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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강의-시내산 성령이 임한자 17110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1. 26.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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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8 00:13:18조회 : 138         
유튜브 강의 (208강, 209강) 시내산 ,,성령이 임한 자 171107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208강              음성               동영상


209강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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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81.188)17-11-23 23:24 
208강-YouTube강의(시내산)1701107-이 근호 목사 

  

이번 강의는 제 208강, 제목은 ‘시내산’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들 많죠. 각 지역마다 사람들이 많은데, 특히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시내 산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나타냈다는 것은 그런 역사를 갖고 있는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한테도 상당히 기이한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평소에 늘 궁금한 것이 뭐냐 하면, 신자라도 궁금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살아있으면 좀 보여 달라는 거예요. 그게 믿는 사람들에게 안 믿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공격을 하고, 그리고 믿는 사람들 본인도 늘 믿음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어떤 때는 ‘내가 안 믿는 것이 아닌가? 내가 하나님이 없는데 있다고 지어내놓고 그냥 믿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죠. 

  

그럴 때 그걸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물론 신약에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를 보라,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이렇게 말했지만 십자가가 눈앞에 안 보이죠. 그리고 요한일서에 보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일한다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안다고 요한일서에 나와 있다고요. 

  

그런데 문제는 성령조차도 눈에 안 보인다는 겁니다. 주께서 너를 사랑했다는데, 이 사랑이라는 것은 인간세상에서 너무 많아요. 그 사랑, 사랑, 사랑, 사랑하지만 그 사랑 중에 어느 사랑이 진짜 사랑이고 그렇고 그런 사랑 중에 일부라면, 그 사랑이라는 것도 인간의 욕구의 한 방편으로, 그런 양태로써, 인간의 욕심의 한 결과물로써 지어냈다고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워낙 인간은 사랑을 원하니까. 신에게 사랑해달라고 했다가 신께서 일방적으로 자기를 사랑했다고 자기주장을 얼마든지 펼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근본적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뭔가 하나님이 나타나고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살아있다는 인간들처럼 눈에 보일 것이고, 그러면 믿음이 더 정돈되고 확신되겠다, 라는 그런 생각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나타난 것은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생기고 난 뒤에 개인적으로 모세에게 자주 나타났습니다. 

  

근데 모세에게 나타나도 소용이 없는 게, 그건 모세 개인적인 체험이잖아요. 다른 사람들의 체험은 아니다 이 말이죠. 모세는 참 좋겠다. 하나님을 만나서 혼나든지, 겁나든지 간에 하여튼 나타났으니까. 모세야 하나님을 자기가 직접 봤기 때문에 구원받는다 치고,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고 모세 말을 듣고 따라야 되는데, 모세야 어디까지나 같은 인간이지 않습니까? 인간이거든요. 근데 인간이 인간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냥 이용하고 일시적으로 평가하고 잠시 참조해볼까, 하는 그뿐이지 누굴 전적으로 믿습니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처럼. 

  

근데 이 점을 알아야 돼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그렇게 자주 나타난 모세조차도 나타난 그 하나님을 안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믿음을 요구한 적이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그냥, 믿음을 요구한다는 것은 모세 쪽에서 하나님께 뭔가 보이라는 뜻인데,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 쪽에서 계속해서 모세에게 나타나잖아요. 

  

물론 모세가 뭔가 하나님께 기대고 의지하고 기도한 적도 있습니다마는,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는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갔습니다. 못 들어간 이유는 믿음이 없어 못 들어갔죠. 그것도 전적으로. 그래도 90퍼센트는 믿었잖아요? 하는데, 믿음에 90퍼센트, 95퍼센트, 99퍼센트가 의미가 없어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믿음은 쪼갤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음을 이렇게 쪼갠다든지, 압축한다든지, 그런 성질이 아니에요. 

  

우리가 누구하고 사귈 때, 전에 많이 사귀었으니까 이제는 좀 쉬자, 라고 할 수가 있죠. 그럴 때 그 소리를 듣고 상대방이 전에 많이 친하게 지냈으니까 좀 쉬어도 된다는 생각보다도 오히려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아, 너는 사랑이 식었구나. 믿음이 식었구나.’ 이렇게 되죠. 지나간 좋은 관계 같은 것은 한 순간이 되게 되면 그건 다 없었던 걸로 무효가 돼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시내산이라는 것에 주목해서 하나님이 거기에 임재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날마다 말씀하시고 날마다 보여주시고 날마다 책망하시고 뭐 이렇게 해서 끌어가시는 것이 아니고, 시내산을 통해서 어떤 원칙을 제시하시는 거예요. 

  

근데 그 원칙이 뭐냐 하면 이거는 인간의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믿고 안 믿고 관계없이 원칙대로 일을 추진하시겠다는 겁니다. 원칙대로. 법적인 선포라 하는데, 옛날에 우리나라에 서머타임(summer time)제도 라는 것이 있었죠. 지금 유럽은 하고 있습니다만. 서머타임제도를 정할 때 국민한테 물어보고 했습니까? 일방적으로 정했습니까? 여름에는 한 시간을 땡긴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했죠. 

  

그 일방적인 하나님의 원칙이 시내산을 통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의견을 인정한다가 아니라 인간의 의견은 안 듣겠다는 거예요. 이 시내산의 특징이. 그래서 이렇게 되면 처음부터 제가 한 질문한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에요. 하나님을 보여주시면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라는 이 질문이 왜 잘못됐느냐면 이건 어디까지나 인간이 누구를 대상으로 지금 제안을 하는 거잖아요. 하나님을 대상으로 제안을 하는 거죠. 

  

근데 시내산을 통해서 그런 제안 같은 것은 하나님 앞에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눈에 보여주면 하나님을 믿겠습니다.”라고 할 때 하나님은 날 믿으라고 너한테 요청한적 없다는 거예요.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이 무슨 부탁을 한 적이 없어요. 정말 우리가 믿는다면 그걸 믿어야 돼요. 

  

우리 인간이 존재할 때,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가 부탁해서 요런 식으로 사람은 이렇게 해주시고, 목소리는 꾀꼬리같이 해주시고, 키는 몇 센티로 해주시고, 그런 컨셉 정해가지고 우리가 하나님께 요구했습니까? 주문제작해달라고 요청한적 있습니까? 그런 것 없죠. 일방적으로 태어난 거예요. 이 모습 그대로. 

  

그걸 한번 생각해보세요. 안 보여주고 일하겠다는데 니가 왜 군말이 많은가? 이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니가 보고 안 보고 내 쪽에서 제시하기 전에 먼저 주님 쪽에서 확 다가온 게 뭐냐, 그건 바로 시내산에서 보여주신,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바로 불입니다. 이건 출애굽기 3장에서도 모세에게 나타날 때에 하나님께서 떨기나무에 붙은 불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시내산 정경이 나와요. 완전히 불덩어리가 나타납니다. 이게 신명기 4장 24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소멸하는 불이다. 나,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다.” “소멸하는” 것을 이렇게 생략해보면 “나는 불이다.” 그러니 가까이 할 수가 없죠. 멀찍이 떨어져야 되겠죠. 그러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어디서 나온다? 불속에서 나오죠. 그것도 소멸하는 불속에서 나오죠.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세상을 불로써 소멸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자, 여기서 그것을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만 알면 돼요? 소멸하는 이유, 원리, 원칙, 법칙, 그것만 알아채면 되죠. 그게 바로 소멸하시는 분이 불속에서 나온 게 십계명이고, 십계명은 열 가지 계명으로 되어 있고, 그 계명을 못 지키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지어다. 그게 모세언약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지옥불, 지옥이 될 수밖에 없는,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이 떨어진 것처럼, 유황불이 떨어지는 그 대지, 그 상황에 이 건물도 놓여있고, 우리 인생은 잠시 몇 십 년 전에 나타났다가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에 가 봐도 역시 유황불이고, 한국에 있어도 유황불이고. 

  

바로 성도라고 하는 것은 “복음 믿겠습니다.”라고 제시할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확 다가오는 원칙 안에서 우리는 못 빠져나간다는 것을, 이걸 감사해야 되겠어요? 아니면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나한테 의논도 안 하고...’라고 이렇게 궁시렁 거려야 되겠어요? 이걸 감격해야 되겠습니까? 감격해야 되죠. 이게 바로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성도입니다.
 이미아 (IP:122.♡.181.188)17-11-23 23:26 
209강-YouTube강의(성령이 임한 자)1701107-이 근호 목사 

  

제 209강, 제목은 ‘성령이 임한 자’입니다. 보통 성령이 임했다 할 때, 사람들은 뭘 살피느냐 하면 그 사람이 어떻게 달라졌느냐, 행동이 달라지고, 태도가 얼마나 경건 하냐, 거룩하냐, 그런 윤리적인 접근을 하면서 관찰하면서 성령 받았다, 안 받았다는 것을 측정하려고 해요. 

  

그리고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게 되면 성령 임한 자에게는 어떤 특징이 나타나는데 그게 성령의 열매가 나타난다는 겁니다. 온유와 화평과 양선과 자비와 형제우애.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자꾸 뭐 의도적인 것은 모르겠습니다마는, 몰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사람들이 놓치는 것이 있어요. 

  

갈라디아서 5장에 그런 말씀이 나오는데, 놓치는 것이 뭐냐 하면 성령이 임한 자에게는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가 나온다고 말할 게 아니고, 성령이 임한 자는 육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그게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게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 육체의 일은 현저하다. 육체의 일에 대해서 간파가 된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이게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19절에 나오는 말씀에 근거해서 그 다음에 유명한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22절부터 이렇게 돼야 돼요. 그게 두 짝이 다 나와야 해요. 두 짝이 다. 육체의 열매는 이것이고 성령의 열매는 이것이다, 라고 다 나와서 나는 지금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면 안 되고, 내가 이렇다고 하면 안 되고, 그건 성령을 받은 사람이 아니에요. 

  

내가 전에는 육신의 일이었고, 그렇게 했는데 주께서 이렇게 하셨다고, 주님께서 어떤 작용을 했기에 이렇게 내가 달라졌는가를,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나와야 돼요. 그 일이 갈라디아서 5장 24절 끝부분에 나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나니, 라고 해서 십자가가 살아야 되는 겁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있기 이전에 나보다 더 생생하게 십자가가 살아서 움직이는 겁니다. 

  

그 십자가 막대기잖아요? 막대기가 살아서 움직인다고 하면 이상하잖아요? 그러니까 그 십자가 지신 그 사건의 위력에 우리는 하나의 결과물로만 있을 뿐이지, 결과물을 가지고 그 십자가를 온통 가려버리면 안 되는 겁니다. 그게 놀랍게도 육신의 열매가 돼요. 육신의 열매가 그런 겁니다. 성령의 열매라고 하면서 그걸 자기하고 결부시키는 그것이 육체의 열매가 된다니까요.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정과 육체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면 뭐부터 살펴야 하느냐 하면 내가 갖고 있던 정, 나의 근본적인 육신의 욕정과 욕심이, 내가 성경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것도 전부 욕심에 해당된다는 것을 인정해줘야 됩니다. 그게 중요한 문제에요. 내가 성령의 열매로 천당 가려고 하는 것은 욕심 아닙니까? 그것도 욕심이 되는 거예요. 

  

내가 기대하는 것이 따로 있고 그걸 십자가 이용해서 채우겠다고 하는 것도 욕심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죽은 게 아니에요. 이거는. 정과 욕심이 죽은 게 아니라니까요. 육체의 일의 근거는 뭐냐 하면, 나는 죽기 싫다고 하는 것이 육신의 일이에요. 나는 더 살아야 되겠다는 것이 육체의 일입니다. 인간이 자기존재 증대를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지금보다 더 큰 존재자가 되겠다는 것을 기피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육체의 열매를 계속해서 뽑아내고 있는 겁니다. 심지어 그 일 조차도 본인의 일이 아니고 십자가가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십자가가 눈에 안 보이지만, 성령의 열매 맺는 사람과 육체의 열매 맺는 사람이 분명히 구분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통해서,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할 게 아니고, 그 배후에 십자가가 실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그걸 보셔야 돼요.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의 특징은 나, 이런 인간이라고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고, 나, 육신의 욕심이 있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나를 매일같이 잡아 죽이더라. 주님께서 십자가를 가지고 날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더라. 십자가 작용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성령은 받은 사람이에요. 

  

그렇지 않고 십자가를 이용하는 사람은 자기를 알아달라고 남한테 떠벌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 보통 사람 아니다. 나 알아 도! 나는 부활의 새 생명이 역사하는 사람이니까, 내가 얼마나 착해졌고 내가 얼마나 경건해졌고 얼마나 주의 온유와 화평과 자비, 뭐 이런 것들을 양산하고 있는지. 그런 살아있는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그게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육체의 열매, 더러운 것들이에요. 그게 더러운 것들. 

  

왜? 자기가 생생하게 살아있으니까. 자기는 죽고 십자가가 살아나야 하는데, 이거는 자꾸 십자가가 자기 살아나는 것에 급급하다보니까 십자가는 자꾸 사라지고 나, 잘났음을 자꾸 앞장세우니까 그게 바로 교회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거예요. 교회 자체가 뭐 지옥이지만. 분란을 일으키는 인간들이 아닙니까? 

  

자, 그렇다면 실제로 성령 받은 사도바울은 어떻게 살았는가,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가, 사도행전 19절 14절, 1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4절,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그러니까 어떤 일을 행했는가 하면, 13절에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 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이런 식으로 시험적으로 한 거예요. 이렇게 자꾸 해보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같은 일을 행한 거예요. 이거 가짜죠. 스게와의 일곱 아들. 아들도 또 많이 낳았어요. 15절,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자, 사도바울은 성령을 받았어요.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은 나, 성령 받았다고 떠벌리는 것이 성령 받은 것이 아니고, 어느 쪽에서 알아주느냐 하면 영의 세계에서 알아줘요. 

  

악마가 이야기하기를 “나는 예수는 아는데 바울은 나 몰라. 바울은 자기가 사도라고 남한테 사기치고 돌아다니는 인간이잖아.”라고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뭐라고 해요? “예수도 알고 나는 바울도 안다.” 예수도 알고 바울도 내가 안다는 거예요. 지금 사도의 사도됨을 마귀나라에서 보증해주고 있는 거예요. 지금 사도바울이 나, 성령 받았다고 떠벌리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도바울이 사도라고 하는 것은 온 우주가 다 아는 겁니다. 온 우주가. 그러니까 제 말은 성령 받았다는 말은 사람들이 사적으로 사도에 대해서 어떻게 무시하고 하는 그것에 신경 쓸 게 아니고, 성령 받은 사람은 사람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잔챙이들을 상대할 문제가 아니라 이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처음에는 좋았다고 하다가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구나, 해서 삐져가지고 다 돌아갔잖아요. 오병이어 기적을 베풀 때는 좋다고 하다가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고 하니까, 어렵도다! 하면서 다 가버렸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의 평가에 같이 말려들고 현혹되면 안 돼요. 적어도 성령 받은 사람만큼은 누가 아느냐 하면 악마도 알아요. 마귀도 알고. 그럼 이 말은 뭐냐 하면 성령 받은 사람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평가에 주눅 들지 말고, 주님이 시키는 대로 꾸준히 자기 일만 하면 돼요. 꾸준히. 해놓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설교해놓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은혜 받았을까? 숫자 계산하고 쪽수 헤아리지 말고. 

  

뭐,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아무도 없었잖아요. 아무도 없으면 주의 일 아닙니까? 마귀가 알고 있는데. 무덤가에 있는 귀신 들린 자는 다른 사람들은 못 알아보는데 그 귀신들린 자는 알잖아요. “예수여! 내가 당신을 압니다. 우리를 멸하러왔군요.”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보증이나 증명을 받지 않는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먼저 인간들을 알기 때문에. 바로 그 마음이 사도에게 그대로 들어갔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어떤 경우라도 주님의 지시만 받았지 사람들의 평가에 놀아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주의 지시를 따라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