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7. 4. 21) 38-1
마가복음 10장 17-18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질문한 사람의 취지에 맞게 답변하시는 것이 아니고, 꼭 시비를 거는 느낌이 들어요.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라고 했으면, “ ~하면 영생을 얻는다.”라고 하면 좋은데, 호칭문제를 거론해요. 예수님을 향해 “선한 선생이여!”라고 한 것에 대해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했지요.
이 말은, “네가 보기에 내가 선한 이로 보이느냐?”라는 뜻은 아니고, 나에게 선하다고 한 그 말을 평소에 하나님께도 같이 사용했는지 묻는 겁니다. “선한 선생이여” 또는 “선한 하나님이여”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 사용한 선하다는 말과 하나님께 사용한 선하다는 말이 같은 질이 되겠지요.
부자 청년이 그런 식으로 선하다는 말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겁니다. 청년이 예수님께 사용한 선하다는 개념을 평소에 하나님께도 같이 사용했다면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른다는 것이고, 예수님이 누군지 모른다는 말은 곧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도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엉터리라는 점을 기정사실화 시킵니다. 우리가 보기에 ‘선하다, 선하지 않다’는 것이 사소한 문제로 보이지만 예수님은 깊은 문제로 봅니다. 제가 문장을 서술하면 무슨 뜻인지 말해 보세요. “거기 거기가 없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내가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곧 그 순간에 내가 의도한 현실이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기’라고 해 봅시다. 내가 예수님을 만났는데, 만나기 전에 예수님과 내가 만나는 것을 예상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예상하면서 내가 예수님을 어떻게 호칭하면 되지? 하나님이 선하시니 그 선하다는 표현을 예수님께 사용해서 ‘선한 선생이여’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아는 하나님과 내 앞에 계시는 선생님과 같은 편이고 같이 계시는 분입니다. 라고 만들 수 있는 ‘거기’
그런데 예수님은 그 청년의 의도를 아시고 ‘선한’이란 단어의 의미 조정에 나섭니다. 즉 ‘네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선함과 나와 같이 있다고 경솔하게 이야기했다.’고 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하나님께 사용하는 단어(선한)를 선생님께 사용한다면 나의 겸손함을 봐서라도 예수님은 내 질문에 답변해 주실 것’이라고 부자 청년은 생각을 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초를 쳐버렸어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선한’이란 단어를 나에게 붙이느냐고 했어요. 옛날 사극에 보면 상대를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과도한 호칭을 남발하는 경우가 있지요. 인사를 할 때 “안녕하십니까?” 라고 하면 되는데, “존경하는 스승님 안녕하셨습니까?” 이렇게 나오면, 그 사람은 뭔가 속셈이 있다는 것을 알지요. 이런 사람을 만나면 경계를 해야 합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과도한 호칭을 사용하니까 주님이 수정하는 겁니다. ‘너는 하나님을 모른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은 곧 ‘네가 누군지를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자신이 누군지 모르면 ‘거기’가 없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누구를 만나고 어떤 현실을 구축할 때는 그 속에서 본인이 기대한 것을 예상하기 때문에 본인은 다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것을 ‘동질성 유지’라고 하지요.
자기의 동질성을 확장시키려는 의도로 사람을 만나요. ‘오늘 밤에 내가 누구를 만나야 한다.’는 말은, 나의 본질을 알겠다는 것이 아니고 ‘저 사람을 만나면 현재 괜찮은 나의 힘을 더욱 확장시킬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을 다치지 않고 유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초를 쳐서 내가 기대한 현실이 성립되지 않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거기’가 없는 겁니다. 우리의 삶은 늘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하시면 내가 기대한 현실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말은, 내가 생각한 나가 가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가짜의 나를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그 이유가 뭔가? 인간의 진리는 자기의 경험을 융합해서 만들기 때문입니다. 경험이 본문에 나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고 할 때,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전부 경험했다는 겁니다.
사람의 경험은 무엇을 얻기 위해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이란, 이미 어떤 일을 겪어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인가 의도하고 기대해도 실재로 주어지는 결과는 자신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펼쳐질 때가 대부분입니다. 차를 몰고 길을 가면서 ‘혹시 길이 막히면 내가 터널을 뚫어서라도 산을 넘어야지.’이런 생각을 하면서 가지는 않아요. 가다보면 길이 있어요.
차가 통과하기 위해 터널을 뚫어 길을 만들어서 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오늘은 이것을 해야지.’ 이 말은 ‘오늘은 터널을 뚫어 길을 만들어야지.’라는 소리와 같아요. 실재로 차가 길을 달리다보면 터널도 나오고 차는 그 터널을 통과할 뿐입니다.
하루하루 갈 길을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 길을 통과하는 식으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 됩니다. 우리가 통과하는 그 길(현실)을 누가 만들었어요? 이것을 부자 청년은 모르고 있어요. 그러면서 “내가 지켰나이다.”라고 해요.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이 부자청년의 사고방식과 유사하게 살아가요.
우리가 내 갈 길을 만들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만들어진 길로 통과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는 말이 ‘나는 경험했다. 내 인생은 이렇게 살았다.’고 해요. 이것은 제가 아까 ‘거기’라고 했지요.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개조하기 위해서 ‘네가 생각한 거기에 너는 없다.’고 하십니다.
없으면 우리는 주님 앞에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할 말이 없어요. 사람이 말이 많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말들의 알맹이는 반성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반성하는 이성이다.’라고 칸트가 말했지요. 왜 반성합니까? ‘내가 이런 잘못과 이런 오류와 이런 나약함을 보였구나.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이것입니다.
반성은 꼭 못해서만 반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합격에 기쁨도 있지만 ‘7급 시험을 쳤으면 좋았을 것을’ 이런 후회를 합니다. 거기에 ‘거기’는 없어요. 이런 식의 후회를 한다는 것은 7급이라는 새로운 ‘거기’를 자꾸만 상정합니다. 그런데 그 안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본인이지요.
그 본인이 예수님께 “선한 선생이여!”라고 부르면서, ‘내가 이 정도 존칭을 붙여드렸으면 나를 내치지는 않겠지’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기에, 이것도 ‘거기’를 구성하는 요건이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직접 만나게 되면 말을 말아야 돼요.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겠다는 탐욕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선한’이란 단어 하나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이유를 알겠지요? 예수님은 이미 부자 청년을 잘 알고 있어요. 그가 주님의 말씀이 그리워서 온 것이 아니고 자신의 잘남을 자랑하려고 왔음을 아십니다. 부자 청년의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는 제자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제자들은 스스로 예수님께 나왔습니까? 아니죠. 예수님이 찾아가서 불러냈지요. 따라서 제자들은 부자 청년과 같은 경험이 없어요. 따라서 제자들도 자진해서 주님 앞에 나온다면 이 부자 청년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나올 수밖에 없어요. 일단 예수님께 좋은 이야기를 해서 내가 원하는 바를 얻겠다는 마음으로 주님을 대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가는 것이 있어야 오는 것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예수님께 ‘선한 선생이여!’라고 부르면서 마음을 낮추면서 나갔다면, 주님도 거기에 걸맞게 ‘너는 참 겸손하구나.’라는 식의 칭찬이 있어야 형평성에 맞지요. 지난 수요일 설교에서 아비멜렉이 사라와 동침할 뻔했지요. 이것이 문제가 된다면 징벌도 태가 닫히면 안 되고 닫힐 뻔해야 되지요. 이게 형평성에 맞아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거기’ 현실 재구성을 위해서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을 총 동원해서 끌어들이는 겁니다. 그 중 하나가 예수님입니다. 부자 청년은 자신의 괜찮은 현실 구성을 위해 예수님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런데 이런 부자 청년의 생각이나 12제자의 생각이나 같아요.
이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여기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나와 있는 거예요. 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살아 있을 때 교회 와서 주님께 충성했다. 그러면 천국 가서도 주님께서 인정해 주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자 청년의 사고방식입니다. 내가 주님께 충성한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상급이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것을 절대 죄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주님께 충성했는데 이것마저 죄라고 여기는 사람은 성령 받은 자 외에는 없어요. 보통 사람들은 남에게 착한 일을 하듯이 주님께 합니다. 어떻게? “선한 선생이여!” 이렇게 나오지요. 주님을 향한 이런 호칭이 자신은 지금 착한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의 답변은 지적질을 하신 거예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지적질부터 먼저 시작하신 거예요. “너 지금 나에게 뭐라고 했어? 선한 선생이라고. 하나님만 선한 분이야. 네가 나를 제대로 알고 선한 선생이라고 했느냐?” 이렇게 시작하신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정리할 것이 있어요. 주님은 우리를 설득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고 배척하거나 일방적으로 수용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주님의 전도 방식은 접촉을 통해서 수용하거나 배척하지요. 즉 상대의 의견을 일체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면, 내 갈 길은 내가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살 길을 찾는 것이지요.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기 위해 주님을 찾아 왔는데, 이것도 본인의 영생을 위한 거예요.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몰라요. 즉 예수님이 어떤 기능으로 일하시는지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자 청년을 배척함으로 자신의 일하는 방식을 알려주신 거예요. 이처럼 전도란 사람을 데려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시는 작업입니다. 그러니까 전도는 예수님만 하시지 사람이 전도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건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바울은 십자가 진 적이 없어요.
인간은 터널을 통과하듯이 삽니다. 그런데 터널을 통과하면서 남들에게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이 힘들었다.’고 말합니다. 차가 터널을 통과하는데 힘듭니까? 터널을 뚫는다면 힘들어요. 그런데 어느 인간도 터널을 통과했다고 생각지 않고 ‘내 인생은 내가 개척했다.’고 생각해요.
‘개척교회’란 말만 들어도 지긋지긋 할 거예요. 홀에서 언제 벗어납니까? 전세방 신세를 언제 면하는가? 자기 건물 없다고 이단인줄 알고 떠나버린 교인이 한 둘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빚을 내서라도 반듯한 예배당을 짓고 싶어요. 반듯한 건물이 있으면 교인들이 찾아 올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건 식당 찾아가는 것과 똑같아요. 이왕이면 주차장도 있고, 사람 많이 찾는 곳에 가면 안심하고 먹을 수 있잖아요.
이런 식으로 교회를 찾는다면 이것은 스스로 자기 살 길을 찾는 것이고, 예수님을 찾는 것도 스스로 찾아가야 되지요. ‘주님은 사랑이 많은 분이라는데 내가 성의를 표시하면 주님이 날 아껴주실 것이다.’라고 여깁니다. 이것이 바로 부자 청년의 마음이고 오늘날 우리들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지요? 배척받았지요. 배척 받을 때 부자 청년은 굉장히 섭섭했을 거예요. 하지만 주님은 이런 부류의 인간을 배척해야 돼요. 왜냐? 배척해야 주님이 심판주로 제대로 일하시는 것이 되기 때문이지요. 이런 인간은 배척해야 되는데, 여기에서 벗어난 인간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배척받아야 될 자들입니다.
지금 부자 청년의 잘못은 뭐냐? 자진해서 예수님께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교회 다닌 지 얼마 되지 않고, 성경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은 ‘자진해서 교회 오는 것이 무엇이 나쁜가?’라고 할 것입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서 제가 성경 구절을 알려드립니다. 요한복음 6장 65절입니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예수님은 반드시 실천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시는 전도입니다. ‘아버지께서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했지요. 이게 바로 아버지와 아들간의 짜고 치는 고스톱입니다. 12제자에게 화투를 나눠줘도 소용없어요. 화투를 여러 사람이 잡고 있어도 아버지와 아들만 화투를 칩니다.
두 분만 재미있어요. 나머지 사람들은 죽을 지경입니다. 길이 있다고 여겨 길을 가면 막혀 있고, 길을 뚫었다 싶은데 또 바위로 막혀 있고, “나는 길이요”라고 해서 주님이 길 인줄 알고 갔는데, 그 개념 자체가 선악구조와 같은 엉터리 개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기 갈 길을 찾으려는 이유는, 스스로 찾지 않으면 찾을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아니라면 구원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으라고 해서 예수 믿었고, 삼위일체를 믿어야 된다고 해서 그것도 믿고, 전도하고 헌신하라고 해서 그것도 했고, 시킨 대로 다 했는데 이제 뭘 하면 됩니까? 이런 자들을 향해 ‘막 사세요.’라고 하니까 “막 살면 구원 됩니까?”라고 또 물어요.
‘막 살아라.’는 말은, ‘당신은 어떻게 살아도 막 살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말을 들어도 그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아요. 왜냐? ‘내 살 길을 스스로 찾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할 때, 내가 살아야 한다는 근거가 뭐냐 하면, 나는 선하기 때문에 살 자격이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께 “선한 선생이여!”라고 했던 부자 청년은, ‘내가 선에 대해서 좀 압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지요. “선한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이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당황합니다. 하나님만 선한 분이면 예수님은 선한 분이 아닌가? 예수님이 선한 분이 아니라면 악한 분인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뜻은, “네가 아는 하나님과 내가 아는 하나님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하나님을 거론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너무 몰라요.
그런데 이 이야기가 부자 청년에 국한 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지금 이 장면을 예수님 옆에 있는 제자들이 다 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3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제자들이 왜 예수님 말씀에 놀랐지요? 제자들 마음이 부자 청년의 마음과 똑같아요. ‘내가 예수님 말씀에 잘 순종하고, 그분을 성실히 따르는 것 외에는 살 길이 없다.’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가능한 한 주님 말씀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데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하시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좀 심한 말이라고 여긴 거예요.
예수님은 마치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내 말 알아듣지? 너희에게는 해당 되는 말이 아니야. 근심하여 도망친 자에게 해당되는 말이야.’라는 투로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저쪽 뒤를 향해 던진 말이 사실은 이쪽 주님과 같은 편이라고 여긴 제자들의 마음을 졸이게 합니다. ‘더 이상은 못 지킵니다. 이제는 어찌할꼬?’
자기 안전, 자기 몸조심. 이것이 부자 청년을 만나고 난 뒤 제자들이 새롭게 알게 된 자신의 본심입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어떻게 내 것을 끝까지 지킬 수 있는가?’
BC 324년 알렉산더 대왕이 바사를 공격해서 정복합니다. 그리고 인도까지 점령해서 인도 스승 브라만을 만나 질문합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는가?” 질문이 더럽기 짝이 없어요. 이 말은, 나는 인간으로 살기 싫다는 거예요. 즉 인간은 인간으로 만족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인간이니까 인간답게 살자.’ 이것이 아닙니다. 인간 속에 있는 괴물이 인간은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신처럼 되지요.
브라만 스승의 대답을 들어봅시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면 신이 됩니다.”라고 했어요. 이로부터 10년 알렉산더는 자신을 신격화 하는 일에 돌입합니다. 그리고 신전을 건립합니다. 사람이 어려울 때는 욕망이 크지 않습니다. 취직을 하기 위해서는 9급 공무원에 합격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하지만, 합격하면 그것으로 욕망이 끝납니까?
지금부터 2,000년 전 진시 왕 때에 자기 무덤을 만드는데 사람과 똑같은 크기의 병사를 진흙으로 만들어 무덤 속에 같이 묻었지요. 자신을 호위하도록. 인간은 자신이 진흙으로 만들어진 것을 압니까, 모릅니까? 누가 이 사실을 알려줘도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금 내가 뭘 하고 싶은가가 중요합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너는 흙이야!’ 진시 왕의 무덤에 수많은 병사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진흙으로 만든 거예요. 얼른 보면 사람 같지만 사실은 흙덩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 없지요. 그런데 어느 날 그 흙이 ‘나 사람이야!’ 라고 했다면 진짜 놀라겠지요.
주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들 때, 이미 하나님의 요소가 들어가 있어요. 그 요소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들어갈 때 그는 사람이 됩니다. 즉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야 사람이 돼요. 그런데 따먹었어요. 이것을 안다면, 우리가 권총으로 나를 죽어야지요. 죽이면 내가 죽는 것입니까, 진흙덩이가 부서지는 겁니까? 진흙이 부서지지요.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뭐라고 했지요?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이 말은, ‘가룟 유다야, 네가 어떤 계획을 갖던 너는 나를 위해 만들어진 도구야.’ 이런 뜻입니다. 맡은 역할이 악역이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미 만들어진 터널을 통과할 뿐입니다. 만들어진 터널이 뭔가 하면, 인간을 빼고, 법과 예수님입니다. 이것이 터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 하셨지요.
이건 율법입니다. 법은 누구를 위해서 있는 것입니까? 율법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드러내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은 뭐라고 합니까?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했어요. 왜? 스스로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그러면 부자 청년은 현재 자신에 대해서 안다고 우기지만 자신의 근원에 대해서 압니까? 모릅니다.
인간은 자신의 근원에 대해서 몰라요. 아는 방법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가는 길을 보면 돼요. 죄인에게 합당한 것은 저주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가 모르는 우리 자신을 주님의 속성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것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이란 것입니다.
10분 쉽시다.
(2017. 5. 11. 08:40 녹취 마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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