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지식과 진리,세상 달리보기 18020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2. 8. 08:40
018-02-06 23:46:38조회 : 33         
유튜브 강의 (220강. 221강) 지식과 진리, 세상 달리보기 180206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220강     음성               동영상


221강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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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8.64)18-02-07 20:50 
220강-YouTube강의(지식과 진리)180206-이 근호 목사 

제 220강, 제목은 ‘지식과 진리’입니다. 세상에서는 지식과 진리, 둘 다를 같은 것으로 봐요. 지식이 모아지면 진리가 된다. 이 세상에서는 인간이, 이 자연의 원칙을 뽑아서 자기 생존하는데 얼마나 편리한가, 거기에 몰두하게 됩니다. 생활하는데 필요하다는 말은 자기 몸이 편해지는데 있어서 어떻게 좀 더 편해질까? 손으로 하는 것을 기계로 하고 기계로 하는 것을 로봇이 하는 이런 식으로. 계속 그걸 하려면 고도의 지식이 필요하잖아요.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 관절이 아프다, 그리고 위가 좀 메스껍다, 이럴 때는 의학지식이 동원되어가지고 수술할 것은 수술하고 고칠 것은 고치고, 그렇게 되면 우리 몸이 편하잖아요. 세상의 모든 지식은 인간들이 자기 몸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동원된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지식이라는 것이 왜 이렇게 계속 세분화되고 복잡하게 되느냐 하면, 그만큼 세상사는 것이 인간 마음먹은 대로 안 된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인간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은 인간의 의도와 이 자연의 의도가 같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뻑뻑하게 돌아가죠. 우리가 알다시피 성경의 의도는 예수님을 위해서 있는 건데, 인간들은 자기를 위해서 자기가 살고 있잖아요. 내가 죽어서 어디에 가는지 그거는 나중 문제고, 지금 당장 자기 몸이 편하고 컨디션이 좋고 하는 거기에 대해서 가만히 놀고 있지 않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세상은 저주 속에 있고 인간은 죽어야 마땅하지만, 인간이 그렇다고 해서 고통 속에서 불편한데 마냥 손 놓고 있을 인간들이 아닙니다. 몸부림을 치죠. 그래서 인간들이 하는 지식을 많이 확보하면 할수록 인간의 몸이 편하니까, 그 몸 편한 것을 가지고 행복이라고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행복이라고. 

자, 문제는 방향이 내가 이 세상에서 행복하다, 행복해지겠다는 그 의도자체가, 인간을 이 세상에 만드시고 그들로 하여금 고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와 이게 일치가 되지를 않아요. 하나님의 뜻은 고생하라고 인간을 만들어놨는데, 인간은 고생 못하겠다는 겁니다. 이왕 뭐 죽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될지, 그건 나중 문제고 지금은 무조건 편해야 되고 행복해야 되겠다는 거예요. 뭐 행복해야 되겠죠.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모든 동물도 그런 거니까요. 푹신한 침대가 좋지 돌 침대에 누울 사람은 별로 없지 않습니까? 몸이 아픈데. 

그런데 목적을 자기 행복에 두다보니까, 이 지식이 늘어난 만큼 무엇과 멀어지느냐 하면, 원래 인간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세상은 누가 만들었는지, 왜 만들었는지, 그러한 내용과 점점 더 이게 각도가 벌어지는 거예요. 멀리 가는 거예요. 지식이 쌓임으로써 진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진리가 뭐냐, 이거는 요한복음 14장 6절에 잘 나와 있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되어 있잖아요. 예수님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기 원래의 목적, 자기 행복과, 행복이라는 것은 뭐냐 자기 몸이 편한 것, 걱정 덜 하는 것, 그것과 연관되어서 예수님을 믿고자 하게 되면 자기 방향은 포기 안 하고 예수님 보고 일방적으로 자기가 지향하고, 자기고 노리고 있고, 자기가 원하고 있는 그 길로 강제로 잡아 땡기다보니까 이 예수가 가짜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서는 ‘다른 예수’라고 해요. 예수는 붙는데 그 내용은 진짜 예수님이 아니고 다른 예수에요. 이 땅에 오실 그 예수님이 아니고, 행복을 위해서 인간들이 모아서 고안해낸, 상상해낸 다른 예수를 그 다음부터는 유포하게 되는 겁니다. 참, 유포하는 이게 문제에요. 유포할 때, 유포가 잘 되는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들은 본래 자기 몸이 편하고 행복한 게 우선이기 때문에, “나는 고생해도 마땅해.”라는 이런 사람이 없잖아요. “나는 저주받아도 합당하다.” 뭐 이런 사람이 없다 이 말이죠. 세상은 악하더라도 자기만큼은 이렇게 특별대우해주기를 바라는 그런 심보 때문에 진짜 예수님의 이야기도 안 듣고 가짜 예수만 자꾸 양산이 되고, 유포라는 것은 전염병 같은 거라서 계속 확장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가짜 예수, 다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걸 넓은 길이라고 하고, 진짜 예수님은 찾는 사람이 적으니까 이게 좁은 길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 선택한 길은 넓은 길이고 주님의 의해서 선택된 길은 좁은 길이고. 좁은 길은 내가 어떻게 행복 하냐, 내가 어떻게 평안 하냐, 에는 관심이 없고 주님이 어느 쪽으로 가셨는가에 관심 있는 것이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에요. 

주님이 어느 쪽으로 가셨는가? 주님 가신 길, 주님 가신 길은 십자가 지신 분이 가신 길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대다수의 생각과 틀어지게 마련이거든요. 동의를 안 받은 길이라 이 말이죠. 인간이 호응이 안 되는 그 길이에요. 따라서 그 길을 우리가 알아서 간다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안 되고, 주님의 영이 오시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집단으로 가는, 큰 규모로 가는 그 대열에서 어깨를 탁탁 치죠. 거기서 따로 뽑아내는 식으로 좁은 길로 가는 겁니다. 뽑아내는 식으로. 

그렇게 거기서 빠져나온 길을 다시 돌아보면 큰 대열을 이루고 있는 저쪽은, 사실은 예수님,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다 껍데기고, 실제로는 그들의 타고난 행복과 자신의 번영과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가는 그 많은 집단인 것을 알면서, 자기는 십자가의 길, 진리의 길로 주께서 이끄시는 겁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겁니다. 자기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끌어가죠. 

자, 그렇게 좁은 길로 가는 사람에 대해서 누가 눈치를 채느냐 하면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 눈치를 채게 됩니다. 넓은 길로 그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께 대드는 악마의 마음으로 전체가 하나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악마는 귀신같이 알아요. 누가 성령 받았는지를 귀신같이 압니다. 알아서 유인해요. 어떻게 유인하느냐 하면 협박공갈로 유인합니다. 

“네가 그쪽으로 가게 되면 너는 왕따 당한다. 너는 사람한테 인정 못 받아. 모든 사람을 널  이단이라고 해도 좋아?” 이런 식으로. “그렇게 하면 가족과 떨어지게 되는데? 남하고 소통이 안 되면 너는 외톨이가 되는 거야.”라는 이런 식으로 쭉 나오는데, 자 외톨이, 소외, 왕따, 이런 것들이 그쪽 세계에서는 무기가 돼요. 왜냐하면 그쪽 세계에서는 사람이 행복해야 되니까. 그 사람은 행복이 목적이니까. 외로우면 안 되기 때문에. 생각이 같아야 사는 맛을 느낀다고 여기는 사람들이거든요. 

한 가족이 되었으면 한 마음으로 호호! 하하! 웃어야 이게 가정의행복이라고 여기는 그쪽이거든요. 명절 때 시댁에 가면. 무조건 모여야 돼요. 무조건 하하! 호호! 해야 돼요. 그게 협박공갈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런데 섞이게 되면 맞지도 않을뿐더러 분위기가 싸해지죠. 웃을 때 같이 안 웃고 또 슬플 때 같이 슬퍼하지도 안 해요. 

그쪽은 지식을 노동으로 모아야 되지만, 이쪽은 뭐냐 하면 진리라는 것은 이끄시는 것이니까 주님으로부터 계속 공급이 되는 겁니다.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저쪽에서는 내가 행복한 것이 인생보람이고 이쪽의 진리 쪽은 주님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행복이에요. 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죽어도 괜찮은 정도의 관계가 유지된다는 것이 그게 행복이 되는 겁니다. 이런 사람한테는 어떤 힘도, 협박공갈이 통하지 않는 그런 길. 

그래서 이 진리의 특징은 이게 미완성도 아니고 완성된, 풍선같이 이미 완성된 풍선 속에, 우리 안에 노아방주처럼 이미 들어있는 것이지. 진리 안에 들어있어서 같이 굴러가는 것이고, 저쪽은 계속 캐내야 하는 거예요. 비트코인처럼 계속 캐내야 해야 해요. 전깃값 많이 올라가죠. 캐내지도 않는데. 계속 캐내고 모으고 캐내고 이만큼 모으고 또 캐내고 모으고. 이렇게 많이 모으면 재벌이고 적게 모으면 거지되고. 얼마나 이게 불안정합니까? 그리고 미완성이고. 

이쪽은 다 잃어도 괜찮아요. 강도처럼. 구원받은 강도처럼. 그게 바로 지식과 진리가 대치된다는 것. 여기가 무슨 동네죠? 대치동입니다. 예, 대치동입니다.

 이미아 (IP:122.♡.178.64)18-02-07 20:51 
221강-YouTube강의(세상달리보기)180206-이 근호 목사 

이번에는 221강, 제목은 ‘세상달리보기’입니다. 세상을 달리 본다는 것, 우리는 개인적으로 세상을 달리 보게 될 생각을 하게 되죠. 어떤 과학세계나 이런 학문의 세계에서 남보다 앞서려면, 유명잡지에 논문이 실리려면 항상 창의력 있게 달리보기를 해줘야 사람들에게 확 관심을 끌어서 뭐 노벨상도 받고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 달리 보는 것은, 달리 봐 봐야 후배들이 그것보다 더 달리보기로 나오게 되면, 결국 달리보기라고 했지만 맨 지평위에서 자기가 발 딛지 않는, 뭐 다른 데에 발을 딛는 것밖에는 안 돼요. 소위 탐험가라고 하죠. 오늘날에는 탐험가가 별로 없어요. 왜냐하면 거의 답습을 다 했거든요. 인간의 발길이 안 닿은 곳이 없습니다. 

5대양6대륙이니 전부 다 미납될 여지가 없어요. 이제 남은 것은 누가 빨리 더 높은 데를 산소통 없이 올라가는가, 그런 것만 남아있고. 맨손으로 어디 가기 뭐 이런 것이지. 남아있는 종족은 없습니다. 다 들쑤셔놨어요. 심심하니까 온 우주를 다 찾아가는 겁니다. 오즈의 마법사는 있지만 오지의 마법사는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들끼리 서로가 서로를 비교해서 난 달리 본다고 하는 이런 것은 나중에 세월만 지나면 이건 달리 본 게 아니고, 그만큼 지식이 모자란 것이 돼버려요. 그러면 달리보기에 전형적인 것, 모델이 누구냐,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세상보기가 정말 달리보기에요. 특히 신학에서 뭔가 멋진 것 새로운 것 하는데, 그것도 세상적인 이성의 달리보기이기 때문에 그것은 주님가지고 장난치는 것입니다. 신학 한다는 사람들이. 

삼위일체 이런 것. 삼위일체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단이야기를 할 때 삼위일체 이야기했잖아요. 이단이 무엇이냐, 삼위일체 안 믿는 것이 이단이라고요. 그러면 삼위일체 믿고 다들 지옥가세요. 삼위일체 잘 믿고 다 지옥가면 돼요. 주님께서 삼위일체 이야기 안 했잖아요. 구원의 능력은 예수님의 피에 있지 삼위일체에 있는 게 아니거든요. 

사도바울이 십자가 증거 했잖아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했잖아요. 나는 삼위일체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다고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죠. 보세요. 얼마나 속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그러니까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마귀들이 그렇게 들고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가 만든 삼위일체는 어떻게 되느냐? 그 가치를 왜 무시하느냐?”라고 이렇게 나온다고요. 삼위일체는 달리보기가 아닙니다. 인간들이 구원욕구를 맞추기 위해서 이성적으로 만들어낸 거예요. 역사적으로. 

그러면 예수님의 달리보기는 여러 가지고 있지만, 누가복음 4장 24절에 보면 나옵니다. 거기부터 쭉 읽어볼게요.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절,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절,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라고 되어 있어요. 

참, 이게 이상한 거죠. 27절,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부심이 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의 기적을 받은 유일한 민족이라는 거죠. 하나님의 기적을. 

하나님의 기적을 누가 줬다? 우리 이스라엘에게 줬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달리보기는 뭐냐 하면 통째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적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말고 다른 이방민족들이 세상 보는 것하고 다르게, 우리는 전체로, 전체로 달리보기가 지금 성립이 된다고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우리는 기적을 받았다는 겁니다. 이 민족이. 유대민족이. 그쪽 이방민족에는 기적이 없었으니까 우리야말로 정말 세상을 볼 때 달리 볼 수 있다. 이래 볼 수 있는 겁니다. 

근데 예수님의 뜻은 그게 아니고, 우리가 뭘 받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모든 사람들에게 흉년이 들었지만은 엘리야가 간 사람은 오직 사렙다 한 과부에게만 갔다는 거예요. 가뭄이 들었으면 가뭄 든 사람이 뭘 요청하겠습니까? “신이시여 우리에게 가뭄을 해소해주옵소서.”라고 요청을 하겠죠. 

그러면 그들은 뭘 기다리겠어요? 저쪽 이방민족에게 말고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우리 민족에게 전체가 같이 합세되어서 달리보기, “우리는 가뭄 속에서도 기적 받았다.”라고 달리보기가 되게 해달라고, 그들의 요청함에 대해서 하나님이 요청을 들어주는 관계를, 그들은 다른 민족과는 달리 하나님의 달리보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보내신 입장에서의 달리보기가 이 세상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다 가뭄 들었어요. 다 어려워요. 사는 게. 다 물이 필요한 곳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누구에게만 갔어요? 모든 사람에게 가지 않고 오직 한 사람에게 들어갔습니다. 오직 한 사람. 그런데 그 한 사람이 요청했습니까? ‘이쯤 돼서 엘리야가 올 때가 됐는데?’ 이랬습니까? 없죠. 정말 뭐가 달리보기냐 하면, 안 와도 됐는데 오셨다가 그게 달리보기의 본질이라는 겁니다. 그게 진수라는 거예요. 

나 같은 인간은 구원 안 해줘도, “구원 해주세요.”가 아니라 반대로 이야기해야 돼요. “왜 다른 사람한테 가시지 왜 저를 구원해주십니까? 저를 왜 천국 보내십니까?”라는 달리보기. 이런 사람에게는 돈 없다고 징징거리고 아프다고 징징거리고, 세상 혼탁하고, 뭐 자식문제, 가정문제 때문에 징징거릴 필요조차 없어요. 

그거는 망해도 당연한 거니까. 문제가 뭐가 문제냐 하면 “안 와도 되는데 저한테 뭘 보시고, 뭘 기대할 게 있어가지고 저를,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필이면 그걸 다 제키고 저한테 오십니까?”라는 인식. 이게 달리보기입니다. 이 세상 달리보기. 참 특이하죠. 

이건 문둥병도 마찬가지죠. 엘리사 시대 때 문둥병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문둥병자들이 얼마나 자기들에게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기를 원했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기도한다고, 철야한다고, 금요철야기도하고, 금식하고, 중보기도 한다고, 뭐 그걸 들어줄 의무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요청하고 달라하는 그것이 달리보기가 안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우리하고 서로 아는 사이니까 봐주세요.”라고 이런 식으로 한다는 이것은 양아치나 깡패들이 하는 짓이죠. 교회깡패. 열성 있는 양아치들. 자기가 기도빨 좀 응답받았다 이거죠. 그만큼 노는 사람들이에요. 교회에서 노는 사람들. 교회놀이하고 노는 사람들. 권위행세하고 힘깨나 쓰는 사람들, 말빨이나 쓰는 사람들. 

그러나 엘리사에게 간 사람은 유대나라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했습니다. 시리아 사람, 수리아 사람, 요새 말로 하면 아람사람입니다. 수리아 사람 나아만 에게만 낫게 했다는 겁니다. 오히려 게하시는 낫기는커녕 멀쩡한 인간이 문둥병자 됐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거예요? 너희들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고, 가뭄에서 숨통 트일 자격이나 권한이 없고, 문둥병에서 나을 수 있는 어떤 권리나 그러한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런 입장이, 저주받아 마땅한 입장이 나라는 것, 이것이 바로 나에 대해서, 내가 전에 보던 나를 달리보기고, 그것이 예수님이 새롭게 보여주는 겁니다. 안 돌아가셔도 되는데, 나 구원하겠다고 피를 흘려서 돌아가셨으니, 우리가 그 십자가 앞에서 무슨 말을 더 하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