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의존교회 170113b (존재와 기능)-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장로라는 사람의 존재는 그냥 아빠에요. 그냥 남자죠. 남자. 가장이에요. 자식이 있고. 그럼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뭐냐 하면, 가장이라면 마땅히 책임감이 있을 거란 말이죠. 어디에? 자기 가족에게. 그럼 우선순위가 돼버려요. 자기 가족을 우선하면서 교회를 우선한다. 그럼 우선이 둘이 돼버리잖아요. 그럼 우선되는 기능이, 가장으로서의 기능과 장로라는 기능이 이게 충돌을 일으키고 순서가 매겨진다 이 말이죠. 그게 과연 가능할까? 하는 겁니다. 그게 가능할까?
자, 장로의 기능이 뭐냐 하는 그걸 통해서 이걸 알아봐야 해요. 장로의 기능은 교회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장로, 감독, 집사도 마찬가지고요. 그럼 교회를 세운다고 하면 교회 해놓고 장로 지명하고 집사 세운다고 하면, 이건 이미 있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에요. 이미 있는 교회는. 그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가리거든요. 그럼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아까 했죠.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 있다고. 교회 안에 교회 있다고.
그럼 교회 안에 교회 있을 때, 우리 교회 안에 또 교회 있겠지. 이런 것은 없어요. 항상 우리 교회는 이미 백퍼센트 다 교회라고 간주하고 교회를 시작하는 겁니다. 백퍼센트까지는 안 되더라도, 팔십 퍼센트라도 교회 안에 교회라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만약에 이십 퍼센트를 교회라고 우기는 교회는 없습니다. 팔십 퍼센트가 가짜기 때문에. 팔십 퍼센트가 가짜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가짜라도 좋다고 하는 이런 교회는 없잖아요. 대략 봐서 우리 교회는 참된 교회가 맞다. 다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그렇지 않는 교회는 없어요.
인간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다 엉터리는 아니다. 이게 인간의 생각입니다. 교회라는 것을 두고 두 가지의 측면이 있어요. 하나는 뭐냐, 사람들이 교회라고 보는 것 하고 주님이 교회를 생각하는 것이 달라요. 왜냐하면 교회라고 할 때 사람들은 뭐냐 이게 존재입니다. 존재에서 교회라고 할 때 이 교회는 존재의 의미로 교회를 생각합니다. 교회 여기 있다. 교회에 모였다. 모였다가 흩어져도 일단 모였으니까 교회잖아. 이런 경우를 말합니다. 모였다가 흩어져도 각자 다 무슨 동, 무슨 동에 살기 때문에, 머릿속으로 계산해요. 점 조직들을 모아보면 하나의 교회가 되고, 흩어져도 하나의 교회로 규정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그거는 흩어지든 모이든 관계없이, 가식이다 불가식이다 관계없이 그거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존재적 교회밖에 몰라요. 본인이 존재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장로가 하나의 가장이라고 했죠. 그럼 가장은 가정이 있잖아요. 있음은 뭡니까? 존재잖아요. 하나의 가장으로서의 있음입니다. 있음인데, 성경에서는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이 장로가 주님이 볼 때는 이게 기능이거든요. 기능.
그러면 주님의 존재에서 어떤 기능을 해야 교회가 되느냐, 이 원칙과 가장의 존재에서 어떤 기능을 해야 교회의 장로가 될 수 있느냐 하고, 그 원리가 같은 원리가 되는 겁니다. 같은 원리가 돼요. 예수님만이 존재에요. 그걸 가지고 이번 수련회에 했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죠. 그리스도의 몸은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 사이에는 존재가 아니고 기능이 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비유, 은유라고 하죠. 인간은 하나의 안개 같은 존재가 되는 거예요. 이 땅에 잠시 나타나 자기 역할을 하고 죽어서 사라지면 그만인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무너지거나 하지 않아요. 그리스도의 몸은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에. 2001년 9월 11일에 탈레반인지, 알 카에다인지, 비행기가 미국 쌍둥이 빌딩 세계무역센터와 충돌했습니다. 이게 철근구조물로 되어 있고 콘크리트 구조물로 안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철근구조물로 되어 있어서 충격 받으니까 와르르 무너진 거예요.
분명히 존재인데 비행기라는 기능이 와서 때려버리니까, 빌딩이라는 존재가 날아가 버렸어요. 다 무너졌어요. 삼천 몇 명이 죽었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다 미국에서 제일 높은 건물을 새로 지었습니다. 이거는 콘크리트로 해서 비행기가 와도, 뭐가 와도 내려앉는 법이 없어요. 세계에서 가장 단단한 건물로 지어놨습니다. 꼭 절벽 같아요.
예수님의 교회가 그런 거예요. 어떤 인간이 타락한다, 뭐 방탕 한다고 해도 교회 건물은 끄덕도 없어요. 왜? 기능을 바꾸면 되니까. 일곱 교회, 일곱 교회 다 망해도 괜찮아요. 그래도 일곱 교회는 유지해요. 그 일곱 교회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해서 영원하기 때문에. 영원하거든요. 그래서 장로 하나 나갔다고 무너지고, 이거는 뭐 알 카에다인지,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면 책임자가 누구에요? 예수님이 책임자죠. 책임자가 어설프게 일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레데 교회에 장로가 필요한데 너희 중에 괜찮은 사람 없어?”라고 주님께서 아쉬워서 사람들한테 묻지를 않아요. “협조 좀 해라. 협조. 나 그리스도 몸인데 지금 팔이 하나 없다. 딴 데는 다 팔이 있는데 그레데 교회는 팔이 하나 없어. 지체로서 팔 기능을 해야지.” 주님한테는 이런 게 없어요. 주님께서는 성령의 은사, 기능을 통해서 이미 다 확보해놨어요. 장로 될 사람, 집사 될 사람, 다 확보해놓고, 장로는 이래야 되고, 집사는 이래야 되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딱 맞는 기능을 추인하는 겁니다. 딱 맞는 기능 어떤 회사에서 여자에게 일을 많이 부려 먹기 위해서 “짧은 치마 입는 여자는 뽑지 않습니다. 남자처럼 바지 입고 활동성 있는 여자를 원합니다.”하고 통보를 딱 해놨는데, 회장님 딸이 미국에서 왔는데 치마를 그렇게 좋아해. 그런데 그 자리에 회장님 딸이라는 백으로 고만 됐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다른 직원들이 “치마 입는 여자는 안 된다고 했는데 왜 합니까?” “바꿨다. 고거 바뀌었다.” “왜 바꿨습니까?” 회장님 딸 넣기 위해서 바꾼 거예요. 그럼 치마 입은 사람은 안 된다는 법을 왜 했는가? 회장님 딸이 올 때까지 전부 다 그걸 거절하기 위해서, 배제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 말씀을 한 거예요. 의도적으로.
그래서 어떤 사람이, 어떤 남자가, 가장이 장로다 되었다는 말은 그 기능이 유효하면 장로가 되지, 만약에 장로라는 기능을 유지하고, “나는 어차피 가장인데 교회 가서는 장로하지.” 이렇게 하고 있는데, 그런데 갑자기 “나는 앞으로 장로다.”라고 이렇게 돼버리면 기능이 뭐로 바뀝니까? 기능이 존재로 바뀌잖아요. 그러면 땡! 탈락이에요. 그 장로는 뭘 가리느냐,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가려버립니다. ‘내가 아니면 장로 될 잽이 없지? 장로 될 그런 자격이 없지?’ 이래 나오면 땡인 거예요. ‘나나 되니까 우리 교회 목사하지, 누가 목사 하겠어?’ 이러면 땡인 거예요.
기능이어야 해요. 기능. 그러면 존재라는 것은 기능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그 사람의 기능은 그 사람의 존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에요. 그 사람의 존재는 가장이에요. 가장에서 장로가 안 나온다니까요. 그러면 어디서 나옵니까? 존재는 예수님에게서 나와요. 하나님의 피로 사신, 피 흘리신 예수님으로부터 그 기능이 나와서, 비록 가장이지만 예수님의 장로의 기능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장로의 기능은 뭐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증거 하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증거 한다고 장로가 되어서 기도할 때 “기도합니다. 피. 피. 피.”하고 내려오면 되는 겁니까? 아까 이야기 했죠. 모든 말씀이 피에 수렴된다면, 그 모든 말씀을 가지고 실생활에 성령께서 다 적용을 시켜버립니다. 적용을 시키면 거기서 뭐가 나온다? 죄가 나오죠.
①죄라는 것은 굉장히 다양해요. 굉장히 다양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다양해도, 이 현실 생활이 아무리 사건이 있고 변화가 있고 다양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범주 안에서 다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되게 하기 위한, 말씀의 티를 내기 위한 범죄만이 일어나요. 모든 게. 아무리 도망쳐도 새로운 법이 추가될 필요가 없습니다. 있는 법의 해석 안에서 모든 범죄는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모든 계명에 총괄해서, 무슨 뜻입니까? 바로 사랑이죠. 그래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뭘 받는다? 저주받는다. 결국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는 것은 믿음도 아니에요. 사랑으로 하지 않는 것은 소망도 아니고.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이라.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근데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 예수님이 죽으신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폐쇄된 공간은 주님의 사랑으로 덮여 있고, 그 사랑을 거부한 자는 바로 지옥 가는 거예요.
그 사랑을 알아먹는 사람은 죄인으로서, 이미 구원받은 의인으로서 이 땅에서 죄인의 모습을 계속해서 들추어 보여주는 겁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이야기하면서, 나타나는 것은 후회가 아니고 감사로 이어져요. 그래서 안양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마는, 제가 우리교회 이강진 성도님의 글에 댓글을 달아놨는데, 여러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강도가 구원받는 것은 강도 외에는 구원받을 길이 없기 때문에 강도가 된 거예요.
그러면 자기기 강도짓 한 것에 대해 뭘 느낍니까? 감사를 느끼죠. ‘어휴! 그때 강도가 아니고 강도 잡는 형사도 되었다면 큰일 날 뻔 했다.’ 딱 그 강도짓을 해야 십자가에 같이 죽게 되고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강도짓에 대해서 굉장히 감사를 느끼죠. 감사를 느끼는 것은 좋은데 자기가 강도생활 할 때 죽은 사람과 그 가족들을 생각해보세요.
사도바울은 사람 죽였어요? 안 죽였어요? 스데반 집사부터 죽이기 시작했잖아요. 그 스데반 집사한테 돌 던진 사람이 누구의 하청업자에요? 사울의 하청업자입니다. 사울이 전부 다 강남파하고 신사동파 조폭들 동원해서 죽인 거예요. 그 주동인물은 사울이죠. 그리고 많은 사람을 잡아 죽였다고 본인 입으로 말했잖아요. 잡아 죽이려고 신바람이 나서 다메섹에까지 갔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사도 됐으면 책임을 져야지. “삼가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하고 찾아가던지. 뭐 그런 것이 없잖아요. 세상에 뻔뻔하기도.
그래서 제가 그 댓글에서 자기 인생에 책임지지 말라고 했죠. 자기 인생에. ‘내가 참 부모를 잘 모셨으면..’ 더 이상 우에 모셔야 되는데? 자기 인생에 책임지지 마세요. 그거는 마귀의 장난입니다. 그래서 제 말을 듣고 하는 말이, “목사님. 그 말씀은 막 살라는 말씀보다 더 즐겁습니다. 더 신납니다. 이제는 뭐 술 먹고 남의 상점 다 때려 부숴도 내 책임 아니고 주님의 책임이라고 하면 되겠네요?” 그럴 용의가 있으면 해봐요?
그래가지고 교도소에 가거든 그것도 자기 책임이 아니고 주님의 책임이고. 교도소 가게 하신 구원의 코스에요. 그거 하다가 더 얻어맞아 가지고 이빨 네 개 나가면 주께서 네 개 나가게 하신 거예요. 자기가 때린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얻어맞아가지고, 형사한테 잡혀가서 10년 징역 사는 것도, 그것도 주의 은혜로 그렇게 생각할 각오가 되어 있거든.
자,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이겁니다. ②어떻게 존재에서 기능이 나오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걸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수정란을 예를 들겠어요.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면 이게 수정란이 되죠. 수정란이 되게 되면 여기서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 세포분열이 일어나요. 두 개에서 네 개. 네 개에서 여덟 개...막 불어납니다. 나중에는 진짜 많이 불어나요. 불어난 거기에서 포배가 돼요.
포배라는 것이 있는데, 이 포배라는 것이 뭐냐 하면 수정란이 있는데, 이 수정란에서 난자한테 에너지가 공급이 줄어들게 되면 더 이상 크지를 않아요. 그럼 이게 수정란이 동그랗게 되어 있다가 움푹 이렇게 함몰이 되는데, 함몰되는 이유가 산소를 얻기 위해서, 산소 많은 표면층을 넓히게 되면 동그랗게 되어 있다가 가운데 옆이 들어간 강낭콩 모양처럼 돼요. 이렇게 되면서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내배엽 외배엽 중배엽, 하는 배엽이 생겨요. 아직까지는 눈, 코, 입, 이런 것이 없다는 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여기 난자, 정자에너지가 계속해서 나오잖아요. 나오면서 나중에 어떤 눈과 코가 될 때에 그 층위가,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에너지 기능이 층위를 이룬다. 어떤 경계선을 이루어요. 경계선을 이루가 되면 눈, 코, 입, 아무것도 없다가 점차 눈이 될 것은 눈으로 모이고, 귀가 될 것은 귀로 모이고, 소위 기관들이 생겨나죠. 기관들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이 이야기를 제가 왜 하느냐 하면, 성령이 임하게 될 때, “나 장로 할래.” 이렇게 해서 장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나 집사 할래.” 이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나 감독 할래.” “나 설교 잘해” 이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령이 은사를 주게 되는데, “은사 줄 사람은 딱 보면 안다.” 이런 게 없다는 말입니다.
자연세계도 아까 한 이걸 규명하는데 힘들어요. 우리가 이걸 딱 딱 구분을 지어서 이거는 눈, 이거는 코, 이거는 입,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처음에는 그게 뒤죽박죽으로 혼란 상태에 있는 거예요. 혼란 상태에 있다가, 뭐 어떻게 했더니만 나중에는 코 나오고, 입 나오고, 구부러진 곳이 나중에는 눈이 되겠죠. 눈. 이거는 발 튀어나오겠죠. 왜 하필 눈 쪽이 발이 안 되고 눈이 되느냐? 이거는 어떤 이유도 없어요. 그냥.
에너지가, 기능이 있으면 힘이 있으니까, 힘의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자연스럽다는 것은 모르겠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모르지만 그렇게 결과로 볼 뿐이에요. 그래서 제가 이번 수련회 할 때, 나뭇잎이 노란 잎이 되거나 붉은 잎이 될 때에, 우리는 분명히 중간 중간에 색깔이 변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 색깔 변한 그 중간을, 왜 이렇게 되는지를 어떻게 규명할 수가 없어요. 규명할 수가. 왜 그렇게 되는지를.
“너 언제부터 그렇게 성경을 좋아했어?” 이걸 우리가 어떻게 말로 설명합니까? “서울대학 갔는데 어떻게 갔어?” “공부가 제일 쉬워요.” “나는 공부가 제일 안 쉽던데?” “그건 니 생각이고. 나는 쉽다니까.” “왜 쉬운데?” “몰라. 그거는. 공부가 쉬운 것을 쉽다고 하는데 왜?” 니 기준 가지고 그거는 아니라고 그럴 필요가 없다는 이 말이에요.
③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다양성은 인간의 개인적인 기대사항이나 희망사항이나 이런 게 소용이 없어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성경에서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을 아시니까 달라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했죠. 달라는 기도를.
어떤 분이 태국을 갔는데, 11명이 곗돈 모아서 태국을 갔어요. 수련회 기간이지만 1년 전부터 되어 있던 거라 할 수 없이 수련회를 빠지고 갔는데, 11명이에요. 11명. 11명인데 꼭 방을 6개 안 만들고 5개 만들어요. 그럼 어떻게 되느냐, 호텔방에 2명, 2명, 2명, 2명 들어가다 맨 마지막에는 3명이 들어가야 되거든요. 아무래도 2명보다 3명이 불편하니까, 그 3명 들어갈 때는 가위바위보를 해야 돼요. 가위바위보를. 그런데 수련회 빼먹고 간 집사님이 하기만 하면 두 명이 자는 방에는 못 가고 맨 세 명이 자는 방에 끼여 자게 된 거예요. 몇 번이나 그랬거든요. 근데 그 동행자 중에 어떤 권사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 권사가 하는 말이 “손 줘봐라. 내가 안수 기도해줄게. 니는 저주받은 손이기 때문에” 이게 바로 주께서 그런 기도를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뭐가 필요하다는 것을 기도하지 마라. 그래서 끝까지 2명 방에서 못자고 3명이 자는 방에서 잤어요. 아주 간증을 해요. 간증을.
인간의 보통 기능은 이미 자기가 자아 됨을 기준으로 해서 기능이 나옵니다. 따라서 내가 이 비타500이 맛있다고 할 때는 어떤 기능으로 나오느냐 하면 나한테 좋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 비타500을 먹어야 되겠다는,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인 기능이 발산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모든 인간입니다.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이거든요.
근데 여기 장로 보세요. 디도서 1장 6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역량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것은 어떤 경우라도 일단은 자기가 좋은 쪽으로, 자기 유리한 쪽으로, 자기 도움이 되는 쪽으로, 자기 이익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7절에 보면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이렇게 한다는 것은, 이거는 본인의 역량이 아니고 어디서 온 성품이냐 하면 성령을 통해서 이 사람에게 은사를 준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어떤 가장이 장로의 기능을 해야 하는데 존재가 뭐냐, 자기 육이 존재죠. 근데 이 장로 기능은 주님의 존재에서 나온 기능이죠. 이게 싸우겠어요? 안 싸우겠어요? 매일같이 싸우죠. 매일같이.
“아이고, 장로님 이렇게 훌륭하십니까?” “훌륭하기는 개코나 훌륭해요? 매일같이 싸웁니다. 내 고집대로 뭘 하고 싶어도 주님이 허락하지 않네요.” 그러니까 누구만 증거 하겠습니까? “나는 고집대로 하는 죄인인데 주께서 주의 말씀대로 이렇게 하게 하시니까 나는 죽을 지경입니다.” 나는 죄인이라는 이 말이거든요.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이 피로 사신, 그 하나님을 증거 하는 교회가 되는 거예요. 교회가.
그러니까 이거는 장로하고 싶다고 손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돈 내고 장로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직 기능이 지금 누구한테 덮쳐서 그 사람을 못 살게 구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는 집사가 안 나오는데. 자, 그렇다면 이렇게 디도서 1장 5절부터 봤는데, 그래놓고 이제 1절부터 봅시다. 1절,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2절,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이걸 한마디로 줄이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에 위배되거든 일체 동정이나 천히 여길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지금 교회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주님의 약속도 모르는데 너무 많이 동정하고 있고 위로하고 있어요. 격려하고 있어요. 주의 약속도 모르는 사람한테.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생의 소망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두둔하고 있어요.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자기 피를 줬는데, 교인이라는 작자들이, 또 교인입네 하는 작자들이 휴머니즘을 너무 많이 발휘하고 있어요. “아휴, 괜찮다니까.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주님께서는 피를 주고 산, 피를 줘야만 교회된다고 그렇게 했건만, 자기들은 그 놈의 정 때문에, 인정에 끌려서, 이거는 뭐 같은 성도라고 얼싸안고 바리케이드를 치는 거예요. 피 앞에서.
“목사님. 이 분은요, 교회 나왔는데, 세상에 때 끼니가 없어가지고, 굶어죽을 판입니다. 우리 교회가 안 도와주면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근데 복음은?” “복음은 뭐 모르죠. 만날 시장에 가서 장사한다고 뭐 압니까? 도와줍시다. 교회로 도와줍시다.” “안 돼요. 그냥 죽으라고 해요. 그냥 죽으라고. 잘 됐네. 나도 죽는 것이 소원인데. 축하합니다.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소원인데 잘 됐습니다.” 이래야 된다니까요.
1장 1절에서 4절을 왜 줬습니까? 교회 만들라고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이 세상의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어느 국가, ④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보다도 예수님의 피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디도를 보낸 거예요. 디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보다 딴 걸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것은 교회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근데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어요. 이런 것이 참 어려워요. “목사님! 목사님! 저 사람은 복음을 고백 안 합니다.” 이렇게 고자질을 하는 사람이 막 있는데, 꼭 고백을 해야 되겠어요? 고백을 하게 되면 이번 수련회에도 나왔죠. 공식 나왔습니다. 진짜 좋은 공식인데. 공식이 뭐냐, 10미터와 3미터 공식, 나왔잖아요. 들어본 사람은 알 거예요. 10미터 앞에서는 꼭 신자 같아. 근데 3미터에서 보니까 신자 되려고 그렇게 애를 써. 10미터쯤에서 볼 만한 신자 되기 위해서 3미터부터 지금 자기에게 애쓰고 있는 거예요.
디도를 보내고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한 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종을 개무시 한다는 것을 전제로 깔아놓은 겁니다. 이번 수련회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사야보고 “이사야야! 니 백성한테 외쳐야지? 누가 가겠나?” “제가 가겠습니다.” “가라!” 이래 하신 것이 아니고, 이사야로 하여금, 먼저 이사야를 부르죠. 찾아오잖아요. 이사야가 놀래버려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 정도가 아닙니다. 뭐라고 했어요? 망하는 백성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서 화로다 망하게 된 거예요. 그러면 자기한테 주어진 사명이 뭐냐 하면 내가 화로다 망하게 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 유다백성, 전부다가 망해도 이의 걸 수 없는, 망해야 될 그러한 소식을 누구보고 전하라고? 미리 망하게 된 이유를 알게 된 나(이사야)보고 전하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아주 장단을 맞추죠. 니가 가서 전한다고 해서 그 백성들이 믿을 위인들이 아니라 이 말이죠. 이사야는 알아요. 왜? 망하는 백성은 망해야 하는 백성이기 때문에, 망하는 백성이 알아들을 리가 있겠습니까? 망하는 백성이 분명히 망한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께서 자기를 보내잖아요. 망하는 백성한테 맞아 죽어도 그건 당연한 것이죠. 왜? 그래야 망하는 백성이니까. 이 이사야의 이 성격이, 이 성질이 예수 그리스도한테 그대로 주어졌고, 그 성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에게 주어졌고, 그 성격이 디도한테 그대로 전해져야 된다 이 말이죠.
뭘 기대해요? 뭘? 성령 전하면 믿을 줄 압니까? 사도행전 마지막에 보니까 나오죠. 성령이 충만해서 전했는데 어떻게 됩니까? 결과가? 흥! 칫! 뿡! 하고 다 가버렸어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그 대목이 나오죠. “내가 갈 줄 알았어. 믿을 리가 없지.” 이게 사도바울의 태도라니까요. 왜?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수님을 떠나보낸 이 세상에 계속 흔적을 남겨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흔적을 남겨야 되기 때문에.
⑤이 거룩한 말씀 시간에 또 연예계 이야기를 해서 안 되겠지마는, 복음을 위해서는 뭔들 못하겠습니까? 복음을 위해서 뭔들? 홍상수 감독하고 사귀는 여자 이름이 뭡니까? 김민희죠. 하여튼 TV보기는 되게 많이 봐. 홍상수 감독이 자기 부인하고 이혼소송 중에 있잖아요. 소송 중에 있다고요. 그러면 홍상수 감독이 어디에서 영화를 촬영한다. 그럼 사람들은 그 촬영장에 김민희가 같이 있겠네. 가보니까 거기에 김민희가 같이 있는 거예요. 같이 산다는 소문도 있고. 그럴 줄 알았어. 이렇게 되잖아요. 그럴 줄 알았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러면 사도가 가게 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그 인간들이 어딜 가도 가득한 거예요. 어떤 교회 가면 수천 명이 되고, 어떤 교회 가면 수만 명이 된다고요. 전부 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사람들이에요. 그게.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주의 종은 거기서 뭘 봐요? 십자가 복음을 전해버리죠. 그럼 어떻게 됩니까? 뭐 욕하고 난리가 나죠.
그렇게 십자가 복음 전하면 우리가 돈 바치고 재산 바친 이 교회는 어쩌란 말이에요? 이 교회는? 이 부동산 어쩌란 말인가? 이 교회 운영을 누가 하는데? 분명히 교회가지고 복음을 반대할 거 아니냐? 이 말입니다. 그래가지고 분명히 교인 수가 삼천 명에서 삼십 명으로 줄어들면 책임질래? 이렇게 나올 게 뻔하다는 말이죠.
근데 그걸 누가 안다? 십자가 복음 전하는 사람이 그걸 미리 알거든요. 예수를 죽인 자가, 예수를 죽인 그 현장에, 홍상수 감독이 영화 촬영하는 곳에 김민희가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김민희가 있는 곳에 홍상수 감독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아는 것처럼, 예수를 죽인 자들이 있는 곳에는 주님의 소식, 복음 다 거부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들은 뭐냐, 예수 이름을 빙자한 유대교, 유대인들이죠. 그러면 그들이 예수를 반대한다고 이러면 안 돼요. 반대한다고 하지 말고 반대하는 이유는 바로 유대교 성격에다가 예수라는 껍데기, 기독교라는 용어만 갖다가, 거기다가 입힐 뿐이겠죠. 그걸 가지고 흉악한 이리라고 하는 겁니다. 흉악한 이리가 되는 겁니다.
자, 정리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지 정리해봅시다. 자, 십자가에 죽었던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 구원받고자 하는 거죠. 정리할 때 여러분이 분명히 정리해야 해요. 우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이유가 자기 구원받으려고 하잖아요. 자기구원. 죽어서 좋은 데 가려고.
그럼 오늘날 복음을 반대하는 소위 개혁주의 교회가 왜 십자가 복음을 반대합니까?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해서 교회 만들면 그것이 누굴 구원한다? 나를 구원한다는 생각이 강렬하기 때문에 유대인처럼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지금껏 돈 투자하고, 십일조 하고, 친목단체까지 되고, 땅 바치고, 장로 되고 했던 이 모든 것이 졸지에 뭐가 되느냐 이 말이에요.
그럴 때 디도서를 이야기해야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 하늘나라 영생보다 니가 갖다 바친 돈 중에 어느 것이 더 소중하냐고 디도를 보낸 겁니다. 거기에다가. 오늘날 디도만한 설교자가 있겠어요? 사람들이 자꾸 헌금 많이 하면 믿음 좋다고,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만 증거 한다고 하는데,
제가 수련회 때 했잖아요. 복음 전한다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지 말라고.
복음 전하는 그걸 빌미로 해서, 복음 전하는 그게 몇 미터냐 하면 10미터거든요. 가까이 가보니까 복음 티내는 3미터 작업하고 있는 거예요. 온갖 것 다 끌어당겨요. 언약에다, 십자가에다, 오직 또 복음만 이야기하고. 어디서 베꼈는지 온 흉내는 다 내고. 교회는 없다.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다. 들은풍월은 있어가지고 다 이야기해요. 어디서? 10미터에서. 가보면 참, 신자 아니에요. 그렇게 이야기하고 신자인 사람을 거의 못 봤어요.
딱 한 마디만 하면 돼요. “그렇게 복음 전했어요.” “전했는데? 그래서? 그게 죕니다.” “그게 어떻게 해서 죈데?” 실컷 10미터에서 해놓고 3미터에서 그것도 죄라고 하니까 그만 나자빠져버려요. “예수 믿었으면 거룩한 행동을 하라고 성경에 나와 있는데 왜 그러느냐? 거룩하라고 해서 우리가 거룩 하려고 애썼는데 그게 왜 죄냐?” “복음을 받았으면 본격적으로 죄 짓습니다.”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왜 그런가 하면은 교인들도 문제에요. 성도 되는 것도 성령의 은사가 있어야 되는데, 성도가 아니고 교인이 돼버리면 교회 갔다가 후딱 자기 집으로 가요. 자기 집의 가장이거든요. 왜? 존재거든요. 자기 존재에서 오는 기능밖에 없어요. 내가 가장으로서 교회 가는 기능을 하게 되면, 나뿐만 아니고 우리 가정이라는 존재가 천국 갈 것이다. 역시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서 교회에 가주는 것이 돼요. 교회 가주는 것. 신년예배니까 가주고. 신년예배니까 또 돈 들고 가서 헌금함에 넣고. 또 올해도 무사히 해가지고 기도하고 빌고 오고. 이게 점집이지 무슨 교회에요? 점집이지.
2절에 봅시다.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거짓이 없다는 말은 사람한테 양보 안 한다는 이 말이에요. “하나님 좋은 게 좋고 우리 협상하고 타협합시다.” 이런 게 없다 이 말이죠. O아니면 ☓고, ☓아니면 O에요. 왜? 주님은 거짓을 모르기 때문에. 그러면 디도가 할 일은 굉장히 간단해요. 거짓이 아닌 것만 증거 하면 돼요. 거짓이 아닌 것을 증거 하면 돼요. 그게 뭐냐, 우리 존재는 몽땅 다 거짓이다. 우리 존재는.
그러나 주님의 존재는 거짓이 없다. 따라서 주님의 존재로부터 오는 기능, 다시 말해서 성령이죠. 성령이 없으면, 성령세례가 없으면, 성령 안 받았으면, 그러면 성도가 아니죠. 성령세례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뭡니까? 특징이 바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 어디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십자가 졌다는 사실. 그겁니다. 이게 성령의 기능입니다. 은사입니다. 믿는 것도 은사에요. 존재가 아니죠.
근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예수 믿는 내 존재는 뭐하면 됩니까?” 하고 기능으로 가다가 갑자기 존재로 가버려요. 예수 믿는 내 존재는 뭐합니까? 그러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죠. 매일같이 죄 짓는 기능을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미 죽었다고 했잖아요. 죽었는데 왜 자꾸 거기다가 미련을 둡니까? 죽은 놈인데.
이렇게 하면 그쪽에서 답답해가지고, 왜 죽었어요? 볼때기 땡겨 보면 아픈데 왜 죽었어요? 누가 힘줘서 땡기게 합니까? 주께서 힘줘서 땡기게 하죠. 어? 살았네? 살았죠. 주님 주시는 힘으로 살았죠. 우리는 죽고 주님이 주신 힘으로 우리가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볼때기를 땡기는 것도 주님이 주신 힘으로 땡기는 거예요. 살았는지 죽었는지 한 번 시험하려고 오후 3시 45분에 땡기게 하신 거예요.
이게 거짓이 없고 영생의 소망입니다. 어떻게 그런 것도 모르고 그냥 봐버리면, 사도바울이 그레데에 선교센터를 짓게 해서 교회하려고 했는데, 교회를 보니까 장로가 없어서 장로 세우려고 디도를 보냈구나. 이래 돼버려요. 그리고 그 내용은 잡다하게, 하나님의 종, 영생의 말씀, 십자가가 어떻고, 이런 것을 줄줄이 외우면 구원되는 줄로 알고 있어요. 성경을 이렇게 보는 것이 기존의 교회들이 자기 정당화 때문에 그런 식으로 성경을 보는 거예요.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빨리 장로 세워서 하나님 앞에 교회라는 티를 내려고 하는 거예요. 티를 낼 때, 여기 보니까 한 아내의 남편이 되고, 책망할 것이 없고,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 없다고 이렇게 하니까, 일단은 이런 사람을 안 뽑아요. 장로 뽑을 때 흠 많은 사람을 안 뽑습니다. 어떤 사람을 뽑느냐, 돈 되는 그런 사람을 뽑아놓고, 장로 됐으니까 하나는 처리해야지. 돈이 목표에요. 돈이.
돈이 목표기 때문에 까짓것 돈 챙겨놓고 차차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면 되잖아요. 방탕 덜 하고. 술집에 덜 가고. 일주일에 세 번 가는 것 두 번으로 줄이고. 농땡이 자녀 교회로 불러내고. 장로 됐는데 니가 안 오면 교회에서 뭐라고 한다. 빨리 나온나! 나오면 십만 원씩 준다고 해서, 일당 줘서, 우리 애 여기 모셔놨습니다. 불순종 하는 일이 없는 자녀입니다. 우리 가정은 없어요. 좀 전에는 있었는데, 장로 되기 전에는 있었는데 이제는 없습니다. 이거 할라고.
7절도 마찬가지에요.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감독이라는 말은 그냥 설교자라고 보면 되죠. 이 감독위에 뭐가 있습니까? 사도가 있죠. 사도가 있다는 말은 위에 말씀이 있다. 말씀이. 주의 복음의 말씀이 있는 거예요. 감독은 지 맘대로 하는 것이 감독이 아니고, 복음의 말씀을 증거 하는 거죠. 증거자니까. 그럼 누가 감시를 하겠어요? 그 교회에 성령 받은 성도들이 감시를 하겠죠. 누가 너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친히 성령께서 너희를 가르치리라. 요한일서 2장 27절. 그 말씀대로 견제 받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감독이 처음에는 한 몇 개월 동안 십자가 복음 외치다가 서서히 이제 갑질 하고 싶은 거예요. “지들만 고기 먹고.” 이래가지고. 중이 쓴 책 제목에 그런 게 있습니다마는. 책 제목도 희한하지만. “자기들은 맛있는 것 다 먹고 목사는 홀대하고. 나 안 해. 나 목사 안 해.” 이래 나오면 성령 받은 교인들이 어떻게 나오겠어요? “언제 니가 그만둘지 우리가 기다리고 있었어.”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각자 성령의 기능 안에서, 성령 안에서 교회입니다. 성령의 기능 안에서 서로 필요한 대로 하면 되는데, 누가 성령의 기능이 아니고 육적인 기능을 해버리면 다른 성령의 기능을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상처를 입고 힘들게 되겠죠. 그러면 뭡니까? 설교자로 누가 오기를 고대하겠죠.
그러니까 어떤 존재자가 감독 된다고 할지라도 그걸 계속 부재 한다는 생각은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럼 나는 목사 안 하고 교인 될래.” 교인되더라도 마찬가지죠. 교인은 성령이 계속 있을 때 교인되죠. 성령이 있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성령이 없었다. 10미터에서는 있는 줄 알았는데 3미터에서는 아니다. 그러면 성도가 그 교회를 나가든지, 안 그러면 성도 아닌 것을 감추기 위해서 그 교회를 장악하든지 해야죠. 니가 가라 하와이! 해가지고 성령 받은 교인들은 천국 다 보내고, 자기가 다니는 교회는 지옥 돼버려요.
8절을 봅시다.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나그네를 대접한다. 나그네를 대접할 때, 커피 몇 잔 드려야 대접하는 겁니까? 한 잔 하고 리필 할까요? 말까요? 나그네 대접을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어디 FM이 있어요? 기준이 있어요? 그냥 나그네를 대접하게 되어 있어요.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고. 이게 뭐냐 하면 어떤 기준이 없죠. 감독 집에 나그네가 왔을 때는 커피 한 잔과 녹차 두 잔을 마셔야 한다는 그런 법이 있습니까? 갈 때는 차비 받아가고. 이런 게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냥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죠.
이런 이야기를 감독이나 일반 성령 받은 성도에게 줬을 때, 이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면 대접하는 것도 법으로 대접한다고 해서 아무리 해봐야 무한판단이 되기 때문에. ‘이보다 더 할 수 있는데.. 아니야. 용돈 차비하라고 이십 오 만원 주고, 커피 석잔 주고 했는데.. 아니야. 이십 칠 만원을 줘야해. 이십 오 만원 줘서 나빠.’ 법적으로 돼버리면 계속해서 마귀의 시험이 들어버려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나그네를 대접하더라도 “주여, 제가 아무리 해도 온전하게 못했습니다.” 이것이 대접하고, 라는 말을 주님이 던진 이유입니다.
그래가지고 전화해서 “제가 제대로 대접을 못했죠?”라고 하면, 나그네가 “어데요? 무슨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까? 세상에, 이런 황공할 데가? 나 같은 죄인이 이런 대접을 받다니? 목사님의 대접에 황공할 뿐입니다. 저는 주의 은혜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그 마음을 주셨겠어요? 성령께서 그 마음을 주신 거예요. 목사를 통해서 대접받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나그네나 목사나 둘 다 이번 일의 성사 공로자는 누굽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한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주의 힘으로 하신 것처럼 하라. 이 말이 또 다시 반복되는 겁니다. 말씀에 의해서.
또 어떤 목사는 나그네를 대접하기가 싫어요. “그저 냉장고 열어가지고 살코기 가져가지 말고 옆에 있는 목살 가져가시고. 우유 네 병 있죠? 두 병만 가져가시라고. 나는 대접할 줄 몰라. 원피스 다섯 벌 있는데 두 벌만 가져가라고. 신발장에 새 신발 네 켤레 있는데 두 켤레만 가져가시고. 나는 대접할 줄 몰라. 당신 대접 안 하겠어.” 무슨 이런 횡재가 다 있나? 하겠죠. 근데 목사는 지금 “주여, 또 나그네를 대접하지 못했습니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때 우유 네 병 다 주는 건데. 뭘 먹겠다고 두 병밖에 안 주고.’ 이러는 거예요. 근데 전화해보니 “목사님. 대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누구 공로에요? 주께서 하신 공로에요. 전혀 나는 대접한 적이 없어요.
이게 뭐냐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면 온유와 화평과 양선과 자비와 형제우애가 막 나오는 겁니다. “내가 무슨 대접을 해? 내가 무슨 성도다워? 나는 장로 값도 안 돼.” 이걸 늘 유지케 하는 능력, 그게 우리가 가진 존재를 주의 존재에서 나온 십자가 기능으로 늘 이렇게 박살낼 때, 이게 바로 교회를 운영하는 운영방식입니다.
설교해놓고 죄짓고, 강의해놓고도 그게 죄고, 요약을 아주 잘해서 아주 백퍼센트 정답지 딱 내놨는데, 실컷 해놨는데, 백날 해도 “나는 깨지기 바빠서 수련회 내용이 하나도 생각이 안 납니다.” 이런 정답에 미치지를 못하니! 이런 정답에! “수련회 때 뭐 했는지 모릅니다. 나는 깨지기 바빠서.” 세상에! 저는 전화하고 한방에 가버렸습니다. 속으로 ‘졌습니다. 아이구, 죄만 졌구나. 죄만 졌어.’ 이게 바로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진짜 성령께서 나오게 하는 고백이 이 고백인데. 이 이야기를 하면 안 돼. 또 송민선 성도님 이 이야기 듣고 존재로 변하겠다. “내가 그 정도였어.” 또 존재로 변해. 내가 또 사람을 버려놓아.
그러니 이 모든 택한 백성, 여기 예정된 택한 백성, 영생 줄자에게는 반드시 영생이 가도록 주께서는 디도서라는 그레데 교회를 빙자해서 사실은 오늘날 우리보고 이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너희는 죄인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모든 것은 주님 앞에 십자가만 바라보고 감사할 것밖에 없는 것. 이게 지금 현재적, 내일은 죽을지 살지 모르니까 지금의 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디도서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보면서 감사만 나오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