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윤리에 대한 두 관점
-성경신학적인 관점과 조직신학적인 관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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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2월 12일
이근호
Ⅰ. 서 론
교계에서 윤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는 것은 뭔가 교계나 세상이 비윤리적인 면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계나 세상을 평가하면서 윤리적으로 평가해서 비윤리적이라니 윤리적이라 하는 식으로 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뭔가 윤리절대주의에 기준한 평가라는 인상을 준다.
세상을 바라볼 때, 윤리적인 바라보는 나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을 제대로 평가하는데 있어 그 윤리적 접근으로 인해 왜곡된다는 점을 신중하게 감안해 봐야 한다.
도대체 세상을 제대로 본다는 게 무엇을 두고 말하는가? 그 기준은 어디서 도출되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이론적이나마 성경에 최종 권위를 두어야 한다고 소리친다. 그렇다면 세상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참되고 유일한 계시인 성경에서 도출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적으로 세상을 판가름하려는 분위기는 계속해서 교계의 주류를 이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일관성 없는 논리의 근원은 바로 윤리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곧 성경적으로 평가하는 것과 동일하지 않겠는가 하는 어렴풋이 지레짐작하는 생각들뿐이다.
성경의 바른 교리는 반드시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맞는 대답이 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윤리적인 것이 성경적이며 옳은 것이라는 생각은 경솔한 생각이다.
우선 윤리적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조차 성경에서 허용하고 있는 지를 검토해 봐야 한다. 이런 검토가 사실상 전무한 것이 현실이다. 이는 획일성 있는 성경신학적인 작업을 범교계적으로 제시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로서는 성령의 열매가 너무나도 쉽게 윤리적인 열매로 받아졌기 때문에 행여나 어떤 신학적인 검토에 의해 결론이 도달된 게 있다면 성령의 열매에 맞추어 그 진위를 결정하려는 편견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인식들이 기독교 윤리의 주류를 차지한다고 한다면 필연코 실제 문제 해결에 있어 시행착오를 발생시킬 것이며 또 시켜왔다고 여겨진다. 이 시행착오는 바로 기독교의 모든 진리규명은 성경에서 나와야 한다는 대전제를 무시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래서 본론에서는 성경에서 기독교윤리의 실체를 한번 찾아보려고 한다. 이것을 성경신학적인 관점이라고 명칭하며 반면에 성경에서 나온 윤리가 아니라 철학적인 사고를 가지고 성경의 진리와 연결을 시도한 관점을 조직신학적인 관점이라고 우선 명명해 본다.
Ⅱ. 본 론
성경신학적인 관점과 조직신학적인 관점의 차이를 그림으로 대략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1. 조직신학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는 기독교 윤리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에게 책임을 지고 있는 존재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 하나하나는 하나님에 의해 점검된다. 그리고 심판의 대상들이다. 그러면 여기서 몇 가지 조사해 봐야 될 내용들이 있는데
(1) 인간의 행위는 어디에서부터 나오는가?
(2) 그렇게 해서 나온 행위 중에서 어떤 행위가 하나님에게 영접되고 어떤 행위가 거부되는가?
(3) 좋은 행위와 나쁜 행위의 기준이 설정되었다고 치면, 그러면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선(善)만 행할 수 있는가?
(4) 만약 그래도 행여 악(惡)을 범했을 때, 어떤 식으로 그 악이 처리 되는가? 그리고 그 악을 행한 본인에게 주어지는 처벌은 어떻게 수행되는가?
(5) 선을 행했을 때와 악을 행했을 때의 주어지는 파급효과는? 그리고 그 정당한 대가는 무엇인가?
(6) 개인적으로 행동할 때의 윤리와 집단적으로 행하는 윤리나 집단속에서 행하는 윤리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차이가 있다면 그 선악의 범위는 무엇으로 경계 지어지는가?
이상의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기본적인 것은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이냐 하는 점이다.
위에 있는 물음의 답변을 두고 조직신학적인 관점은 항상 세속적인 철학을 들먹여, 그 철학에서 언급하는 것을 반박하고 고발하고 변증함으로서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
(1)의 답변
철학에서나 조직신학에서나 공히 언급하기를 인간의 행위는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철학은 원칙적으로 인간의 마음이 백지상태에 있기 때문에 환경과 유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조직신학에서는 성경을 근거로 하여 원죄개념을 가져온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의지 자체도 죄에 팔려갔기 때문에 사실상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본다. 또 행위를 셋으로 나누는데 이도 철학과 같다. 즉 지식(이성)과 감정과 의지이다. 이 세 가지도 원죄에 의해 심히 왜곡되어 있고 타락 부패 되어 있어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조직신학에서는 인간을 세 측면에서 나누는 철학의 분석방법을 차용하면서도 그것마저 왜곡되고 거짓되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2)의 답변
무엇이 선이고 악이냐 하는 것은 포괄적으로 말해서 행위의 방향이 어디로 항해져 있느냐로 판가름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한 행위는 선이 되고 그 외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악이다. 그러나 목적뿐 아니라 수단까지도 하나님의 법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면 영광이 된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예수님이 세우신 새 법은 준행하는 경우에 한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유일한 것이다. 주된 율법의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 사랑의 내용은 율법으로 명시된다. 반대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악이 되는 것이다.
(3)의 답변
성령에 의해서만 선을 행할 수 있다. 성령은 인간의 죄 된 마음을 억제하고 조절하여 거기서 나오는 충동이 바른 행위의 동기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의 지시에 굴복하도록 하시며 옆길로 나가는 것을 방지 하신다. 그러면 성령이 내주하는 통로는 무엇인가? 그것은 기도와 말씀이다. 부단한 기도와 말씀에 대한 묵상과 이해를 통해 성령은 오신다.
(4)의 답변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지 않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했을 경우에는 하나님은 여러 경로로 회개와 반성을 촉구하신다. 그래서 자신이 저지른 죄가 무엇인지 확인케 하신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성동에게 징계가 주어지는데 이 징계 자체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이런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성도로 하여금 더욱더 성숙된 윤리가 나오도록 유도하신다. 성숙된 윤리는 성숙된 인격으로부터 형성된다.
(5)의 답변
우선 개인적으로 자유가 주어진다. 죄로부터의 자유와 의를 위한 자유 안에 놓이게 되는데 이 자유로 인하여 이 죄악의 지상에 천국이 임하게 된다. 천국건설이 기독교윤리의 최고 목표가 된다. 천국의 영광이 상급이다. 반면 악의 파급효과는 이 지상에서 성도들에게 심각한 고난을 제공하지만 하나님의 저주와 지옥형벌이 그들에게 주어진다.
(6)의 답변
교회라는 집단도 한 개인으로 취급되어 개인에게 요구되었던 모든 것이 요구된다. 우선 주안에서 하나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의 공통적인 목표를 향해 전력해야 하는데 그 목표가 무엇인가 하며는 이 세상에서의 하늘나라 건설이다. 이럴 때 세상은 비로소 희망을 바라보게 되고 의의 나라로 개혁된다. 교회가 제사장으로서 선지자로서 왕으로서 제 사명을 완수하지 못할 때는 세상도 심각한 타락에 직면하게 된다. 성도 개개인의 이상과 목표도 전체 교회 목표에 부합되어야 한다. 성도 개개인의 행동은 곧 교회의 대변자로서의 행위로 간주되며 성도의 개인적인 범죄와 실수에 따르는 책임은 사적인 범주를 넘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손시켰고 천국건설의 장애요소라는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2. 조직신학적인 기독교 윤리의 약점
(1) 하나님의 바램과 인간의 이상(理想)을 혼합시키고 있다.
좋은 세계, 멋진 세계를 인간이 꿈꾸어 왔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간절한 소망도 인간에게는 불행히도 요구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마치 이러한 인간들의 소망을 들어줄 의무라도 있는 것처럼 전제하고 들어가는 것이 조직신학적인 기독교 윤리관의 약점이다. 그들은 성경을 오해하기를 성경에서 언급하는 율법을 지키면 인간들이 소원하는 바가 이루질 것으로 알고 있다.
(2) 인간을 분석하고 거기서 나오는 행위를 조사하여 그것이 죄이냐 선이냐를 하나님의 법과 비교해서 판단하는 작업은 처음부터 무리한 시도였다. 왜냐하면 인간을 도대체 어떻게 분석할 수 있단 말인가? 철학의 근원을 죄악의 열매라고 간주해 놓고서는 그 철학적 방법을 도입하여 인간을 분석하는 조직신학적 방법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실제로 원죄가 어떻게 후손에게 전달되느냐 하는 문제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죄라는 것을 어떤 물질일 수가 있는가? 그것뿐 아니라 인간의 영혼 창조도 모호하다. 육체는 부모의 몸의 일부인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자. 그러면 영혼은 부모의 영혼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아니 아예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주입하시는가? 그렇다면 그 자식이 온전히 부모로부터 나온 자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없다고 한다면 그 자식은 아담의 자식이 되지 못하는 게 된다.
(3) 성령에 의해서만 선을 행할 수 있다고 한다면 성령의 관여가 어느 부분까지 이르게 되는가 정리하기 힘들어진다. 만약 성령의 강제성이 강조되면 인간 행위의 책임소재가 모호해지고 반면에 성령의 관여를 소극적인 선에서 머문다면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인간에게 굴복되는 셈이다. 성령과 인간의 관계를 [인격적인 관계]라는 정도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포괄적이다. 죄인이 범죄하는 것도 자칫하면 성령의 책임으로 돌아갈 수가 있다. 성령님의 적극적인 관여와 소극적인 관여를 일일이 경계 지어 구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의 행위를 놓고 하나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 둘 다를 인정해 주는 것은 두 개의 동기 사이에서 선악이 왔다 갔다 한다. 이렇게 되면 선과 악이 같은 것이 되는 위험이 있다. 하나의 행위가 선인 동시에 악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치 아담의 선악과 먹음은 분명한 악이요 가룟유다의 배신은 분명한 악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넓은 차원에서 선이 되는 경우를 배제시켜야 하는데 이것을 배제 시킬만한 근거가 사라지는 것이다. 천국이 지옥이 되고 지옥이 천국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또 악한 자가 천국 가는 사태는 일어나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4) 악한 세상을 변화 시키고 개혁하는 것이 교회의 목표라고 간주하는 것은 성도의 삶에서 불편함을 해소해 쉽고 편하게 살아보자고 하는 자구책에서 나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세상의 개혁을 교회의 사명과 목표라고 이야기 하고 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왜 가만있는 악한 세상에 대해 그토록 관심이 많은가? 그것은 기독교라는 교세를 가지고 세상을 속 시원하게 정복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것도 탐욕이요 우상숭배이다. 이러한 비계시적인 탐욕을 감추기 위해 기독교윤리를 들먹이고 있다. 기독교윤리만 제대로 적응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악의 문제다 다 해결이라도 될 것같이 말이다. 기독교인들의 정복욕은 모든 것을 자기가 소속해 있는 집단의 무릎 앞에 꿇리기 전까지는 만족함을 주지 못한다. 선교라는 명목으로, 전도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나타나는 기독교 침략자들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고난당하고 있다. 세계정복을 향한 야심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 중에서 가장 위선적이고 가장 야비한 것이다. 그것이 폭력적이든 비폭력적이든 상관없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는 것을 자신의 탐욕을 주체 못해 일어나는 현상이다. 기독교 윤리운동이 결코 교회 내의 개혁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부정부패에 관심을 생길 때에 흔히 등장한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5) 윤리라는 것이 개개인에 향한 외침이 들어있을 때에만 성립한다. 기독교 윤리라는 것이 성사되려면 성도 개개인에 대한 일목요연한 일반적인 원칙이 세워져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성경에 보면 인간의 행위와 인간의운명이 항상 같이 가는 것이 아니다. 철학적인 윤리학에서는 인간의 행위를 보고 인격을 결정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라는 것이 한 토막 한 토막 끊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고 또 그 하나의 행위가 상대에 따라 선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악으로 작용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 철학에서의 윤리는 절대적이지 못하고 상대적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분명 한 토막 한 토막을 끊어서 그 가치를 평가한다. 그 이유는 바로 그 행위와 그 인간이 운명이 반드시 같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구약 때 사울 왕이나 다윗, 모세의 경우나 신약 때의 가룟유다를 비롯한 베드로의 행동을 예를 들어보면 일시적인 선행이 결코 전 일생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행위의 영향평가를 일관성 있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악인이 선을 행하는 경우를 가지고 우리는 선인이라고 판단 내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한 번의 악을 가지고 그 인간을 악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전화위복이 되는 경우를 성경에서 많이 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정 해위를 가지고 그 사람의 운명이나 신분을 단정 짓지 못한다고 한다면 조직신학적인 관점으로 본 기독교 윤리는 개인을 향해 직접적인 연관을 갖지 못하는 셈이 된다. 성도라면 반드시 이러이러한 행위를 해야 된다고 단정해보지만 그런 행위의 필연적 결과는 비확정적이다. 그렇다면 필연적인 것을 찾기 위해 윤리적인 행위에서 찾지 못하고 다른 측면에서 시도한다면 이는 필시 인간의 행위하고는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에 [윤리]라고 하는 그 고유의 철학적인 개념이 와해되는 것이 마땅하다. 즉 기독교에는 [윤리]라는 것이 성립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다만 확정된 신분에서 나온 확정된 결과만이 도출될 뿐이다. 성도도 행위란 그 필연적 과정을 다만 확인해 주는 것에 지니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라!]라는 명령어의 의미가 일단 윤리적인 차원에서의 명령이 아님이 드러난다.
3. 성경신학적인 관점에서의 기독교 윤리
성경을 대하는 태도부터가 다르다. 성경이 인류사회에 얼마나 큰 공헌을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성경해석에 큰 장애요소이다. 우리들은 다만 성경에서 하나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시는 가에만 귀를 기울려야 된다.
성경은 인간을 개인적으로 다루지를 않는다. 인류전체가 아담의 세계로 간주한다. 그리고 성경은 인간 자체를 분석하지 아니한다. 그 거대한 아담의 세계가 지금 무슨 세력에 놓여있는가를 율법을 통해 확인시켜 준다. 즉 원죄가 각 개인마다 들어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죄아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아담으로부터 나온 인간은 그 죄를 원래부터 이길 수 없다고 처음부터 가르쳐 놓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이길 수 없는 것임을 최종 확인시키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있다, 이 모든 작업에 작동자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위치와 신분을 확인시킨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 경우에만 죽음을 면할 수 있지 그렇지 않고서는 모두 죽음을 당했다. 이 또한 아담세계의 본질과 그 한계를 보여주는 실예 들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에만 기대를 건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하나님의 자의에 의해서만 신분과 운명이 달라진다. 이것을 또한 확인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이고 교회를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즉 약자보호법과 이웃환대법은 한편으로 인간의 죄성을 노출시키는 책략이었고 그와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그 모두를 극복하여 새로운 신분과 운명을 제공하며 그 열매가 언약의 성취로서 나타난다는 점을 보이기 위한 재료였다.
구약의 십계명과 제사법과 시민법은 윤리로서가 아니라 사랑을 입은 자에게 나타나는 필연적 결과이며 확인과정이다. 그리고 그 언약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선택된 자의 관계의 성립여부를 검증해야한다. 즉 선택된 자인가 아니면 비선택된 자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언약이란 세상을 쪼개는 역할을 하는 것인지 결코 세상을 개혁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자기 백성을 찾아내는 역할을 할 뿐이다. 악한 세상의 존재이유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소품역할을 하기 위해서 있다. 악한 세상의 부정적 역할은, 악한 세상에서 선택된 자를 모아 그리스도의 모습을 띠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기 위해 몽둥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즉 너희들은 저런 식으로 살다가는 오히려 그들로부터 매 맞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치는 앗수르와 이스라엘을 귀환시킨 바벨론 처럼).
신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명령어들은 윤리라기보다는 구원받는 성도의 목표라고 볼 수 있다. 즉 그 목표와 비교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신분성을 확인하고 그리스도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데 목적이 있다. 예를 들면 성도가 성경이 요구하는데 까지 미치지 못했을 때, 거룩을 요구하는 성경귀절은 일종의 성경을 통한 경고조치가 됨을 알게 된다. 이때 성도는 다시금 그리스도의 연합을 인식하고 그분께 기도하게 될 때 그 연합된 관계에서 성령에 의한 열매로서 거룩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흔히 윤리라고 하는데 이것이 윤리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거룩한 행위가 비록 성도가 행했지만 사실 그가 한 것은 그리스도께 복종한 것뿐이고 그 복종된 관계에서 성령께서 일하신 것이다. 분석적인 측면에서 분명히 그 당사자가 일한 것은 분명하나 성경은 거기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했다는데 초점을 두기를 원하고 있으니 우리들도 그 뜻에 따라야 한다.
Ⅲ. 결 론
조직신학적인 윤리건 성경신학적인 윤리건 결론은 같은 것이 아니냐고 반문해 보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 어떤 결론이건 간에 그것을 이해하는 측면도 우리들의 철학적 요구나 호기심에서 나와서는 아니 되고 성경에서 강조하는 측면에 고정해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비로소 성경이 우리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진리의 터 위에 서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교회역사에서 성경을 가장 모독했던 점이 바로 이점이었다. 인간들의 사유작용에서 비롯된 궁금증이나 현실사회의 난제들을 해소하기 위해서 성경을 거론했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된다. 성경이 원래 나타내고자 한 그 의도를 따라서 우리들의 사고도 움직이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 아니겠는가? 성경은 기독교 윤리를 세우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있다.
인간이 주체가 되어 행위를 했으면 [윤리]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으나 성경 자체의 초점이 인간은 부족하고 무능하지만 성령께서 일 하신다 에 있다면 이것이 어찌 [윤리]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영광을 부르짖으면서 시작한 윤리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에 훼손되지 않았는지 염려스러워진다. 하나님께 영광이란 하나님이 세상을 바라보는 자리에서 함께 동참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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