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아

대구강의를 듣고서 150812 오용익

아빠와 함께 2018. 1. 16. 10:18
2015-08-12 19:22:55조회 : 995         
대구강의(20150810 동질성)를 듣고서.이름 : 오용익 (IP:121.178.235.193)

2015-08-10일자(월)의 대구강의(동질성)를 듣고서.



계시록(*) 17장에서 음녀(큰 성 바벨론)란 하나밖에 없는 이 현실세계, 그 세계 안에 갇힌 모두를 규정하는 하나님관점에서의 통째로 규정되고 구체화된 악이다. 성경에서의 구원설명에 음녀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할 이유는 이미 구원된 성도에게는 누구나 예외 없이 그 하나님관점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음녀의 특징은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입니다. 이방 계집입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예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위상을 모르는 유혹과 힘의 세상을 가지고 음녀라고 합니다.”(잠언속의 그리스도 121쪽) 근원적 악의 실상이란 ‘동질성유지’다. 동질성에 머무르고자 하는 힘의 세상 전체를 뜻한다. 그 힘의 매질, 혹은 그물망에 잠긴 상태의 인간한계를 잘 표현해준 노래, 윤도현의 ‘사랑했나봐.’



“이별은 만남보다 참 쉬운건가봐


차갑기만 한 사람


내 맘 다 가져간 걸 왜 알지못하나


보고싶은 그 사람“



이별이 쉽고 자연스럽고 만남이, 사랑이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럽지 않다면 세상이 그렇게 사랑을 예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깨 춤 추고 호들갑 떨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특히 신과의 만남을 주선한다는 신부나 목사, 승려들의 거룩한 사랑의 눈짓, 이건 정말 주의를 요한다.



“사랑했나봐 잊을 수 없나봐


자꾸 생각나 견딜 수가 없어


후회 하나봐 널 기다리나봐


또 나도 몰래 가슴 설레어와


저기 널 닮은 뒷 모습에


기억은 계절 따라 흩어져 가겠지


차갑기만 한 사람


빈 가슴 애태우며 난 기다리겠지


어설픈 내 사랑은”



‘복음안의 세상구조에서 악이란 자기 밖에서 자기를 관찰하는 시선’이다. 왜 그게 그렇게 되나? 이 관찰을 통해서 꾀하는 것이 자기 동질성의 유지이기 때문이다. 다루어지기만 해야 하는 대상이 따로 자기 영역을 상상으로 구축해내게 되면 필연 다루시는 주체, 하나님의 보편적 평가에 대한 무시요 공격이 된다. 동질성을 유지하고자(그대로 머물고자, 스스로 구원받고자) 안간힘을 쓰는 세상과 이 세상을 떠나라고 떼 내는 식으로 세상 힘 한 복판에 언약을 앞장세워 개입하는 싸움구조, 싸움의 장, 이것이 세상이다. 당연히 세상은 세상만으로 파악될 수 없다. 잊을 수 없고, 견딜 수 없고, 기다리고, 설레고,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달래고, 원망도 하고, 다짐하고, 노래해도 내 사랑아, 참 어설프다.



이 시도가 악의 변명, 악의 위장이기에. 이 악의 변명, 악의 위장은 악을 악으로 발췌하는 복음을 대적하고 훼방하기에 역겹고 흉악하다. 이게 복음 장사하는 교회다. 이들에게는 이렇게 안부를 물어야 한다. “요새 십자가복음 좀 팔리나?”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근황을 들려줄 것이다. “옛날 같지는 않아. 사람들이 많이 영악해졌어. 신학은 더 이상 목사들만의 전문영역도 아니야. 하지만 무너질 수 없는 마지노선이 있잖아. 성찬식과 세례식과 축도에 부여된 목사(신부)의 전권. 물론 신부는 이 차별화된 신성한 권능을 더 영악스럽게(유니폼과 독신) 유지하고 있지. 신성한 권능이 목사의 안수하는 손, 설교하고 기도하고 축복하는 입, 성화된 삶, 구약의 레위 인이나 나실 인 같이 차별화된 신체를 통해서 하늘창고의 복, 천국과 성화와 재물과 장수와 평안과 가정화목 등등이 흘러나온다는 이 신심루트가 막히지 않는 한, 이 건재한 교역로를 따라서 복음 팔이, 영생 팔이, 십자가장사도 건재하다고 봐야겠지. 장터(교회)도 물론이고. 어설프다고 해서 노래가 멈추지는 않아.”



“못되게 눈 돌리며 외면한


니 모습 모른 척 할래


한번쯤은 날 뒤돌아보며


아파했다 믿을래.”



무슨 다른 수가 더 있을까? 하지만 그래봤자 탈출은 요원하다. 탈출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주님에 국한된 숙제고 그 숙제물의 결과물로서 탈출된 인간에게서 남아야 하는 것은 전혀 인간의 자기 동질성유지가 아니다. 아예 그 세계로부터 단절된 무엇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의 탈출 작업자체가 이 동질성을 깨뜨리고 뜯어내는 작업을 그 절차나 과정으로 포함시켜놓고 있으니까. 과정을 말할 수 있으려면 과정 전체를 ‘소급’할 수 있는, 모든 절차의 끝자리에서 ‘차후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완성, 완결의 지점으로 가야하고 그 끝의 지점에서조차 그래도 남는 것, 그걸 건져 올려야 한다. “주님이 나를 건드렸다.”



복음전함의 당위는 이처럼 ‘하나님의 자기파괴, 자기파멸현상(마 27:46), 자기 안을 파내서 지옥, 저주의 영역을 만드시는 그 주님의 건드림(개입)’ 뿐이다. 돈 많이 벌어들여서 웃다가 이번에는 돈을 많이 내놓으면서 웃는 삭개오의 웃음. 삭개오의 인생을 주님이 건드리자 비로소 생겨난 낯선 문양, 그 웃음에 숨겨놓은 주님의 자기존재증명의 속성을 읽어내는 단서가 달리 이 세상에는 없다. 그래서 십자가 안의 구원에, 믿음에, 교회에, 이유(자기존재를 따로 증명해야 할, 혹은 자기 동질성을 유지해야 할 ‘자아’자체마저) 없다 하지 않던가? (“죄인 되게 하시는 주님의 성실함으로 인하여 우리의 행함은 몰수당해 더 이상 커버할 자아마저 십자가로 도려냄을 당했습니다. 그 '구멍 난 가슴'에 성령의 바람만 불기를…….”) 이 주님의 자기존재증명이 고전 9장에서 사도바울이 고백했듯이 ‘부득불, 죽을찌언정’ 이라는 극단적용어가 품고 있는 뜻이다.



음녀가 언제나 정치적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정의를 위하여 분연히 나선 패거리들, 가상 적을 설정하고 그 가상의 적을 박멸하기 위함이라고 내세운 기치, 혹은 정의라는 이름은 어디에든, 어느 패거리에든 속해서 자기존재의 공허를 잠시 잊어보려 하거나 혹은 이렇게라도 살아 있음의 이유를 억지로라도 가지지 않고서야 견딜 수 없는, 그 견딜 수 없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정치적 충동(음녀는 정치적이다)을 감안한다면 이미 존재는 존재 자체로만도 폐해다. 참된 교회가 공동체 없는 공동체이어야만 하는 이유고. 그러니 교회공동체가 어떻게 음녀가 아닐까?




“바보인가봐 한마디 못하는


잘 지내냐는 그 쉬운 인사도


행복한가봐 여전한 미소는


자꾸만 날 작아지게 만들어


멀어지는 니 모습처럼


언젠가 다른 사람 만나게 되겠지


널 닮은 미소 짓는


하지만 그 사람은 니가 아니라서


왠지 슬플 것 같아


잊을 수 없는 사람”



세상에, ‘바람났기에 내 아내’(롬 9:25)라고 자기 아내의 존재증명을 하는 이런 남자는 해석하겠다는 그 자체가 오류다. 그만 그 건방진 남자(해석의 주체 또는 자기존재증명, 자기 동질성유지) 행세를 포기하고 바람난 여자의 자리에서 그 낯선 남자가 명명하는, 그 남자가 자기존재증명을 위하여 이름붙이는 그 이름에 형해 할 수 없도록(마 9:13, 롬 14:8)녹아 붙어야 한다.



왜 우리는 밤에도 쉬 잠 못 들어 하는가? 뭐가 그렇게 슬프고 뭐가 그렇게도 잊을 수 없더냐? 이 짜증나는 역겨운 영혼아! 선지자의 아내는 바람났기에 선지자의 아내란다. 다시 말해주랴?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단다. 선지자의 아내의 자리, 죄인이라고 통보받는 자리, 이미 건져졌기에 어디서 건져졌는지를 통보받는 그 긍휼의 품안에서 그만 사라져도 괜찮은 사람아, 이제 알았으면 그만 잠이나 좀 편히 주무시든가!



* 겨울수련회는 요한계시록이라고 한다.


 이미아 (IP:180.♡.90.76)15-08-12 22:29 
나를 벗어나 나를 관찰할 수 없음에도... 
주님을 벗어나 주님을 믿을 수 없음에도... 
갇혀있는 신세임에도... 
도대체 뭘 바라는지... 
주님 마저도 십자가에 가두임 당하지 않았던가. 

yyy목사님. 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오늘 잠시 들렀던 서점에서 읽었던 내용에서, 비가 오면 잊지 않고 전화해주는, "빨래 걷어라"는 엄마의 목소리처럼...그렇게 복음의 소리를 잊지 않고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죄인임을 자랑질 하라고 이 세상에 오도록 조치하시고 살게 하신 줄을, 성령의 바람이 불어댑니다. 
벌 받고 있는 이 세상에서 편안 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긍휼의 품 안에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