이근호 목사님 덕분에 눈을 좀 뜨게 되었습니다. 

철학 이야기를 많이 하시던데... 목사님들이야말로 철학공부는 필수과목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복음 전한다면서 철학을 전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정말 친절한 목사님입니다 ^^ 

이상 저의 개인적인 느낌을 적어 보았습니다.
 강구만 (IP:118.♡.241.216)09-09-23 17:39 
심 목사님, 성도란 '그리스도의 것'임을 아는 사람이지요. 자기 인생의 主語가 나에서 예수님으로 바뀐 사람을 두고 그리스도인 이라고 합니다. 이는  내가 원치않은 죽음,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고 모든 주도권이( 선택, 생명, 의, 거룩, 행함, 죽음,모든것) 그분에게 있음을 평생동안 확인 시켜나가는 대상으로서 성도의 삶이 있다는 말 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사는 인생 입니까 주님이 사는 인생 입니까? 자유란 그분에게 다 빼앗김을 자유라고 합니다.(있음에서 없음)) 죽을때까지 죄밖에 나올것 없는 죄인이 낯선 은혜로, 한 제물로 말미암아 영원히 온전케되었으면(히10:14) 온전케 하신분을 평생 증거하고, 그분의 제물되신 죄없는 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지 '나'에게 자꾸 더덕더덕 같다 붙일것, 혹은 나의 있음에 눈 돌린다면 과연 내가 예수안에서 세상(사람)에 대하여 죽은자인지, 하나님의 진짜 죄와 생명을 맛본자인지 성령께서 책망해주시길 빌어야 할 것입니다. 이곳의 어느 누구도 이근호 목사에게 관심 없습니다. 그분이 가리키는 한분만 바라볼 뿐 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입니다(고전2:2)  이근호 목사를 바로 보지말고 위를 거쳐 주님의 안목으로 보게되면 주님 자신을 위해 고난으로 몰아가시는(주체없음) 사랑이 보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을 대상으로 보는한 십자가는 저주일 뿐 입니다.
 이종호 (IP:124.♡.75.164)09-09-23 18:03 
All's fair in love and war. 

조현창님의 댓글에 아멘입니다. 

어려운 책도 러브레터 읽는 맘으로 10번정도 읽으면 이해가 됩니다. 

문제는 심목사님을 적군으로 인식할때는 극심한 반항들이 나타나지요. 

하기사 심목사님도 이목사님을 적군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나타나더군요. 

모쪼록 서로가 복음안에서 바울과 바나바처럼 선한싸움(?)을 하시기를~~~
 강구만 (IP:118.♡.241.216)09-09-23 18:16 
이목사님 크게 오해 하셨네요 사람을 두고 아군 적군하는 선한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닌 다른 복음, 다른영과의 싸움 입니다. 양도, 질도,차이도 깊이도 아닌 생명의 있고 없음이고 '피'냐 아니면 '아닌 모든것' 이냐의 논쟁 입니다.사람은 빠져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항상 가짜이기 때문 입니다.
 이상규 (IP:121.♡.224.171)09-09-23 18:49 
찾았습니다.전도사님! 
많이 참고 하겠습니다. 
대단히,감사합니다.^^
 이미아 (IP:119.♡.119.36)09-09-23 19:17 
십자가가 무엇인지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될텐데...
 이미아 (IP:119.♡.119.36)09-09-23 19:19 
왜???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안되는가??? 라고 하면 될텐데...
 이미아 (IP:119.♡.119.36)09-09-23 19:22 
도저히 예수님 믿고서는 못살겠다고 하면 될텐데...
 이미아 (IP:119.♡.119.36)09-09-23 19:27 
십자가가 눈 앞에 밝히 보이는데 누가 나를 꾀고 있다고 하면 될텐데...
 이미아 (IP:119.♡.119.36)09-09-23 19:39 
왜??? 
왜??? 
왜??? 
왜??? 할 수 없는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구득영 (IP:203.♡.97.161)09-09-23 22:06 
심 목사님의 글을 읽고 나니 조금 전의 기쁨이(?) 그만 다 사라지는군요. 10년 정도, 아니 1년 정도라도 더 있다가 이런 글을 썼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이런 부분은 이근호 목사님이 스스로 본인에게는 질문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러나 이건 아니다 싶네요. 과연 피 맛을 본 자들에게 이런 권면이(?) 통할까요? 피는 말 그대로 피 입니다. 피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참, 그런데 9시 55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이러다가 대구 쪽과 사이가 틀어질까 겁납니다.ㅋㅋ
 서정진 (IP:123.♡.106.126)09-09-24 02:03 
심목사님의 글을 읽으면 지식적으로 파고드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수능 언어 공부하듯 , 언어 독해 공부하는 듯한... 
심목사님의 표현들 중 '이 목사의 신학은 참으로 획기적이고 감탄을 자아 낸다'라는 지문을 보아 제가 느낀 것은 십자가 피의 능력을 통해 터져 나오는 고백들을 지식으로 받아 드리신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의도는 십자가만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본문을 보면 볼 수록 죄만 나와서 지킬래야 지킬 수 없고 적용 할래야 할 수 없어서 십자가 피 말고는 할 말이 없는 것이 성령의 친히 인도 하심의 증거라 생각하고 확신 합니다. 십자가 앞에 감히 누가 성경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십자가에 주와 함께 못 막힌 성도가 감히 머리되신 주님 안에서 행위를 말 할수 있겠습니까? 
교회된 자라면 행함은 주님의 행함으로 보게 되는 것이 합당하고 그것이 머리 밑의 지체요 포도나무의 가지라 생각 합니다. 은혜 받은자 당연히 행함이 나오지요 하지만 그것 또한 의로 여기지 못할 뿐더러 행함 취급에 끼지도 못합니다. 성도는 주 안에 있을 때 오직 성도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못박힌자 할말 없습니다.있다면. 오직 십자가 뿐... 
2000년 기독교 역사의 신학자의 행적을 생각 하기 이전에 2000년 동안 주님께서 보이지 않는 친히 만드신 -오직 십자가 피만 말하는-성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해 보셨습니까? 우리가 성령의 도움으로 말씀을 깨닫지 2000년 역사의 신학자를 통해 복음을 알고 성경을 알게 되었습니까? 생각 해보십시요. 천국에 갔더니 루터의 신학을 기대 하겠습니까?칼빈의 이론을 기대하겠습니까?그들의 입에서 무엇이 나오길 기대 하겠습니까? 우리는 천국에 갔더니 세상 종교지도자들의 멋드러진 언변과 은혜롭다는 설교보다 더럽고 찜찜하고 무식해 보이더라도 어린아이와 같이 '십자가 피만'고집하는 성도의 고백의 기대합니다. 천국에는 장로교 사람도 없고 천주교 사람도 없고 이스라엘 사람도 없고 침례교단도 없고 오직 하늘나라 백성만 있습니다. 
2000년 역사를 지닌 신학일지라도 십자가 앞에서 조금의 의라도 주장 한다면 당장에 입을 다물어야죠.하모요.하모하모...2000년이 아니라 1만년이라도 입을 다물어야죠. 하모요 하모하모. 
성경을 볼 때 언약의 중심이 잡혀 있다면 그 전개는 동일시 됩니다.다만 중심은 같아도 해석의 언어적 편차 등 인간 언어의 한계성을 다 띄기 마련이겠죠..허나 십자가 앞에 죄가 드러나면 눈을 들어 놋뱀을 보듯 십자가로 인한 해석이 나온다면 부족한 부분이 나온다 할찌라도 그것이 바르다 생각됩니다. 인간에게서 무엇을 기대 하겠습니까?단지 일편으로 십자가만 나오면 기적이죠. 그리고 복음을 알게 된 성도는 이근호 목사의 단점을 알아도 그의 설교를 듣습니다. 언어가 투박하고 없어 보이고 막가는거 같아도 달콤하게만 들립니다. 성도는 단지 주님이 세우신 이근호 목사를 이용해 주님께 더 나아가고자 하는 자들이기에 죄인 이근호 목사님의 연약한 부분 조차도 은혜로 받아 드리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성도들이 말씀을 상고하는 것은 '하는 것'이 아니라 상고'하게된 것'이라 생각되어 집니다. 말씀을 생각케 하시는 주님. 말씀으로 인도케 하시는 주님.말씀 깨닫게 하시는 주님.그것이 친히 성령의 인도로 복음을 깨닫게된 성도의 모습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말씀을 피는 것 조차도 은혜로 알게 된 자들입니다.
 서정진 (IP:123.♡.106.126)09-09-24 02:03 
심재성 목사님 많은 글 부탁 드립니다. 무슨 글을 쓰셔도 주님은 친히 일하시니 부담 마시고 마음것 표현하시고 성도와의 교제가 있기를 원합니다.
 이종호 (IP:124.♡.36.240)09-09-24 09:09 
무슨 드랴큐라 영화보는듯 하네요. 

십자가마을은 팬클럽인가요? 오빠부대가 이렇게 많아서 좋겠습니다. 
참고로 나는 바르트의 오빠부대입니다...
 강구만 (IP:118.♡.241.216)09-09-24 11:11 
사람은 십자가의 영이 오시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고 죄도 모르고 왜 구원의 능력이 '피'에 있는지도 알수가 없습니다.(지식이 아닌 영을 말합니다) 성도의자리 는 십자가앞 이라는 말 입니다. 그곳엔 팬클럽도 보이지 않고 바르트도 없고 피흘리시는 주님만 보입니다. 이미 온 세상이 십자가로 가두어졌고 심판이고 끝입니다. 나의 가능성을 펼칠만한 세상이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지 않으면 세상을 보는 눈도 바뀌지 않습니다. 세상이 죽은세상으로 보이는자 만 산 성도 입니다. 영화는 볼수나 있지만 거울의 안과 밖 같은 현실은 그냥 안타깝네요..
 심재성 (IP:119.♡.214.25)09-09-24 11:18 
무섭습니다. 십자가 마을에 동의(?)하는 글은 칭찬 일변도 인데 다른견해는 벌떼 처럼달려 드는군요. 살살 했으면 좋겠습니다. 담에는 글올릴 자신이 없습니다.(그래도 필요성을 느끼면 올리겠지만)
 강구만 (IP:118.♡.241.216)09-09-24 11:51 
벌떼같은 사랑 입니다. 사랑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강구만 (IP:118.♡.241.216)09-09-24 12:45 
예수안에 있으면 "너 개잖아!"라는 지적도 사랑으로 들립니다. 어느 이방여인 처럼..
 이종호 (IP:124.♡.37.109)09-09-24 17:44 
강선배님 너무 안타깝게 생각마세요. 
변화산에서 많은 은혜를 받았답니다. 

심목사님 왠 엄살입니까? 
아직 제대로 된 벌떼는 날지도 않았답니다. 
계속해서 글을 올려야 이목사님의 삼단논법도 배우고, 십자가마을의 실체도 좀 더 알게됩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점점 재미있어지는데 좀 더 가 봅시다. 
마산찜먹으면서 강연하던 호기를 다시한번 보여주시기를~~~

 이미아 (IP:119.♡.119.36)09-09-24 17:57 
이종호 목사님...오늘도 시간이 많으신가 봅니다.."아 심심해!!!" 
정말 낭만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