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16 - 시간의 삽입
07,08,0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53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전도서 3장에 보면 "천하에 범사가 다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라고 되어있습니다. '때' 라는 것은 시간에 속하는데, 이 시간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전 3: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전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 3: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 3: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전 3: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전 3: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전 3: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전 3: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목적'이 있다는 것은?
여기에 '목적' 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모든 것이 목적과 관련이 있을 경우에만 의미가 생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목적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렇게 목적이 있으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여기에 하나로 쏠리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다 말이죠.
그러니 이 목적과 연관성을 가질 때만, 여기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들, 즉 인간만이 아니라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짐승들, 그것들이 관련이 있고, 그렇게 될 때 여기서 의미가 생긴다는 겁니다. 의미라는 것은 우리 각 개인이 주변을 둘러본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사람은 태어나게 되면, "나는 왜 이 집안에서 태어나게 되었는가?" 라고 하면서 그 의미를 계속해서 찾게 되는데,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것은 이쪽 의미와 충돌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즉 차이가 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 중심의 의미가 되어버리면, 전도서 3장에 나오는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라는 것과, 그게 서로 같을 리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자기의 목적이 말이죠.
그렇게 사람은 이 땅에서 살아갈 때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게 되는데, 하지만 그렇게 의미를 찾을 때마다 나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진짜로 숨겨진 하나님의 목적과 늘 부딪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부딪침이 바로 죄가 되고 어둠이 되고 만다는 말이죠. 그렇게 죄가 되니 범죄가 되고 악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목적이 그렇게 부딪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원래 창조한 목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지고 계속해서 우기기에 들어간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나' 라는 것이 이미 있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 중심의 의미를 계속해서 우기다가보니, 거기에 의해서 징벌이 따르고 저주가 따르고 형벌이 따른다는 겁니다.
불교와 유교 !!
하지만 불교의 경우에는 이런 목적이 없는데, 불교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한 그 사람에게만 그 무의미가 의미가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해탈이 되었기 때문에 말이죠. 이 세상 전부를 다 알았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게 주님이 보시기에 죄가 되고 악이 되고 어둠이 된다는 겁니다.
불교의 고승들이 그 얼마나 점잖은지 모르는데, 그리고 공부도 엄청나게 많이 한다는 말이죠. 그들은 말을 결코 함부로 하지 않고, 남의 집에 들어가서 물건을 훔치지도 않는데, 그리고 길을 가다가 여자에게 시비를 걸지도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 일을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경우는 성리학에 의해서, 즉 공자와 맹자의 사상에 기초해서 조선이 건국되었다는 말이죠. 그런 자들을 두고 '선비'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런 선비가 있던 시대에도 불교가 민중들에게 확산되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조선시대처럼 유교사상에 의해서 국가의 기본이 형성되어버리면, 그게 하나의 사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만 국가의 법으로서 장착이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법이 있다는 것은 무엇이 있는 것과 같은고 하니, 선과 악이 결정되어있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나에게 법이 있다" 라는 것은, "내 뜻대로 하지 않으면 모두가 다 악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국가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 그 악인에 대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처벌을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도 불교가 그런 조선시대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불교가 그만큼 점잖다는 겁니다. 즉 기존의 법망으로도 악인의 축에 들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 그만 전쟁이 터졌다고 하면, 그러면 불교신자들을 군인으로 모집을 해야합니까? 신앙적인 양심에 의해서 그만두라고 해야합니까? 불교는 교리적으로 살생을 하지 않는데, 그런데 전쟁이 일어났으니 당연히 군사는 모집을 해야하고 말이죠. 그래서 유교 쪽에서 보는 겁니다. 과연 그들이 군사가 되어서 살생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말이죠.
이것이 부처님의 뜻입니다 !!
그런데 사명대사의 경우에는, 먼저 스스로 지원해서 군대를 만들어서 살생을 해버린다는 겁니다. 먼저 나라가 있어야 불교도 있다고 한다는 말이죠. 큰 살생을 막기 위해서, 즉 전쟁을 막기 위해서 작은 살생을 하는 것은 부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부처님의 뜻이라고 해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입장이 변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불교가 살아남는데, 그래서 유교 쪽에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종교라는 것은 진리가 아니고, 자기 뭄뚱아리 하나 제대로 살리기 위한 수완에 불과하다" 라는 것을 말이죠. 그렇게 되면 불교는 전혀 국가권력에 위협하는 세력이 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고려시대의 불교라는 것도, 또한 신라시대의 불교라는 것도, 그게 하나의 정신이 아니라, 대중들이 불교를 믿으니 왕도 같이 믿는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을 하나의 사상으로 옭아매기 위해서 말이죠. 그래서 종교가 그만 권력화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제가 불교와 유교의 이야기를 왜 하는고 하니, 오늘날 기독교도 역시 마차가지라는 것이죠.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몸뚱아리가 편안한 것인데, 그렇다는 말이죠. 요즘 날씨가 무척 더운데, 밤에 잠을 잘 주무십니까? 제대로 잘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기도타임이라고 해서 기도를 하면, 그러면 서늘해지면서 잠이 잘 옵니까? 그런 것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덥다고 하는 것, 목적이 그렇게 온다는 말이죠. 이렇게 더울 때, 즉 자기 신체가 힘들 때, 지금 여기 기온이 견딜 만한지 신경이 많이 쓰이는데 말이죠. 하지만 날씨가 덥다고 하는 것, 그게 주님의 목적에 부합된다는 겁니다. 제가 덥다고 날씨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은 그게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는 말이죠.
인간의 의미는 자기 신체의 컨디션에서 나오는데, 그래서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는데, 그런데 날씨가 더워서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기는 쾌적한 것을 원하고 있는데, 그게 몸이 자연스럽게 요구하고 있는 의미인데, 그런데 기온이 무려 36도까지 몰라간다는 말이죠.
그렇데 도와주지 않는데, 그러면 주님의 목적이라는 것이 여기서 벌써 자기와 충돌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뜻이 있어서 덥게 하셨는데, 그러나 자기는 그것이 기분이 나쁘다는 말이죠. 그러면 기분이 나쁜 것과 주님께 감사하는 것이 맞지 않는데, "더워도 감사합니다" 라고 되어야하는데, 그런데 더운데 누가 감사합니까? 무슨 지옥생활도 아니고 말이죠.
자기 인생을 책임지지 말자 !!
그래서 이 목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추궁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데, 그게 바로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제 제일 중요한데, 우리도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죠. 37도에도 견딜만한 몸을 자기가 어떻게 주문해서 만들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조금만 온도가 높아지든지, 혹은 낮아지면 견딜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자기 자신의 몸에 대한 컨디션, 그것을 자기가 어떻게 책임질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만,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기 인생의 의미를 찾겠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자기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책임을 지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부질없는 짓은 하지 말라는 것이죠.
전도서에서 분명히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라고 했는데, 그것을 가만히 추적해보면 "너의 인생도 아닌데 니가 왜 건방지게 책임을 지려고 하는가?" 라는 겁니다. 그것을 추궁하고 있다는 말이죠. 12사도의 경우에, 그들이 가는 길이 자기가 원해서 가는 길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후회를 했습니까? "사도가 괜히 되었어. 주님이 자기를 따르고 했을 때 거부했어야 하는데" 라고 말이죠.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신약의 사도들이나, 오늘날의 성도들이나, 그들은 전부가 다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런 부르심이 없으면, 즉 주님의 찾아옴이 없으면 성도가 아니라는 말이죠. 자기가 주님을 찾겠다고 하면서 손을 들고 나서는 것은 가짜라는 겁니다. 평생을 교회에 다녀도 가짜라는 말이죠.
우리는 갈 곳이 없어 !!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의미를 날마다 삭제시키는 것, 그러면 우리 자신의 의미는 사라지는데, 그렇다면 우리 안에 들어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의 목적인데, 그게 전도서 3장에 나온다고 제가 앞에서 언급을 했는데 말이죠.
지금 처음에 했던 강의를 다시 하고 있는데, 그렇게 주님의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과 관련이 되어서 목적이 이미 하나로 묶어져 있다는 겁니다. 이게 문어발과 같이 서로 연결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의 의미는 소용이 전혀 없고, 목적에서 나오는 의미, 그 의미가 우리의 의미를 대체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갇혀있다' 라는 것인데, 달리 말하면 "갈 곳이 없다" 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대처하면 됩니까? 그것은 간단한데, 가지 않으면 된다는 겁니다. 즉 다른 상상적인 세계를 만들어서 그리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번에는 우방랜드로 갈 거야 !!
예를 들어서, 초등학생들이 소풍을 가는데, 그런데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요즘 같으면 난리가 나겠지만, 우리 때는 선생님의 카리스마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소풍을 가는 당일에도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학부모가 감히 전화도 할 수가 없는데, 물론 그때는 집에 전화기도 거의 없었지만 말이죠.
선생님이 가자고 하면 가는 것인데, 그러면 한 반에 40명이라고 하면, 선생님의 구호에 맞추어 줄을 지어서 40명이 간다는 겁니다. "참새-짹짹, 오리-꽥꽥!" 라고 하면서, 김밥과 칠성 사이다를 가방에 넣어서 말이죠. 물론 요즘 초등학생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데, 그때는 그랬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가면서 상상을 하는데, "선생님이 이번에는 여기로 갈 거야. 아냐, 저기로 갈 거야" 라고 하면서 말이죠. 대구의 서부 초등학교의 경우에는 지금의 우방랜드가 있는 곳이나 팔달교의 밤나무 숲으로 많이 갔는데 말이죠. 그렇게 상상을 한다는 겁니다.
담임 선생님이 없기에 !!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자기 인생에 대해서 매일같이 하는 상상인데, 하지만 갇혀있고 갈 곳이 없는 이상은 이러한 상상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의 목적이고, 우리는 이미 거기에 관련이 되어있기에 말이죠.
불교의 경우에, 스님들도 상상을 하면 인생이 힘든다는 것을 아는데, 미리 오지도 않은 미래를 당겨서 걱정하는 것이 부질없는 짓임을 아는데, 하지만 그들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담임 선생님이 없으니 말이죠. 자기 인생을 자기가 알아서 갈 뿐이지, 담임 선생님, 즉 구세주가 없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주인이 없는데, 창조주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심판주도 없는데, 여기서 불교는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인생을 심판할 자는 아무도 없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언뜻 들으면 굉장히 좋아 보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허무하다는 겁니다.
교회에 좀 다니다가 나오지 않는 자들은 모두가 다 불교신자라고 보면 되는데, 왜 그렇습니까? 자기 상상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교회에 왔는데, 그런데 교회에서 목사가 자꾸만 다른 길을 이야기하니까 재미가 없다고 하면서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죠.
"어디로 갈 것인가?" 라는 문제는 목적 쪽에서 계속해서 주입을 시키는 것이지, 자기가 상상한 것이 맞추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 마음에 부합이 되도록 우리의 인생을 이끌고 가시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 오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죠.
그렇게 모를 때 신자가 아닌 사람은 불안함에 떠는데, 반면에 신자인 사람은 "그것을 내가 꼭 알아야 되는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게 곧 성도의 자유함인데, 오늘 오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한 달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것을 꼭 알아야만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그것은 주님이 알아서 하실 문제인데, 그런 식으로 자기 인생을 수용하면 된다는 것이죠.
다시 정리하면 !!
오늘 강의제목이 '시간의 3가지 표현' 인데, 그렇다고 해서 "시간이 무엇인가?" 라고 하면서 바로 들어서게 되면,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간에 대해서 생각하기 이전에 사전준비가 조금 더 길어져야 하는데, 그 준비를 더 해보자는 말이죠.
이것을 그림으로 한 번에 그리면, 이렇게 목적이 있고, 여기서 연관이 나오는데, 이렇게 연결된 모든 관계가 우리가 되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개인적인 목적과 의미는 숨겨져 있는 목적과 늘 충돌하게 되는데, 단 누구에게 말인가요? 성도들에게 부딪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된다는 말이죠. 심지어는 자기 뜻대로 되더라도 그게 주님의 뜻인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오늘 오후에 경북지방에 비가 옵니다" 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간절한 바램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역시 주님의 뜻이라는 것이죠.
자기가 알아서 맞추었다고 해서, 그것은 주님이 용납하지 않는데, 여기서 충돌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렇게 충돌이 일어남으로서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갇혀있다는 사실인데, 그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보호받는다고 여기면 된다는 말이죠.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지 않으면 누가 우리를 지켜주고 보호해주시겠느냐는 겁니다. "거기는 안 돼. 거기는 멸망의 길이야. 이쪽이 목적으로 이끄는 삶이야" 라고 하시면서, 주님이 그렇게 인도를 해주신다고 여기고 언제나 감사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즉 충돌을 일으키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느끼겠느냐는 겁니다. "목사님, 그러면 너무 무의미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지 싶은데, 하지만 불교의 무의미와는 다르다는 말이죠. 불교의 무의미는 목적이 없다고 했는데, 그런데 성도의 무의미는 목적이 따로 있기 때문에, 자기가 따로 생각하는 의미는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무의미하다' 라는 의미는?
여기에서 질문을 하겠는데, '무의미하다' 라고 하면, 그러면 1번은 "무엇을 해도 괜찮다" 라는 것이고, 2번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라고 한다면, 여기서 몇 번이 정답입니까? 모든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막 살아도 된다고 하면 1번인데, 그리고 2번은 아무도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고 말이죠.
여러분이 한 번 골라서 잡아보세요. 어떻게 마음에 드는 것이 있습니까? "무엇을 해도 괜찮다" 라는 것과,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라는 것인데 말이죠. 정답은 둘 다 틀린 말인데, 아무 것도 하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여기 전도서 3장에 보면,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라고 하는데, 그러니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다가 언제 죽겠습니다" 라고 요청을 해봐야,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목적이 일방적으로 알아서 하기 때문에 말이죠.
그리고 8절에 보면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라고 하는데, 그러면 "무엇을 해도 괜찮으니, 나는 당신을 미워할 거야" 라고 해도, 그것은 이 무의미와 그 내용이 합치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무의미하다는 것이 진짜 의미가 있는 내용을 위해서 충실하게 쓰여지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전 3: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전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 3: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 3: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전 3: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전 3: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전 3: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전 3: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자책할 필요가 없어 !!
그러니 진짜 주님의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무의미하다는 것으로 전환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무의미하니 괜찮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이 무의미에서 이쪽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이쪽 방향, 즉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지요? 우리는 무의미하지요?" 라고 하는, 이쪽 방향에서 무의미한 쪽으로 방향이 바뀌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의미가 없구나" 라고, 혹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의미가 없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찡그리면서, 허무하면서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아하,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무의미' 라는 인식을 가지고, 진짜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의미가 있는 쪽으로 이끌고 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무의미를 느끼면서, 속으로는 기분이 좋고 감사가 나오도록 인도를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내가 무엇도 해도 괜찮다" 라는 것에 대해서 자책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물론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라는 것에 대해서도 그렇고 말이죠. 즉 스스로 자기 인생에 대해서 책임지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다시 불교 이야기를 !!
불교 이야기를 다시 해보면, 불교는 무엇인고 하니, 목적이 없으니, 즉 무의미하니 그만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즉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니 배가 고프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변에 텃밭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그만 무엇을 하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잡초를 뽑고 진드기 약도 치고 하는데, 그런 것은 왜 하느냐는 것이죠. 모두가 다 살아있는 생명인데 말이죠. 그것은 자기가 살아야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그래서 취직도 하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나서, 즉 속세를 떠나서 깊은 산골에서 산다고 하는데, 하지만 깊은 산골은 어디 속세가 아니냐는 겁니다. 거기는 바람도 불지 않고 비도 오지 않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제 아무리 깊은 산골에 들어간다고 해도 기본적인 것은 해야한다는 겁니다.
"당신은 왜 밥을 먹습니까?" 라고 하면, "예, 아무 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라고 하면, 하지만 그것이 바로 왔다갔다하는 것인데, 그게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다들 위선자들이라는 겁니다. 모두가 다 사기꾼들이고 거짓말쟁이들이라는 말이죠.
스님과 컴퓨터 !!
우리교회의 컴퓨터를 고치는 기사가 하던 말이 있는데, 자기는 교회뿐만이 아니라 절에도 컴퓨터를 고치려고 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절에 왜 컴퓨터가 필요합니까? 속세를 떠났다고 하는데 말이죠. 거기에는 사주팔자를 보는 앱을 깔아놓았다고 하는데, 그러면 절에서 하는 일이 다른 일이 아닌데, 물론 컴퓨터는 뒤에 숨겨놓고 있는데 말이죠.
"어떻게 오셨습니까? - 우리 남편이 몸이 아픕니다. - 그러면 생일이 어떻게 됩니까? - 예, 언제 언제입니다. - 그러면 이제 잠시만 기다리세요" 라고 하는데, 그리고는 커턴 뒤로 가서는 컴퓨터에서 자료를 뽑아 가지고 와서는 뭐라고 합니까? "예, 앞으로 5년 뒤에 좋아질 겁니다" 라고 하면서 복채를 5만원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리고 혹시 맞게 되면, 나중에 더 많이 챙기고 말이죠.
중들이 생활을 그렇게 하는데, 손목도 아픈데 굳이 왜 목탁을 치고 염불을 왜 외우고 합니까? 그런 것은 다 폼으로 하는 것인데, 그래서 어떤 절에 가면 그것을 녹음해서 녹음기로 그냥 틀어놓기만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영업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은 교회의 미래모습인데, 왜냐하면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불교가 수 천년 동안을 내려왔는데, 그렇게 내려온 결과가 무엇인고 하니, 결국은 점을 치는 것이란 말이죠. 즉 인간의 생사화복을 미리 알려고 한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무의미가 싫다는 것인데, 나름대로 의미가 있게, 즉 자기 욕망이 원하는 의미를 채워주는 것을, 그것을 그동안 절에서 해주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제 역할교체에 들어가는데, 그동안 절에서 해주던 것을 이제는 교회에서 그 담당을 해준다는 겁니다. 절은 시대에 뒤떨어지면서 밀리고 말이죠.
십자가에는 운명 결정권이 있기에 !!
그러니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합니까? 자기가 알아서 하는데, 주님의 목적이 없기 때문에, 조금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즉 어른이 없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인생의 운명에 대해서 결정타를 날릴, 그러한 인생의 키를 쥐고 있는 분을 만나지 못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십자가에는 운명 결정권이 있는데, 즉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면, 거기에서 우리의 운명은 그만 결정이 나고 만다는 겁니다. 그 십자가의 피가 관련이 되어있는 자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하든지, 그 사람은 오늘밤에 죽어도 낙원에 간다는 말이죠.
이 세상에 수많은 사건이 있는데, 임진왜란도 있고, 부처가 태어난 것도 있고, 또한 하나님의 천지창조도 있고,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것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운명을 한 방에 결정짓는 사건은 십자가 사건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했다는 말이죠.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결정적 의미 !!
조금 전에 했던 것을 다시 하면, 무의미가 이렇게 가는 것이 아니라, "나는 무엇이든지 나의 원대로 하겠다", 혹은 "나는 힘들어서 하지 못하겠다" 라고 하는, 그렇게 "하겠다, 못하겠다" 라는 것이 결국 무의미로 가서, 물론 그렇게 무의미가 되게 하는 위에는 최종적인 '결정적 의미'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 결정적 의미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의 계획을 주님에게 양보를 좀 하자는 겁니다.
날씨가 더우면 에어컨을 틀면 되는데, 에어컨이 없으면 그냥 욕탕에서 물을 틀어놓고 그 안에서 살면 되고 말이죠. 그러니까 자기 인생에 대해서 자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자기 인생에 대해서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마음을 낮춘다는 것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에 대해서 너무 심하게 책망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러니 자기 자신을 보고 "이 바보야!"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인데, 젊었을 때는 몰라도 나이가 좀 들었다고 여겨지면 곡기만 빼먹지 않고 살면 되는데, 힘도 좀 빼고 살자는 말이죠. 어떤 일이 생겨도 너무 놀라지 말고, 이미 놀랄 것은 다 놀라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하게도, 진리를 알고 복음을 알았으니 더 이상 놀랄 것은 없다고 여겼는데, 막상 남편이 계단을 올라가다가 발이라도 삐끗했다고 하면 얼마나 놀라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아닌가요? 순간적으로 "하나님이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래서 조금 전처럼 "내가 무엇을 해야하지?" 라고 환원이 된다는 말이죠.
주님의 때 !!
그래서 여기 전도서 3장에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모든 것이 다 때가 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런 때가 오지 않아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우기지 말라는 겁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목적과 관련된 때가 반드시 있다는 것이죠. 주님의 때가 말이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모든 것이 무의미했는데 주님께서 때를 통해서 최종적인 운명결정과 관련된 내용으로 나에게 삽입을 시켜주시고 개입을 시켜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 의미와 주님의 의미를 교차시키는 때로 수용하면 된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줄곧 자기 때를 주장하는데, 주님께서 자신의 때로 바꾸어주신다는 겁니다.
본론 - '시간의 3가지 표현' !!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시간의 3가지 표현'에 대해서, 혹은 시간의 3가지 형식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데, 그것을 한 번 살펴보자는 말이죠. 여기 교재의 작은 제목이 '시간의 3가지 표현' 이라고 되어있는데, 이 제목자체가 상당히 어렵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시간이 무엇인지, 그것부터 먼저 알아야 하는데, 시간은 무색, 그리고 무취라는 말이죠. 즉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무형인데, 즉 형체도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시간이 있다고 우긴다는 겁니다. 한 두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하면 거짓말이라고 하겠는데, 모두가 다 그런 이야기를 하니 거짓말인지 아닌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사람들은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간다" 라고 하는데, 물론 강물은 흘러가는 것이 눈에 보이지만, 그런데 시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시간이 무슨 낙동강인가요? 물론 요즘은 댐 때문에 강물이 제대로 흐르지 않아서 난리인데, 아무튼 왜 시간이 흘러간다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뭔가 우리가 시간에 대해서 표현할 때 놓친 것이 있다는 말이죠.
나의 의식의 동질성 !!
그러니 시간에 대해서 정확하게 표현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러면 도대체 그 놓친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의 동질성', 혹은 '나의 의식의 동질성'을 기초로 해서 그 다음에 시간을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의 의식의 동질성' 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인간은 "5초 전에 나와 지금의 내가 같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전혀 같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변하기 때문에 말이죠. 인간은 변하는데, 그런데 5초 전의 자기와 지금의 자기가 같다고 우기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지금의 자기가 우기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의 자기가 무엇이라고 우기는고 하니, 5초 전의 자기 모습을 기억해버린다는 말이죠. 5초 전의 자기 모습은 날아가 버리고 없는데, 그런데 5초 전의 모습을 기억하는 그 기억 속에는 동질성, 즉 "5초 전과 지금은 똑같다" 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의식 속에 작용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반갑다, 친구야 !!
예를 들어서, 50년 전에 같이 학교를 다녔던 동창생이나, 혹은 자기의 첫 사랑을 우연한 기회에 멀리서 보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1번, 다가가서 만난다", "2번, 얼른 피한다" 라고 한다면, 과연 몇 번이겠습니까? 2번인데, 일단 피하고 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인간을 만나면 자기 시간을 빼앗을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하고, 그리고 돈과 엮이게 되면 그야말로 빼고 박도 못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사람은 50년 전의 자기의 치명적인 약점을, 그것을 그 사람은 자기 기억 속에 동질성으로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이왕 어렵게 했으니 더 어렵게 가겠는데, 자기가 여기에 있는데 50년만에 동창생을 만났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떤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게 바로 방금 이야기한 기억인데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라고 우기는 기억 속은 어떻습니까?
그러면 "나의 허락도 없이 나의 10대 모습을 자기의 기억 속에 담겨서, 자기의 동질성을 유지하는데 내가 보탬이 되는 요소가 되고 만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반갑다, 친구야!" 라고 하면서 내미는 손에는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너는 기껏해야 그때 3학년 2번 25번이고, 그때 너는 나의 신발을 훔친 인간이야" 라고 하는, 그것을 포함한 채로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민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 동창생을 50년만에 만났을 때는 어떻게 됩니까? 물론 그 동창생은 기억을 하지 못하겠지만, 자기는 "너는 그때 내 돈 500원을 갚지 않았어" 라고 하는, 그렇게 좋지 않은 기억이 담겨있는 상태로 자기의 동질성을 유지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두 사람이 만나는 시간이 다 다르다는 겁니다. 이게 시간론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인데, 시간이라는 것은 백 명이 만나도 다 똑같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인데, 그런데 시간은 자기의 동질성을 기초로 해서 구성이 되기 때문에, 그 어떤 경우라도 시간이 결코 같지 않다는 겁니다.
시간에 갇혀있는 인간 !!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시간이 같지 않으면 같지 않은 것이지, 그것이 무엇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시간이 같지 않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자기의 의식 속에서 시간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그 사람은 시간 속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즉 시간에 갇혀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시간에 갇혀있게 되면, 그 시간에 따라서 기억이 나는 추억의 공간도 갇혀있게 되는데, 그러면 그 사람은 나름대로의 자기 세계관이 따로 펼쳐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동창생을 만나게 되면, 자기는 무엇을 손해를 보는고 하니,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졌던, 이미 목적이 완성된 그 주님의 세계관이, 50년만에 만난 동창생으로 인해서 깨어지게 되는데, 즉 방해를 받는다는 말이죠.
'쓰윽'과 '움찔' !!
50년만에 동창생을 카페에서 만났는데, 그러자 그 친구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나도 10대에는 교회에도 열심히 다녔는데, 그때 너는 종교가 없었지만, 나는 열심이었어. 그런데 지금 나이 70이 되어보니 그렇게 다닌 것도 다 헛방이야" 라고 하는 자기 동질성에 대해서 체험담을 늘어놓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는 지금 교회에 다니고 있는데, 그래서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은 목적을 이룰 때가 있나니" 라는 것인데, 즉 운명 결정권이 누구에게 있다는 겁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인데,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가 알고 있는, 즉 예수님이 자기의 모든 결정권을 가지고 있고, 그 예수님을 믿으면 천당에 간다는 것이 하나의 가설이나 추억담이나 취미활동이 아니냐고 하는, 그런 새로운 감각이, 새로운 체험이 50년만에 친구를 만남으로서 자기에게 '쓰윽' 들어온다는 겁니다.
하지만 상대방은 그것을 모르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50년 전에 교회에 다니지 않았기에 지금도 다니지 않는 줄을 안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동창생은 편하게 이야기를 하는데, "목사들은 다 사기꾼이고, 알고 보니 예수도 똑같은 인간이더라.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살았다고 하더라" 라고 말이죠.
상대방인 동창생은 자기를 같은 편이라고 여기고 마음 편히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데 정작 듣는 자기에게는 그것이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구축하고 있는 세계관 속으로 그만 '쓰윽' 하고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움찔' 하게 되고 만다는 말이죠.
그래서 "내가 기도원에 가서 '밉씁니다' 라고 기도를 하면서 까지 열심히 예수님을 믿었는데, 그것이 일방적인 나의 착각이나 착오는 아닐까? 혹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세뇌를 당한 것은 아닐까? 이 세상에는 성경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경도 있는데, 그런 것까지 다 살펴보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그냥 분위기에 휩싸여서 기독교만 진리이고 다른 종교에는 진리가 없다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배제한, 그야말로 그들의 폐쇄적인 사고방식에 내가 말려든 것은 아닐까?"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
제가 본 바로는 이러한 경우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여러분이 평소에,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믿지 않는다고 치고 성경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라고, 그렇게 간곡히 부탁을 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길에서 얼마든지 30년만에, 혹은 50년만 동창생을 만날 수 있고, 그리고 첫 사랑을 만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다 만날 수 있다는 말이죠.
자기가 요청한 것이 아닌데, 기다린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우연히 만났는데, 그런데 그때부터 흔들리는 마음을 어쩔 수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래, 너무 독선적으로 하면 안 돼. 자칫 잘못하면 광신도가 되고 말아. 일단 다리 하나를 기독교에 넣어놓고, 다른 것도 좀 알고 가야지. 그렇게 해서 융통성이 있게 진리에 어프로치를 해야지" 라고 하면서 갑자기 수정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는 무의미한데, 50년만에 친구를 만나고 나서는 자기 단도리를, 즉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의미를 챙겨야한다" 라고 하는, 그런 자기 자신을 챙기는 의식이 그만 재발하고 만다는 겁니다. 주님을 버리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참고로 하겠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도 복음을 좀 들었다고 하는 자들이 지금은 다들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자들과 이야기를 하게 되면 뭐라고 합니까?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믿는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라 걸치고 있는 것인데, 혹시 자기의 의미를 호응해줄 다른 교리나 신학체계가 오지 않을까 싶어서, 그것을 간곡히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한 대기상태에 있을 뿐이지, 전적으로 자기를 주님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사람을 찾아보기가 너무나 힘들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목사님,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러니 강요하지 마세요. 나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나의 의지가 있습니다, 나도 배울 만큼 배웠고, 알만큼 압니다" 라는 식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누가 강요한 것이 전혀 아닌데, "성령이 함께 계십니까?" 라고 묻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강요로 들린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죠.
정말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떻습니까? 주님만 의미가 있고 자기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잘 아는데, 그런 사람은 50년만에 친구를 만나도, 그래서 그 친구가 말하기를, "나도 옛날에 예수님을 좀 믿어봤는데, 그게 다 부질없는 짓이야. 인생, 그것은 자기 팔을 자기가 흔들면 된다" 라고 하면서, 자기보다 더 자유롭게 보인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반응을 해야합니까? 그런데 그런 친구가 실제로 성경에 보면 나온다는 겁니다. 고난도 없고, 아픈 것도 없고, 또한 이도 튼튼하고, 그야말로 완벽하다는 말이죠. 묘지도 다 준비를 해놓고, 자식들도 모두들 효자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전혀 믿지 않는데, 물론 부처님도 믿지 않지만, 그렇게 아무 것도 믿지 않는데, 왜 그렇게 팔자가 편한지, 말년이 너무나 행복해 보인다는 말이죠.
내 시간은 헛방이다 !!
그런 사람을 보면 당연히 자기와 비교가 되는데, 그러니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 다녀도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떠한고 하니, 그런 사람을 반드시 만나게 되어있는데, 스케줄이 그렇게 짜여져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께서는 왜 그렇게 우리의 스케줄을 짜시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너의 시간은 헛방이다" 라는 것인데, 즉 "내 동질성은 헛방이고, 내 공간성은 헛방이고, 내 세계관은 헛방이다" 라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전도서의 말씀을 보면서, 성경말씀을 보면서 자기 세계관을 구축하려고 하는 것은 다 헛된 짓이라는 말이죠. 성경말씀을 참고로 해서, "성경대로 이런 세계 같으면 내가 믿을 만하다" 라고 하면서 구축한 그 모든 것이, 그것이 무의미한 것 같지만 사실은 꼼수를 썼다는 겁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만나더라도 동창생을 만나면 안 되고 주님을 만나야 하는데, 즉 십자가를 만나면 그때부터는 무엇인고 하니, 모든 시간은 스톱이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과거+현재+미래'가 십자가 안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말이죠. 그것을 어제 오후시간에 "과거+현재+미래는 묵시가 된다" 라고 했는데, 그것이 통합이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친구야 !!
며칠 후에 동창생을 만나서, 그 동창생의 입에서 "기독교도 헛되고, 복음도 헛되다" 라는 소리를 듣게 되도록 이미 십자가 안에서, 십자가라는 최종 목적에 맞도록 타이밍을 맞추어서 그런 친구를 만나야 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정말 제대로 된 믿음인지, 아니면 조작된 가짜인지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렇게 흔든다는 말이죠.
그렇게 주님께서 계속해서 흔드는데, 그래서 정말로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면, 그런 친구를 만나면 그냥 싱긋이 웃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오호, 그랬어요? 하지만 친구야, 니가 그렇게 살아도 헛되고 헛된 것이야. 처음부터 헛된 것이야"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친구야, 한 가지만 물어보자. 너를 누가 만들었지?" 라고 하면, "나는 그런 것을 몰라. 하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 행복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친구는 무엇입니까? 자기 눈앞에 있는 것밖에 모른다는 말이죠. 자기가 체험한 것들 중에서도 현재 기억에 남는 것만 구성해서, "지금 나는 행복해" 라고 우기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말이죠.
이 지구에는 70억이 넘는 인구가 살아가고 있는데, 전부가 다 개인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말이죠. "너도 죽었다가 다시 살래? - 나는 그런 것은 몰라. - 그러니 그것은 너의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해. - ? ? ?"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복음이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고 했는데, 그가 왜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그것은 모든 인간은 거기에 부합되지 않기에 그렇다는 말이죠. 사실은 인간도 아닌데, 그냥 있다가 사라지고 마는 안개와 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을 하나의 '증상' 이라고 보면 된다는 말이죠.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성은 어디서 왔는가?
여러분이 지금까지는 다 이해를 했다고 치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겠는데, 그러면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성은 어디서 나왔느냐는 겁니다. 모든 것이 묵시라고 한다면 이런 것은 필요가 없지 싶은데, 그런데 이것이 어디서 나왔느냐는 겁니다.
이 시간성은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이 결탁이 되어있는데, 누구와 말입니까? 악마와 결탁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은 개입을 하지 않는다고 치고, 악마와 인간만을 보면, 여기서 악마는 눈에 보이지 않으니 없애버리고, 그러면 누구만 남습니까? 인간이 보이는데, 이게 흔히 우리가 말하는 현실이라는 겁니다.
(창 3: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러면 창세기 3장에 나오는 가인의 자손들은 무엇을 했는고 하니, 똑같은 인간들끼리 지혜를 짜내고 노력을 해서, 그렇게 서로 생각하고 연구를 해서 인간의 세계, 즉 문명을 이루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이 무엇이 그렇게 어려우냐는 말이죠.
오랜 세월동안 이 세상에는 인간밖에 없었는데,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그 인간들은 서로 협력을 했고, 그러면서 너무나 불확실한 이 자연세계를 달래기 위해서 그들은 종교를 만들어서 신에게 정기적으로 뇌물을 바쳤는데, 즉 제사를 드렸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가인이 만든 '문명' 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는 것인데, 이것을 지금 교실에서 배우고 있다는 겁니다. 즉 '교실 이데아' 라는 말이죠.
혹성탈출 !!
방사성 동위원소가 나오기 이전까지는, 즉 19세기까지는 '크로마뇽인' 이라는 말은 나오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라는 복잡한 말도 없었고 말이죠. 이 세상의 역사는 유럽에서는 6,000년이고, 멕시코의 마야문명에서는 2만년이고, 인도에서도 그 정도가 되고, 중국이나 이집트에서는 만년 정도로 보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상상과 상상으로 엮어진 신화적 세계였다는 말이죠.
그런데 방사성 동위원소를 발견하고 난 뒤에는 그만 무려 지구의 역사가 57억년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대기 속에 남아있는 탄소의 동의원소의 잔류량과 지금 물질의 잔류량을 비교해서 연대측정에 들어간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인간의 조상은 그만 원숭이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물론 원숭이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더 올라가는데 말이죠.
이번 8월 15일에 개봉하는 영화가 있는데, '혹성탈출' 이라고 말이죠. 현대인들의 종교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영화인데, 아직 그 내용은 잘 모르지만 그 이전에 나왔던 '혹성탈출' 이라는 영화를 고려해보면, 현대인들은 무슨 종교를 믿고 있는지, 그것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현대는 과학이 그만 진리가 되고 말았는데, 그러니 더 이상 종교는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죠. 학교에서 이렇게 가르치지 않으려고 하면 그만 보따리를 싸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주의 연대는 137억년이라고 하는데, 물론 구라라는 말이죠.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법 자체가 전혀 정확하지 않다는 겁니다.
왜 노아홍수를 빼는가?
저는 기껏해야 6,000년을 넘지 않는다고 보는데, 제가 이것 때문에 과학서적을 많이 보았는데 말이죠. 그들의 주장은 헛점투성이이고 거짓말이라는 겁니다. 물론 진화론도 다 엉터리인데,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6일만에 창조하셨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제 와서 그것을 믿지 않는고 하니, 요즘은 교회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중간에 있는 노아홍수를 빼버려서 그러한데, 홍수가 났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너무나 육적이기 때문에 심판을 하셨는데, 그 심판의 사건을 그만 빼버리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렇게 심판사건을 빼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심판사건은 모든 시간을 제로로 만들어버리는데, 묵시가 개입되기 때문에 말이죠.
인간, 그리고 문명 !!
다시 하겠는데, 창세기 3장에서 이렇게 인간이 있고 악마가 있다고 하면, 그렇다면 아담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배후에 있는 악마는 눈에 보이지를 않으니 말이죠. 그래서 인간들끼리 문명을 이루었는데, 그것이 창세기 4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창 4: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 4: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 4:18)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창 4: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 4: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 4: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 4: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그렇게 문명을 이루면서 여기에서 '과거-현재-미래'의 시간관이 동원된다는 겁니다. 즉 "과거는 지나갔고, 현재에는 내가 있고, 미래에는 있을 것이다" 라고 하는, 그것이 인간의 삶의 의욕을 북돋아준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는 죽어도 자식을 낳게 되는데, 그러면 자식에게 무엇을 물려줍니까?
부모는 자식에게 과거에 선조들이 알았던 모든 지혜와 언어를 남겨주는데, 그 지혜는 언어에 담겨서 전달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의 두뇌가 매우 더 복잡하게 되었다고, 소위 뇌과학을 연구하는 자들이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겁니다. 기억이 늘어나면서 인간의 두뇌피질이 더욱 더 복잡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커진 것은 아니고, 회로가 더 복잡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들은 그것을 실험으로 증명을 해냈는데 말이죠.
그러면 인간은 시간에 대해서, 이 시간은 기억이라고 했는데, 인간은 이 기억을 자꾸만 축적해서 자식들에게 물려준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가면 갈수록 생각지도 못했던 과거가 점점 더 늘어난다는 말이죠. 그렇게 늘어나면 어떻게 됩니까? 인간의 의식은 기억에서 나오는데, 이 기억은 동질성이기 때문에 끊어지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시간이 아닌, 기억이 들어있어 !!
무슨 말인고 하니, 지금 저와 여러분의 머리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시간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끊어지지 않은 기억이니, 그게 시간이 된다는 것이죠. 즉 "지금은 지금이고, 내가 기억하는 것은 과거다" 라고 말이죠. 그러니 과거가 있어서 자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기억 속에 과거가 있기 때문에 과거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개인적으로 각자의 기억이 다 다른데, 그래서 동창생을 만나면 기억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말이죠. 다르다고 하는 것은, "너의 시간이 따로 있지만, 나의 시간도 따로 있다" 라는 겁니다. 시간이 있어야 세계관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50년만에 만난 동창생이 '쓰윽' 들어온다는 겁니다. "교회에 다녀도 소용이 없더라. 나도 옛날에 다 해봤는데 말이야. 너도 예수를 본 적이 없지? 나도 없어. 그렇게 없으니 지어낸 것이야" 라고 하면서 말이죠. 만약에 자기가 만든 시간관이 있다고 하면, 거기서 '움찔'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야, 그동안 내가 다듬어놓은 시간관이 다 깨지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그게 주님의 주신 묵시적인 시간관이라고 하면, 그렇게 반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니가 나에게 와서 그런 소리를 해야한다는 시점까지,
그렇게 우연처럼 보이는 것까지
주님에게는,
그게 다 십자가와 관련이 되어있기에,
십자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런 일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지금 이게 어려워서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데 말이죠.
그런 일이 있고 나면 그 다음에는 40년만에 또 동창생을 만난 것이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비구니가 되어버린 옛 애인을 만날 것이고, 그렇게 앞으로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 사건은 십자가만을 자랑하기 위해서, 그것은 필연적으로 자기가 부딪쳐야 하는 체험 중에서 감당해야만 하는 절차 중의 하나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의 동질성은 늘 깨어지는데, 만약에 동질성이 그래도 있게 되면 자기에게 의미가 있어버리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의미를 무의미로 바꾸어야하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야 주님만이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주님의 묵시만 의미가 있다는 말이죠.
사도들은, 묵시도 알고 역사도 알고 !!
이것은 성령을 받아야만 이해가 될 내용인데,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도들의 경우에 어떻습니까? 사도들은 자기 인생을 산 것이 아닌데, 사도들의 곁에는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이죠. 즉 묵시가 역사적 존재와 사도들과 함께 있기 때문에, 사도들은 묵시도 알고 역사도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4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 라고 하는데, 이렇게 성경에는 나오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하나가 결코 사도들의 개인적인 견해가 아닌데, 옆에서 주님께서 속삭이고 계신다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함이지, 사도들이 잘났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말이죠.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리고 여기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라고 하는데, 물론 여기서 '나' 라는 것은 사도바울이 되겠지만, 이것을 바꾸어보면, "이 세상에 대해서 예수님은 죽었고" 라고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 사람들은 살았다고 하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죽었다는 겁니다. 즉 역사적 존재는 죄 안에서 이미 죽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죽어있는 것들이 아무리 잘난 척을 해도, 아무리 "아, 나는 편안하다" 라고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겁니다. 동창생을 50년만에 만난 것은 죽음의 사자에 붙잡힌 자와 50년만에 카페에서 만난 것인데, 그래서 그 입에서는 저주를 받을 이야기만 골라서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령을 받은 자는 단번에 그것을 눈치를 채야하는데, '움찔' 하지 말라는 겁니다. 오히려 "나에게 마음대로 퍼부어라. 복음이 헛것이라고 퍼부어야" 라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상대방도 눈치를 채는데, "진짜로 믿는 모양이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그쪽에서 '움찔' 해야 하는데, 이쪽에서 '움찔'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어. 그동안 내가 너무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졌었어" 라고 하면, 마귀는 그만 신이 나서 더 까분다는 겁니다. 그러니 평소에 성경말씀을 보고 설교를 들을 때는 체험적으로 보고 들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을 만날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게 모두 다 필요한 십자가와 관련된 것이기 그렇다는 말이죠.
누가 벌을 주지?
계속해서 해보겠는데, 창세기 4장에서 계속 나가면 노아홍수가 나오는데, 이것은 벌을 받은 것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는데,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누가 있어야 벌을 주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오늘날 과학자들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인간의 문명은 인간이 알아서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도대체 벌을 주기는 누가 주느냐는 겁니다. 왜냐하면 망원경으로 조사를 해보니 하늘나라에 벌을 줄 사람이 없다는 말이죠.
옛날에 두뇌피질이 발달하기 이전까지는 신을 조작하고 만들어서, 하늘에 신이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 우리나라도 옛날에 달에는 누가 있다고 했습니까? 물론 사람은 아니지만 옥토끼가 있다고 했다는 겁니다. 옥토끼가 열심히 방아를 찧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는 어릴 때 그것을 믿었고 말이죠.
그리고 어떤 음모론에 의하면 달의 뒷면에 지금도 옥토끼가 살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산소가 전혀 없는데 도대체 살기는 어디서 사느냐는 말이죠. 무슨 로봇으로 만든 옥토끼도 아니고 말이죠.
그렇게 옛날이나 어릴 때, 즉 두뇌의 회로가 복잡하지 않고 지식이 모자랄 때는, 그 자리를 신화나 동화가 다 매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점차적으로 과학이라는 종교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래서 신도 없고, 물론 예수는 이미 죽어버린 과거의 인물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제 의지할 것은 우리 인간들끼리의 협업이고 단합이고 상호교류라는 겁니다. 그리고 평화, 기본적 양심, 이웃사랑, 윤리와 도덕, 이것 외에는 인류의 미래는 보장되지 못한다고 보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힘으로 해결하자" 라고 하는데, 지금도 이 시간에 학생들은 교실에서 그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을 빠트렸습니까? 창세기 6장 이하에 나오는 노아홍수를 빠트렸고, 그리고 19장에도 보면 벌을 주는 내용이 나오는데, 하늘에서 유황불이 소돔과 고모라에 떨어진다는 겁니다.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는 말이죠. 그것도 묵시적 사건의 개입인데, 그러니 빠트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결국, 논리가 아닌, 믿음에 관한 문제 !!
그러니 결국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 논리의 문제가 아니고 믿음에 관한 문제라는 겁니다. 행함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것도 그냥 믿음이 아니고, 예수님이 가지고 있던 믿음을 성령을 통해서 선물로 받은 믿음인데, 그게 없이는 결코 예수님의 안목으로 이 세상을 볼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믿음을 선물로 받아서, 예수님과 사도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예수님은 이 세상을 악하고 음란한 것으로 보았다는 말이죠. 그렇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계속해서 동질성을 이어가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 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그러니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여, 꺼내주세요. 언제 오십니까?" 라고 하는, 요한계시록 마지막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는데 말이죠. "말도 안 되는 이 세상, 엉터리 같은 이 세상, 악마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믿음을 선물로 받은 것에 대해서 우리 감사합시다. 주님, 어서 오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계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교인들이 모일 때마다 했던 사랑의 인사였는데, 그러니 이것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아무리 "어떻게 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까?" 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말로 답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님이 주신 선물이지, 인간이 주는 선물이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성령께서 바람과 같이 오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은 "싫으면 말고!" 라는 것인데, 즉 "가라지와 알곡은 따로 있다. 믿지 않으려면 자연스럽게 니가 원하는 대로 해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다시 하면 !!
다시 해보겠는데,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흘러가는데, 여기에서 '흘러간다' 라는 것 자체가 인간들만이 있는 세상에서는 이것이 서로 동의가 되고 납득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만 심판을 해버린다는 말이죠.
시간은 흘러가면서 동질성을 유지하는데, 즉 끊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벌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시간이 그만 끊어진다는 말이죠. 오늘 강의가 참으로 어려운데, 하지만 우리가 언젠가는 반드시 알아야 할 문제라는 겁니다.
여기서 출애굽기 12장을 보겠는데, 41절과 42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출 12:41)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출 12:42)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밤의 나라, 이스라엘 !!
여기 42절에 '여호와의 밤'이 나오는데, 이것은 단절되어있다는 말이죠. 그 밤으로 시작해서 이스라엘은 1년이 된다는 겁니다. 모든 국가는 낮으로부터 시작하는데, 그런데 이스라엘은 밤으로 출발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밤은 낮의 절연인데, 즉 '끊어짐' 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어디에서 나왔는지 몰라도, 인간의 문명 가운데, 즉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묵시의 세계가 역사 속에 삽입이 되었다는 겁니다. 오늘의 강의제목은 바로 이 '시간의 삽입' 인데 말이죠.
시간의 삽입 !!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인간들끼리만 있다고 하면 별 문제가 없는데, 그러면 그냥 고요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그만 삽입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계속해서 고요할까요? 아니면 요란할까요?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었다는 겁니다. 애굽에 있는 모든 가정에서 통곡소리가 그치지를 않았다는 말이죠.
맏아들은 다 죽었는데, 그것은 바로 왕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리고 왕궁의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들의 가족들의 집에도 마찬가지인데, 장자라고 하는 장자는 다 죽었다는 말이죠. 심지어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도 다 죽었다는 겁니다. 즉 인간과 관련된 것들은 모두 다 죽었다는 말이죠.
(출 13:14)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어찌 됨이냐 하거든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곧 종이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실새
(출 13:15) 그 때에 바로가 완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모든 것은 사람의 장자로부터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죽이셨으므로 태에서 처음 난 모든 수컷들은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서 내 아들 중에 모든 처음 난 자를 다 대속하리니
이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인간들아, 너희들이 문명이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왜 내 말을 듣지 않고 까불어?" 라고 족치는 겁니다. 그렇게 심판을 행하시는데, 그 심판을 행하는 현장에 불쑥 낯선 나라가 등장하는데, 그 나라는 밤에서 나온 나라라는 겁니다. 낮에서 나온 문명의 나라가 아니라, 밤에 나온 이스라엘이 등장했다는 말이죠.
그런 이스라엘이 등장해서 기존의 문명과 섞였다고 하는 것은, 서로 이질적인 구성요소 두 개가 그만 섞인 것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두 개의 시간이 같이 공존하게 되는데, 그러면 현재 인간들의 시간은 그 마지막이 멸망으로 치닫고 만다는 것이죠.
인류의 역사는, '엔진에 불난 비행기' !!
이것은 마치 비행기의 엔진에 불이 나서 밑으로 꼴아 박는 것과 같은데, 그렇게 마구 꼴아 박는다는 겁니다. 비행기가 엔진에 불이 났다고 해서 바로 폭발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게 엔진이 불이 나서 땅에 꼴아 박는 그 기간, 그게 바로 인류의 역사라는 겁니다. 브레이크가 없는 벤츠라고, 바로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니 꼴아 박는 약간의 시간은 있는데, 그게 인류의 역사라는 겁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떠한고 하니, 잠깐 동안 더러운 세상을 맛만 보다가 묵시의 세계, 영원한 세계로 가는데, 그것을 두고 영생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가는데, 그렇게 먼저 간 사람 중의 하나가 누구인고 하니,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인 나사로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고 먼저 죽은 자들은 지금 거기서 쉬고 있다는 말이죠. 즉 탈출에 먼저 성공했다는 겁니다.
이번에 영국의 서민 아파트에서 불이 나서 난리가 났는데, 거기서 먼저 탈출했다는 말이죠. 하지만 마음은 편치 않는데, 왜냐하면 그 아파트 안에 아직 자기 가족들과 친척들이 있기 때문에 말이죠. 물론 주님의 나라에 먼저 간 사람들은 마음이 편안한데, 왜냐하면 그것조차도 주님의 계획이니 자기들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는 겁니다.
그런데 죽지 않고 이 땅에서 아직 성도로서 같이 살아가는 자들의 심정은 무엇인고 하니, "야, 불났어. 빨리 나와!"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안에서 조카는 뭐라고 합니까? 고스톱을 치면서 "이모야, 지금 한 참 따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돈을 좀 더 벌고 교회에 나가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죠. 지금 불타고 있는 것도 모르고 말이죠.
거지 나사로와 부자 !!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경우에, 거기에서 결정적인 장면이 무엇인고 하니, 나사로는 말을 하지 않는데, 부자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가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렇게 불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좋다고 살고 있는 내 동생들에게 나사로를 보내서, 지금 이렇게 불타고 있음을 알려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뭐라고 합니까? "그것은 나사로가 다시 간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에 의해서 구원을 받을 자만 건진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자기와 관련이 되어있다고 해서 다 건지면, 그것은 자기 의미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눅 16: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눅 16: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눅 16: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
그러니 무의미한 상태에서 주님의 목적에 합당한 사람은 따로 있고, 그렇게 건질 자에 대해서는 주님께서는 전혀 실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런 주님의 실수 없음에 대해서, 그것을 우리는 느긋하게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말이죠.
자기 자식은 구원을 받아야하고, 자기 아내는 구원을 받아야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 의미와 관련을 시키면 결국 주님에게 불평하게 된다는 겁니다. 주님의 일에 간섭하는데, 즉 자기 뜻대로 되게 해달라고 요구하게 된다는 말이죠.
'시간' 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시간' 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게 오늘강의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어려운 대목이니 조금만 더 참으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3장으로 돌아와서, 아까 제가 인간이 있고, 그게 보이지 않는 악마와 관련이 되어있다고 했는데, 거기까지만 했는데 말이죠.
여기서 하나를 더 보태면, 이렇게 인간과 악마가 한 패가 되어있는 것에, 여기에 미지의 '여자의 후손'을 그만 붙여버린다는 겁니다. 그분이 바로 메시야인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게 되면, 메시야를 위한 시간을 위해서, 인간들의 그런 문명적인 시간이 흘러가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처음에 제가 이야기를 할 때는 여자의 후손, 즉 메시야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둘만 있으니까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으로 흘러간다고 했는데,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을 첨가하게 되면 멋도 모르고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반드시 인간은 자기 시간관을 가져야 하고, 자기 세계관을 가져야 하고, 그렇게 자기 의미를 따로 가져야 한다는 말이죠. 자기에게 자기가 행복하기 위해서, 즉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자기가 행복하기 살아가기 위해서 이런 어리석은 짓을 반드시 하게 된다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십자가가 되기 위해서 말이죠.
나는 오늘도 밭에서 마구 놀았습니다 !!
그러면 다시 질문을 하겠는데, "우리는 무의미합니다. 그렇게 무의미하니, 우리는 막 살아야 합니까? 아니면 아무 것도 하지 않아야 합니까?" 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대답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던 간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나는 막 살았습니다" 라고, 혹은 "나는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살았습니다" 라고, 그것을 누가 평가를 내립니까? 그것을 자기가 내리는데, 그러니 그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가 알아서 평가를 내라고 말고 할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대답을 해야하는고 하니, 자기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그것을 두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면 된다는 말이죠. "오늘도 저는 마구 놀았습니다. 밭에서 하루종일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놀았습니다" 라고, 그렇게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도 저는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모릅니다. 낮 12까지 잔다고 등이 다 아픕니다. 심심해서 그렇게 힘든 노동을 했습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언어를 뒤섞어버리라는 겁니다. 묵시와 역사를 섞어서 이야기를 하면 된다는 말이죠. 즉 자기가 내린 평가에 대해서 부정을 해버리면 되는데, 자기가 잘났다고 하는 자기 의미로 나오는 평가를 뒤집어버리자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노는 식으로 열심히 살고, 열심히 사는 식으로 막 살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사실 필요가 없는데, 결국 소급해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묵시, 즉 완료된 상황에서 우리는 지금 이 땅에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성도는, 자기 몸에 '주님의 증상'을 !!
그것을 두고 '주님의 증상' 이라고 하는데, 즉 십자가의 증상이라는 말이죠. 이 '증상' 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감기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데, 그런데 몸에서 열은 난다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보이지 않는 감기라는 실체의 증상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몸이 욱신욱신하다고 하면, 그런데 욱신욱신이라는 병이 있습니까? 그런 병은 없는데, 그것을 두고 담에 걸렸다고 하는데, 즉 담의 증상이 욱신욱신이라는 겁니다. 또한 눈이 감기고 입술이 부풀어오른다고 하면, 그것은 피곤함에 대한 몸의 증상이라는 말이죠.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인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통해서 무슨 증상을 나타내시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즉 "십자가에서 다 용서하셨다" 라고 하는 증상인데,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나타내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죄로,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 너무나 부끄러운 '나' 위주의 '나' 중심의, '나'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로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을 증상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그런데 증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는 사람은 마귀의 자식이라는 말이죠.
그런 사람은 "오늘은 이렇지만 내일은 잘 할거야" 라고 하면서, 그렇게 계속 내일을 외치면서 자기의 동질성에 대한 시나리오나 소설을 쓰는 사람인데, 하지만 성도는 무엇입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것인데, 이미 끝났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라고 하면 언제나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침투할 때, 낯선 시간, 즉 묵시로 침투해서 결국에는 영생으로 이끈다는 사실, 그것이 우리의 몸에서 증상으로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8,24 오후 7시에 마침.
감기도 주님의 증상으로 여기에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