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13 - 대표자
07,06,2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49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이로서 예수님은 유일하게 아버지의 뜻을 대 변하고 완수하신다는 조건아래에서 아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버지께서 생각했던 그 주님이 되시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는 천국은 없다 !!
여기에 교재 49페이지를 계속해서 보면 "예수님은 누구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가 왜 그것을 알아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이것을 아무리 강조하고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감을 잡지 못하는데, 즉 "내가 생각하는 천국은 없다" 라는 겁니다.
천국은 우리 인간의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나라가 곧 천국인데, 그러니 '나'부터 출발하는 천국은 없다는 말이죠. 반드시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해야만, 그게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들어가는 나라가 천국이 아니라, 주님이 찾아오셔야만 천국이라는 말이죠. 하나님은 예수님의 나라건설에 관심이 있지, 우리 인간의 나라에는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는 죽어서 천국에 간다" 라고 하는 것은, 물론 좋은 희망사항이고 또한 누구든지 그런 기대를 얼마든지 할 수가 있는데, 하지만 천국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나서 그런 기대를 하든지 해야한다는 말이죠. 그냥 막연하게 자기는 죽어서 어디로 간다고 하면, 그것은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죽어서 어디로 가려고 한다면, 살아있을 때 이미 무슨 현상이 일어나야 하는고 하니, 자기가 가고자 하는 거기와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시그널' 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시간을 초월해서 미리 그게 다가온다는 것이죠. 그러니 그 나라에게 가기 이전에 그 나라에서 보낸 신호가 도착해야 한다는 겁니다.
시그널, 성령세례 !!
그것을 두고 '성령세례' 라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가고자 하는 천국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천국은 가짜이기 때문에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나'로부터 출발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가짜라는 겁니다.
그러면 저쪽에서 그런 신호가 왔을 때, 그것이 악마가 보낸 신호인지, 아니면 예수님이 보낸 신호인지, 그것을 어떻게 판정을 하고 알 수가 있습니까? 바로 그 판정에 대해서 여기 교재 49페이지에서 이야기하는데, 즉 "이로서 예수님은 유일하게 아버지의 뜻을 대변하고" 라고 한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것을 대신하고, 심판도 대신하고, 선택도 대신하고, 구원받을 것과 고난도 대신하고, 그렇게 모든 것을 아버지를 대신할 때 아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겁니다.
(요 5: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요 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요 5: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예수님의 '대신해줌' !!
그렇다면 진짜 예수님은 누구인고 하니, 진짜 예수님은 '대신해줌' 이라는 것을 품고 있다는 말이죠. 여기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는데, 먼저는 자기 백성이 해야하는 것을 대신해주는데, 그리고 아버지가 해야하는 것을 대신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 두 개의 '대신해줌'이 합류가 되어서 예수님으로 나타난다는 말이죠.
그러면 불교는 어떻습니까? 알다시피 부처는 대신해주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부처는 없는데, 그리고 공자나 맹자도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도 할 수 없는 것을 잔소리나 해대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잔소리대로 지키라고 했다는 말이죠.
수니파와 시아파 !!
그리고 이슬람의 경우에는 수니파와 시아파가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구분하는고 하니, 시아파는 씨앗으로 생각하면 된다는 겁니다. 즉 마호멧의 씨앗을 옹호하는 쪽이 시아파인데, 현재 이란의 대부분이 그렇다는 말이죠. 이슬람 전체로 보면 비율이 20퍼센트도 되지 않는데, 이란 외에 이라크나 시리아의 일부, 그리고 바레인 정도가 여기에 속한다는 겁니다.
반면에 수니파의 경우에는 괜찮은 도사가 마호메트의 정신을 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순수한 것은 수니파이고, 씨앗을 강조하는 것은 시아파라는 말이죠. 수니파의 대표적인 나라가 사우디아라비아인데, IS도 여기에 속하고 말이죠. 그런데 이라크의 경우에는 국민의 80프로는 시아파이지만, 20프로의 소수 집권자들이 수니파라는 말이죠. 숫자가 적은 수니파가 다수의 시아파를 점령한 형국인데, 그러니 나라가 조용할 리가 없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의 아들이 기독교의 족보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것은 시아파이고, 반면에 예수님만큼이나 훌륭한 사도바울이 기독교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것이 수니파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싸우는고 하니, 서로가 서로에게 이단이라는 말이죠. 사실은 이게 이슬람 이야기가 아니라 기독교의 이야기이라는 겁니다.
'행함'의 문제 !!
이슬람이 서로 그렇게 싸우는 이유가 바로, '행함'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즉 "어떤 행함을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가?" 라는 것인데, 그들의 공통된 주장은 "행함이 없이는 구원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에는 무엇이 없습니까? '대신하심'이 빠져있다는 말이죠.
이슬람은 알라와 여호와가 싸우는 것이 아닌데, 그들은 여호와를 알라로 보기 때문에, 이러한 용어에 대한 개념의 싸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진짜로 하나님에게 우리에게 행해서 구원을 받으라고 했는가?" 라는 문제로 그렇게 피를 흘리면서 싸운다는 겁니다.
십일조를 해야하고, 예배에 참석을 해야하고, 전도를 해야하고, 세례를 받아야하고, 성만찬에 참여를 해야하고,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하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이슬람이고, 또한 불교라는 겁니다. 이게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인데, 지금 늦게 오신 분이 있어서 다시 하겠는데 말이죠(ㅋㅋ).
다시 하면 !!
우리가 가고자 하는 천국은 없는데, 만약에 그런 천국이 있다고 하면 이 성경말씀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말은, 우리 인간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서로 다르다는 말이죠. 분명히 십자가로서 그것을 드러내었는데, 그렇게 우리의 생각은 이미 다 들통이 났는데, 그런데 "우리 마음에, 내 마음에!"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진짜로 죽어서 가는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던 천국이 아닌데, 그런 나라는 없다는 말이죠. 천국은 주님의 나라인데, 그런데 그 주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봐야 아는 나라가 아니라, 이 땅에서 성경을 통해서 미리 알 수 있는 나라라는 겁니다. 성경말씀에 이미 다 소개가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것을 제가 조금 전에 '시그널' 이라고 했는데, 성령세례, 즉 신호가 온다는 겁니다. 그러한 신호가 오게 되면, 그런데 우리는 그 신호의 내용이 마귀가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 보낸 신호인지, 그게 아니면 주님이 보낸 신호인지를, 그것을 우리는 알 수가 없다는 말이죠.
대신하심 !!
그런데 여기 교재 49페이지에 보면, 주님이 보낸 신호에는 무엇이 있다는 겁니까? 방금 해도 다 잊어버렸지 싶은데, 대신하심이 담겨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대신하심'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 백성들의 행위를 대신하고, 또한 아버지의 행위를 대신하고, 이 두 가지의 대신하심이 예수님의 행위 가운데 모두 다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슬람은 무엇인고 하니, "알라신은 위대하다" 라고 하는데, 사실은 신을 따지는 종교가 아니라, "어떤 행함을 해야 구원을 받는가?" 라는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행함이 들어갔다는 것은 무엇을 거부한다는 겁니까? "나는 내가 행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그러니 굳이 예수라는 분이 대신할 필요가 없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불교 !!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 과연 이슬람의 문제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한국의 기독교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오늘 아침에 제가 십자가 마을에 글을 하나 올렸는데, '하나님을 믿는 불교' 라고 말이죠. 기독교라고 여기고 들어가 보면 전부가 다 불교라는 겁니다.
그러니 대신하심은 그 어디에도 없고, "믿는 티를 내야지. 행해야지!"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자꾸만 어떤 규격을 원하고, 실천을 원하고, 행함을 원한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해야지 교회가 운영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안녕히 계셔요!" 라고 하고 나가버리면 교회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냥 가면 안 되고 돈을 내고 가야한다는 겁니다.
목사님, 십일조를 꼭 해야합니까?
오늘 아침에 어떤 분이 저에게 질문을 했는데,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십일조를 꼭 해야합니까?" 라고 말이죠. "이제 예수님을 믿었으니 십일조는 하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라는 것인데, 거기에 대해서 제가 티박을 주는 답변을 하기가 참으로 곤란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창세기 14장을 언급했는데 말이죠.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한 것은 자기 소속의 문제였는데, 십분의 일을 낸다는 것은, 그 이전에 자기의 모든 소속이 어디에 있는고 하니, 여기에 등장한 이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고 되어있는데, 히브리서 7장에 보면 말이죠.
그러니 인간의 하나님 사이가 그냥 맹탕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보내신 분이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을 보냈다는 겁니다. 그런 역할을 일찍 하신 분이 멜기세덱이라는 말이죠. 바로 그분에게 아브라함이 소속이 되어있기 때문에, 아브라함 주위에 성전이, 즉 전쟁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가 전혀 이길 전쟁이 아닌데 그만 이겨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알고 보니 자기가 멜기세덱에 소속이 되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멜기세덱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운영하시는데, 아브라함이 거기에 말려들어서 본의 아니게 전쟁에서 승리를 했는데, 그래서 승리의 몫은 당연히 하나님의 것이고, 자기가 멜기세덱에게 소속이 되었기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멜기세덱에게 전부를 드리는데, 그것을 맏물인 십분의 일로 해서 드렸다는 말이죠.
(히 7: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히 7: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히 7: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히 7: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그 질문에 대해서 제가 이렇게 답변을 했는데, 그런데 답변을 제가 해놓고도 이 답변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질문자체가 "십일조는 하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라는 쪽이었기 때문에, 십일조를 하는 것도 행함이고 하지 않는 것도 행함이라는 겁니다.
그분의 경우에, 자기는 이제 믿으니까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그렇게 십일조를 하지 않는 행함을 통해서 구원을 받으려고 느낌이 있었기에, 답변을 하기가 곤란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은 제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여기고, 십일조가 무엇인지, 그것을 소개하면 되겠다는 차원에서 그렇게 답변을 했다는 말이죠.
대신하심과 새언약 !!
우리가 예수님의 대신하심을 모독하면 안 되는데, 주님이 모두 이루셨다는 겁니다. 그것은 새언약을 다 이루신 것인데, 즉 예수님은 새언약을 제시했다는 말이죠. 내부로는 '대신하심'이고, 그것을 바깥으로 명칭을 정하기를 '새언약' 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새언약을 무엇으로 다 이루었습니까? 예수님 자신의 피와 살로 다 이루었는데, 마지막 유월절에 12제자들을 다 불러놓고는, 그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게 하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한 새 언약이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고전 11: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고전 11: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고전 11: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그러니 피와 살은 무엇인고 하니까, 대신하심을 다 이루었는데, 그러면 그 흘린 피와 찢겨진 살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을 일체 받지 않는다" 라는 것을 품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구라를 치는 것이 아닌데, 교회가 되고 말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데,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잘 되는 것이 언약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왜 교회에 관심이 가 있느냐는 겁니다. 교회가 천국에 가는 언약이 아닌데 말이죠.
강의를 새로 시작할까요? 천국은 무슨 나라라고 했습니까? 우리 인간의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나라인데, 그러면 주님이 우리에게 제시한 시그널은 무엇입니까? 대신하심인데, 그런데 거기에 무슨 교회가 들어가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존재 자체가 천국을 훼방하고 있는데, 자기가 천국에 가겠다는 그 욕심이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에게 이 정도의 역량이 있어. 이 정도로 신앙의 티를 낼 수 있어!" 라고 하는 자기에 대한 자신감, 신앙에 대한 자신감, 그것을 발휘하지 못해서 환장을 한다는 겁니다. "나는 이렇게 해서 복을 받았다" 라고 하는 근거를 마구 들이댄다는 것이죠. 그것도 십자가 앞에서 말이죠. 그러니 십자가를 완전히 쓰레기통으로 만들고 만다는 겁니다.
향기인가? 악취인가?
그러니 주님이 보시기에 악취가 진동하는데, 실제로 김천의 어느 마을에는 트럭이 무려 19대나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갔다고 하는데 말이죠. 이것이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전한 복음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악취고, 믿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고후 2: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후 2: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그리고 창세기와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향기를 흠향하신다고 했는데, 그러니 향기 대신에 악취를 내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언제 향기가 납니까? 흠이 없는 짐승을 잡아서 드릴 때 그게 향기가 되었는데, 그러면 우리가 자기 자신의 행함을 바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악취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대신하는 분이 있기에 말이죠.
(창 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만약에 자기밖에 없다고 하면, 그러면 자기가 알아서 열심히 해서, 자기가 알아서 열심히 중보기도를 하고 해서 천국에 가겠는데, 그런데 그 중보기도를 예수님께서 다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왜 중보기도가 뒤에 또 튀어나오느냐는 말이죠.
옛날에는 목사들이 문제가 많다고 했는데, 그런데 알고 보니 교인들도 그것에 못지 않게 심각하다는 겁니다. 교회를 절로 다 바꾸고 말았다는 것이죠. "교회에 갑시다" 라고 하는 대신에 "절로 갑시다" 라고 해야하는데, 즉 "오늘도 행하러 가자!" 라는 겁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말이죠. 그래서 교회이름도 '축복교회' 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복에 환장을 한 자들이라는 겁니다. 진작에 지옥에 갈 인간인데 복을 이야기한다는 말이죠.
이 복이라는 것이 토속신앙에서 나왔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이름을 그 이전에는 '복덩이' 라는 수준에서 짓던 것을, 칠복이나 팔복이 정도로 말이죠. 그런데 기독교가 들어오니, 그 복덩이를 빼고 한나나 사무엘과 같은 성경에 나오는 이름으로 지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교회가 앞장서서 복을 달고 시작한다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 안에 재림 사건이 !!
예수님은 자신의 대신하심을 다 이루었는데, 이것을 '묵시' 라고 하는데, 이게 어렵기 때문에 '시간의 완료'로 보자는 겁니다. 물론 이것도 어려운데 말이죠. 다 이루었으니, 그러니 시간도 완료가 되었다는 말이죠. 즉 시간의 질이 십자가로 종결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미 끝난 시간을 너희가 보낸다" 라고 하는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사건' 이라는 겁니다. 즉 "막상 너희들이 다시 만나니, 이전에 십자가를 졌던 그 사람이 맞지?"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십자가를 지신 분이 어떤 분인지를, 그 속사정을, 그 본질을 보여주는 시간만이 계속해서 연결이 되어질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 사건이 있고 또한 재림 사건이 있는 게 아니라, 십자가 사건 안에 이미 재림 사건도 완료가 되었다는 겁니다. 묵시세계에서는 그렇다는 말이죠. 그런데 역사세계에서는 그게 완료가 되지 않는데, 역사는 인간의 시간세계인데 말이죠.
누워있는 역사 !!
그래서 역사세계에서는 성도가 무엇을 해야하는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녀가시면서 하신 일을 반복해야 한다는 겁니다. 제가 이것을 '다니엘서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 이라는 글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는데, '누워있는 역사' 라고 말이죠.
누워있다는 것은 보통 인간과 동물처럼 움직이는 물체에게 사용하는 말인데, 그렇지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누워있는 역사라고 표현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다니엘서에 보면 금신상이 있는데, 그런데 그 금신상이 나중에 넘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넘어질 때 어느 바닥에 넘어지는고 하니, 역사라는 지평 위에 우상이 넘어진다는 말이죠.
물론 누워있는 부처상도 있기는 있는데, 아무튼 그렇게 누워있으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이제 역사에 남아있는 모든 질은, 여기서 우상은 바벨론인데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은 바벨론적인 요소가 그야말로 가득하다는 겁니다. 역사가 끝날 때까지 말이죠.
그러면 어떤 지점에 서있으면, 이 지점이 아니라 다른 지점에서 무슨 일이 또 있을 수 있는데, 그런데 바벨론이라는 우상이 그만 누워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누워있다는 말은 시간이 아무리 진척이 되고 이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주어진 저주의 연속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이런 계시를 주셨을 때, 그것을 어떻게 아는고 하니, 누워있는 이 질에 대해서 이미 십자가 사건으로서 정죄를 하고 심판을 해버렸다는 겁니다. 그렇게 역사를 따라서 계속해서 십자가가 반복이 되니까, 남은 역사는 전부가 다 어떻게 됩니까? 남은 역사는 십자가를 반대한 느부갓네살 왕의 우상성이라고, 그렇게 정리가 된다는 것이죠.
모든 남은 역사가 다 그러한데, 그런데 그렇게 주님의 대신하심에 대한 감각도 전혀 없이, "나는 여기 이 땅에 1978년도 태어났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자기는 주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내가 죽더라도 내 자식들이 이 대한민국을 이어나갈 것이다" 라고, 그렇게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에게 저주를 받은 느부갓네살의 시간관과 똑같은 시간관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느부갓네살 왕과 동일한 시간관을 가진 자들 중에서 누가 있는고 하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하는 그 재림날짜를 계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모르는데, 다만 자기가 구원을 받겠다고 하면서 그 날짜를 계산하고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날짜를 계산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의 시간관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상이 누워있는 역사가 아니라 뭔가 비어있는 역사인데, 그런데 자기 중심의 시간관을 다른 사람이 또 이어나가면 될 것이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이미 죽은 자로서 !!
그러니 그런 '나' 중심의 시간관이 정죄함을 받은 시간관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긴다는 말이죠. "내가 죽고 난 뒤에 몇 년 뒤에 주님이 오시겠지" 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주님에게 정죄를 받은 자인데, 즉 "나는 십자가 안에서 이미 죽은 자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죽게 되면 우리의 시간관도 죽는다는 말이죠.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가까웠음이니라 !!
그래서 사도행전이나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에 보면, 주께서 가까이 오시는데, 그렇게 가까이 오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나'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실 것과 가까워진다는 겁니다. 로마서 13장에 봐도 구원의 날이 가깝다고 하는데, 그것은 기준점을 자기 시간부터 출발하지를 말고, 모든 것을 주님의 입장에서 볼 때 점점 더 가깝다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롬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그러면 남은 그 다음의 이야기는 무엇이 되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무엇을 하셨는가?" 라고 하는, 그것만하면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하신 일을 남은 역사 속에 채우기 때문에 말이죠. 주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을 말이죠.
오직 새언약뿐 !!
성경은 이렇게 모든 것이 다 연결이 되어있는데, 그러면 "연결이 되어있는 것을 연구해보자" 라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연결되어있는 것의 정답이 이미 나와있다는 겁니다. 정답을 모르고 연결되어있다고 하게 되면, 결국은 포기하기 되는데, 즉 "성경을 연구했는데 나는 모르겠다" 라고 하면서 덮어버리면 끝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몰랐기에 모르겠다고 나오는 것인데, 그러니 처음부터 알면 되는데, 그게 바로 '대신하심' 이라는 말이죠. "인간이 얼마나 못났으면 대신하겠는가?" 라는 것인데, 그러면 구약전체는 무엇입니까? 인간의 못남을 확인해주는 역사라는 것인데, 그리고 신약도 역시 인간은 못났다는 것을 확인해준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중심은 십자가인데, 중심이 십자가라는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새언약으로 다 이루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다른 언약은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없다는 말이죠. 오직 새언약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새언약에는 주님의 대신하심이 모두 녹아져있다는 말이죠. 자기 백성의 대신하심, 아버지의 대신하심, 이것이 모두 다 녹아져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녹아져있는 것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는 피와 살로서 나타나고, 예수님을 떠밀었다고 하는, 즉 적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죽였다고 하는 증거가 우리의 남은 역사를 채운다는 겁니다. "내게 남은 사랑으로 다 채운다" 라는 노래가 있는데, 지난 대전수련회 때 했던 것 같은데 말이죠.
아무튼 구약이라는 것은 실패의 역사인데, 그런데 그들을 의도적으로 실패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주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 이라는 겁니다. 율법이라고 하면 또 골치가 아프니까 법이라고, 즉 "법을 주셨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법을 주셨는데, 그것은 실패를 하라고, 망하라고 주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제가 지지난 시간에 "이스라엘은 헌금을 함으로 망했다" 라고 했는데, 대신하심인데,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자꾸만 자기의 행함을 가지고 들이민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됩니까? 저렇게 하면 됩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죠. 당연히 오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분은 따로 있는데, 그런데 "나도 인간이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서 나선다는 것이죠.
법, 실패, 은혜 !!
지금 오신 분이 있는데, 하지만 너무 늦어서 반복을 하지는 못하겠는데 말이죠(ㅋㅋ). 아무튼 구약의 원리가 이러한데, 하나님께서는 법을 주셨는데, 그것은 실패를 하라고 주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데, 이게 삼종세트라는 말이죠. 즉 법을 주시고, 실패를 하게 하고, 그 다음에는 은혜를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은혜를 받은 자는 어떤 입장에 서는고 하니까, 자기가 법을 지켰기 때문에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을 어겼다는 차원에서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은혜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겠습니까? "너는 너 자체로는 실패자야" 라는 것이 포함이 되어서 은혜가 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가 실패자라는 것이 없이 오는 은혜는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불교나 토속신앙과도 같은 이 세상의 종교인데, 즉 "내가 잘나서 은혜를 받았다" 라고 하는, 그렇게 일종의 보상차원에서 주어지는 은혜라는 겁니다. 자기가 성의를 표했더니만, 그것이 대견하다고 하면서 마구 마구 주시는 은혜, 금요일에 철야를 했더니만 그 다음 주에 계약이 성사되는 은혜, 그렇게 반드시 원인이 있어서 주어지는 것을 세속종교에서는 은혜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했으니 저쪽으로 갈 이유는 없고, 오히려 자기가 했기 때문에 저쪽으로 갈 은혜도 자기에게로 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치열한 경쟁마당이 금요철야를 하는 가운데 발생이 되는데, 즉 "누가 은혜를 받는지 한 번 두고 보자" 라는 겁니다. 또한 집단적으로 생각해서, "이렇게 열심히 철야를 하는 우리교회가 부흥이 되는지, 아니면 옆의 교회가 부흥이 되는지 말이야"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출발준비, 'GO' !!
마치 카레이싱을 하는 것 같은데, 즉 "누가 누가 더 앞서 나가는가?" 라는 겁니다. 둘 다 대신하심의 의식은 전혀 없는데, 그렇게 달리다가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끊어진 다리에서 추락을 해서 지옥으로 간다는 말이죠. 신나게 지옥으로 질주를 한다는 겁니다. 그것도 은혜를 받겠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야말로 죽음의 레이싱이라는 겁니다.
그 원인 제공자는 '나' 라는 것인데, 즉 "내가 은혜를 받겠다고 하면 은혜가 주어진다" 라는 겁니다. 자기가 은혜를 받겠다고 하는 자기의 그 의도가, 자기에게 은혜가 주어지는 결과를 양산하고 유발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오늘날 교회가 바로 구약에 나오는 산당인데, 즉 갓바위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불교라는 말이죠.
너는 은혜를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실패자다 !!
그것이 아니라면 은혜는 어떻게 온다는 겁니까? "너는 은혜를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실패자다" 라고 하면서 은혜가 주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은혜가 와도 그만이고, 오지 않아도 그만이다" 라는 인식을 가진 채로 은혜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게 은혜라는 말이죠.
그래서 은혜가 주어지게 되면, 은혜가 주어진 그 시점에만 감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주님을 직접 만날 때까지 내내 "구원을 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구원을 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그런 감사의 삶을 계속해서 살게 된다는 것이죠.
물론 이런 마음이 계속되면 좋은데, 그게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그 이유가 다 있는데, 그것은 조금 있다가 설명을 하겠는데 말이죠. 아무튼 구약의 3종 세트는 무엇인고 하니, 먼저 율법을 주고, 실패하게 하고, 그렇게 실패를 함으로 은혜를 주신다는 겁니다. 그 대목이 구약 어디에 나오는고 하니, 민수기 11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여기서 민수기 11장 29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민 11: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민수기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의 실패한 역사인데, 무려 10번이나 실패를 거듭하는데, 그런데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렇게 계속해서 실패를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려야 하시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모세를 통해서, 그런 그들의 실패 속에 미래의 상황에 대한 흔적을 남기신다는 겁니다.
율법을 어겼으면 망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들은 망하지 않고 꾸준하다는 말이죠. 그것은 모세 때문에 그러한데, 이 모세에게서 하나님의 예언이 나오는데, 그 예언의 마지막 모습이 바로 모든 인간이 다 선지자가 된다는 겁니다. 그 장면이 그 앞에 나오는데 말이죠.
민수기 11장 24절과 25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민 11:24) 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고하고 백성의 장로 칠십 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민 11:2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아하, 예수님은 이런 분이구나 !!
여기서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나오는데, 즉 "모든 계시는 나의 구원과 관련이 없고, 오실 예수님과 관련되어서 계시가 주어진다" 라는 겁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는 자기가 기대하는, 그런 자기 이익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오실 분이 어떤 분인지, 그렇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즉 복음을 소개하는 것과 관련된 은혜, 오직 그것만이 계시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은혜를 받으면 그 결과는 무엇인고 하니까, "아하, 예수님은 이런 분이구나. 대신해서 죽으신 분이구나!" 라는 것인데, 그것을 알면 은혜이고, 그것이 빠지고 없으면 지옥에 가도록 하는 힘이라는 말이죠. 제 아무리 좋은 용어를 갖다 붙여도, 여호와, 예수님, 은혜, 성령세례 등등, 아무리 그런 것을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그런 것에 속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얼마든지 자기가 인위적으로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안에 들어있는 알맹이가 중요한데, 그것이 곧 대신하심이라는 말이죠. 거기에 비해서 우리는 얼마나 못난 존재인지, 우리가 얼마나 못났으면 예수님의 대신하심이냐는 겁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하시는데, 거기서 예수님이 죽이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2제자들을 보고 "너희들이 따라오려면 오너라" 라는 것인데, 하지만 그들은 따라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심지어 죽어도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갈 수가 없다는 것이죠.
물론 노래는 얼마든지 부를 수 있는데,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 ♬" 라고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자기 혼자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닌데, 주님의 가명(架命)을 받고 한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 일을 주님의 제자들도 했는데, 그런데 중도에 모두 포기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십자가 자체의 율법적 기능 !!
그래서 "아하, 인간은 안 되는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게 십자가가 율법의 완성인 동시에 율법이고, 그것이 곧 복음인데, 그게 우리에게 작용할 때는 율법으로 작용한다는 겁니다. "너희가 나를 위해서 희생하고 자기를 부인했다고? 십자가와 비교를 해봐라. 그게 십자가의 기준에 맞아?" 라는 겁니다.
그러니 제 아무리 희생을 하고 자기를 부인해도, 그것은 여전히 십자가의 기준에 미달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십자가 자체의 율법적 기능 앞에서 우리는 입이 백 개라고 해도 전혀 할 말이 없는, 그야말로 저주를 받아서 합당한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러한 십자가의 내용이 곧 사도바울의 권면이고 명령인데, "술에 취하지 말라고 성령에 취하라" 라고 한다든지,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무시로 기도하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등등, 그 모든 명령 안에는 십자가가 담겨있다는 겁니다.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그러니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 그 안에는 하나하나가 다 십자가가 들어있는데, 그러니 자기 행함으로 해내겠다고 하면, 그 자체로서 실패라는 말이죠. 그것은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을 모독하는 것이란 말이죠.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 마귀가 등장하는데, 그런데 그 마귀가 설마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겁니다. 우리는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서워할 줄로 알았는데, 그런데 마귀는 그 말씀을 모두 외우고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말씀을 외우고 있어도, 마귀는 여전히 마귀라는 말이죠.
성경구절 외우기 !!
요즘 교회에는 젊은 사람들은 없고 나이가 든 사람들만 있는데, 그래서 교회에서는 거기에 맞추어서 오락시간을 만들어주는데, 그게 바로 '성경구절 외우기' 라는 겁니다. 노인네들의 마지막 자랑거리는 그것밖에 없는데, 남아도는 것은 시간밖에 없고, 거기에 믿음이 좋다는 것은 자랑을 해야하겠고, 그래서 거기에 대한 욕망의 충족을 교회가 해준다는 말이죠.
"김 권사님이 나오셔서 로마서 8장을 외워보세요" 라고 하면, 못이기는 척을 하면서 나와서 외우는데, 그러면 잘했다고 하면서 상을 주고 말이죠. 그렇게 자기 인정, 즉 누구로부터 인정을 받기를 원하는데, 왜냐하면 자기의 기억보다도 타인의 기억이 더 무섭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꾸준히 남들의 기억에 맞추어서 살아왔는데, 그런데 그것이 그만 버릇이 되어서 죽을 때까지 그렇게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들이 자기를 인정해주면 살아갈 맛이 나고, 반면에 자기를 무시했다고 여기게 되면 그만 죽고 싶다는 말이죠.
솜사탕 현실 !!
그렇게 우리는 이 세상의 일부가 되어서 살아가는데, 자기의 실천이 현실을 구성하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실천하는, 그러니 집에서 하는 설거지조차도 그 모든 하나 하나의 행동들이 직결되어서, 자기가 잘못 생각하는 현실을 자기 주변에 둘러친다는 말이죠.
일종의 솜사탕 현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솜사탕을 만들 때 어떻게 합니까? 작대기 하나에 세워놓고 설탕으로 둘둘 감는다는 겁니다. 그 작대기가 '나' 라고 하면, 그 주위에 항상 포개지고 중첩이 되듯이 쌓이고 쌓이는 것이 자기만의 현실인데, 그 현실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자기의 하루하루 일과가 그렇게 만든다는 말이죠.
웰컴 투 동막골 !!
강원도의 깊은 산골의 할머니의 경우에, 17살에 시집을 와서 영감이 죽고 난 다음에도 90살까지 계속해서 사는 사람에게, 글자도 모르고 스마트 폰을 사주어도 아무런 소용도 없는, 그냥 옥수수와 감자만 키우는 할머니에게 6,25가 무슨 의미가 있고 광주 민주화운동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나온 영화가 무엇인고 하니, '웰컴 투 동막골' 이라고, 즉 "너희들이 전쟁을 하는데 우리 마을에는 왜 들어와서 싸우는가?" 라는 겁니다. 그래서 꽃을 꺾어서 돌아다니던 미친 소녀 하나가 '뻥' 하면서 강냉이를 튀기니까, 인민군이고 국방군이고 간에 옥수수가 맛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평화를 이루는데, 정치적 평화를 말이죠.
그래서 영화제목이 그러한데, 즉 "환영합니다. 여기는 남과 북이 사상을 초월해서 하나가 되는, 인간미가 흘러 넘치는 동네입니다" 라는 겁니다.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강원도의 그 깊은 현실관에 다른 현실관이 들어와서 임시적으로 차이가 난다는 말이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보면 비행기가 마구 폭격을 하는데, 그러니 그 동막골의 현실이 다 깨지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바벨론이라는 현실관에서 그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오죽 했으면 사채놀이를 하는 업소의 이름이 바벨론이냐는 겁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말이죠(ㅋㅋ).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대표자'로 !!
그러니 하나님의 신이 임했을 때, 오늘의 강의제목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에 바로 '대표자' 라는 것인데, 즉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되면, 그 단합된 단체를 자신을 대체할 새로운 우상으로 삼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하나의 나라가 되었다고 하면, 거기서 자동적으로 무엇이 나옵니까? 이스라엘 자체가 이스라엘에게 우상이 되고 만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들은 여호와를 대표자로 내세웠는데,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을 운영해 보았는데, 그러면 과연 성공을 했을까요? 그게 아니라 실패를 했는데, 여호와를 대표자로 해서 가나안 땅에 있을 때, 그 주위에 모압과 압몬과 블레셋과 같은 나라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런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해서 약탈을 했는데, 그 당시의 농경시대에서는 약탈이 일상이었는데, 토지는 한정이 되어있고, 그런데 영양분은 흡수를 해야하겠고, 그러니 남의 것을 빼앗아와야 한다는 겁니다. 힘이 있는 자가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람들은 고상하게 '전쟁' 이라고 표현을 한다는 말이죠.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남의 나라를 침입한 적이 없다고 하는데, 전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중국 땅에 쳐들어가서 철광석을 약탈해왔다는 말이죠. 발해도 역시 그러하고, 그게 일상이라는 겁니다.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힘이 없어서 힘을 키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지, 힘만 있으면 언제든지 한다는 말이죠.
지금의 정보전쟁의 시대이기에 영토전쟁이 의미가 없지만, 옛날에는 영토가 곧 삶의 유일한 터전이기 때문에, 땅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아와 과부의 땅을 가진 자들이 계속해서 빼앗는다는 말이죠. 그게 구약의 이사야서나 미가서에 보면 나온다는 겁니다.
애굽이 없으면 이스라엘은 없어 !!
알다시피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즉 애굽에서 나온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애굽이 없으면 이스라엘은 없는데,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히브리인들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과 동행할 때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지, 자기들끼리 모인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대표자가 동행을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이 애굽에 나올 때, 그들은 왜 나오는고 하니, 애굽의 연장선에서 나온다는 말이죠.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이스라엘이 곧 애굽이고, 그 이스라엘에서 탈출하는 것이 바로 제2의 출애굽이라는 겁니다.
제2의 출애굽 !!
창세기부터 다윗까지의 이야기는 이스라엘과 애굽이 달랐는데, 그 이후의 솔로몬 시대부터는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이 빠져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에스겔서 11장에 나오는데, 에스겔이 활동하는 지역이 두 군데인데, 하나는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히기 전에 이미 전쟁에서 패배해서 잡힌다고 예언을 했다는 겁니다.
그게 에스겔서와 예레미야서가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예레미야는 포로로 잡혀갈 때 가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히려 애굽으로 내려가는데, 그런데 에스겔은 따라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라가 망해서 포로가 된 그들과 함께 있다는 겁니다. 일종의 이민목회인데, 즉 한국이 아닌 LA에 이민자들을 따라가서 목회를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죠.
그렇게 에스겔은 따라가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신 우리 이스라엘이 왜 망해야 하는가?" 라는 것인데,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에스겔서이고 또한 예레미야서라는 겁니다. 그것을 이번 수련회에서 첫째 시간에 할 예정인데 말이죠.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진짜 이스라엘은 그 이스라엘을 만드는 중간과정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나왔다" 라고 하면, 그것은 누가 관찰해도 애굽은 애굽이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확연히 분류가 되는데, 즉 저쪽은 나일강에 속해서 살고, 이쪽은 요단강에 속해서 산다는 겁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가 되는데,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해서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겁니다. 장소를 옮겨서 살아도 여전히 애굽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기에, 그것은 애굽이 늘어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이라고 자부하는 그 속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끄집어내는 두 번째 작업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존의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는고 하니, 아브라함의 혈통중심인데, 즉 아브라함의 아들은 이삭이고, 이삭의 아들은 야곱인데, 그 야곱에서 몇 명의 아들이 나오는고 하니, 12명이 나온다는 겁니다. 야곱의 아들이 이삭인데, 그러면 이스마엘은 아들인가요? 아닌가요? 아닌데, 약속의 아들이 아니기에 퇴출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은 요셉인데, 그러면 요셉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11명의 아들들은 퇴출인가요? 아닌가요? 퇴출이 아닌데, 왜 그렇습니까? 야곱이라는 이름 자체가, 즉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미 확정되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요셉이 형제들의 모함으로 팔려나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애굽에 온 형들이 자기들이 한 짓에 대해서 요셉이 보복을 할까봐서 걱정을 하니까, 오히려 요셉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여러분들을 살리기 위해서 제가 이 애굽에 먼저 왔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대신 희생' 이라는 겁니다.
(창 45: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창 45: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진짜 이스라엘과 대신 희생 !!
여기서 다시 정리를 해보면, 이스라엘이란 무엇인고 하니까, 이스라엘은 대신 희생이 없으면 그 어느 곳에 살던지 간에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대신 희생을 가리우는 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권사님이 맞추셨는데, 그게 바로 '행함' 이라는 겁니다. 소가 뒷걸음질을 하다가 맞춘 것이 아니라 평소실력인데(ㅋㅋ), 왜냐하면 눈에 보이니 그렇다는 말이죠.
저쪽은 애굽에 사니 애굽이고, 이쪽은 약속의 땅에 있으니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그 누가 봐도 그러한데,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것이죠. 즉 "성전이 있다. 제사를 드린다. 그러니 우리는 이스라엘!" 라고 하는, 이게 인간의 한계인데, 왜냐하면 눈에 보이니 말이죠. 제사를 드리면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러면 하나님은 그 연기를 기쁘게 받으시고, 그러면 당연히 복을 받을 줄 알았는데, 그런데 이스라엘은 망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알고 있었는데, 성전이 있고 제사장이 있어서 제사를 드렸는데도 왜 망했는지를 말이죠. 이스라엘은 무엇을 빠트렸는데, 그게 바로 "너희들의 행함으로 인해서 희생한 자가 있다" 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희생한 자를 자기들의 행함으로 그만 짓밟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들의 행함은 목표가 있었고 기대가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이스라엘은 우리의 행함으로 유지하세" 라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은 우리들을 위한 집단인데, 그 집단을 우리들의 손으로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겠는가? 우리가 열심히 지키세. 그렇게 하세!" 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위한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그들은 망하고 말았다는 것이죠. 이것은 오늘날 무엇을 의미입니까? 교회를 위한 교회, 그것은 이미 망한 교회라는 겁니다. "교회가 잘 되기 위해서 이렇게 저렇게 합시다" 라고 하면, 그것은 이미 망한 교회라는 말이죠.
천주교의 1500년 구라 !!
흔히 사람들은 말하기를 "교회가 잘 되는 것이 주님이 잘 되는 것이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구라도 그런 구라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한 구라를 무려 1500년 동안 줄기차게 해온 자들이 바로 천주교인데, 사람들은 교회가 잘 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러면 교회의 우두머리가 누구인가요? 교황인데, 즉 교황이 잘 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잘 되는 것이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황의 부하들이 누구입니까? 주교이고 천주교의 신부들인데, 그러니 당연히 신부에게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해주는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무식한 민중들은 눈에 보이는 신부에게 잘해주면 하나님에게 잘해주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렇게 해서 그들은 탄탄한 조직체를 유지해왔다는 말이죠.
그래서 루터가 그 상을 그만 엎어버리고 말았는데, "무슨 이런 놈들이 다 있어?"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루터가 그렇게 엎게 된 것은, 그것을 자기 혼자서 그렇게 하면 아무런 효과도 없는데,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구텐베르그가 유럽에서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어서, 그는 인쇄업자인데 말이죠. 그래서 성경이 드디어 자기 나라의 언어로 번역이 되어서 나오지 시작했다는 겁니다. 틴델은 영어로 번역을 했고 말이죠.
그 이전까지는 성경이 라틴어로 되어있어서, 소위 배웠다고 하는 엘리트가 아니라면, 즉 신부가 아니라고 하면 성경을 읽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농부를 비롯한 무식한 민중들은 "신부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 당연히 맞겠지?" 라고 여겼다는 것이죠.
마치 요즘 교회에서 "신학교를 나온 목사님이 그렇게 주장하니 맞겠지?" 라고 여기는 것처럼 말이죠. 자기들이 성경을 직접 볼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것은 신학을 전공한 분들이 알아서 잘 하겠지" 라고 하면서 그만 미루어버렸다는 겁니다. 자기들이 지옥에 가는 줄로 모르고 말이죠.
구텐베르그와 짝퉁 면죄부 !!
그런데 자기 나라 말로 번역된 성경을 보니 개판인데, 사실 구텐베르그는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닌데, 성경보다는 면죄부를 인쇄해서 완전히 히트를 쳤다는 겁니다. 물론 이게 구텐베르그의 개인적인 일이라는 보다는, 그 당시의 인쇄업자들이 구텐베르그가 발명한 인쇄기를 가지고 그렇게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당연히 위조된 면죄부도 나돌게 되었는데, 그런데 바티칸에서 발간한 그 면죄부의 내용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바람을 피운 사람은 얼마다" 라는 식으로 그 금액이 적혀있었다는 겁니다. 그게 만약에 500만원이라고 하면, 그것을 짝퉁으로 만들어서 인쇄를 해서 헐값에 마구 유통을 시켰다는 말이죠. 그러니 당연히 대박이 났다는 겁니다.
판을 뒤엎은 루터 !!
그러니 모든 인간들의 공통적인 기대가 무엇인고 하니, "천국에 가고 싶은데 무슨 행함으로 천국에 가지?"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것을 완전히 뒤엎어버린 것이 루터라는 겁니다. 즉 "십자가를 믿음으로 간다" 라는 것인데, 물론 루터가 옳은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왜냐하면 거기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즉 믿음이란 행함이 그만 추가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기존의 행함과는 전혀 다른 행함을 이야기했다는 말이죠. 아무튼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루터가 수도사로서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 바티칸의 그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그렇게 자기를 낮추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말씀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로마서 3장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고 하는 말씀 앞에서 모든 것이 다 깨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러니 지금 자기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도대체 누가 자기를 이렇게 속이고 있느냐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악마인데, 교회가 이미 악마의 소굴로 바뀌었다는 것을 루터가 알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기존 교회와는 협상과 타협할 생각이 전혀 없는데, 마귀와 무슨 협상을 하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이미 면죄부가 남발되어서, 하나님을 대신한다고 하는 작자들이 그렇게 했다는 말이죠. 민중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교회에 등록하면 구원을 받는 줄 알고 있다는 겁니다. 세례를 받고 성만찬에 참여하면 천국에 가는 줄로 알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거기에 반항해서 나온 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트, 즉 반항하는 종교라는 겁니다. 그게 오늘날의 개신교라는 것이죠. 하지만 이제는 이 개신교가 천주교가 되고 말았는데, 왜냐하면 손님이 와야하니 말이죠. 중요한 것은 고객만족이라는 겁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 !!
루터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 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이 믿음이 문제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말씀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선물로 받을 때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선물은 우리가 요청할 자격이 전혀 없는데, 성령을 따라서 온다는 겁니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렇다면 성령은 어디서 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셨던 그 모든 업적을 성령 안에 담아서, 그것을 '다 이루었다' 라는 형식으로 온다는 겁니다. "이것을 하고, 이것을 하라" 라는 형식이 아니고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묵시적으로 다 이룬, 즉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는 겁니다.
다양성 !!
하지만 우리는 역사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고 하는 내용이, 그게 다양성으로 준다는 말이죠. 이렇게 다양성으로 주어졌다는 것은, 사람은 곧잘 옆 사람을 흉내내게 되어있는데, 예를 들어서, 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기도를 하는데 너무 잘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들 목표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처럼 기도하는 것이 목표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러니 다양성을 자신이 거부하고, '누구처럼!' 이라고, 즉 "한경직 목사처럼, 주기철 목사처럼!", 그렇게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면 "어느 교회처럼!" 이라고, 그렇게 눈에 보이는 모델을 정하고 마는데, 그러면 그만 다양성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죠.
어제 낮에 미처 이야기를 다하지 못했는데, 사도바울이 디도와 동무가 되는데, 그렇다면 사도바울과 디도가 서로 닮아야 합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 다양성이라는 겁니다. 이 다양성이라는 것은, "니가 나의 모델이 되고, 내가 너의 모델이 될 수 없다" 라는 것인데, 주님께서 맡겨주신 역할이 다 다른데, 그렇게 각자의 인생이 다 다르다는 말이죠.
인간은 없고, 오직 기호밖에 !!
그러니 인간은 없는데, 오직 기호밖에 없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임시적으로 할당한 기호, 이 기호를 두고 이름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우리는 자기의 이름을 걸고 한 평생을 살아가는데, 자기의 90평생을 그렇게 살아간다는 겁니다. 물론 80이 지나면서부터는 이미 시체이지만, 일단 그렇게 90까지 산다고 여기자는 말이죠.
그러니 그 나이가 되면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닌데, 이 말은 이제 곧 그 성능의 시효가 다 끝난다는 겁니다. 인생의 배터리가 다 떨어졌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생은 임시적으로 할당을 받은 것인데, 무엇 때문에 말이죠? 주님을 증거하라고 할당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할당을 받은 모습이 다양하다는 것이죠.
최후의 제국, 바벨론 !!
아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해를 했다고 했는데, 다양한 인간들이 모여서 집단을 이루었는데, 그것을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이라고 했는데, 그 이스라엘이 눈에 보이는 대표자를 자꾸만 뽑는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왕인데, 이런 왕 중심의 집단을 이루는데,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우리 집단을 도와주어서 옆에 있는 나라들보다 더 잘살고 그들을 이기기를 원할 때, 그들은 이미 브레이크도 없이 내리막길로 내리 치닫고 있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 탈출했다고 여겼던 애굽의 속성이고, 그것이 확장된 것이 바벨론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어디로 포로가 되어서 잡혀갑니까? 물론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잡혀가고, 남쪽 유다는 바벨론에 잡혀가는데, 그 앗수르가 바벨론에 흡수가 되는데, 그러니 결국 모든 것을 바벨론이 통합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바벨론이 최후의 제국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 바벨론에게 이스라엘이 잡혀갔다는 것은, 그것은 선지자들에게 의하면 "지금 이스라엘이나 바벨론이나 똑같다" 라는 겁니다. 물론 바벨론은 다른 신을 믿고,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신의 명칭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 내용이 전부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믿고 있는 자기 나라와 자기 집단의 대표자를 세워서, 그 대표자를 어떻게 잘해서, "너는 너의 나라, 나는 나의 나라" 라고, 그렇게 독자적인 나라를 구성하겠다고 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곧 바벨론적 사고방식이라는 겁니다.
가정에서 살래? 천국에서 살래?
복음을 전하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가장 거부하는 자들이 누구인고 하니, "당신은 백날 그런 소리를 해도, 나는 우리 집구석이 있다" 라는 것인데, 즉 교회에서 목사가 무슨 소리를 하든지 간에, 자기는 자기 가정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그 자기 가정이 집단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비나 어미나 자식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정을 주신 것은 맞는데, 하지만 그것은 임시적으로 할당을 받았다는 말이죠. 그 가정을 통해서, 그 가정이 우상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셨다는 겁니다.
(마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쉽게 말해서 "가정에서 살래? 천국에서 살래?" 라는 것인데, 자기 가정만 행복하면 말씀이고 뭐고 필요가 없는데, 자기 가정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말이죠. 그것을 이스라엘이 시도하다가 그만 망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교회에 와서는 남의 가정을 보고 "저 집은 참 좋겠다" 라고 하는데, 과연 그러하냐는 겁니다. 고민이 없는 가정이 어디에 있냐는 말이죠. 더러운 인간들끼리 모였는데, 그게 무슨 천국이겠느냐는 겁니다.
왜 돈을 벌려고 하는가?
어제 그러한 이야기를 했는데, 사람이 돈을 쓸 때는 예쁘게 써도 벌 때는 지저분하게 번다고 말이죠. 이것이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인데, 왜 돈을 벌려고 합니까? 예쁜 자기를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돈을 쓸 때는 폼이 난다는 말이죠. 상대방이 굽신굽신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가 원했던 세상이고 현실이란 겁니다.
자기는 돈이 있고 저쪽은 돈이 없고, 그래서 "어서 오세요.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왕 같은 대접을 받을 때, 돈이 있어야 그런 대접을 받는다는 말이죠. 돈이 없으면 가족들에게도 버림을 받는데, 그래서 욥기에 보면 "가난한 자나 부자나 다 주께서 지으셨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욥 34:19) 왕족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며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더 생각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니라
그러므로 부자든 가난한 자든, 이 세상에서 그 누구라도 모델로 삼지 말라는 겁니다. 부자가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지만, 가난해야 구원을 받는 것도 역시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마치 가난해야 구원을 받는 것처럼, 어떻고 저떻고, 자기 속에 들어있지도 않은 그런 위선적인 것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기 죄에서 유발된 대표성임을 !!
그러니 대표자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눈에 보이는 대표성, 즉 자기를 행복하게 해주고 자기의 미래를 보장해주는 그 대표성이 자기 죄에서 유발된 거짓임을, 그게 실패임을 깨닫게 해주는 은혜가 바깥으로부터 왔을 때, 그 은혜에다가 대신 죽으심으로 인해서 자기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은혜라는 말이죠.
그런데 지금 여기 안에서는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분주하게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행함은 총동원을 시킨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먼저 기도하고, 하루에 성경을 3장 이상을 보면, 그렇게 하면 가게에 손님이 많이 올 것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자기가 잘되기 위한 수완, 요령, 기술, 그것을 교회에 와서 목사에게 배우려고 한다는 겁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내 사업이 잘 되고 우리 가정이 행복하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그 방법을 알려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다가 은혜를 좀 받았다 싶으면 그만 난리가 난다는 겁니다. 하지만 진짜로 은혜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지금 자기가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란 말이죠.
주님이 하게 하셔서 합니다 !!
그런데 이것이 잘 믿어지지 않아서 실제로 테스트를 한 사람이 어제 우리교회에 왔는데, 자기는 교회에 가지고 않고 말씀도 듣지 않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이 사람이 누구라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해도, 절제의 영이 임해서 참고 있는데 말이죠(ㅋㅋ).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있는데, 그렇게 자기는 정말로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만나는 언니들이 자꾸만 성경말씀을 이야기를 해서 그때마다 성경말씀을 펼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는 그야말로 칼맞은 기분이라는 말이죠. 자기는 진짜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싶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가 주인공일 때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구원을 받은 것으로 되는데, 그런데 그만 주인공이 바뀌어서 주님이 주인공이 되니, 자기는 성경공부도 하고 예배참석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는 아무 것도 하기 싫어도 말이죠. 그러니 그 모든 시도와 발걸음은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래서 "주님이 하게 하셔서 합니다" 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 소리를 듣고 놀랐는데, 왜 그런고 하니,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지, 그것을 테스트하겠다는 용기가 가상하다는 겁니다. 우리와 같이 이미 나이가 든 사람은 겁이 나서라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데, 진짜 그게 맞다고 하면 자기만 손해라는 겁니다. 이것은 누가 이기고 지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제로섬게임이 되어서 말이죠.
아무튼 자기가 진짜로 그렇게 시도를 해보니, 주님께서 자기를 그냥 가만히 두지를 않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 새로 나온 책을 벌써 다 읽고 나서는 또 다시 읽어보고 있다고 하는데, 보통은 서너 장을 읽다가 그만 잠이 와서 덮어놓고 마는데 말이죠.
하나님, 왜 내 것을 건드립니까?
이제 그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이렇게 대신 죽으심이 있고, 여기 안에는 자기가 설쳐서 만든 솜사탕과 같은 현실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현실을 지키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는데, 자기 것이 깨지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을 작정이라는 말이죠.
"하나님, 왜 내 것을 건드립니까? 이것은 내 자식, 내 새끼입니다. 건드리면 안 됩니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가 만든 현실이 자기의 자랑거리로 가득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괜찮은 현실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괜찮은 짓을 총동원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의 대신 죽으심이 외곽에 있게 되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주님의 새언약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대신하심이 이것을 소개하고 알려주는 식으로, 여기 안에 허가도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침입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갑자기 뛰어드는 것을 두고 '난입' 이라고 하는데, 마치 도적같이 그렇게 뛰어들어오신다는 것이죠.
그러면 여기 안에는 울부짖고 난리가 나는데, 이렇게 울부짖고 하는 것을 '기도' 라고 하는데 말이죠. 우리가 평소에 습관적으로 하는, 그렇게 하나님에게 예쁜 짓을 하는 기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난리가 나서 마구 항의를 하듯이 하는 기도가 있다는 겁니다.
완전히 막다른 골목길에 이르러서 하는 기도가 있는데, 그때는 두 손을 예쁘게 모으고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두 다리를 뻗어가면서 기도를 한다는 말이죠. 마치 아이가 장난감을 사주지 않으면 마트 바닥에 주저앉아서 울부짖듯이, 그렇게 하는 기도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 이렇게 하시면 정말 저는 죽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그래, 내가 죽으라고 했잖아"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싫습니다. 이 현실을 그냥 두고 죽기는 싫습니다. 이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보람인데, 이것이 깨지만 저는 정말 죽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다리를 뻗치고 있다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아직도 남아있는 12척의 배가 있다는 겁니다(ㅋㅋ). 주님이 주신 말이죠. 그러니 그렇게 울부짖고 항의할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아직도 힘이 남아있다는 것인데, 자아가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죠.
주님의 공생애이기에 !!
그게 무엇인고 하니, 지금 이 자리가 우리의 것인데, 그런데 주님은 무엇으로 바꾸는고 하니, 이것을 그만 공생애로 바꾸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공생애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우리 자신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예수님인데, 바로 그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찾아오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 자신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역할을 했다는 겁니다. 로마로부터 유대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 바로 그 사고방식을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 속에 재현시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대신 죽으심이 어떤 경로를 밟아서 완성이 되었는지를, 그것을 우리의 고집스러움을 통해서, 이 땅에서 반복해서 바깥으로 증거케 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예수의 증인' 이라고 하는데, 남에게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자기에게 시달리고 있다는 증거, 즉 우리가 얼마나 자기 것을 지키고 싶어서 예수님을 이용해먹었는지, 그게 곧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의 마음가짐이라는 겁니다. 즉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주님을 욕되게 했는가?" 라는 것을 남들에게 증거한다는 말이죠.
나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자다 !!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삼종세트, 즉 법과 실패와 은혜인데,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면, 그런데 거기서 은혜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 주어지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그 은혜 안에는 "나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자다" 라고 하는 들어있는데,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그러한 윤곽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 가운데서 12제자들의 모습은 무엇인고 하니, 나중에 알고 보니 그야말로 쓸모가 없는, 즉 탕자와 같은 자들은 주님께서는 이미 십자가로 구원하시기로 작정을 하셨다는 말이죠. 바로 그것을 두고 '대신하심'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 짧은 대신하심이, 물론 그것이 우리에게는 이론이지만, 그런데 그게 우리의 실생활일 줄은 우리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 대신하심이 마치 아이스크림이 녹듯이 녹아져서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오게 되면, 우리의 그 일상의 모든 것도 다 주님의 대신하심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살구 엑기스를 만드는 것도 주님의 대신하심인데, 그때 주님이 물으시는데, "왜 살구 엑기스를 만들지?" 라고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이것은 복음을 위해서 하는데, 주님께서 좋아하시라고 말입니다" 라고 하게 된다면, 물론 그것이 이론상으로는 맞는데, 루터의 주장처럼 믿음으로 사는 것이 맞다는 겁니다.
너무 아파요 !!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되기 위해서 이러한 우리 자신의 이론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것이 들어갔다가 빠져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 힘으로 되지 않는데, 너무나 아프기에 말이죠. 물론 말로는 "주님을 위해서!" 라고 하지만, 그렇게 자기가 주님을 위해서 했기 때문에, 자기 것도 덤으로 어떻게 좀 잘되게 해달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을 뺄 때, 우리는 참으로 많이 아픈데,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빼면 살아가는 보람도 없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게 주님의 공생애인데, 주님의 공생애가 어떠한고 하니, 마태복음 3장이나 4장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진행이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처음에 있던 그 현실이,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울부짖고 "그럴 수 없습니다" 라고 하면, 주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라고 하시는데, 이것이 계속해서 전진을 한다는 겁니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강도의 자리까지 !!
우리는 "이것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울부짖다가도 세월이 지나면 "아, 견딜 만하네" 라고 하면서 새로운 현실로 재구성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점점 더 어떤 방향을 향해서, 그곳으로 가고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강도의 자리까지 간다는 말이죠. 즉 "오늘밤에 니가 낙원에 있으리라" 라는 겁니다.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니 모든 것을 다 버려도 괜찮은데, 그렇게 해도 기뻐할 수 있는, 그것이 바로 그 십자가이고 그 십자가의 상을 향해서 가도록, 그렇게 주님은 우리를 끌어당기신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십자가 외에는 자랑거리가 없다는 말씀을 실감나게 만든다는 겁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지금 여러분의 표정이 별로 밝지가 않은데(ㅋㅋ), 굳이 십자가까지 가지 말고 지금 여기에서 스톱해달라고 하는 듯한 모습이라는 것이죠. 제가 잘못 보았습니까? "그만, 거기서 멈춰라!" 라고, 이것이 어떤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인데 말이죠. 하지만 주님께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데, 기어이 우리를 강도의 자리까지 가게 만든다는 겁니다.
주님의 '대신하심'만이 달랑 남는 것 !!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그 어떤 다양성, 즉 그 어떤 직업과도 상관이 없이, 그 어떤 모습으로 있다고 하더라도 최고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대신하심'만이 달랑 남는 것, 다른 것은 전혀 필요치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그것이 사도바울의 입술에서 나왔는데, 사도바울은 이미 성령을 통해서 다 알았다는 말이죠. 그러니 다양성의 남들을 모델로 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로 끌려가고 있는, 그런 자들의 대표자가 누구인고 하니, 유일하게 대신하신 그 대표자가 누구인고 하니,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주님께서 친히 인도하고 있는 줄로 압니다. 그리고 그런 도중에 목표지점을 미리 알려주시니 또한 감사를 드립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처럼, 오늘밤에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겠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그래서 온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기뻐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6,9 오후 5시에 마침.
이미 '죽은 자'임을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