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구하지 말라

아빠와 함께 2022. 8. 22. 11:35

구하지 말라

2011년 5월 22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12:22-29

(눅 12:22, 개역)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눅 12:23, 개역)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눅 12:24, 개역)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눅 12:25, 개역)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눅 12:26, 개역)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눅 12:27, 개역)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눅 12:28,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눅 12:29, 개역)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구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의 기도 내용을 통해서 이방나라 백성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제자인지가 밝혀진다는 겁니다. 이방민족들이 구하는 것으로 기도하면 예수님의 제자답지가 않다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방나라 사람들이 어떤 것을 기도하는지를 알아야 하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지옥갈 이방나라의 사람들이 행하는 기도내용에는 ‘염려함’이 담겨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이 ‘염려함’이 담아져 있지 않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 염려함의 이유는, ‘몸’과 ‘목숨’에 대해서 사람이 어떻게 관리해보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사람들은 입을 것과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있어야 그래야 내 몸과 내 목숨은 부지될 수 있다고 믿기에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자기 몸과 목숨에 신경쓰고 염려하는 그것으로 인해 도리어 네 몸과 네 목숨은 더욱 피폐해진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자기 몸과 목숨에 염려하는 마음을 갖는 이유는, 그 몸과 목숨이 자기 것이라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것이기에 자신의 관리해야 하고 자신의 지켜내야만 부지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자기 외에 아무도 자기 몸과 목숨에 신경 써 줄 이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마음자세에 기도를 하니 그 기도 내용에는 ‘염려’만 가득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새와 들풀의 예를 들면서 예수님의 제자의 처지를 설명하십니다. 새에게 물어보세요. “새야, 새야 너는 너 몸체와 목숨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지?”라고 말입니다. 새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저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전부가 다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라는 신분은 이런 자리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소유된 자들입니다. 소유되었다는 말은 일시적으로 도와준다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난 날과 앞일과 미래를 영원토록 일방적으로 이끌어주신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말씀에 의해서 생산된 자들이 따로 있고 그들에게만 천국이 허락된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19:4-6에 보면,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구원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한 조치를 취해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식으로 구원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에게만 ‘하나님께서 소유된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을 찾으십니다. 독수리 날개에 업힌 사람을 찾습니다. 과연 거룩한 백성 맞는가 틀리는가 하는 것은 언약이 그 안에 담 겨 있는가 여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새롭게 지상에 나타난 자들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범죄한 자’라는 특이한 고백을 내놓게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죄냐 아니냐를 자신이 결정합니다. 하지만 언약 백성들에게 있어 죄란 언약과 말씀이 주입되면서 새롭게 밝혀지고 알려지는 죄가 따로 있습니다. 이로서 언약 백성들은 죄를 새로운 관점에게 알게 되고 그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피로 용서함을 받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지옥갈 이방민족들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자신의 몸과 목숨을 자기 소유로 생각해서 자신의 책임지고 관리해내가려고 합니다. 이러다보니 매일을 염려와 근심 속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를 해도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에 대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이것은 몸과 목숨에 대한 자기 소유욕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오늘날 사람들의 윤리성이란 자신이 타인에게 책임질 수 있는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저 동양철학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마음만 천심이고 마음만 성실하다고 해서 하늘의 뜻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양에서는 ‘힘있는 윤리’를 위하여 자기 노동의 댓가는 몽땅 자기 것이라는 논리를 폅니다. 즉 힘쓰고 애쓴 자가 획득한 것은 몽땅 남의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일단 자기 소유가 되어버린 토지 같은 것은 그 이유는 아무 노동도 하지 않더라도 막대한 수익을 얻을 수 없어야 합당한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토지 소유자에게 막대한 이익이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그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자기가 쓸만큼만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여분과 잉여의 생산물을 만들어놓고서는 판매자와 소비자를 찾게 됩니다. 만약에 아무리 노동해서 많은 물건을 만들어도 사 가는 사람이나 판매해 줄 사람이 없으면 자신의 노동은 소유로 이어지지를 못하고 망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이라는 겁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람이 도 닦듯이 홀로 산다고 해도 그것이 무소유요 그 나라와 의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솔로몬의 옷으로 나타납니다. 솔로몬의 옷은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100%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간주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솔로몬의 입은 옷보다도 들풀이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들풀인 경우, 몽땅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적 관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입각한 사람만 귀한 몸이요 귀한 목숨입니다. 언약에 위배되면 가차없이 천국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영원히 천국문은 닫힌 문이 됩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에게는 그의 죽음까지 몽땅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예수님의 피라는 귀한 것을 담는 포대기 내지는 그릇으로 그는 쓰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가 천국의 백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원래부터 죄인이다 는 점을 잊지 말고 우리의 전부를 하나님께 맡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077강-눅12장22-29(구하지 말라)-luk11052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12장 22절에서 29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15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12:22-29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이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오늘 설교제목은 예수님 말씀하신 중에서 따온 것입니다. 29절에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것 가지고 기도하지 말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 네가 평소에 어떤 것을 염려하고 있는지를 내가 파악해 냈다.’는 겁니다. 기도 할 때 기도하지 말 것과 염려하지 말라고 한 그 내용을 가지고 사람들이 기도하고 또 염려하고 있으니까 주님께서 그런 것은 성도가 구할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30절에 보면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그래서 기도의 내용을 통해서 세상 백성들과 너희, 예수님의 제자들과 차별화되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해서 세상 백성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세상 백성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만 구원받는데 기도하는 내용을 보니까 똑같지 않느냐 그 말이지요.

분명히 구원이라는 것이 큰 문제고 큰 차이나는 문제인데 구원받는다고 나선 그 사람들의 기도내용이 어쩌면 그렇게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똑같다면 ‘너희가 구원받은 사람이 맞아? 혹시 너희들이 나를 안 믿는 것이 아니야? 예수는 그냥 폼으로 언급하고 네가 애쓰는 기도자체를 신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되묻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책망을 하실 때 구원받는 백성과 구원받지 못한 백성은 이렇게 차이가 나고 달라진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면서 그 이유를 댑니다. ‘네가 몸과 목숨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아야 될 것인데 염려하고 있다.’는 겁니다. 22절, 23절에 보면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중하다는 것은 귀중하다는 뜻입니다. ‘몸과 목숨이 음식과 옷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런데 그 중요한 것을 네가 염려함으로 스스로 망치고 있다.’ 그 말입니다. ‘네가 그렇게 염려하면 네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몸과 목숨이 네 염려로 인해서 피폐해지고 허물어지고 바짝 말라버린다.’고 하는 겁니다.


‘네가 뭔데 네 목숨과 몸을 그토록 피폐하게 만들고 찌그러들게 만드는가?’ 하는 거지요. 본문을 보니까 문득 지나간 세월이 생각나요. 십자가마을 처음 갈라질 때 십자가마을에서 저를 공격했던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십자가마을의 복음은 사람의 영혼을 피폐케 한다.’


쉽게 말해서 ‘주를 위해서 아무것도 안하면 우리의 몸과 목숨은 어떻게 사느냐, 주를 믿으면서 사는 그것이 결국은 아무것도 안한 것이 되기 때문에 피폐해지고 결국 우리의 몸과 목숨은 보장받을 길이 없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주님은 그런 자를 보고 ‘네가 네 목숨과 몸에 대해서 걱정하고 근심하고 염려하는 그것이 도리어 네가 위한다고 하는 그 목숨과 몸을 피폐하게 만든다.’ 하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네 목숨과 몸이 누구 소유냐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관리를 해도 이 하나님이 하고 목숨과 몸도 주님 것입니다. 주님 것으로 해서 이 사람들이 제자 되었거든요. 제자라는 것이 학원 수강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은 예수님이 책임지고 구원하겠다고 해서 제자된 거예요. ‘내가 관리하고 내가 책임질게. 나를 믿어라.’라는 관계가 제자와 주님과의 스승관계입니다.


그런데 제자라는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를 못해요. 주님을 믿지를 못하니 걱정을 해도 자기가 걱정을 해야 걱정한 덕분에 자기 몸과 목숨이 유지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예수님의 제자고 하나님을 믿는 표시가 나느냐는 말이지요. 그것은 예수님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세상백성들이 염려하는 그것과 다를 바가 뭐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뭘 먹을까, 입을까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기도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시는 거예요. 당부하시면서 ‘목숨과 몸이 음식과 옷보다 더 귀하다.’ 그것은 ‘네가 보기에 네 목숨과 몸이 귀하다는 것이 아니고 네 목숨과 몸을 주신 분이 보기에 네 목숨과 몸은 귀하다.’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이 논리가 약간 어려운데 그것이 어려운 줄을 아시고 주님께서 쉽게 풀었어요. ‘공중의 새를 보아라.’ 동물원의 새든지 공중의 참새가 되었든 어찌되었든지 ‘새를 보아라.’ 새한테 한 번 물어봅시다. ‘새야! 네 몸체는 하나님 것이냐, 네 것이냐?’라고 물으면 새가 입을 열어서 ‘내 몸을 관리하고 내 목숨을 관리하시는 분이 그분이 나를 소유했습니다.’라고 이야기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들풀에게 물어봅시다. ‘들풀아, 들풀아! 너는 누구의 것이냐?’라고 물으면 ‘내일 아궁이에 들어가도록 조치하시고 관리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 것이지 저는 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새와 들풀에게 또 묻지요. ‘네가 고민하고 근심하는 것이 뭐가 있느냐?’ 그러면 ‘없습니다.’ 할 거예요. 여기서 주님께서 이야기하시는 성도라는 것은 태어났다고 해서 그것으로 ‘이제는 네가 다 알아서 해라.’ 이런 성도는 없습니다. 그런 제자도 없고요.


새를 끝까지, 노인 새 될 때까지, 늙어죽을 때까지 끝까지 관리하시고 들풀을 내일 아궁이에 불쏘시개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기르시는 관계, 그런 관계로서 관리하듯이 ‘너희는 새보다 더 귀하니라,’ 해서 그런 관리가 우리 예수님의 제자에게 그대로 뒤집어 씌워진다는 겁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아니 죽고 나서 영생 얻는 그 순간까지 영원토록 주님의 관리 하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새와 들풀과는 달리 인간들은 이 사실에 대해서 이미 마음을 악마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뛰어내려 온 겁니다. ‘그것이 아니야. 그것은 사람이 아니야. 원래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이 아니야.’라고 당부를 하시는 겁니다. 그 많은 죄악 된 사람들 중에서 구분해서 한 쪽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을 따로 뽑아내고, 그 중에서 소유되지 않는 세상 백성, 또는 이방인으로 해서 따로 분류시키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주께서 분류하실 때 그냥 분류만 하시는 것이 아니고 분류된 그 들을 영원토록 완벽하게 보장해주는 겁니다. 그 몸과 목숨을 보장해 주는데 그 몸과 목숨은 우리가 처음 주님을 알기 전의 그 몸과 목숨의 가치와는 달라요.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몸과 목숨의 가치와는 다른 가치,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분류시킬 때 그 능력이 나와요.


그 능력은 새와 들풀을 완전보장하고 책임지듯이, 완전하게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분류를 시켜주는 겁니다. 분류될 때 주님이 분류하시는 그 의도, 계획이 있어요. 그냥 분류시키는 것이 아니고 목적과 존재이유, 그 뜻이 있어요. 그 뜻이 출애굽기 19장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나의 애굽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애굽기 19:4)


독수리 날개 참 크기도 합니다. 40만 대군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홍해를 건너왔다고 하니까 그만큼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날 수 없잖아요. 독수리는 날잖아요. 인간이 걸어서 애굽에서 빠져나온 것이 아니고 마치 홍해를 건너온 것이 독수리 날개에 일방적으로 업혀서 건너온 것처럼 대단한 능력을 너희에게 적용시켰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만한 능력을 받을 입장이 되는가? 그것은 주님을 만나기 전의 평소의 나, 주님을 만나기 전에 생각했던 내 목숨, ‘그까짓 것, 뭐 힘들면 자살하면 그만이지.’라고 한 입장이 아니고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구원할 때는 새롭게 추가된 내용이 몸과 목숨에 담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몸과 목숨이 귀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담아주는 그 내용물이 귀해요.


그 내용물이 나오는데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애굽기 19:5) ‘너희들만이 구원 받아서 천국 가는 사람이 되리라.’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그 안에서 뭐가 퇴색되면 안 되고 계속 유지되어야 하는가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계속 비춰야 되고 보여야 되는 겁니다.


‘내 언약을 잘 지키고 순종하면 제사장 나라가 된다.’고 했거든요. 하나님의 약속이 거기에 실리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 거기에 게재되게 되면 세상의 무엇이 확실하게 다가오느냐 하면, 천국은 온 세상에 대해서 닫힌 문으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닫힌 문, 닫혀 있음. 참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입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뭐냐, 천국이 닫혀 있다는 거예요. 언약이 아니면 열어주지를 않습니다. 그것을 누구만 알고 있느냐, 하나님만 알고 있어요. 우리 인간은 몰라요. ‘착한 일을 했으니 죽으면 좋은데 가겠지.’라고 자기 맘대로 생각해요. 천국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문이 닫히고 열리고, 그렇게 되어 있는데 그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고 그저 자기 생각만 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이 처음 태어날 때의, 주위에서 들었던 그 몸과 목숨 그대로는 천국 문을 열어 제킬 수가 없습니다. 그 앞에서는 천국 문이 열리지를 않습니다. 언약이 묻혀 있어야 돼요. 언약의 피가 묻혀 있어야 됩니다. 피를 보고 열어주는 거예요. 피를 보고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는 거예요. 이것이 유월절입니다. 우리가 성경 이야기 잠시 접고 세상 이야기 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건설현장에서 든든하고 변변한 직업도 없이 있습니다. 과거에 잠시 실수해서 교도소에 갔다 오고 배운 것도 별로 없지요. 그래서 건설현장에서 개처럼 일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돈 받을 때 되니까 건설회사가 부도나서 임금도 반밖에 못 받았지요. 그래서 그 사람이 ‘세상이 참 이토록 더럽구나.’ 하고 탄식하면서 택시회사 운전이라도 할까 해서 취업을 하려고 하는데, ‘요새 막 교대 하면서 택시 운전해봐야 사납금 채우기도 힘듭니다. 그래도 해 보려거든 해 보시던가요.’ 하는 거예요.


그래서 택시운전 해 봤어요. 말대로 사납금 채우기도 헉헉댔어요. 한 마디로 말해서 요즘 뭘 할게 없다는 거예요. 돈 좀 있어도 할 게 없대요. 노래방도 한 물 갔고 대체 뭘 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세상에 할 것이 없는데 이 성경말씀이 무슨 수로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방금 내가 너무 현실적인 이야기를 했지요. 일할 것도 마땅치 않고 밥벌이 할 것이 없는 판국인데…….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하게 되면 누가 부러우냐하면, 정규직으로 월급 받는 건설회사 현장감독이 그렇게 부럽고 택시회사 취직해서 운전 좀 하려고 들면 그 택시회사 경리 보는 아가씨가 그렇게 부러운 거예요. 왜,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잖아요. ‘나도 언제 저런 자리에 앉아볼까?’ 그런 생각이 든다는 말이지요. 당장 눈앞에 때 거리가 없고 집은 하나 있어도 곧 철거될 판국이라 오도 가도 못할 판국인데 이 성경말씀을 뭐한다고 펼칩니까?


펼칠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이거 펼친다고 돈이 막 나옵니까? 참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현실입니다. 그러니 일요일 날 교회 올 이유도 없지요. 모르지요. 교회 와서 돈 많은 장로한테 잘 보여서 그 장로가 운영하는 회사에 취직이나 되면 또 모를까. ‘김 집사님의 믿음이 이렇게 좋은데 지금 놀고 있는데 최 장로님이 주선해서 어떻게 주차장 안내원이라도 시켜주세요. 밥이라도 먹게 해주면 됩니다.’하고 목사가 소개시켜 줄 것 같으면 교회 갈만 하겠지요.


그 사람이 기도할 때 ‘주님이여, 저한테 입을 것과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소서. 까짓 마실 것, 술이나 커피는 빼놓더라도 먹을 것과 입을 것이라도 주옵소서.’ 한다면 그럴 때 주님께서 이야기합니다. ‘네 몸이 음식보다 귀하며 네 목숨이 입을 것보다 귀하니라.’ 하면 그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귀하니까 달라는 것 아닙니까? 주님은 하여튼 내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내가 무엇을 마실까, 입을까, 마실까, 이것을 달라고 하는 것이 이 몸과 목숨이 귀하니까 달라는 것 아니겠어요? 주님이 좀 똑바로 알아들으시라고요. 대체 하나님이 되어서 왜 그렇게 내 말귀를 못 알아듣습니까?’


어렸을 때 주일학교 가서 자살하면 그게 죄라는 이야기는 들어놓아서 자살하면 지옥 갈 까 싶어서 겁나고 자살하기도 싫고, ‘그러니까 내 몸과 목숨을 위할 테니까 제발 달라 이 말입니다. 달라고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게 바로 이단들, 지옥 갈 사람들이 하는 기도다. 그런 기도 하지 말라니까.’ 그러면 이 사람이 하는 소리가 ‘그런 기도 안할 거면 교회 미쳤다고 나옵니까?’


하나님과 그 인간사이가 소통이 안 됩니다. 말이 도무지 통하지 않아요. 오늘 본문에 ‘솔로몬의 입은 옷도 이 들꽃 하나만도 못하다.’ 할 때 따지고 싶어서 환장한 우리는 이렇게 따집니다. 솔로몬이 입은 그 금 옷, 그 귀한 옷, 오늘날 한국교회의 용어로 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을 축복해놓고서 이제 와서 그 축복을 들풀 하나만 못하다고 한다면 솔로몬에게 축복을 주기는 왜 줬느냐.’ 그 말이지요.


솔로몬의 그 화려한 수천 벌의 옷을 줘놓고, ‘솔로몬아, 내가 너에게 복을 주마.’ 해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놓고 하시는 말씀이 ‘솔로몬의 그 귀한 옷도 이 들풀 하나만도 못하다.’ 한다면 대체 주기는 왜 줬느냐는 말이지요. 줘놓고 뺨치는 식이지요. 점점 이 본문의 해석은 미궁에 빠지고 있습니다. 쉽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쉽지 않아요.


이것은 주님의 생각과 평소 우리 생각이 보통 벌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 확실합니다. 이것 해결 봐야 돼요. 일치를 보든지 완전히 갈라서든지 해야 됩니다. 분명히 오늘 말씀 속에 중요한 것이 들어 있어요. 상식선에서 ‘주께서 내 일 도와주겠지’라는 식으로 본문을 해석하기는 곤란합니다. 시편 135편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택했다는 말은 ……, 중요한 것이니 잘 들으셔야 됩니다. 이것은 빠트리면 안 됩니다. 인터넷 보시는 분들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자기소유로 만들어서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이 아무것도 아닌 빈터에 주어지게 되면 그 약속 때문에 태어나야 될 사람이 따로 있고 생산될 사람이 따로 태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혈육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약속에 의해서 태어나는 사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달라요. 아까 이야기한 것을 다시 해 봅시다.


교도소 다녀와서 할 것이 별로 없어서 건설 현장에서 일했는데 임금도 변변히 못 받고 사기나 당하고, 그 다음에 택시운전을 하려고 했는데 그것도 여의치가 않고, ‘대체 이 세상을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오, 신이시여! 있다면 나에게 답변해 보세요. 내가 죽을까요, 아니면 살까요? 신이 있다면 날 살려주고 신이 없다면 내가 맘껏 욕을 해도 당신은 할 말 없습니다.’라고 대들 그때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뭐냐, ‘네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크게 오해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있고 그 다음에 약속을 주는 것이 아니고 약속이 먼저 주어지면 약속 안에 생소한, 생각도 못한 하나님이 그 안에 들어 계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들어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것은 전부 다 사기입니다. 그것은 성사될 수 없는 이야기예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자기궤도가 달라져야 되는 거예요.


그 전과자가 따지기 위해서, ‘하나님이 내 인생 망쳐놓았으니 책임지세요.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됩니까?’라고 따지기 위해서 교회 왔다가 어느 순간에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성령을 받아버리면 ‘아,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구나.’라고 알 때 그 사람의 인생궤도가 달라져요.


그 궤도가 달라졌는데 옆 사람이 그것을 보면 미쳤다고 해요. ‘너무 못 먹어서 영양실조 때문에 머리가 완전히 돌아버렸구나.’ 하도 못 먹어서 헛것 본거지요. 옛날 동화에 그런 것이 나왔던가, 어떤 사람이 보이는 길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데 다른 사람은 공중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어요. 꼭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E.T영화에 나오는 외계인처럼 공중을 향하여 자전거를 타고 가는 거지요.


그런데 자전거라는 것은 보이는 길을 따라서 타고 가도록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상식이죠.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전거를 타든 걷든 공중을 가게 되면 그 사람은 길이 없는 공중을 걸어가고 있는 겁니다. 나중에 보니까 거기에 길이 없는 것이 아니고 길이 나 있는데 그게 투명한 무지개다리였어요.


그 투명무지개 다리가 ‘착한 사람에게만 대여함’이라고 되어 있어요. 나쁜 사람은 그 길에 없어요. 착한 사람만 그 길을 가고 있어요. 궤도를 이탈해서 보통사람들이 가는 길이 아니고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데 그 궤도가 뭐냐, 언약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이지요. 사람들이 말씀대로 산다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하나님의 책임 하에 있는 제자와 하나님의 책임 하에 있는 백성 같으면 주의 말씀이, 주께서 그 사람보다 고집이 더 셉니다.


우리는 타고난 육적성향이 있어서 평범한 길, 돈만 있으면 갈 수 있는 여유 만만한 그런 길을 가고자 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는 ‘그쪽 아니다.’ 해서 엉뚱한 길로 가는데 그것을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길이 아닌 곳을 가는 거예요. 공중을 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궤도를 이탈한 것과 같습니다.


방금 제가 언약 이야기를 했는데 좀 있다가 더 하기로 하고……, 이 언약 이야기는 금방 이해하기는 너무 어려워요. 이스라엘사람은 너무 특수하기 때문에 제가 이야기를 해줘도 못 알아듣고 안 믿는 사람이 굉장히 많기에 먼저 알아듣는 이야기 먼저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있어서 그 언약에 의해서 새로 만들어진 나라가 이스라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특징이 뭐냐, 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죄는 죄가 아니에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먼저 죄라고 지적해 놓고, ‘죄구나’라고 알게 해 놓고 그 다음에 그 죄에 대해서 용서를 해줘요. 이해되십니까? 우리가 양심적으로 아는 그런 죄는 이스라엘에게는 죄 축에도 안 들어갑니다.


이방인들이 죄를 다 끄집어내서 ‘주여, 저는 이런 죄가 있고 이런 죄가 있으니까 용서해 주세요.’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연기를 하는 것이지 언약하고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죄를 아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 바늘처럼 쑤시고 들어올 때 비로소 죄를 아는 거예요. 다윗 같은 경우에 무슨 죄냐, ‘나는 주께만 범죄 했다.’는 거예요.


일반인들이 보면 간음죄, 살인죄지만 다윗은 ‘오직 주께만 죄를 지었다.’ 합니다. ‘처음부터 내가 죄인인줄 모르고 왜 애초에 내가 잘난 인간인줄 생각했던고. 처음부터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을 안 한 그것이 바로 죄였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주께만 범죄 하는 존재로 태어난 그 사실을 모르는 그것이 죄였다는 겁니다.


이에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에요. 이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어려운 이야기는 그만 두고 아는 이야기를 할게요. 언약이 없는 민족을 이방민족, 세상 사람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역사를 보면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동양철학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서양철학이 있어요. 동양철학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동양에서는 자연과 사람의 관계가 뭐냐, 사람 속에 누구나 착한 심성이 있는데 그것이 하늘이 준 계시라고 보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측은지심’,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는데 어떤 애가 우물에 빠져서 우는 소리가 들릴 때 그 길가는 사람이 강도가 되었든 난봉꾼이 되었든 관계없이, 귀족이든 장군이든 관계없이, 심지어 북한의 김정일이라도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천하의 몹쓸 인간이라도 자기와 직접적인 관계도 없는데 어떤 우물에 빠진 그 애가 살려달라고 할 때 살려주고 싶은 그 측은지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는 거예요.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것은 누구나 하나님 닮은 하나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동양철학입니다. 아무 가진 것 없이 누구나 다. 이것을 성(聖)이라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기질, 하늘의 성질이 누구에게나 다 들어 있다는 거예요. 네 가지 있는데 그것 다 하면 골치아프고 제일 중요한 것이 측은지심,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에게도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니까 인간은 날 때부터 착하다고 해서 그것을 성선설(性善說)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선하게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계급에 상관없이 백정이거나 못난 인간이라도 그 측은지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하늘에서 복을 받는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상놈과 양반의 계급이 있어도 그것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아요. 나는 못살아도 내 안에 하나님 심성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을 두자로 천심(天心)이라고 합니다. 누구 별명 같이 들리지요. 우리 엄마가 그 소리 많이 들었어요. 아무도 동의는 안 하시는 것 같은데 누가 봐도 천심, 옛날 사람들은 종교와 별 관계없이도 ‘누가 아줌마는 천심입니다.’ 하잖아요. 착하다는 거지요.


서양철학에서도 비슷한 것이 있었어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리가 있기 때문에 못사는 그것도 못살면 못사는 대로 주신 하나님의 복이다. 잘사는 사람 부러워하지 마라.’ 그랬는데 점점 더 세상이 발달하면서 뭘 느끼느냐, 윤리적으로……, 윤리와 도덕이 좀 다른데 윤리란 개인의 것을 윤리라 하고 사회적이 되면 도덕이라 합니다. 사회에서 지킬 마음가짐이나 행동을 가지고 도덕이라 합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윤리를 지킬 때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려 하니까, 윤리적으로 살려 하니 힘이 있어야 돼요. 그리고 힘이 있으려면 뭔가 가진 것이 있어야 돼요. 어렵지 않은 이야기니 잘 들어보세요. 그래서 존 로크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왕이나 귀족이 많은 것을 다 가지고 있었던 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주장하기를 ‘사람에게는 누구나 노동을 할 수 있는 권한 있다. 동네에 감나무 한 그루가 있다면 그 감을 따면 그 감은 그 감을 딴 사람의 소유가 된다.’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일한 만큼 그 사람의 소유가 되기에 열심히 일하면 그 만큼 모든 것이 자기 것이 된다는 겁니다. 자기 것이 될 때 그 사람은 힘을 가지게 되고 그 가지게 된 힘은 남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 그에 대한 보상을 해줌으로 말미암아 윤리적으로 완벽을 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때부터 ‘귀족들, 너희들이 가진 것 다 가져와. 너희는 놀면서 가졌잖아. 이제는 귀족이고 왕이고 그런 것 없다. 누구나 일할 수 있고 또 일할 수 있다면 누군가 노동을 했다면 그 노동한 그 사람의 것으로 소유가 전환되어야 된다.’ 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자기가 노동해서 얻은 소유를 가지고 사유재산이라 합니다.


그 사유재산을 획득하기 위한 장을 시장이라고 하고 그 시장에서 사유재산을 얻기 위한 그 구조를 가지고 자본주의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제가 자본주의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현재 2011년도의 한국교회가 옛날의 공자시대가 아닙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사회에서 교육받는 모든 것이 결국은 자본주의에 맞춘 윤리와 도덕을 요구하기에 그렇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목숨과 자기의 귀한 몸을 유지하는 것은 자본주의 원칙을 따라주는 것 밖에는 없어요. 그러면 자본주의 원칙이란 뭐냐, 내가 노동할 때 생산물을 많이 내는데 그 많이 내는 생산물을 가지고 잉여, 여분의 것이라 합니다. 여분의 것을 만들어놓은 뒤에, 내가 생산자라면 그것을 판매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고 또 소비하는 사람이 있어야 돼요.


신발공장에서 신발 많이 만들어놓았는데 사가는 사람 없으면 망하는 겁니다. 망하면 재산 없고 재산 없으면 그 사람은 착한 사람 아닙니다. 동양에서는 어진 착함이지만 서양에서는 힘을 가진 착함, 그래서 남들에게 자기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착함을 다 요구하는 거예요. 말로만 ‘미안합니다.’ 하면 안돼요. 차를 박아놓았으면 변상을 해줘야 됩니다.


‘보험 들어놓았습니까?’ ‘돈 없어서 보험 못 들었습니다.’ 하면 그 사람은 아무리 마음이 천심이라도 수갑 차고 유치장에 들어가야 돼요. 돈 없으면 징역을 살아야 됩니다. ‘이 나쁜 것, 남의 사유재산을 이렇게 망쳐놓고. 내가 이것을 번다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결국 이 자본주의 사회는 생산해놓아도 소비할 사람이 없으면 안 되고 생산을 해놓아도 그 상품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얼마나 효능이 있는지, 상인이 개입해서 광고를 비롯해서 마케팅을 해주지 아니하면 쫄딱 망하는 거예요.


돈 천 만원 투자했는데 나중에 보면 돈 십 만원 달랑 건진다니까요. 그런 식으로 우리 몸과 목숨을 유지하니까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기도내용이 뭐가 되겠습니까? ‘주여, 소비자가 있게 하옵소서. (아니지, 아니지 소비자만 있으면 안 되고.) 주여, 판매자도 있게 하옵소서.’ 자본주의에 맞추어서 자본주의맞춤기도를 하게 돼요.


자본주의 이야기를 하니까 이게 귀에 쏙쏙 들어오지요. 알아듣잖아요. 이것이 현실이잖아요. 아무리 자기가 맘이 착하고 좋은 기술을 가졌다고 해도 손님이 안 오면 소용이 없다니까요. 광고하지 않으면 안 되고 소문나지 않으면 소용이 없어요. 인기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나는 망하고 망하면 천심이고 믿음이고 소용이 없어요.


내 몸과 목숨은 위태롭기 짝이 없는 겁니다. 이런 판국에 이런 성경책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어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것은 지금 시대가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먹을까 하는 것을 구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나가게 되면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무시하는 겁니다.


도인들, 영월의 동강 같은데서 삿갓 쓰고 낚시 드리우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잉여가 필요 없어요. 낚시해서 오늘 먹을 물고기와 하루 먹을 채소만 있으면 되지 뭘 시장에 내다 팔 필요가 전혀 없는 겁니다. 투자를 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 식으로 살면 그것이 그 나라의 의가 됩니까? 아마존의 발가벗고 다니는 그 사람들의 그 모습이 그리워하는 그 나라의 의입니까?


그게 진짜 천국입니까? 솔로몬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전도서 1장 2절에서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했습니다. 예수님의 그 나라 의라는 것은 우리의 몸과 우리의 목숨을 염려하는 입장에서는 전혀 접촉이 안 되는 그 나라 의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라는 것은 내가 많은 돈을 버는 거예요.


예를 들어 아까 어떤 사람이 ‘노동을 해서 그 감나무의 감을 땄을 때 그 사람의 소유가 된다.’고 이야기 했잖아요. 그러면 그 때부터 문제가 뭐냐, 토지라는 부동산을 가지면 주인은 그 밭에 대해서 손가락 하나도 안 움직여요. 그러면 원래 자본주의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한 푼어치의 양식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왜, 놀기만 했으니까. 그런데 토지만 갖고 있어도 먹기는 더 잘 먹지요.


그것이 어째서 그렇습니까? 노동하지 않으면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맞는 것 같은데 일단 내 것을 만들고 난 그 다음부터는 ‘너는 일해라. 나는 놀고먹겠다.’ 하는 놀고먹는 판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자본의 축적이에요. 결국 가진 것 없고, 백 없고,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산 없고, 아무 실력도 없고, 부모 잘 못 만나서 배운 것도 별반 없고 배운 기술도 없으면 12시간 이상씩 열심히 일해도 돌아오는 것은 시중 물가 따라잡기도 힘들어요.


먹고 살기 점점 힘들어지면서 자기 몸 둘 곳도 없어요. 하나님의 언약이 없이 살아가는 이 방나라, 이 사람들에게는 그 나라 의를 구할 수도 없고 예수님 말씀대로 살아갈 수도 없는 겁니다. 결국 오늘 이 말씀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예수님 빼놓고는 이 말씀대로 산 사람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인가? 예수님 한 분만 구원받고 다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인가?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가 나옵니다. 스데반 집사가 성령을 받게 돼요. 이게 핵심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 예수님의 영을 받았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영을 받게 되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대로 투명한 무지개다리를 건너면서 궤도를 이탈한다고 한 것처럼,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완성된 언약이 다 들어 있어요.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된 그 능력으로 성령이 오고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한 그 것이 온전하게 그냥 우리에게 사랑으로 담겨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가되느냐, 뭐든지 그냥 받기만 한 사람이 돼요. 스데반 집사의 경우 그 사람은 성령을 자기 노동으로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성령을, 천국 가는 것을 자기 노동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면 단지 성령이나 천국만 노동으로 얻는 것이 아니고 나머지 모든 육적인 것까지 하나님께서 성령을 받아내는 하나의 바구니로, 발판으로 밑받침으로 미리 다 주셨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는 지금 그것에 대해서 걱정하는 나 때문에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깔아놓고 받아내기 위해서, 새로운 갓난아기를 받는 포대기 같은 역할로서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의 그 모든 것을 주시고, 또 노동할 수 있는 이 힘, 이 모든 것은 진짜 보물을 받아내고 거기에 안치하기 위해서 주께서 깔아준 거지요.


그것이 예수님의 영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받아내는 포대기로 우리를 사용하는 거예요. 솔로몬이 좋은 옷 입었습니다. 솔로몬이 철이 없을 때는 자기 옷 자랑했을 거예요. ‘너 복 받았나?’ ‘복 받았다. 이 옷을 봐라.’ 하지만 주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들풀이 솔로몬의 그 귀한 옷보다 더 영광스럽다.’ 했지요. 그것이 뭐냐, 풀의 경우에는 모든 DNA부터 세포 하나하나 전부 다가 하나님께서 주신 겁니다.


그 풀잎 하나, 그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까지 다 하나님 것인데 솔로몬은 자기 더러운 몸 따로 있고 그 더러운 몸을 가리기 위해서 입은 옷, 그 정도……, 무슨 똥인지 모르겠지만 무슨 똥이라는 그 정도 가방……, 그 정도, 그거 하나는 주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가 노동해서 소유했다는 거예요.


그러니 이것은 들풀과 게임이 안 되지요. 들풀은 속속들이……, 우리가 들풀이 되면 우리가 베어지는 그것까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위험한 발언이 나옵니다. 우리 힘으로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주께서 은혜를 주셔야 죄를 짓는데 우리 행동 하나하나가 주의 말씀에 의한 생산물입니다. 그 나라 의는 생산자도 필요 없고 판매자도 필요 없고 소비자도 필요 없어요.


생산된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듬뿍 드러냅니다. 우리가 구할 것은 그 나라 의, ‘주여……’, 인간 바깥에 있는 그 주의 세계가 궁금해야 됩니다. 그 나라가 궁금해요? 그냥 주기만 하는 나라, 우리는 그냥 받기만 하는 세계, 그런 세계가 어떤 나라인지, 그 세계는 무엇을 근거로, 주고 또 주고 무엇을 근거로 계속 주시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희생, 예수님 자신의 사랑, 예수님 자신의 다 이루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를 하나의 포대기로 삼아서 이 허접스러운 우리의 모습,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죽지 않으려고 하는 우리, 하지만 이런 어설픈 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약속의 위대함, 강도도 창녀도 세리도 천국에 너끈하게 들어간다는 그 위대한 능력은 우리가 상상도 못하고 오직 예수님 혼자서 만들어서 주신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증거 하는 이 땅의 생산물이고 그것을 증거 하기 위한 주님이 만든 상품이에요. 그 때 우리 속에 주님의 새 언약, ‘다 이루었다.’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다 피어나는 거예요. 남들 보기에는 완전히 돌은 것예요. 정신 나간 거예요.


‘거기는 길이 아니야. 그리로 가면 안 돼.’ 하지만 우리도 가고 싶어 가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말씀으로 이끌어 주니까 내가 가진 것 보다, 별로 가진 것도 없지만 주님께서 거저주신 그 사랑과 용서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었다는 것을 스데반집사처럼 목숨 바치더라도 증거 해야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돈 다발 주신 것도 아니고 비싼 옷이나 구두를 주신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신 것은 피요 자기 찢어진 살인데 이제는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죄가 있는 자는 천국에 못 들어가기에 죄가 뭔지도 모르는 자를 죄 알게 하시고 그 죄마저 다 씻어주는 희생을 대신 치렀기 때문에 우리가 영생을 거저 얻었사오니 이 귀한 보석 같은 영생을 보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