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41212a-히9장1절(애매함) -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9장해봅시다. 1절에 ‘첫 언약에도’ 이렇게 되어있지요. 첫 언약이 뭐냐 하면, 율법입니다. 그러면 율법이라는 핵심이 어디에 들어 있느냐 레위기에 들어있습니다. 레위기. 그러면 레위기 내용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출애굽의 내용이 좀 더 제사법 중심으로 자세하게 이야기한 것이 레위기가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 다음에 레위기가 되기 때문에.
민수기 내용은 뭐냐, 요번에 수련회에서 민수기 할 건데, 민수기 내용이 뭐냐 하면, 출애굽기와 레위기가 하나의 이론 이라면 말씀은 이론에서 머물면 안 되잖아요. 실천하잖아요. 실천을 하는데 고정 적에서 가만히 있어서 실천하는 것이 아니고 무빙, 움직이면서 실천해요. 움직이면서. 어디서 움직이면서 실천하느냐, 광야에서 움직이면서 실천하는 겁니다. 광야. 광야니까 뭔가 땅하고, 땅이라는 개념하고 광야하고 개념하고 뉘앙스가 다른 거 같아요. 광야는 지나가는 느낌이 들고 땅이라 하는 것은 정착하는 느낌이 들지요.
그래서 땅에서 나와서 광야를 통해서 영원한 땅으로 가는 것. 그렇다면 광야라 하는 것은 기존의 땅을 부정하고 새롭게 주께서 마련한 땅을 맞이할 인간으로 바꿔치기 하는 장소가 광야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광야에는 두 가지 요소가 다 들어있어야 되겠지요. 하나의 겹치는 부분이니까. 옛 땅과 새 땅이 겹치는 부분이니까.
이 광야 자체가 땅으로 묘사된 오늘날 성도의 마음 상태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어요. 육과 영이 함께 있습니다. 육이 없어지고 영만 있는 게 아니고 그건 천사나 그렇고요. 육과 영이 함께 있지요. 아브라함이 맨 날 하나님 앞에 티격태격 겪고 야곱이 맨 날 하나님 속이고 사실은 아버지 속은 게 하나님 속인 거예요. 하나님과 싸우고. 이삭도 자기 원하는 아들에게만 몰아주고 사랑을 몰표 보내고 그러한 것. 그리고 정작 아들한테 속임을 당해서 축복해야 될 사람에게 지 뜻대로 안되게 하는 것. 사람이 자기 뜻대로 안 된다는 것. 자기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이 굉장히 고맙고 감사해야 돼요.
뜻대로 안될 때, ‘왜 내 뜻이 안 되었을까?’ ‘내 뜻은 왜 안 될까?’ 하는 생각은 그러면 내 뜻을 망치는 그 뜻이 무엇이냐, 내 뜻을 망치게 하는 그 뜻이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주님의 뜻이지요. 그렇다면 주님의 뜻과 내 뜻은 항상 사이좋게 가는 것이 아니고 충돌되는 양상을 보이지요. 충돌되는 양상. 그렇지요?
그런데 그 충돌되는 것이 어디서냐, 바로 옛 땅에서 벗어나야 되고 새 땅에 들어가야 될 광야 같은 세상이라는 환경을 통해서 내 뜻과 아버지 뜻이 서로 만남도 성사되고 충돌도 성사되고 그러면서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달라지게 하는 거예요.
제가 미국 가니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했지요. “까이는 재미가 멋있습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그 교회에 어떤 전도사님이 <왔다! 장보리>가 좋아가지고 예배마치고 잽싸게<왔다! 장보리>보러 갔다 말이죠. 그 이야기 듣고 예배에 관심 없고 예배에 있으면서도 <왔다! 장보리>에 관심이 있으니까 안 되지 않느냐, 라고 설교시간에 이야기했다 말이죠. 하고 나니까 당사자가 미안해가지고 제가 미안합니다. 하니까 “아이고 목사님 까이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데요. 그것도 공개적으로 까이는 재미가.” 내가 그 소리를 듣고 사랑을 많이 느꼈지요. 위로를 많이 받았지요.
주님께서는 늘 이렇게 까는 거예요. 다시 하겠습니다. 오늘 히브리서9장인데 옛 언약에 관한 것. 옛 언약은 율법이죠. 율법은 어디에 필요한가 하면 광야에 필요합니다. 이론만이 아니고 실천에 옮기는 거죠. 율법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무슨 상황이 필요한가, 광야라는 상황이 필요합니다.
광야라는 상황은 이렇게 정주, 정착하는 게 아니고 이동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흐르는 거죠. 영어로 Flow. 물결 흘러가듯이 흘러가는 겁니다. 최 희준이 불렀던 유명한 노래 있잖아요. 인생은 무슨 길이라 했습니까? 인생은 나그네길이죠. 1960년대 드라마로 알고 있는데 자기를 배신한 여자가 앞집의 부잣집 사모님으로 마나님으로 살고 있을 때, 뒷집의 하숙하는 어떤 남자가 와가지고 하숙하면서 그 여자에 대해서 복수하는 드라마입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라디오 연속극인데.
인생은 나그네 길이다. 어릴 때는 그걸 몰랐어요. 젊은 사람들이 설교 잘 이해 못하듯이 그런데 나이 많은 사람은 자기 인생이 나그네 길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인간은 구름 같아라, 라는 말을 이해하는 이유가 여기 이 땅에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감지할 때나 나올 동의지요. 이 땅에 대해서 미련을 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마지막 아파하면서 죽음을 앞두고 운다는 것은 두 가지 감정이 다 있을 것 같아요. 뭐냐 하면, 그동안 내가 집착했던 것을 이것은 내 뜻이 아니고 외부의 뜻에 의해서 아깝지만 포기하는 가운데서 오는 섭섭함, 내가 쥐고 있는 내 자식이고, 내 부동산이고, 내 돈이고, 내 통장이고, 이 모든 것을 내 몸이 죽어버리면 그게 뭡니까?
내 게 안 되잖아요. 거기에 대한 섭섭함, 아쉬움, 그것에 대한 분통, 원통함이 있어가지고 이런 아픈 상황에 화가 나서 울 수가 있고 그런 게 태반이고요. 99%고 1%가 뭐냐 하면, 헛된 것에 너무 미련을 두고 살았다는 자기반성용, 그런데 그 1% 기대하지 마세요. 반성용으로 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엉엉 울었다는 말은 반성하기 보다는 원통해서 분통해서 우는 경우가 더 많지요. 은혜 받아서 우는 건 아니고.
이 율법의 주 내용은 레위기에 있다고 제가 이야기했지요. 레위기의 내용은 출애굽기에서 전체적으로 언급돼 있고 그 내용이 본격적으로 레위기에서 들어갑니다. 레위기는 제사에 관한 제사법이 주어집니다. 그 다음에 민수기에 들어가면 이제는 그걸 이론에서 실천으로 옮기면서 그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그 레위 법을 실패하는 이유가 나오지요.
그러면 레위기에 보면 거기에 제사법만 있는 게 아니고 거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이 제사법에 관한 율법을 위반했을 때 벌칙도 같이 레위기에 나옵니다. 그 벌칙 내용이 굉장히 가혹해요. 정말 가혹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말고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는 아주 특이한 방식에 대해서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뭐냐 하면, 내가 가만히 있는데 누가 꿀 차를 준다고 합시다. 일단 고맙지요. 달콤하고 피로회복이 되니까. “꿀 차 줄게.” “일단, 고맙습니다.” 하지요. 그런데 꿀 차 줄 때 한 방울도 만약에 흘리면 너는 니 목숨과 니 영혼은 내가 가지고 간다. 이러면 우리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아이고, 그럴 것 같으면 꿀 차주지 마소.” 우리는 꿀 차 사양합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거절하겠지요. 왜냐 하면, 벌칙이 너무 가혹할 때는 이러한 우리에 대한 이익보다도 벌칙이 가혹할 때는 우리는 차라리 상대 안하는 게 더 낫지요. 이 세상에서는.
그런데 주님께서는 특히 이스라엘한테는 이런 꿀 차를 줘요. 이걸 지키면 복을 받는다. 굉장히 고맙지요. 그런데 지키지 못했을 때는 벌칙이 너무 가혹해요. 그래서 아까 다시 해봅시다. 이 땅에 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어긋난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뜻이 뭐냐 하면, 내가 요구하지 않은 사항을 일방적으로 내 터전에다가 주의 뜻을 내 허락도 없이 나한테 내가 주인인데 이 주인장 허락도 없이 나를 하나의 어떤 장판으로 사용해가지고 아주 펼쳐버린다는 겁니다. 누구 허락도 없이? 내 허락도 없이 하나님의 뜻을 펼쳐버리는 거예요.
잘하면 복주고 못하면 가혹한 징벌이 오고, 라는 그 내용이 나를 마치 어떤 넓은 장바닥처럼 사용해가지고, 영양고추 말릴 때 보통 어떻게 합니까? 뭔가 펴놓고 고추를 말리잖아요. 우리 자신을 이렇게 널다랗게 펼치는 것으로 만들어 놓고 주님께서 일방적인 뜻을 심어놓는 거예요.
우리가 요구한 게 아닙니다. “주여, 이런 걸 요구한 게 아닙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이거 니가 원해서 주는 거 아니야. 니는 내가 주는 대로 먹어야 돼! 어쩔 수 없어.” 이게 이스라엘이에요. 이게. 이게 성도에요. 성도는 본인의 원하는 것을 자기가 취사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그냥 들이닥치면 그 하나님의 뜻을 보관해야 돼요. 지켜야 돼요. 만약에 어떤 중소기업이 와서 미안하다는 소리도 없이 “내가 만든 물건인데 지금 재고가 남았으니까 이 재고를 당신의 집을 창고로 삼아서 일방적으로 여기다가 안치시키겠습니다.” 하면 우리가 “누구 마음대로? 누구 마음대로.” 우리는 굉장히 화내지요.
주께서는 우리의 허락도 없이 자신의 물건을 우리에게다가 창고로 삼아가지고 들여놔버렸어요. 그리고 제대로 보관 못하면 합당한 영광을 못 돌리면 그것은 책임은 우리한테 돌리겠다는 겁니다. 너무나 터무니없는 조폭 같아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잖아요. 감히 우리 허락도 없이. 우리하고 의논도 없이. 우리하고 좋은 대화도 없이 사전에 통보도 없이 이렇게 들이닥치면 우리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죽여 버리겠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사건이에요.
십자가사건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주께서 일방적으로 들이닥친 그 뜻에 대해서 우리가 호응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왜 호응하지 않았을까요? 우리 안에 뭐가 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 나 자신을 지키는 다른 규칙과 법칙이 이미 자리 잡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육이라는 거예요. 그게 육이에요.
그러면 히브리서9장 다시 해봅시다. 율법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 허락도 없이 들이닥치는 주님의 일방적인 뜻이고 그 뜻이 우리가 이미 기존에 갖고 있는 모든 일은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 법칙과 대충돌을 의도적으로 유발하기 위해서 주입된 것이 율법이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정리하시면 되겠습니다. 이게 당시 이론이 아니고 이 땅 자체를 광야로 변질시켜서 그걸 실천에 옮기도록 하지요.
자, 그렇다면 광야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다시 한 번 물어봅시다. 자, 우리는 정착지를 원합니까? 광야를 원합니까? 어느 쪽입니까? 우리는 정착지를 원하지요. 이제 이사 그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살다가 또 세종시가고 그러지 말고 그만 내 집 마련해가지고 주택부금도 다 넣어가지고 이제는 나라도 못 나오도록 정착했으면 좋겠지요.
정착하고 싶은 나의 법에 광야에 적합한 율법이 치고 들어오는 거예요. 히브리서9장의 내용이 치고 들어오는 거죠. 지킬 수가 없지요. 왜 지킬 수가 없는가, 우리는 항상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여기에 정착 또는 정주, 정주라는 말은 안정되게 주거한다는 뜻이에요. 정주의 반대말은 정유거든요. 왔다가 잠시 오라이! 하고 떠나버리는 거예요. 정류장이에요. 정류장. 잠시 머물다 가는 거죠. 정주는 잠시가 아니고 영영 확정된 장소죠. 그런데 이 확정된 장소가 창세기3장에서 보면 이게 저주받은 장소에요. 이게 아담이 쫓겨난 장소에요.
그래서 지금부터 이야기할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은 왜 저주 받은 장소에 가려고 하는가, 이유가 뭐냐 인간은 본래의 자기 모습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체가 가짜에요. 가짜 이야기는 지난주 낮 설교에서 했잖아요. 인간은 곧 가짜라고. 인간은 가짜에요. 가짜만 있어요. 가짜 중에서 가장 진짜 같은 모델이 되겠지만 진짜는 아닌. 진짜 같은. 진짜인 듯 가짜 아닌 듯 같은 가짜. 가짜인데 유사 진짜 같은 가짜를 인간들은 자신의 삶의 모델로 삼아요.
사람들이 교회 오게 되면 제일 먼저 찾는 게 뭐냐, 이 교회에서 가장 신앙인 다운 모델이 누구지? 찾지요. 이게 가짜 찾는 거예요. 찾아서 뭐할 건데? 따라 흉내 내려고. 모방하려고. 목사들이 이제 그걸 자기가 진짜 모델 행세를 하지요. 그 모델 행세하면서 동반해서 뭐냐 하면, 갑질하려고. 을이 아니고 갑. 갑질하지요. 자기가 칼기 부사장도 아닌데. 대한항공 부사장 노릇하려고 하고. 거기에 굴복해야 저 사람 말 듣기 싫지만 저 사람 말 안 들으면 혹시 내가 탈락할 수가 있다는 그런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본인들이 그걸 요구했던 거예요. 모델을 찾은 게 문제에요.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는 걸 믿어야 되는데 보이는 어떤 인간을 모델 삼아서 그게 자기의 믿음의 내용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이 어떤 모양이 있습니까? 율법은 명령과 지시로 되어있지 모양이 없잖아요. 그거 보세요. 그렇잖아요? 지시와 명령을 따르지 율법이 와서 뭘 만들라는 것이 없잖아요. 율법이 하나님을 이렇게 만들라는 말이 없지요. 언약궤 만들라, 하는 이것은 만드는 사람 따로 있어요. 성신 받은 사람들이 만들어요. 일반 사람들은 만들지도 않아요. 만들 자격도 없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반 백성들이 뭘 만들었어요? 만들긴 뭘 만들어요? 금송아지 만들어서 개판 깨졌잖아요.
서울에 가면 영동교 있잖아요. 비 내리는 영동교. 영동교의 영동의 뜻이 뭐냐 하면, 영등포 동쪽이라서 영동교에요. 그거 안다고 구원받습니까? 교회에서 뭘 만들고 교회에서 뭘 하면 구원받는 거예요? 교회 만들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교회 키우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왜 구원도 관계없는데 왜 거기에 몰두합니까? 교회가 눈에 보이거든요. 내 교회가 눈에 보이거든요. 스탠드글라스가 눈에 보이고 피아노 보이고 파이프오르간 보이고 교인들 웅성, 웅성 눈에 보이고 헌금액수가 눈에 보이니까 그런 거예요.
가짜가 가짜티를 내고 있는 겁니다. 가짜끼리 모여서 가짜티를 내면 눈에 보이는 그런 것들이 주의 역사다, 주의 기적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식이 잘되고 출세하고 이게 주의 뜻이 아니에요. 그 자식이 주의 복음을 이해하고 말씀을 이해하는 그게 기적이에요. 주님이 살아계셔서 내 뜻과 충돌하면서 내 뜻을 꺾어버린다는 것을 이해하는 자식, 그게 기적입니다.
만약에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버린다면 내 뜻이 모여서 눈에 보이는 하나의 실적이 나와 버려요. 그럼 그 실적이 자기한테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사람의 모든 실적은 그 전에 뭐냐, 그 사람의 기대치가 있기 때문에 실적이 나온 거거든요. 기대치가 있기 때문에.
경상도 남쪽에 남해가 있어요. 거기는 눈이 잘 안와요. 그런데 그 때 눈이 오게 되면 무슨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치가 있어요. 눈이 오게 되면 만약에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난다든지 청춘 남녀한테 그런 게 있을 수 있잖아요. 아~ 내가 눈이 오면 사과나무 밑에 숨긴 캡슐을 열어가지고 내가 눈이 오는 날 같이 만나서, 10년 후 눈 오는 날 그날에 우리 여기서 만나자, 동창들이 보통 10년 후 우리가 무엇이 되어 만나리, 그런 비슷하게 해가지고 그런 게임하잖아요. 타임캡슐 만들어 넣어 놓고 10년 후에 만나자. 만나자 하고 보통 잘 안 나와요. 성공한 사람은 나오고 실패한 사람은 잘 안 나와요. 폼 낼 거 있으면 나오고 없으면 잘 안 나와요.
어떤 귀에 꽃을 꽂은 미친 여자가 남해에 눈이 온다는 거예요. 남해에는 거의 20년이 되어도 눈이 안 왔어요. 그런데 눈이 왔어요. 오니까 철수와 만나는 그런 장면이 있어요. 옛날에 한 예슬 나오는 드라마가 있어요. 사람이 기대치를 하는 이유가 그 기대치가 될 때, 하나님의 뜻이라고 간주해버리면 바로 마귀가 그렇게 대범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자기는 하나님의 사람 맞는 걸로 확정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마태복음20장에서 주님의 기도가 뭐냐 하면, 반드시 주님의 기도는 니가 기대한 건 필요한 건 주께서 주시지를 않아요. 하나님의 뜻은 항상 우리의 기대를 비켜가는 쪽으로 일하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정주하지 않고 정착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뭔가 자꾸 미련두지 않고 이 땅에서 뒤돌아보지 않고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지 않고 하늘나라만, 그 나라 의만 추구하도록 그렇게 유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잖아요. 환영받았지요. 다윗은 만만이고 사울은 천천이고. 그 때부터 소년 다윗의 인생이 어떻게 됐습니까? 평탄했습니까? 꼬였습니까? 이것은 이유도 모르는 밉상과 미움을 받아서 정치적인 망명길에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다윗을 사랑했지만 그 사울 왕이 다윗을 자기 가진 모든 것을 망치게 하는 라이벌로 여긴다면 그 때부터 다윗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 되어버려요. 사울 왕한테는. 이유 없이 미운 거예요. 악신 들린 거예요.
나는 저 여자만 불행하다면 나는 이제 소원 없다. 드라마에 보면 그런 내용들이 많아요. 무조건 며느리를 압박해야 시어머니가 행복해져요. 그런데 이 드라마가 못된 시어머니라고요?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거기에 아주 친한 친구가 나와요. 친한 친구를 또 이용해 먹지요. 글쎄요. 친한 친구? 내 뜻에 부합될 경우에만 내 기대치의 실적에 이용가치만 있을 때만 친한 친구가 되는 겁니다.
만약에 그 친한 친구가 너무 너무 잘됐다 보세요. 더 이상 친구가 아니고 평생의 웬수가 됩니다. 니가 있으면 나는 자동적으로 불행해져요. 친구의 행복이 나의 불행이 된다니까요. 친구가 잘되면 나는 아무 변동이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불행한 삶이 되어버립니다. 남편이 죽었다. 그날부터 남편이 있는 여자들 다 미워요. 착한 신사임당? 착한 신사임당 없어요. 착한 여자, 착한 남자 없어요.
히브리서9장에서 죽 내려가는데 죽 내려가는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뜻을 붕괴시키는 내용들이 율법에 나와 있습니다.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되어있지요. 성소란 말은 한자 그대로 하면 거룩한 장소지요. 거룩한 장소. 이걸 제가 처음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옛 땅은 날아가고 새 땅과 교체할 때, 그 새 땅이 우리가 그냥 살기만하는 땅이라고 듬뿍 들어갈 수 없고 그 땅을 만드는데 그 땅을 만드는 근원이 있어요. 본래적인 게 있어요.
그게 뭐냐, 거룩한 거죠. 그러면 거룩한 땅을 개척하고 거룩한 율법이 이스라엘을 찾아왔다는 말은 인간들은 본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알아요? 몰라요? 결국 모르고 있다는 것을 들통 내는 작용을 하지요. 무슨 뜻이냐 하면, 거룩한 장소가 임하는 순간, 이 장소 이스라엘이 생각했던 땅의 개념은 더러운 장소가 되지요. 졸지에.
그러면 거룩한 장소로 바뀌겠습니까? 아니면 더럽다하던 간에 내가 정들었던 땅을 유지하려고 애쓰겠습니까? 아니면 거룩한 장소를 얼른 받아들이기를 원하겠습니까? 유지하려고 하겠지요. 유지하면서 거룩한 땅은 땅대로 유지하면서 그러니까 옛날의 내가 정들었던 땅을 유지하면서 거룩한 장소를 이렇게 같이 하게 되면 내 땅이 졸지에 거룩한 장소로 변화될 것을 기대하겠지요. 그게 잘못이었던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현재 이 땅은 누가 갖고 있다? 내가 갖고 있다. 내가 갖고 있는 이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갖고 있는 것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추가적으로 거룩한 것이 오게 되면 나는 졸지에 거룩한 천국에 가는 사람으로 변한다, 라는 즐거움이 생기겠지요. 그것이 바로 그 자체가 인간의 육적인 방식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그 때 남자만 해도 40만이 왔다. 자, 물어봅시다. 약간 깊이 있는 거니까 물어봅시다. 40만 되는 그 사람들이 자기를 더럽게 봅니까? 거룩하게 봅니까? 자기를 거룩하게 보지요. 만약에 더럽게 볼 것 같으면 애굽인들이 자기를 학대해도 감수할 거예요. “맞아요. 저 같은 나쁜 인간들은 맞아도 싸요.” 이렇게 될 텐데 그런 인간 없어요. “왜 때리십니까?” 사람이 누가 나를 건드리면 이유도 없이 무조건 기분 나빠요. 나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이미 인간의 진리로 장착되어 있어요. 진리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옳은 일이잖아요. 옳은 일.
사람은 옳은 일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안 건드리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옳은 일로 이미 확립이 되어있어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잔소리하지 마래이.” 남편들이 흔히 아내보고 하는 말이잖아요. “제발 잔소리 좀 하지 마라. 나도 안다.” 그럼 부인이 “안다는 인간이 똑같은 짓을 반복하느냐, 그래 전에도 안다고 해놓고 또 사고 쳤잖아. 내가 두 번 속지 세 번 속는 줄 아나.” 이런 식으로 나오지요. 그럼 또 “아침부터 또 잔소리.” 이러지요. “잔소리로 듣지 말고 내 말이 틀렸느냐, 맞느냐가 더 중요한 게 아니야?” “그래, 니 말이 맞는데 잔소리 좀 하지 마라. 아무리 좋은 소리도 잔소리하면 일부러 하기 싫다.” 또 이렇게 나오면서 오기를 부리잖아요. 그럼 또 여자가 “못 살아, 못 살아.” “그럼 살지 말지 뭐” “그럼 이혼할까?” “그 말은 아니고.” 남자는 이혼하면 제일 겁내.
제발 날 좀 건드리지 마라. 나는 선악과 따먹었다. 나는 나다. 이것은 여자고 남자고 관계없어요. 모든 인간들이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우상인가를 본래의 지 모습을 몰라요.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 없어요. 인간은. 인간은 자기가 알고 있는 거울이 있지만, 내가 모르는 것까지 비춰주는 거울을 인간은 발명하지를 못합니다. 말씀에 비춰야 되는데. 말씀에 비춰봐야 소용없어요. 왜? 말씀을 비춰봐야 말씀을 또 오해해요. 지가 아는 것만 골라서 해석하고.
거룩한 것이 왔다는 말은 졸지에 인간은 거룩한 것을 감당하리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실천적으로는 감당 못합니다. 그 정도로 인간은 거룩하지 않아요. 거룩하지 않는 곳에 거룩이 여기에 잠입했다는 것은 비 거룩함을 드러내고 다 깨부수면서, 첫 번째는 율법이 실제로 부수는 것 첫 번째 기능, 두 번째는 새로 세우는 것. 이 두 가지 기능이에요. 부수는 것과 새로 세우는 것이에요. 부숴야 새로 세울 것 아닙니까. 율법의 기능은 부수는 겁니다. 그리고 새로 세워지는 겁니다.
새로 세워진다니까요. 새, New, 새로우니까 졸지에 율법 때문에 인간이 갖고 있던 것은 갔다가 버려도 상관이 없는 옛것이 되어버렸어요. 예수님도 그런 이야기하셨지요. 포도주를 담을 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 게 옳으냐, 헌 부대에 담는 게 옳으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 게 옳지요.
그러면 인간들이 갖고 있는 헌 부대는 이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지요. 그래서 본래의 우리의 모습은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요. 영어로 하면, 낫싱 Nothing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게 그게 바로 주께서 주신 기적이고 축복입니다. 사람이 돈을 얻는다고 행복이 아니고 본인이 아무것도 아닌 그 짧은 순간이 와요. 그러면 날씨가 추워도 고맙고 더워도 고맙고 아파도 고맙고 건강해도 고맙고. 왜, 원래부터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무것도 아니니까. 교회가 증거 해야 될 그게 진리에요.
진리가 뭐냐 하면,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죠.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추상적이고 이게 또 종교적이 될 수 있는데 구체적인 인물을 보고서 아무것도 아니어야 돼요. 누구냐, 예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어야 하는 게 복음입니다. 복음은 주님이 나타나서 아무것도 아니고 정말 뭔가 의미 있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다. 왜, 그 분이 주님이시니까. 온 우주의 주님은 주님이 나타났을 때, 졸지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주님을 보게 하셨으니까.
주님을 보게 한 게 이게 새로운 면이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다시 이야기하면 인간은 자기 건드리면 다 싫어요. “매일 건드려도 괜찮습니다. 주님만 계시면 됩니다.” 라고 달려든다면 이건 그야말로 새로운 NEW, 새로운 거예요.
주님이 하신 일이 바로 우리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들추어내고 새로운 인간으로 만드는 겁니다. 대표적인 예가 뭐냐, 닭 우는 거예요. 닭이 울었잖아요. 만약에 베드로가 물리학 교수라면 닭이 몇 데시벨이 나올까, 그거 측정할 거예요. 측정해서 뭐하는데? 측정해서 논문 발표하려고? 논문 발표해서 뭐할 건데요? 논문 발표했다고 노벨상 받겠지. 노벨상 받아서 뭐하는데? 노벨상 받으면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상금 받아서 뭐하는데? 출세하겠지. 출세해서 뭐하는데? 출세해서 죽지 뭐.
베드로는 물론 닭울음소리를 측정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닭울음소리 앞에서 베드로는 닭이 뭐냐가 아니라 본래의 자기 자신을 알게 되었어요. 내가 말씀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던 사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보다 더 깊이 내려갔지요. “나는 바로 죄인입니다.” 옛날 자기가 예수님 앞에서 했던 것, 그물을 오른편으로 던지라 할 때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 한 그 말, 그것이 하나의 이론이었다면 실제로 자기가 내뱉은 그 말, 내가 죄인입니다. 라는 그 말에 부합되도록 주께서 말씀으로 “내가 죄인 맞습니다.” 하는 그것을 체험 화시키고 실제로 그걸 느끼게 만든 조치가 주님 쪽에서부터 실시되어왔다는 겁니다. 그동안.
그럼 어떻게 그냥 닭만 울었어요? 아니에요. 베드로로 하여금 닭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내가 자신만만하게 주님을 따라다닙니다. 라고 스스로 자기한테 신뢰감을 가질만한 사항들을 3년 동안 가져왔지요. 물위를 걸었고, 여러 가지 기적도 행했으니까 이만하면 이제는 주께서 추가적인 조치 없이도 내 힘으로도 주님을 위하여 주의 편에 서서 천국 가는 백성답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자부했지요.
그 자부한 양만큼 자기가 죄인 될 줄이야 생각도 못했지요. 그 모든 것을 자부했지만, 사실은 그게 Nothing, 아무것도 아닌 내용들로 채워졌다는 사실을 베드로가 그걸 닭 울기 전에는 몰랐지요. 실컷 주님만 사랑한다고 이야기했고 주님 일한다는 그 모든 것이 모아져서 “나는 주님을 모릅니다.” 하는 그런 결론에 도달되게 했던 지난 3년의 세월이었습니다.
말씀 앞에서 인간은 자기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버리지요. 그럼 이 율법이라는 제사법이 나오는 휘장, 그 다음에 금향로, 사면이 금으로 싼 언약궤, 만나가 들어있는 금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언약의 비석, 속죄소를 덮는 그룹, 이 모든 것들의 내용은 목적은 뭘까요? 인간으로 하여금 본래의 죄를 들추어내는 기능이지요. 그렇다면 이 방금 언급한 거룩한 것이 그냥 아름다워서 눈부셔서 거룩한 겁니까? 뭐가 묻어서 거룩한 겁니까? 뭐가 묻지요? 피가 묻지요.
그 피는 정결한 흠 없는 제물의 피가 묻지요. 이 지상에서의 거룩은 뭐냐, 호화찬란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귀가 세 번째 시험할 때 세상 부귀영화 보여주면서 “예수여, 나한테 절하면 이 모든 걸 가지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했지만, 정작 이 땅의 하나님의 거룩은 뭐냐, 예수님의 손자국과 창 자국을 보면서 거기에 피가 흘렀던 그 장소를 보는 겁니다. 그 피가 주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살점과 피가 이게 바로 거룩함입니다. 이게 거룩한 거예요. 그걸 안다면 그게 바로 거룩한 사람, 바로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바로 십자가 복음만 피만 증거 해야 돼요. 딴 거 증거 하면 안 됩니다. 그건 참된 교회가 아니에요.
인간의 본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커다란 전신거울을 준비한 게 아니고 거울을 봐야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그거밖에 더 나오겠어요. 백설 공주를 괴롭힌 그 계모밖에 더 되겠습니까? 우리도 매일 하잖아요. 거울을 보잖아요. 어떤 사형수는 사형을 당하기 직전에 “머리 좀 만지고요.” 사형장에 끌려가면서도 머리 만지고. 비가 와서 물웅덩이가 있으니까 그냥 가면 될 걸 가지고 퐁당 뛰어가지고 바지 안 젖고 인간은 곧 죽어도 10분 뒤에 죽어도 챙길 건 챙기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은 미래에서 자기를 바라볼 줄 모르고 누적된 과거의 습관이 현재 자기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현재의 자기를. 교회가 이래야 되고 믿는 가정이 이래야 된다. 진리 같지요? 진리 아닙니다. 과거의 습관이 지금 그런 말을 내뱉은 겁니다.
미래에서 오신 분이 성령인데, 창세기할 때 그걸 시간의 역전이라 했지요. 대전강의 할 때. 미래에서 이렇게 오게 되면 나는 뭘 해도 주님 앞에서는 십자가 앞에서 낫싱 Nothing이 되는 겁니다. 미래에서 온다는 것이 항상 닭소리 듣고 사는 거예요. 십자가의 닭소리 듣고 사는 거죠. 닭이 운다는 것은 곧 십자가의 사건을 염두에 두고 미리 앞당겨서 닭이 우는 거예요. “베드로야, 니 뜻하고 십자가진 내 뜻하고 이렇게 차이나는 거다. 니는 바로 내 면전에서 부정하고 있지. 그게 니 본래의 모습이야. 그리고 니 본래의 모습은 니가 손댈 수 없어.” 우리 손으로 고쳐지지를 않습니다. 세상에 내 힘으로 안되는 게, 마지막 안되는 게 바로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죄를 알지도 못하고 알아봤자 죄에서 씻음 받는 것도 자기 힘으로 되지를 않아요. 영동교 뜻이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영등포 동쪽이지요. 그거 안다고 해서 죄가 씻어집니까? 비 내리는 영동교~ 그 노래 부른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지요? 영동교가 영등포 동쪽이라는 걸 안다고 아무 소용없듯이 교회에서 운영하는 게 그게 구원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재직회는 3분의 1이상이 되어야 그거 아는 게 무슨 구원이 되겠어요? 세례 받을 때는 물 이만큼 적셔야 되고 그거 아는 게. 앞자리 앉고 뒷자리 앉으면 안 되고. 주일날은 양복 말끔하게 입고 오셔야 되고. 슬리퍼 신고 오면 안 되고. 이런 게 무슨 구원에 관계가 되느냐 말이죠. 이런 쪽으로 설교를 하니까 옷차림들이 아주 가관이에요. 그동안 가다마 입고 온다고, 그동안 정장 입고 오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았어요. 그것도 가짜로.
주님 보시기에가 아니라 남들 보기에 얼마나 자기 잘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정숙한 신사임당으로 오신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이제는 완전히 옷차림이 산에 등산할 때 옷차림으로 아주 편하게 오셔요. 그러나 바짝 옷차림, 머리 신경 쓸 때는 언제인가 하면, 상견례 할 때. 주님하고는 상견례 안하는 모양이라. 서로 안다는 이 말이지요.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에는 상견례도 할 필요가 없다고. 사도 만날 때는 그 때는 바짝 정신차려가지고 명품가방 들고 괜히 흔들어가지고 루비똥이 왜 이리 흠이 나지 하면서.
인간의 거룩은 마귀가 조작한 겁니다. 아까 제가 행할 때는 뭐라고 했어요. 인간은 모델을 택하지요. 그 모델 할 때 그 모델이 어떤 겁니까? 바로 돈 되고 인기되고 영광 얻는 사람 아닙니까. 이 마귀가 첫 번째, 돌이 떡 되고 두 번째 인기 있으면 스타 되고 스타 되면 세 번째가 뭐냐, 스타 되면 세상의 모든 영광은 다 쥔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늘의 아버지께 온 게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온 거예요.
요한일서 2장15,16절에 보면 세상으로부터 왔다고 했거든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그러면 세상이라는 것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다져진 곳이 바로 세상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그 세상에서는 온 게 아니다. 그러면 진정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면 어떤 내용이 섞일 수가 없어요? 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가 그런 질이 그런 내용이 포함이 안 된 그것이 사랑이지요. 그렇잖아요.
그럼 기도할 때 뭘 기도해야 돼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는 일체 담기지 않는 것만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를 해야 되겠지요. “아주 우리 애 공부 잘하게 하옵소서.” “공부 잘해서 뭐할 건데?” “공부를 잘하면 세상의 영광을 얻는데.” “영광 얻어서 뭐할 건데?” “누구 좋은데?” 즈 엄마가 좋지요. 결국 지 좋아라고 기도한 거예요. 그런 것은 기도하지 마세요. 이미 무엇이 필요한가는 다 주십니다. 안 준다는 게 아니에요. 안 준다는 게 아니고. 기도해야 얻지. 잘못된 말이에요. 기도 안 해도 주십니다. 누구 피 때문에 왔느냐를 보는 거예요.
사르밧 과부 알잖아요. 엘리야가 참기름, 밀가루 몽땅 야박하게도 죽으려고 먹는 마지막 만찬을 뺏어 먹잖아요. 그 모자간에 가뭄 들어서 남편도 없어요. 모자간에 굶어죽으려고 마지막 털어먹는 그 음식마저 그것을 새치기해가지고 그걸 뺏어 먹잖아요. 벼룩의 간을 내먹지. 그걸 뺏어가지고 지가 먹어버렸다 말이죠. 마지막 케이크 먹고 죽으려고 했는데 죽는 것도 지 맘대로 못 죽어. 굶어죽으려 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밀가루가 가득하고 참기름이 가득했을 때, 그 참기름 어디서 나온 겁니까? 그거 누가 준 거죠? 바로 참기름, 밀가루는 무슨 뜻이냐 하면, 그전부터 가뭄 들기 전부터 그 사르밧과부 집에 있던 그 기름이 사실은 너희들의 노동으로 얻은 게 아니고 엘리야를 보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동안 참기름, 들기름, 아주까리기름, 해바라기 기름 주신 거예요. 밀가루 준 거예요. 그걸 잊어버리는 이스라엘에 가뭄 드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위반하게 되면 가뭄 드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위반하게 되면 가뭄 들게 되어있어요.
옛날 풍족할 때, 너희들은 풍족한 것만 생각했지 누구의 희생 때문에 왔다는 것은 잊어버렸잖아요. 그걸 다시 가뭄으로 되돌리니까 엘리야가 아니면 못 삽니다. 다시 말해서 엘리야를 보내신 여호와 아니면 못 삽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동안 여호와의 은혜로 살았지 우리의 애씀과 노동으로 산 게 아닙니다. 라는 것을 그들이 사르밧과부가 알아야 돼요.
그게 바로 성소의 거룩한 곳이에요. 거룩한 곳은 낯선 곳이고 이질적인 곳이고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그런 내용이 펼쳐지는 겁니다. 펼쳐지는 거예요. 거룩한 공간으로부터 펼쳐지는 거예요. 인간은 본래의 인간을 잘 모르지요. 인간은 자기의 본래의 모습을 모릅니다. 본래의 모습으로도 사람들은 잘 살아요. 왜 그럴까요? 습관 때문에 그렇겠지요. 어떤 습관? 기존의 땅에 정착하고자 하는 습관대로만 그냥 사는 거예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고 언급했건만, 인간은 일단 떡 먹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배부르면 말씀을 들을 기운이 난다고 이리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은 말씀에서 본래가 나와야 되는데 자신의 진면목을 떡에서 찾아요. 많은 돈에서 우리는 진짜 내 모습을 거기서 규정하려고 하고 구축하려고 하고 애를 쓴다 말이죠.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주께서는 그걸 바꾸려면 이 땅에서의 거룩은 참혹하고 처참한 모습으로 와야 되지요. 주님께서 처참하고 참혹하게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신분은 달라졌어요? 안 달라졌어요?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 맞잖아요. 그러면 됐잖아요. 주께서 이 땅에 고생한다고 독생자 아닌 분입니까? 아닌 분이 되는 거예요? 아버지의 품속의 독생자 이건 마찬가지잖아요. 바로 그런 입장이 되게 만들겠다는 거예요. 니가 가난해도 환란과 핍박과 곤고와 위협이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조치를 내리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그 말씀을 통해서 그 내용이 솟아져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모델을 찾아라,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모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이 추운 날 어떻게 살았는가 보자는 겁니다. 고생한다고 지옥자식 아니거든요. 예수님이. 환란 핍박에다가 심지어 사형당한다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분이 아니에요. 버림받았다가 다시 주께서 부활하신 분이잖아요.
참, 우리가 도대체 누구한테 속은 겁니까? 그동안. 내가 나를 속였지요. 내가. 지금도 속이고 있고 계속 속이고 있지요. 그러면 속이지 않는 분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말씀, 율법, 하나님의 언약, 이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속이지 않고 직구로, 바로 우리에게 바로 이야기합니다.
의는 없나니 애초부터 하나도 없었다. 너는 죄인이었다. 그게 본래의 니 모습니다.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