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21d 울산목양교회 특강-구원, 그 이후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끝에 에덴동산에서 우린 침투가 불가능하고, 불가능한 줄도 모르고 그냥 너무 살기 힘드니까, 저주 받은 세상 아닙니까. 아무리 기대한 만큼 되지 않으니까 결핍이 있어요. 그리고 여기는 고생이 있고, 해산하는 아픔이 있고. 이러한 것이 인간에게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살인, 폭력, 범죄 이런 것으로 해결하고 결국 이런 결핍이 모여서 그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 창세기 11장에 우리 이름을 저 밑에 놔두자가 아니죠.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하자.’
인간의 모든 행동은 지향성, 뱡향이 목표한 지점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이름을 하늘에 두자. 그래서 아담의 이름의 세계는 신을 향하여 들어가는 거예요. 하지만 인간이 그렇든 말든 이 구조가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 ‘변하지 않는다’는 이걸 굳혀놓은 것이 창세기 3장 15절. 너희들이 어떻게 하늘을 향하여 하더라도 나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 나는 변해도 하나님 약속은 변하지 않고, 나는 변해도 복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얼마나 많은 고생과 고난을 받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내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복음 전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한 것은, 누가 뭐래도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서 ‘예스’가 되고 절대로 ‘노’는 아니다.
하나님 하시는 일은 이미 완료된 것을 완료된 그래도 주어집니다. 우리가 새삼스럽게 여기에 손으로 다듬어서 아름답게 꾸민다든지 그럴 필요조차 없어요. 완제품 자체가 그냥 주어지고 손댈 필요조차 없는 미완료가 완료로 그대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 그 이후는 미완료가 있는 것이 아니고 완료되었음을 확대시키고 전체가 완료되었음이 점점 더 증식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입장에서 구원 그 이후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확정될 때 창세기 3장 15절, 이것은 반드시 전쟁이 일어나고, 땅의 세계는 창세기 3장 15절이 굳혀진 확정된 원칙에 의하면, 이 세상은 뱀의 세계고, 여기는 여자의 후손 세계죠.
여기선 침투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침투할 때 틈새로 침투하는 게 아니고 이 자체가 넓혀져 버려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오셨다는 말은 이 자체가 우리한테 다가오는 겁니다. 다가오게 되면, 예수님이 비록 사람의 몸을 입었지만 여전히 몸을 입기 전이나 입은 후에나 예수님 말씀을 이해한다는 것은 침투 불가능성을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그 자체가.
여러분 로마군인들 전쟁할 때 방패가 막잖아요. [적벽대전2]에 보면, 방패를 해체하고 튀어나오는 게 아니고 방패 자체가 움직여요. 방패의 진영이 깨어지지 않는 것처럼. 시내산 위에 하나님이 오셨다. 그럼 마중 나올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여전히 오면 이 사람들은 진동하면서 벌벌 떠는 거예요. 산이 움직이면 못 올라오는 건 마찬가지에요.
그리고 이 시내산에 말씀이 여기 언약궤 위에 담겼다. 그러면 우리가 갈 수 있습니까? ‘아 이것 일 미터밖에 안 되는데’ 갈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언약궤 있는 자리는 시내산처럼 거룩한 공간이 되어서 오직 택한 자가 아니면 언약궤에 가면 죽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다가오면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죽은 자가 아니면 십자가 속에 들어가는 법이 없어요. 죽으면 들어간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죽여서 들여보낸다 말이에요. 우리가 죽으면 우리 힘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이 아니고, 산 자를 죽은 자로 만들어서 십자가 안에 그리스도 안에 넣어주는 거예요. 그 안에서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이미 죽은 자고, 세상 바깥에서 전부다 죽은 자가 된다 이 말이에요. 갈라디아서 6장 14절. 성경에 그런 말씀이 있어요? 하여튼 그런 말씀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확장되었다는 이 논리에서 더 어렵게 나가봅시다. 분명히 확장되면 이 원리가 뭐냐 하면, 축복과 저주를 완전히 굳히는 그 원리대로 오게 됩니다.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이스마엘이 있고 이삭이 있죠. 그런데 이스마엘을 하나님이 허락을 해요. 이게 중요해요. ‘이스마엘은 내가 원하는 자식이 아니야. 낳지 마.’ 낳지 말라고 말리는 것이 아니고, 허락을 하고 난 뒤에 ‘아니야’라고 가위표를 칩니다. 그래야 저주 받는 인간이 어떤 것에 증식되어서 저주로 증식되는가를 보여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우리 본래의 소유할 걸 얻기 위해서 주께서 있는 게 아니고 반대로 하나님이 자기의 축복과 저주가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어놓으셨지요. 그래서 우리 가운데 저주 받은 자가 있어야 대비해서 복 받을 자가 누군가가 윤곽이 나타나죠. 가라지가 있어야 알곡도 빛이 나게 마련입니다. 그게 하나님 뜻이에요. 하나님의 저주 받는 사람이 있어줘야 복 받은 사람이 무엇 때문에 복 받았는지가 드러나는 겁니다.
저주 받는 사람이 이스마엘이죠. 저주 받을 자가 어디서 증식되는가? 놀랍게도 복의 근원되는 아브라함의 몸을 통해서 저주가 나왔다는 이 사실을 우리가 박수쳐야 됩니다. 의미를 알고 혼자 박수치고 있는데. 소위 ‘나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이제는 죄는 안 집니다. 나는 복의 근원이다. 역시 나는 훌륭한 사람이야’ 죄송합니다. 그 배에서 저주거리 나와요.
이스마엘이 어디서 나왔는가? 아브라함이 육적인 안목에서 나왔습니다. 딱 나오게 되면 여기 대기하고 있는 환경이 있어요. 이스마엘 낳았지요. 여기는 율법이라는 환경이 주어집니다. 이스마엘을 무슨 차원으로 보느냐 하면, ‘이스마엘. 너, 율법적으로 잘 지켰어?’ ‘못 지켰는데요.’ ‘그러니까 넌 저주야.’ 하나님이 이래요. 얄미울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저주와 복을 보여주기 위해서 왜 저주에는 정당하게 저주받는 것은, 제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주장에 뭔가 얍삽한 점이 있다는 거예요.
저주받기로 작정하고 저주 내립니까? 아니면 저주받을만해서 저주내립니까? 어느 쪽입니까? 분명히 저주받을만해서 저주 내렸으면 ‘야 저주받기로 작정했다’ 하고 받으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반드시 이유를 하나님이 제시한 율법을 들이대면서 ‘거봐. 율법대로 똑바로 살았어, 못 살았어?’ ‘못 살았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는 모두가 저주야.’ 갈라디아서 3장의 말씀을 들이댄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일은 사전에 하나님이 꾸며놓고 책임은 인간에게 돌리고. 박수쳐야 돼요.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에서 손톱만큼도 공의로움과 그 정당함에 대해서 핑계치 못하게 만들어버려요. 이것 대들었던 자가 누구냐? 악마입니다. 악마는 같은 신이면서도 신이 되지 못해 원한이 되어서 충청남도 서산시 어느 갯바위의 전설이 돼요.
우리 선악과 알잖아요. 인간은 모르지만 우리끼리 아는데 이것 알았으니까 신 돼야 될 것 아닙니까? 까불고 있어. 피조물이. 그래서 그들은 쫓겨나서 땅에서 인간들을 유혹했죠. 유혹이라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빈 자리가 있어요. 그게 뭐냐? 딴 건 아는데 선악과를 모르는 체 태어났거든요. 모르는 체 선악과 있으니까 ‘저게 어디서 온 물건이고’ 모르는 거예요. 다만 말씀만 있을 뿐이지.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한테 이런 무모한 시험하는 사람이 있어요. ‘목사님, 내가 만약에 예수 안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 한번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 거기에 대한 해답이 나오지요. 6페이지 밑에서 다섯 번째 줄에. [예수님의 기도가 아니었다면…. 어휴, 아찔하다.] 도움상회가 나왔어요. 도움상회 압니까? 월 9,900에 다 도와줍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나 베드로나 마찬가지에요. 사람은 금지하면 반드시 심리가 호기심이 발동해서 호기심은 누구한테 증식되었습니까? 아담에게 증식된 그 호기심이 아브라함이나 베드로에게 왔으니까 타넘고 싶잖아요. ‘예수 타넘으면 우에 되겠노?’ 마찬가지로 똑같아요. 다만 예수님께서 기도하니까 가룟 유다는 마귀한테 팔렸고, 베드로는 마귀한테 팔리지 않았고. 그래서 히브리서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를 위해서 기도하지 아니하면 너희들은 구원 없다. 예수님 기도 안 했으면 완전히 베드로는 마귀의 종이 되겠지요.
어쨌든 간에 개혁주의신학에서는 딜레마에요. ‘선택 후 구원’ 하는데 그게 아니고 선택 후나 전이나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두 가지의 법칙을 인간이라면 다 집어넣은 거예요. 저주를 받기로 작정해놓고, 뒤따라서 저주받을 일을 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복제를 하고 거기다 기술도 집어넣어야 악을 증식시키죠. 하나님께서 뭘 하느냐? 악을 증식시킵니다. 잠언서 16장 4절, 누가 읽어보세요.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악마도 적절하게 악마질을 해줘야 돼요. 나쁜 역할 하는 사람이 나쁘게 역할 해야지 갑자기 착한 일 하면 드라마 안 봅니다. 울고불고 고함지르고 땡깡부리고 달려들고 그래야 돼요. 신애리 있지요. 못되게 굴어줘야 돼요. 그래야 시청률 40%씩 올라가지 갑자기 천사되어서 좋게 나오면 누가 봅니까? ‘에이 시시하다’ 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장난감이에요. 그 장난감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장난감으로 된 것을 알게 된 것을 감사해야 돼요. 왜? 그렇게 되면 내가 나의 장난감이라는 심적인 부담에서 스트레스에서 우울증에서 벗어나요. ‘아, 나는 내가 하는 게 아니구나.’ 범사의 감사는 그렇게 해서 되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몸을 통해서 저주받을 이스마엘을 출생케 했고, 이삭의 몸을 통해서 저주받을 에서가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서 축복과 저주가 양쪽 다 튀어나오게 하는 겁니다. 여기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같은 인간이 튀어나올 때 그러니까 아브라함에서 이스마엘 나오는 걸 정상이라 보고, 아브라함에서 이삭이 나오는 것을 불가능성, 뭔가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다가오는 증표로써 튀어나옵니다.
그러면 불가능성이 되려면 인간의 가능성을 잠시 접어야 되겠지요. 그 접는 게 뭐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임신을 못하는 불임여성으로 만들어버려요. 불임여성이 될 때까지 기다렸지요.
이런 식이라면 어떤 분은 ‘목사님, 지금 아내가 나이가 육십인데 칠십 되면 이삭이 생기겠네요?’ 죄송합니다. 종말의 증식은 증식방법이 달라요. 종말의 때에 증식방법은 골로새서 3장에 나옵니다.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 이미 네 목숨은 하늘에 있으니까 땅에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우상숭배요 탐욕이라 했습니다. 종말 때는 환장합니다. 죄 아닌 게 없어요.
아브라함에서 나올 때 여기에 아브라함과 이삭 나오는 두 개로 고리를 만드는데 이 노선을 이게 바로 율법 노선, 로마서에선 행위 노선. 갈라디아서 3장 3절에 “네가 율법으로 행한 것은 곧 행위로써 행한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얼마든지 율법과 자기 행위를 발현시켜 놓고는 그 다음에 이삭이 나올 때는 누가 행한 것도 없이 일한 것도 없이 경건치 않은 자, 죄인 된 자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너는 네가 한 걸 믿나, 네가 못한 걸 믿나’ 이렇게 따지는 겁니다.
똑같은 질문을 우리한테 해야 되는데 왜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거든요. 우리는 믿음의 후손 아닙니까. 믿음의 후손 같으면 같은 쉬운 문제가 나와요. ‘네가 한 걸 믿나, 네가 안 한 걸 믿나’라고 할 때 제가 ‘못한 걸 믿습니다’라고 이야기하니까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이근호 목사는 아무것도 하지 마라 했다’ 이래 나오는 거예요.
제가 언제 아무것도 하지 말라 했어요. ‘뭘 해도 죄가 된다’ 했지요. 그러니까 ‘옳다구나 걸려들었다. 이근호 목사는 뭘 해도 죄가 된다 하더라’ 그러니까 찬양하고 헌금하고 설교해도 강의해도 죄가 된다 하더라.
그러나 제 말 들어보세요. 그것만 나온 게 아니죠. 나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은 다른 의가 제 안에 있는 주님께서 나를 죽인 자로 치부하고 나온 거기서 뭐가 있습니까? 의가 나오잖아요. 그 의는 뭡니까? 오직 의는 꾸며서 나오는 게 아니고 그대로 나옵니다.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입니다.
그러면 이 두 개를 합쳐봅시다.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할 때 우리 속에서 마음껏 증식되니까 ‘난 이걸 해서 했다 해야지. 이번 강의 내가 했다 해야지’ 만날 자기와 결부시키죠. 하는데 백날 해도 헌금 안 나오고, 교인 안 늘 때 ‘내가 뭘 해도 소용없네’ 할 때 그 교회는 이근호 교회가 아니고, 누구 교회가 돼요? 구원받았다는 뜻이 아니고, 어쨌든 간에 주님께서 관리하는 주님의 교회가 되는 걸 알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교회는 주님의 교회입니다’라고 증거할 수 있겠죠. 그러면 목회자가 누굽니까? 예수님이 목회자가 되겠지요.
그런데 인간은 해마가 있고, 두뇌 앞쪽이 전두엽이 있고 뒤에는 뇌간이 있고 신경척수가 나오고 있는데 두뇌 앞에는 장기기억이고, 시상하부에 있는 해마는 단기기억이죠. 사람은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은혜는 2초 내지 5초에 잊어버려요. 성령께서 장기기억으로 많이 해주면 되는데 자꾸 잊어버려요. 잊어버리는 게 하는 가운데서 어떻게 작용하는가? 계속 생각해봅시다.
다시 봅시다. 아브라함에서 이스마엘이 나왔다. 이걸 잊어버리면 안 돼요. 아브라함에서 저주가 나왔으니까 누가 증식한 거예요? 아브라함의 육체가 늘어진 거죠. 아브라함의 DNA가 늘어진 것 아닙니까. 당기니까 수제비의 말랑말랑한 것 떼서 넣고 하잖아요. 이게 이스마엘이란 말이죠. 이스마엘 아버지가 아브라함이고, 아브라함 아들이 이스마엘이잖아요. 그러니까 같은 통속이라고. 그 다음에 난데없이 이삭이 나왔으니까 이삭은 외부인물이에요.
그러면 외부인물을 아브라함이 진짜 믿음이 있으려면 ‘나에게 나온 것은 무조건 하나님이 안 받고 외부 것은 무조건 받습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창세기 22장에서 누굴 바치게 했습니까? 이스마엘을 바치는 것이 아니고 누굴 바칩니까? 이삭을 바친다고. 이삭이 누구 아들이냐고 묻는 게 아니고 이삭을 바쳐버려요. 이삭을 바쳐버리면 결국 이삭이 죽잖아요. 누가 죽음이에요? 아브라함이 죽은 자고, 이스마엘은 죽은 자에게서 태어난 죽은 자가 되죠. 셋 다 죽음이죠. 결국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원리가.
분명히 복제를 했는데 죽음이 죽음을 복제했지요. 죽음이 결국 뭐냐?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삭이 나왔잖아요. 그렇다면 이 죽음에서 ‘여호와이레’ 하나님의 준비된 어떤 분에 의해서 수풀에서 수양이 나와서 수양은 죽고, 이삭은 살았지요. 수양을 준비한 주체자가 누굽니까? 아브라함이 아니고 하나님이 준비해놨잖아요. 그렇다면 이삭이 관여된 이거는 결국 아브라함 자기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어머니는 하늘에 있다. 이게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죠.
이쪽 노선은 하늘의 노선이고, 이쪽 이스마엘 노선은 땅의 노선인데 여기는 율법의 저촉을 받는 육적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 속에 육적인 것과 하늘의 것이 이렇게 증식되는 그 토대에 우리 하나하나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오해받을만한 말한 또 합니다. 마음껏 성질대로 사시고, 성격대로 사시고, 멋대로 한번 살아보세요. 그때 주께서 그 순간순간 어떻게 나란 인간을 통해서 나 같은 인간도 구원될 수 있는 근거가 어떻게 낱낱이 주어지는가를 느끼고 그것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멋대로 사는 것이 바로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이럴 수밖에 없다는 그것을 다시 한번 통감해줘야 돼요. 목사는 설교하면서 내가 죽을 수밖에 없구나. 심방가면서 죽을 수밖에 없구나. 기도하면서 죽을 수밖에 없구나. 왜냐하면 전부다 나의 생산물이기 때문에. 내가 증식했기 때문에.
여기서 아까 DNA 봅시다. DNA구조가 나선형으로 돼있는데 세포 분열할 때는 풉니다. 풀면서 리보솜이라는 게 있어서 중간에 가면서 읽어버리는데 이걸 전이라 하고, 이걸 기존에 있는 단백질과 결합시켜서 이걸 번역이라 하는데 여기서 이걸 몇 센티미터 RNA가 이걸 전이시키고 트랜스 RNA가 번역해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는데 여기서 똑같은 것이 안 나오죠. 이건 누구 마음대로냐 하면, 흩어져있는 여러 가지 다른 당들과 항상 붙을 준비돼 있다가 결합하는데 이것은 누구 마음대로냐 하면, DNA 자기 마음대로 효소를 만들어서 결합이 된다 이 말이죠.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독립해라’ 그렇지 않습니다. ‘독립하라’는 말을 해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는 독립하되 내 마음에 흡족하도록 독립해라’ 이게 나온다고. 그 환경이 학자들에 의하면 DNA에 영향을 미친다는 거예요. ‘너는 이러면 선이고, 이러면 나쁜 거야’라는 것을 자꾸 시키면 DNA 70%, 환경 30% 해서 새로운 성질이 생긴다는 겁니다.
보통 원숭이는 태어나자마자 4개월 만에 완성이 되지만 인간은 태어나서 두뇌 피질이 계속 증가하는데 19세가 되어야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19금’이 있잖아요. 19세까지 두뇌가 아직까지 자아가 덜 발달되어서 그때는 부모가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습관이 돼요. 습관이 뭉쳐서 나중에 도덕관념이 돼요. 전에 도덕발달이론 하는 것,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아동부터 어른까지 도덕이라든지 신앙이란 게 어떻게 발달되느냐 이론들이 나와 있어요.
거기에 보면 중요한 것은 습관이고, 습관은 항상 강제적으로 하라. 잠언서에 나옵니다. 애들한테 매를 아끼지 말고 때려라. 애들한테 논리를 이야기하지 말고 때려라. 이 교회, 저 교회 가봐라 하지 말고 무조건 나와. 언제까지? 19까지. 이러한 강제성, 이것이 절대로 의는 아니고 뭡니까? 반드시 죄가 돼서 꼭 자기 닮은 아이가 결국은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아들이 나중에 구박을 받고 설움을 당하면 그 설움이 누적이 돼서 나중에 아버지 묘에 가서 오징어하고 소주 한 병 들고 가서 ‘아버지여 내 성공도 못 보시고 이렇게 돌아가시니까 억울합니다. 아버지 제 옆에 색시 봤지요. 아버지 돌아가고 난 뒤에 한 달 만에 결혼했습니다. 절해라. 뭐하나. 우리 아버지다’ 드라마에 많이 나오지요. 경치 좋은데 산 위에 나오잖아요.
이게 왜 중요하느냐 하면, 평소에 인간이 행동할 때 자기한테 자꾸 영향을 준 사람을 의식하면서 행동을 해요. 그 사람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행동하는데 이게 사실은 19세 이상은 나쁜 거거든요. 하나님을 의식해야 되는데 하나님보다도 부모를 의식하게 되면 이건 결국 부모의 종이 돼요.
그래서 에베소서 5장에 보면, 결혼하면 부모를 떠나라 해서 부모만 떠나면 안 되죠. 주님한테 가라 이 말입니다. 이제는 주님을 보고 네 아내 사랑하기를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고,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복종하듯 하라 이 말입니다.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남을 의식한다는 것, 아직도 비자립적이죠. 아직도 인간세계에서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게 습관화 되어서 큰 문제를 일으켜요. 그래서 제가 ‘자기 멋대로 살라’는 말이 성경 말씀 전체를 보는 줏대가 있어야 돼요. 다시 말해서 내 주인은 내가 아니고 주님이라는 주님의 십자가 증식이 있을 때 나는 죄인이며 이 죄를 죽은데서 살게 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란 게 있을 때는 습관에서 오는 타인의 의식을 벗어난다는 것 , 다시 말해서 습관은 뭐다? ‘자기를 키워준 타인의 의식이다’ 이 말입니다.
쉽게 합시다. 어린애한테는 뭐가 주어진다? 어른들의 명령이죠. 이 어린애는 명령에 의해서 창조가 되죠. 이게 습관이 돼요. 옳은 것이 아니고 습관이 된다니까. 국을 오른쪽에 해야 됩니까, 밥을 오른쪽 해야 됩니까? 이게 성경에 나옵니까? 만약에 밥을 오른쪽에 놓으면 대번에 바꿔 놓습니다. ‘그렇게 놓는 게 아니다. 양반집엔 그게 아니야.’ ‘내 마음대로다 와.’ ‘내가 보기에 어색해서 안 돼.’ 바꾸지요.
제가 결혼식 주례하면 자유롭게 쓰고 싶은데 꼭 일하는 아가씨가 바꿔놓는다고. 좋은 게 좋다고, 사람들은 습관에서 어긋나면 혼란을 일으켜서 그 자리가 불편해요. 제가 이야기하는 건 제 자리가 결코 의가 아닌데, 왜 이 이야기를 해야 되느냐 하면, 교회에서 말하는 의란 게 전부다 그 사람의 습관이고 타고난 환경이 그런데 이걸 의인 줄 생각해서 일방적으로 아버지 역할 하는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이 말이죠.
목사가 성경 다섯 장 읽고 기도하세요. 자기는 30분 읽고 난 뒤에 노니까 하지, 바쁜 사람들 못 한다고. 볼 순 있어요. 보면 잠 오는데 피곤해서. 권면을 할 수 있을 때 이걸 의로 보지 마라. 의는 의답게, 의는 의 그대로 와야 돼요. 나는 죄인인데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공로, 그것만이 의지 목사가 모델이고 집사, 장로가 모델 그런 것은 그 사람의 습관이에요. 앞자리에 앉는 것 은혜 된다? 저는 아무리 봐도 앞자리엔 침만 튀기지. 우리 강영애 집사님 앞자리에 잠만 자던데 요샌 잘 안 자던데.
제가 이야기하는 건 제발 습관을 의라고 생각하지 말고, 또 목사 개인적인 습관을 전체로 아버지처럼 강요하지 말란 말이죠. 나도 이 습관도 어디서 나온 거다? 바로 율법에 비하면 죄에 불과하다.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켰습니다. 이게 성경에 안 나오면 우리가 본받을 일인지 알지만 성경에 보면 그게 죄다. 성경에 나왔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킨 게 죄가 되는 거예요. 왜? 그 사람은 뭐로 본다? 습관이고 더 나쁜 것은 그걸 의로 보는 게 문제 아닙니까.
그러니까 제 말은 절대로 우리 가운데 습관을 가지고 의라고 하지 말고, 오직 의는 우리가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회개할 때만 그 틈새로 나오지 그 외에는 어떤 인간도 자기 그것을 정당화시키고 자기를 모델화시키지 말라 말이죠. 남들 앞에. ‘나처럼 되라’ 하지 말란 말이죠.
그 다음에 마지막 봅시다. 8페이지. 저는 교인들이 우리교회 오면 하나님 보낸 줄 알고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 교인들 조져야지. 헌금도 안 한 사람 조져. 이런 마음은 습관적으로 점차 없어져요. 그저 감사할 뿐이에요. 감사할 뿐이라고 방금 제가 이야기했죠. 한 열 명 빠져도 감사하죠. 다 빠져 보세요. 감사가 나오는가. ‘이 사람 다 어디 갔노’ 이러지.
8페이지에 보면, 구원 그 이후에 복음적 관점인데 거기 사도행전 나오지요. 8페이지, 9페이지에 나오는데 이렇습니다. 예수님 하신 그것을 증식을 해요. 예수님이 만드신 베드로와 바울한테 예수님의 운명 일대기가 그대로 복사가 돼요. 복사만 되면 안 되지요. 번역이 돼야 돼요. 만들기만 하면 안 되고 처음에 예수님이 베드로 만들 때 그 원칙이 베드로 속에도 들어있어야 되는데, 예수님께서 베드로 만들 때 어디서 만들었습니까? 바로 죽음입니다. 무슨 죽음? 십자가 죽으심. 십자가 고난을 가지고 베드로를 만들었거든요. 죽은 자를 살리고 그리고 기도한 것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그것을 베드로에게 그대로 입혔고 그리고 사도 바울에게도 그대로 입혔다. 이것이 바로 구원, 그 이후에 주님께서 완성된 입장에서 하신 일이다.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한 겁니다.
봅시다. 8페이지. 데오빌로에게 헌정사, 성령께서 가시적인 형태로 오셨다, 누가복음, 사도행전 똑같죠. 첫 설교, 중풍병자 치료받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베드로에게는 자기 집에 초대하다, 과부 아들이 소생되었다, 예루살렘 수난여행 가셨다, 베드로도 거기 갔다, 체포되었다, 사도행전 전체와 누가복음 전체가 유사성을 갖고 있고.
그 다음 9페이지. 앉은뱅이가 치료됐다, 루스드라 앉은뱅이 치료됐다. 이것도 사실은 여기서 빠졌지만 예수님께서 앉은뱅이 치료했죠. 베드로의 마술사, 바울의 마술사, 다비다 그러면 사도행전 자체가 뭡니까? 예수님은 아직도 안 죽었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자기 증식은 성령이 있는 한 절대로 멈추지 않고 있다.
여러분 성령 받았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속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바울에게 했던 일을 증식시킵니다. 계속해서. 그 목표는 사도행전 1장 8절, 성령이 오게 되면 너는 땅 끝까지 내 증인 되라. 여기 반드시 앞에 하나 있어요. 이런 것은 너희가 알바 아니요. ‘예수님 마지막 때 우에 되겠습니까?’ “너희가 알바 아니고” 너희는 다만 성령이 다루시는 도구에 불과하지 너희가 알아서 뭐 하는데?
이거는 관계되느냐 하면, 요한복음 마지막 장에 나오지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사도 요한 저거 예수님 재림할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건 네가 알바 아니고 내가 올 때까지 살아있다 할지라도 네가 관여할 바 아니고 네 할 일 해라.
구원, 그 이후라는 것은 에덴동산, 밑에는 선악과 없어집니다. 생명나무만 남는데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생명나무가 이렇게 퍼지게 되는데 퍼지면서 침투 불가능성은 마차가지에요.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들어가면서 다만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너희는 바로 내게 속한 자다. 너희는 하늘에 속한 자다. 하늘에 속한 자로서 계속 퍼져나가게 돼요. 성령을 받게 되면.
여기서 주의할 것은 아까 이야기했죠. 아브라함이 그런 삶이지만 아브라함에서 저주의 요소가 반드시 나온다는 것, 오늘 이것 한 가지 떼야 됩니다. 절대로 ‘이런 게 저주거리구나’ 계속 나오고 있다는 거예요. 나오게 하시면서 병행해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내가 못하는 걸 주께서 하신 일도 있다 이 말이죠.
그럼 예를 듭시다. 평소에 설거지를 잘 못하는데 제가 설거지를 잘했다. ‘아 설거지 참 잘됐다.’ 그러면 설거지를 나는 못했는데 내가 했을 경우에 설거지한 것이 주께서 하신 일이 되죠. 그런데 아내가 퇴근했다. ‘여보, 나 설거지 잘한다.’ 이게 뭐가 돼요? 갑자기 주의 은혜 되다가 ‘내가 설거지 잘했구나’ 이게 뭐가 됩니까? 죄에 해당되죠. 여기서 여기까지 건너가는데 3.5초. 항상 이게 스톱이 안 돼요. 항상 흔들려요. 그렇게 작용하게 된 것이 구원받은 자의 특징이었습니다.
결론 봅시다. 오바댜 다시 봅시다. 1286페이지. 17절, 18절, 제가 읽어봅니다.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요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며 에서족속은 초개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의 위에 붙어서 그를 사를 것인즉 에서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라”
이 야곱이 누구들입니까,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에서 같은 우리에게 뭘 증식해요? 예수님 몸이 있지요. 예수님 몸에서 뭐가 증식됩니까? 예수님 몸은 하나님 형상이니까 저주받을 자와 복 받을 자가 나오죠. 예수님 몸에서 에서가 나오고, 예수님 몸에서 야곱이 나오고. 바로 그 일을 누가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면서 하신 거예요. 예수의 피의 의미를 아는 자는 복 받은 자고, 피를 모르는 자는 저주받은 자고.
그리고 예수님의 저주받을 자로 작정해놓고 율법 가미해서 ‘아이고 너는 이러니까 율법 못 지켜 저주받아 마땅하지’라고 하시는 반면에, 복 받은 자는 은혜로 창세전에 복 다 해놓고 ‘네가 나를 믿나?’ ‘믿습니다.’ ‘아이고 행함으로 네가 복을 받을지어다.’ 참 남 부끄럽게 만들지. 따님 오셨네. 증식됐네.
우리는 그럴 때 뭐라 합니까? 그때 타임을 잘 맞춰야 돼요? 생명의 면류관을 얼른 벗어서 뭐라고 하며 던집니까? ‘이건 제가 쓰면 안 되고요 주님이 쓰셔야 합당합니다’라고 요한계시록 4장 같이 던져야 되지, 그것도 모르고 쓰고 있다가는 맞아요. ‘아이고 그렇지 내가 역시 예수 잘 믿어서’ 이러면 안 되고 얼른 벗어서 ‘내가 쓰는 게 합당치 않고 주님 쓰셔야 합당합니다’ 하고 내놔야 된다 말이죠. 이것 하는데 또 3초 걸려요. 또 해마가 문제라. 단기기억이에요. 또 잊어버렸어요.
똑같이 주의 은혜로 다 구원 해놓고는 항상 결론은 뭐냐? 너는 훌륭해서 구원받았고, 너는 저주받을만해서 구원받고, 너는 복 받을만해서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아이 참 구원받고도 미안스러워서.
결론 봅시다. 중간에 보면, 성도는 나의 위기는 없어요. 부도나고, 실직 당하고, 이혼당하고 그건 위기 아닙니다. 이스마엘이니까 당연한 거고. 다만 예수의 위기가 뭡니까? 십자가죠. 십자가가 성령에 의해서 찾아든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자리, 자기가 갖고 있는 자리가 이게 바로 주님께서 은혜주신 자리인 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늘 자리가 바뀌어졌음을 깨달으며 살게 된다. 내가 인간 됐다는 것이 아니고, 자리에서 치밀어 오르는 힘, 이야기했지요.
v=√2gh인데 h에다 집어넣으면 1/4h다. 이게 앞에 방정식에 넣어버리면 같아야 되는데 안 같아져요. 제곱이 되서 벗겨져야 같다고. 그러니까 이건 뭐냐? 주도권이 뭐냐 하면, 힘에 의해서 모든 것이 내가 아니라 나를 충돌할 수밖에 없는 힘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그 논리입니다. 그래서 자리가 바꿔졌으면 그 다음 어떻게 되는가? 그 순간만큼은 내가 사라져버려요.
사라져버린 모습을 봅시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1-4)
차후에 그는 자기가 삼층천 올라간 것을 마치 남 이야기하듯이 이야기해요. 그 순간에 자기는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모를 정도다 말이죠. 그게 바로 주님께서 은혜가 넘쳐버리면 순간적으로 나의 위기, 나라는 인생 의미가 없어지는 게 마땅하다는 거예요. 있어도 없는 자리로 가지요.
결론 내리면 이렇습니다. 항상 있음은 성령이 오게 되면 나는 없음으로 바뀌고, 나는 살았음이 항상 뭐로 바뀝니까? 나는 죽음 안에서. 이 죽음 안에서 주님이 다시 보이고 없음에서 주님 은혜가 다시 보일 때 이것이 이 사람은 없기 때문에 죽기 때문에 누구만 증거한다? 예수님만 증거하는 그것이 사도행전 1장 8절에 예언의 성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원의 모든 문제가 주님에 속한 문제인 것을 우리가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점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똑같이 주님을 원망하고 똑같이 주님을 배반했지만 가룟 유다는 버림받았고 베드로는 주님의 기도로 하나님의 성도가 되었습니다. 똑같은 원리가 저희에게 적용되었사오니 우리의 죄를 알고 그것보다도 우릴 용서하시는 주님의 하나님의 의가 되는 죄 씻음을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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