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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강의-보고 믿는 것 17051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5. 21. 10:56
2017-05-21 09:29:59조회 : 3         
가락-요한복음14장8절(보고 믿는 것)170516a-이 근호 목사이름 : 이미아 (IP:122.43.183.206)

가락-요한복음14장8절(보고 믿는 것)170516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4장 8절을 보겠습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질문이 없으면 변화가 없어요. 주님께서는 질문을 하게끔 해서 그 깊이를 더합니다. 질문이 나올 수 없다는 말은 이끌림을 지금 안 받고 있다는 뜻이에요. 끊임없이 질문이 나오는데, 나오도록 주님께서 유도했죠.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예수님이 옛날에 했던 말씀을 자기들은 이해했다고 자꾸 생각하기 마련이에요. 이해를 했다고. 그래야 제자다우니까. “예.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이렇게 그려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이만큼(◯)말씀했으면, 제자들이 이해했다는 말은 그 중의 극히 일부(◔)를 딱 떼어서 이것, 까맣게 색칠한 부분만 떼놓고 전체를 이해했다고 우길 거예요. 우긴다 이 말이죠. 일부만 떼고, “예. 나 이해했습니다. 주님 뜻 잘 알겠습니다.”라는 식으로 간다 이 말이죠.

 

그럼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또 다른 이야기를 해버리면 일부만 알고 있기 때문에, 일부 알고 있는 이것을 밑천으로 삼아, 근거로 삼아 주님의 그 다음 이야기를 전체로 삼아 이해하려고 또 시도하겠죠. 따라서 질문을 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주님과 같은 자리에 함께 있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지금 끌려가고 있는 중이에요.

 

근데 질문을 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가 알고 있는, ‘나는 주님의 무슨 말씀이라도 다 알아들어.’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질문이 나왔다는 말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 말고 더 큰 내용을 주께서 지금 또 쏟아내신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자기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질문하기 마련이죠. “나는 이 정도는 아는데 이 대목은 모르겠습니다. 마저 보태주세요.”라는 식으로 질문할 게 아니냐 이 말이죠.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이 말이죠. “그건 니가 아는 것 맞고, 근데 더 추가된 이건 몰랐지? 그 정보를 더하면 온전하게 된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니고, 니가 전에 아는 가운데서 질문을 했는데 이 답변을 통해서 니가 알았다는 것도 니가 제대로 안 게 아니라는 근원적인 전복, 뒤집는 것, 근원적인 전복을 반복해요. 반복할 수밖에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근원을 몰라요. 그러면 근원을 모른다는 것은 나름대로의 자기 삶의 근원이 있을 거고, 이거는 한 마디로 말해서 “살아보자! 잘 살아보자!”라는 이런 투다 이 말이죠. 근데 제자들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어디로 갑니까? 예수님은 어디로 가요? 죽으러 가시죠.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죽으러 간다고 하니까 제자들이 막 농담을 하잖아요. “우리도 죽으러 가자. 잠자러 간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모양이다.” 뭐 이렇게 이야기하더란 말이죠.

 

예수님이 죽으러 가는 이 노선과 이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근거하고 지금 서로 안 맞습니다. 맞지 않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지금 말씀을 툭툭 던지면서 니들이 가는 곳과 내가 가는 곳이 서로 다르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죠. 베드로가 자기 목숨을 내놓겠다고 하니까 주님께서 니가 목숨을 내놓는다고 할지라고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처소가 없기 때문에 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이거는 지난 시간에 했죠. 이게 뭐냐 하면 그 세계관이 단절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목숨 바쳐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베드로가 생각했던 주님의 세계고 천국이었는데, 누가 그러한 제안을 한다는 것에 베드로는 자기 사고방식이 옳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못 온다고 하니까 베드로는 아까 이야기한 전복, 뒤집기가 그 뿌리부터 전체다가 뒤집혀지는 그러한 결과를 낳게 된 겁니다. 여기에 빌립이라는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했죠. 이 대목을 제가 길게 설명하겠습니다. 이거는 정말 길게 설명이 돼야 돼요.

 

아버지를 보여 달라, 이게 사실은 빌립 개인적인 희망이었겠어요? 아니면 열두 제자 그들의 다 희망이었겠어요? 다들 가만히 있는 것 보니까 누가 대신 자기의 속마음을 용감하게 예수님에게 먼저 이야기해주기를 바랐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로 간다고 하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이미 알고, 보고 있으니까. 자기들이 지금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하니까, 자기들은 모르고 예수님만 아는 그게 있는데, 그게 뭐냐, 예수님은 아버지를 아는데 우리는 아버지를 모르니까.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러면 그들이 예수님과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지 않고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은 벌써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익히 알고 있습니까? 눈에 보이니까 익히 알고 있는 거예요. 눈에 보이니까. 그러니까 이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은 눈에 보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처럼 아버지도 짜짠~하고 나타나게 되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고 있다는 이것이, 이 범위가 확장이 되겠죠.

 

예수님을 알고 있는 이것이 만약에 OK라면, 옳다면, 자기가 아는 방식으로 아버지를 같이 알게 되면 이것도 뭐가 되느냐 OK, 옳은 것이 된다 이 말이죠. 이런 식으로 보여 달라고 한 거예요. 그럼 제가 여기서 길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오늘 한 시간이 될지, 끝날 때까지 할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지금 하는 것은 이들이 눈으로 보면서 세계관을 형성할 때 어떤 식으로 형성했는가를 설명하려고 하는 겁니다.

 

빌립이 이야기했다는 말은 나머지 제자들도 같은 생각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같은 생각이 아니라면 제자들끼리 싸웠을 거예요. 가만히 있는 것 보니까 빌립이 다른 제자들을 대표해서 한 이야기 같아요. 빌립이 대표해서 한 이야기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오늘날 우리들도 이 빌립 같은 사고방식으로 지금 같이 가고 있다고 봐야 해요. 빌립 같은 사고방식으로.

 

이게 뭐냐 하면 눈에 보면 믿고 눈에 안 보이면 믿기는 믿는데 좀 힘들다. 그렇게 되겠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보다 눈에 보고 믿는 것이 굉장히 좀 확실하다. 네. 들어오세요. 늦게 오시면 다시 새로 하는 원칙이 있잖아요. 진도 얼마 안 나갔어요. 요한복음 14장 8절을 하고 있습니다. “보여주면 믿겠습니다.” 그 이야기한 거예요. 8분 동안 한 이야기를 5초 만에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보여주지 않고 믿는 것보다 보여주고 믿는 것이 더 확실합니다. 또 믿기에 더 수월합니다.”

 

“보여 주면”, 원인이죠. 그 다음에 뭐가 나온다? 결과가 나오는데, 그 결과는 “믿겠나이다.” 부사를 붙인다면 “든든하게, 또는 확실하게” “보여주면 더 믿어지겠나이다.” 이거는 나중에 도마한테,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문이 잠겼는데 오시잖아요.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했죠.

 

그러면 보고 믿는 것이 믿음의 최종상태가 아니고 더 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거는 하나의 중간과정이며, 중간과정을 넘어서서 보지 않고 믿는 경지까지 나아가는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이끄시는 거예요. 그러면 보고 믿는 것에서 보지 않고 믿는 것까지 가려면 뭐가 형성돼야 되느냐 하면 요한복음 14장 내용이 우리한테 되풀이 되는 겁니다. 되풀이 된다는 것이 단절이에요. 단절.

 

보고 믿는 이것이 오히려 나로 하여금 못 믿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 보았기 때문에 백퍼센트 이게 믿음이 아니고 가짜일 확률이 크다는 것을 인정해야 돼요. 과거에 내가 기도해서 병 낫고 기도했더니만 응답받았다. 그게 거의 백퍼센트 가짜로 믿을 확률이 굉장히 높은 거예요. 실지로 기도했더니 응답받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방언인데, 방언기도를 예상했는데 방언이 터졌다. 그 방언 터진 것, 진짜 주님한테 얻어터져야 돼요. 백퍼센트 가짜에요. 계속해서 했었다는 것에 집착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돼요? “이건 컵이야. 이건 책이야.”라고 평소에 보고 믿는 것과 그 구원의 세계가 단절이 일어나야 되는데, 단절이라는 경험이 없이 그냥 쭉 미끄러지다가, 참기름 발라놨는지 쭉 미끄러지다보니까 어느새 보이지 않는 곳에 왔다. 이래버리면 중간에 뭐가 빠져요? 끊어짐, 부정, 단절, 요한복음 14장 내용이, 제자들이 겪었던 내용이 하나도 여기에는 섞여 들어가지를 않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이건 줄곧 나는 보이니까 믿는다, 보이니까 믿는다, 보이니까 믿는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뭐 꿈속에 봤다고 이래 나오다가 결국은 워낙 보이는 증거들이 많이 나오고 쌓이다보니까 이제는 그 힘으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믿을 수 있는 능력이 거기서 생산되었다고 우길 수가 있어요.

 

양이 많다고 질이 됩니까? 그건 마르크스의 유물론이에요. 프롤레타리아가 자본주의 계급을 엎어버리면 그게 공산주의 사회가 된다고 했어요. 역사는 뭐냐 양이 쌓이면 이게 질로 달라진다는 거예요. 우리나라 속담에 그런 게 있잖아요.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 이런 것.

 

계속 시도하면 언젠가 뭐가 되겠지. 방언 안 터진다고? 천 번 주기도문 외워봐. 방언 터져. 그런 요령이 있잖아요. 요령이. 습관이 누적되면 새사람이 됩니까? 습관이 누적되면 이게 자동화가 돼요. 사람이 사물이 되고 기계가 돼요. 주기도문 빨리 해보세요. 주께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기도문 기계가 돼요. 랄랄랄~기계 된다니까요.

 

여기서 그럼 이런 질문을 해봅시다. 지금 예수님이 아버지를 안 보여줬잖아요. 근데 보여주면 어때요? 어떻게든 천국을 데려갈 백성 같으면 보여 달라고 하는데 소원대로 보여주고 “봤지?” “예.” “아버지 이제 됐습니다. 볼 일 보세요.”이렇게 해서 건지면 되잖아요. 왜 아버지를 안 보여줘요? 여러분 그 질문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 질문을?

 

그렇게 보여 달라고 하는데, 보여 달라고 하면 보여주고 천국 보내면 되지. 보여 달라고 하는데. 그리고 그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이 나쁜 짓 하려고 보여 달라고 했습니까? 예수님 믿듯이 아버지까지 잘 믿어보려고 하는데, 얼마나 생각하는 것이 가상합니까? 얼마나 착해요? 근데 굳이 왜 아버지를 안 보여줍니까? 아버지를 보여줬으면 예수님 배반도 안 할 텐데. 저는 그런 의문이 드는데 여러분들도 그런 의문이 드는지 모르겠어요.

 

성경을 보실 때 성경해석의 첫걸음이 뭐냐 하면, “나는 주께서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성경해석의 첫걸음이에요. “말씀만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이러면 이건 수상해요. 이거는 백퍼센트 가짜입니다. 아담이 범죄 해서 우리가 범죄 했잖아요. 그러면 성경해석은 범죄한자답게 해석하고 믿어야 돼요. 여자는 튕기는 맛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튕겨야 돼요.

 

“주께서 뭐 처소 있어야 간다고요? 그럼 잘 됐네. 가기 싫었는데.”하고서 한 번 튕겨보시기 바랍니다. “나 안 갈래. 나는 지옥갈래.”이렇게 한 번 튕겨봐야 해요. 튕겨보면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몇 번 튕기다보면 자기 본성에 딱 합당해요. 자기 죄성에 딱 합당해요. 십일조도 늘 하다가 안 하게 되면 찝찝한데 몇 번 안하다보면 굉장히 감사할 일이에요. “아이고, 내가 그동안 십일조라는 마귀 짓에 말려든 것을 생각만 하면 끔찍하다.” 이렇게 굉장히 감사하게 돼요.

 

사람의 모든 본성은 죄를 더욱더 확실하게 하는 쪽으로 이미 거기에 꽉차있어요. 처음에는 어색해서 죄를 억누르는 식으로 행동하지만 자꾸 버릇이 되게 되면 자기 죄 지어놓고 그걸 변명조로 나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에요. “잘 믿겠습니다. 십자가 믿겠습니다.” 하는 것도 사실은 자기의 본성에 어울리지 않는 어떤 위선 또는 가면, 그런 걸로 봐도 무방합니다. 그런 종류에요.

 

뭔가 내가 이렇게 주님 앞에 잘 보이면 앞으로 올 어떤 나쁜 액운을 미리 사전에 때울 수 있는,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어떤 면역체계 비슷하게, 미리 한 방 맞아놓으면 그 다음부터는 진짜 전염병이 와도 안 걸리는 것 있잖아요. 만약에 일주일 후에 안 좋은 일이 있다고 한다면 새벽기도에 가서 꿇어앉아서 하는 거예요. “주님. 저 꿇어앉았습니다. 제 무릎 피 나오려고 합니다. 지금 피나는 것을 받아주시고 일주일 뒤에 피 터지는 일은, 요걸 보시고 그건 안 나오게 하옵소서.”라는 심리 메커니즘이 막 작용하는 거예요.

 

애 고3을 앞두고 갑자기 부모들이 교인이 되어가지고 완전히 교회에 몸 바치는 사람처럼 되죠. 수능이 끝날 때까지만, 점수 나올 때까지만 그래요. 뭐 수능 끝나고 그냥 끊어버리면 또 니가 얍삽하게 그런다고 하니까, 또 수능발표 나면 그때 두고 보자고 이래 나오기 때문에, 수능점수 나올 때까지만, 안심 푹 놓을 때까지만 그렇게 하는 거예요.

 

결국 인간은 “보여 주옵소서”라고 할 때 평소에 인간에게 뭐가 장착이 되어 있느냐 하면, 보면 이해가 되고 그 이해덩어리를 자기는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믿음이라고 그렇게 자기가 간주하고 싶은 거예요. 이게 그냥 자연스러우니까. 자, 그러면 이제 찬찬히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왜 보면 그렇게 믿음이 생길까요? 왜 보면 이해가 생기고, 안 보면 의심과 추측, 이런 것이 왜 난무할까요?

 

지금 질문하는 제가 나쁜 사람입니까? 나한테 돈이 이십 만원이 있다. 이십 만원이 있다고 딱 이야기를 하니까, 내 통장에 이십 만원이 있으니까 십 만원 빌려달라고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통장 한 번 보자고 이러죠. 왜 말을 안 믿어줘요? 왜 보는 것이 안 보는 것보다 확실한 이유가 뭡니까? 이게 왜 확실한데요? 예수님이 하나님을 안 보여줬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너희 인간들아! 너희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적이 있느냐?” 이걸 말씀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아버지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아버지가 안 보이죠. 똑같은 아담의 육신, 마리아의 육신을 입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력이 얼마에요? 한 5.0이 됩니까? 어디 어벤져스, 영웅이에요? 뭐 좋아봐야 2.0이고, 한쪽은 1.5고, 마리아가 시력이 안 좋으면 유전적으로 0,5가 나올 수가 있고.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을 지녔기 때문에요. 연약한 육신의 몸을 지녔기 때문에. 뭐 예수님이 남보다 멀리보고 하는 그런 것은 없어요. 똑같아요.

 

그러면 이 제자들이 믿으려면 자기들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이 아버지를 믿는 방식으로 교체가 되어야 돼요. 지금 어디고 간다? 아버지에게로 간다. 그런데 거기에는 너희를 위한 처소가 없다. 지금 예수님은 아버지하고 예수님 사이에서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에게로 가는 겁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의 그 코스 말고 다른 코스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다른 코스가 없어요.

 

그걸 가지고 지난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way,길이요. 너희들이 길이 아니고 바로 내가 길이다. 어디로 갑니까? 아버지에게로 간다고 하니까 빌립이 하는 말이 그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이래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 빌립은 뭐냐 하면 아버지가 있으면 자기가 보고 가겠다는 거예요. 근데 그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럼 그 자체가 어떻게 문제가 있는지 그 문제를 제가 언급을 했어요.

 

왜 보면 확실하고 안 보면 확실하지 않느냐? 그걸 여러분들이 한 번 생각해 본적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그걸 왜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되는데, 이걸 왜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 이걸 생각 안 하게 되면 우리가 건성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셈이 되어버려요. 철저하게 해석을 못하고 건성으로 해석하는 것이 됩니다. 건성으로 해석하기 전에 성경을 한 번 보시고 평소에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을 했는가를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시편 104편 30절,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28절도 비슷한 이야기고요. 29절도 보면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이걸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사람에게만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앞에 보면 모든 자연 전체에 주의 영이 함께 있다고 하시는 거예요.

 

B,C.3세기경, 서기로 한다면 290-208년경에, B,C.기원전이니까 그리스도가 오기 전이에요. 예수님 오시기 전에 스토아철학이 있어요. 스토아철학이 그 시대에 있는데, 스토아 이전 사람이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고, 그 전 사람이 플라톤인 거예요. 그 전에는 소크라테스고. 이 스토아철학은 사도행전에 나오죠. 에피쿠로스가 라이벌로 되어 있어요.

 

이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어떤 생각을 했느냐 하면 신이 전 세계를 다 만들었다는 겁니다. 신이. 자, 이제부터 스토아학파의 철학을 이야기할 테니까 여기에 대해서 반박을 해보세요. 이 우주는 신이 만들었어요. 신이 만들었기 때문에 반드시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신이 만들어낸 흔적이 있다는 겁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의 그 논리가 당연한지, 문제가 있는지를 여러분들이 한 번 따져 보라는 겁니다.

 

천지를 만드신 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 만들어진 모든 물건 속에 자기가 만든 흔적과 증거를 거기다가 집어넣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둘로 나누었어요. 스토아학파가 능동 원인과 수동 원인으로 분류시켰어요. 이거 능동 원인은 작용하는 것. 이거 수동 원인은 작용 받는 것. 이렇게 본 겁니다. 작용하는 것은 신이고 작용 받는 것은 세계 모든 피조물이에요. 이렇게 분류를 했습니다. 능동, 수동으로.

 

그리고 능동, 수동할 때 작용하는 것에 모두 집어넣은 것을 가지고 퓨뉴마라고 했어요. 퓨뉴마는 헬라어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영’입니다.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영’이라고 하는 것이 이 퓨뉴마에요. 그리고 창세기 2장에서 흙으로 만드시고 호흡을 집어넣은 그 호흡이 퓨뉴마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신이 만들었고 신이 그들에게 신의 형상을 집어넣는데, 그 활동을 누가 한다고요? 하나님의 영, 또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신. 하나님의 영이 이걸 이렇게 작용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신을 찾는 방법은 이제 됐어요. 뭐냐 하면 이것들의 공통점을 끄집어내버리면 신이 이 세상을 만든 법칙이 마련된다는 거예요. 그 법칙이 뭐냐 하면, 법칙이 여러 가지가 되죠. 뜨거운 것이 위로 올라가고 차가운 것은 아래로 내려오고. 뜨거운 것은 올라가고 차가운 것은 내려오는 것을 누가 했다? 퓨뉴마가 한 거예요. 퓨뉴마(영).

 

아까 여러분들이 시편 104편 30절 봤죠. 거기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신이, 영이 모든 창조물을 만들어놓고 호흡을 거기다가 집어넣고 다 움직이도록 했죠. 아까 시간관계상 다 보지는 못했지만 앞에 보면 악어가 나오고 있어요. 26절, “선척이 거기 다니며 주의 지으신 악어가 그 속에서 노나이다.” 27절,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그들이 죽고, 살고, 자라나고, 하는 그 모든 것은 누가 하신다? 신의 영이 그들에게 호흡도 주고, 호흡도 빼앗고, 자라게 하시고, 뭐 식물, 동물 가릴 것이 없이 다 그렇게 한다 이 말이죠. 능동 원인, 수동 원인이라고 했는데, 근원이라고도 봐요. 능동 근원, 수동 근원.

 

그래서 스토아학파 이 사람들은 신을 믿자. 신을 믿되 자연 속에서 움직이는, 모든 부딪히는 모든 자연물 속에 뭐가 들어있다고 했어요? 신의 영이 들어있으니까, 우리는 거기에 맞추어서 절제하면서, 욕심내지 말고, 너무 과도하게 살지 말고, 자연스럽게 신이 이끄는 대로 인도 하에 살자. 이게 스토아학파의 세계관이에요.

 

제가 아까 먼저 질문을 드렸죠. 이들의 논리에 문제점을 발견하라고요. 이거 칼빈주의의 주권사상이 아니에요? 칼빈의 주권사상?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걸 모르니까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면 스토아학파 이 사람들은 이단이고 죽일 사람들로 알고 있는 거예요. 이들의 사고방식이 오늘날 교회의 사고방식과 차이점이 뭐가 있어요?

 

자, 질문을 했습니다. 이들의 문제점이 뭔지를 제가 분명히 질문을 했습니다. 이들의 논리 자체적으로 문제점이 뭐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아까 이야기를 했는데. 제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지금 이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는 자연만물이 그들의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보이죠. 이게 문제라 이 말입니다. 이게 문제거든요.

 

그럼 이 사람들이 사도바울과 복음으로 이야기할 때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바울서신에도 나오고. 스토아철학이 나와요. “모든 것, 우리가 기동하는 것, 움직이는 것은 신의 입김으로 신의 힘으로 움직인다고 너희들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잖아.” 하고 사도바울이 그들의 사상에 대해 운을 떼면서 공격해버려요.

 

오늘 본문에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했죠. 그 말은 뭐냐,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지금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 안 믿고 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잘 믿고 있는 거예요. 그럼 인간이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이거는 제자들뿐만 아니고 이미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한계가 눈에 보이는 것은 믿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거론할 가치도 없는 거예요.

 

왜? 눈에 보이는 것은 신이 만들었으니까. 그러면 신을 섬길 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제키고, 그냥 멍청하게 쳐다보는 것, 진짜 이것은 멍청한 짓이라고 스토아학파는 이야기하는 거예요. 스토아학파는 다른 것 다 버리고 산에 와서 기도하자고 하는 이런 것이 아니에요.

 

모든 자연물 하나하나가 하나님이 주신 성찬, 만찬 상인데 그걸 통해서 뭘 뽑아내면 돼요? 하나님께서 저 벌들은 어떻게 능동적으로 앵~하고 움직이게 했는가? 저 들소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서 풀을 먹게 하셨는가? 그걸 알면 알수록 그들은 신에 대한 충성도가 점점 더 높아가는 거예요.

 

왜? 많이 아니까. 뭘 많이 아니까? 하나님이 하신 그 작업과 그 내막에 대해서, 더, 더 자기 안에서 누적이 되니까, 그냥 하나님 안에 푹 파묻혀 산다. 이래 보시면 돼요. 푹 파묻혀 산다. 길에 지나가다가 돌멩이 찼어도, “주님이 주신 돌멩이를 내가 찼구나. 가슴 아팠어요.” 이런 식으로. 이 정도에 대한 믿음. 이거는 누구나 모든 인간에게 이미 본성적으로 장착되어 있는 거예요. 이 스토아학파 이런 주장이 그 시대뿐만 아니고 모든 시대에도 이게 거부감이 없어요.

 

이게 뭘 닮았느냐, 불교에요. 불교 중에서도 화엄경이에요. 화엄경. 화엄경 또는 법화경이에요. 특히 화엄경 같은 경우에 뭐냐 하면 이런 겁니다. 달이 떴는데 거울을 탁 깼다. 거울의 파편 조각조각마다 달이 들어 있어 달을 비춘다. 이 세상에 많은 강이 있지만 어떤 강도 전부 다 달을 비춘다. 이 말은 모든 세상만사에는 부처의 마음이 전부 다 담겨있다.

 

스토아학파는 뭡니까? 모든 세상 만물에 신의 마음이 다 들어있다. 그 신의 마음은 노는 마음이 아니고, 우리보고 찾아오라는 마음이 아니고,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신이 노는 것이 아니고 퓨뉴마, 퓨뉴마의 뜻이 뭐라고 했습니까? 영. 시편 104편을 봤죠. 그 영이 친히 지금도 이들을 호흡도 취하고 자라게 하는 그러한 작업을 하고 있다. 완벽에 완벽을 기하는 세계관입니다. 종교관이기도 하고. 하나의 인생관이기도 하고.

 

자, 이들의 문제점이 뭐라고 했습니까? 다 눈에 보이는 것부터 스타트, 출발을 하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것부터. 눈에 보이는 것부터 출발이 되니까, 이러한 주장은 당시에 예수님 제자들의 주장이나, 오직 성전이 있으니까 우리는 택한 백성이라고, 성전이 눈앞에 보이고 거기서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리니까 누가 뭐래도 우리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고 메시아가 감람산에 설 것이라고, 누가 뭐래도 감람산에 서 있잖아요. 감람마운틴이 있잖아요. 감람마운틴.

 

그 감람마운틴에 두 다리 턱 걸치고 스가랴의 예언대로 오실 거니까. 그때 올 때 뭐로 본다? 두 시선으로. 눈 나쁜 사람은 안경 쓰면 되고, 눈이 약간 부시면 선글라스 쓰면 되고. 봐가지고 “어! 메시아 왔네!” 메시아 온 것을 보고 믿으면 어디에 간다? 구원받고. 또 더 괜찮은 볼거리는 뭐냐 하면 주께서 휴거하러 오실 때, 몸을 삐쭉하게 해서, 이걸 제가 치킨 런Chicken Run이라고 했는데, 닭이 럭비공처럼 되는 것이 있잖아요. 그처럼 삐쭉하게 해가지고 휴거 책에 보면 나오잖아요. 사람들을 막 잡아 땡겨서 끌려올라가잖아요. 그걸 눈으로 목격해서 진짜 성경말씀 요한계시록 그대로네! 라고 믿게 되면 그거 좋은 믿음이에요? 나쁜 믿음이에요?

 

글쎄, 그 믿음이 사단 났다니까요. 그 믿음이 바로 진짜 믿음을 가로막는 마귀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 믿음이. 눈으로 보고 믿는 믿음이. 아까 이야기를 다시 해볼까요? 그들이 그렇게 잘 믿는데, 예수님한테 아버지를 잠깐만 보여 달라고 하면 “자, 봤지? 아버지 이제 볼 일 보러 들어가세요.” 왜 이렇게 못 해주냐 말입니다.

 

보고 믿는 것이 그들의 한계인데. 적어도 그 한계를,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한다면 그 한계를 하나님 쪽에서 해결해줘야 그게 사랑의 하나님이 아닙니까? 우리보고 없는 믿음 내놓으라고 하지 말고. 똑바로 하라고 닦달내지 마시고. 친절에 친절을 더하시면 되잖아요. 친절한 금자씨는 아니지만 하여튼.

 

정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오늘 밤에 잠잘 때 예수님이 나타나시든지. “춘자야!” 뒤에 바이브레이션을 막 넣어가지고 “춘자야~~~니가 고생이 많구나. 나 때문에. 조금만 견디면 내가 언제 몇 월 몇 시에 감람산에 두발 딛고 올게.” 이렇게 계시를 주게 되면 얼마나 좋아요. 그것만 떴다 하면 유튜브에 계시 받은 어린애. 일곱 살 어린애가 계시 받았다. 오십 넘은 아저씨가 계시 받았다. 뭐 유튜브에 그런 것이 쫙 깔려있습니다. 그런 것이. 코카콜라 목사부터 해서 펩시콜라 목사까지 전부 다. 거기에 천국 갈 사람이 많잖아요.

 

그런 식의 믿음은 왜 주께서 거부하는 이유가 뭐냐 이 말이죠. 뭘 누락시켰기에 그런 겁니까? 보고 있기에, 주께서 죽었기 때문에 그래요. 보고 있기에. 보기 때문에 죽으신 거예요. 보는 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보기 때문에. 이제 차분하게 한 번 해볼게요. 아까 스토아학파에서 보는 것부터 출발했죠. 보는 것부터 출발하면, 이제부터는 어렵습니다. 지금까지는 진짜 쉬웠어요.

 

보는 것부터 출발하게 되면 인간은 남을 보기 전에 누굴 먼저 첫째로 봅니까? 거울을 통해서 누굴 먼저 봐요? 나를 먼저 보죠. 그러면 거울 앞에 보이는 나는 믿을만해요? 안 믿을만해요? 믿을만하죠. 나의 존재성은 내가 눈에 보이고 만져지니까 내가 여기 존재하잖아요. 그러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안다는 이것이 나는 없어져도 무방하다는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안 나오고, 있음 자체를 죽어서도 어떻게 천국까지 집어넣을까 하는 의지가 더 강렬하게 있겠죠.

 

어렵다고 분명히 했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에 있습니다. 빌립이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했어요. 믿는다고 할 때에 빌립이 예수님을 사랑해서 믿는다고 했을까요? 빌립이 평소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끼고 자기 자신을 포기 안 하는 자기 사랑에 의해서 믿는 겁니까? 빌립이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같이 뛰어들지 않았죠? 피했잖아요. 피한다는 뜻은 무슨 뜻입니까? 죽는 예수님보다 뭐가 더 귀하다? 내가 더 귀한 거예요.

 

그럼 평소에 내가 나를 바라볼 때 그냥 맨숭하게 바라본 것이 아니고, ‘이 귀한 것, 이 사랑스러운 것, 내가 니 지켜줄게.’라는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온 거예요. 거기서 뭐가 나왔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하는 그 믿음이, 예수님이 요구한 믿음이 아니고 예수님을 이용해서 평소에 나를 지키겠다는 그 신념의 표상이에요. 신념의 연장선이라니까요. ‘믿어서라도 나는 나를 지켜 줄게.’라는 거예요.

 

근데 여기서 아주 최고 어려운 것이 나와요. 내가 나를 지키겠다고 할 때, 나를 지키겠다는 나는 누구고, 지켜주겠다는 나는 누굽니까?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점선으로 보이지 않는 내가 따로 있어야 돼요. 따로 있어서, 그 나를 여기 신체로 있는 나하고 일치를 시켜줘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 점선으로 있는 나는 희망을 갖고 소망을 가져요.

 

지금의 이 꼬라지 보다 더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그런 나를 내가 그것을 시도하겠다는 거예요. 시도하겠다는 것은 이 숨어있는 내가 그만큼 기대를 하는 거예요. 기대를. 소망하는 거예요. 그럼 나는 이미 그렇게 되어진 내가 소망한 것이 아니고, 나보다 더 근원적인 어떤 내가, 소망한 대로 내가 나를 다루고 있는 셈이 된다 이 말이죠.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냥 알아들으세요.

 

내가 나한테 기대를 건다는 말은 이미 내가 어느 정도 되고, 한 달에 수입이 칠백 만원 정도 되고, 칠백 만원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 내가 있을 것 아니냐는 말이죠. 근데 그 나는 누가 만들었냐는 말이죠. 지금 칠십 만원 받는데 칠백 만원 받았으면 좋겠다고 할 때, 육백 삼십 만원은 결함이 되죠.

 

결함이 되면, “육백 삼십 만원 벌기 위해서 더 노력을 해야 돼.”라고 누가 누구한테 지적을 합니까? 보이지 않는 내가 지금 거울 앞에 서 있는 나에게 계속 지금 충동질하는 거예요. “바보야! 뭐 하고 있어? 맨날 집에서 잠이나 자지만 말고 더 일해서 돈 더 벌어야지.” 내가 자꾸 나보고 충동질을 하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일 것 같으면요, 그런 생각이 안 들죠.

 

그걸 자의식이 없다고 하는 거예요. 자의식은 정박아, 이 사람들은 자의식이 없어요. 어린애라든지, 아이큐가 30이면 자의식이 없어요. 이걸 내가 해야 하는 행동인지, 아닌지 그런 것도 없어요. 허허허 그냥 웃고 돌아다니는, 그걸 사자성어로 동네바보 아닙니까? 여자 같으면 꽃 꽂고 “나무에 눈이 와요?” 누가 욕하는지도 모르고 있어요. 유진박 같은 사람들. 바이올린은 잘 켜는데 바보 같아요. 또 우리나라에 유명한 피아니스트. 세계대회에서 2등까지 한 사람 임동혁. 임동민, 이 사람은 계대 교수까지 했는데, 피아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부모가 그렇게 만들어놨어요. 부모가. 천재가 돼야 한다는 이게 막 밀려와가지고.

 

여러분은 천만다행입니다. 잘하는 게 없어서 천만다행이에요. 바보가 되면 희망도 없어요. 근데 희망들을 가진다는 말은 현대인들은 내 맘대로 안 된다는 겁니다. 내 마음에 안 든다는 니 나와! 숨어 있지 말고 정체를 밝혀! 내 뒤에 숨어 있지 말고 니 나와 봐! 니 도대체 어느 별에서 왔니? 도대체 니를 누가 만들었어? 바로 그걸 모르는 거예요. 인간은 그걸 몰라요. 진짜 나는 내 뒤에 항상 숨어 있어요.

 

사사기 속의 그리스도 책에 나오는데, 학교에서 선생님이 “여러분 마음속에 암소가 들어오죠?”라고 이야기하니까 어떤 아이가 손들고 하는 말이 “큰 암소가 어떻게 내 작은 마음에 들어와요?”라고 질문했단 말이죠. 그거 일리가 있는 질문이죠. 암소는 크고 나는 작은데 어떻게 암소가 내 마음에 들어옵니까? 참 그거 설명한다고 선생님이 애 먹었을 거예요. 뭐 이미지라고 해도 이미지가 무슨 말인지 모르니까.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돼요? 그런데 마가복음 5장 8절에서 9절에 보면 거기에 귀신 들린 청년이 나와요. 귀신 이천이 돼지 한 마리당 하나씩 들어갔다고 치면, 이천의 귀신이 한 청년 안에 다 들어있었어요. 그 청년 안에. 그런데 그 청년이 “나는 귀신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을까요? 그냥 보통 평범한 사람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내용은 이상하지만. “예수여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라고 말하는 게 이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청년이 뭐 행동은 이상하지만 진짜 외국인처럼 이런 게 아니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그 청년을 봤을 때, 그 청년을 어떻게 봅니까? 이게 어려운데, 우리가 남을 볼 때에, 평소에 내가 나를 다루었던 그 방식으로 남한테도 그대로 같은 적용을 해버려요. 그 애도 나처럼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짐작하고 같이 이야기를 해버린다 이 말이죠. 그렇게 돼버리면 귀신 이천 마리 들어있는 청년을 우리가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결국 인간은 보고 믿겠다는 이것이, 보는 것은 다 이해되고, 보는 것만 믿을 수밖에 없다는 이 지시를, 뭔가 수상한 귀신같은 존재가 들어앉아가지고 인간에게 자꾸 그걸 시키는 거예요. 니가 안 보이거든 믿지 말고 보이거든 믿고, 관념으로 믿었거든 나중에 눈으로 확인할 그때까지 믿음을 보류해놨다가, 관념으로 했고 추상으로 했던 것이 실제로 딱 보이거든 그때 ‘아하! 믿는 것이 맞구나.’ 이렇게 확정하라고 자꾸 누가 시키는 거예요. 누가 시키겠어요? 마귀가 시키는 거예요.

 

빌립은 자기 안에 마귀가 들어있는 것을 몰라요. 예수님을 보고 믿는 것을 예수 믿는 것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뭐라고 합니까? 니가 목숨을 바친다고 할지라도 너는 내가 가는 곳에 갈 수 있다? 없다? 갈 수 없죠. 못 가면 믿음이 아니에요. 그냥 못 가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못 가는 이상 그의 믿음, 소망, 사랑이 전부 다 소용이 없는 거예요. 아니, 천국도 못 갈 믿음, 소망, 사랑을 어디에 써먹으려고 지 자랑합니까?

 

베드로가 그 말을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럼 그 베드로가 그 말을 알아들으려면 누가 와야 돼요? 성령이 와야 되죠. 자, 그렇다면 한 번 봅시다. 아까 그 스토아학파에서의영은 출발점이 어디라고 했습니까? 모든 눈에 보이는 만상 속에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신께서 그렇게 움직인다고 했죠.

 

그러나 베드로에게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성령이 어디서 왔습니까? 모든 만물과 구별되는 특수한 한 분, 누굽니까? 오직 아버지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베드로에게 오순절 날 성령이 오잖아요.

 

그래서 성령 받은 베드로가 무슨 중심으로 설교를 해요? 누구 중심으로? 예수님 중심으로 설교를 하는 겁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님 중심으로 설교하면서 모든 인간에게 귀신들렸다고 분명히 이야기를 해요. 너희들이 보는 거나 안 보는 거나, 인간들이 안 보이는 것도 사실은 보는 것을 재료로 해서 이걸 추상적으로 약간 연장을 한 것뿐이에요.

 

그걸 외삽이라고 하는데, 외삽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대구강의 때 했거든요. A에서 B로 통하는 이 논리를 연장시켜서 C까지 동일한 논리로 통한다는 것을 가지고, 이렇게 범위를 외부 쪽으로 넓힌다고 해서 외삽이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은 지가 보는 것을 기반으로 해서 이거 보니까 보이지 않는 것도 같은 믿음으로 통하겠지, 라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이 외삽이에요.

 

이게 뭐냐, 이걸 가지고 두자로 과학이라고 하는 겁니다. 과학. 지금 이 시대에서 방사성동위원소를 할 때 500년의 측정이 잘 되니까 이걸 지구 초창기에도 방사성동위원소가지고 연대 측정하면 동일하게 되겠지. 이걸 외삽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구나이는 45억년. 우주나이는 137억년. 얼마 전에 또 바뀌었어요. 137억년에서 109억년으로. 들쑥날쑥 지 맘대로에요.

 

빅뱅이 있다고요? 빅뱅을 안 믿는 과학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우주가 빅뱅한다. 전부 다 외삽이에요. 전부 다 종교교리에요. 종교교리. 아무 증거 없습니다. 블랙홀이 있다고요? 블랙홀을 본 사람이 없고 사진 찍은 사람이 없습니다. 블랙홀은 사진으로 찍히지 않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과학은 현미경으로 보고, 실험실습으로 보고, 모든 게 보고부터 시작해서 보고, 보고, 보고....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은 스토아학파의 제자들이에요. 이 세상의 모든 과학자들은. 그 과학에 근거해서 경영학, 인문학, 사회과학, 법학, 전부 다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따져서 그런 식으로 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쭉 나오는 겁니다.

 

전부 다 빌립의 제자들이죠. “보면 믿겠습니다. 우리에게 보여주면 믿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속으로 ‘기다려라. 니가 보고 믿는 것이 얼마나 니 믿음이 아닌 것을 성령이 오게 되면 알게 될 것이다.’ 보고 믿는다고 했기 때문에 누가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죽은 거예요.

 

그 죽음을 내용으로 해서 찾아오신 영이 뭐냐 하면 성령입니다. 그걸 고린도전서 2장에서 십자가 영이라고 하거든요. 십자가 영으로 오십니다. 십자가 영으로 오게 되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는 살아있는 죽은 사람이 되죠. 그럼 우리가 죽었다는 말은 뭐가 죽었다는 말입니까? 내가 여기에 있는데 그 전에 누가 살았어요? 귀신이 살아가지고 나한테 지시하죠. “그 정도 믿음 가지고는 안 돼. 기도 더 해야 돼.”라고 시키는 거예요.

 

십자가 성령이 오게 되면 이걸 죽여 버리는 겁니다. 이걸 죽여 버리면 우리의 몸은 누구의 것이 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돼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사람이 돼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첫째 시간의 결론이 뭐냐, 이 자연만물은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존재한다가 아니라, 이렇게 꽃이 있고 존재한다가 아니라, 모든 세상만물은 지옥이 무엇이며, 천국이 무엇인가와 연계되어 있는 겁니다.

 

꽃은 핀다가 아니라 저 꽃이 피는 것과 천국과 지옥은 어떤 관계가 있느냐? 개구리가 운다, 개구리가 우는 것하고 천국과 지옥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전부 다 새로운 배치, 새로운 관계망이 형성되는 것. 그건 성령께서 주시는 겁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 뒤에 이야기는 10분 쉬고 합시다.

 가락-요한복음14장8절(보고 믿는 것)170516b-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합시다. 눈에 보이는 그것을 믿게 되면, 그 결과가 눈에 보이는 결과로 들어오지 아니하면, 아예 처음부터 믿음이 아닌 것으로 그렇게 오해를 하는 겁니다. 눈에 보인다는 것이 이러한 큰 문제점이 있어요. 중보기도 했는데 애가 더 비뚤어지게 나간다, “중보기도 소용없잖아.” 이 말은 뭐냐 하면 벌써 예상하는 거예요.

 

내가 나에 대해서 지금 괜찮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그것에 대한 합당한 결과가 반드시 눈에 보이는 어떤 실적 같은 것으로 나와야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으로 지금 열두 제자는 착실하게 3년 동안 같이 붙어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 붙어있는 것을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붙어있는 것을, 목자를 치니 양들이 어떻게 돼요? 흩어진다는 구약성경 말씀이 그들은 자기한테 해당된다고 상상도 못한 거예요.

 

양들은 다 각기 제 갈 길로 갔거늘 우리 무리의 죄를 주님한테 씌운다는 그 원리원칙에 의해서 남의 이야기라고 여기는 거예요. 자기한테 하는 이야기라고 받아들이지 않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인간의 보고 믿는 그 속성을 고치는 것이 아니고 그걸 활용하시는 거죠. 활용하시는 겁니다.

 

“실컷 안 믿어도 돼. 왜? 내가 구원시킬 것이니까. 니가 알아서 믿음 없음을 믿음 있음으로 바꾸지만 그거는 니가 평소에 니가 하던 대로 니 인생에 개입한 거니까.” 그렇게 돼버리면 그 처소가 없다는 말이 우습게 돼버려요. 그게 의미가 없어요. 베드로가 얼마나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까? 그런데 처소가 없다는 말은, 니 자리가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니가 하는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럼 그 통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면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눈으로 보고 믿는 믿음은 이 사이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아버지가 눈에 안 보여요.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있습니다. 이 방식이 그대로 적용돼야 이들이 구원받아요. 함께 있는데 눈에 안 보여요.

 

그게 아까 이야기한 요한복음 20장 29절,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는 것을 자꾸 예수님은 고집하시는 겁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다. 그러나 인간은 눈이 있으니까 우선 보이는 것부터 믿기 시작하는 거예요. 보이는 것부터. 보이는 것부터 믿기 시작하니까 주님께서 어떻게 해요?

 

보이는 것부터 믿기 시작하는 이것을 보지 않고 믿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여기에 방법은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아버지와 사귀었던 그 모든 관계를 이 제자들 속에 집어넣는 방법밖에 없어요. 이것이 바로 아까 이야기한 성령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그 관계로 인하여 나온, 이 본문 당시의 결론은 뭐냐 하면 ‘처소 없음’입니다. 그럼 처소 없음의 반대말은 뭐죠? ‘처소 있음’이죠. 처소 있음은 이게 천국이 되는 겁니다. 처소 없음은 이게 지옥이 되는 거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셨다는 말은 첫째 시간 끝에 뭐와 관련되어 있다고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뭐와 관련되어 있다? 천국과 지옥과 관련성을 지닌다고 했죠.

 

스토아학파 다시 해봅시다. 스토아학파에 있어서 그들은 하나님을 어디서 찾았습니까? 그저 따뜻한 것은 위로 올라가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구나! 낙엽은 떨어지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구나! 장미는 아름답고, 세상에!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하셨구나! 전부 다 눈에 보이는 것에, 여러 가지 것들이 있잖아요. 그것을 스토아학파는 진선미眞善美라고 하는 겁니다. 많이 들어보지 않았어요? 대구에 가면 경북여고 교훈이 진선미에요.

 

이 진선미가 오늘날 현대 물리학에서는 뭐로 바뀌었느냐 하면 바로 에너지로 바뀌었어요. 에너지. 모든 현대 과학은 에너지입니다. 과학이 에너지에요. 하루 성인이 섭취할 열량이 2800kcal에요. 2800kcal라는 말은 뭐냐, 이 에너지 열량이 있어줘야 우리의 간, 신장, 머리카락, 발...다 움직인다는 거예요. 결국 이 사고방식은 뭐냐, 우리는 뭐다? 기계에요. 기계고 열량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이걸 에너지라고 해요. 에너지는 오늘날 하나님의 퓨뉴마, 영이 되고, 신이 되는 거예요.

 

TV틀어보면 전부 다 나오는 것이 뭡니까? 다이어트하고 음식이야기 많이 나오잖아요. 그럴 때 내가 대처를 잘했느냐 못했느냐는 뭐로 판정 나요? 열량을 얼마나 줄였느냐, 열량을 얼마나 효율화 시켰느냐, 그걸 보는 거예요. 전기에너지, 전기자동차, 모든 4차 산업의 이야기는 결국 에너지를 얼마나 절약하느냐, 활용하느냐 그 문제잖아요.

 

북한이 저렇게 핵폭탄해도 중국에서 석유 안 주면, 요새 전기도 안 들어온다고 해요. 세계는 무역 전쟁이라고 하는데 따져보면 에너지 전쟁입니다. 에너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어요. 북한에 공장이 있어요. 공장 가동 못합니다. 뭐가 없기 때문에? 전기가 없기 때문에. 에너지 문제거든요.

 

근데 전기가 없어서 공장이 가동이 안 된다, 라는 식으로 이 세상을 설치한 자들이 누굽니까? 그렇게 세상이 굴러가도록 만든 자들이 누구에요? 바로 스토아학파 후손들이 아닙니까? 눈에 보이는 대로 믿는 것. 눈에 보이는 대로 믿는데, 근데 눈에 보이는 것이 믿을만하다는 것이 처음에 어디서 나왔어요? 내가 나를 눈으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여기 있음. 내가 여기 눈에 보임. 따라서 이 자체로 어떤 하자가 없고 무조건 나를 살려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처소 없는,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누가 이야기해줘야 알 수 있는 겁니까? 오늘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이 이야기해줘야 해요. 예수님이 뭘 근거로 해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나는 아버지로 가는데 베드로야 너는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느니라. 뭘 분리시켜요? 예수님과 그 외의 모든 자.

 

제가 강의할 때 몇 번 그런 이야기를 했죠. 안양강의에서도 했는데.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이름을 지을 때 실체가 있고 그 다음에 이름을 지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유일하게 단 하나, 실체 없이 이름만 먼저 나오는 것. 그게 주의 이름,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여호와 이름으로 벌어지는 현장을 보세요.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랍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으로 완전히 거기에 갇혀있어요. 설마? 홍해가 갈라진다고? 있을 수 없는 겁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을 이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에게 물어보세요. 왜 홍해가 갈라질까? 그들은 어림도 없어요. 왜? 줄곧 하나님께서 바다가 갈라지게 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주의 이름으로 홍해가 갈라지게 했죠? 그러면 주의 이름과, 주의 이름 외에 기존에 세상에 있는 모든 이름과는 싸움의 관계고 적대적 관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적을 뭐라고 합니까? 두자로? 악마죠. 악마. 그러니까 악마가 인간을 지배한 겁니다. 그걸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서는 뭐냐, 사망이 세상을 삼켰는데 부활을 통해서 유일하게 예수님만이 이 사망을 뚫고 이겼잖아요.

 

그때부터 생명이 사망을 삼키게 되어 있어요. 생명이 사망을 삼킨다. 삼킨다는 말은 일대일로 개인구원 하는 것이 아니고, 통째로 일괄해서 다 집어먹고 다 삼키고 그런 거예요.

 

마치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전쟁할 때에, 다윗 시대 때 전쟁 어떻게 했습니까? 몽땅 다 전쟁했습니까? 오야붕끼리 일대일 대표로 했습니까? 골리앗 나왔죠. 이쪽에서는 누가 나왔습니까? 소년다윗 나왔잖아요. 골리앗 하니까 골리앗 크레인이 생각이 나는데, 얼마나 컸으면 골리앗이에요? 장수 목 베고 그들이 다 무너졌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게 다윗언약에 가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아! 다윗 내세울 테니까, 악마 쪽아! 너희도 대표 한 번 보내봐라.” 주께서 다윗 내세웠습니다. 에스겔 34장에 보면 오실 다윗이에요. 로마서 3장에 보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오셨고. 마가복음 10장, 누가복음18장에 보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호산나 찬양한다. 전부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다윗언약대로 오실 분만 오시라는 이 말입니다.

 

그 대표자만 오면 돼요. 그 왕만 오면 백성은 왕이 만들게 되어 있어요. 어떻게 만드느냐, 그게 바로 주의 이름으로 만들거든요. 자, 여러분이 배웠으니까 주의 이름은 어떻게 적용된다? 그냥 곱게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방해를 뚫죠.

 

우리는 뭘 믿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 눈에 보이는 내가 실천에 옮긴 것을, 그걸 결과로 끄집어낼 때. 그때 우리는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정당하다고 확인하게 되니까. 원인도 나, 그 원인자에게서 나온 결과도 동일하게 내가 있을 때 그걸 우리는 “믿습니다.”라고 이야기해요. “믿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긴다고 했죠. 그러면 산을 옮긴다는 결과를 내려면 원인은 뭐가 돼야 됩니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야 돼요. 그러면 진짜 겨자씨만한 믿음인지 아닌지가 구분이 되려면 기도제목이 뭐가 돼야 돼요? “청계산에 저기 황해에 빠져라.” 뭐 기도 제목 내용이 그 정도는 돼야 되잖아요.

 

물론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청계산이지만 믿음이 좋은 사람은 금강산이나 백두산이 돼줘야죠. “금강산이 좋다는데 잠시 남쪽으로 옮기면 되지 않겠는가, 관광산업 때문에 설악산 옆으로 좀 붙어다오.” 왜 그런 기도는 금요철야 때 왜 안하는지 모르겠어요.

 

기도할 때 사람들이 이미 예상을 해요. 얼추 잘하면 되겠다는 파시빌리티possibility, 가능성을 내다보고 그걸 미리 중보기도 내용으로 담습니다. 터무니없는 것은 하지를 않아요. 그만큼 인간이 전혀 믿음이 없으면서 믿음 있는 척을 하고 살아가는 거예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는 것은, 나를 믿으라가 아닙니다. 니가 믿음 아님을 니가 믿어야 돼요. 나의 믿음, 소망, 사랑은 전혀 처소를 마련할 잽이 못 됨을 인정해야 돼요. 그러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돼요? 이미 확정해야 돼요. 내가 뭘 끄집어내도 주께서는 NO! 삑(☓)안 받는다는 것을 확정해야 되겠죠.

 

그 확정은 뭐냐, 십자가에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니 때문에 내가 대신 죽는다는 확정된 원리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어떤 짓을 해도, 십일조, 선교, 금식....뭘 해도 그게 죄가 된다는 것. 그게 확정되도록 누가 이야기합니까? 바로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그걸 꽂아주죠.

 

그래서 성령이 찾아오면 베드로는 자기가 원치 않는 길로 갑니다. 요한복음 마지막에 나오죠. 그거 한 번 생각해봅시다. 베드로야 니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 원치 않는 길로 내가 너를 띠 띠고, 허리띠 쥐고 강제로 이끈다는 거예요. 그러면 원치 않는 길이니까 베드로 나름대로 뭐가 먼저 전제되어 있어야 해요.

 

베드로가 뭘 하든 원하는 것이 있어야 돼요. 원하는 것이 있어줘야 원치 않는 길이 이게 의미가 생긴다니까요. 원하는 것이 한 달에 한 번만 생깁니까? 아침에 눈만 뜨면 원하는 것이 있겠죠. 아침에 눈만 뜨면. 눈만 뜨면 원하는데 주님께서는 원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으로 바꿔주죠.

 

이걸 과학적으로 말하면 에너지인데, 아까 에너지2800kcal가 있어야 산다고 했죠. 베드로가 사는 것은 바로 이 성령에 의해서 사는 거예요. 성령에 의해서. 베드로가 바울에게 당한 것도 다 주의 뜻이고 그거 원치 않는 거예요. 베드로가 원하는 것은 뭡니까? 할례 받지 않은 사람하고는 식사 같이 하지 않는 것.

 

그런데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어떻게 인도했습니까? 그거는 사도바울을 통해서 베드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받는 것이 바로 원치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충분하게 베드로는 솔직하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내놓아야 해요. 이게 사실은 복음에서 제일 이해하기 힘든 거예요.

 

제가 주일 낮에 했잖아요. 거룩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된다? 개인 거룩에, 개인구원에 집착하고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개인구원이 없기 때문에. 없기 때문에 집착해야 해요. 만약에 개인구원이 없고 집단구원만 있다면, 인간이 그 소리를 듣고 베드로처럼 자기는 어떻게 하겠어요? “나는 개인구원 안 한다.” 하고 스스로 개인구원 없애고 집단구원으로 가려고 할 거예요.

 

제가 아까 누구하고 이야기할 때 그런 이야기했어요. 막 산다 이야기. 어떤 사람이 막사는데, 막사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진짜 그게 막 사는 겁니까? 할 때, 막사는 것은 항상 결과 선에서 평가해야 막사는 거예요. 이걸 원인 선에서, “막살면 구원받는단다. 막살자.” 이게 원인 선에서 투입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 지나고 보니, 하루 일과가 끝나고 보니, ‘참 내가 막살았구나.’

 

금식하는 그런 막삶. 목돈 헌금하는 막삶. 전부다 막살았음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항상 결과적으로 해줘야 해요. 결과적으로. 결국 결과적으로 한다는 것은 인간이 그만큼 주님 앞에 활용 당하고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오히려 감사하는 겁니다. “참, 나같이 못난 인간 그동안 잘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용할 게 뭐가 있다고 이렇게 이용해주십니까?” 이렇게.

 

그러니까 요한복음14장에 나오는 내용은 제자들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에요. 이 14장이 어디와 연계되어 있느냐 하면 십자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를 할게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자기 육신 때문에 죽으신 거죠. 인간의 죄 때문에.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죽으신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 땅에 다시 전달한다는 것은, 왜 예수님께서 어떤 차원에서, 니 죄를 니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더냐? 라는 내용까지 십자가 이후에 계속에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정보를 주입시키는 겁니다. 정보를 주입시키기 되면 이 제자들과 함께 있었던 이 이야기가 그냥 헛된 이야기로, 과거의 에피소드로 끝날 것이 아니고, 계속 남겨둬서 이걸 반복시켜줘야 돼요. 이걸 반복해야 돼요.

 

“보면 믿겠습니다.”하는 말이, 제가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철저하게 보고 믿어야 해요. 제가 이걸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자동적입니다. 자동적으로 나옵니다. 자동적으로. “지난번에 일이 잘 풀린 것, 내가 무심코 기도했더니만, 일이 잘 됐네.” 갑자기 기도한 원인과 그 잘된 결과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결하게 되어 있어요.

 

“그때 어렵다고 해가지고 내가 딴 생각 안 하고, 약간의 돈이 좀 남는 것이 있어가지고 한 십 만원 했더니만 아이고, 세상에 삼일 만에 삼백 만원이 들어왔네. 가만히 있어보자 30배네. 이거 잘하면 60배나 100배도되겠네.” 이렇게 연결시켜버려요. 자동적으로 연결시킨다고요. 그러면 이 연결시킨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걸 나한테 장착하겠죠. 장착시켜버리면 이걸 누구한테든 떠벌리겠어요? 안 떠벌리겠어요? 자연스럽게 이걸 떠벌리게 돼요.

 

그 일을 누가 선배 격으로 했는가, 열 두 제자가 한 거예요. 열 두 제자가. “우리가 죽기까지 고생했습니다. 제 목숨 내놓겠습니다.” 열 두 제자가 한 그 길을, 우리는 “에이, 제자들 배반이나 하고.” 이렇게 남 이야기로 여겼는데, 성경을 보면 열 두 제자가 간 그 길을, 똑같은 짓을 같이 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구원받았거든요. 구원받았는데, 구원받은 이유가 뭡니까? 십자가의 긍휼로 구원받았다. 자, 그렇다면 제자들이 십자가의 긍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그 긍휼을 극대화하는 방법은, 내가 주님께 몹쓸 짓을 했는데 긍휼을 줬잖아요. 그럼 긍휼을 극대화 했을 때가 언제입니까?

 

내가 뭐 기도 좀 했더니만 뭐 30배 나왔고 뭐 나왔고 하는 이 모든 것이, 아, 나밖에 모르는 이런 짓이 반드시 나한테 일어날 일이었다 이 말이죠. 막살아야 될 일이에요. 막사는 것을 하나도 하나님 앞에서 놓치지 않을 거예요. 주께서 전혀 놓치지 않습니다. 막사는 것 다 필요한 거예요. ‘내가 기도해서 응답받은 이게 막사는데 포함이 된 거였구나. 아, 그때 큰소리 친 것, 뭐 잘한 짓은 아닌데, 했어야 할 짓이었구나.’

 

그때 누가 와서 툭 친다고 합시다. “당신이 기도해서 응답받는다고 소문났던데? 기도해서 전에는 삼백 만원 받았지만 기도 더 빡세게 하면 육백 만원 받을 텐데 한 번 해보지?”라고 이렇게 한다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지금 생각해보니 참 죄 지은 거야. 근데 그걸 통해서 십자가의 긍휼을 다시 한 번 깨달았어.” 그럼 그 사람은 자동적으로 뭐가 나와요? 누굴 증거 합니까? 주의 이름을 증거 하는 겁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요한복음 14장 13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제 여러분이 정확한 뜻을 알겠죠. 결국은 주의 이름이 제자들을 떠난다? 안 떠난다? 절대 떠나지 않습니다. 제자이기 때문에. 가룟 유다는 빼놓고. 제자이기 때문에 주의 이름이 계속 관여하죠.

 

그러면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돼요? 제자들은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뭐든지 조심해서 주의 이름으로 하면 응답받겠습니까? 아니면 자기는 자기 원하는 대로 살아야 돼요? 자기 원하는 대로 가야 되죠. 여기에 누가 개입합니까? 주님이 개입하죠.

 

아까 한 것을 다시 합시다. 홍해가 갈라졌잖아요. 홍해가 갈라졌을 때 나중에 다 건너오고 보니까 누가 개입되었어요? 이거는 주의 이름이 개입했죠. 주의 이름. 이게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주의 이름은 용사요” 미리암의 찬양 가사 내용에 나와요. 지나보니까 주의 이름이 관여했잖아요.

 

그러면 주의 이름으로 시행했다는 말은 제자들이 언제 압니까? 처음부터 이거는 주의이름이 했다고 아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대로 했는데 거기에 누가 관여해요? 주의 이름이 관여하잖아요. 목사님 관여 안 하면 어떻게 됩니까? 관여 안 하면 주의 제자가 아니죠. 관여 안 하면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아니고 사도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두 제자가 도망치듯이 엠마오로 내려갔잖아요. 내려가는데 거기에 누가 뛰어들었습니까? 예수님이 뛰어들었죠. 못 알아봤어요. 왜 못 알아봅니까? 보고 믿는 것이 아니에요. 뛰어들어서 믿는 거예요. 뛰어들어서. 주님이 뛰어들었어요.

 

주님이 뛰어들었다는 것은 낙엽지고 하는 이 정도로 뛰어든 것이 아니에요. “니가, 니 혼자 살도록 나는 내버려두지 않겠다. 너는 니 맘대로 사는 양이고 나는 너를 구원할 책임이 있는 목자기 때문에.” 그러면 양은 “나는 믿었습니다.”라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내 갈 길로 갔습니다.”라는 것을 증거 하면서 목자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거예요. 나는 나밖에 몰라요.

 

제가 주일 낮에 설교 할 때, 철저하게 개인구원에 집착해야 하고, 자기 거룩만 자랑질 해야 되고, 비슷하게 했잖아요. 자기밖에 모르고, 그건 안 가르쳐줘도 평소에 하는 행위가 그 행위에요. 툭 치면 나오는 그 행위가 자기밖에 몰라요. 왜 다른 집은 수돗물이 나오는데 우리 집은 왜 안 나오는데? 이거잖아요. 이거.

 

갑자기 범사에 감사하라는 이 이론이 어디서 나왔는지 날아가 버렸죠. 왜 다른 집은 수돗물이 나오는데 왜 안 나오느냐 말이죠. 그럼 성령이 “니 왜 범사에 감사 못해?” “그거는 이론이고요. 실제로 화나잖아요?” 그래서 수돗물이 안 나와서 보니까 고장이 났어. 돈 한 십 만원 나갔는데, 수도 고치려고 온 사람이 복음을 듣고 구원 받았어요. 그럼 어떻게 할 거예요? 이거는 예상 못한 일이잖아요.

 

사도바울의 전도가 그런 거예요. 사도바울의 전도가. 절대로 사도 이름으로 구원한 적이 없어요. 사도바울 이름으로 구원한 적이 없어요. 항상 사도가 있는 곳에 누가 개입한다? 주의 이름이 개입하죠. 개입해놓고, 오늘 본문 14장 13절을 보세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제 납득이 됩니까?

 

아, 결국은 마지막 결론은 뭐냐 하면 니가 한 것이 아니고 그 현장에 내가 개입했다. 주님의 이름이 개입했기 때문에 네가 한 그 모든 것이 주님이 개입해서 한 일이 돼버려요. 홍해가 갈라진 것 예상 못했습니다. 결국은 갈라지게 됐습니다. 근데 홍해를 처음부터 다시 돌려봅시다. 홍해로 가지 말고 샛길로, 아스팔트도 있지만 좋은 길로 가게 하시면 왜 안 됩니까? 제가 질문 드리는 겁니다.

 

가로막힌 홍해로 가지 말고, 갈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었거든요. 근데 왜 그 길로 안 가고 홍해로 가게하십니까? 다른 길로 가면 나의 이름으로 건너가기 때문에 그래요. 뭐가 개입이 안 된 셈이에요? 주의 이름이 안 된 셈이에요. 물론 내가 가면서 주의 이름, 주의 이름 찬양하면 되잖아요. 그거는 주의 이름이 아니에요.

 

내가 주의 이름 불러 원인이 되게 되면, 주의 이름 부른 어떤 결과가 나올 거라는 것을 누가 생각한다? 잘못된 나의 믿음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제가 잘못된 믿음이라고 한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또 그럼 목사님 우린 잘못된 믿음 안 하고 옳은 믿음 하면 되잖아요? 이래 나오지 마세요. 벌써 제가 열 번도 더 이야기했는데, 이래 나오지 마시고 잘못된 믿음을 행하세요.

 

주의 택한 백성은 주의 이름이 개입하고, 지옥 갈 사람은 그건 나한테 묻지 마세요. 개입 안 하면 할 수 없지 뭐. 그렇게 헛된 믿음 하다가 지옥 갈 수밖에 없죠. 실컷 교회 다니고, 실컷 주의 이름으로 하고, 지옥가고. 세상에 그렇게 불쌍한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어요. 예수님 제자로 뽑혀가지고 지옥 갔잖아요. 주께서 그렇게 활용하신다니까요.

 

이런 예를 들어봅시다. 만약에 내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어떤 누가 나를 굉장히 억울하게 한다. 이럴 때 어떤 대처를 해야 될까요? 오늘 이거 알았는데, 이거는 실습문제입니다. 실습문제. 이론이 아니고 실습문제. 누가 굉장히 억울하게 한다. 직장에서, 또는 다른 곳에서 억울하게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할 거예요? 답변을 기다리는 내가 잘못된 거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뭐와 연결되어 있다고 했습니까? 천국과 지옥. 다른 말로 하면 처소 있는 사람과 처소가 아예 마련되어 있지 않은 사람. 그럼 어떤 사람이 나를 억울하게 한다면, 지금 그 사람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느냐 하면 지옥 안 가도 이미 지옥에 있음의 행태를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그럼 지는 자기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그 일을 하게 하신 거예요.

 

너무 억울해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그는 자기 역할에 충실하고 있는데 그 사람 때문에 억울하다고 하면 안 되죠. “나는 이래서 지옥 간다.” 지금 이러고 있는데, 이 사람들 그렇게 하도록 하게 해주세요. 나는 이래서 지옥 간다고 하는데 마음대로 하게 해주고 욕 할 필요 없다고요. “여러분들은 행해서 구원받습니다.”라고 하면 마음껏 지옥 가는 행동을 하게 해주라 이 말입니다. 해줘요.

 

그리고 그 하는 그 이야기가 우리는 납득이 돼요? 안 돼요? 납득이 되도 너무 잘 돼요. 왜? 같은 한통속이니까. 똑같은 한통속인데, 지 자랑하고 싶어서 환장한 똑같은 인간인데, 다만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주의 이름이 개입되어 있으니까, 아! 구원은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구나!

 

근데 이 통 안에서 모든 일이 누구 이름으로 시행된다? 주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주께서 한시도 노시는 법이 없어요.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우리에게 행악질하고, 우리를 억울케 하는 모든 일도 다 어디서 나왔다? 주께 나온 행위에요. 그래서 니가 그런 일들을 보거든 지옥은 엄연히 실존하고 있다는 것. 실제로 지옥이 있다는 것을 니가 목격하는 의미로 생각하면 돼요.

 

그렇다면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해놓고 오늘 본문 13절을 읽어봅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이 원인자에 누가 들어가죠? 이 원인자에? 여기 원인자로 누가 들어가죠? “너희가” 들어가죠. 그럼 이 원인자는 누굽니까? 제자들이죠.

 

그럼 13절로 제자들이 구원받았습니까? 구원 안 받았습니까? 13절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 십자가 없으면 구원 됩니까? 모세와 엘리야가 십자가 없으면 구원 돼요? 변화산에서 그 사람들 왜 나타났습니까? 예수님이 언제 돌아가시는지 그거 물어보러 왔죠.

 

그럼 이 말씀 14장 13절로 제자들이 구원받아요? 안 받아요? “아이고, 주님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주님의 이름으로 시행하겠습니다.”라고 하면 이 사람들의 처소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이렇게 해놓고 예수님이 어디로 갑니까? 십자가로 가고. 제자들은 떠나버리죠.

 

그래놓고 다시 성령이 오면 이 본문을 다시 보라 이 말입니다. 주께서 던진 모든 말씀이 분명히 우리를 주체로 보고 던진 말씀인데 이게 의미가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이 말씀대로 행해봐라 이 말이죠. 행해봐라. 한 번 해봐라. 니 속에 어떤 괴물이 있는지 드러날 것이다.

 

아까 쉬는 시간에 권세자들을 위해서 하라고 할 때, 로마서 13장에서는 권세자들을 하나님의 사자로 봤어요. 이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을. 베드로전서에서는 권세자들에게 하라 니가 평안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근데 요한계시록에 가보세요. 그 권세자들이 뭐에요? 짐승입니다. 짐승. 다 세 개를 종합해봅시다.

 

종합해보면 그 모든 것은 복음을 위해서, 복음의 진수, 이 땅에서 복음이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가, 복음이 드러나려면 예수님 빼놓고 모든 자가 배신자가 되어야 해요. 배신자인데 주께서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해줘야 해요.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러나 결과적으로 죽도록 충성케 해서 생명의 면류관을 얻도록 주의 이름이, 성령이 그렇게 몰아넣고 있잖아요. 그럼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촛대를 옮기죠. 그럼 온전한 교회도 옮겨집니까? 옮겨지지 않습니까? 온전한 교회는 옮겨지지 않아요. 그럼 온전한 교회는 어디에 있습니까? 온전한 교회가 어디 있느냐 이 말이죠.

 

정답은 촛대를 옮기리라는 그 말씀을 주의 이름으로 믿게 된 그들이 온전한 교회에요. 항상 주의 이름이 원인이 되어서 나온 결과물이에요. 주님 때문에 생긴 결과물. 내 결과물이 아니라. 그래서 이걸 바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항상 우리에게는 매일같이 단절이라는 것이 주의이름으로 이렇게 개입되어야 합니다. 주의 이름이 개입되면 우리에게는 단절이 주어지는 겁니다.

 

자,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12절에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라고 되어 있죠.

 

여기서 이 본문을 지금 우리가 보는 것처럼 그 당시 제자들이 봤다고 해봅시다. 제자들이 이걸 믿었다 칩시다. 제자들이 여기서 배신할 마음이 있겠어요? 아니면 함께하고 싶겠어요? 세상에, 이런 보너스가 어디에 있어요? 너희들은 내가 하는 것보다 어떤 것도 한다? 더 큰일도 하죠. 아니, 큰일 하겠다는 사람이 배신해요? 예수님을 놔두고 도망칩니까?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베드로가 여종 앞에서 불 쬔 것이 나오죠. 닭이 운 것이 나오죠. 지금 오늘 본문 말씀 큰일도 하겠다는 사람이, 목숨 바치겠다고 하는 그 사람이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저주했다 이 말이죠. 그럼 이 말씀을 주님께서 왜 미리 하시는 거예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12절 끝에 나와요.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을 왜 합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보고 이야기하거든요. “너희들이 나를 믿으면 나보다 더 큰일을 한다. 알겠지?” “예.” “너도 알겠나?” “알겠습니다.” “됐어. 내가 너희들 보니까 내 마음이 든든해.”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근데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을 왜 합니까? 바로 방금 말씀 한 큰일이 너희들 명령으로는 된다? 안 된다?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서 이제 본격적으로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거예요. 예수님보다 더 큰일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근데 예수님보다 더 큰일을 하게 하실 때 제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야, 나는 예수님보다 더 세다. 더 잘한다.”라고 이렇게 하겠어요? 아니면 모든 일을 주의 이름으로 하겠어요? 주의 이름으로 하는 거예요. 어떻게? 원하는 것을 원치 않는 방식으로.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

 

이런 이야기를 제가 문장으로 써보겠습니다. “나를 향한 일이 아니니 걱정 말라.” 이렇게 요약될 수 있어요. 지금 아버지에게로 가잖아요. 그럼 예수님은 누구 지시를 받습니까? 아버지 지시를 받죠. 그럼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지금 나를 향한 일입니까? 아니죠. 나를 가지고 하는 일이지만 나한테 뭔가 기대를 하고 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나를 향한 일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자기가 하신 일을 적용시키는 일이잖아요. 나한테, 우리한테 뭘 얻기 위해서 위한 일이 아니고. 우리는 뭘 해도 죄인 중의 괴수잖아요. 철이 없잖아요. 다만 나를 가지고 주님께만 영광 돌리면 되는 거예요.

 

결국 우리는 뭘 하면 안 돼요? 걱정을 하면 안 돼요. 나를 향한 일이 아니니까 부담 갖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돼요? 담담하고 묵묵히. 묵묵히 살면 되잖아요. 어차피 이 세상에서 내 일이라는 것은 없어요.

 

근데 실제로 일이 안 되면 걱정하잖아요. 걱정할 때마다 우리를 죽여 버리잖아요. 우리를 날마다 죽이고. 걱정 말아요. 그대. 그대여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얼마나 찬송가적입니까? 나를 향한 일이 아닌데 우리는 너무 예민해. ‘주께서 나를 벌하려고 했구나. 그래, 헌금 좀 안 했다고 차사고 나게 해서 이십 만원 날려버리게 하고.’ 모든 것을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가 아닌데. 괜히 우리가 너무 민감하고 예민하게 해가지고.

 

예민하니까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느냐 하면, “그러면 이케요? 저케요? 이러면 인생 보상해주겠습니까? 이거 하면 들어주겠습니까?” 그거 짜는데 하루 종일 걸려요. 하루 종일. 앞으로 내 미래는 주님의 은혜 받아서 어떻게 풀리는지. 잘 풀리는 집은 화장지고. 그걸 연구하는데 하루 종일 보내요. 내가 저 사람한테 이렇게 해주면 주께서 잘 했다고 뭘 해줄지. 짐 들고 오는 할머니를 밀어줬다. 그러면 두 시간 뒤에 나에게 어떤 행운이 오는지. 이거 연구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징크스라고 합니다. 축구 선수들 수염 안 깎고 개인적으로 뭐 안 하죠. 시험 치기 전에 손톱 안 깎는 사람도 있죠. 이게 터부잖아요. 본색 다 드러났잖아요. 완전히 우리가 미신쟁이에요. 미신쟁이. 앞에 있는 내가 원하는 결과를 따내기 위해서 어떤 짓도 다 할 각오가 되어 있는 우리. 진짜 못돼먹었어요. 그래놓고 그걸 가지고 주의 영광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누구 영광입니까? 자기 영광이죠.

 

자, 13절 봅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누가 영광 받아요? 아들이 영광 받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를 향한 일이 아니라니까요. 이게 아주 정확하게 된 것이 베드로전서 4장입니다. 정말 걱정 말아요. 그대에요.

 

11절,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누구로 말미암아요? 예수님 말씀 잘 듣는 나로 말미암아요? 아니죠. 누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성도 곁에는 성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있다? 주님이 함께 있어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누구 뜻대로? 아버지 뜻대로 주님께서 나를 조종해나가시는 거예요. 그렇게 조종해나갈 때에 우리는 항상 뭐가 나오느냐 하면 내 뜻이, 내 고집이 부산물로 계속 나오게 되어 있어요. 부산물로.

 

거기에 대한 정확한 예를 들라고 하면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입니다. 주님이 함께 있죠. 증거 대라고 하면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잖아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를 하는데 어디로 인도하느냐? 물 있는 곳으로 인도했어요? 물 없는 곳으로 인도했어요? 물 없는 곳으로 인도했어요. 사람 죽으라는 말이에요? 뭘 유도하기 위해서 그랬습니까?? 원망을 유도하기 위해서. “아니, 물은 주고 인도해야지?”

 

그러니까 사람들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니까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미리 알고 있는 물과 양식 정도는 챙겨주겠지,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가끔 고기, 양식, 물은 챙겨주겠지. 어떻습니까? 챙겨줬어요? 챙겨줬어요. 어디서? 물 없는 곳에서 물 챙겨주고, 양식 없는 곳에서 양식 챙겨주고, 고기 없는 곳에서 고기 챙겨줬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왜 안 챙겨줍니까? 여러분 냉장고에 보면 물 없어요? 그건 약수터에서 내가 떠 온 거라고 하는데, 아니에요. 다 주께서 없는데서 있게 하신 거예요. 근데 우리가 그거는 기본으로 여기고 그건 별로 감사하게 여기지 않아요. 그럴 때는 갑자기 수돗물이 안 나오게 한다든지 해가지고, 물 귀한 줄 이제야 알겠네. 그게 주의 이름으로 수돗물이 안 나오게 하신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항상 목적은 뭐냐 하면 내 영광, 아버지가 아들의 영광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너희들도 예수님의 영광만을 설명해야 돼요.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한다고 주의 영광, 주의 영광 노래 부른다고 되느냐, 아니에요. 우리가 죄인으로 살아야 되고, 죄인으로 산다는 것은 평소에 하던 것 있잖아요. 잘 하는 것 있잖아요. 이기주의.

 

그리고 자기자랑, 자기믿음자랑, 자기기도자랑, 자기선교자랑, 자기신앙경력자랑, 꾸준히 지치지 말고 하세요. 아낄 것 없어요. 어차피 인생은 거기서 거기에요. 자랑 안 한다고 하는 것이 더 수상해요. 어쩌면 자랑 안 하고 있다는 그것이 새로운 자랑거리로 구성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그리고 아까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에요. 보는 것만 믿습니다. 실적만 믿어요. 두 세 사람도 주와 함께 있다. 참 이론은 좋아요. 교인이 두 명인데, “기쁨으로 감사합시다.” 참 이론은 좋은데, 갑자기 두 명 있는데 사십 명 보냈다. 옆에 교회가 돈 문제로 싸워서. “에이, 정말 믿음 좋은 분위기였는데..” “목사님 가라고 할까요?” “가라 할까?” 이런 사람 없어요. “두 사람만 기도했더니만 주께서 더해주셨구나.” 이렇게 해석한다니까요.

 

그러면 있는 사람까지 사십 이 명 됐죠. 이거 기도하면 사백 명 올 참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온 사람들 중에 오야붕이 설쳐가지고 두 명까지 다 나갔어요. 목사 자기만 남았네. 롤러코스터를 타요. 천국, 지옥을 내려갔다 올라갔다 어지러워요.

 

주께서 매일같이 흔들바위처럼 흔들어댑니다. 그래도 그것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흔들어대니까 걱정 말아요. 그대. 우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걱정한다고 해서 미래가 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요. 걱정 안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에요.

 

자, 그렇다면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근데 뭐가 날라 갈까봐 걱정하는 줄 알아요? 목사님 이러면 기도할 필요가 없잖아요? 참 재밌죠. 왜 기도 하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십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이야기잖아요. 그러면 감사 할 것만 있는데 구태여 기도할 필요 없잖아요.

 

그럼 기도는 왜 하는 겁니까? 기도하는 내가 원인이 되어서 응답이라는 결과가 나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할 때만 기도해요. 그렇잖아요. IN PUT들어가야 OUT PUT나오고, 입력 들어가야 출력 나오고. 기도 안 하는데 기도 응답이 왔다. 이걸 우리는 믿을 수가 없어요. 내가 기도를 안 했기 때문에. 기도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기 때문에.

 

기도 한 적이 없는데 기도의 응답이 주어졌다면 우리는 살짝 짜증이 난다니까요. ‘주께서는 기도 안 했는데 줘놓고 나중에 열 배로 빼먹는 것이 아닌가?’ 이런 걱정이 된다니까요. 공짜 들어오는 것 별로 안 좋습니다. 위험한 거예요. 공짜. 보이스피싱 그 종류잖아요.

 

그러면 기도는 어떻게 할 거냐, 무시로 기도하고. 사도바울 에베소서 3장에서 기도 어떻게 했습니까? “너희들에게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고 길이를 더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니” 간구가 나왔죠. 아까 13절에 보면 기도를 누구 이름으로 구하라고 했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했잖아요. 그럼 주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허락하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이시니까 주의 이름으로 기도를 합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 내용을 나름대로 넣을 거예요. 예를 들어서 성경대로 합니다. 누구든지 남한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그걸 기도제목으로 넣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집어넣어야, 말씀만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주의 뜻대로 하는 기도죠.

 

근데 이 사람이 이 말씀을 집어넣은 순간, 이 사람은 이 말씀을 모르는 게 돼요. 이 말씀의 뜻도 모르면서 무조건 집어넣었잖아요. 그러면 주의 이름이 이 말씀을 기도한 당사자에게 기도한 대로 되돌리게 되겠죠. 그렇잖아요. “그래. 니 소원이 그렇다면 소원 들어줄게.” “주여 좁은 길로 가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이 팔 걷어 부치면서 “고뤠? 내가 좁은 길 맛을 한 번 보여줄게.” 이래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겁을 내는 거예요. 주의 이름 가운데서 근사한 것 있잖아요. “온유하고 자비롭게 하옵소서.” 이런 것 하는 거예요. 왜? 그런 걸 하게 되면 남한테 무슨 소리 들어요? “참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구나. 야 진짜 온유하다. 주께 영광돌리네.” 이래 나온다 이 말이죠. 그것 말고 좁은 길로 가게 해달라고 하는 이런 것은 진짜로 응답 받으면 곤란하잖아요. 비록 영생의 길이라 할지라도. 고생길이 훤한데 그걸 왜 자진해서 나갑니까?

 

진짜 겁이 많아서 온유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합시다. 또는 권세자를 위해 기도하라 해서 문재인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합시다. 문재인 대통령 때문에 불교가 확 죽고 갑자기 기독교가 부흥이 되게 해달라고 나온다면, 그 사람은 사전에 그 본문 내용을 안다고 여겼을 것이 아닙니까? 안다고 여기기 때문에 미리 예상을 하겠죠. 결과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

 

근데 주의 이름으로 개입을 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본인이 그렇게 기도한 순교자가 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게 바로 그 말씀의 기도의 응답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은 내 이름이 날라 가고 주의 이름만 가득차서 주님께만 영광 돌리도록 나오게 하는 그것이 바로 기도응답입니다.

 

반드시 내가 너를 기도케 했고 응답도 내가 너에게 줬다. 따라서 너는 무시로 기도해라. 내용을 니가 자꾸 점검하지 말고. 이게 맞을까? 하지 말고. 너 하고 싶은 대로 기도하되 응답은 주께서 주의 영광 돌리는 쪽으로 되게 하도록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 응답은 마지막에 뭐로 끝나느냐, 감사로 끝나게 되어 있어요. 모든 성령이 주는 기도 응답은 감사입니다. 처음에 할 때는 뭐 불만이 가득해요. “뭐 기도해도 무슨 소용이 있다고 기도하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내용을 기도제목으로 하세요. 어떤 사람은 기도할 줄 모른다고 하는데 저는 그게 이해가 안 돼요.

 

“주님 기도할 줄 모르는데 기도하는데 섰습니다. 교인들은 빨리 끝내고 나오라고 하는데, 저도 빨리 끝내고 나가고 싶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왜 이런 기도를 못합니까? 우사스러울까 싶어서. 어떤 사람은 기도하면서 막 설교를 해요. 들으라고. 그리고 어떤 분은 우리교회에서 설교를 하는데 복음내용하고 좀 틀린 것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오후설교 때 했잖아요. 아슬아슬했다고.

 

그러니까 사람이 항상 길 가다가 무심코 내뱉는 말도 그걸 기도로 전환시켜서, 우리 자체가 응답입니다. 응답이 뭐냐, 걱정하지마라. 니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같이 산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이름으로 영광 받는다는 것, 제자들은 이해했다고 여겼습니다. 그 제자들 다 도망갔습니다. 주님 다시 찾아왔습니다. 처소마련해서 찾아왔습니다. 이미 처소가 마련된 상태에서 주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저희들도 그렇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