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창조 제 1강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어디든지 하늘나라가 되는 이 비밀을, 이 진리를 이 가야산에서 많이 알고 돌아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지금부터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린이들과 중학생들이 함께 모였으니까 될 수 있으면 쉽게 하기 위해서 그림으로 그려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림에서 시작해서 그림으로 끝내주겠습니다.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사람이 있는데 ‘그 근본은 어디서 왔느냐’가 문제지요. 사람에게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어떤 요술쟁이도 이런 요술을 한 적은 없을 거예요. 사람의 그림자는 사람이 가는대로 이리 가면 이리 가고 저리 가면 저리로 따라갑니다. 그런데 사람은 저리로 가는데 그림자는 가만히 서 있다. ‘아! 이것은 신기한 마술이죠?’ 이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림자는 이럴수가 없지요. 그림자는 주인님이 이리 가면 ‘아이고! 내 정신좀 봐라.’ 하면서 쫒아가는 거지 따로 노는 것은 있을 수가 없겠지요.
사람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항상 붙어 있잖아요. 우리가 여기 이렇게 있다면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것이 뭡니까? ‘대체 누구 때문에 내가 여기에 와 있느냐?’하는 것은 그림자처럼 늘 따라붙는 생각이 되는 겁니다. ‘에라! 모르겠다. 내마음 나도 몰라. 나는 내 끌리는대로 살거야.’ 이렇게 분주하게 살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나라는 것이 여기 왜 있지?’ 하고 보니까 다른 여자 분도 있어요. “당신은 왜 여기 있어요? 여자여! 당신은 여기 왜 있는데? 남자여! 당신은 여기 왜 있는데?” 하면서 보니까 늙은 아버지가 있어요. “아버지는 왜 거기 계시는 겁니까?” ‘내가 왜 있지?’라는 이것을 근본이라 합니다. 사람들은 ‘근본이 궁금해!’ ‘왜 내가 여기 있는가?’ 하는 그 문제가 상당히 궁금한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아! 내가 있는 것은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가 있는 것은 할아버지가 있고,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주욱 이어져서 그 이어진 것이 나에게까지 이어져서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을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사람은 빨간색으로 그립니다. ‘나는 어디서 왔지? 아버지에서 왔지. 그 아버지는 그 아버지에게서 왔지. 내가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고’ 계속 죽 이어지는 그 가운데 내가 있겠지요.
나라는 것은 그 근본이 어디 있느냐? 제일 처음에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이 사람은 어디까지 이어지는 몰라요. 여기서부터 이렇게 죽 이어져 가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죽어서는 어디가느냐? 여기 1번, 2번, 3번, 4번, 5번, 6번, 7번, 8번, 9번, 10번, 11번 죽 있는데 그들에게 묻는 겁니다.
“아버지! 내가 죽으면 어디 갑니까?”
“몰라. 할아버지한테 물어봐라”
“할아버지! 죽으면 어디 갑니까?”
“몰라! 나도 다 죽어가는데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안되겠구나. 내 자식한테 물어봐야지’
“얘야! 예! 아버지! 너는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
“아버지도 모르는 일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가 어디서 생겼는지는 알 듯말듯 한데,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가 없으니까 결국 ‘에라! 모르겠다.’ 합니다. 근본을 몰라요. 근본을 모르면서 그냥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것을 잘 몰라요. 잘 모른채 그냥 열심히 일하고 밥먹고 사는것이 전부라고 합니다. 만약에 이 아저씨가 95세가 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자기가 곧 죽게 되죠. 만약 8월 7일에 죽는다면 며칠 남지 않았잖아요?
그렇다면 8월 7일 그 이후에는 어디로 갈지 그 할아버지는 모르는 거예요. 자신이 95년동안 살아 왔지만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세월 따라 그냥 밀려밀려 살아 온겁니다. 결국은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사람은 결국 근본을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공부를 참 많이 했다고 칩시다. 이 사람이 한국인인데 연구를 많이 했어요.
이분이 한국인인데 ‘도대체 내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지?’ 하니까 단군할아버지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단군’이라는 것이 실제 인물도 아니지만) ‘단군’이라는 분부터 시작해서 여기에 주몽도 있고, 김유신장군, 이순신장군도 있고 여기에 오늘날 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단군은 누가 지었는가?” “신의 아들하고 곰하고 결혼해서 애기를 낳은 것이 단군이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신이 인간이 될수 있나’ 하면서 코웃음 칩니다.
사람들이 공부를 해도 ‘내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또 몰라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봐야 됩니다. 근본이 무엇이냐? 골로새서 1장 16, 17절을 봅시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성경은 정답을 내려 줬어요. 정답을 그림으로 내려보겠습니다. 방금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은 ‘나의 근본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할때 옛날 사람들, 그리고 내 뒤에 올 사람들을 죽 확인해서 ‘나는 이쯤에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성경은 그 모든 것을 다 통째로 묶어 버립니다. 통째로 묶어 버리고, 근본은 어디 있느냐? (통째로 묶인 그 바깥에 계신)예수님이 만물보다 먼저 계셔서 예수님이 (통째로 묶인 그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어떤 신이 창조해서 낳고 낳고 이어지고 이어지는 식으로 생각하는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두가지를 창조했어요. 하나는 천국을 창조하고 또 하나는 지옥을 창조했어요.
그런데 지옥에 들어가는 사람들도 예수님이 나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 에라! 모르겠다. 그것을 알아 낸다고 해서 돈을 버나?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에라 모르겠다 내맘대로 살자.’
천국가는 사람이나 지옥가는 사람이나 똑같이 생각하는데 둘다 맞아요? 틀려요? 둘다 틀렸어요. 하나님의 창조하심은 누가 아느냐 하면, 예수님만 알아요. 사람들은 몰라요. 사람들은 동그라미 안에서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지 예수님께서 천국과 지옥 양쪽을 만든것을 사람들은 모릅니다. 세상에 지옥가는 사람과 천국가는 사람이 섞여 있어요. 파란색은 천국가고 빨간색은 지옥가는 사람이라 합시다.
둘다 섞여서 놀러가고, 바둑두고, 함께 공부하고, 함께 살아도 눈에 보이는 것은 어깨동무 하면서 “우리는 똑같은 인간이다. 그지?” 함께 놀러가고, 함께 좋은 대학가지고 하면서 공부하고 시험친다고 하고 있어요. 빨강이냐, 파랑이냐 하는 그것은 아무리 돋보기를 가지고 들여다봐도 구분이 안돼요. 사람이 빨강입니까? 구분이 안됩니다. 누구만 알아요? 예수님만 알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 갈지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갈지 우리가 모르잖아요. 똑같은 인간으로만 보이니까 모른다는 말이죠. 그것을 아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창조를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구분합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보니까 양쪽이 다 보이는 것이지, 옆에 있는 사람이 지옥갈 사람인지 천국갈 사람인지 우리는 몰라요.
나하고 똑같아요. 밥 먹는 것도 똑같고, 생각하는 것도 똑같고 노는 것도 똑같고요. 다를 것이 없어요. 전부 다 똑같아요. 예수님의 창조에 대해서는 우리가 거기에 간섭하지 말고 맡겨야 합니다. 만약에 두 식구가 있는데 하나는 아들이 살고 엄마가 사는데, 예수님 보시기에 엄마는 지옥 갈 사람이고 아들은 천국 갈 사람이에요.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아들 눈에, 엄마 눈에 서로가 영원히 떨어진다는 것을 압니까? 모릅니까? 몰라요. 그냥 같이 사는 겁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둘 사이를 쫙 갈라지게 해서, “너는 원래 이 자리였어. 지옥 갈 자리였고, 너는 원래 천국갈 자리였어.” 이렇게 갈라놓는 이 일은 아들이 합니까? 엄마가 합니까? 예수님이 합니까? 누가 합니까?
예수님이 하십니다. 사람이 못해요. 강의 첫 시간부터 결론을 내릴게요. 하나님의 창조는 사람이 못합니다. 사람이 못하니까 관여하지 마세요. 그것은 거들면 안돼요. 거든다고 되는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것을 내가 좀 도와드릴게요. 제가 힘이 된다면 좀 보태드릴까요?” 이럴 수가 없어요. 우리는 창조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빽을 쓰고 힘을 쓴다고 해서 지옥 갈 사람이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권한 밖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주제넘게 시비 걸고 간섭하고, “예수님! 일을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하면서 브레이크를 걸고 나서면 안돼요. 제가 이렇게 하니까, 여러분이 듣기에 좀 기분 나쁘다는 생각이 안듭니까? 내 운명에 대해서 내가 나에게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해야 사는 보람이 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내 운명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에 상당히 속이 상하고 기분 더러울수가 있거든요.
내 운명을 내가 노력해도 못 바꾼다는 것이 기분 더럽지 않습니까? 상당히 불쾌하고요. 그런데 저와 여러분이 기분이 좋든지 더럽든지 간에 골로새서 1장 15-17에서 아주 맹렬하게 이야기합니다. 지옥이나 천국이나 모든 만물은 예수님 맘대로입니다. 예수님 자기 맘대로 이미 결정을 해 버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뜻대로 이미 갈라놓은 것을 어느 인간이 “예수님! 일을 그렇게 하시면 안됩니다. 이 사람은 이리로 가야 하고요, 저 사람은 저리로 가야 합니다” 하면서 건방떨면서 거기에 관여하면 안돼요. 절대 관여하면 안됩니다. ‘창조에 관해서는 내가 말할 입장이 못되고 주님께서 알아서 해 주이소.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대로 알아서 하시면 되겠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을 믿는자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아! 배짱 편하지요. 이 사람은. 배짱 되게 편한 거예요. 그런데 이 불신자들은 예수님이 창조하는 것을 인정치 않고 ‘내 운명은 내가 창조하고, 내 인생이니까 내가 결정해나가고, 내 인생은 내가 하기 나름이다’고 하면서 막무가내로 골로새서 1장 16,17절에 도전합니다. 이것을 마구 비난하고 나서는 겁니다.
이것을 막 험담하는 겁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 수 없어. 그럴 수 없어. 그런 것은 말도 안돼. 그럴수 없어. 그것은 예수님의 횡포야. 우리 인간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있을수 없어. 우리 인간들이 거기에 대해서 들고 일어나야 돼. 하나님이 우리의 가치를 모욕하도록 허용하면 안돼지.” 이런 식으로 대드는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강의하면서 먼저 이렇게 정답을 내립니다. 골로새서 1장 15, 16절에 있는 대로 예수님께서 이미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을 확정해 놓으시고, 이 땅에서 섞여 살게 하십니다. 우리는 몰라요. 그냥 섞여서 살게 하는 거예요. 나중에 분리가 될 때 예수님 맘대로 분리되는 거예요. 지금 누가 누군지는 예수님만 알고 우리는 몰라요. 어쨌든 같이 섞이게 하시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결론적으로 창조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면, “그러면 목사님! 더 이상 이야기할것이 없네요.” 이렇게 결론 다 내렸으니 집에 가면 되겠다고 생각들 하시겠지만 성경이 상당히 두껍습니다. 골로새서 1장 16, 17절만 있으면 성경이 한 장도 안돼요. 엄청나게 두꺼운 성경책이 이렇게 두꺼울 필요가 있습니까?
이게 왜 이렇게 두꺼우냐 하면, 골로새서 1장 16, 17절에 있는 대로 “모든 것은 예수님이 알아서 한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습니다. 사람들의 그 뒤틀린 심사가 만만치 않아요. 그 반발하는 가운데 누가 있느냐? 지금도 열심히 천국가고 있는 우리가 그 파업에 함께 가담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가면서도 지옥 가는 사람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예수님! 일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일 지금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를 모독해도 유분수지 예수님은 일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얕봐도 너무 얕본다. 정말!’ 그러니까 이 성경이 두꺼울 수밖에 없어요. 인간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하는 일에 대해서 사사건건 대들고 또 대들고, 계속 시비를 건 그 역사의 현장.
그래서 제가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천국가는 사람이나 지옥가는 사람이나 사고방식이 똑같아요. 처음에 한것을 기억하는지 시험을 쳐 봐야 겠어요. 문제 나갑니다. 천국가는 사람이나 지옥가는 사람이나 사고방식이 똑같은데 천국가는 사람은 어떻게 천국에 갑니까? 정답은? 예수님 맘대로 하는 겁니다. 신자는 이것이 믿어진다니까요. 반발을 하면서도 돌아서서 이것이 믿어진다니까요.
반항할때는 열심히 반항하죠. 왜 반항하는가? 우리의 육의 본성이 걷잡을수 없잖아요. 솔직합시다. 우리는 활화산처럼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 들끓는데 때로는, 가끔씩은 ‘세상만사 내뜻대로가 아니고 주님뜻대로 되는데 내가 신경쓸 필요가 뭐가 있나.’ 그런 생각이 우발적으로 번쩍 떠 올라요.
성경책이 이렇게 두꺼운 이유는 예수님 하시는 일에 인간들이 달려들어서, (정말 예수님을 뜯어 먹듯이 달려들어서, 뜯어 먹는 다는 표현보다는 사실 죽이지요) 십자가에 창으로 찌르고 못박아서 죽이는 대목도 있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선지자들을 학대하고 죽이고 핍박했습니다. 그 긴긴 기록을 하다 보니까, 또 예수님 이후에 사도들이 고생한 것들을 기록하다 보니까 그것이 이만큼 두꺼워진거예요.
이 두꺼운 것을 간단하게 한 두 문장으로 이야기한다면, 창세전부터 예수님이 계셔서, 세상이 어떻게 반발하고 반항하더라도 그것마저 주님이 다 익히 아시는 코스라는 겁니다. “반항은 반항대로 하고, 나의 자비로서 구원은 구원대로 받고.” 가는 코스가 그 코스입니다. “원대로 한번 반항해 봐라. 너를 지옥에 보내는가?” 그겁니다. 성도에게는. 지옥갈 사람에게는 “네 원대로 나한테 한번 아부해봐라. 내가 반드시 지옥보낸다.” 이것이 지옥갈 사람들의 코스입니다.
누가 그렇게 합니까? 예수님 맘대로 그렇게 합니다. 이것이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입니다. “모든 만물은 주의 뜻대로, 주를 위해서, 주로 말미암아.” 그렇게 인도하는 겁니다. 방금 제가 이렇게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을 말하니까 여러분이 굉장히 믿음이 좋은것처럼 보이는 것같은데 이것을 한번 지워보겠습니다. 이것을 지우고 이렇게 구분되는 것을 지워버리면 남는 것은 누구냐? 신기하지요?
남는것이 뭐예요? 아주 정상으로 돌아오지요. ‘근본? 나는 그거 몰라도 돼. 그냥 밥이나 먹고 살면 돼. 우리 조상? 다 그렇게 살아 왔잖아. 우리 자식들? 다 그렇게 살건데 뭐. 이것이 인생이다. 인생 별거냐 이것이 전부지.’라고 아주 생각이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골로새서 1장 16, 17절이 투입되면 갑자기 정상적인 사람이 바뀝니다.
‘아니야! 세상이란 것은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다 결정났어’ 라고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딴판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늘 그런 것이 아니고 가끔은 그래요. 한 달에 한 5초쯤은 그래요. ‘세상은 주의 뜻대로 되는 거야.’ 그런데 예수님만 지워 버리면 정상으로 돌아오죠. ‘사는것 뭐 별거냐? 근본 그런 것은 알아서 뭐할거냐? 애 키우고 살면 되지. 죽은 다음의 일은 죽어봐야 아는 것이지. 그런것 몰라도 사는데 아무 지장 없는데.’
어떤 사람 만나도 지옥과 천당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고요. 악수나 먹으면서 인사나 하면서 , “날이 무지 덥죠. 수박이나 함께 드십시다. 내일 비 온다고 하던데 좀 시원해 지겠네요.” 이렇게 슬슬 날씨 이야기나 하면서 아주 정상으로 돌아오죠. 그런데 이 무슨 조화인지, 골로새서 1장 16,17절이 머리에 딱 떠오릅니다.
그러면 ‘아니야! 아니야! 비온다고 그것이 구원이 아니야! 비오건 안오건 간에, 우산을 쓰고 비안맞든, 우산을 안쓰고 비맞든 전혀 상관없이, 내가 지금 중동지역에 갔다가 탈레반에 잡혀서 총에 맞아 죽으나, 몇십년 더 사나 상관없이, 술집에 가서 술먹고 꽥꽥거리든, 기도한다고 두손을 모으든 전혀 상관없이’ 구원은 누구 맘대로 된다? 내가 기도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술먹는다고 지옥가는 것도 아니고 뭡니까? 예수님 자기 맘대로입니다.
예수님 맘대로 입니다. 아주 신기해요. 이것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 봅시다. 괜히 이런 소리 오래 했다가는 욕 얻어 먹으니까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 봅시다. 지금부터 이 정상적인 세상 안에서 인간은 어떤 종교생활을 하는가를, 지금부터 이 성경 전체를 가지고 설명하겠습니다.
지금 뭐는 빠져 있는 상태입니까?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을 빠진 상태입니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을 때의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생활하고, 신앙생활하고, 종교생활 할 때, 그 교회가 얼마나 비 신앙적이며 예수님과 성경과 딴판이고 마귀가 하는 짓이라는 것을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이 모든 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종교심에서 나와서 얼마나 그것이 고상하게 보이는지를, 제가 한국교회와 성경을 비교하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늘 참석을 안 하신 분이 계심으로 이 이야기는 다음에 또 되풀이 할 겁니다. 지금 앞에 이야기한 것을 빼먹어 버린 채, 이 후의 이야기만 들어버리면 ‘아하! 신앙생활은, 교회생활은, 신을 섬길 때는 저렇게 하는 거구나. 그래! 열심히 매진해야지’라고 되어 질 공산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답은 뭐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다가 갑자기 뭐가 나타나요?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아하! 정상적으로 보이는 이것이 주님보시기에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잠재되어 있던 숨길 수 없는 나의 양심에다 신에 대한 알수 없는 두려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심, 전능하신 신에게 의지하는 의존심들이 짬뽕이 되고 비빔밥이 되어서 전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괜히 마음이 허전해서 믿어야만 약간의 마음정돈이 될까 싶어서 짬짬이 신앙생활 폼내는 것이었구나’ 라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겁니다.
교회라는 것, 기독교, 종교. 이것은 무서운 허상입니다. 가짜입니다. 십자가마을 수련회 강의를 들어보면 갑자기 못 듣던 특수한 용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것은 강의하면서 강조하기 위해서 등장하는 용어들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는 늘(매일같이) 가짜다”하는 겁니다. 그것을 제가 표어로 걸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공부하면서 기독교, 종교라는 것을 분석할 때, 골로새서 1장 16,17절이 빠진 상태에서 인간들이 얼마나 고상하게 종교성을 발췌해서 얼마나 고상하게 꾸미는가를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우리가 그것을 다 이미 아는데 그것을 꼭 알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는데 본인들의 대다수의 신앙을 제가 방금 이야기한 ‘아니올시다’ 하는 그것으로 저나 여러분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하는 소리입니다.
“제가 미리 알고서 그렇게 안하면 안하는거죠. 뭐” 아닙니다. 그것부터 고쳐야 돼요. 세상이 자기 안하고 싶다고 해서 안해지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은 뭘 하고 안하고에 관계없이 자기 감정이 우선입니다. 내 똑똑함이 우선이 아니고, 내 절제력이 우선이 아닙니다. 하고 안하고의 계제가 아니라 터져 나오는데 어떻게 합니까? 터져 나오는데.
제가 예를 한번 들어 볼까요?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잡혀서 죽은 사람이 있어요. 온 한국교회가 지금 그사람의 죽음과 잡혀간 사람들의 일로 눈물로 지샙니다. 순교자 하나 났다는 거죠. 참 아까운 사람이 죽었다는 겁니다. 장신신학교 나와서 칼빈주의 강의를 그렇게 잘했던 분인데, 남들이 아무도 가지 않으려 했던 그 죽음의 길을, ‘죽으면 죽으리라’하는 그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주기철도 그렇게 했으니까) 갔다는 겁니다.
“한국교회야! 그 배00의 순교자정신을 본받아야 돼.” 이런 식으로 난리를 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한국교회가 정신을 차린다는 거죠. ‘신께서 배목사를 순교자로 만든것은 타락한 한국교회 정신차리라고 스데반집사처럼 하나의 선지자적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교훈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분위기로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안타까이 보다보다 보기 힘들어서 제가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밤에 모기 한 마리 죽잖아요. 모기 죽으면 애도합니까? “아이고! 모기야! 아이고! 모기야! 네가 죽었구나” 하고 애도합니까? 배00씨 모기 한 마리밖에 안된다고 했어요. 왜 사람들이 모기 죽는데 애도하지 않습니까? 그 모기속에서 사람들은 자기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 낼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 하찮은 모기에서는 보람있고 참다우며 가치있는 인간의 존재의 의미, 하나님보시기에 가치있는 인생 같은 것이 없잖아요. 그런데 모기는 죽으면 ‘너는 내 피를 빨아먹으면서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면서 잘죽었다고 시원해 하면서, 모기 한 마리 같은 배00목사, 그 인간 죽은것 보고는 그렇게 애도하는 것은 그 사람이 나의 대체물이라는 겁니다.
내가 하고 싶었는데 차마 용기 없어서 못한 일을, 용감하게 먼저 죽음에 뛰어 들어서 한 그의 선교활동과 이슬람의 악마의 소굴에서 죽는 최후의 장렬한 모습은 평소에 내가 ‘죽어도 저렇게 죽어야 하나님의 종답다’라는 일종의 이미지 같은 것을 발췌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죽음은 모기의 죽음과는 비교가 안 되는 아주 갸륵하고 의미 있는 죽음으로 보고 사람들은 애도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지금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것이 다 맞는것 같은데 그게 바로 복음이 아닙니까?”할 분이 계시는데, 이쯤되어서 다시 한번 정상적인 생각을 깨버리고 정답으로 갑시다.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 뭐라고요? 하나님의 거룩한 일은 누가 합니까? 예수님만 하잖아요. 예수님만 하는 겁니다.
방금 제가 배00규 이야기 안하고 다른 것을 이야기 할 때는 “목사님! 더 이상 강조하지 마세요.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라고 하다가도 막상 어떤 고상한 죽음, 갸륵한 죽음, 순교자의 죽음이 나오니까 “야! 그 사람은 정말 휼륭해!”라는 이미지가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다시 이야기합니다. 세상에 훌륭한 작자는 없습니다. 휼륭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어떻게 된다고요? 예수님 자기 맘대로 하는 거예요. 지금 열 번도 넘게 이야기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다른 창조 염두에 두지 마세요. 그게 성경의 뜻인데 여기에 인간적인 생각이 들어와 버리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창조는 그냥 창조가 아니고 고상한 창조라서 고상한 사람만 뽑아서 천국에 보내고, 더러운 개떡 같은 놈들만 골라서 지옥 보낸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인간들의 창조입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윤리, 도덕, 종교, 기독교, 선교, 순교 그런 것들입니다. (이게 열이 안날수가 없어요. 조용히 하라고 그렇게 당부를 했건만 인간의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니.) 그것을그림으로 다시 그려보겠습니다. 다시 사람 그리고요. 사람 속에는 부글부글이 있어요. 이게 뭐죠? 욕망이죠. 이렇게 욕망이 끌어 오릅니다. 이 욕망에 ‘사람이 인간답게 살아야지’의 ‘인간답게’가 딱 떨어지니까, 이 욕망을 절제하면서 살아가요.
그런데 우리 속에는 밑에서 욕망이 부글부글 끓고 있고, 그 욕망이 ‘남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그것을 가지고 자꾸 채우는 거예요. A라는 사람 것도 채우고, B라는 사람의 것도 채우고, C, D 자꾸 채우는 거예요. 지금 배낭이라고 여기고, 내속에 있는 것을 다 열어보면 ‘이것은 203호 엄마의 교육이고, 이것은 옆 동 아파트에 사는 506호 아저씨의 가르침이고, 이것은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나에게 교훈하신 것이고, 이것은 교회 목사님이 이야기한 것’이 들어 있어요.
전부 다 우리는 텅텅 비어 있는데, 내 속에 남들이 어떻게 살았다는 것이 하나, 둘, 배낭에 물건 담듯이 그 수북한 쓰레기들이 담겨서 ‘나’라는 것을 이루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중에 무엇도 들어오느냐 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은 이런 일이야’라는 것도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같이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내가 남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들이 기뻐하는 일을 내가 해줘야 내가 인정을 받아요. 아까 제 숙소에서 TV를 켜니까, ‘하이킥’이라는 드라마에서 음악만 나오면 춤을 추는 애가 등장합니다. 부모가 그 애가 신경이 쓰여서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 쟤는요. 음악만 나오면 춤을 춰요. 왜 저렇게 춤을 춥니까?” 하니까 소아과 의사가 잘 답을 했습니다.
“저 애가 음악을 이해해서 그런것이 아니라, 엄마가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애가 눈치를 채고 ‘아, 이게 잘하는 짓이구나’ 해서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니까 주위 반응도 ‘아이고 내새끼 잘한다’고 하니까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19세기 말에 ‘파블로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한 실험이 뭐냐 하면, 개한테 먹이를 줄때마다 종을 치면서 줬어요.
“어이! 멍멍아! 이것 먹어라!” 이렇게 준것이 아니고 “멍멍아! 땡!” 이런식으로 먹이를 준겁니다. 그렇게 먹이를 줄때마다 종을 치니까 어느 때부터는 그 개가 ‘아, 내가 맛있는 먹이를 먹는 때는 종소리가 울리더라’는 것이 머리에 딱 새겨지는 거예요. 그래서 먹이를 먹을때마다 흘리던 침이 이제는 종소리만 들려줘도 질질 흘리더라는 겁니다. 그것이 ‘파블로프’의 유명한 심리실험입니다.
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위에서 교육한 대로 나라는 배낭속에 그대로 수북히 쌓여 있어요. 쌓여 있어서, 주위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는 쪽으로 그것만 골라서 끄집어내서 아부하고 재롱잔치를 벌이는 식으로 하면, 다른 사람들이 돈을 물어다 줘요. 돈! 다른 사람들이 나를 먹여 살리게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하고 종교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까?
종교라는 것은 (이런 것은 어린이들한테는 어려운 이야기입니다만) 어떤 신을 나 혼자 알고 있을 경우를 종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사회 모두가 인정하는 신, 백명이면 백명이 다 동의하는 신이 참된 신입니다. 저는 이것을 강강수월래라고 합니다. 강강수월래 알아요? 긴 옷입고 손에 손을 잡고 노래하면서 돌잖아요. 이 사회는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사람이 무슨 낙으로 사는지 압니까? 사람은 외로움을 잊기 위해서 살아요. 외롭지 않기 위해서 사는 겁니다. 아무리 돈많고 아무리 재벌이 되어도, 사람이 외로우면 다 갑자기 불행해져요. 그런데 부도나서 좀 어려운 처지에 있어도 “친구야! 고생했지?” 하면서 많은 친구에게서 전화가 오고, 옆에서 격려해주면 외롭지 않고 슬프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고, 정치적 동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은 혼자 못살고 강강수월래 하는 것처럼, 손에 손잡고 마음이 하나 되어서 살 때 마음에 평안과 평화를 누립니다. 사람이 누구 한사람이 삐질 때 제일 싫어해요. 만일에 이 호텔 305호실에 한 열명이 함께 2박3일을 묵는다 할 때, 아무 일 없이 잘 지내면 좋겠지만, 그중의 한명이 삐져서 밥도 안먹으면 나머지 아홉명은 다 속상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갈라놓는 것을 싫어해요. 다 같이 지옥가면 다 가고, 천국을 가도 다 함께 가야지 누구는 천국, 누구는 지옥으로 이렇게 갈라놓는 것을 싫어해요. 그래서 하나님도 적당히 타협적으로, 조정과 조절을 통해서 하나님을 결정하는 거예요. 그 하나님은 ‘순수증여자’로서의 하나님입니다. 증여란 선물(GIFT)입니다. 순수하게 선물주시는 분, 더 쉬운 말로 해서 ‘거저 은혜주시는 분’, 이 일곱자를 한자로 줄여서 ‘신’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온 모든 인류사회가 생각하는 신이란 주기만 하고 보답을 강요하지 않는 분, 베풀기만 하시는 분입니다. 어느 민족, 어느 사회도 다 이런 신입니다. 이렇게 강강수월래 하는 사람 위에 신이 있으면 이 신께서 베풀어준 순수증여를 받은 A라는 사람은 그냥 있으면 안되고 그것을 그 옆에 있는 B한테 줘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C에게 또 D에게 주게 됩니다. 그러면 이 증여를 받은 모든 사람은 누구에게 영광을 돌려야 합니까? 순수증여자 신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겁니다.
“내가 거저 받았으니 너에게 거저 주는 것이다.” 이것이 옛날 우리 조상들인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이었어요. 그 사람들은 이사를 가게 되면 그냥 있지 않고 떡을 해서 이웃을 찾아갑니다. “왠떡입니까?” “이사왔습니다.” “뭐 이런걸 다.” “제 호의니까 받아 주이소.” 옛날 사람들은 그랬는데 요새는 ‘이떡이 얼마짜리지? 500원 짜리지. 다음에 갚을때 500원짜리로 갚아주면 되겠구나’ 이래요.
요새는 돈과 상품의 교환가치에 의해서 모든 것이 돌아가지만 옛날 모든 것이 종교에 푹 절어서 살아갈 그 시대에는 인정, 사랑, 정성, 자비성, 애정이 담겨 있는채로 이웃과 이웃이 만나서 살아가는 겁니다. 두레마을이죠. “너의 집에 초상나면 내가 도와줄게. 모내기 할때도 내가 품앗이 해줄게. 허물없이.” 서로 상부상조하는 그런 시대가 우리나라뿐이 아니고 전세계 모든 민족이 일구고 살아온 사회의 힘이 되었던 겁니다. 하나의 힘을 형성했습니다.
여기에 불교가 들어오든, 기독교가 들어오든, 무슨 종교가 들어오든 그 기독교와 불교는 다 무엇으로 변합니까? 이러한 자연종교로 다 변합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그리 되었어요. 다 변해요. 이쯤해서 다시 정답 들어갑니다. 이거 맞습니까? 하나님은 어떻게 구원하신다고요? 구체적인 인물인 예수님 맘대로 입니다. 이게 골로새서에 나오죠?
그런데 제가 이런 말을 하니까 “목사님! 말을 들어보니 그런 사회가 그립다. 그런 사회가 더 좋네, 예수천당, 불신지옥 그런것 보다는 인정 넘치고, 사랑이 푸근하고요.” 여러분! 이것이 더 맘이 땡기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 봅시다. 사람이 사는 것은 서로 한덩어리되어서 외로움을 덜기 위해서 함께 어울려 사는 거예요.
이왕 같이 사는 거, 이왕에 호텔방에 한 열명이 묵기로 했으면, 서로 안싸우고 사는 것이 최고입니다. 그런데 열 명이 있는 중에서 누가 한사람이 토라지면, 종교 떠나고 제사를 떠나서, 나는 기독교 너는 불교 이런 것을 떠나서, 같은 식구, 올케 시누이 동서 사이에 그저 마음맞게 살아 주면 부모님 살아생전에 그것보다 더 큰 효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기독교건 복음이건 때려치우고, 형제간에 안 싸우고 우애 좋게, “너 얼마 부조했나? 5만원?”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뭘 하든 인정과 애정이 담긴 채 서로 하나 되는 이것이 사람 사는 것이 아닙니까? 종교니, 복음이니, 예수 그리스도니 그런 것 다 때려치우고요. 사람 사는 것은 강강수월래입니다. 다 함께 손에 손잡고 서로 싸우지 않고 화목하게 지내는 거요.
그렇게 화목하려면 무엇이 같아야 된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같아야 화목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라고 했습니까? ‘순수증여’, 그것이 말이 어려우면 ‘거저 주시는 분, 한글자로 줄여서 ‘신’입니다. 못난자도 거저 주시고, 잘난자도 거저 주시고. 김수미가 부른 노래도 있잖아요. “♬~너만 잘났나? 나도 잘났다. 짠짠 젠틀맨이다.”
모든 인간은 ‘잘났다, 못났다’ 하지 말고 강강수월래 하면 된다는 겁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면 된다는 겁니다. 거저 받은 사람이 다른 이웃에게 거저 주는 겁니다. 얼마짜리냐고 묻는게 아닙니다. 정성이라고 하면서 주는 겁니다. 그러면 받은 이웃이 또 다른 이웃에게 계속해서 전달하는 겁니다.
A는 하나님을 통해서 B에게 주고, B는 하나님을 통해서 C에게 주고. 이렇게 서로 서로 돕고 사는 이것이 조선시대의 두레정신, 상부상조, 네것 내것이 없는 사회, 하나님도 하나가 된 사회, 그것이 바로 외롭지 않은 사회입니다. 사람들은 돈많아도 외로운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외롭지 않고 어려울 때 친구들이 많아지고, 좋으면 좋은것도 함께 나누고, 슬프면 같이 울어주는 이것이 모든 인류의 공통된 마음의 본성입니다.
“우리 다 약하니까, 약한자들끼리 뭉쳐서 힘을 모아서 분열 없이 다툼 없이, ‘잘났다, 못났다’ 그런 것 따지지 말고 다 같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수여자 입장에서 마음을 낮추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세.” 이것이 종교를 떠나서 모든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것이 정답입니까? 이게 정답은 아니지만 정상적입니다. 그런데 그 정상을 난데없는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이 믿는자를 비정상으로 바꿔버려요.
이게 바로 천국 가는 특이한 사람입니다.
질문답변) (질문의 내용이 들리지 않네요. 답변만 녹취했습니다)
1. 진짜는 인간에게서 찾지 마세요. 찾는 다는 것 자체가 스톱되어 버립니다. 스톱되어 버리면 그것 자체가 절대화 된다고요. 절대화 되어서 남하고 자기하고 비교하게 돼요.
2. 인간이 사는 것은 이것 하나로 굳어집니다.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것.’ 그것을 이웃사랑이라고 보거든요. 세상에서는. 여기서 새삼스럽게 가짜라는 것이 나올 길이 없어요. 이것이 가짜라는 것이 되려면 진짜인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이 개입할때입니다. 가짜라는 생각이 신자는 괜찮지만 불신자 같으면 뭔가 화가 나지요. 동서간에 잘 지내 왔는데, 새로 시집온 동서가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을 이야기 해 버리면 그 집안 다 깨져 버리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