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강-눅16장 1절-8절(칭찬받은 청지기)11100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6장 1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21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16:1-8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 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무슨 이야기냐 하면, 8절에 보면 나옵니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 하였으니”라는 이 대목이 중요한 대목입니다. 자기 돈을 도둑질 해간 자기 밑의 직원을 주인이 칭찬을 해주는 겁니다. 불의한 행동을 하는데 그것을 칭찬한 거예요. 불의한 행동이 의로운 행동이 되는 겁니다. 이 땅에서 불의한 행동을 한 그 속에서 우리가 천국갈 수 있는, 구원받을 수 있는 의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러니 무슨 말이냐, ‘불의하세요.’ 그런 말이에요. ‘제발 나쁜 짓 좀 하세요.’ 그런 뜻이에요. ‘이 땅에서 옳게 살지 마시고 불의하게 살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뜻입니다. 별로 안 어렵지요.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아버지가 ‘네가 내 옆에 있어봐야 내가 너를 믿지 않는다. 빨리 하나님 없는 곳으로 가서 자수성가해라. 빨리 나가라. 괜히 교회 왔다 갔다 하지 말로 빨리 나가란 말이다. 너 원래 나 안 좋아 하잖아. 안 좋아 하는데 왜 자꾸 교회를 오느냐?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자꾸 교회를 와? 네가 나 안 좋아하는 것 다 알거든. 옆에 붙어 있다고 해서 구원 안 돼. 멋대로 나가서 나는 하나님이고 예수고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 본때, 본색을 좀 팍팍 발휘를 좀 하란 말이다. 내 옆에 바짝 붙어 있지 말고 교회 좀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좀 교회 오기 싫으면 오지 마!’ 하는 그 이야기가 예수님 이야기에요.
오늘 본문 이야기는 ‘제발 좀 착하게 살지 마라. 인간이 착하게 산다는 것을 보니 참 가관이다. 가관이야. 제발 나쁜 짓 좀 해라. 네가 하는 나쁜 짓 속에서 내가 너를 구원하는 의로움을 내가 너에게 평가해줄게. 악하게 살았느냐?’ ‘예’ ‘지혜롭게 살았구먼. 구원받아라.’ 이 이야기를 한다 이 말이지요. 하나님이 바보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해당 안 되지만 기존교회, 교회에 놀러간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이야기인데 그 교회를 주께서 구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지요. 하나님이 바보가 아니거든요. 천국에 가서 살지도 못할 사람을 어떻게 천국 보내주겠습니까? 이 지상에서도 천국생활 하는 사람에 한해서만 죽어서 천국 가는 이것이 논리상 하자 없는 당연한 것인데 이 땅에서는 천국생활 안하고 죽어서 좋은데 가겠다,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립니까? 안되지요.
예수님의 오신 것은 이겁니다. ‘이 땅에서 천국생활 하는 사람을 내가 천국에 보내주겠다.’ 아주 간단한 논리에요. 그런데 이 땅에서 천국생활 못한다, 그러면 죽어도 마찬가지지요. 그 인간이 여기 사나 저기 사나 마찬가지인데. ‘여기는 힘들게 살아도 죽어서는 좋은데 가겠다. 내 존재가 죽어서 천국 가는 존재가 되겠다.’ 이렇게 존재적으로 따지는 것은 주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아는 사람만이 천국에 가서 천국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이 땅에서의 천국생활은 어떤가, 그것을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탕자, 연이어서 불의한 청지기, 보통 불의한 청지기라 하는데 오늘 제목은 ‘칭찬받은 청지기’ 다시 말하면 ‘칭찬받은 불의한 청지기’ 청지기가 곱게 사무볼 때는 전혀 칭찬이 없었는데 주인의 돈을 도둑질 할 때 비로소 칭찬을 받습니다.
‘네가 참 제대로 사는구나.’ 하고 칭찬을 해주는, 피해 입은 주인이 오히려 칭찬을 해 줌으로서 그 칭찬받은 자만 천국에 간다는 그 진리를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라 하는 것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돼요. 성경을 우리가 잘 안 봐서 그러는데 성경에 충격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당나귀가 이야기하는 것도 충격이죠.
집에서 당나귀가 고양이를 십년 째 키워보세요. 그것들이 말을 하는지. 그런데 성경을 보면 당나귀가 말을 하잖아요. 얼마나 충격적입니까? 그런 충격가운데 하나가 누가복음 24장에 나와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그런 주제의 이야기가 나와요. 제자들이 예수님 죽었다는 소식 듣고는 이제는 그 동네 살기 싫어서 ‘이제 별 볼일 없다. 가자.’ 해서 고향 엠마오로 가는 도중에 어떤 아저씨 하나가 끼어들었어요.
같이 가면서 ‘지금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십니까?’ 하고 물으니까 ‘우리는 원래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인데 예수님 따르던 제자들인데 예수님도 죽어버리고 더 이상 희망도 없고 여기 있을 이유도 없어서 고향에 가서 농사나 지으려고 갑니다.’ 할 때 제 삼자로 끼어든 그 나그네 아저씨가 하는 말이 ‘성경 말씀에 다시 살아난다고 했는데요.’ 하니까 ‘그거야, 말이 그렇다는 말이지요. 그것은 이론상이지요. 성경은 다 이론이고 실제는 그냥 죽었어요. 당신은 성경보고 그런 소리 하는 모양인데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다 이론이고 실제로는 예수님이 죽었어요. 그래서 별 볼일 없어서 내려갑니다.’
가다가 저녁이 되어서 식사를 하는데 떡을 떼어줄 때 예수님께서 식사기도를 하니까 갑자기 눈이 열렸어요. 보니까 예수님이 살아나셨습니다. 여기서 제가 충격이라는 말을 하는 이유는 지금도 예수님이 살아 계시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 살아계셔서 우리 일상에 끼어들어서 성경말씀이 이론이 아니고 실제라는 것으로 계속 끼어든다면 우리가 교회를 몇 년 다녔고 직분이 뭐고 목사니 장로니 이런 것,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동안 내가 십일조를 얼마나 했으며 봉사를 얼마나 했는지 아무짝에도 소용없습니다. 내가 직업이 뭔지, 의사가 되었든지 박사가 되었든지 국회의원이 되었든지 아무 의미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인생에 계속해서 끼어들어서 실제로 안 죽고 살아 있다는 것을 매일같이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면 충분해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제가 어제 어느 모임에 가서 이야기를 하고 난 뒤에 돌아오면서 아주 섭섭했습니다. 속이 안 좋아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속이 안 좋았어요. 어떤 목사님과 이야기를 죽 했어요. ‘저는 기존교회를 이단이라고 봅니다.’라고 했거든요. 그 분이 하는 이야기가 ‘교회라고 다 나쁜 것이 아니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이 있다.’고 했어요.
그 소리 듣고는 속이 더 시렸어요. 뭐냐 하면, 왜 자꾸 교회를 쥐려고 하는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지금 성경말씀이 이론이 아니고 실제로 우리 인생에 말씀으로 계속 집어넣고 끼워 넣는데 이것이면 충분한데 왜 목사라는 이유 때문에 자꾸 ‘적어도 우리교회는 성도가 있다’라는 존재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기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래도 우리 교회는 건전해, 얼추 괜찮아.’라고 교회를 쥐고 있느냐 하는 그 말입니다. 왜 그런가!
왜 그렇게 존재론적으로 생각하는가? 시간이 없고 갈 길이 바빠서 더 말을 못했는데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 뉴스를 보다가 놀라운 뉴스거리를 보고 ‘아, 그거야!’ 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잘 들어보세요. 인터넷 뉴스에 들어가서 보니까 ‘박주영 두 골 넣은 것 말소’라고 나왔어요. ‘이 동국 국가대표 복귀전 말소.’ 이렇게 되어 있어요. 특히 여자분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얼마 전에 우리나라하고 폴란드하고 축구를 했는데 2대 2로 비겼습니다. 그 때 박 주영 선수가 두골을 넣어서 2대 2로 비겼는데 FIFA에서 그 경기는 말소 되었다, 없는 경기로 치는 거예요. 왜 없는 경기로 하느냐, 왜 무효로 치느냐, 선수를 6명까지 교체할 수 있는데 폴란드 감독하고 합의해서 7명을 교체했기 때문에 이 경기는 말소, 즉 기록에 남아서는 안 되는 경기가 되고 말았어요.
그것을 보고 제가 황당한 느낌을 받은 것은 뭐냐, 박 주영선수가 공을 안찼습니까? 이 동국선수가 경기에 참가 안했습니까? 분명히 축구경기를 했다는 그 사실은 남아 있는데 후대사람들은 축구경기의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은 생각 안하고 역사에 기록된 것만 인정하더라 그 말이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박 주영이가 축구를 했든 말든 기록된 것을 보고 우리가 판단을 하겠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것을 보고 느낀 것은, 그렇다면 이 세상의 심판주가 누구입니까? 교회 목사입니까? 목사가 심판하고 장로가 심판합니까? 우리 자신의 신앙을 누구한테 평가받고 누구한테 심판받아야 돼요? 목사한테 심판받아야 돼요? 목사가 신앙 아니라고 하면 신앙 아닌 겁니까? 교회가, 대한예수교장로회가 판단합니까? 개혁주의신학이 역사적이거든요. 역사에 남겨야 된다는 거예요. 자기가 뭔데!
문제가 뭐냐, 내 신앙을 내가 판단하는 이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내 신앙을 내가 판단하면 자기잘난 것 밖에 안돼요. 내 신앙을 목사나 장로가 판단 못할뿐더러 내가 내 신앙도 판단 못해요. 내 속에 들어오신 예수님이 판단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안 들어왔다 하면 그것은 아무리 교회 나와도 구원 못 받지요. 어떤 목사도 안돼요.
울산강의에서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어느 아주머니가 평소처럼 설거지를 하다가 갑자기 ‘나는 뭘 해도 죄인이다.’ 하는 순간 그 사람은 맨홀에 확 빠져버린 거예요. 맨 홀에 빠져버리면 그 맨홀안의 세계는 예수님이 모든 것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심판하는 세계, 구원도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행사하고 지옥도 예수님이 자기 맘대로 보내는 세계, 예수님의 자기 맘대로의 세계 속에 빠졌을 때 우리는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 것을 아는 겁니다.
그러면 설거지를 하는데 밥풀이 그대로 묻어 있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딸이 결혼식을 한다. 그래서 엄마가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결혼식장에 들어가지요. 그런데 예식장에 가기 위해서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나는 지금 운전을 하든 말든 딸을 시집보내든 말든 나는 주님 앞에 무조건 죄인 맞잖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차를 타고 가다가 맨홀에 빠진 것과 똑같은 거예요. 쏙 빠진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상태입니다.
제자들이 엠마오로 갑니다. 자기가 아는 상식을 다 동원해요. 예수님의 제자니 오죽 아는 것이 많겠습니까? 요새 말로 신학자죠. 성경에 박사들이고 예수님에게 잘 배웠고. 그런데 예수님이 죽어버리니 그 모든 것이 다 의미가 없는 거예요. ‘종교, 신앙, 삼위, 예수고 뭐고 다 소용없어. 하나님도 안보이니까 다 없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이제 밥이나 먹고 살자.’ 하고 그냥 가는 거예요.
본문 식으로 하면 그 두 제자는 불의한 청지기입니다. 자기본색을 그냥 마구잡이로 드러낸 거예요. 지난시간으로 하면 탕자입니다. ‘아버지 재산 주세요. 나는 아버지하고 있기가 싫어. 나한테는 내가 전부야. 예수고 뭐고 하여튼 내가 제일 중요해.’
그 자기본색을 마음껏 발휘하는 그 순간, 거기에 주님께서 ‘너는 뭘 해도 십자가 앞에서 죄인 맞다. 왜, 나는 너 때문에 피 흘렸잖아. 내가 죽은 이유는 네 죄 때문에 죽은 거야. 내가 피 흘린 이유는 네가 죄인이라는 뜻이기에 너는 내 앞에서는 무조건 죄인이야. 그런데 이 피로 너는 무조건 죄인된 것처럼 너는 내 피만 믿으면 무조건 의인이야. 네가 착한 일을 했는지 안했는지 판단하지 마. 내가 의인이라면 의인이야. 네가 왜 말이 많아. 네가 네 행동에 잔소리를 걸지 마. 네가 네 행동에 대해서 재판하지 마. 네가 네 행동에 대해서 판단하고 시비 걸지 마. 십자가 피가 몽땅 다 너를 의롭게 만들었어. 끝!’
여러분,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교회 와서 목사 눈치보고 그러지 맙시다. 우리교회 해당사항 없습니다만, 이근호가 십자가 달렸습니까? 제가 부활했어요? 나도 같은 입장인데, 나도 불의한 청지기고 나도 탕자입장인데 누가 누구 눈치를 봐요.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 당시에 남겨진 기록된, 주위 사람들이 의롭다고 인정해줘야 하나님도 구원시킬 것이라는 분위기로 몰아가는 그 세대에 대해서 주님께서 파격적인 전복, 완전히 거꾸로 되는 경우를 제시해버립니다. 그 이야기에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사람들을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야기한 것은 하나였습니다. ‘말씀은 지키라고 준 것이다. 안 지키면 나쁜 인간되어서 지옥 갑니다.’
이것이 그 당시에 그들이 만들어낸 종교분위기, 오늘날과 같은 교회 분위기, 신앙 분위기에요.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누구나 납득을 잘했어요. 왜, 교회 오기 전부터 평소에 품고 살아가던 신념과 인생관과 너무나 딱 들어맞기 때문에 그들은 의문 없이 그냥 받아들인 겁니다. 그냥 받아들인 그것 때문에 그들은 누가 불의한 인간인지, 누가 지옥 갈 정도로 불의한 인간인지를 찾아내는 작업이 시작되는 거예요.
한국교회가 이야기하는 것을 간단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에서 성공 못한 것은 나쁜 짓 많이 해서 저주받아서 그렇습니다. 제가 어떤 분을 초청해서 간증집회를 하겠습니다. 이분은 평소에 막살고 제멋대로 산 사람인데 어느 날 성령 받고 말씀대로 살았더니 하나님이 복 주셔서 미국의 상원의원 되었습니다.’ 이런 것, 요 옆 교회 초청받은 어느 상원의원.
누가 놀리겠습니까? 성령 안 받은 철학가들이 놀립니다. ‘너희들이 정치를 알아?’ 정치판에서 놀았다는 것은 (양아치나 조폭들같이) 침 탁탁 뱉으면서 어깨 으쓱거리면서 놀았다는 뜻이에요. 정치판에서 놀았다는 말은 속속들이 썩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서민들은 몰라요. 판사도 평판사로 살다가 평판사로 임기 끝냈다고 하면 사람 괜찮다고 봐줄 수 있어요.
그런데 판사인데 부장판사까지 올랐다? 썩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교사도 평교사로 끝냈다? ‘아이고, 그래도 착실하게 사셨네요.’ 그런데 교감 지나 교장 되었다? 도가니입니다. 평 교인으로 집사하다가 죽었단다, 하면 모를까 목사하다 죽었단다, 하면 사기꾼입니다. 얼마나 사람들을 그동안 속여 왔던가요.
그래서 속여도속여도 속일 수 없는 인간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들이 대십니다. 누구냐, 불의한 청지기. ‘제발 좀 네 본성 따라 네 본색 따라 불의하게 좀 살아다오.’ 그 말입니다. ‘횡령 안하는 척 하지 말고 주인 돈 탐 안했다고 하지 말고 제발 자기 본모습을 확실하게 내 놓으라.’ 그 말입니다. 재미있는 현상이 있어요.
수십 년 전부터 성경공부를 죽 해왔던 사람들이 있거든요. 처음에 성경공부 할 때 ‘어떻게 성경공부 참석하셨습니까?’ 하면 ‘직장생활 하면서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해서 이제는 예수 믿고 복음대로 살아서 반듯하게 살아서, 인생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영원한 세계가 있으니 그 천국을 내다보면서 대비하려고 참석했습니다.’ 출발은 그렇게 해요.
한 10년 지나서 묻지요. ‘직장생활 어떻게 합니까?’ ‘직장도 주신 것은 하나님이고 직장생활 바르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소명이니까 이 현장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합니다.’ 또 한 20년 지나서 물어보지요. ‘직장생활 왜 합니까?’ ‘돈 벌려고 합니다.’ 진작 그러지. 사명이니 영광이니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했어요. 괜히 가리고 있는 다고 표 안 나는 줄 압니까? 표 다 나는데. ‘목사 왜 하십니까?’ ‘돈 벌려고 합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16장 1절부터 8절까지 읽었는데 1절부터 7절까지의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장님에게 평소에 착실한 직원에 대해서 안 좋은 소문이 들려요. 돈관리가 투명하지 못하다는 소리를 듣고 회계감사를 했지요. ‘돈 관리를 제대로 했는지 한 번 보자.’ 하니까 그 사람이 ‘사장님, 내일 하면 안 되겠습니까? 좀 준비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래놓고는 집에 와서 연락 다 해서 ‘김 대리님이죠? 우리 회사에 납품 대금 미납금 얼마입니까?’ ‘10억인데요.’ ‘빨리 장부에 5억으로 하세요.’
그것도 ‘빨리’ 이것이 6절에 나옵니다. “말하되 기름 백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여기에 ‘빨리’가 나오지요. ‘내가 아직 이 자리에 있을 때 당신 빚 반으로 탕감해 줄게. 10억을 5억으로 해 줄 테니 나머지 5억 갈라먹기 합시다.’ 한 거예요. 그런 식으로 다른 대리점에 또 연락합니다. 그것이 7절까지의 내용입니다.
8절을 모른다 치고 여러분이 지금까지의 신앙을 총동원해서 그 8절을 여러분이 적어 넣어 보세요. 힘드시면 객관식으로 해보세요. 1. 너는 죽었다. 너 같은 인간 지옥 안보내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2. 네가 회개하고 횡령한 돈 다 갚으면 너는 천국 간다. 3. 나는 너를 죽을 때까지 용서하지 않겠다. 보통 4번에 정답이 많아요. 4. 참 잘했어요.
몇 번입니까? 피해 입은 사장님인데 그 사장님 하는 소리가 ‘참 잘했어요.’ 왜 잘했다고 했을까요? 사장은 피해자인데 자기 돈을 횡령한 직원보고 참 잘했다고, 참 지혜롭다고 왜 칭찬을 했을까요? 이것은 우리 자신이 그동안 거짓되게 부활하신 주님의 침투 없이 스스로, 진짜 천국의 원리는 알지도 못한 채 좋은 나라 가려고, 죽어서 좋은 곳 차지하려고 스스로 자기가 거짓으로 끄집어낸, 착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조작해 낸 엉터리 같은 인생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한테는 주님이 준비해놓은 정답을 거부할 수밖에 없어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이 시간 우리가 밝혀내야 합니다. 왜 천국의 주인공, 진짜 천국의 왕이시고 진짜 천국과 지옥이냐 하는 것을 심판할 수 있는 그 담당자, 최후의 책임자가 하시는 말씀인데 불의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내가 판사인데 판사로서 말한다. 참 잘했어요. 다른 소리는 듣지 마. 내가 너한테 참 잘했다고 하면 참 잘한 거야.’ 라고 할 때 그 판단 기준이 뭐냐는 겁니다.
이것을 모르면 수십 년 교회 다녀도 다 헛것입니다. 횡령한 이 직원, 불의한 청지기는 자기가 평소에 한 행동과 자기 자신의 본색과 일치성을 갖지를 못했습니다. 말이 좀 어렵지요? 참외 키울 때 거기서 인생을 논하지는 않지요. 촌에서 참외 키우는 것은 그저 밥 먹고 살기위한 단순한 노동이니까 가볍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처럼 평소에 이 직원도 그냥 일을 할 뿐입니다.
돈 들어오면 장부에 기재하고 돈 나가면 나갔다고 기재하면서 평소에 하는 일일뿐이었어요. 진실로 자기본 모습과 자기행동을 일치시키는 것은 사장님이 자기행동에 대해서 시비 걸고 나올 때 비로소 자기다운 본색이 발동이 되는 겁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인간은 자기본색이 드러나는데 누가 죽던 말든 중요한 것은 누구다? 바로 이 세상에서 누가 뭐래도, 예수든 하나님이든 중요한 것은 누구밖에 없다? 천상천하유아독존, 바로 나 밖에 없다, 는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을 처음으로 접선하는 순간입니다.
살고 보자, 살고 보자! 집의 교훈 다 걷어치우세요. 다 걷어치우고 이것만 쓰세요. ‘살고 보자.’ 천국은 나중 문제에요. 지옥도 나중문제고, 이 땅에서 지금 쇠고랑 차게 되었는데 당장 중요한 것은 빨리 자기를 챙기는 거예요. 살고보자. 이것이 바로 지난시간에 아버지가 탕자보고 집 나가는 것을 허락한 것처럼 오늘 본문에서는 주인이 그 직원을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빨리 네 본색을 드러내라. 쓸데없이 교회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옳지! 그렇지. 남이야 죽든 말든 나는 살고 보자.’ 그 순간 그 사람은 뭐냐, 자기가 존재하는 이유를 최초로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이 세상 삶이라는 것은 이유가 없어요. 이유가 언제 생기는가, 남을 만날 때 이유가 생깁니다. 무슨 말만하면, 입만 떼면 늘 문제가 생겨서 이야기하기가 곤란한데……, 주의 말씀이라고 여기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옛날에 우리가 결혼할 때는……, 우리라고 하니 주관적이라고 할지 싶은데 그냥 제 경우라고 하지요. 제 경우에 20대가 되니까 항상 빈자리가 있었어요. 그 빈자리란 어른들에게 배우기로는 ‘20대가 되면 결혼해야 된다.’는 그런 것이 있어요. 그래서 나는 나 혼자 살면 안 되고 내 옆에 누가 있어야 돼요. 내 옆에 여자가 있어야 된다는 빈자리를 설정하고서 20대를 보낸 겁니다.
먼저 빈자리를 만들어 놔요. 무슨 말이냐, ‘혼자 살면서 20대를 다 보내서는 안 된다. 적어도 30대에 진입할 때는 옆에 누가 있어야 된다.’라는 생각을 한 거예요. 혼자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을 보면 얼마든지 혼자 살아도 편하게 되는 세대가 되었어요. 그러면 결혼을 언제 하느냐, 누군가를 만날 때 ‘아, 저 여자 같으면 한평생 같이 살아도 되겠구나.’ 해서 부랴부랴 내 옆에 자리를 마련해 주고 ‘내 옆에 계시렵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혼자 살아도 되는데, 필수가 아니고 선택의 문제인데 ‘아, 저 여자라면 같이 살아도 되겠다.’라고 해서 그 여자를 그 때 만나는 순간 내가 저 여자와 살아야 될 이유가 새롭게 발생되는 거예요. 그 말은 무슨 뜻이냐, 같이 여자하고 살았는데 그 여자가 나에게 살아가는데 부담을 줄때는 같이 살아야 할 이유도 사라지면서 그 옆에 마련되었던 자리도 없어지면서 이혼이 되는 겁니다.
제가 하는 말은 뭐냐, 요즘 혼자 살아도 혼자 사는 것 자체가 내가 사는 이유가 되어버렸어요. 같이 살 이유를 찾지를 못했으니까. 그래서 결혼하신 분들에게 이유를 묻게 되면 ‘해야 되기 때문에 한 것이지 무슨 그런 따위의 질문을 합니까? 당연히 결혼을 해야지요.’ 하는데 그것이 질문한 사람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같이 태어나게 하지 혼자 살아도 아무 지장 없는데…….’
이게 뭐냐, 하나님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은 내가 누구냐를 전혀 몰라요. 그냥 혼자 살고 혼자에게 재미있는, 나는 나에게만 이유가 돼요. 그런데 어떤 위기가 온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비로소 이유를 이야기하지요. 복잡하게 이야기할 것이 없어요. 그러면 ‘나는 불의한 놈인데, 존대도 할 필요 없어요, 그냥 불의한 놈인데 불의한 자도 이 땅에서 칭찬받는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라는 이유를 발생시키기 위해서 부활의 주님께서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 앞에 등장하시는 거예요.
부활하신 주님이 십자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나타나지 아니하면 나는 이 땅에서 살 이유도 모르면서 편하게 나 편한 대로만 사는 거예요. 제가 취미가 바둑인데요, 아마 6단에서 7단정도 돼요. 제가 바둑 두는 시간을 재보니까 한수 두는데 0.5초에서 0.7초 걸려요. 바둑을 모르는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빠른지 잘 모를 거예요. 1초도 안 걸리니까요.
그런데 바둑을 하면서 제가 뭘 배우느냐 하면 제가 빨리 두면 상대방도 빨리 두곤 해요. 재미있는 것이 심리적으로 그렇습니다. 빨리빨리 두면 상대방이 정신없어서 막 화도 내는데 화를 내건 말건 저는 빨리 빨리 두는데, 바둑 3백 몇 점 다 둔 뒤에 다 쓸어버리면 바둑판만 남아요. 인생은 아무리 나만의 스타일이라고 하면서 환경운동이다 뭐다 백날을 해도 확 쓸어버리면 그 바닥, ‘역시 나는 나밖에 몰라.’ 라는 그 바닥, 불의한 청지기, 그것만 달랑 남는 거예요.
그것을 말끔하게 드러내게 되면 칭찬이 있을 것입니다. 남이 접근해야 소용없습니다. 남들은 천국을 지배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천국을 쥐고 있고 우리를 천국에 보내시는 분이 접근해서 우리를 칭찬해 줘야 됩니다. 그 칭찬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어떤 원칙에 준해야 되는데 그 원칙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따라서 그 죄인 항목에 우리를 집어넣을 수 있는 여건, 사태를 하나님께서 일으킵니다. 어떤 사건을 일으켜서 맨홀에 빠진 것처럼, 설거지를 해도 나는 죄인이고 딸 시집을 보내도 나는 죄인이고 하늘의 별을 따도 등산을 해도 뭘 해도……, 이런 것은 다 바둑판의 배치요 조합에 불과한 것이거든요, 그것을 확 쓰레기로 완전히 치워버리면 남는 것은 누런 때 묻은 바둑판 외에 남는 것이 없지요.
그 위에 또 바둑을 놓지요. 그러면 또 쓸어버리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우리 동기들이 60가까이 되는데 얼마 전에 환갑지낸 분이 이야기를 하는데 60이라 하지 말고 30을 두 번 산다고 하라고 이야기해요. 60을 30의 두 번이라고 하니까 바둑 두는 사람은 금방 알아요. 그게 바둑으로 치면 한판이 아니고 두 판을 둔다는 그 말이거든요.
두 판이든 세 판을 두든 나중에 백 살이 되어도 쓸어버리면 그 밑바닥에 남는 것은 예수님께서 피 흘릴 수밖에 없는 죄인 덩어리만 남는 거예요. 그 위에 어떻게 아름답게 수놓았든 아무 상관없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청지기를 이용해서 이 시대,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조성해 놓은 세계, 착해야 구원된다는 그 세계보다도 네가 더 지혜롭다, 그 말입니다.
아, 어려워라! 주님께서 그렇게 어렵게 해요. 그렇다면 그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것,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잖아요.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자기 살고자 하는 이 모습을 두고 예수님께서 그 예를 들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죄 값으로 죽었던 그 살과 피, 그 십자가를 이제는 예수님 십자가가 아니라 나의 십자가로 강탈하든지 빼앗는 그것을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되고 나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되는 그 경과를 설명하시는 겁니다. 성경 전체적으로 다 보면 ‘내가 십자가 질게.’ 그 다음에 ‘그 나의 십자가가 너의 십자가가 돼야 돼.’ 그 다음에 ‘십자가를 졌다고 까불면 안 돼. 그러면 자기부인이 안되니까. 너의 십자가는 너의 십자가가 아니었었어. 예수님이 너의 죄를 진 나(예수님)의 십자가였어.’라는 그 경로를 설명하는 겁니다.
누가복음 14장 31절부터 보면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찌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주께서 심판하실 때 심판의 기준으로 봐서 우리가 못 미치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아도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거룩의 수위, 착함의 수위, 올바름의 수위, 윤리도덕적의 수위를 하나님의 수준으로 이루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리 항복하라는 말입니다. 미리 항복하라!
자기가 갖고 있던 잘남, 자기가 갖고 있던 거룩, ‘이런 착함과 모든 교회 봉사 같은 것이 다 소용없습니다.’ 하고 다 포기하고 버리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항복하는 것이 낫다는 말이거든요. 오늘 본문에서 그 말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주인의 재산을 가지고 자기재산으로 전환시키고 이전해서 내 것으로 버티겠다는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원받을 자의 것으로 전환시키는 그 모습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되어서 그 불의한 청지기가 갖고 있는 그 지혜가 이 세상에서 자기혼자 착하다고 우기는 그 십자가 없는 인간들의 거룩함과 성화보다 훨씬 월등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이 말씀 때문에 죽으시죠. 그 당시 사람들이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하고 죽여 버리지요. 예수님의 이 미친 윤리, 예수님의 이 미친 세상 관, 이것이 예수님의 사고방식으로만 머물지 말고 불의한 청지기가 되어서 예수님의 이 미친 사고방식과 십자가정신을 이제는 내 것으로 전환시키자, 그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서 밉상 받아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잖아요. 돌아가실 때 모든 사람이 예수를 다 미워했어요. 그 미움을 우리가 나의 미움으로 가져올 때 우리가 구원받는다 그 말입니다. ‘너희들은 착해라. 나는 혼자 악할 게. 이런 소리하니까 내가 밉지? 그래, 미워하고 미워해라.’ 하고 그 미움 받음을 더 감사하라는 말이고 그것이 더 지혜롭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6장 8절 중간부터 보면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무슨 뜻입니까? 친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고 불의한 재물은 나밖에 모르는 나, 내가 쥐고 있는 나의 모든 죄 성, 죄 졌다는 입장에 서서 예수님을 믿으라는 그 말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 말은 ‘천하의 죄인중의 괴수가 바로 저입니다.’ 하는 죄인의 입장에서 ‘저, 예수님 필요해요. 저 예수님 사랑해요. 나는 예수님이 최고의 보물이에요. 살길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라고 사귀라 그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불의한 재물을 탐하는 자, 나는 나밖에 모르는 자, 돈을 사랑하고 돈에 미쳐있는 자, 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게 하지요.
얼마나 고맙습니까. 전부 다 창기 되고 세리 되기 싫어하는데 주님께서 우리보고 너는 세리고 창기라고 해줄 때 얼마나 기쁘고 감사합니까? 이 감사하는 일이 십자가마을을 통해서 전파 많이 되었었어요. 사실로! 돌아오는 것은 뭐냐, 욕만 돌아옵니다. ‘이것은 사람만 보면 무조건 죄인이래.’ 하면서 하는 소리가 ‘나도 십자가 믿는 착한 사람이다.’ 하는 거예요.
세상에 ‘나는 십자가 믿는 착한 사람’이라는 공식, ‘십자가 복음 아는 착한 사람’이라는 그런 공식에 어디 있습니까? 자꾸 자기신앙 업적을 기록하려고 해요. 그것은 항상 말소되어야 하는데. 제발 기록하지 마세요. 기록 안 해도 내일 되면 내일의 죄가 또 나옵니다. 넉넉합니다. 평생 넉넉하게 죄만 지으니까 아무걱정하지 마시고 매일 매일 하루치의 죄를 지으시기 바랍니다.
매일같이 지어서 죄 속에서 의를 끄집어내는, 죄 속에서 주님의 칭찬을 끄집어내는 주님의 작품에 우리 자신을 재료로 맡깁시다.
기도합시다.
착함을 근거로 해서 이 의로 남은여생을 편하게 살아보려고 교회 왔던 우리들, 반듯하게 살면 복 준다는 소문 듣고 교회 왔던 우리들, 주님께 충성하면 30배, 60배, 100배의 보상으로 축복한다고 알고 있던 하나님, 그것이 다 거짓되었으며 우리가 만들어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악마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이제는 거짓에서 맨홀로 빠져서 진짜 십자가지신 주님과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처럼 동행하면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