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14 - 하늘의 로봇팔
07,07,0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49페이지부터 시작을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전도서도 그렇지만 성경전체가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하나님이 애초부터 없다고 했을 때, 그러면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무슨 불편한 것이 있고, 또한 아쉬운 것이 있느냐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있으면 좋아 !!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이 잘 살아가고 있는데, "왜 하나님이 없는 거야?" 라고 하면서 애를 태우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있습니다" 라고 하면, 평소에 살아가는 것에다가 "아하, 하나님이 있구나" 라고 하는 정보를 하나 더 추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삶이 달라진다든지 하는 것은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보태는 식으로 해서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그런 자들은 나름 기대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굳이 믿지 않아도 되는 하나님을 믿어주었으니까, 하나님 쪽에서 그렇게 해서 믿는 사람에는 뭔가 주는 것이 있어야, 그것이 공평하다고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여기 교재 49페이지에서는 '사랑' 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즉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그런데 자기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자기에게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여긴다는 것이죠.
** 이것이 대립이 되는 것이 마귀로부터 온 잘못된 하나님관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아들에게 '사랑' 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도 당연히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제가 강의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없어도 살아가는데는 지장이 없다" 라고 했는데, 그러면 이 하나님의 사랑도 무엇이라는 겁니까? 물론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그렇게 여기면서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여기 교재에도 나오듯이 마귀로부터 온 잘못된 하나님관이라는 말이죠.
악마를 믿습니까?
그러면 질문을 "하나님을 믿습니까?" 라고 하지 말고, "마귀를, 악마를 믿습니까?" 라고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나오는 대답이 오히려 정답에 가깝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있으나마한 것이지만, 만약에 악마가 있다고 하면, 이것은 평소에 인간이 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는 겁니다. 왜 여름에 모기가 많으면 가만히 있을 사람은 없는데, 모기약을 뿌리든지 아니면 모기장을 치든지 한다는 말이죠.
이것을 보면 이 세상 자체는 하나님을 위해서, 혹은 악마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평소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하나님을 믿으면, 추가적으로 괜찮은 것을 하나 더 받고 말이죠. 왜 음식점에 가면 서비스로 주는 것이 있지요? 주지 않아도 되는데, 주면 좋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식당에 깡패가 있습니다" 라고 하면 그만 분위기가 달라지는데, 그때부터는 조심하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있으면 좋지만, 자기가 하는 일에 방해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악마는 그게 아니라,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 방해가 되고, 그리고 자기를 망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있다" 라는 것 대신에 "악마가 있다" 라고 하면, 그렇게 악마가 있을 때 그냥 곱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나쁜 짓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악마가 무슨 짓을 합니까? 사람들은 악마가 죄를 짓는다고 하는데, 즉 악마를 멀리 하면 죄를 짓지 않고 가까이 하면 죄를 짓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죄를 지으면 왜 나쁩니까? 죄를 지으면 나중에 벌을 받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 대신에 악마가 있다. 그 악마가 모이는 곳은 지옥이다. 그 악마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는고 하니, 죄를 짓는 일을 하는데, 그래서 당신이 어떤 죄라는 생각을, 죄을 짓고 싶다든지 하는, 그런 죄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악마가 당신을 건드렸기 때문인데, 그렇게 당신에게 벌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악마가 관여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바짝 신경을 쓰게 되데, 왜냐하면 자기가 하는 일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데 악마가 아니라 만약에 하나님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은 없어도 그만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일종의 서비스 차원이라는 겁니다.
매력적이지 못한 하나님 !!
그래서 그 하나님 앞에 무엇이 붙는고 하니까, 여기 교재 49페이지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을 가지고 온다" 라고 하는데, 아니 누가 달라고 했습니까? 물론 사랑을 준다고 하니까 받기는 받겠지만, 하지만 자기가 요구하지도 않는 것을 남이 주게 되면, 그것을 다시 가지고 간다고 해도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결국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인간은 자기가 알아서 산다고 하는 것이 토대가 되어있는 이상은, 그게 기본바탕이 되어있는 이상은 하나님은 별로 매력적이지를 못하다는 겁니다. 반면에 악마의 경우에는 조금 신경이 쓰이고 말이죠. 아무튼 그 정도라는 겁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별 수 없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인간이 스스로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언제 압니까? 나이가 70이 지나서 80이 지나고 온 몸이 성치 않으면, 그러면 그때 자기에게 그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낄까요? "아, 내 인생은 어디로 가고, 그리고 나는 왜 죽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죠. 인간이 그리 만만치가 않은데, 나이 90이 되어도 살던 행세를 그대로 한다는 겁니다.
인생이 무엇이며, 죽어서는 어디로 가는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죠. 평소에 자기 살 것만 생각하는데, 그러니 나이가 90이 넘었다고 해서 자기 미래에 대해서 걱정을 하고, 그렇게 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나이가 90살이 되던 100살이 되면,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평소에 하던 대로, 그냥 평이한 일상이라는 말이죠.
우리가 지금 전도서를 하고 있는데, 그러면 이 전도서에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악마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우리가 공통적으로 다 아는 이야기를 하는데, 즉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전도서는 그렇게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하면서 다가온다는 말이죠.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허무를 느껴라 !!
그러면 이렇게 허무하다고 하는 것은, "허무지 않는 쪽으로 바뀌어라" 라는 겁니까? 아니면 "왜 허무할까?" 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겁니까? 사실은 둘 다 정답이 아닌데, 성경에서 허무하다고 하는 것은, 만약에 이 세상 자체가 허무하지 않고 보람이 있고 즐거운 쪽으로 매진을 하게 되면, 그 순간 어떻게 됩니까? 허무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이죠.
성경은 허무하다고 하는데, 그런데 정작 자기는 전혀 허무하지를 않고 보람찬 하루를 매일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봤지? 내가 이겼지? 내가 하나님을 이기고 교회를 이겼어. 하나님이 나에게 겁을 줘도 나는 겁을 내지 않아. 그러니 내가 하나님보다 더 세지?" 라고 나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 고집쟁이들이 한 두 명이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소개하기 위해서, 혹은 복음을 알리기 위해서 아무리 쑤셔봐야, 인간 바깥에 하나님에 대해서 외면하는 기류가 강력하게 흐르고 있다는 겁니다. "도에 대해서 궁금합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궁금합니까?" 라고 하면, "전혀 궁금하지 않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장래에 대해서는 궁금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 "니나 궁금하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죠. "복을 받고 싶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 "지금 받은 복도 감당하지를 못합니다" 라고 나오고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살고 싶습니까?" 라고 하면, "내 편안한 대로 살고 싶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에피쿠로스 학파' 라고 하는데, 그러면 '스토아 학파'도 등장하는데, 이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가라" 라는 것인데, 인간은 자기가 편한 것이 최고라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감정' 이라고 하는데, 즉 '편한 감정' 이라는 말이죠. 자기 편한 대로 살겠다는 것이죠.
그러니 만약에 자기 몸이 아프면 그 편안함을 위해서 노력을 하는데, 병원에 간다든지 해서 말이죠. 그것을 두고 "인간은 감정 덩어리다"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은 따져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느낀 대로 산다" 라는 겁니다. 필링, 쉽게 말해서 '욱' 하는 성질대로 산다는 겁니다.
인간은, 감정 덩어리 !!
제가 왜 이렇게 믿지 않는 자들의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그것은 믿는 자들도 역시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니 믿지 않는 자들을 구원하겠다고 하는 것, 그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일에 대한 도전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예수님을 알았다. 그런데 가족 중에서 믿지 않는 자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든 그 사람을 교회로 데리고 가서 예수님을 믿게 해서 천국에 보내는 것이 주님의 사랑이 아니겠는가?" 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주의 일을 방해하는 중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남을 설득하거나 납득을 시킬 위치에 있지 아니한데, 그러니 구원은 전임자가 따로 있다는 말이죠. 그분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교회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목사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예수님이 하신다는 말이죠.
제가 지금까지 10여분동안 이야기한 것을 다시 정리하면, 그것을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는데, 마태복음 11장 6절을 보겠습니다.
(마 11: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실족하지 아니는 자 !!
여기에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 성경구절은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22장 21절까지, 모든 성경말씀에 다 깔려있다고 보시면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전도서도 그렇고 마태복음도 역시 그러한데, "이미 예수님의 사람이 된 자들만이 알아듣는, 즉 복이 있는 자들만 알아듣는, 그런 복의 전달과정으로서 성경말씀을 너희에게 준다" 라고, 우리는 그렇게 이해하면 된다는 말이죠.
실족과 복 !!
거기에 비해서 우리의 욕심은 무엇인고 하니, "내가 교회에 다녀서 구원을 받는 것처럼, 남들도 구원을 받았으면 참으로 좋겠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남들을 걱정하지 말라고 "니나 잘하세요"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구원의 전임자는 예수님이니, 우리가 전도를 한다든지 해서 남들을 구원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나 자질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저에게 "성도란 어떤 자들입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답변할 수밖에 없는데,
성도는 실족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실족을 딛고 복의 대상으로 등장한 자들이 바로 성도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성도는 예수님을 믿는 자입니다" 라고 간단하게 이야기를 해버리면 되는데, 그런데 이렇게 길어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태복음 11장 6절에 의해서 "우리 인간은 실족할 수밖에 없다" 라고 다시 정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인간은 실족할 수밖에 없어 !!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 편한 대로만 살아가기에 말이죠. 하나님도 귀찮고 예수님도 귀찮고 부처님도 귀찮다는 것이죠. 즉 "천당에 가든 지옥에 가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알아서 할 문제니, 제발 나를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세요" 라는 겁니다. 그러니 건드리지 않고 그냥 두면 된다는 말이죠.
전도를 한다는 것도 짜증나는 일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감정에 둘러싸여져 있기 때문에, 그게 옳다고 해서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란 겁니다. 자기 감정에 의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가는, 그야말로 마치 아메바와도 같은 존재라는 말이죠.
이 아메바가 어떠한고 하니, 건드리면 움직이지만 가만히 두면 자기가 알아서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지렁이나 개미도 마찬가지인데, 그냥 가만히 두면 괜찮은데, 하지만 건드리면 반항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그런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인간은 왜 움직이는가?
여기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 인간은 왜 움직이는가?" 라는 것인데, 이것이 오늘날 21세기 생물학자들의 제일 큰 고민거리인데 말이죠. 과학자들은 어떤 힘이 있어서 움직인다고 하는데, 뉴턴에 의해서 해와 달과 별이 움직이는 것, 그리고 진도 앞 바다의 그 밀물과 썰물을 다 예상한다는 겁니다. 심지어 조선시대에도 일식과 월식을 예상했는데, 물론 그 원리가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말이죠.
그런데 뉴턴에 의해서 힘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밀물과 썰물은 지구와 달의 관계라는 겁니다. 서로 밀고 잡아당기는 만유인력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사람들은, 물론 그때는 그 이유를 몰랐지만, 달이 뜨고 지는 것과 고기가 잡히는 것이 관련성이 있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아무튼 그렇게 밀고 잡아당기는 힘이 있는데, 그 힘을 에너지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다시 묻겠는데, 인간은 왜 움직입니까? 이런 질문은 거의 하지 않는데, 흔히 하는 질문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무엇을 하면서 살고, 그리고 나중에 커서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그런 생각을 하지, "인간이 왜 움직이지? 내 손은 왜 움직이지?" 라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원래 움직이게 되어있다" 라는 것이 아니라, "왜 움직이는가?" 라는 겁니다.
인간은 엔진부분이 없어 !!
방금 에너지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면 인간은 에너지가 있어서 움직인다고 한다면, 자동차는 엔진의 힘으로 가는데, 그러면 인간의 엔진부분은 과연 어디냐는 말이죠. 그게 없는데, 즉 인간은 엔진부분이 없다는 겁니다. 참으로 이상한데, 생물학자들의 고민이 그것이란 겁니다.
멀리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은 아는데, 그런데 정작 가까운 자기는 왜 움직이는지를, 그것은 모른다는 말이죠. 왜 움직이는지를 알아야 왜 죽는지도 알아낼 수가 있는데, 나중에 나이가 들면 그동안은 숨을 잘 쉬다가 그때는 쉬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죽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생물학자들의 고민 !!
인간이 움직이는 것은 에너지 때문에 그러한데, 그런데 그 에너지가 어디서 나옵니까? 곡식과 같은 탄수화물에서 나오는데, 그러니 부지런히 음식을 먹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음식을 먹으면 왜 힘이 나오느냐고, 그렇게 계속해서 묻는다는 말이죠.
음식을 먹으면 위에서 소화가 되기 때문에 힘이 나오는데, 그러면 소화가 되면 또 무엇이 나옵니까? 거기서 열량이 나와서, 이 열량이 에너지와 같은 말인데, 그 열량이 피에 의해서 모든 세포에 다 전달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이 움직이는 것은 세포가 살아서 움직이기 때문에 움직인다는 것인데, 그러면 세포는 왜 움직이느냐는 말이죠.
이 세포 안에는 핵과 세포질이 있는데, 그리고 거기에는 미토콘드리아라는 것이 있어서 세포의 모든 영양분을 열량으로 바꾸는 일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미토콘드리아가 그런 일을 하니 그 열량으로 인해서 세포가 자체적으로 움직이고, 그렇게 되니 우리 인간의 몸 자체가 걷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미토콘드리아라는 왜 만들어졌습니까? 여기서 갑자기 스톱이 될 수밖에 없는데, 미토콘드리아에서 열량이 나오는 것을 알겠는데, 그게 왜 있느냐는 겁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생겼느냐는 말이죠. 생물학자들의 고민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세포 안에서 열량이 나온다고 하면, 그 세포가 왜 있느냐는 겁니다.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있다 !!
제가 복음적인 정답을 말씀드리겠는데, 예수님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있다는 겁니다. 이게 복음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마태복음 11장 6절을 다시 보겠는데,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하는데, 여기서 '나'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마 11: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성도는 죽으면 예수님의 나라에 가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의 나라에 가기 이전에 성도라고 하면 어떤 식으로든지 예수님과 엮어져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엮어져야 하는데, 이 땅에서 말이죠. 그런데 학교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뉴턴의 만유인력을 이야기하고, 미토콘드리아를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모든 것은 에너지로 움직인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러면 미토콘드리아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것을 현대 생물학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은 원래 인간 바깥에 있었는데, 인간이 진화과정을 겪으면서 바깥에 있던 미토콘드리아의 원형 DNA가 형태를 바꾸어서 언제부터인가 인간의 세포 속에 들어옴으로서, 그 세포가 진화가 되어서 오늘날의 인간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가르치는 선생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또한 듣는 학생도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말이죠(ㅋㅋ). 미토콘드리아의 모습자체가 인간의 모습과 다르다고 하는 것은, 이게 인간의 바깥에 있었는데 그런데 어느 날 인간 속으로 들어왔다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수억년 전에 말이죠.
같은 세포의 차원으로 있을 때 미토콘드리아가 잡아먹혀서, 그래서 미토콘드리아가 없던 것에서 미토콘드리아가 있는 진핵세포가 되었는데, 그게 자연선택으로 진화를 해서 오늘날 개구리가 되고, 그리고 인간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 기간은 약 2억년 정도로 보는데 말이죠. 물론 거짓말인데, 그것은 일종의 종교이고 또한 미신이라는 겁니다.
과학은 곧 종교 !!
과학이 종교인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마태복음 11장 6절의 말씀인데, 예수님께서 인간을 만들었다는 말이죠.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부처님이고 간에 다 싫고, 그러니 자기에게는 아무런 소리도 하지 말라는 것인데,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무엇이 문제입니까? 자기 속에 있는 미토콘드리아를 만들어주신, 세포를 만들어주신 그분을 모르면서 자기 몸을 자기 것이라고 우기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완전히 도둑놈인데, 주인은 따로 있는데, 그런데 머리카락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고 우기면서,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자기에게 잔소리를 하지 말라고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나가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지 말라. 나는 내 편한 대로 살겠다. 그냥 평소에 내가 하는 방식대로 살 것이니, 일체 나에게 간섭하지 말라" 라는 것이죠. 그렇게 스톱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남의 물건을 훔쳐서 살아가면서, 주인이 와서 달라고 하니, 여전히 자기 것이라고 하면서 우기고 있다는 겁니다.
성경말씀과 실족 !!
사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도 필요가 없는데, 오히려 믿는 자들에게 필요하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6절에서 분명하게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모든 성경말씀은 '실족' 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 자체가 마귀에게 빠져서 자기 편한 대로 살아왔다는 말이죠. 인간은 감정의 덩어리인데, 즉 자기 편한 대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무엇을 따져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냥 끌리는 대로, 느끼는 대로, 감정 그대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느끼는 대로 살아가다 보니까 이게 무엇을 유발하는고 하니, 예수님의 복음 앞에서 실족하고 만다는 것이죠. 즉 "나는 그런 분과는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실족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발을 잘못 디뎌서 넘어지는 것인데, 그러니 성경말씀 앞에서 "나는 나다" 라고 하면서 폼을 잡다가, 이것을 '시건방지다' 라고 하는데 말이죠.
나는 나다 !!
자기에게 있는 이 세포를 도대체 누가 주었는지도 모르면서, 물론 알고 싶지도 않은데, 일단 몸이 있으니 그것은 자기 몸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게 시건방지다는 겁니다. 주인이 와서 돌려달라고 하니, "나는 당신과 같은 사람은 모른다" 라고 하면서 무시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런 고집불통이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없는 것에서 만들어주었으면, 그래서 이제 만들어주신 분이 자기 것을 회수하겠다고 하면 내놓아야 하는데, 분명히 로마서 11장에서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내놓아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 인간은 뭐라고 합니까?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습니다. 귀찮게 하지 마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믿지 않는 자들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들은 무식한 자들인데, 박사학위가 10개가 있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박사학위를 딴 것은 다 밥을 먹기 위해서, 그런 직업적인 방책으로 땄다는 것이죠. 돈을 벌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니 우리 인간은 그저 감정대로, 자기가 느끼는 대로 살아갈 뿐이라는 겁니다.
성도는, 날마다 실족하면서 살아야 !!
그렇다면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날마다 실족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말이죠. 우리의 몸이 심히 수상한데, 정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처음부터 어긋났다" 라고 하면서 시작하는데, 그게 창세기 3장의 내용이라는 말이죠.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이라고 우기고 있다는 겁니다.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감정은, 원인이 아닌 결과 !!
그 증거가 예수님의 산상설교에 나오는데, 그게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란 말이죠. 인간은 감정 덩어리인데, 형제를 미워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지독하게 사랑하는데, 즉 집착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감정이 우선이고 자기는 뒷전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미워하는 것이 먼저 오게 되면, 아무리 그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도, 그게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미운 사람은 미운 것이지, 그게 사랑으로 바뀔 수는 없는데,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인간자체가 감정 덩어리이기 때문에, 감정 자체가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해당된다는 말이죠.
감정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어 !!
조금 어려운 말이지만, 이 감정이라는 것은 "내가 생각한 원인이 어떻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기뻐할 것이다" 라고, 그런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기는 기쁨을 만들어낼 수 없는데, 기쁘면 기뻐하는 것이고, 슬프면 슬퍼하는 것이고, 그렇다는 말이죠.
가을이 되면 남자들은 약간의 우울증이 온다고 하는데, 그래서 슬퍼하곤 하는데, 그렇게 슬퍼하면 슬퍼하는 것이란 말이죠. 남들은 아무리 기뻐해도 자기는 기쁘지 않을 수가 있고, 남들은 그렇게 울어도 자기는 울고 싶지 않을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장례식을 갔는데, 자기는 별로 슬프지 않아서 전혀 울고 싶지 않는데, 그런데 남들은 마구 울고 있으니 그만 민망한 자리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화장실에 가서 담배나 피우면서 바깥으로 빙빙 돈다는 말이죠.
믿기 싫을 때도 믿어지는 것, 그게 곧 믿음 !!
인간은 감정 덩어리인데, 그런데 그 감정이 결과로 주어지기 때문에, 그러니 인간은 어떤 누구의 결과물이라는 겁니다. 즉 누군가가 자기를 붙잡고 흔들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믿음이란 무엇인고 하니, 믿음은 믿기 싫을 때도 믿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믿음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철회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즉 "나는 이제 교회에 나가지 않을 거야. 예수님을 믿지 않을 거야"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런 사람의 경우에는 전혀 믿어본 적이 없다고 할 수 있는데, 그냥 자기가 한 번 시도를 해봤을 뿐이라는 겁니다.
편의점에 가서 물건을 구입할 경우에는, "저 물건을 살까? 괜찮아. 아직은 그렇게 필요하지를 않아" 라고, 그렇게 철회가 된다는 말이죠. 극장에 가서 "이 영화를 볼까? 주인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다음에 다른 영화를 볼 거야" 라고, 그렇게 철회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감정은 어떻습니까? 감정은 결과물이기 때문에, 철회를 하려고 하면 이미 타이밍이 늦었다는 말이죠. "저 사람을 미워할까? 그래, 미워해야지" 라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 왜 밉지? 교인들끼리 미워하면 안 되는데 말이야" 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늦었다는 겁니다. 이미 얼굴이 그 표정이 다 나타나고 말았다는 것이죠(ㅋㅋ).
인간은, 자기가 주인이 아니기에 !!
인간은 이렇게 감정적 존재인데, 그런데 그 감정에 대해서 뒤처리를 하지 못하는고 하니, 그것은 자기가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주인은 따로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신앙생활은 간단한데, "주께서 나를 만들어간다" 라는 것인데, 그리고 자기는 그 결과물을 인수를 받는다는 겁니다. 매일매일이 말이죠.
그러니 성도에게 있어서 하루하루의 삶이란 무엇인고 하니, 주께서 만들어놓은 것을 인수를 받고 또 인수를 받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옳은 이야기인데,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침에 "참 잘 잤다" 라고 하면서 일어나서는,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자기를 관리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하루하루 삶이 주님을 실족케 하는 것 외에 다른 삶은 없다는 말이죠. 이렇게 주님의 결과물이면서도 자기가 원인이 되어서 자기를 조종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자기를 매일같이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이것이 매우 어려운 대목이기에 다시 설명을 하겠는데, 여기 마태복음 11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이 복이 어떤 복입니까? 그것은 어떤 경계선을 넘어서 있는 상태를 두고 복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마 11: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이미 죽음의 경계선 너머에서 !!
무슨 말인고 하니까, 자기가 획득하고 가지는 것이 복이 아니라, 자기가 있는 자리가 어떤 경계선을 넘어서 놓여있다는 겁니다. 어제 낮 시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죽음의 경계선 너머에서 구원의 능력이 오는데, 이미 죽음의 경계선 너머에서 말이죠.
여기에 휴전선과 같은 경계선이 있다고 하면, 인간은 여기서 살고 있는데, 주님은 그 반대편에서 왔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인간이 있는 쪽에는 복이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거기에는 복이 없는데, 주님이 오신 이쪽에만 복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실족을 경유해서 이쪽으로 와버리니, 그래서 "아마, 나는 실족할 수밖에 없구나" 라고 깨닫는 자들은 복이 있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실족을 하고 말고 하는 그 차이점은 무엇인고 하니, 여기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자기가 주인공인데, 즉 자기 인생을 자기가 알아서 살아가겠다는 말이죠.
그런데 실족으로 인해서 이쪽으로 넘어온 자들이 있는데, 그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 몸의 주인이 따로 있는데, 그분이 누구인고 하니, 여기 마태복음 11장 6절에서 "나로 인해서" 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을 인해서" 라는 것인데, 예수님이 주인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로봇팔로 우리를 이렇게 붙잡아왔다는 말이죠.
성령세례 !!
이것을 두고 '성령세례' 라고 하는데, 이 성령세례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올라가시니 제자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이 땅을 있을 때는, 자기 몸이 따로 있고 예수님의 몸이 따로 있어도 같이 움직일 수가 있는데, 그래서 그때는 마음이 편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들을 이렇게 그냥 두고 가버리면, 자기들은 외로워서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이제는 지시할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자기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120명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하면서 걱정을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미리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가게 되면 성령이 온다" 라고, 즉 "로봇팔이 온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바로 눈앞에 있으면, 그 예수님에게 지시를 받고 살아가면 되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면 어떻게 됩니까?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그렇게 되면 우리가 미국이 가던지 독일에 가던지 아프리카에 가던지 북한에 가던지, 거기에는 성령께서, 즉 예수님의 로봇팔이 함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한꺼번에 다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 어디를 가든지 말이죠.
여러분은 날씨도 이렇게 더운데 같이 붙어서 일을 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하늘에서 로봇팔로 조종을 해서 우리가 움직이는 것이 좋습니까? 직접 하늘에서 내려오니, 아프리카에 가도 그곳이 하늘나라라는 겁니다. 로봇팔이 있으니 말이죠. 포항이나 대구나 별로 차이가 없다는 말이죠. 물론 서울에 가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효과적인 로봇팔 !!
주님은 효과적으로 일을 하시는데, 이렇게 더운 날에 유다 동네에만 붙어서 복음을 전할 것이 아니라, 아예 주님께서는 높이 올라가 버리셨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주님의 로봇팔이 땅 끝까지 미치는데, 그러니 우리는 땅 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풍랑을 뚫고 로마까지 가서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사도바울은 이미 복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는 사람이 곧 복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지금까지 자기 몸을 자기가 알아서 살아왔음이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는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만드신 분이 따로 있다는 것을, 즉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복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복이라는 것은 자기가 뭔가 따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실족을 넘어선 위치에 놓여있는지, 아니면 여전히 실족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여있는지, 그런 위치의 문제라는 말이죠. 실족을 넘어선 위치라면 복이고, 아직도 여전히 실족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고 하면, 그 어떤 인간이든 간에 저주를 받고 있는, 즉 저주 아래에 있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권력에는 공백이 없어 !!
이렇게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닌데, 예수님은 전체를 다 포괄해서 통치하고 계시는데, 권력은 공백이 없다는 말이죠. 주님의 주되심에는 전혀 누수가 없는데, 북한의 김정은이 핵을 준비하는 것도 다 주님이 알아서 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허락이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예수님의 관심은 어느 나라가 잘 사는지, 그런 것에 있는 게 아니라, "누가 영생을 받을 자인가? 누가 저주를 받을 자인가?" 라는, 그것만하면 끝이라는 겁니다. "너는 어느 교단에 있지? 신천지에도 들어갔다가 나왔지?" 라는 것은 묻지도 않는데, 합동 측이라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최고의 혼수품 - '요 3:16' !!
요한복은 3장 36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저는 이것을 최고의 혼수라고 보는데, 시부모가 되어서 며느리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혼수는 바로 이 말씀이란 겁니다.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며늘아, 너의 친정이 얼마나 잘 사는지는 모르겠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저주 아래에 있다" 라고 말이죠. 그것은 사위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죠. 시계가 어떻고 이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이면 족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최고의 혼수를 어른들이 왜 사위나 며느리에게 선뜻 주지 못하는고 하니, 사위나 며느리가 눈치도 없이 "아버님은 그렇게 살았습니까?" 라고 하면서 싸가지가 없이 나올 때는 부끄럽기가 짝이 없다는 말이죠. "아버님은 이 세상에 대해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영생이 머리에 있는 것으로 만족해하면서, 평소에 그것을 복이라고 여기면서 살았습니까?" 라고 한다면 곤란하다는 겁니다(ㅋㅋ).
자기가 던진 요건을 저쪽에서 받아서 도로 던지게 되면 그야말로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는데,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너는 시집을 올 때 얼마나 해서 왔지?" 라고 하면서 그만 얼버무린다는 겁니다. 그런 것들은 전혀 혼수감이 되지도 못하는데 말이죠.
보통 함진아비가 함을 지고 갈 때는 어떻게 합니까? 오징어에다가 구멍을 뚫어서 머리에 쓰고 가는데, 그러면 신부 측에서는 봉투를 가는 길에다 놓는다는 말이죠. 물론 그 봉투 안에는 돈이 들어있는데, 당연히 만원 짜리인 줄 알고 좋아했다가 천원 짜리가 들어있어서 열을 받지만 말이죠(ㅋㅋ).
하지만 제대로 하려면 돈이 아닌 말씀을 던져주어야 하는데,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다" 라고, 그리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다" 라고 것이죠. 그러면 돈도 적게 들고 은혜가 되고 좋은데, 물론 삐치면 함을 내려놓지 않고 돌아갈 수도 있지만 말이죠. 아무튼 이렇게 보면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우리 인간을 실족케 할 수밖에 없는 요인들이 깔려있다는 겁니다.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
어려워서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하겠는데, 지금 교인들의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의 지식으로 남들을 전도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라고 것인데, 즉 자기의 업무가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해도, 그래서 자기만 알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서 남들에게 전한다고 해도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인간이 인간을 전하게 되면, 그것은 복음싸움이 아니라 그만 감정싸움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아는 사이라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들어주자니 왕짜증이 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만 감정 싸움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이 자기의 이성과 지식을 이야기해도, 인간은 그런 이성과 지식 이전에 감정이 먼저 깔려있기 때문에 어떻게 됩니까? 쉽게 말해서, 자기가 30분 동안 열심히 복음을 이야기했는데 상대방이 알아주지를 않으면 화가 난다는 겁니다. 즉 "내가 이렇게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는데, 니가 뭔데 알아주지 않는가?" 라고, 그렇게 감정이 튀어나온다는 말이죠.
전도와 하늘나라는 전부가 다 주님의 소관이지 우리 소관이 아닌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그것은 주님의 로봇팔이, 즉 성령과 더불어서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는 제가 할 말이 많이 있는데 말이죠.
보통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제가 구원을 받은 것은, 어느 집사님의 전도를 받아서 교회에 가서 등록을 해서 받았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은 언제 알았습니까?" 라고 하면, "저는 지금도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은 교회에 등록을 했을 뿐이지, 하늘나라에 등록된 적은 없다는 겁니다.
교회의 초대를 받은 적은 있겠지만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적은 없는데, 로마서 8장 30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라고 하는데, 그것은 주님만이 하실 수 있지, 다른 사람은 안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주님이 불러주셔야 의롭다 하시고,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는 겁니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믿음은, 이성이 아닌 감정의 문제 !!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당신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라고 한다면, 이게 바로 조금 전에 이야기한 것인데 말이죠. "나는 이렇게 해서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하면 안 되는데, 그것은 이성의 문제이고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감정으로 답변을 해야하는데, 즉 "나는 예수님을 믿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 믿어집니다" 라고, 이것이 감정으로 답변하는 것이란 말이죠. "나는 오늘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싶고 내일도 믿고 싶은 마음이 없어. 나도 당신과 똑같은데, 나도 내 혼자 편하게 살고 싶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떻다는 겁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더 편한 감정으로 자기에게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는 말이죠. 이것은 결코 자기가 의도한 것이 아닌데, 그러니 신앙에 대해서는 감정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성이 아닌 감정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상대방이 "그런 감정을 나도 가지고 싶어" 라고 나온다면, 하지만 그런 것은 묻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것은 어쩔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게 바로 전도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하는 전도를 방해하는 것이 주님의 전도라고 정리할 수 있는데, 우리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는 전도를 주님께서 찢어버리시는데, 그런 과정 속에서 주님의 전도가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우리의 말을 듣고 상대방이 구원을 받는 일은 생기지 않도록, 그렇게 주님께서는 그 전도에 개입을 하신다는 말이죠.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믿습니까?" 라고 해서, "예, 믿습니다" 라고 했다면, 그러면 "믿은 것을 한 번 따라해 보세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교회를 위해서 어쩌고" 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Why Me, Lord?
그러면 예수님을 믿었다면 어떤 고백이 나와야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나의 능력으로 전혀 믿을 수가 없는데, 그런데 왜 믿어지는지, 그것은 나도 모르겠다" 라는 겁니다. 그것이 "Why Me, Lord?" 라는 것인데, 굳이 번역을 하면 "주님, 왜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십니까?"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한 감정적인 고백이 나올 때, 그것은 누군가가 설득을 해서 나오는 고백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가운데 개입을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왜 제가 구원을 받았습니까?" 라는 것은 자리가 달라질 때, 즉 이미 복이 있는 자리에 있을 때만 나오는 고백이라는 말이죠.
자기의 이성으로는 예수님을 믿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데, 그런데 자기의 감정은 믿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그런 감정이 이성을 날마다 이기고 있다는 겁니다. 그냥 편하게 살고 싶다는 자기 본성이 주님이 주인이라고 하는 감정에 늘 지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주님의 영역 속에, 즉 영생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굳이 남들에게 해야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 사람이 가짜임을 들통내기 위해서 그러한데, 그러니 전도라는 것은 간단한데, 무엇입니까? "너, 믿지 않지?" 라는 것인데, "너는 믿지 않으면서 믿는 척을 하고 있는 것이지 맞지?"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것이 사도바울이 했던 전도인데, 사도바울이 1차, 2차, 3차에 걸쳐서 유대인들에게 전도를 했는데, 그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까? 믿지 않는 자들입니까? 그야말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했던 자들인데, 거기에는 근거가 있는데, 그만큼의 기적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성을 능가하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들은 믿는다고 자부를 했다는 말이죠.
정말 복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볼까?
그런데 아까 본 마태복음 11장 6절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들은 그 말씀을 듣기도 이전에 이미 복을 받은 민족이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말로 복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보자" 라고 하는 것이 바로 전도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목사님, 저는 교회에 20년을 다녀서 권사가 되었는데, 그동안 하나님이 얼마나 축복을 해주셨는지 모릅니다. 암도 낫게 해주시고, 아이가 취직도 되게 해주시고, 지금도 그 주님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믿는 척을 하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믿음이 아닌데 말이죠.
그래서 그것이 믿음이 아닌 가짜라는 것을 들통이 나도록 하는 방법은, 성경말씀대로 복음을 전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쪽에서는 열을 받는데, 이성에서 감정으로, 즉 복음이 미워지기 시작한다는 말이죠.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라고 하는 말 한마디에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인간은 찬란한 자기 역사를 계속해서 자기 것으로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말이죠.
이제 이 정도는 알았다고 치고 연습문제로 들어가겠는데, 여기에서 마태복음 7장 12절을 보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 말씀을 제대로 해석한 것을 보지 못했는데 말이죠.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먼저, 엉터리 해석을 !!
지금 제가 50분 동안이나 이야기를 했는데, 여러분이 그것에 입각해서 과연 이 12절 말씀을 해석할 수 있을지, 물론 저는 그것까지는 기대하지 않는데 말이죠. 그러면 기존의 해석을 먼저 말씀해드리겠는데, 그리고 그것이 왜 아닌지, 거기에 대해서 정리를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올바른 해석이 무엇인지, 그것을 여러분에게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기존의 해석은 무엇인고 하니, 먼저 이것이 틀렸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말씀해드리겠는데 말이죠.
그들은 여기에 무엇을 집어넣는고 하니, '사랑'을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즉 "모든 율법의 완성은 사랑에 있다. 따라서 산상설교에서 이 말씀을 주신 것은, 내가 남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게 되면, 이게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이다" 라는 것인데, 이게 기존의 해석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전혀 아닌데, 왜 아닌고 하니, 제가 모든 성경말씀에는 그 전제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마태복음 11장 6에 보면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서 '나' 라는 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성경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 누가 들어가야만 한다는 겁니까? 예수님이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성경해석을 함에 있어서 '너'와 '나'만 달랑 있다는 겁니다. 즉 "내가 당신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러니 당신은 그 사랑을 받아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세요.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입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여기에는 예수님이 등장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무슨 요소가 빠져있는고 하니, 실족할 요소가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은혜를 받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너무나 사랑하지 않았어. 주님의 사랑을 안다고 하면서 교인들끼리 너무 질투하고 미워했어. 주님의 산상설교의 요구가 이것이라고 하면,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서 율법과 선지자를 우리가 완성해야지. 그것이 성도의 바른 도리야"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고함을 쳐도 전혀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은데(ㅋㅋ),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일차적으로 주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면 이차적으로 이웃과의 관계도 바르게 된다" 라고 말이죠. 그런 식으로 배웠지요? 하지만 그게 바로 엉터리이고 다 거짓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보이지 않는 신과 바른 관계가 되면 눈에 보이는 인간과도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라는 것인데, 인간이라면 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이죠. 공자나 부처님의 말씀 속에 이것이 다 들어있는데, 물론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겁니다.
'사랑'으로 하나가 되자 !!
공자가 "자기에게 싫은 일은 남들에게 하지 말라" 라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공자나 예수님이나 같은 수준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처음의 해석이 맞다고 하면 말이죠. 그렇다면 공자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말씀이나, 구원을 받기는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진리는 하나인데, 그 가는 길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죠. 마치 산 정상으로 가는데, 가는 코스는 여러 개가 있듯이 말이죠.
그렇게 해서 정상에 도착하면, 거기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사랑이 기다리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하나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종교인들은 서로 싸우지 말고 모여서 단합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세계종교대회' 라는 것이 생겼다는 겁니다. 즉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인데, 그러면 우리는 마음이 편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그것을 아까 배운 공식을 대입해서 해보겠는데 말이죠. 인간은 이성적 존재입니까? 감정적 존재입니까? 감정적 존재인데, 인간은 감정 덩어리라는 겁니다. 이유도 모르고 무조건 그렇다는 말이죠. 왜 미워하는지도 모르는데, 아무튼 자기 편한 대로, 그렇게 감정대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따지는 것은 나중에 핑계에 지나지 않는데, 사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죠. 나이가 80이 되고 90이 되어도 말이죠.
사람은 그렇게 자기 감정대로 살아가는데, 그런데 그 감정에는 노림수가 있는데, 즉 "누가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가?" 라는 겁니다. 이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도 거부하지 않는데, 그래서 "신은 ( )이다" 라고 했을 때, 여기에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집어넣는 것은, 그것이 바로 '사랑' 이라는 겁니다.
'사랑' 이라는 보편성 !!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이라고, 그 노래가 왜 그렇게 인기가 많고, 심지어 TV연속극에도 방송이 되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 이름으로 ♬" 라는 노래는 왜 나오지 않습니까? 불교의 찬불가는 나오는데, 찬송가는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죠. 신부가 고아를 돌보는 것은 되는데, 예수님의 이야기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보편성인데, 감정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일치된 것은 '사랑' 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거기에 예수님을 이야기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사랑의 반대개념, 즉 미움개념이나 저주개념을 유포한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은 국론을 분열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불교의 경우에는 모두가 부처가 되는 것인데, 즉 "당신은 고귀한 존재다" 라는 것이죠. 제발 자기 자신을 소중한 존재로 여기라고 하는 것, 이것이 부처가 가르친 진리라는 겁니다. 길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보살을 만나면 보살을 죽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자기가 이미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우치면 되는데, 그렇게 깨우치는 것을 두고 '해탈'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동안은 이 세상의 욕망의 잠겨서 눈이 감겨 있었는데, 그런데 성불을 해서 눈이 열리게 되면 "나는 고귀한 존재구나. 이 세상에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즉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부처의 가르침이라는 것이죠.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만 불교의 전도사가 되고 말았는데 말이죠(ㅋㅋ).
거부감이 없는 '사랑' !!
그러니 여기에 무슨 거부감이 생기겠습니까? 오히려 우리가 평소에 다 바라던 바라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제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창세기 3장에 보면 그것이 어긋나있다는 말이죠. 만약 그렇게 되면 자기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자기 자신인데, 그런데 마태복음 11장(7장?)에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자기 것을 돌려달라고 하는데, 즉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악한 인간들이 각자 자기가 주인이라고 우기면서 '종교' 라는 연합체를 만들었다는 말이죠. 그 연합체의 교리는 하나밖에 없는데, 즉 "부처든 신이든 절대적으로 ( )이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이라는 것인데, 즉 인간은 사랑을 받고 싶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물론 기존의 사랑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으로는 자기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사랑을 받기 원하는데, 자식들을 매일같이 전화를 해주고 말이죠. 물론 자주 찾아오는 것은 좀 그렇고, 허리가 아파서 가고 나면 청소하기가 귀찮아서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돈이나 좀 붙여주고 전화나 자주 해주면 된다는 말이죠(ㅋㅋ).
그러니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남들에게 대접한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즉 "내가 원하는 것을 누가 해주게 되면, 그것이 사랑이고 율법과 선지자다" 라는 식으로 그동안 그렇게 이 말씀을 해석해봤다는 겁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주면 말이죠.
아, 자존감 !!
그러면 인간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게 바로 '자존감' 이라는 겁니다. 평소 우리 인간의 감정은 자기 자존감, 혹은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존심은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니까, 자존심보다는 자존감이 더 적당한데 말이죠. 즉 "나는 스스로 있다" 라고 하는 절대적인 감정에 우리는 휩싸여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누구라도 자기 자존감을 동정해주고 동의해준다고 하면, 둘의 관계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이죠. 남녀가 사랑을 해서 결혼할 때, 자존감을 무시하고 하는 법은 없는데, 서로의 자존감을 인정해준다고 하는 조건 아래서 서로 결혼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쌈, 마이웨이 !!
예를 들어서, 남자와 여자가 동거를 하고 있는데, 그런데 그만 남자가 술을 마시고는 과거에 사귀던 여자의 집에 가서 잤다고 하면, 설령 그게 동침을 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여자는 그 남자와 헤어지려고 하는데 말이죠. 그때 여자가 남자를 보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내가 당신의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먼저 나의 잡은 손을 놓고 다른 여자에게 갔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TV드라마에 나온 대사인데, '쌈, 마이웨이' 라고 말이죠. 그러니 여자는 늘 손을 잡고 있는 관계라고 보았는데, 그렇게 손을 잡고 있을 때 여자는 자기 자존감이 그 남자로 인해서 한껏 높아져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는 않는데, 사랑의 대상은 오직 자기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자기 자존감을 세우는데 있어서 상대방이 도움이 된다고 하면, 그래서 상대방과 손을 잡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만 그 남자가 다른 여자의 집에 감으로서 자기 자존감을 그만 완전히 박살내고 말았는데, 그래서 이제는 자기도 그 남자의 손을 그만 놓겠다는 겁니다.
물론 그 드라마에서는 내용상 그 남자가 잘못한 것으로 나오지만, 하지만 그 여자도 그 남자를 사귈 때부터 어떻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일상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말이죠. 그 여자는 자기의 자존감을 세우기 위해서 그 남자를 이용했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악마의 고집 !!
그러니 그 어떤 인간이든 자기 사랑을 떠나서, 자기 자존감을 포기하면서까지 남을 사랑하는 것은 없는데, 그런 것은 애초에 우리 인간에게 없다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이상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을 놓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심지어 지옥에 가도 자기 자신을 놓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어디라도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위로해주는데, 그 정도로 우리 인간의 고집이 보통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을 '악마의 고집'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게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노출이 되는데, 그러니 평소에도 그것이 우리 안에 이미 깔려있다는 말이죠.
좋은 것이 좋다고 하면서 아무리 서로 친하게 지내려고 해도,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악마의 고집이 깔려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 터지게 되면, 즉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의 집에 가서 자든지 하면, 그 좋던 관계가 그만 다 깨지고 만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남자는 그동안 투자한 것을 모두 날리고 마는데, 그러면 남자가 여자에게 왜 투자를 했을까요? 그것은 여자와 마찬가지인데, "나는 이런 여자와 산다" 라고 하면서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서, 그렇게 자기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 투지를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한 순간의 실수로 그만 다 날아가고 말았다는 것이죠.
이 시루떡을 좀 드세요 !!
아직까지 제가 마태복음 7장을 해석하지 않았는데, 다만 이것을 해석함에 있어서, 서로가 각자 자기 자존감을 세우고 있는 입장에서, 사랑한다고 하든지, 대접한다고 하는 것은, 즉 "오늘 이사를 왔으니 이 시루떡을 좀 드세요" 라고 한다면, 그래서 상대방도 거기에 보답한다고 하면서 "여기에 참외가 있습니다" 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되면 그게 과연 율법과 선지자를 다 이룬 것입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시루떡과 참외를 가지고서 마태복음 7장 12절을 다 이룬 것입니까? "남에게 대접을 받던 대로 대접을 하라" 라고 했으니까, 그야말로 '딱'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성경말씀을 지키기가 참으로 쉽다는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그만 예수님이 빠졌는데, 그렇게 예수님이 빠지면 실족하는 것, 즉 "나의 자존감이 나를 지옥으로 보낸다" 라고 하는, 그것을 노출시키는 사태가 빠져있다는 겁니다. '실족' 이라고 하는 의미가 말이죠. 그렇다면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면 됩니까? 그러니 그것이 아니라고 하면,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면 되는고 하니, 기본적으로 산상설교 전체가 그러한데 말이죠.
끝없는 용서 !!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하고 난 다음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뭐라고 합니까?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면 됩니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라고 했는데,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마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마 1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쉽게 말해서, 베드로의 경우에는 "예수님, 일곱 번을 용서하게 되면 이것이 사랑입니까? 이것이 용서입니까?" 라는 것인데,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의 일흔 번을 용서하라고, 즉 "490번을 용서하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용서에는 끝이 없다" 라는 것이란 말이죠.
갑과 을 !!
그렇게 용서에 끝이 없다고 하면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보면 안 되는데, "나는 베드로, 저 사람은 나에게 해꼬질을 한 사람", 그렇게 보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거리를 두면 안 되는데, 그렇게 되면 아무리 해도 용서가 되지를 않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자기는 용서를 해주는 갑이 되고, 상대방은 그만 용서를 받는 을이 되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과 자기의 자리는 거리가 생기는데, 이 거리는 제 아무리 이으려고 해도 이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우리 인간이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자기가 독자적인 개별체로 자부하는 이상, 남에게 대접을 한다든지 용서를 한다든지 사랑을 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거리감으로 인해서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해내시는데, 그러니 이 산상설교는 우리 인간이 "나는 나다" 라고 하는 독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상 도저히 지킬 수가 없다는 겁니다. 전혀 불가능한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말씀을 주셨다는 말이죠.
예수님과의 격차 !!
그러면 지키지도 못하는 말씀을 왜 주셨습니까? 이 말씀을 누가 가지고 가는고 하니, 예수님 본인이 가지고 가셔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라고 하는 이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 이해를 했고, 그리고 예수님은 어떤 식으로 이해를 했는지, 그 격차를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렇게 격차를 보여주게 되면, 자기 딴에는 남을 대접했다고 우기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자기가 하는 식이 맞다는 것인데, 자기가 성령을 받아서 말씀을 지키는 것이 맞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자기 자존감을 높이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고 말았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율법을 지켰으니 말이죠.
사울의 경우에, 자기는 율법에 흠이 없는 자라고 했는데, 즉 율법이 자기를 저주받게 하는 게 아니라, 자기는 오히려 그 율법을 다 지켰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즉 "나는 착해. 나는 율법에 흠이 없어. 어디 한 번 따져봐?" 라고 한다는 말이죠.
(빌 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하지만 말씀은 우리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 준 것이 아닌데, 오히려 실족하라고 주셨다는 겁니다. 넘어지라고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누구 앞에 넘어져야 합니까? 예수님 앞에 넘어져야 하는데, 그러면 여기서 남은 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이 말씀을 주님께서 어떻게 이루시는가?" 라는 것만 해결하면 된다는 겁니다.
진지왕 이야기 !!
지금 카메라에 문제가 생겨서 강의를 하는 동안 계속해서 찜찜한데, 이게 감정적인 요소가 되어서 말이죠(ㅋㅋ). 어제 낮에 한 이야기인데, 너무 어려워서 그냥 넘어갔는데 말이죠. 즉 "조건을 제안하는 쪽에서 조건을 위반했다" 라는 겁니다. 분명히 했다는 말이죠.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예를 들면, 신라시대에 임금이 있었는데, '진지왕' 이라고, 그런데 이 사람이 바람둥이라는 겁니다. 이름과 달리 진지하지 않다는 말이죠(ㅋㅋ). 자기 신하가 출장을 갔는데, 이게 마치 사무엘하 11장에 나오는 다윗과 우리야 장군의 이야기와 비슷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임금이 그 신하의 아내를 보고 동침할 것을 요구했는데, 신랑이 지금 출장을 가고 없으니 말이죠. 그러자 그 여자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그렇게 되면 나는 신랑이 두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나의 몸은 하나이니 그렇게는 안 됩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자 왕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오케이, 알았어. 신랑이 한 사람이 되면 나에게 시집을 올 수 있다는 말이지?" 라고 한다는 말이죠.
여기에 엄청난 반전이 있는데, 우리의 상식은 무엇인고 하니까, 다윗처럼 남편을 죽여서 아내를 차지하는 것인데, 그런데 그만 임금이 죽어버린다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진지왕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 아니라, 제가 꾸며서 덧붙이는 겁니다. 바람둥이가 그렇게 나올 리가 만무하다는 말이죠(ㅋㅋ). 아무튼 그렇게 두 사람 중에서 하나를 죽여버린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는데, 그 율법을 지키는 자를 의인이라고 하고, 율법을 어기는 자를 죄인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는 것인데, 그런데 율법이 다가올 때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노림수가 있다는 말이죠. 즉 의인을 만들어내는 자체적인 목적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죄인인 인간들이 뭐라고 합니까? 자기가 의인이라고 우기는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율법의 본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서, 즉 "남에게 대접을 받기 위해서 남을 대접하라" 라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그 '남'을 만들기 위해서 의인이 의인의 자리에서 죽는 게 아니라 죄인의 자리에서, 즉 율법의 저주를 한꺼번에 다 받아버리는데, 그리고는 사흘만에 부활한다고 하면, 그분의 뜻에 의한 자는, 율법이 아니라 그 무엇이 오더라도 의가 충만한 의인이 된다는 말이죠.
율법을 제시한 당사자가 위반자가 됨으로서 !!
진지왕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나오지만, 그런데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는 없어요(ㅋㅋ). 즉 율법의 요건을 제시한 그 당사자가 율법의 위반자가 됨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율법에 시달리지 않는 상태가 되면, 그게 천국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 상태, 그게 곧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율법으로 아무리 공격해도 죄가 없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태여 율법으로 공격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은 악마에 속해있기 때문인데, 이 악마가 하는 일이 있다는 말이죠. 악마는 모든 인간을 정죄하는 일을 한다는 겁니다.
강의 처음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모든 인간은 감정 덩어리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복음을 이야기해도 귀담아 듣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해야하고, 교회에서도 이야기를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이 "나는 이렇게 이렇게 해서 예수님을 믿는다" 라고 하는 논리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교리나 신학과 같은 것이 말이죠. 그러면 감정은 어떻게 되는고 하니, "Why Me, Lord?" 라는 것인데, 즉 "주님이여, 저 같은 인간은 왜 건져내시려고 그렇게 하십니까? 괜찮은 인간들이 저렇게 많은데, 왜 하필이면 저에게 그렇게 하십니까? 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라고 말이죠.
이유를 묻지 말라. 그냥 믿어진다 !!
그것은 자기가 믿고 싶지 않아도 믿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이성차원이 아니라 저 밑바닥의 감정차원이라는 말이죠. 이성은 철회가 가능하고 수정이 가능하지만, 감정이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저 사람이 밉다" 라고 하면, 그 이유를 묻지 말라는 겁니다. 그냥 밉다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을 왜 믿지?" 라고 하면, "이유를 묻지 말라. 그냥 믿어진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전혀 감정의 차원이라는 말이죠.
이렇게 정말로 주님이 찾아오셨다고 하면, 교회에서 그 무슨 일이 일어나고 목사가 무슨 소리를 해도 예수님을 믿는 자라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믿지 않는 요소들이 발생해도 괜찮은데,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믿는 척을 하는, 그런 믿지 않는 자들이 빠져나가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태복음 7장 12절의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라고 하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그 누구라도 죄인을 위해서 죽는 자는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자기 자존감을 높여줄 때, 그것을 사랑으로 이해하는데, 그러니 "당신은 죄인이기에 저주를 받습니다. 악마가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누가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런데 실족함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즉 복을 받은 자에게는 어떻습니까? "당신은 죄인이야!" 라고 하는 소리가, "당신은 구원을 받았어!" 라고 하는 것과 동일하게 들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소리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른다는 말이죠.
우리의 깊숙한 감정의 층까지 !!
아까 성령을 뭐라고 했습니까? 로봇팔, 이게 오늘 강의제목이 되겠는데 말이죠. 그 로봇팔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의 이성, 논리, 교리, 성경공부 등등, 이런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깊숙한 밑바닥을, 우리의 자존감을, 그런 우리의 감정을 유발시키는 층까지 내려간다는 겁니다.
우리 지구가 무엇으로 되어있습니까? 지금 우리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껍데기인데, 겨우 10에서 15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을 지각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야말로 카스테라의 그 약간 검은 부분, 그런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밑에 있는 4천키로는 맨탈로 되어있고, 그리고 더 깊숙하게 들어가면 외핵이라는 무거운 액체가 있는데, 여기서 자기장이 나와서 태양의 해로운 요소들을 다 막아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태양 아래서 무사히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햇볕을 볼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도 이렇게 지구로 보면, 우리 인간의 내부에는 감정이 들어있어서, 이게 이성으로 조절이 되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좋은 걸 어떻게 합니까? 미운 걸 어떻게 합니까? 예쁜 걸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나이가 90이 되어도 예쁜 여자가 좋은데, 이것을 과학에서는 호르몬의 작용이 어떻고 하는데, 그러면 그 호르몬을 누가 준 것입니까? 그러니 전혀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지금 4차산업의 시대에 와서는 어떤 시도를 하는고 하니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주사기를 가지고 사람의 몸 속에 집어넣어서 만들어내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고집이 센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신경전달물질을 집어넣어서 온유하고 자비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일종의 마약과도 같은데, 그런데 그것을 왜 개발해야 하는고 하니까, 타고난 성질이 고약하고 이상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도저히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말이죠.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신경전달물질을 집어넣으면, 그 다음부터는 남을 배려하고 해꼬질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DNA를 조절하면 착한 사람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죠.
뇌 임플란트 !!
그렇게 착한 사람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뇌 임플란트' 라고 하는데, 즉 악마의 이빨은 빼내고 천사의 이빨을 심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을 만드는데, 앞으로 그런 시대가 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굳이 부흥회에 참석해서 박수를 칠 필요가 없는데, 주사만 한 대 맞으면 된다는 겁니다.
과학이 그렇게 되는데, 하지만 제 아무리 그렇게 해도 예수님이 찾아오시지 않으면, 하늘의 로봇팔이 오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그 자체가 저주라는 겁니다. 주님의 말씀에 실족하게 되면 모두가 저주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도 주님의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얼마나 거부감을 나타냈는지 모른다는 것이죠.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죄인이 맞아!" 라고 하면서, 그것이 죄를 지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하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죄를 짓고 말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가 도둑놈인데, 왜냐하면 주님이 주신 몸을 가지고 자기 몸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 몸이 내 것이 아닌데, 그런데 내 것이라고 마구 우기면서 살아왔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그 사람은 로봇팔이 임한, 즉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이전과는 다른 생활을 하려고 하면 안 되는데, 그러면 또 다시 자존감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즉 "구원을 받았으니 바르게 살아야지" 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전의 자존감의 반복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달라지지 않는다 !!
그러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 느낌을 아니까, 즉 구원받은 느낌으로 살아가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내가 성경말씀을 많이 보고 성경공부에 참석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달라지지 않는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그냥 주님의 것으로서, 주님의 영광의 위해서 사용되어질 뿐이지, 자기 마음에 맞도록 어떻게 달라지고 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 느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이 믿으니까 자기도 같이 믿어야 되는 줄로 알았는데, 남들이 기도하고 전도하고 헌금하니 자기도 그렇게 해야 되는 줄로 알았는데, 그런데 그게 우리 자신의 자존감과 관련이 있는 악마의 술책임을 이제 깨달았사오니, 그러니 이제는 주님의 것으로 날마다 드려지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7,24 오후 5시에 마침.
달라지지 않는 인간, 그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