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아

수련회요약 170805 이미아

아빠와 함께 2018. 1. 16. 08:29
2017-08-05 02:16:08조회 : 572         
수련회 요약이름 : 이미아 (IP:122.43.181.188)

이번 가야산여름 수련회는 열왕기상을 하신다고 6개월 전 쯤에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시작된 멍 때리기, 멍 때리고 있을 때마다 벌써 아득하게 멀어진 옛 추억이 떠오르곤 했다. 멋모르고 선생이 되어서, 세상에서 선생이 되었다면 존경이라도 받고 돈이라도 잘 벌었을 텐데...멋모르고 선생이 된 그 선생은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근데 왜? 주께서는 열왕기상을 한다고 하시니 지난 과거를 떠오르게 하셔야만 하셨을까? 지은 죄 때문이다. 얼마나 혹독한 선생이었는지, 열왕들을 외우게 하고 시험도 보게 했다. 못 외운 아이들은 벌까지 주기도 했다.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고 매일같이 성경공부 하려고 와서는 공책에 달달 쓰고 외웠다. 체벌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휘두른 그 선생이라는 작자는 폭녀였다. 그때 유행했던 유행어 중에는 구구단을 외자! 구구단을 외자, 라는 것이 있었는데, 우린 그걸 패러디해서 열왕을 외자! 열왕을 외자, 라고 했다.  

 

사울-다윗-솔로몬-(남유다)①르호보암(17) ②아비얌(3) ③아사(41) ④여호사밧(25) ⑤여호람(8) ⑥아하시야(1) ⑦아달랴(6) ⑧요아스(40) ⑨아마샤(29) ⑩웃시야(52) ⑪요담(16) ⑫아하스(16) ⑬히스기야(29) ⑭므낫세(55) ⑮ 아몬(2) ⑯요시야(31) ⑰여호아하스(3개월) ⑱여호야김(11) ⑲여호야긴(3개월) ⑳시드기야(11)

 

(북이스라엘)①여로보암1세(22) ②나답(2) ③바아사(24) ④엘라(2) ⑤시므리(7일) ⑥디브니/⑦오므리(12) ⑧아합(22) ⑨아하시야(2) ⑩여호람(12) ⑪예후(28) ⑫여호아하스(17) ⑬요아스(16) ⑭여로보암2세(41) ⑮스가랴(6개월) ⑯살룸(1개월) ⑰므나헴(10) ⑱브가히야(2) ⑲베가(20) ⑳호세아(9)

 

열왕의 이름과 재위기간까지, 그리고 선한 왕과 악한 왕까지 외우게 했다. 이걸 죽자고 외웠던 25명의 아이들은 다 떠나고 남아 있지 않다.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그들이 먹고 사는 일에 무슨 보탬이 된다 말인가? 생존에 일말의 도움조차도 되지 않는 열왕들의 이름....., 이름들은 왜 그렇게도 비슷비슷한지...그 아이들에게 남겨진 것은 노처녀 선생이 부리는 히스테리에 휘둘린 기억밖엔 없으리라.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을 외우게 하고, 성경에 대해서 안다면 그들이 복 받는 인생을 살 것이라고 믿었다. 그때 내 믿음이 그러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호세아4장6절의 말씀 때문이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이스라엘이 왜 남북으로 갈라져야 하고, 남유다는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하고, 북이스라엘은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서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눈알이 빠지고, 바벨론 군사들의 군화발에 짓밟히는, 그런 하나님의 백성들을 실로 상상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고 이스라엘 백성의 왕이신 분이신데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망할 수밖에 없는가? 라는 이 아이러니는 백성된 자들의 행동, 산당에서 바알에게 분향하고 푸른 나무 밑에서 아세라를 섬기는 백성들의 우상숭배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에 망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렇다면 우리는 망하지 않기 위해서 알아야만 했고 행해야만 했다. 참으로 힘 있는 하나님을 원한 것이지 비참하고 초라한 예수는 원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있었고 예수는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 혼자 구원받고자 미쳐서 날뛰고 환장했던 짓거리들로 벼락 맞아 죽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우리의 과거는 이렇게 순수하지 않다. 리바이벌 되는 고백 속에 단독성만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우리의 과거는 누적되기 때문이다. 예수님만이 순수과거를 가지고 계신다. 창세전부터 동결된 과거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그 관계성에서 한 번도 떠나지 않은 사랑으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대신해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에서 승리하셨다. 아버지는 아들의 영광을 위해서, 아들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서로 일하신다. 우리는 그 안에 소속된 들러리다. 그 들러리로서 사랑받음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순수하지 못하게 하셨던 그 과거를, 이제 열왕기상 강의를 통해서 지우려 하신다.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왕이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열왕기상은 신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 있다. 이걸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가 봐도 안다.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구약은 지나간 것이라서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교인들이다. 구약은 지나간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안에서 고유한 시간과 공간이 새롭게 분출된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시간은 가 볼 때까지 가보자는 것이고, 십자가에서 고유하다는 시간은 이미 완성되었고 완료되었고 마감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마지막 때요, 종말이라고 히브리서에서 말씀하고 계시다.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는 공간은 피땀 흘려 개발한 문명과 관련되어 있고, 문명은 에너지와 관련되어 있다. 삶의 공간을 에너지를 활용해서, 에너지로 바꿔서 어쨌든 우리끼리 잘 살아 보자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고유하다는 공간은 이미 너희는 죽었고, 땅 자체가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에너지는 자자손손 번성하고 대대로 이어지는 전통을 고수하지만 하나님께서 환원하시는 에너지는 오로지 복음을 위해서다. 인간은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이라는 에너지를 이용해서 죽지 않으려 하고 복음은 죽어야 산다고 한다. 그래서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거부당하게 되어 있고 핍박받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땅에는 종교가 없는가? 종교가 있다. 복음 빼고, 나머지기 종교가 교회라는 사회단체를 만드는 것이다. 교회를 통해서 나는 천국 가겠다고 한다. 그 교회의 운영을 위해 돈이라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교회는 인간들이 설치는 것이지만 복음은 예수님이 활동하시는 것이다. 교회가 마지막 때 복음으로 완료가 되었기 때문에 완료의 완료됨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미완료가 들어가고 빠지고 들어가고 빠지고 하는 일련의 반복, 주께서 깨부수심으로 인해 영원한 진리는 복음 밖에 없다는 것을 알리신다. 왜 미완료가 필요한가? 이게 복음이라고 하면 인간들은 넙죽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복음이 그냥 완료로 오면 예수 믿는 내가 대상이 되어 내가 어떻게 했다는 자기 드라마가 나오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복음 전하기 위해서 미완료, 어설픔, 가짜를 불러내신다. 가짜인줄 뻔히 알면서 교회를 만든다. 가짜 교회는 기도 빡세게 하고 헌금하고 선교 많이 하면 주께서 도와주신다고 한다. “까짓 것 믿지 뭐”라고 나온다. 그러나 복음에 얽매여 있으면서도 어설픈 이 교회는 열왕기상의 원칙처럼, 구약에서 이스라엘로 부름 받았다가 내침을 당하고 멸망당하는 그 과정이 있다. 이미 망하고 시작했기 때문이다. 완료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나는 예수를 믿을 수 없다.”라고 나온다.

 

구약이라는 것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옛 언약이다. 어설프고 늘 실수한다. 십자가가 반복되면 어설픔이 나온다. 기존의 시공간이 새롭게 돋아난다. 역사에 얽매이지 않고 불쑥불쑥 구멍 뚫고 나온다. 그 구멍을 뚫고 나온 자들이 천상회의에서 보내어진 선지자들이다. 역사와 묵시를 다 이야기하려면 왕(혈통적)과 선지자의 대립관계를 통해서 이야기 할 수가 있는 것이다.

 

‘and, 그리고’ 이 접속사는 뒤에 있는 요소가 전체의 의미를 포괄하는 토대가 될 때 and(와, 과)라는 말을 쓸 수가 있다. 뒤에 있는 개념이 앞에 있는 개념을 새롭게 해버린다. 예를 들면 이렇다. 유다and(와)이스라엘, 유다는 복을 받는다. 이스라엘은 저주받는다. 뒤에 있는 저주가 토대가 될 때 앞에 있는 복이라는 의미가 나온다는 것이다. 남자and(와)여자, 남자는 뒤에 있는 여자라는 생명을 통해서 소급해서 아담이라는, 흙이라는 해석이 주어진다. 인간and(과)하나님, 땅에 오신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시므로 새롭게 인간의 요소를 규정한다. 그냥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and’가 필요가 없다. 새로운 의미가 없으니까.

 

십자가는 반드시 한쪽을 버리고 한쪽을 채택한다. 남유다and(와)북이스라엘, 북이스라엘의 멸망이 있어야 남유다가 있다. 멸망의 이스라엘 속에 유다가 있다. 그렇기에 남유다는 없는 유다이다. 그 이스라엘의 멸망과 더불어 새롭게 교체되는 유다이기 때문이다. 결국 다 망한다. 그 망함 속에서 새로운 열 두 지파, 새로운 이스라엘은 멸망하지 않는다. 야곱의 언약대로.

 

에스겔(37장)이 본 마른뼈 환상에서 왕은 백성을 생산해낸다. 전부 바짝 마른뼈다. 인자라는 호칭은 장차 오실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다. “인자야 이 뼈들이 살겠느냐”라고 물으셨다. 왜 물으셨느냐 하면 이 땅에서는 구원을 할 수 있는 담당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은 절대 불가능하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에스겔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하나님께 돌린다. 선지자의 기능이란 이렇다. 주께서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시대의 선지자인 우리 또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구원되었으니, “우리는 못합니다. 주께서 하셨습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선지자and(와) 국가, 모든 국가의 망함의 토대를 통해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천상회의의 뜻과 관련되어 있다. 국가는 망한다. 이스라엘and(과)애굽, 애굽은 멸망한다는 토대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구원받는다.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에.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망한다. 그럼 유다 나라는 망하지 않는가? 근데 유다도 망한다. 멸망당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 하지만 그 누구도 망함을 원치 않았다. 나만 망하지 않겠다는 그 밀침은 벗어날 수 없는 악마적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맙게도 주님은 그것을 유일한 구원의 장소로 삼으신다. 예수님만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셨다. 아무도 버려달라고 하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그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은 자기걱정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것이다.

 

다니엘에 나오는 짐승이라는 것은 비-인격체인 국가를 약간의 인격화된 물질로 전환시켜버린 것이다. 짐승에 올라 탄 인격체를 왕으로 본다. 짐승이란 악마의 표상이다. 인물이 물체가 되려면 여기에 죽음을 집어넣어버려야 한다. 출애굽기 31장 14절에서 안식일에 나무하면 죽으리라고 되어 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죽음이 삽입되어 있다. 아담은 흙인데, 흙이라는 것이 물체가 된다. 그냥 자살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주어짐으로 물체가 된다. 율법의 인격화다. 어린양이 죽음으로 물체가 용서받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정말 어렵다. 이럴 바엔 차라리 처음부터 죽이지 말지? 그러나 우리보다 예수님이 중요하고, 인간보다 생명나무가 더 중요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피조물이 있어야 한다.

 

기존의 모든 국가는 완전체가 등장하기 위해서 멸망당해야 한다. 없는데서 새롭게 만들어내는 원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한다. 죽지 아니하면 예수님이 아니시다. 예수님이라는 존재는 구원이 아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다. 우주는 진화하면서 우리의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주님은 살아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죽으셨다. 내가 죽어있어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국가에는 상상적 권력체와 상징적 권력체가 있다. 상상적 권력체는 상상사회, 곧 평등을 의미한다. 상징적 권력체는 계급사회를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평등했던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숭배함으로, 상징적 사회로 바뀌어 모세가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다. 이제부터 모세 말을 듣지 않으면 다 죽는다.

 

아담and(과)아담, 뒤에 있는 아담은 저주받아야 되고, 앞에 있는 미지의 아담, 이 아담은 저주받는 방식으로 오시게 되어 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래서 이 뒤에 있는 아담은 오실 예수님의 표상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아담의 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여자 이름이 하와라 해도 남자에게 복속되기를 원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생명이라는 하와는 없다. 자꾸만 남자 되기를 원한다. 남자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자진해서 굴복하고자 한다. 마이너스(-)남자다. 남자의 세계는 흙이고 죽음이다. 예수님은 남자 없이 태어나셨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끄집어내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없는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것이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근거는 사도바울이 이야기 한다. “성경대로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라고.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국가와 국가만 있는, 생존만 있는 이 현실을 선지자가 갖고 있는 언약적인 관점으로 양쪽을 땡겨 버리면, 신발끈 묶듯이 바짝 땡겨 버리면 이 틈 사이에서 은밀한 나라가 나온다. 선지자의 원동력이요, 에너지인 예수님, 선지자의 마지막 도착점은 예수그리스도의 나라다. 무너뜨리면서 새로운 나라가 출몰하는 것이다. 선지자가 품고 있는 새로운 나라를 솟구치게 함, 그게 은밀한 나라다.

 

그러나 우리는 유다나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만이 유일한 현실이 된다. 험한 세상 버리고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여기에 일조한 게 나다. “사람들아! 이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구원하기 위해 있다.”라고 하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이다. “이 하나님”이란 종교적인 인간들이 다 아는 하나님이다. 나를 만든 하나님이 따로 있을 것이라는 그 논리적 추론이 바로 인간들이 말하는 믿음이다. 사르밧 과부에게 진짜 선지자가 찾아왔을 때 사르밧 과부는 기름과 밀가루가 끊이지 않고 나오니까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여겼지만, 아들을 죽이자 사르밧 과부는 자기가 끌어 모은 정보, 그걸 믿음이라고 여겼던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처럼 우리는 처음부터 이 세상이 우리를 죽이기 위한 세상임을 놓치고 있었다. 탕자가 집 나갈 때는 아들로 나갔다가 아들 아님으로 돌아왔듯이, 뭔가 내 손으로 할 수 없는 것을 끄집어내는 것이 적폐다. 나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요소가 내 안에 있다. 내 속에 들어있는 것이 나를 죽이고 있다.

 

누가복음 18장 11절에서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우리 모두는 “이 사람과 같지 아니하고!”를 외쳤다. 과거에 그렇게 외쳤던 주여! 삼창 대신에. 우리는 상대를 통해서 자기의 순수함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순수에 순수를 더해서. 속에서 썩어가는 것을 감추고 경건과 거룩이라는 이름하에 자기 자신의 영역을 하나님과 순수한 관계로 확인시키고자 한다. 나름 조폭사회에도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가 성립이 된다. 저들보다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남을 희생한다. “~와 같지 않고”라는 이 본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복음으로 달라질 인간은 아무도 없다.

 

솔로몬의 재판을 통해서 장차 오실 메시야가 이 땅에서 어떤 원리로 나오시는가를 보여준다. 왕의 이중지위는 법적지위와 생물학적 지위(늙어죽는)가 있다. 남아있는 아이를 쪼개버리면 없는 재판이 된다. 이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 세상이기에 애가 둘로 쪼개지는 그 틈 사이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등장할까? 아기의 진짜 엄마는 “제가 재판 잘못 걸었습니다.”라고, 내 것이라고 우겼던 적폐에 갇혀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경험하는 자아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자아다. 자기가 요청한 게 아니다. 외부에서 몰아세운 것이다. 말하는 자아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려는 자아다. 자기욕구가 담겨있다. 욥의 기도는 땅에서부터 출발했던 말하는 자아였다. 그래서 솔로몬 이야기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솔로몬을 존재로 이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존재가 아닌 솔로몬을 솔로몬답게 만드는 언약적환경이 이루어진 것이다. 솔로몬이 처음에는 좋았는데 나중에는 이방여인들과 결혼하고 이방여인들이 들여온 이방신까지 섬겼다고 해서 나쁘다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전반전, 후반전을 주님이 만드셨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이 솔로몬의 길을 가게 하신다. 말하는 자아에서 경험하는 자아로의 길로.

 

우리는 주변 환경이 우리를 몰아세워서 떠밀려갔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었다. 인간이란 환경이 재구성한다. 하늘(선지자의 소식)과 땅(자기주장)의 세계에서 마찰을 보여주는 열왕기상. 죄인에게는 어떤 미래가 준비되어있다 할지라도 내일이 아니니까 걱정을 안 해도 된다. 주님의 일이니까. 우리가 무엇을 붙잡으려고 하는가? 개인구원이다. 몸이 불쾌하면 악이고 몸이 유쾌하면 선이다. 이것 말고 다른 유난 떠는 것, 종교윤리도덕은 개나 주라고 존 스튜어트 밀은 말했다. 이렇게 인간은 그냥 말하는 자아만 있을 뿐이다. 경험하는 자아는 예수님 본인이시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분양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셨다. 인간 스스로는 의인될 수 없음을 부정하는 어법이다. 나는 죽고 예수님이 내 안에 있기에 대신 죽으신 예수님만 드러내며 산다.

 

솔로몬이 아니고 다윗의 등불이다. 왜냐하면 야곱과 이스라엘이 중첩되어 있듯이, 둘 다 죄를 지었지만 다윗 언약 안에 있는 내부적인 요소가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축복과 저주가 대치되는데 나란히(중첩되어) 들어 있다. 솔로몬이 다윗을 품고 있듯이. 다윗은 자기 군사를 계수함으로 전염병으로 죽게 했는데, 다윗은 있음이 없음을 바탕으로 해서 있음이라는 것을 몰랐다. 안개같이 없어지는 없음이 바탕인데,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있음에 혹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 생물학적인 다윗을 언약적 다윗으로 바꾸어준다. 언약적 다윗은 예수님을 품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것이다. 다윗과 연결된 예수님이 낮은 자리로 오셨듯이 다윗도 추락하고 추락한다. 솔로몬도 마찬가지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도록 솔로몬 안에 들어있는 적폐를 십자가 기능으로 풍선 터트리듯이 터트려주셨다.

 

세상의 현실이란 국가만이 유일한 현실이다. 우리의 유일한 현실은 국가가 잘 돼야 밥 먹고 산다는 것이다. 이것 외에 없다. 국가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 땅이 아니라 국가라는 형식에서 탈출하는 것을 신약적인 표현으로 구원이라고 한다. 국가에서 구출되지 않았다면 우린 식겁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둘이 싸우고 있는데 토네이도나 불이 났다면, 그쪽을 둘이 같이 바라본다는 것, 탈출한 것이다. 이게 구원이다. 이렇게 되면 갑자기 일상이 무의미해진다. 갑자기 의미 있는 것이 발생함으로 내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은 무의미가 되고 적폐가 된다. 열왕기상8장 12절에, “그때에 솔로몬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캄캄한 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 인간들의 유일한 현실에 주님께서는 그냥 하늘에 계시지 않고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이다. 이 땅을 방문하신 분으로 우리의 일상은 무의미해진다.

 

열왕기상 8장에서 솔로몬은 성전을 건립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 그래서 성전을 중앙센터로 만들어서 산포(뿌려줌)해준다. 성전네트워크다. 성전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짓고 전쟁에서 패배하고 남들한테 학대를 받아도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다시 원상복귀 시켜주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살다가 약속의 땅으로 온 것이 구원이 아니다. 진짜 구원은 하늘에 사신 하나님이 땅으로 이동하셨다는 것이다. 그게 진짜 구원이다. 이스라엘을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이 임재하고 있다는 성전을 대외적으로 공표하는데 있다. 원래 성전은 비어있다. 공백이다. 인간이 끼어들 수 없다. 그 공백에서 품어져 나오는 천상의 기운으로 이스라엘은 이방민족과 차이 나게 하는 천국백성의 모형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를 부인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죄인이라고 해도,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도,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해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해도, 예수 믿는다고 해도, 그것은 도 닦는 불교가 된다. 인간의 시간의식은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단절되지 않고 지속된다. 인간의 기억은 끊어짐이 없이 줄곧 이어진다. 나 자신을 지울 수가 없다. 따라서 내가 스스로 무의미하게 만들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전(UFO)에 올라타서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어떤 조치가 주어진다. 열왕기상 2장에서 솔로몬은 칼로 숙청을 감행한다. 그것마저도 이방나라와 같은 방식이라면 탈출 할 수가 없다. 다윗정권에서 솔로몬 정권으로 바뀌어 행복하게 산다는 것밖에는 안 된다. 그러나 성전에서 나오는 조치는 의미 있는 나를 무의미로 바꾼다. 무의미라는 말은 일상을 수정하라는 것이 아니고 뭘 해도 거기에 의미를 두지 말라는 것이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라는 노래에 나오는 가사처럼, 음악이 흐르는 그 카페엔 초콜릿 물감으로, 가로등 등불 아래엔 보랏빛 물감으로, 비 오는 날의 사람들이 도화지속에 그려진 풍경처럼 행복한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 비 오는 날의 풍경을 도화지에 수채화로 그려버리면 그 안에 있는 모든 등장인물들은 동작 그만이 된다. 비는 계속 오고, 너와 나 사이의 활동 사이에 하나님은 끼어들고 있다. 그럼에도 자기한테만 의미를 두니까 하나님의 활동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노동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나 이 비 오는 날에 주인공이신 주님이 오셔서 우리의 모든 것을 드러내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도된 성전의 네트워크다. 이것이 구출이다.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동작 그만!

 

성전과 인간 사이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 성전과 인간 사이에는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경유해서 성전에서 받아준다. 죽음을 반복시키는 것이 성전 안에 있는 기계장치다. 이 죽음 안에서 우리의 시간이 끊어지고 연속성이 끊어진다. 성전에서 시간은 묵시다. 이미 원서마감이 됐고 합격자 발표가 났다. 근원되시는 메시아가 다 이루었기 때문이다. 다 이루었기에 묵시가 된다. 성전(UFO)에 탄 사람들은 그냥 뒤돌아보면서 살 뿐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해석이다. 앞으로 되어 질 일도 이미 완료된 것이다. 기억의 다발을 쓰레기 소각장에 집어넣어버린다. 이중처벌금지법처럼, 지은 죄도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이미 벌을 다 받았기에 우리는 죄 짓는 일만 남았다.

 

국가는 없다. 나라도 없다. 은밀한 나라만 있다. 이스라엘의 있음이 진짜 이스라엘(성전의 공백에서 나오는)이 없음을 증거 하는 있음이 된다. 쉽게 말하면 영구 없다는 것을 누가 이야기 하느냐 하면 영구 본인이 이야기한다. 내가 성도가 아니라는 것을 성도 본인이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다. 열왕기상 8장 46절,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포로 잡혀가도 괜찮다.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는 곳이 모든 있음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그것을 항아리처럼 껴안고 있다. 이게 택한 백성이다. 포로 잡혀가도 괜찮다. 망해도 괜찮다. 주님의 복음을 위한 네트워크 기능의 일부고, 하나님과 연결된 묵시의 존재기 때문이다.

 

레위인이 있는 남유다와 레위인이 없는 북이스라엘. 레위인은 사람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레위인이 없는 북쪽 이스라엘은 인민을 위해서 나라를 한 번 새롭게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비언약적인, 주위의 이방나라와 똑같다. 권력이란 대중들이 통치를 원하는데, 이 통치는 피지배자의 이념이 원하는 것의 반영이라고 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양 잡고 소 잡는 것이 레위인에게 얼마나 번폐스러운 것이었던가? 종교라는 공동체를 만들어서 행복하게 살자고 북쪽 이스라엘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이 있는 남유다와 성전이 없는 북이스라엘이 갈라지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안고 있는 다윗언약이 성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건물에 가두어진 것이 아니다. 형체 없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다.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실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다윗의 자손이여! 이름이 먼저 있고 실체이신 예수님이 등장한다. 복음은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전에서 그렇게 다윗 가문을 튀어나오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공백에서 나오셨다. 나오시면서 주변의 땅을 쫙쫙 밀어내신다. 아기예수로 태어나셨을 때 배후의 악마는 헤롯으로 하여금 아기예수를 죽이기 위해 두 살 아래 아기들을 다 죽이게 했다. 공백이신 예수님이, 꽉 차 있는 이 세상 존재에 구멍을 뚫으신다. 그 안의 낯선 기운, 성령께서 뿜어져 나오신다. 성전은 허물이기에 나중에 불 타 없어져야 한다. 그러나 유다나라는 성전이 있다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존재였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믿고 있다. 스가랴 14장 14절의 예언처럼 감람산에 두 발 딛고 선다는 것이다. 유대인에게 메시아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 메시아는 스파이더맨, 어벤져스 이미지다. 그러나 성전은 형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메시아가 있느냐이다. 메시아는 오늘날 성령으로 우리 안에 찾아오신다.

 

성전 없는 북이스라엘은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갈까봐서 벧엘과 단에 제단을 만들어 놓았다. 쉽게 말하면 유사한 종교를 설치해서 고객만족에 나섰다는 것이다. 성전 있는 유다는 우리는 북이스라엘, 저들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둘 다 망했다. 북이스라엘은 성전 없는 채로 망했고, 남유다는 성전 있는 채로 망했다. 성전이란 건물에 갇혀 그 안에 어떤 분이 계신 것이 아니라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다윗의 자손으로 계속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혈통에 속했다는 것은 좋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혈통에 속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혈통을 부정하는 것이 선지자에게서 나온다.

 

범죄한 다윗과 다윗나라의 차이점은 다윗은 존재에서 출발해서 왕이라고 하고 다윗나라는 죄인으로 출발해서 레위인의 기능, 제사기능이 나온다. 그래서 다윗나라는 존재가 아니라 공백이다. 빈자리에서 기능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다윗언약으로 오신 메시아는 성령을 주신다. 그렇기에 왕상 13장에서 이름 없는 선지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공백을 비워놓아야 한다고 한다. 장차 올 진짜 메시아를 위해서 자리를 마련해놓아야지 니 권력으로 채우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목사가 할 일은 피 흘리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소개해야 된다. 성전의 공백 앞에 서 있는 선지자는 성전의 껍데기만을 붙잡고 있음을 폭로함으로 공격당한다. 선지자는 제물이 된다. 양을 잡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잡는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목 베인 영혼이다. 결국은 양을 잡는 제사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제물이 되는 선지자의 죽음은 망할 나라임을 들통 나게 한다.

 

이방민족은 조용하다. 그 시대 이방민족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왜 사는지 모르고 살기 때문이다. 그와 반면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알게 된다. 왜 사는지, 왜 존재하는지를. 불길한 인물이 등장한다. 선지자다. 잘 살고 있는 기존인간의 토대 자체를 확 갈아엎는다. 선지자한테 이익 되는 것도 없는데, 한 오지랖 한다. 선지자가 이야기하는 핵심은 뭐냐, 여자가 없는데 생명이 생기고 엄마가 없는데 자식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걸 구분하겠다는 것이다. 이 땅을 물갈이 하겠다는 것이다. 기존의 엄마아빠를 통한 사람은 더러워서 못 보겠다고 한다. 엄마한테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왕상14장, 21절, 15장 18절에서 엄마를 왜 소개하느냐? 엄마 있는 자식이라 문제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무엘하 7장 14절에 엄마 없는 가문을 만든다. 집(성전) 지어놓았다고 거기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인격에 하나님이 거주한다는 것이다. 엄마 없는 가문, 천국 가는 가문, 성령이 오면 그런 사람이 된다.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요?” “니고데모야! 바람이 불면 새로 태어날 수 있단다.” 바람은 요청해서 부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임의로 분다. 스쳐 지나가면 바람이 남기고 간 흔적, 거기서 새로운 천국 갈 영적 사람이 태어난다.

 

우리의 모든 출발은 “나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에 있다. 하나님은 그걸 비켜간다. 인간은 선악체제 외에는 부릴 재주가 없다. 그 재주로 하나님과 협상에 나선다. 하나님은 협상하지 않는다. 육과 끊어지게 하신다. 구약의 할례다. 신약에서는 세례고 십자가의 죽으심이다. 예수님은 차라리 내가 죽겠다고 하신다. 엄마아빠에게서 받았던 DNA를 가지고 들어오는 꼴을 보지 못하겠다고 하신다. “내가 죽음으로 너희들을 가로막겠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담긴 의미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인간을 재구성한 것이다.

 

북이스라엘은 레위인이 있고 남유다는 레위인이 없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은 가짜다. 남유다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제사가 있어 멀쩡하다. 그러나 성전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멀쩡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 앞에 모인 자들은 멀쩡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 옆에 달린 강도를 보라. 강도는 육으로 갈 수 있는 희망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엄마나 그 자식이나 똑같은 문제아인데도 불구하고, 희망 없음이 희망 있음을 토해낸다. 부정어법이다. 너 죄인이라는 것은 너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이미 너는 나와 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지? 그지?”라는 것이다.

 

인간의 엄마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 자식은 엄마의 문제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북쪽이스라엘은 여자로 인해 나라가 엉망진창 된다. 이세벨과 그의 딸 아달랴, 이 두 여자가 남북으로 다 조져 놨다. 왕상 21장에는 나봇의 포도원이 나온다. 이 땅에 나봇이 있고 포도원 농사를 짓는다. 다시 말하면 아무것도 없는데 포도농사 짓는 나봇이 있었다. 여호와의 약속을 함유해서 없는데서 생긴 것이다. 이세벨이라는 악함을 노출시키고자 하는 도구다. 일종의 선지자 기능을 하고 있다. 아합은 왕이면서도 나봇의 포도원을 뺏는다. 이것이 힘이고 북이스라엘의 속성을 대변해준다. 왕은 보이지 않는 공백을 자기의 중심의 권력으로 바꾼 것이다. 이세벨이 하는 말, “이것이 힘이고 정치다.” 나봇의 토대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 의미를 품고 있다는 단지 그 이유로 인해, 주변이 그를 가만두지 않은 것이다.

 

엄마 없이 태어남을 집약시키고 응축시킨 내용이 갈라디아서 4장 4절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이 세상의 법칙대로 태어나지 않았다. 특수한 여자를 통해서 이 땅에 나타났다. 구원이고 복음이다. 엘리야도 엄마 없는 특징이고, 세례요한도 그러하다. 성령의 예언으로 불임여성에서 태어난 것이다. 엘리야-세례요한-오실 메시아의 전령역할. 그래서 엘리야부터 모든 선지자는 엘리야의 치마폭에 휘감겨있다. 모든 선지자의 특징은 엄마 없이 태어난 양상을 보여준다. 이 땅에서 붕 떠있다. 열왕기상 11장에 보면 솔로몬이 이방여인을 사랑하고 그들이 가져온 이방신을 섬긴다. 이방여인을 사랑할 때부터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않다. 다윗이 안고 있는 속내를 드러내준다. 이제 무엇이 다윗의 노선이 아닌가를 보여준다. 엄마 있는 왕들은 다 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혈통으로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라만이 유일한 현실 속에 불길한 요소들로 세상은 돌아가고 있다. 평화로운 동그란 하얀 나라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 안에서 불길한 까만 점이 커진다. 가뭄과 전쟁과 전염병...자연현상과 더불어서 엘리야는 여호와계심을 드러낸다.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하지만 버리고 돌아올 수 없음을 안다. 망하게 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이 세상은 이렇게 불길한 요소가 있는 가운데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엄마 없는 자식이라 해서 집안에 엄마아빠가 없는 것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하나님께 원천을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방민족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패밀리다. 조상제사를 중심으로 한다. 혈육 외엔 없다. 그러나 사래는 이삭을 낳고 사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니가 나를 낳았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토대가 나를 낳았다. 언약이 육을 이겨서 다른 토대를 집어넣는 것은 이스라엘에게만 가능하다. 이방민족은 그냥 조용히 살 뿐이다.

 

엘리야는 자연현상과 보조를 맞춘다. 이스라엘 땅에 비가 3년 반 동안 안 왔는데, 어떤 이벤트를 벌이면 비가 온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엘리야는 이스라엘 전체를 놓고 대한다. 판이 커졌다. 그동안 왜 비가 안 왔는지 한 번 해보자는 거다. 우연한 만남, 아합의 궁내대신 오바댜를 만난다. 오바댜가 비록 아합을 섬기면서 선지자들을 도와줬다 할지라도 권력 앞에서 하수인이었을 뿐이었다. 오바댜가 이렇게 했다 할지라도 선지자는 개인구원은 없고 집단구원을 이야기한다. 구원받아도 단체로 구원받는다. 구원에 아무런 조건이 없이 주님께 분양받는다. 우연한 만남에는 개인구원은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계기가 들어있을 뿐이었다.

 

바알, 아세라 선지자를 합한 850명과 엘리야 1명과 붙는다. 대결방식은 송아지를 각각 한 마리씩 가지고 와서 제단위에 올려놓고 불을 피우지 않고 각자 신을 부른다. 불렀을 때 불로 응답하는 쪽을 승리하는 쪽으로 한다. 850명 가짜 선지자들은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테크닉을 동원해서 자기들의 신을 부른다. 음파의 에너지로 엑스터시를 느끼면서 자아도취 되어 자해까지 한다. 자기들이 유발한 은혜에 흠뻑 빠진다. 그러나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지혜는 뭔가? 얼마나 기도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자처해서 저주받는 것이다. 이것이 제물의 의미다. 엘리야는 가만히 있는데 나서서 스스로 태우는 것이다. “너는 가만히 있어라! 내가 죽을게.”

 

바알종교는 획득하고 소유하는 것을 은혜로 본다. 복을 받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신을 못 떠난다. 그러나 신을 떠난 자만이 천국 간다. 처음부터 인간은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불가능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 제물에, 나무에, 도랑에까지 물에 흥건하게 젖을 때까지 물을 갖다 부었다. 이것이 절연관계다. 인간이 천국 가는 것은 완전히 끝난 것이다. 내가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아세라, 바알 종교일 뿐이다. 이 종교의 특징은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간다.

 

엘리야는 열왕기상 18장 36절에서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의 하나님을 언급한다. 언약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죄에서 의로 살아나셨듯이, 우리는 죽을 몸으로 살면 산다. 살아있는 몸으로 살려고 하니까 힘들다. 비가 오지 않았다는 것은 우상을 섬긴 저주요 심판이었다. 드디어 비가 왔다. 저주와 심판에서 벗어났기에 비가 온 것이 아니다. 이 비는 무서운 비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노아가 드린 희생제물의 피가 담긴 비다. 지금도 악인과 선인에게 비가 내리는 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를 근거로 해서 미리 앞당겨서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엘리야의 특심이었던 열심은 이제 이세벨이 죽이겠다는 말을 피해서 로뎀 나무에 앉아 죽기를 소원하고 있다. “나는 저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천사가 와서 은혜로 남은 자 칠천 명이 있다고 하신다. 니 자신을 위해서 인생 살라고 일 시킨 적 없다고 하신다. 잘라내고, 잘라내고 또 잘라내고 모든 것을 잘라낸 그 가운데서의 남은 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 남은 자는 오로지 은혜로만 남은 자이다. 선지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이제 기적이 아닌 문서로, 조용하게 일 하게 하실 것이다. 망하고 난 뒤에 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하게 되도록 말이다. 임마누엘 되시는 새로운 왕이 올 때까지, “나는 이렇게 엉터리 같은 왕이었습니다.”라는 바퀴를 천사들이 돌리게 되면, 바알선지자들을 유혹해서 피비린내 나도록 살육했던 예후 왕 마저 무의미한 행동이 될 뿐이다.

 

전쟁이다. 모두가 한통속이다. 같은 운명이다. 나누어지는 계파를 하나로 모아 버리는 하나님의 작전이다. 너나 나나 똑같은 인생으로 살아간다. 우리 안에 통합되어진 속성이 있음을 확인시키기 위한 것이다. 한통속이다. 영화 신세계에 나오는 황정민의 대사처럼 “어이, 브라더!” 이것이 세상을 보는 멋진 방법이다. 니만 통뼈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힘센 놈이 다 먹어치우는 단 하나의 원리로 장악되어진다. 전쟁이라는 것은 나는 평소에 뭘 소중히 여기고 귀히 여겼는가를 확인시킨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승리케 한다. 100,000대군 대 7232명이다.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을 승리케 한다. 이 말도 안 되는 승리의 전쟁 배후에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있다. 왕상 20장 32절에, “저는 나의 형제니라”라는 이런 고백이 튀어나오도록, 한통속임을 들통 내기 위한 개입이었다.

 

어느 누구도 이 세상의 절대적인 힘 안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빠져나오는 방법은 밟고 때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님을 때리고 죽여야 내 안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본성이 있음을 감지한다. 날마다 주님을 죽이는 길을 줬는데도 절대로 자기는 주님을 칠 수 없다는 것이다. 악마와 한패이면서도 나만의 선을 포기한 적이 없다. 개가 오줌으로 영역 표시하듯이 나만의 단독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그러나 “나를 쳐라!”라고 하신다. 하나님을 밟고 때리고 줘 패는 그 계기가 유일하게 우리가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이다. 하나님을 죽이지 않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한다. 단독적인 자기 영역을 확보하면서 입에 발린 소리만 한다. “내가 이만큼 산 것도 주님의 은혜입니다.”라는 이것은, 니가 저들과 같이 아니하다는 저 동네하고, 똑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똑같은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전쟁은 결국 하나로 통합시키는 전쟁이었다. 절대로 나만은 잘났다고 할 수 없다. 한통속이다. 혼자만의 영역은 주님이 용납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붙여준다. 누가 착한지, 내가 착한지 네가 착한지, 결국 자기 의를 내놓고 한 판 붙는 전쟁이다. 그 의는 악마가 제공한 의다. 신앙생활이란 이런 것을 감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 신앙생활이다. 이것만이 성도에게 주신 축복이다. 고전1장22절에, “유대 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 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십자가는 매일같이 거리끼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내가 믿는 주님을 칩니까?” 그게 바로 악마적인 오야붕이다. 이 악마 짓이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이다. 역설이다. 부정어법이다. 주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이것이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이라니?? 내가 주님의 피를 흘린 원인제공자였음을 인정해야 된다. 이럴 때 내가 챙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이 엉터리다.

 

선택이라는 것은 원인 자리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다. 선택되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결과의 자리에 집어넣어야 한다. 구원되었으니까 소급해서 선택된 것이다. 내가 주님을 날마다 줘 팼음에도 구원받은 것은, 창세전에 예정되었기 때문이다.

 

진리가 있고 세상은 진리대로 펼쳐진다. 이것이 진리다. 그러나 진리를 인식하는 나에게서 원망이 나오고 의심이 나오고 회의가 나오고 이제 나 혼자 살겠다고 살림 차릴 때, 그것이 진리의 정상적인 노선이 된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진리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이것도 역설이다. 부정어법이다. 진리야 처음부터 확정되어 있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렇지만 진리는, 실제로는 매일같이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일로 인하여 새롭게 구성되어 나가는 것이 진리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걱정하고 염려하는 이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코스다. 세상에 있는 교회가 다 이단인 것은 예수 믿는 자기를 믿기 때문이다.

 

왕이 “전에 아람군대의 전쟁에서 이겼으니까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겠지. 이번 전쟁에서 이기겠느냐?”라고 물으니까, 가짜 선지자 시드기야는 왕에게 철로 뿔까지 만들어서 아부하면서 이긴다고 한다. 가짜 선지자 400명은 다 이긴다고 한다. 그러나 한 번도 좋은 말 하지 않고 막말하는 한 선지자 있으니, 그 선지자에게도 물어봐야 한단다. 그 선지자, 미가야를 부른다.

 

“거짓영” 열왕기상 22장 19절, “누가 아합을 꾀어서 길르앗 라못에서 죽게 할꼬” 22절,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이걸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 따라서 어떤 인간도 하나님과 한 패 먹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한테 거짓말하도록 부추길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거짓말 하는 운명으로 태어났다. 복음의 십자가에 대해서 늘 거리낀다. “나는 십자가 피를 믿습니다.” 거짓말이다. 이게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이다. 이런다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고백으로 내 행동으로 구원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보이는 것이 전부 다 수평적이다. 그러나 미가야만은 수직적이다. 천상회의에서 보내줬기 때문이다. 수평적인 이 세상은 수직에서 조종했다는 것을 미가야는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거짓말하는 영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아무리 예수님, 십자가 해도 우리를 우리 힘으로 건질 수가 없다. 개인구원은 없다. 너나 나나 다 똑같다. 집단구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언약대로 지금도 생성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원주인 악마는 우리가 겸손하게-실상은 최고가 되고 싶지만-최고가 되고 싶지 않다, 라고 말해도 최고로 만들려고 안달이 나있다. 자기만의 영역을 고수하면서 각자의 집이라는 곳에 들어가 자기만의 세계에서 늘 혼자 즐긴다. 밤이면 쫙 켜지는 불빛의 아름다움이 심판의 불빛이라는 것을 누가 알까? 은혜 받았다는 그것이, 죄인이라는 그것이, 한통속인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말빨이었고, 나 예수 믿는 사람임을 티내고자 하는 습관이었다. 돈 없으니 복이라도 받겠다고, 그거라도 붙잡아보겠다고 아등바등 대는 악마의 날갯짓이었다. 점점 더 멀어져 간다. 구원은 생각도 안 하고 상관없다고 속였던, 그 구원에 대한 열망에서 말이다. "니가 왜 구원받아야 하는데?"라고 주님은 물으신다.

 

수련회 교재를 단 한 번도 보지 않고 강의를 한 적은 수련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교재를 거들떠보는 그것마저 무의미했을까? 무의미했다. 수련회 준비한다고 했던 그 고생마저 주님 앞에서는 게임 끝이었다. 어쩌면 그는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른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에 담긴 머리 짧게 깎은 주인공 같은 모습을 하시고서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12장 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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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81.188)17-08-06 07:55 
이렇게 끝내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끝내기엔 뭔가 아쉽단다. 죄는 이렇게 우리를 몰아가고 있다. 
우리는 파도 위에서 출렁대는 쓰레기 같다. 파도가 출렁대면 출렁대는 데로 출렁이는...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대신 죽으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그 누구도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지 않았다. 물에 빠진 나를 나 스스로 건져낼 수 없듯이 인간 모두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예수님마저도 저주받으셨다면 저주받음에서 예외 된 자는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누구도 절대기준일 수는 없는 것이다. 절대기준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뿐이다. 누구누구의 복음은 없다. 서로를 쳐다봐 봤자 저주받은 흔적만이 철철 넘치고 있는데, 예쁘면 어떻고 못생겼으면 어떻고 잘났으면 어떻고 못났으면 어떤가? 모든 입을 막고 저주 아래 가두어 두셨음을 발견할 뿐이다.  

물론 모든 연예인들이 그러하겠지만, 특히 개그맨이라면 유행어 하나쯤 만들어야 그 세계에서 밥벌이는 해서 밥 먹고 살 수 있다. 마치 그렇게 유행어처럼 번져버린 막산다는 말. 그러나 그 말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복음에서 빌려온 표현이지 복음은 아니다. 막산다고 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말하는 자아와 경험하는 자아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려나? 여기저기서 많이 인용되더라. 말은 내가 할 수 있다. 그러나 경험은 내가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럼 결국 말이란 경험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그 경험을 누가 주셨는가에 관건이 있어야 한다. 배후가 있다. 주님 아니시면 악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마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의 배후는 악마다. 그러면 인간이 하는 모든 말은 악마의 말이다. 악마가 준 경험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주님이 그 배후에 있는 자들이 생겨난다. 주님의 경험을 분양받은 자들의 말이다. 아! 그 누가 알꼬?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음을(고전4:20). 주님의 경험을 분양받은 자들은 소급해서 안다. 

수련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참 시원한 말을 들었다. “소식이 없으셔서 이근호 목사님을 배신 때린 줄 알았어요?” “뭐, 이근호 목사님은 배신 때려도 되지 않나요?” 이 대답에는 함축적인 의미가 들어있다. 매일같이 자기가 자기를 배신 때리면서 사는데, 하물며 남편쯤이야, 아내쯤이야, 자식쯤이야, 직장동료쯤이야, 친구쯤이야, 목사쯤이야, 교인들 쯤이야... 주님을 배신한 자들이 까짓것 인간쯤이야 배신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 아닌가? 성령께서 그를 통해서 전하시는 복음만 배신하지 않으면 된다는 함축적인 의미가.  그래, 우린 서로 배신해도 복음은 배신하지 말자. 

구약에서 선지자들은 천상회의를 마치고 파견 나온 자들이다. 그들은 오직 천상회의에서 결재되어진 역할만을 할 뿐이다. 이 시대의 선지자들이여! 자기 역할에만 충실하자. 망한 자임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역할. 남유다의 멸망을 예언하고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 선지자들 또한 그 나라에 속해 있었다. 포로 되었을 때 함께 포로가 되었고 멸망했을 때 함께 멸망당했다.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주님의 이름을 증거 하는 성도들 또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
 우인숙 (IP:59.♡.42.44)17-08-06 08:46 
할말없는자로 살아가는 편안함~~영구없다~~~의 자유로움~~ 

참 귀한 사람 우리 미아선생~~
 이근호 (IP:119.♡.94.40)17-08-07 19:13 
이미아 성도님은 글을 대하면 '원치 않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내가 알던 나를 포기하므로서 '미안함을 느끼는 새로운 분류'를 조성케 합니다. 목숨 걸어도 나올 수 없는 글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태윤 (IP:220.♡.116.34)17-08-10 18:03 
감사합니다. 들통나는...저를 다시 들통나게...

 임청일 (IP:124.♡.228.229)17-08-10 20:41 
너무 오랫만에 댓글을 달려고 로그인을 했더니 비밀번호를 틀려서 수첩을 펴고 확인해야만 했다 
"수련회 요약"이란 제목에 속아서 좀 쉬울려나 했는데 녹취록보다 더 어렵다 
목사님말씀은 의심없이 볼 수 있는데 이미아성도님 글은 혹시 틀린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과 함께 보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탓일까 부분적으로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데 모두 읽고나면 머리속에 남는 게 없다 
이미아님은 선지자로서의 성도의 역할을 말씀하셨지만 머리속에 유일하게 남은 것은 목사님모습 뿐이다. 
"수련회 교재를 단 한 번도 보지 않고 강의를 한 적은 수련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교재를 거들떠보는 
그것마저 무의미했을까? 무의미했다. 수련회 준비한다고 했던 그 고생마저 주님 앞에서는 게임 끝이었다. 어쩌면 그는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른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에 담긴 머리 짧게 깎은 주인공 같은 모습을 하시고서는..." 
이미아님의 마음속을 훔쳐본 것 같은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