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강-YouTube강의(지식과 진리)180206-이 근호 목사
제 220강, 제목은 ‘지식과 진리’입니다. 세상에서는 지식과 진리, 둘 다를 같은 것으로 봐요. 지식이 모아지면 진리가 된다. 이 세상에서는 인간이, 이 자연의 원칙을 뽑아서 자기 생존하는데 얼마나 편리한가, 거기에 몰두하게 됩니다. 생활하는데 필요하다는 말은 자기 몸이 편해지는데 있어서 어떻게 좀 더 편해질까? 손으로 하는 것을 기계로 하고 기계로 하는 것을 로봇이 하는 이런 식으로. 계속 그걸 하려면 고도의 지식이 필요하잖아요.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 관절이 아프다, 그리고 위가 좀 메스껍다, 이럴 때는 의학지식이 동원되어가지고 수술할 것은 수술하고 고칠 것은 고치고, 그렇게 되면 우리 몸이 편하잖아요. 세상의 모든 지식은 인간들이 자기 몸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동원된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지식이라는 것이 왜 이렇게 계속 세분화되고 복잡하게 되느냐 하면, 그만큼 세상사는 것이 인간 마음먹은 대로 안 된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인간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은 인간의 의도와 이 자연의 의도가 같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뻑뻑하게 돌아가죠. 우리가 알다시피 성경의 의도는 예수님을 위해서 있는 건데, 인간들은 자기를 위해서 자기가 살고 있잖아요. 내가 죽어서 어디에 가는지 그거는 나중 문제고, 지금 당장 자기 몸이 편하고 컨디션이 좋고 하는 거기에 대해서 가만히 놀고 있지 않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세상은 저주 속에 있고 인간은 죽어야 마땅하지만, 인간이 그렇다고 해서 고통 속에서 불편한데 마냥 손 놓고 있을 인간들이 아닙니다. 몸부림을 치죠. 그래서 인간들이 하는 지식을 많이 확보하면 할수록 인간의 몸이 편하니까, 그 몸 편한 것을 가지고 행복이라고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행복이라고.
자, 문제는 방향이 내가 이 세상에서 행복하다, 행복해지겠다는 그 의도자체가, 인간을 이 세상에 만드시고 그들로 하여금 고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와 이게 일치가 되지를 않아요. 하나님의 뜻은 고생하라고 인간을 만들어놨는데, 인간은 고생 못하겠다는 겁니다. 이왕 뭐 죽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될지, 그건 나중 문제고 지금은 무조건 편해야 되고 행복해야 되겠다는 거예요. 뭐 행복해야 되겠죠.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모든 동물도 그런 거니까요. 푹신한 침대가 좋지 돌 침대에 누울 사람은 별로 없지 않습니까? 몸이 아픈데.
그런데 목적을 자기 행복에 두다보니까, 이 지식이 늘어난 만큼 무엇과 멀어지느냐 하면, 원래 인간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세상은 누가 만들었는지, 왜 만들었는지, 그러한 내용과 점점 더 이게 각도가 벌어지는 거예요. 멀리 가는 거예요. 지식이 쌓임으로써 진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진리가 뭐냐, 이거는 요한복음 14장 6절에 잘 나와 있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되어 있잖아요. 예수님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기 원래의 목적, 자기 행복과, 행복이라는 것은 뭐냐 자기 몸이 편한 것, 걱정 덜 하는 것, 그것과 연관되어서 예수님을 믿고자 하게 되면 자기 방향은 포기 안 하고 예수님 보고 일방적으로 자기가 지향하고, 자기고 노리고 있고, 자기가 원하고 있는 그 길로 강제로 잡아 땡기다보니까 이 예수가 가짜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서는 ‘다른 예수’라고 해요. 예수는 붙는데 그 내용은 진짜 예수님이 아니고 다른 예수에요. 이 땅에 오실 그 예수님이 아니고, 행복을 위해서 인간들이 모아서 고안해낸, 상상해낸 다른 예수를 그 다음부터는 유포하게 되는 겁니다. 참, 유포하는 이게 문제에요. 유포할 때, 유포가 잘 되는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들은 본래 자기 몸이 편하고 행복한 게 우선이기 때문에, “나는 고생해도 마땅해.”라는 이런 사람이 없잖아요. “나는 저주받아도 합당하다.” 뭐 이런 사람이 없다 이 말이죠. 세상은 악하더라도 자기만큼은 이렇게 특별대우해주기를 바라는 그런 심보 때문에 진짜 예수님의 이야기도 안 듣고 가짜 예수만 자꾸 양산이 되고, 유포라는 것은 전염병 같은 거라서 계속 확장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가짜 예수, 다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걸 넓은 길이라고 하고, 진짜 예수님은 찾는 사람이 적으니까 이게 좁은 길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 선택한 길은 넓은 길이고 주님의 의해서 선택된 길은 좁은 길이고. 좁은 길은 내가 어떻게 행복 하냐, 내가 어떻게 평안 하냐, 에는 관심이 없고 주님이 어느 쪽으로 가셨는가에 관심 있는 것이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에요.
주님이 어느 쪽으로 가셨는가? 주님 가신 길, 주님 가신 길은 십자가 지신 분이 가신 길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대다수의 생각과 틀어지게 마련이거든요. 동의를 안 받은 길이라 이 말이죠. 인간이 호응이 안 되는 그 길이에요. 따라서 그 길을 우리가 알아서 간다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안 되고, 주님의 영이 오시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집단으로 가는, 큰 규모로 가는 그 대열에서 어깨를 탁탁 치죠. 거기서 따로 뽑아내는 식으로 좁은 길로 가는 겁니다. 뽑아내는 식으로.
그렇게 거기서 빠져나온 길을 다시 돌아보면 큰 대열을 이루고 있는 저쪽은, 사실은 예수님,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다 껍데기고, 실제로는 그들의 타고난 행복과 자신의 번영과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가는 그 많은 집단인 것을 알면서, 자기는 십자가의 길, 진리의 길로 주께서 이끄시는 겁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겁니다. 자기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끌어가죠.
자, 그렇게 좁은 길로 가는 사람에 대해서 누가 눈치를 채느냐 하면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 눈치를 채게 됩니다. 넓은 길로 그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께 대드는 악마의 마음으로 전체가 하나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악마는 귀신같이 알아요. 누가 성령 받았는지를 귀신같이 압니다. 알아서 유인해요. 어떻게 유인하느냐 하면 협박공갈로 유인합니다.
“네가 그쪽으로 가게 되면 너는 왕따 당한다. 너는 사람한테 인정 못 받아. 모든 사람을 널 이단이라고 해도 좋아?” 이런 식으로. “그렇게 하면 가족과 떨어지게 되는데? 남하고 소통이 안 되면 너는 외톨이가 되는 거야.”라는 이런 식으로 쭉 나오는데, 자 외톨이, 소외, 왕따, 이런 것들이 그쪽 세계에서는 무기가 돼요. 왜냐하면 그쪽 세계에서는 사람이 행복해야 되니까. 그 사람은 행복이 목적이니까. 외로우면 안 되기 때문에. 생각이 같아야 사는 맛을 느낀다고 여기는 사람들이거든요.
한 가족이 되었으면 한 마음으로 호호! 하하! 웃어야 이게 가정의행복이라고 여기는 그쪽이거든요. 명절 때 시댁에 가면. 무조건 모여야 돼요. 무조건 하하! 호호! 해야 돼요. 그게 협박공갈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런데 섞이게 되면 맞지도 않을뿐더러 분위기가 싸해지죠. 웃을 때 같이 안 웃고 또 슬플 때 같이 슬퍼하지도 안 해요.
그쪽은 지식을 노동으로 모아야 되지만, 이쪽은 뭐냐 하면 진리라는 것은 이끄시는 것이니까 주님으로부터 계속 공급이 되는 겁니다.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저쪽에서는 내가 행복한 것이 인생보람이고 이쪽의 진리 쪽은 주님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행복이에요. 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죽어도 괜찮은 정도의 관계가 유지된다는 것이 그게 행복이 되는 겁니다. 이런 사람한테는 어떤 힘도, 협박공갈이 통하지 않는 그런 길.
그래서 이 진리의 특징은 이게 미완성도 아니고 완성된, 풍선같이 이미 완성된 풍선 속에, 우리 안에 노아방주처럼 이미 들어있는 것이지. 진리 안에 들어있어서 같이 굴러가는 것이고, 저쪽은 계속 캐내야 하는 거예요. 비트코인처럼 계속 캐내야 해야 해요. 전깃값 많이 올라가죠. 캐내지도 않는데. 계속 캐내고 모으고 캐내고 이만큼 모으고 또 캐내고 모으고. 이렇게 많이 모으면 재벌이고 적게 모으면 거지되고. 얼마나 이게 불안정합니까? 그리고 미완성이고.
이쪽은 다 잃어도 괜찮아요. 강도처럼. 구원받은 강도처럼. 그게 바로 지식과 진리가 대치된다는 것. 여기가 무슨 동네죠? 대치동입니다. 예, 대치동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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