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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강의-오류,여기저기 17120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2. 7. 08:25
이미아 (IP:122.♡.181.188)17-12-06 19:00 
212강-YouTube강의(오류)171205-이 근호 목사 

제 212강, 제목은 ‘오류’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오류가 있다는 생각을 미처 못 하죠. 근데 성경은 이야기해줍니다. 인간의 출생자체가 고장 난 성질을 갖고 태어났다는 겁니다. 이것은 시편 51편에 이미 다윗도 그러한 고백을 했는데, 다윗의 고백이 그냥 사적인 고백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언약화 시켰어요. 다윗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윗언약을 통해서 인간은 왜 태어나면서부터 꼭 죽음을 향하여 질주해야 하는가? 그 이유가 다윗언약은 전에 있는 모세언약보다 진전된 내용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다윗언약 다음에 무슨 언약이냐 하면 새 언약이거든요. 새 언약에서는 확실하죠. 인간이 갖고 있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에 하나님 자신이 그 속에 들어왔습니다. 

들어왔는데 그 결과는 무엇이었던가요?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은 그 순간부터 예수님도 예외가 없이 죽게 됩니다. 근데 예수님 죽는 것 하고 다른 사람이 죽는 것하고의 차이점은, 다른 사람은 죽으면서도 죽는 이유를 몰라요. 다만 죽을 때 약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고 좀 오래 살 수 있었는데, 라는 이런 생각이 들죠. 

예를 들면 강도 같은 경우에 “나는 강도짓해서 체포되어가지고 십자가에 달린다.” 그런데 남들 보기에는 그 사람이 죽어야 될 이유는 명백하죠. 나쁜 짓 했으니까 죽잖아요. 근데 강도 입장을 한 번 봅시다. ‘왜 나는 남들처럼 부유한 가정에 못 태어나서 강도짓을 해야 밥 먹고 사는 그런 팔자인가?’ 이걸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이거는 벌써 남들하고 똑같은 환경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불공평하죠. 그러면 이런 불공평한 상황을 누가 조성했습니까? 이거는 강도 본인이 조성한 것이 아니란 말이죠. 왜? 태어날 때부터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보게 될 때, 그런 식으로 따지게 되면, 하나하나 내가 그렇게 살 수밖에 없고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 대해서 본인의 영향력이 끝까지 도달할 수가 없어요. 본인이 다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상당히 억울하지 않습니까? 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병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죠. 요한복음 9장에 나오잖아요. 소경인데, 근데 대번에 제사장들이 하는 말을 좀 보세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저 사람이 소경된 것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이렇게 이야기한다고요. 

그렇게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본인들은 저 사람처럼 소경될 만큼의 죄는 없다고 자부할 경우에만 그런 생각이 들죠.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두고 바리새인들이 “이 여자를 어떻게 할까요?”라고 질문하면서 벌써 돌을 쥐고 있다 이 말이죠. 이거 무슨 자세에요? 이 자세가? “우리는 행동을 똑바로 해서 저 여인을 죽일만한 권한이 있다. 권한을 하나님이 우리한테 줬다.”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이미 이야기했듯이, “비판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너도 도로 비판을 받는 것을 당해볼래?”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으로 처단할 경우에 조건을 달아줬어요. 뭐냐 하면 “죄 없는 자일 경우에만 율법으로 처단시킬 수 있다.” 이래 됩니다. 

그렇게 돼버리면 이 땅에 사는 인간들 가운데서 절대적인 기준이 없지 않느냐? 그렇죠. 인간들 가운데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습니다. 인간들이 판정을 내리는 모든 것은 최종적인 정의아니에요. 저스티스justice, 정의가 아니라 이 말이죠. 정답이 아닌 겁니다. 너도 정답 모르고 나도 정답 모르는 거예요. 

그러나 정답은 모르지만 가는 길이 죽은 길이라는 것은 동일합니다. 십자가에 달렸던, 그냥 호위호식하면서 편하게 눈을 감았던, 그 상태는 어떤 상태냐 하면 죽음의 상태죠. 그렇다면 인간은 살아가면서 오류가 있다는 것은 안다 할지라도 더 중요한 것은 모르고 있어요. 왜 오류냐 하는 것을 몰라요. 

왜 우리는 오류를 지니고 태어났느냐, 라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없겠죠. 에스겔서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두루마리, 성경책이 적혀있는 두루마리를 먹게 합니다. 근데 그 두루마리가 무슨 맛이 있겠느냐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두루마리를 먹게 하니까 입에서는 꿀 같더라고 했습니다. 

자, 입에서는 꿀 같은데, 입에서는 꿀이더라 이 말이죠. 계속 꿀 같으면 위장 속에 들어가도 기분이 좋아져야 하는데, 에스겔이 꿀 같은 그것을 먹었을 때 이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입에서는 꿀 같지만 나중에 그것이 창자까지 내려가고 이것을 전할 때는 이게 자기를, 인자의 인생을 힘들게 하는 겁니다. 기분 좋게 들어갔는데, 기분 좋게 들어가는 그 말씀 때문에 인자의 인생이 굉장히 괴롭게 되는 거죠. 

이 이야기는 말씀과 인간의 육신의 만남, 하나님과 육신의 만남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성도의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복음은 굉장히 단데, 복음대로 산다는 것은 오히려 더 힘들고 가중하게 추가된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그런데 그 말씀을 가지고 전합니다. 전하는데, 에스겔 3장 7절에 보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이래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잖아요. 그러면 생각해봅시다. 우리 자신이 ‘나는 오류가 있다. 뭐가 오류인지, 왜 오류를 낳는 인생으로 태어났는지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내가 오류가 있는 것은 맞아. 내가 잘못된 것은 맞아. 그러니까 죽잖아.’라고 아무리 다짐을 해도 하나님께서 “그래. 내가 정답을 알려줄 테니까 들어볼래?”라고 하면 “아니요.”라고 강력하게 거부하는 거예요. 참 이상하죠? 

“내가 뭐가 문제입니까?” 라고 질문을 던지면서도 “그래? 그게 궁금했어? 내가 정답을 알려줄게.”라고 하면 아예 안 듣겠다는 겁니다. 꼭 국회 청문회하는 것 같아요. 국회의원이 장관들한테 질문해놓고 답변을 하려고 하면 아, 들을 필요 없다고 하는 것하고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단순히 오류가 있다고 하는 그것이 오류이겠습니까? 이걸 바로 제가 여기서 질문을 드리는 거예요. 우리가 오류 있다고 하는 그것이 과연 오류의 전부이겠느냐는 겁니다. 오류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도 뭐가 되겠어요? 오류가 되는 겁니다. 

진정성 있게 오류가 있다면 받아들여야 되는데, 오류가 있다고 해놓고는 에스겔 7절에서처럼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는 그런 존재로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인간이 심각한 게 뭐냐 하면 죽는 것이 심각한 게 아니고, 정답이 있어도 정답에게 외면한다는 그 심각함이 더 큰 거예요. 길이 있고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더라도 절대로 그 길과 생명과 그 진리를 거부하는 세력이 인간 속에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길과 진리와 생명을 나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긴다면 이거는 하나님의 추가적인 기적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이 이 오류에서 자기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이 오류라고 하는 그것도 제대로 오류를 모르고 있는, 그 자체도 오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그렇다면 소위 구원받았다고 하는 교회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교회에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러면 그 교회에서 전달되어야 할 것은 뭡니까? 전달되어야 할 것은 우리에게 뭐가 있다? 오류가 있다. 오류가 있는데 어느 지경에 있다? 아무리 내가 오류가 뭔지를 파악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뭐가 문제인지 그 조차도 모를 정도인 존재다. 

그래서 에스겔서에서는 그걸 바짝 마른 뼈라고 이야기합니다.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정답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진리가 없어서가 아니에요. 왜 우리 인생이 힘듭니까? 정답이 없어서입니까? 정말 진리가 없어서 우리가 기뻐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매일같이 십자가복음을 내밀치고 내던져버리고 무가치하게 보는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겁니다.

 이미아 (IP:122.♡.181.188)17-12-06 19:00 
213강-YouTube강의(여기 저기)171205-이 근호 목사 

제 213강, 제목은 ‘여기 저기’입니다. 여기와 저기라고 할 때 여기에는 반드시 여기라고 할 수 있는 중심점을 예수님이 제시합니다.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누가복음 17장 20절부터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는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상당히 중요한 질문을 했어요. 궁금하기도 하고. 그리고 꼭 알고 싶은. 

이게 안 풀리면 딴 게 찝찝할 정도로 중요한 근원적인 문제이기에, 노골적으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하죠. 바리새인들이 이런 질문을 해 준 것에 대해서 우리가 감사해야 됩니다. 

왜냐? 우리도 진즉에 질문을 하고 싶은 내용이거든요. 주님 쪽에서 “니가 알아서 뭐 할래?”라고 이렇게 나올까봐, 핀잔을 줄까봐 차마 질문을 못했지만, 어쨌든 간에 마귀의 자식인 바리새인이 우리 대신 질문을 해서, 욕은 그들이 먹더라도 하여튼 우리도 같이 궁금했던 것을 물어주니까 고맙죠.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예수님께 언제 임합니까? 라고 물을 때, 벌써 어떤 심보를 갖고 있는가 하면, 지금 여기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자기들이 아무리 보기에는 여기  저기에 하늘나라가 없어요. 없으니까 아직 하늘나라가 안 온 것으로 여기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뭐냐, 만약에 하늘나라가 실제로 온다면 자기들 눈으로 확인이 되는 나라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어쩌면 평소에 우리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을 바리새인들이 지금 대신해서 해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세례요한이 마태복음 3장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했다 이 말이죠. 그들은 보면 보인다는 겁니다. 세례요한 생각과 일반사람들의 생각이 이렇게 달라요. 다른 이유가, 아까도 오류라고 했지만, 다른 이유가 뭐냐 하면 본인이 생각해놓은 그 나라가 아니면 하늘나라가 아니라고 여기는 그게 이제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 문제가 어디서 출발하느냐 하면 자기가 이 세상에 제일 중요한 중심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지금 이 순간 제일 중요한 지점은 내가 있는 자리가 제일 중요해요. 낚싯배가 뒤집혔어도 내가 낚시하러 안 갔으니까 그쪽은 안 중요해요. 이쪽이 중요해요. 내가 있는 자리는 저 서해바다가 아닙니다. 지금 여깁니다. 

그래서 어떤 경치 좋은 곳을 구경하는 것도 괜찮지만 그걸 보는 순간, 사람들은 그 경치 좋은 알프스 산맥에 본인이 거기에 가고 싶어. 내가 거기에 가고 싶어. 그럴 때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경치 좋은 곳에, 행복한 곳에 내가 있으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그런데 그 소망이 계속 이어지고 이어진다면 결국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빼놓고는 천국을 생각 안 한다는 겁니다. 천국이 좋다한들 내가 빠져버리면 안되잖아요. 결국 천국이 좋은 것은 그 천국에 누가 합류하기 때문에 좋다 이 말입니까? 내가 들어가기 때문에 좋은 거예요. 그렇잖아요. 근데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렇다면 그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이, 이게 천국이겠어요? 지옥이겠어요? 지옥이죠. 결국 교회 온 사람들이 예수 믿고 지옥 가겠다고 교회에 온 거에요. 결국은. 왜? 뭐가 안 되니까? 자기를 부인 못하니까. 자기가 부인되지 않는 상태에서 나도 갈 수 있는 천국, 그 천국은 망상입니다. 있지도 않는 천국이에요. 

이걸 누가 질문했느냐 하면 바리새인들이 질문을 했다고요. 이 질문을 한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천국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천국은, 이거는 같지 않다는 정도가 아니라 정반대로 생각하면 됩니다. 정반대로.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자기가 기대하는 그 나라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니 예수님한테 묻는 거예요. “예수님 내가 고대하는 그 나라가 언제쯤 옵니까?” 라고 하는 질문을 이렇게 천국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어서 그렇게 생각을 한 겁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자신들이 예수님이라면, 그 마귀자식들이 천국이 언제 옵니까? 라고 물었다면, 그게 마귀자식들이 분명하다면 우리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답변하겠습니까? “니 못 들어가.”라고 이렇게 하겠죠. “니가 꿈꾸는 나라는 엉터리야.”라고 하겠죠. “니는 반대로 생각했다.”라고 그렇게 하겠죠.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야기를 하느냐 한 번 보자 이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만약에 니는 못 들어간다고 이렇게 답변을 해버리면, 정반대만 이야기를 했지 정작 하늘나라는 여기다, 라는 말을 안 한 게 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두 가지를 다 집어넣은 거예요. 니가 생각하는 그 나라는 천국이 아니다, 라는 것도 들어가야 하고 또 한 가지는 뭐냐 하면 하늘나라는 이런 거라고, 그렇게 두 가지 설명을 다 해야 하겠죠. 

그럼 어떻게 설명을 하느냐,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락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죠. 임하기는 임하는데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그런 사고방식 가지고는 여기 아무리 임했다 할지라도, 방금 니 옆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게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그 말이 뭐냐 하면 21절에 나옵니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주님 말씀이 너무 어렵죠. 없다면 없다고 이야기를 하든지 왔으면 왔다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너희가 생각하는 하늘나라는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해줘야 하고, 하늘나라는 왔다는 것을 이야기해줘야 하고, 이 두 가지를 이야기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거예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듣는 바리새인들 입장에서, 내가 볼 수 없다면 그거는 자기에게 안 온 거예요. 안 온 거다 이 말이죠. 그러면 천국은 사람에게 가는 거예요? 아니면 주님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천국의 방향은, 예수님이 대동하신 천국의 초점은 천국을 기다리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겨냥해서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겨냥해서.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한물간 옛날 연예인이 일본 나리타공항에 딱 가니까, 세상에! 아가씨들이 꽃다발 들고 수 천 명이 모여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얼마나 감격했던지. ‘그래, 한국에서는 한물갔는데 그래도 일본에서 나를 알아줘가지고 꽃다발을 주는구나. 추운데 감사하구나.’라고 하면서 받으려고 하니까, 정작 뒤에 있는 방탄소년단한테 주는 거예요. 엑소나. 늙은 연예인 자기가 아니고 K-POP스타한테 주는 꽃다발이란 말이죠. 그러면 애들이 슥 지나가면 자기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는 거예요. 

지금 우리 꼴이 그 꼴이 아닙니까? “하나님이여 천국을 보여주세요. 천국 가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생각은 안 하고 자기 이득, 자기 잘 되는 것, 자기 죽어서 좋은 데 가는 것, 이런 것만 생각하면 이건 한물간 연예인이에요. 

지금 하늘나라의 초점은 누구의 나라냐 하면 아들의 나라, 예수님의 나라지 내가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에요. 그래서 주님의 나라는 왔습니까? 안 왔습니까? 이미 왔어요. 왔는데, 인간들이 내가 원하는 나라의 어떤 상황을 자꾸 보려고 하니까. 예수 믿고 행복한 가정되기. 교회 같으면 예수 믿고 행복한 하늘나라 되기. 지가 지 맘대로 지어내는 거예요. 예수 믿고 행복한 가정되기, 그런 게 어디에 나오느냐 이 말입니다. 

하늘나라가 오면 처나 자식이나 전부 다 불화가 되는데 무슨 하늘나라? 저건 지 맘대로 생각하는 하늘나라에요. 하늘나라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옆에 있는 강도에게 하신 말씀, “니가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와 함께 있으리라. 이 땅에서 교도소인지, 화산 분화구 속이라 할지라도, 지옥이라도 주와 함께 있으면 그게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주와 함께 죽으면 이제는 내 삶이 아니고 누구의 삶? 예수님께서 만들어준 나 자신의 과거에요. 그걸 느낄 때, 그게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희락, 하늘나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