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강-YouTube강의(시간과 시대상)180102-이 근호 목사
제 217강, 제목은 ‘시간과 시대상’입니다. 사람이, 본인이 사는 세상을 시대라, 본인이 있는 세상을 시대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느 인간이든 자기의 시대상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이유는 사람이 외부환경을 이용해야 본인이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걸 적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적응한다. 그래서 인간은 혼자 못살고 자기한테 힘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려고 하죠.
그것도 적응하는 하나의 방식이 돼요. 너무 외톨이로 살게 되면 안 되니까. 그래서 그 시대상에 대해서 인간은 잔뜩 기대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자기가 어떤 나라에서 살게 되었는데 그 나라가 갈수록 잘 살게 된다, 그러면 신나죠. 인간은. 잘 사는 나라의 일부니까 덩달아 자기가 편하게 살고 여유 있게 살 수 있습니다.
근데 그 나라가 정치적으로 어지럽고, 싸우고, 국민소득이 떨어지고,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민 갈 생각을 하겠죠. 자기가 속해있는 시대상이 허망하기 때문에, 자기 모습을 유지하는데 손해가 되기 때문에. 창세기 41장에 보면 요셉이 등장하고 그 요셉 주변에 요셉의 시대상이 나옵니다. 그 요셉이 있는 나라가 바로 애굽 나라고, 그 나라의 통치자가 바로입니다.
근데 이 바로라는 시대상에 요셉이 있을 때에 사람들의 관심사는 요셉이 그 바로의 막강한 나라 앞에서 어떻게 힘들어서 살겠느냐, 라고 생각을 하겠죠. 근데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꿈을 주셨을 때, 여기서 또 우리는 생각을 해요. 하나님이 주신 꿈이 더 세고 넓은가, 아니면 요셉이 바라보고 있는 애굽 나라의 권세나 왕의 권세가 더 센가, 어느 쪽이 세냐를 생각하게 돼요.
성경을 안 본 사람은 지금 인간이 그냥 꿈을 꾼 것뿐이니까, 개인보다는 국가통치자가 더 힘이 셀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죠. 그런데 성경이 왜 있겠습니까? 성경에 보니까 그 바로 왕이 꿈을 꿉니다. 바로 왕이 꿈을 꾸고 꿈의 해몽이 안 되는 순간 이제는 권세에 역전이 일어나는 거죠.
그 바로 왕이 통치하는 나라에 그냥 미미한 한 개인에 지나지 않는 이 요셉이 바로 왕의 꿈을 해몽함으로서, 드디어 이제는 누가 누구를 기대고 의지해야 하느냐 하면 바로 왕이 요셉에게 기대서 빌어먹게 되어 있어요. 역전이 일어난 겁니다.
이와 같은 비슷한 예가 바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과 다니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신약에 오게 되면 성도가 그러한 자리에 있다는 거예요. 세상의 권세자보다, 심지어 천사들도 부러워할 정도의 자리가 성도기 때문에, 성도끼리는 재판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흔히 말해서 재판장이 최고인데, 재판장을 그야말로 내려다볼 수 있는 천사의 안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너희끼리 무슨 고소를 하느냐, 고소하고 고발할 필요가 없다. 누구의 힘에 기댈 필요가 없다. 이런 식으로 하거든요. 이게 구약 때부터 줄곧 내려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시대상이 점차 발전할 때 사람들은 좋아하겠죠. 이러한 시대상에 애굽의 통치자 바로 왕이 무엇에 이제 몸달아하느냐 하면, 자기가 통치하는 나라가 앞으로 잘 될 것인가, 바짝 기대를 하고 있잖아요.
올해가 2018년도 초반인데, 초반에 올해는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을 억지로라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제목을 시간과 시대상이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앞으로 흘러가게 되면 못되는 것보다 잘될 것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데, 과연 인간의 마음대로 되느냐 아니면 인간의 마음이 아닌 또 다른 누구의 마음으로 그렇게 되느냐 하는 것은 창세기 41장,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볼 필요가 있어요.
꿈을 꿉니다. 바로가 꿈을 꾸는데, 꿈에 보니까 처음에는 아름답고 살진 암소 일곱 마리가 나왔다. 그 뒤에 곧장 흉악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서 그 소와 함께 하수가에 있더니 흉악하고 파리한 소가 그 아름답고 살진 소를 먹은지라.
소는 원래 채식동물인데 소가 소를 먹어버리니까 이건 얼마나 짜릿하고 무시무시한 공포스러운 상황이죠. 그 꿈을 바로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소가 소를 잡아먹다니! 사자라면 몰라도, 풀을 뜯어먹는 소가 다른 고기를 잡아먹었을 때 얼마나 충격이 컸겠습니까? 잊을 수가 없죠.
또 꿈을 꿨는데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뒤에 또 세약하고 동풍에 마른 이삭이 나오더니 그 세약하고 마른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켜버렸어요. 자, 신하들을 불렀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시대상은 반드시 미래의 낙관을 기대한다고 했죠.
그래서 이 꿈이 해몽이 안 되면, 이 시대상, 자기가 속해 있는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죠. 여기서 이제 이 꿈을 해몽하는데 어느 누구도 나설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게 그냥 꿈의 해몽으로 끝날 것 같으면 구라를 쳐서라도 돼요. 근데 이게 현실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보장이 있어야 돼요.
그럼 이 꿈의 해석을 누가 하겠어요? 이 꿈을 꾸게 한, 인간을 초월한 어떤 분이 있어서 그 분이, 이미 앞일을 다 내다보시는 그 분, 내다보는 정도가 아니죠. 그 분의 뜻대로 세상을 운영해나가시는 그 분이 꿈을 집어넣었기에, 문제를 출제한 그 분만이 해답을 갖고 있는 거예요.
누가 나섭니까? 나서다가 틀려버리면 죽는데? 책임져요? 인간이 내일 일을 책임질 수 있단 말입니까? 못 지죠. 그런데 여기에 요셉이 개입합니다. 요셉이 개입해서, 우리가 알다시피 칠년 대 풍년 이후에 칠년 대 흉년이 옵니다, 라고 해석을 할 수가 있어요.
이걸 보면서 사람들은 나 같았었어도 그렇게 해석을 하겠다고 하는데, 문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해석을 좋게 하고 나쁘게 하고의 문제가 아니고 그게 실제 돌아가는 것하고 일치가 되어야 된다 이 말이죠. 칠년이니까, 칠년 기다렸다가 안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 사기꾼 능지처참 할 거다 이 말이죠. 죽여 버린다 이 말이죠.
자기 목숨 걸고 꿈을 해석할 그런 용기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없어요. 무당도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칠년 동안 붙잡혀 있어야 돼요. 맞는지 안 맞는지 확인 작업에 들어가야 하니까.
그래서 이렇게 했을 때 여기 창세기 41장에서 보면, 풍년과 흉년의 교차에 의해 실질적으로 이득을 얻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가 아니고 요셉이 우선입니다. 요셉의 지위가 저 바닥에서부터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갑니다. 그러면 이 바로의 모든 권력은 사실은 바로가 쥐고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초점이 모아지고 응집이 되겠어요? 요셉한테 응집이 되겠죠. 모아지겠죠.
그게 하나님께서 꿈을 줬던 이유입니다. 요셉 배후에 누가 있느냐 하면 야곱 언약에 의해서 살아야 될, 인도함을 받아야 될 자기 아버지 어머니, 본 어머니 라헬은 죽었지만 레아는 있잖아요. 그리고 열 한 형제가 있습니다. 이들은 언약의 공동체에요.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복음을 담고 있습니다.
애굽 나라를 위해서 바로에게 꿈을 준 게 아니고, 그 애굽 나라에 개입된 요셉의 가정, 몇 명 되지 않아요. 70명밖에 안 되는 그 가정을 위해서 이 계시가 주어졌고, 그 계시가 주어진, 집중되는 그 지점에 요셉이 있어요.
그래서 창세기 41장을 다시 보게 되면, 소출이 심히 많은 뒤에 50절에 보게 되면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을 낳되 곧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 낳은지라” 51절, “요셉이 그 장자의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므낫세 라는 뜻이 뭐냐 하면 잊어버렸다. 자신의 모든 고생은 잊어버리고 이제는 안식의 들어갔다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고생 많은 성도의 마지막 모습이 꿈같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이 고생을 마감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열 두 아들 중에 므낫세이라는 그 이름을 차용해서, 하나님께서 꿈이라는 칠년 풍년, 칠년 흉년을 이 현실 바닥에 일으켜주셨습니다. 그러면 이 현실은 누굴 위한 현실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한 자녀의 현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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