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24강-애매함 14121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4. 29. 14:30
2014-12-13 00:33:29조회 : 1316         
애매함 141212이름 : 이근호 (IP:119.18.9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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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20141212a-히9장1절(애매함) -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9장해봅시다. 1절에 ‘첫 언약에도’ 이렇게 되어있지요. 첫 언약이 뭐냐 하면, 율법입니다. 그러면 율법이라는 핵심이 어디에 들어 있느냐 레위기에 들어있습니다. 레위기. 그러면 레위기 내용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출애굽의 내용이 좀 더 제사법 중심으로 자세하게 이야기한 것이 레위기가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 다음에 레위기가 되기 때문에. 

민수기 내용은 뭐냐, 요번에 수련회에서 민수기 할 건데, 민수기 내용이 뭐냐 하면, 출애굽기와 레위기가 하나의 이론 이라면 말씀은 이론에서 머물면 안 되잖아요. 실천하잖아요. 실천을 하는데 고정 적에서 가만히 있어서 실천하는 것이 아니고 무빙, 움직이면서 실천해요. 움직이면서. 어디서 움직이면서 실천하느냐, 광야에서 움직이면서 실천하는 겁니다. 광야. 광야니까 뭔가 땅하고, 땅이라는 개념하고 광야하고 개념하고 뉘앙스가 다른 거 같아요. 광야는 지나가는 느낌이 들고 땅이라 하는 것은 정착하는 느낌이 들지요. 

그래서 땅에서 나와서 광야를 통해서 영원한 땅으로 가는 것. 그렇다면 광야라 하는 것은 기존의 땅을 부정하고 새롭게 주께서 마련한 땅을 맞이할 인간으로 바꿔치기 하는 장소가 광야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광야에는 두 가지 요소가 다 들어있어야 되겠지요. 하나의 겹치는 부분이니까. 옛 땅과 새 땅이 겹치는 부분이니까. 

이 광야 자체가 땅으로 묘사된 오늘날 성도의 마음 상태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어요. 육과 영이 함께 있습니다. 육이 없어지고 영만 있는 게 아니고 그건 천사나 그렇고요. 육과 영이 함께 있지요. 아브라함이 맨 날 하나님 앞에 티격태격 겪고 야곱이 맨 날 하나님 속이고 사실은 아버지 속은 게 하나님 속인 거예요. 하나님과 싸우고. 이삭도 자기 원하는 아들에게만 몰아주고 사랑을 몰표 보내고 그러한 것. 그리고 정작 아들한테 속임을 당해서 축복해야 될 사람에게 지 뜻대로 안되게 하는 것. 사람이 자기 뜻대로 안 된다는 것. 자기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이 굉장히 고맙고 감사해야 돼요. 

뜻대로 안될 때, ‘왜 내 뜻이 안 되었을까?’ ‘내 뜻은 왜 안 될까?’ 하는 생각은 그러면 내 뜻을 망치는 그 뜻이 무엇이냐, 내 뜻을 망치게 하는 그 뜻이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주님의 뜻이지요. 그렇다면 주님의 뜻과 내 뜻은 항상 사이좋게 가는 것이 아니고 충돌되는 양상을 보이지요. 충돌되는 양상. 그렇지요? 

그런데 그 충돌되는 것이 어디서냐, 바로 옛 땅에서 벗어나야 되고 새 땅에 들어가야 될 광야 같은 세상이라는 환경을 통해서 내 뜻과 아버지 뜻이 서로 만남도 성사되고 충돌도 성사되고 그러면서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달라지게 하는 거예요. 

제가 미국 가니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했지요. “까이는 재미가 멋있습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그 교회에 어떤 전도사님이 <왔다! 장보리>가 좋아가지고 예배마치고 잽싸게<왔다! 장보리>보러 갔다 말이죠. 그 이야기 듣고 예배에 관심 없고 예배에 있으면서도 <왔다! 장보리>에 관심이 있으니까 안 되지 않느냐, 라고 설교시간에 이야기했다 말이죠. 하고 나니까 당사자가 미안해가지고 제가 미안합니다. 하니까 “아이고 목사님 까이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데요. 그것도 공개적으로 까이는 재미가.” 내가 그 소리를 듣고 사랑을 많이 느꼈지요. 위로를 많이 받았지요. 

주님께서는 늘 이렇게 까는 거예요. 다시 하겠습니다. 오늘 히브리서9장인데 옛 언약에 관한 것. 옛 언약은 율법이죠. 율법은 어디에 필요한가 하면 광야에 필요합니다. 이론만이 아니고 실천에 옮기는 거죠. 율법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무슨 상황이 필요한가, 광야라는 상황이 필요합니다. 

광야라는 상황은 이렇게 정주, 정착하는 게 아니고 이동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흐르는 거죠. 영어로 Flow. 물결 흘러가듯이 흘러가는 겁니다. 최 희준이 불렀던 유명한 노래 있잖아요. 인생은 무슨 길이라 했습니까? 인생은 나그네길이죠. 1960년대 드라마로 알고 있는데 자기를 배신한 여자가 앞집의 부잣집 사모님으로 마나님으로 살고 있을 때, 뒷집의 하숙하는 어떤 남자가 와가지고 하숙하면서 그 여자에 대해서 복수하는 드라마입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라디오 연속극인데. 

인생은 나그네 길이다. 어릴 때는 그걸 몰랐어요. 젊은 사람들이 설교 잘 이해 못하듯이 그런데 나이 많은 사람은 자기 인생이 나그네 길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인간은 구름 같아라, 라는 말을 이해하는 이유가 여기 이 땅에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감지할 때나 나올 동의지요. 이 땅에 대해서 미련을 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마지막 아파하면서 죽음을 앞두고 운다는 것은 두 가지 감정이 다 있을 것 같아요. 뭐냐 하면, 그동안 내가 집착했던 것을 이것은 내 뜻이 아니고 외부의 뜻에 의해서 아깝지만 포기하는 가운데서 오는 섭섭함, 내가 쥐고 있는 내 자식이고, 내 부동산이고, 내 돈이고, 내 통장이고, 이 모든 것을 내 몸이 죽어버리면 그게 뭡니까? 

내 게 안 되잖아요. 거기에 대한 섭섭함, 아쉬움, 그것에 대한 분통, 원통함이 있어가지고 이런 아픈 상황에 화가 나서 울 수가 있고 그런 게 태반이고요. 99%고 1%가 뭐냐 하면, 헛된 것에 너무 미련을 두고 살았다는 자기반성용, 그런데 그 1% 기대하지 마세요. 반성용으로 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엉엉 울었다는 말은 반성하기 보다는 원통해서 분통해서 우는 경우가 더 많지요. 은혜 받아서 우는 건 아니고. 

이 율법의 주 내용은 레위기에 있다고 제가 이야기했지요. 레위기의 내용은 출애굽기에서 전체적으로 언급돼 있고 그 내용이 본격적으로 레위기에서 들어갑니다. 레위기는 제사에 관한 제사법이 주어집니다. 그 다음에 민수기에 들어가면 이제는 그걸 이론에서 실천으로 옮기면서 그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그 레위 법을 실패하는 이유가 나오지요. 

그러면 레위기에 보면 거기에 제사법만 있는 게 아니고 거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이 제사법에 관한 율법을 위반했을 때 벌칙도 같이 레위기에 나옵니다. 그 벌칙 내용이 굉장히 가혹해요. 정말 가혹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말고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는 아주 특이한 방식에 대해서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뭐냐 하면, 내가 가만히 있는데 누가 꿀 차를 준다고 합시다. 일단 고맙지요. 달콤하고 피로회복이 되니까. “꿀 차 줄게.” “일단, 고맙습니다.” 하지요. 그런데 꿀 차 줄 때 한 방울도 만약에 흘리면 너는 니 목숨과 니 영혼은 내가 가지고 간다. 이러면 우리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아이고, 그럴 것 같으면 꿀 차주지 마소.” 우리는 꿀 차 사양합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거절하겠지요. 왜냐 하면, 벌칙이 너무 가혹할 때는 이러한 우리에 대한 이익보다도 벌칙이 가혹할 때는 우리는 차라리 상대 안하는 게 더 낫지요. 이 세상에서는. 

그런데 주님께서는 특히 이스라엘한테는 이런 꿀 차를 줘요. 이걸 지키면 복을 받는다. 굉장히 고맙지요. 그런데 지키지 못했을 때는 벌칙이 너무 가혹해요. 그래서 아까 다시 해봅시다. 이 땅에 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어긋난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뜻이 뭐냐 하면, 내가 요구하지 않은 사항을 일방적으로 내 터전에다가 주의 뜻을 내 허락도 없이 나한테 내가 주인인데 이 주인장 허락도 없이 나를 하나의 어떤 장판으로 사용해가지고 아주 펼쳐버린다는 겁니다. 누구 허락도 없이? 내 허락도 없이 하나님의 뜻을 펼쳐버리는 거예요. 

잘하면 복주고 못하면 가혹한 징벌이 오고, 라는 그 내용이 나를 마치 어떤 넓은 장바닥처럼 사용해가지고, 영양고추 말릴 때 보통 어떻게 합니까? 뭔가 펴놓고 고추를 말리잖아요. 우리 자신을 이렇게 널다랗게 펼치는 것으로 만들어 놓고 주님께서 일방적인 뜻을 심어놓는 거예요. 

우리가 요구한 게 아닙니다. “주여, 이런 걸 요구한 게 아닙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이거 니가 원해서 주는 거 아니야. 니는 내가 주는 대로 먹어야 돼! 어쩔 수 없어.” 이게 이스라엘이에요. 이게. 이게 성도에요. 성도는 본인의 원하는 것을 자기가 취사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그냥 들이닥치면 그 하나님의 뜻을 보관해야 돼요. 지켜야 돼요. 만약에 어떤 중소기업이 와서 미안하다는 소리도 없이 “내가 만든 물건인데 지금 재고가 남았으니까 이 재고를 당신의 집을 창고로 삼아서 일방적으로 여기다가 안치시키겠습니다.” 하면 우리가 “누구 마음대로? 누구 마음대로.” 우리는 굉장히 화내지요. 

주께서는 우리의 허락도 없이 자신의 물건을 우리에게다가 창고로 삼아가지고 들여놔버렸어요. 그리고 제대로 보관 못하면 합당한 영광을 못 돌리면 그것은 책임은 우리한테 돌리겠다는 겁니다. 너무나 터무니없는 조폭 같아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잖아요. 감히 우리 허락도 없이. 우리하고 의논도 없이. 우리하고 좋은 대화도 없이 사전에 통보도 없이 이렇게 들이닥치면 우리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죽여 버리겠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사건이에요. 

십자가사건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주께서 일방적으로 들이닥친 그 뜻에 대해서 우리가 호응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왜 호응하지 않았을까요? 우리 안에 뭐가 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 나 자신을 지키는 다른 규칙과 법칙이 이미 자리 잡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육이라는 거예요. 그게 육이에요. 

그러면 히브리서9장 다시 해봅시다. 율법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 허락도 없이 들이닥치는 주님의 일방적인 뜻이고 그 뜻이 우리가 이미 기존에 갖고 있는 모든 일은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 법칙과 대충돌을 의도적으로 유발하기 위해서 주입된 것이 율법이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정리하시면 되겠습니다. 이게 당시 이론이 아니고 이 땅 자체를 광야로 변질시켜서 그걸 실천에 옮기도록 하지요. 

자, 그렇다면 광야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다시 한 번 물어봅시다. 자, 우리는 정착지를 원합니까? 광야를 원합니까? 어느 쪽입니까? 우리는 정착지를 원하지요. 이제 이사 그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살다가 또 세종시가고 그러지 말고 그만 내 집 마련해가지고 주택부금도 다 넣어가지고 이제는 나라도 못 나오도록 정착했으면 좋겠지요. 

정착하고 싶은 나의 법에 광야에 적합한 율법이 치고 들어오는 거예요. 히브리서9장의 내용이 치고 들어오는 거죠. 지킬 수가 없지요. 왜 지킬 수가 없는가, 우리는 항상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여기에 정착 또는 정주, 정주라는 말은 안정되게 주거한다는 뜻이에요. 정주의 반대말은 정유거든요. 왔다가 잠시 오라이! 하고 떠나버리는 거예요. 정류장이에요. 정류장. 잠시 머물다 가는 거죠. 정주는 잠시가 아니고 영영 확정된 장소죠. 그런데 이 확정된 장소가 창세기3장에서 보면 이게 저주받은 장소에요. 이게 아담이 쫓겨난 장소에요. 

그래서 지금부터 이야기할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은 왜 저주 받은 장소에 가려고 하는가, 이유가 뭐냐 인간은 본래의 자기 모습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체가 가짜에요. 가짜 이야기는 지난주 낮 설교에서 했잖아요. 인간은 곧 가짜라고. 인간은 가짜에요. 가짜만 있어요. 가짜 중에서 가장 진짜 같은 모델이 되겠지만 진짜는 아닌. 진짜 같은. 진짜인 듯 가짜 아닌 듯 같은 가짜. 가짜인데 유사 진짜 같은 가짜를 인간들은 자신의 삶의 모델로 삼아요. 

사람들이 교회 오게 되면 제일 먼저 찾는 게 뭐냐, 이 교회에서 가장 신앙인  다운 모델이 누구지? 찾지요. 이게 가짜 찾는 거예요. 찾아서 뭐할 건데? 따라 흉내 내려고. 모방하려고. 목사들이 이제 그걸 자기가 진짜 모델 행세를 하지요. 그 모델 행세하면서 동반해서 뭐냐 하면, 갑질하려고. 을이 아니고 갑. 갑질하지요. 자기가 칼기 부사장도 아닌데. 대한항공 부사장 노릇하려고 하고. 거기에 굴복해야 저 사람 말 듣기 싫지만 저 사람 말 안 들으면 혹시 내가 탈락할 수가 있다는 그런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본인들이 그걸 요구했던 거예요. 모델을 찾은 게 문제에요.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는 걸 믿어야 되는데 보이는 어떤 인간을 모델 삼아서 그게 자기의 믿음의 내용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이 어떤 모양이 있습니까? 율법은 명령과 지시로 되어있지 모양이 없잖아요. 그거 보세요. 그렇잖아요? 지시와 명령을 따르지 율법이 와서 뭘 만들라는 것이 없잖아요. 율법이 하나님을 이렇게 만들라는 말이 없지요. 언약궤 만들라, 하는 이것은 만드는 사람 따로 있어요. 성신 받은 사람들이 만들어요. 일반 사람들은 만들지도 않아요. 만들 자격도 없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반 백성들이 뭘 만들었어요? 만들긴 뭘 만들어요? 금송아지 만들어서 개판 깨졌잖아요. 

서울에 가면 영동교 있잖아요. 비 내리는 영동교. 영동교의 영동의 뜻이 뭐냐 하면, 영등포 동쪽이라서 영동교에요. 그거 안다고 구원받습니까? 교회에서 뭘 만들고 교회에서 뭘 하면 구원받는 거예요? 교회 만들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교회 키우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왜 구원도 관계없는데 왜 거기에 몰두합니까? 교회가 눈에 보이거든요. 내 교회가 눈에 보이거든요. 스탠드글라스가 눈에 보이고 피아노 보이고 파이프오르간 보이고 교인들 웅성, 웅성 눈에 보이고 헌금액수가 눈에 보이니까 그런 거예요. 

가짜가 가짜티를 내고 있는 겁니다. 가짜끼리 모여서 가짜티를 내면 눈에 보이는 그런 것들이 주의 역사다, 주의 기적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식이 잘되고 출세하고 이게 주의 뜻이 아니에요. 그 자식이 주의 복음을 이해하고 말씀을 이해하는 그게 기적이에요. 주님이 살아계셔서 내 뜻과 충돌하면서 내 뜻을 꺾어버린다는 것을 이해하는 자식, 그게 기적입니다. 

만약에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버린다면 내 뜻이 모여서 눈에 보이는 하나의 실적이 나와 버려요. 그럼 그 실적이 자기한테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사람의 모든 실적은 그 전에 뭐냐, 그 사람의 기대치가 있기 때문에 실적이 나온 거거든요. 기대치가 있기 때문에. 

경상도 남쪽에 남해가 있어요. 거기는 눈이 잘 안와요. 그런데 그 때 눈이 오게 되면 무슨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치가 있어요. 눈이 오게 되면 만약에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난다든지 청춘 남녀한테 그런 게 있을 수 있잖아요. 아~ 내가 눈이 오면 사과나무 밑에 숨긴 캡슐을 열어가지고 내가 눈이 오는 날 같이 만나서, 10년 후 눈 오는 날 그날에 우리 여기서 만나자, 동창들이 보통 10년 후 우리가 무엇이 되어 만나리, 그런 비슷하게 해가지고 그런 게임하잖아요. 타임캡슐 만들어 넣어 놓고 10년 후에 만나자. 만나자 하고 보통 잘 안 나와요. 성공한 사람은 나오고 실패한 사람은 잘 안 나와요. 폼 낼 거 있으면 나오고 없으면 잘 안 나와요. 

어떤 귀에 꽃을 꽂은 미친 여자가 남해에 눈이 온다는 거예요. 남해에는 거의 20년이 되어도 눈이 안 왔어요. 그런데 눈이 왔어요. 오니까 철수와 만나는 그런 장면이 있어요. 옛날에 한 예슬 나오는 드라마가 있어요. 사람이 기대치를 하는 이유가 그 기대치가 될 때, 하나님의 뜻이라고 간주해버리면 바로 마귀가 그렇게 대범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자기는 하나님의 사람 맞는 걸로 확정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마태복음20장에서 주님의 기도가 뭐냐 하면, 반드시 주님의 기도는 니가 기대한 건 필요한 건 주께서 주시지를 않아요. 하나님의 뜻은 항상 우리의 기대를 비켜가는 쪽으로 일하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정주하지 않고 정착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뭔가 자꾸 미련두지 않고 이 땅에서 뒤돌아보지 않고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지 않고 하늘나라만, 그 나라 의만 추구하도록 그렇게 유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잖아요. 환영받았지요. 다윗은 만만이고 사울은 천천이고. 그 때부터 소년 다윗의 인생이 어떻게 됐습니까? 평탄했습니까? 꼬였습니까? 이것은 이유도 모르는 밉상과 미움을 받아서 정치적인 망명길에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다윗을 사랑했지만 그 사울 왕이 다윗을 자기 가진 모든 것을 망치게 하는 라이벌로 여긴다면 그 때부터 다윗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 되어버려요. 사울 왕한테는. 이유 없이 미운 거예요. 악신 들린 거예요. 

나는 저 여자만 불행하다면 나는 이제 소원 없다. 드라마에 보면 그런 내용들이 많아요. 무조건 며느리를 압박해야 시어머니가 행복해져요. 그런데 이 드라마가 못된 시어머니라고요?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거기에 아주 친한 친구가 나와요. 친한 친구를 또 이용해 먹지요. 글쎄요. 친한 친구? 내 뜻에 부합될 경우에만 내 기대치의 실적에 이용가치만 있을 때만 친한 친구가 되는 겁니다. 

만약에 그 친한 친구가 너무 너무 잘됐다 보세요. 더 이상 친구가 아니고 평생의 웬수가 됩니다. 니가 있으면 나는 자동적으로 불행해져요. 친구의 행복이 나의 불행이 된다니까요. 친구가 잘되면 나는 아무 변동이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불행한 삶이 되어버립니다. 남편이 죽었다. 그날부터 남편이 있는 여자들 다 미워요. 착한 신사임당? 착한 신사임당 없어요. 착한 여자, 착한 남자 없어요. 

히브리서9장에서 죽 내려가는데 죽 내려가는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뜻을 붕괴시키는 내용들이 율법에 나와 있습니다.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되어있지요. 성소란 말은 한자 그대로 하면 거룩한 장소지요. 거룩한 장소. 이걸 제가 처음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옛 땅은 날아가고 새 땅과 교체할 때, 그 새 땅이 우리가 그냥 살기만하는 땅이라고 듬뿍 들어갈 수 없고 그 땅을 만드는데 그 땅을 만드는 근원이 있어요. 본래적인 게 있어요. 

그게 뭐냐, 거룩한 거죠. 그러면 거룩한 땅을 개척하고 거룩한 율법이 이스라엘을 찾아왔다는 말은 인간들은 본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알아요? 몰라요? 결국 모르고 있다는 것을 들통 내는 작용을 하지요. 무슨 뜻이냐 하면, 거룩한 장소가 임하는 순간, 이 장소 이스라엘이 생각했던 땅의 개념은 더러운 장소가 되지요. 졸지에. 

그러면 거룩한 장소로 바뀌겠습니까? 아니면 더럽다하던 간에 내가 정들었던 땅을 유지하려고 애쓰겠습니까? 아니면 거룩한 장소를 얼른 받아들이기를 원하겠습니까? 유지하려고 하겠지요. 유지하면서 거룩한 땅은 땅대로 유지하면서 그러니까 옛날의 내가 정들었던 땅을 유지하면서 거룩한 장소를 이렇게 같이 하게 되면 내 땅이 졸지에 거룩한 장소로 변화될 것을 기대하겠지요. 그게 잘못이었던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현재 이 땅은 누가 갖고 있다? 내가 갖고 있다. 내가 갖고 있는 이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갖고 있는 것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추가적으로 거룩한 것이 오게 되면 나는 졸지에 거룩한 천국에 가는 사람으로 변한다, 라는 즐거움이 생기겠지요. 그것이 바로 그 자체가 인간의 육적인 방식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그 때 남자만 해도 40만이 왔다. 자, 물어봅시다. 약간 깊이 있는 거니까 물어봅시다. 40만 되는 그 사람들이 자기를 더럽게 봅니까? 거룩하게 봅니까? 자기를 거룩하게 보지요. 만약에 더럽게 볼 것 같으면 애굽인들이 자기를 학대해도 감수할 거예요. “맞아요. 저 같은 나쁜 인간들은 맞아도 싸요.” 이렇게 될 텐데 그런 인간 없어요. “왜 때리십니까?” 사람이 누가 나를 건드리면 이유도 없이 무조건 기분 나빠요. 나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이미 인간의 진리로 장착되어 있어요. 진리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옳은 일이잖아요. 옳은 일. 

사람은 옳은 일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안 건드리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옳은 일로 이미 확립이 되어있어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잔소리하지 마래이.” 남편들이 흔히 아내보고 하는 말이잖아요. “제발 잔소리 좀 하지 마라. 나도 안다.” 그럼 부인이 “안다는 인간이 똑같은 짓을 반복하느냐, 그래 전에도 안다고 해놓고 또 사고 쳤잖아. 내가 두 번 속지 세 번 속는 줄 아나.” 이런 식으로 나오지요. 그럼 또 “아침부터 또 잔소리.” 이러지요. “잔소리로 듣지 말고 내 말이 틀렸느냐, 맞느냐가 더 중요한 게 아니야?” “그래, 니 말이 맞는데 잔소리 좀 하지 마라. 아무리 좋은 소리도 잔소리하면 일부러 하기 싫다.” 또 이렇게 나오면서 오기를 부리잖아요. 그럼 또 여자가 “못 살아, 못 살아.” “그럼 살지 말지 뭐” “그럼 이혼할까?” “그 말은 아니고.” 남자는 이혼하면 제일 겁내. 

제발 날 좀 건드리지 마라. 나는 선악과 따먹었다. 나는 나다. 이것은 여자고 남자고 관계없어요. 모든 인간들이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우상인가를 본래의 지 모습을 몰라요.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 없어요. 인간은. 인간은 자기가 알고 있는 거울이 있지만, 내가 모르는 것까지 비춰주는 거울을 인간은 발명하지를 못합니다. 말씀에 비춰야 되는데. 말씀에 비춰봐야 소용없어요. 왜? 말씀을 비춰봐야 말씀을 또 오해해요. 지가 아는 것만 골라서 해석하고.  

거룩한 것이 왔다는 말은 졸지에 인간은 거룩한 것을 감당하리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실천적으로는 감당 못합니다. 그 정도로 인간은 거룩하지 않아요. 거룩하지 않는 곳에 거룩이 여기에 잠입했다는 것은 비 거룩함을 드러내고 다 깨부수면서, 첫 번째는 율법이 실제로 부수는 것 첫 번째 기능, 두 번째는 새로 세우는 것. 이 두 가지 기능이에요. 부수는 것과 새로 세우는 것이에요. 부숴야 새로 세울 것 아닙니까. 율법의 기능은 부수는 겁니다. 그리고 새로 세워지는 겁니다. 

새로 세워진다니까요. 새, New, 새로우니까 졸지에 율법 때문에 인간이 갖고 있던 것은 갔다가 버려도 상관이 없는 옛것이 되어버렸어요. 예수님도 그런 이야기하셨지요. 포도주를 담을 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 게 옳으냐, 헌 부대에 담는 게 옳으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 게 옳지요. 

그러면 인간들이 갖고 있는 헌 부대는 이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지요. 그래서 본래의 우리의 모습은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요. 영어로 하면, 낫싱 Nothing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게 그게 바로 주께서 주신 기적이고 축복입니다. 사람이 돈을 얻는다고 행복이 아니고 본인이 아무것도 아닌 그 짧은 순간이 와요. 그러면 날씨가 추워도 고맙고 더워도 고맙고 아파도 고맙고 건강해도 고맙고. 왜, 원래부터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무것도 아니니까. 교회가 증거 해야 될 그게 진리에요. 

진리가 뭐냐 하면,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죠.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추상적이고 이게 또 종교적이 될 수 있는데 구체적인 인물을 보고서 아무것도 아니어야 돼요. 누구냐, 예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어야 하는 게 복음입니다. 복음은 주님이 나타나서 아무것도 아니고 정말 뭔가 의미 있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다. 왜, 그 분이 주님이시니까. 온 우주의 주님은 주님이 나타났을 때, 졸지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주님을 보게 하셨으니까. 

주님을 보게 한 게 이게 새로운 면이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다시 이야기하면 인간은 자기 건드리면 다 싫어요. “매일 건드려도 괜찮습니다. 주님만 계시면 됩니다.” 라고 달려든다면 이건 그야말로 새로운 NEW, 새로운 거예요. 

주님이 하신 일이 바로 우리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들추어내고 새로운 인간으로 만드는 겁니다. 대표적인 예가 뭐냐, 닭 우는 거예요. 닭이 울었잖아요. 만약에 베드로가 물리학 교수라면 닭이 몇 데시벨이 나올까, 그거 측정할 거예요. 측정해서 뭐하는데? 측정해서 논문 발표하려고? 논문 발표해서 뭐할 건데요? 논문 발표했다고 노벨상 받겠지. 노벨상 받아서 뭐하는데? 노벨상 받으면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상금 받아서 뭐하는데? 출세하겠지. 출세해서 뭐하는데? 출세해서 죽지 뭐. 

베드로는 물론 닭울음소리를 측정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닭울음소리 앞에서 베드로는 닭이 뭐냐가 아니라 본래의 자기 자신을 알게 되었어요. 내가 말씀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던 사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보다 더 깊이 내려갔지요. “나는 바로 죄인입니다.” 옛날 자기가 예수님 앞에서 했던 것, 그물을 오른편으로 던지라 할 때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 한 그 말, 그것이 하나의 이론이었다면 실제로 자기가 내뱉은 그 말, 내가 죄인입니다. 라는 그 말에 부합되도록 주께서 말씀으로 “내가 죄인 맞습니다.” 하는 그것을 체험 화시키고 실제로 그걸 느끼게 만든 조치가 주님 쪽에서부터 실시되어왔다는 겁니다. 그동안.  

그럼 어떻게 그냥 닭만 울었어요? 아니에요. 베드로로 하여금 닭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내가 자신만만하게 주님을 따라다닙니다. 라고 스스로 자기한테 신뢰감을 가질만한 사항들을 3년 동안 가져왔지요. 물위를 걸었고, 여러 가지 기적도 행했으니까 이만하면 이제는 주께서 추가적인 조치 없이도 내 힘으로도 주님을 위하여 주의 편에 서서 천국 가는 백성답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자부했지요. 

그 자부한 양만큼 자기가 죄인 될 줄이야 생각도 못했지요. 그 모든 것을 자부했지만, 사실은 그게 Nothing, 아무것도 아닌 내용들로 채워졌다는 사실을 베드로가 그걸 닭 울기 전에는 몰랐지요. 실컷 주님만 사랑한다고 이야기했고 주님 일한다는 그 모든 것이 모아져서 “나는 주님을 모릅니다.” 하는 그런 결론에 도달되게 했던 지난 3년의 세월이었습니다. 

말씀 앞에서 인간은 자기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버리지요. 그럼 이 율법이라는 제사법이 나오는 휘장, 그 다음에 금향로, 사면이 금으로 싼 언약궤, 만나가 들어있는 금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언약의 비석, 속죄소를 덮는 그룹, 이 모든 것들의 내용은 목적은 뭘까요? 인간으로 하여금 본래의 죄를 들추어내는 기능이지요. 그렇다면 이 방금 언급한 거룩한 것이 그냥 아름다워서 눈부셔서 거룩한 겁니까? 뭐가 묻어서 거룩한 겁니까? 뭐가 묻지요? 피가 묻지요. 

그 피는 정결한 흠 없는 제물의 피가 묻지요. 이 지상에서의 거룩은 뭐냐, 호화찬란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귀가 세 번째 시험할 때 세상 부귀영화 보여주면서 “예수여, 나한테 절하면 이 모든 걸 가지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했지만, 정작 이 땅의 하나님의 거룩은 뭐냐, 예수님의 손자국과 창 자국을 보면서 거기에 피가 흘렀던 그 장소를 보는 겁니다. 그 피가 주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살점과 피가 이게 바로 거룩함입니다. 이게 거룩한 거예요. 그걸 안다면 그게 바로 거룩한 사람, 바로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바로 십자가 복음만 피만 증거 해야 돼요. 딴 거 증거 하면 안 됩니다. 그건 참된 교회가 아니에요. 

인간의 본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커다란 전신거울을 준비한 게 아니고 거울을 봐야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그거밖에 더 나오겠어요. 백설 공주를 괴롭힌 그 계모밖에 더 되겠습니까? 우리도 매일 하잖아요. 거울을 보잖아요. 어떤 사형수는 사형을 당하기 직전에 “머리 좀 만지고요.” 사형장에 끌려가면서도 머리 만지고. 비가 와서 물웅덩이가 있으니까 그냥 가면 될 걸 가지고 퐁당 뛰어가지고 바지 안 젖고 인간은 곧 죽어도 10분 뒤에 죽어도 챙길 건 챙기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은 미래에서 자기를 바라볼 줄 모르고 누적된 과거의 습관이 현재 자기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현재의 자기를. 교회가 이래야 되고 믿는 가정이 이래야 된다. 진리 같지요? 진리 아닙니다. 과거의 습관이 지금 그런 말을 내뱉은 겁니다. 

미래에서 오신 분이 성령인데, 창세기할 때 그걸 시간의 역전이라 했지요. 대전강의 할 때. 미래에서 이렇게 오게 되면 나는 뭘 해도 주님 앞에서는 십자가 앞에서 낫싱 Nothing이 되는 겁니다. 미래에서 온다는 것이 항상 닭소리 듣고 사는 거예요. 십자가의 닭소리 듣고 사는 거죠. 닭이 운다는 것은 곧 십자가의 사건을 염두에 두고 미리 앞당겨서 닭이 우는 거예요. “베드로야, 니 뜻하고 십자가진 내 뜻하고 이렇게 차이나는 거다. 니는 바로 내 면전에서 부정하고 있지. 그게 니 본래의 모습이야. 그리고 니 본래의 모습은 니가 손댈 수 없어.” 우리 손으로 고쳐지지를 않습니다. 세상에 내 힘으로 안되는 게, 마지막 안되는 게 바로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죄를 알지도 못하고 알아봤자 죄에서 씻음 받는 것도 자기 힘으로 되지를 않아요. 영동교 뜻이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영등포 동쪽이지요. 그거 안다고 해서 죄가 씻어집니까? 비 내리는 영동교~ 그 노래 부른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지요? 영동교가 영등포 동쪽이라는 걸 안다고 아무 소용없듯이 교회에서 운영하는 게 그게 구원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재직회는 3분의 1이상이 되어야 그거 아는 게 무슨 구원이 되겠어요? 세례 받을 때는 물 이만큼 적셔야 되고 그거 아는 게. 앞자리 앉고 뒷자리 앉으면 안 되고. 주일날은 양복 말끔하게 입고 오셔야 되고. 슬리퍼 신고 오면 안 되고. 이런 게 무슨 구원에 관계가 되느냐 말이죠. 이런 쪽으로 설교를 하니까 옷차림들이 아주 가관이에요. 그동안 가다마 입고 온다고, 그동안 정장 입고 오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았어요. 그것도 가짜로. 

주님 보시기에가 아니라 남들 보기에 얼마나 자기 잘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정숙한 신사임당으로 오신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이제는 완전히 옷차림이 산에 등산할 때 옷차림으로 아주 편하게 오셔요. 그러나 바짝 옷차림, 머리 신경 쓸 때는 언제인가 하면, 상견례 할 때. 주님하고는 상견례 안하는 모양이라. 서로 안다는 이 말이지요.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에는 상견례도 할 필요가 없다고. 사도 만날 때는 그 때는 바짝 정신차려가지고 명품가방 들고 괜히 흔들어가지고 루비똥이 왜 이리 흠이 나지 하면서.  

인간의 거룩은 마귀가 조작한 겁니다. 아까 제가 행할 때는 뭐라고 했어요. 인간은 모델을 택하지요. 그 모델 할 때 그 모델이 어떤 겁니까? 바로 돈 되고 인기되고 영광 얻는 사람 아닙니까. 이 마귀가 첫 번째, 돌이 떡 되고 두 번째 인기 있으면 스타 되고 스타 되면 세 번째가 뭐냐, 스타 되면 세상의 모든 영광은 다 쥔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늘의 아버지께 온 게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온 거예요. 

요한일서 2장15,16절에 보면 세상으로부터 왔다고 했거든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그러면 세상이라는 것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다져진 곳이 바로 세상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그 세상에서는 온 게 아니다. 그러면 진정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면 어떤 내용이 섞일 수가 없어요? 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가 그런 질이 그런 내용이 포함이 안 된 그것이 사랑이지요. 그렇잖아요. 

그럼 기도할 때 뭘 기도해야 돼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는 일체 담기지 않는 것만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를 해야 되겠지요. “아주 우리 애 공부 잘하게 하옵소서.” “공부 잘해서 뭐할 건데?” “공부를 잘하면 세상의 영광을 얻는데.” “영광 얻어서 뭐할 건데?” “누구 좋은데?” 즈 엄마가 좋지요. 결국 지 좋아라고 기도한 거예요. 그런 것은 기도하지 마세요. 이미 무엇이 필요한가는 다 주십니다. 안 준다는 게 아니에요. 안 준다는 게 아니고. 기도해야 얻지. 잘못된 말이에요. 기도 안 해도 주십니다. 누구 피 때문에 왔느냐를 보는 거예요. 

사르밧 과부 알잖아요. 엘리야가 참기름, 밀가루 몽땅 야박하게도 죽으려고 먹는 마지막 만찬을 뺏어 먹잖아요. 그 모자간에 가뭄 들어서 남편도 없어요. 모자간에 굶어죽으려고 마지막 털어먹는 그 음식마저 그것을 새치기해가지고 그걸 뺏어 먹잖아요. 벼룩의 간을 내먹지. 그걸 뺏어가지고 지가 먹어버렸다 말이죠. 마지막 케이크 먹고 죽으려고 했는데 죽는 것도 지 맘대로 못 죽어. 굶어죽으려 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밀가루가 가득하고 참기름이 가득했을 때, 그 참기름 어디서 나온 겁니까? 그거 누가 준 거죠? 바로 참기름, 밀가루는 무슨 뜻이냐 하면, 그전부터 가뭄 들기 전부터 그 사르밧과부 집에 있던 그 기름이 사실은 너희들의 노동으로 얻은 게 아니고 엘리야를 보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동안 참기름, 들기름, 아주까리기름, 해바라기 기름 주신 거예요. 밀가루 준 거예요. 그걸 잊어버리는 이스라엘에 가뭄 드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위반하게 되면 가뭄 드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위반하게 되면 가뭄 들게 되어있어요. 

옛날 풍족할 때, 너희들은 풍족한 것만 생각했지 누구의 희생 때문에 왔다는 것은 잊어버렸잖아요. 그걸 다시 가뭄으로 되돌리니까 엘리야가 아니면 못 삽니다. 다시 말해서 엘리야를 보내신 여호와 아니면 못 삽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동안 여호와의 은혜로 살았지 우리의 애씀과 노동으로 산 게 아닙니다. 라는 것을 그들이 사르밧과부가 알아야 돼요. 

그게 바로 성소의 거룩한 곳이에요. 거룩한 곳은 낯선 곳이고 이질적인 곳이고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그런 내용이 펼쳐지는 겁니다. 펼쳐지는 거예요. 거룩한 공간으로부터 펼쳐지는 거예요. 인간은 본래의 인간을 잘 모르지요. 인간은 자기의 본래의 모습을 모릅니다. 본래의 모습으로도 사람들은 잘 살아요. 왜 그럴까요? 습관 때문에 그렇겠지요. 어떤 습관? 기존의 땅에 정착하고자 하는 습관대로만 그냥 사는 거예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고 언급했건만, 인간은 일단 떡 먹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배부르면 말씀을 들을 기운이 난다고 이리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은 말씀에서 본래가 나와야 되는데 자신의 진면목을 떡에서 찾아요. 많은 돈에서 우리는 진짜 내 모습을 거기서 규정하려고 하고 구축하려고 하고 애를 쓴다 말이죠.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주께서는 그걸 바꾸려면 이 땅에서의 거룩은 참혹하고 처참한 모습으로 와야 되지요. 주님께서 처참하고 참혹하게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신분은 달라졌어요? 안 달라졌어요?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 맞잖아요.  그러면 됐잖아요. 주께서 이 땅에 고생한다고 독생자 아닌 분입니까? 아닌 분이 되는 거예요? 아버지의 품속의 독생자 이건 마찬가지잖아요. 바로 그런 입장이 되게 만들겠다는 거예요. 니가 가난해도 환란과 핍박과 곤고와 위협이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조치를 내리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그 말씀을 통해서 그 내용이 솟아져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모델을 찾아라,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모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이 추운 날 어떻게 살았는가 보자는 겁니다. 고생한다고 지옥자식 아니거든요. 예수님이. 환란 핍박에다가 심지어 사형당한다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분이 아니에요. 버림받았다가 다시 주께서 부활하신 분이잖아요. 

참, 우리가 도대체 누구한테 속은 겁니까? 그동안. 내가 나를 속였지요. 내가. 지금도 속이고 있고 계속 속이고 있지요. 그러면 속이지 않는 분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말씀, 율법, 하나님의 언약, 이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속이지 않고 직구로, 바로 우리에게 바로 이야기합니다. 

의는 없나니 애초부터 하나도 없었다. 너는 죄인이었다. 그게 본래의 니 모습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 (IP:218.♡.196.154)15-01-29 10:54 
안양20141212b-히9장1절(애매함) - 이 근호 목사 

복음은 굉장히 간단하고 단순한 거예요. 뭐냐 하면, 뭐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부터 뒤틀리기 시작해요. 뭔가 등장한 거예요. 교회가 등장했다면 전혀 뒤틀리지 않습니다. 나에게 죽음이 찾아왔다. 죽을 때 죽고 죽더라도 죽게 되면 죽고 반성하면 되지. 나를 근본적으로 뒤틀리게 하는 게 아니거든요. 나이 많아서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자연스럽지 못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거룩하신 주님이 참혹하신 모습으로 등장했다. 원래 우리가 거룩하다 하는 것은 착하고 위대하고 이래야 거룩하잖아요. 

그런데 사람 손에 의해서 당한 사형수, 사형수가 메시아였다고 한다면 이건 당혹스러운 겁니다. 당혹스러운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온 복음은 늘 그런 거예요. 성령 없이 그냥 복음 와버리면 주께서 우리에게 참 착하신 분이다. 우리를 살리려고 희생하셨구나. 고맙다. 이리 되는데 성령을 통해서 이렇게 십자가 복음이 와버리면 우리 자신이 더 이상 내 가치에 대해서 손쓸 수 없게 만들어버려요. 그야말로 “뭐지?” “뭐야?” 

우리가 항상 예상하거든요. 뭔가 예상해요. 기대치. 아까 한 거 다시 복습해 봅시다. 예상 치라 하는 것은 내가 잘났기 때문에 나를 건드리면 내가 싫어한다. 그거잖아요. 왜 남은 나를 건드려서는 안 되는가. 내 입장에서 내가 잘났기 때문에 이 잘난 입장에서 거룩이 와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나보다 더 잘난 분이 오시니까 우리는 잘 영접하고 모시면 되겠지요. 모셔버리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덩달아서 지금도 착하지만, 더욱 더 훌륭한 사람이 되겠지요. 그게 바리새인이잖아요. 

제가 첫 시간에 첫 강의할 때 뭐라고 했지요? 어떤 장소가 있는 곳에 거룩한 성소가 와버릴 때, 기존 장소도 괜찮고 거기다가 성소까지 추가했으니까 훨씬 더 훌륭한 성소로 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들의 생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뭐냐 하면, 그게 바로 거룩하지 않는 인간의 본래의 죄악된 모습으로 들통 내는 방법입니다. 그게. 이게 허물어져야 됩니다. 

소유하고 수용하는 것이 아니고 반기면 반기는 내가 허물어져야 된다니까요. 만약에 바구니에 수박을 담으면 바구니도 멀쩡하고 수박도 멀쩡하잖아요. 그렇잖아요. 바구니에 수박 담아보세요. 수박 없던 바구니가 수박이 있는 바구니가 되어가지고 빛이 나겠지요. 그런데 바구니에 수박을 담지 말고 뜨거운 태양을 담아보세요. 바구니가 어떻게 됩니까? 홀라당 타버리지요. 그런 격이라니까요. 그게. 

성령께서 오시는 것은 홀라당 타버리게 한다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는 잘났다. 그러니까 나를 건드리지 말라. 이러한 폼이 주님 앞에서는 저주거리가 진짜 저주받아야 될 이유가 된다니까요. 이게. 잘난 내가 교회 가서 구원까지 챙겼으니까 얼마나 잘난 사람 되겠습니까. 그것을 주님께서 일소에 죄의 괴수로서 처리해버린다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아까 했던 낫싱 Nothing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 말이죠. 꿈을 어떻게 꾸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현재 내가 본 십자가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겁니다. 


이 이야기를 예수님 같으면 이 땅에 오셔가지고 사람에게 밉상 받고 그러면서도 세우기 위해서 12명의 제자, 다시 말해서 기존의 이스라엘 말고 새로운 이스라엘 만들기 위해서 12명의 제자를 뽑고 뽑으면서도 그들에게도 비난받고 그러면서 제자한테도 오해받고 심지어 팔릴 때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 배신해서 자기를 팔고 예수님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를 사랑했던 자에게 미움 받고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고 이렇게 분명해지는데, 이게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율법의 제사를 통해서는 이게 상당히 또렷하게 안 보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또 미워하고 또 미워해놓고도 미운자 중에서 택한 백성을 건져주고 이 작업이 율법의 제사법과는 잘 안 드러나지요. 드러나지 않더라도 이미 그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그게 1차인데, 7절에 봅시다.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첫 째 장막이 있고 둘째 장막이 있는데, 방위표 이리 있고요. 동서 북남 이리 되어있고 성막이 있는데. 동쪽으로 출입구가 되어있고 요기 앞에 뜰이 나있어요. 뜰에 제단이 있어요. 놋 제단이 있고 제단에서 항상 제사가 잡으니까 연기가 피어오르지요. 그리고 피가 흘려져있고. 요기에 텐트가 있는데, 텐트가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있다 말이죠. 

제사장이 입구에 들어갑니다.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어요. 들어가게 되면 요 위에 뭐냐 하면, 테이블이 놓여있고 요 맞은편에 뭐가 있느냐 하면, 조명시설이 되어있어요. 등잔으로 조명시설이 되어있고. 요 중간에 뭐냐 하면, 향 피우는 향로가 있어요. 테이블위에 떡이 6개씩 6개 12개의 떡이 놓여있습니다. 어두컴컴한 요 실내를 밝히도록 되어있습니다. 향로는 늘 불이 켜져야 되고요. 

요 안에 들어가면 지성소가 되어있어, 요기에 상자가 있고 그 상자위에 천사 조각품이 날개 짓하며 마주보며 있어요. 요 앞의 커튼은 여러 가지 장식되어있는 커튼이 있어요. 들어가는 순서에 따라서 1구역, 2구역이 있습니다. 자, 요렇게 성막이 이런 구조로 되어있는데, 요 구조가 뭐냐 하면, 하늘나라 하나님나라의 청사진이에요. 설계도에요. 설계도인데, 그래서 다시 한 번 물어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는 겁니까? 아니면 명령입니까? 명령이죠. 

사람은 왜 눈에 보이는 것을 믿으면 안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다는 말은 그게 하나의 모델이 되어버리죠.
모델이 되면 그게 우상이 되고 시간이 정지가 되어버려요.

그건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누구를 쳐다본다 할 때에, 여기 스탠드가 있는데 스탠드를 쳐다보잖아요. 스탠드를 쳐다보는데 만약에 제가 이 스탠드의 모양을 봤습니다. 보고 난 뒤에 나도 갖기 위해서 가게에 가서 “스탠드 주세요." 라고 할 때 이 스탠드 말고 다른 모양의 스탠드가 오면 “이건 스탠드가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신제품 스탠드 아주 희한한 스탠드 나오잖아요. 왔을 때, 왜 나는 그것이 스탠드 아닌 것같이 봅니까? 이미 나는 스탠드를 봤고 그 본 것을 ‘저게 스탠드야.’라고 이미 인증이 돼있지요. 머리 기억 속에. 

이미 모델이 된 거예요. 과거의 한 모델이 되게 되면 그 다음에 나오는 것들은 모델에 기준해서 진위가 판단이 돼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형이 서울대학 나오고 누나도 서울대학 나왔는데 본인은 광운대학교 나왔다. 이러면 졸지에 그 사람은 공부 잘하는 측이 아니고 못하는 측에 들어가지요. 이 이야기는 서 경수 목사님이 자기 사적인 이야기하면서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한 거예요.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설교시간에 한 것이기에 내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항상 자기 집에서 공부 못하는 학생으로 분리됐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시골에서 광운대학 보세요. 광운대가 얼마나 셉니까. 광운대가 얼마나 일류에요. 공부 잘하는데 가는 겁니까. 옛날 광운대보다 지금 광운대가 더 좋거든요. 지금은 일류대학이라 말이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공부를 잘하지만, 본인의 모델이 뭐냐, 아버지 엄마가 형, 누나가 서울대학 갔으니까 당연히 서울대학 가야 되고 당연히 그 집안은 서울대학 가야만 되는 집안이 되어서 그런 거예요. 이게 모델이 되어버리니까 아버지 입장에서는 서울대학 안 가면 공부 못하는 측이 되어버렸는데. 이게 하나의 우상이 되어버린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나의 고정이 되어버리니까. 변화의 여지가 없어요. 

인간은 뭔가 특정의 모델이 되어버리면 모델이 된 그 순간 그건 하나의 신이 되어버려요. 우상이 되어버리니까 시간이 거기서 정지되어버립니다. 그런 경우가 있고, 자기가 지금 30살인데, 7살 때 자기가 몸이 굉장히 아플 때 엄마가 자기를 업고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 그 추운 날 병원에 갔는데 나중에 깨어서 보니까 자기 엄마가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는지 신발도 한 쪽 슬리퍼만 신고 벗어버리고 맨발로 병원까지 왔을 때, 그 어린 마음에 엄마가 이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구나, 라고 알았을 게 아니에요. 그런데 그 엄마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자기를 훔쳐간 가짜 엄마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청담 스캔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엄마는 저 정도로 나를 사랑해. 사랑하는 순간에 진짜 엄마를 만나는 순간에 그 여자는 도둑년이 되어버리지요. 도둑이 되어버린 거예요. 자기를 사랑한 그 여자를 자기 힘으로 처단해야 돼요. 여기서 주인공이 갈등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우상의 모델이에요. 

사람이 뭔가 본 게 있으면 그것이 세상을 만들어버려요. 세상이 이렇다고 정해버려요. 자기가. 그래서 사람마다 세상이 다 달라요. 놀라운 사실은 똑같이 해 뜨고 해지고 다해도 사람마다 다 달라요. 어떤 사람은 하늘이 파랗지만, 어떤 사람은 하늘이 뇌랗다, 에요. 노란 것도 뇌랗다고 했어요. 이게 누구냐 하면, 송창식이 부른 노래가 있어요. 담배 가게 아가씨 혼자 좋아하다가 깡패한테 얻어맞아서 하늘이 뇌랗다 했거든요. 얻어맞아가지고 하늘이 노래. 오직 그 담배 가게 아가씨만 차지하는 그 생각만 하기 때문에 세상 모든 것도 북한 핵문제도 중요하지 않아요. 담배 가게 아가씨만 중요해. 꼭 애들이 그래요. 애들을 보게 되면 애들이 소원이 있답니다. 뭐냐 하면, 어떤 가정에 소원이 있는데 그 아들 소원이 딱 두 가지에요. 
하나는 개그맨 되는 것이고 하나는 딱지 왕 되는 거고. 유자식상팔자에 나오는 거. 둘 중에 어떤 게 될 건지 걱정이라. 그 딱지 왕이 어른이 보기에 뭡니까?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하지만 과거에 본 게 있기 때문에 그게 고정돼 버린 거예요. 나는 딱지 왕 되어가지고 친구한테 자랑질해야지. 재벌이 되어도 안 넣어줘요. 천국은 들어갈 수 없는 어떤 걸림돌이 있어요. 걸림돌이. 

천국은 모양으로 눈에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뭔가 그 안에 걸림돌이 있어요. 걸림돌은 지시와 관련되어 있지요. 명령과 관련되어 있지. 아름답다. 아름다운 걸 누가 싫어해요. 다 좋아하지. 천국에 가면 샘이 터진다. 샘 터질 것 같으면 롯데월드에 가면 샘이 터지지. 기껏 천국이 롯데월드 그 정도입니까. 천국이 그 정도밖에 안돼요? 천국은 걸림돌을 간파해야 되고 걸림돌을 넘어서야 된다는 걸 알아야 천국 제대로 가는 사람이에요. 

그 걸림돌은 왜 필요한가 하면, 바로 내가 나밖에 모른다. 어떤 진리든 관계없이 나를 건드리면 나는 화난다. 그러한 나 중심, 절대적인 나 중심이 나를 천국으로 못 가게 만드는 겁니다. 그런 내가 그런 육이 나를 못 가게 만들어요. 기적이라 하는 것은 내 힘으로 구원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 경계선 넘어 도달시켰다는 것. 내 이 자리가 내가 만든 자리가 아니고 내가 노력해서 얻은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이기 때문에 비로소 십자가 바깥에서 내가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가를 눈에 훤히 보일 때 그게 진정한 기적입니다. 이건 축복 중에 그런 축복이 없어요.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게. 

그러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1구역(등잔,향로,떡)과 2구역(지성소)을 나눈 겁니다. 그런데 여기 히브리서 1구역, 2구역으로 나눴다는 이유가 뭐냐,  이것은 허물과 관련되어 있어요. 우리 죄와 관련되어서. 그러니까 히브리서의 내용은 이겁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르고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인간 탓이 아니고 인간 자체 속에 허물과 죄 때문에 그렇다고 보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폼 나게 오실 수도 있어요. 멋있게 아랑드롱보다 더 이쁜 미남으로 오고 키 185Cm에다가 식스팩하고 탄탄한 목근해가지고 원빈과 현빈처럼 멋있게 와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욘사마처럼 올 수 있습니다. 천사도 그렇게 미남이었는데 천사를 만드신 주님은 더욱 더 미남이겠지요. 할 수 있는데, 오히려 반대로 흠모할 수 없게 만드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 힘으로 처리할 수 없는 게 있어요. 우리 속에. 그게 박혀있어요. 그게 뭐냐,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처리 못하는 이유가 죄 자체가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래요. 가짜 우리를. 우리를 우리 자신이 만들면요, 우리가 그렇게 안 만들지요. 하지만, 죄가 우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몸부림치는 것도 죄에요. 구원 받으려고 애쓰는 것도 죄고 금식하는 것도 죄고 전도하는 것도 죄고 다 죄에요. 죄. 죄. 

마치 갇혀있는 것. 마치 냉장고 안에 갇혀 있는 것과 같아요. 냉장고 안에 있는 김치도 시원하고 냉장고 안에 있는 팥죽도 시원하고 냉장고 안에 있는 사과와 포도도 시원하고 콜라도 시원하고. 왜 그렇습니까? 냉장고 적당하지 않고 냉동고. 냉동고 안에 있는 것은 모두 다 꽁꽁 얼어있는 이유가 그 안에 들어있는 우리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생태도 동태 되어 벌벌 떨고 있고. 죄로부터 꼼짝을 하지를 못해요. 건드리기만 해봐라. 화낸다. 이건 분명한 겁니다. 이건 언제나 육이에요. 죄로 인하여 푹 젖어있는. 

평소에 다윗은 사람 죽이는 게 취미고 평소에 사람이 다윗이 간통하는 게 취미고 그런 보사노바나 카사노바 아니에요. 왜 이쁘냐 말이에요. 예쁜 게 죄에요. 뒤태를 보자 이리 오너라. 이도령이도 마찬가지에요. 춘향이가 뒤태가 안 좋았으면 절대로 사또 자녀가 그런 짓하면 안돼요. 이쁜 것도 죄냐. 이뻐서 죄송합니다. 왜 이쁘냐 일만의 책임을 져야 돼. 100:0 아니에요. 80:20 져야 돼. 차 박아놓고 이쁜 거 20, 박는 거 80 줘야 돼. 100% 사고 없어. 그래서 여자들은 안 그럽니까. 여자가 살랑 살랑 꼬리를 치니까 그렇지. 백년 묵은 여우인가 꼬리는 왜 쳐. 인간의 모든 살랑 살랑 꼬리를 잘라버려요. 잘라버리는 게 뭐냐 하면, 제단입니다. 죽여 버려요. 죽이고 죽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무빙이 일어나지를 않아요. 행동이 없지요. 죽은 사람이 행동이 있겠습니까? 어떤 움직임이 없지요. 

다만, 그 죽은 것을 통째로 가져가는 움직임은 누구 몫이냐, 하나님 몫이지 사람 몫이 아닙니다. 지성소에 어떻게 들어가느냐, 천국에 어떻게 들어가는가, 우리가 못 들어가요. 죽여 놓고 들어가잖아요. 누가? 우리의 목숨을 쟁반에 담아가지고 사발에 담아서 가면서 피를 뿌려야 돼요. “이 자리가 합당한 자리네요.” 하고 뿌리는 거예요. 지성소가 합당한 자리에요. 지성소에 뭐가 있다? 양쪽에 천사가 서로 마주보면서 “얘가 사는 동네는 천사라는 동네에 부합됩니다.” 하고 피를 뿌리는 겁니다.  

물론 자기 피는 더러워서 안돼요. 그 제사장이 안수하고 어린양의 피기 때문에 거룩한 어린양의 죽음에 합류했다는 것으로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린양은 두 가지 애매성이 함께 있어요. 뭐냐 하면, 허물이 없어야 되고 또 하나는 뭐냐, 흠이 있어서 드렸던 흠이 있는 자의 소유의 양이 되어야 돼요. 상당히 설명하기 난해하지요. 흠이 있어? 없어? 둘 중에 하나도 안돼요. 흠이 없어요. 흠이 없는데 흠이 있어요. 왜? 죄인이 용서해 달라고 바친 죄이기 때문에. 아니 성도가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둘 다 맞는 이야기라니까요. 예수님이 의인이에요? 죄인이에요? 둘 다 맞는 이야기라니까요. 둘 다. 

우리는 애매한 성문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는 거예요. 죽여 놓고, 죽을 때는 죽을죄를 지어놨기 때문에 죽여 놓고 살 때는 죽을죄가 아니고 살아야 될 분이기 때문에 살고. 그래서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죄로 인하여 죽고 의를 위하여 살아났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할 때에 예수님이 누구냐고 하지 말고 죄에 대해서는 어떤 분이냐, 의에 대해서는 어떤 분이냐, 이렇게 설명되어야 됩니다. 보는 방향이 두 개의 방향으로 설명이 되어야 돼요. 이건 우리 성도한테도 마찬가지에요. 죄인의 입장에서 우리는 죄인이고, 의인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의인이고. 이게 애매한 그리스도 안에서는 둘 다 맞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 애매한 것이 한 공간에 한 시간대에 신약에서는 우리의 몸을 가지고 우리 몸이 성전이니까 그렇게 되어있지요. 그렇게 되어있는데 반해서 구약에는 시간과 공간이 따로 있어요. 더러운 공간 따로 있고, 거룩한 공간 따로 있고. 여기에서는 일절 못 들어오고. 피를 뿌려야 될 그 날은 1년에 한 차례 되어있어요. 7절 보세요. 대제사장이 일 년 일차씩 그 다음에 ‘홀로’지요. 온리  유에요. only you. 홀로. 

홀로. 대표자지요. 이 말은 12제자가 있더라도 결국 예수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분은 홀로, 다른 말로 해서 아버지를 아시는 분은 이 세상에 예수님밖에 없지요. 예수님 이외에는 사람이 아닙니다. 짐승입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모르는데, 창조주를 모르는데, 자기가 사람이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예수님만이 아버지라고 할 수 있고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되어 있고요. 로마서8장과 갈라디아서4장에 보게 되면 성령을 받은 자만이 아바 아버지라고 하는데 이건 양자의 영을 받아서 그래요. 원래 맏아들 따로 있고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아서 그런 거예요. 

아들의 영을 받지 아니하면 아무도 아버지라 할 수 없고 아버지를 안다면 우리는 항상 ‘홀로’라는 것을 생각해야 돼요. 나를 포함한 홀로가 아니고 나를 뺀 ‘홀로’ 나 아닌 다른 홀로. 그러니까 나는 예수님 홀로에 소속되면서 더 이상 나는 나한테는 소속이 안 되어야 되는 거예요.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내 운명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들이어야 돼요. 개꿈을 꾸던 무슨 일이 벌어지던 그것이 내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일들이에요. 마귀를 만나던 귀신을 만나던 전혀 나의 구원과 상관이 없는 거예요. 

내가 뭘 봤다는 것은 결국 내가 본 기억으로 하게 되면 나를 내 본 기억을 내 스스로 포기를 못하지요. 스탠드를 본 이상은 다른데 가가지고 “이거 스탠드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하지요.  그럼 주인이 “아이고, 아저씨가 뭘 안다고. 이거 스탠드 맞아요.” “아, 내가 옛날에 딴 데서 본 적이 있는데.” 이리 이야기한다고요. “광운대학 나왔는데 공부 못하네.” “니가 뭘 공부를 못해. 좋은 대학인데.” “그래도 우리 집안은 우리 형들은 다 서울대학 나왔어.” 이미 본 게 있기 때문에 나는 공부 못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옛날에는 시골에서 동서기만 해도요, 플래카드 붙였습니다. 일제시대 때 파출소장만 해도 한 고을의 유지에요. 파출소장 되어 말 타고 옆에 긴 장검을 들고 가게 되면 울던 애도 뚝 그쳤다 하잖아요. 호랑이 온다 해도 안 울다가 순사가 오면 울다가 다 그쳤다 하잖아요. 일제시대 때. 

일제시대 때나 그 이후에 해방이후에 파출소장 정도는 너무 높고 파출소 경찰만 되어도 대단한 거예요. 워낙 무식하니까. 교육이 바탕이 안됐으니까 워낙 무식하니까 글깨나 써야 공직에 있을 수가 있어요. 옛날에는 공직하는 자체가 완전히 감투에요. 감투. 옛날에는 판사, 검사보고 ‘영감님’했어요. 여러분, 아시지요. 몰라요? 얼마 전만 해도 그랬어요. 젊은 30대 초반의 검사보고 나이 많은 서기관들이 “아이고, 영감님” 이리 이야기했어요. 

요새 관복은 비유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늘같은 존재에요. 뭐 안다는 거예요. 기존의 체제, 기존의 질서, 우리는 못 버리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그 영감님한테 죽었는데. 

기존의 체제, 질서에 죽었잖아요. 그럼 오늘날 뭘 의미합니까? 이것은 우리도 순교하면 구원받는다는 게 아니고 니 죄를 알렸다 입니다. 니 죄를 알렸다. 뭔가 예수 믿고 변화시키라는 게 아니고 가장 큰 변화는 뭐냐 하면, 내가 낫싱 Nothing 하는 것.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아니 더 나아가서 나는 나를 건드리면 짜증난다. 따라서 “예수든 하나님이던 나를 건드리면 나는 가만 안 둬.” 라는 이 죄, 이 악마성이 바로 내가 현재 발휘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자, 7절에 보면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자, 여기서 봅시다. 이 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일차씩 들어가서 그 다음에 (뭐) 없이는 아니하나니. 뭐가 없이? ①피 ②물 ③돈 ④착함 다음 중 몇 번입니까? 1번. 이건 답이 두 개 아닙니다. 하나님의 피 밖에 없어요. 피를 가지고 들어간다는 이 말은 피는 죽음을 의미하잖아요. 따라서 모든 인간은 예수님 빼놓고는 다 죽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이 복음이라 하는 게 기쁜 소식이라 하잖아요. 이게 왜 기쁜 소식이냐 하면, 더 이상 니 자신에게 미련 안 둬도 괜찮아. 라는 뜻이에요. 이걸 마지막 때라고 합니다. 

마지막 때는 참혹한 때에요. 인간의 모든 것이 낫싱되는 무의미한 때가 마지막 때입니다. 그 마지막 때라고 알려주라고 주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거예요. 성도는 마지막 때를 유일하게 아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가치 있는 게 아닙니다. 국경없는 의사회 필요 없어요. 착함이고 성당이고 절이고 다 필요 없어요. 다 똑같아요. 인간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인간 자체가. 그게 마지막 때에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자랑할 게 없어요. 없어야 돼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피 없이 안 된다는 것은 이미 너희들 심판 내렸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심판 받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인간은 이미 게임오버! 끝났어요. 컴퓨터 꺼보세요. 소리 나잖아요. 비비비빙~ 소리 끝나지요.  화면이 까맣지요. 이게 어두움이에요. 세상은 어둡다니까요. 

이 어두움에 빛이 왔으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한 거죠. 이미 화면이 꺼졌는데 자기는 화면이 살아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반짝 반짝 예쁜 옷 입는다고 구원받은 거 아니거든요. 이 화면이 끝났으니까 이게 검은색이지만, 하나님이 이걸 뭐로 보는가 하면, 죄에 대한 피 색으로 피로 칠해버린 거예요. 피로서 이미 세상은 마지막 때가 된 겁니다. 

그 마지막 때가 여기 이스라엘 내부에서 성소 내부에서는 미리 이미 시작이 되었어요. 미리 마지막 때가. 그래서 이스라엘 가는 곳마다 주변나라가 마지막으로 맞이합니다. 여리고성에서 여리고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만나는데 완전히 멸망당했잖아요. 그들은 완전히 멸망당했잖아요. 그 마지막이라는 것을 증거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거기서 구사일생 기어 나온 살아남은 기생라합 가족, 그들만 “앗다, 식겁했다.” 이리 나오는 거예요. “앗다, 하나님이 무섭긴 무섭더라.” 이리 나오는 겁니다. 

뭔가 멸망을 해도 멸망한 이유를 알아야 되고 그 방식을 알아야 될 텐데 이 방식은 이스라엘도 모르고 망했던 나라도 몰라요. 홍해가 갈라졌으면 갈라진 이유가 있어야 될 텐데 지형이 어떻게 바뀌었는가, 이건 이스라엘도 모르고 이건 애굽 군사도 몰라요. 빠져 죽어도 몰라요. 왜 빠져 죽었는지를 몰라요. 사람은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왜 죽어가고 있는지를 몰라요. 왜 죽는지? 왜 내 색깔이 탈색되어서 까맣게 되는지? 왜 죽으면 하얀색이나 까만색이나 색깔이 없는 무색으로 왜 돌돌 쌓아야 되는지? 내가 좋아하던 옷이 아니잖아요. 화려한 옷을 원하는데 검은색으로 꽁꽁 치고 왜 내가 그런 대우를 받아야 되는지? 평소에 살아야 될 때는 뭐라고 합니까? 나만 건드리기만 해봐라. 가만 안 둔다. 했는데 죽어서는 지근, 지근 밟아도 흙을 뿌려도 병신같이 가만히 앉아 있고. 뒤에서 쿵덕 쿵덕 밟아도 시끄럽다고도 못하고 가만히 누워 있고. 왜 내가 그런 대우를 받아야 돼요. 왜 내가 그런 대우를 받아야 됩니까? 거기다가 새들이 와서 1차 먹고 2차는 박테리아가 먹고. 

8절에 봅시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이제 신약 때 신약의 십자가로서 다시 해석을 해보자 하는 그 뜻이에요. 구약의 있는 해석은 사람으로 못하고 십자가 지실 때 오신 성령만이 구약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라는 뜻에서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성령으로 해석한 것은’ 이런 뜻이에요.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이 뜻이 상당히 어려운 뜻이 되는 이유가요. 지금 구약의 여기서 두 번 째 2구역이 지성소인데, 지성소가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은 그들은 생각하겠어요? 생각 안하겠어요? 못하지요. 성막이 있다.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앞뜰의 연기밖에 없어요. “아, 연기가 올라가네. 오! 성소가 올라가네.” 이런 거 없잖아요. 땅에 끈으로 해서 딱 고정시켜 놨어요. 이동할 때 빼가지고 가도록. 고정을 시켜놨기 때문에 하늘로 올라가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나중이 되면 이것이 불타버리지요. 이 성소자체가 불타버립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옛날에는 성소, 성소가 완성되어서 하늘나라 되는 게 아니고 하늘나라가 먼저 있고 이 성소가 하나의 그림자가 되는 거예요. 

8장 4절에 보면,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지요. 그림자가 있는 거예요. 그림자가 있다는 말은 진짜는 하늘에 붕 떠있다는 말입니다. 하늘에 지성소가 따로 있다는 거죠. 그래서 하늘의 지성소가기 전에 이건 모형이고 그림자지요. 그림자로서 모든 것이 들통 나기 이전까지는 진짜 실체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성령께서 그렇게 해석을 하시는 거예요. 

일 년에 한차례 들어갔거든요. 일 년에 한차례 들어갔는데, 한차례 들어간 거 그거가지고 다음에 가면 그만 갑니까? 그 다음에 또 갑니까? 또 들어가야 되지요. 이게 온전하지 않다는 거죠. 한 번 들어갔으면 끝나야 될 텐데 2구역(지성소)이 끝이니까 끝나야 되는데 또 간다 말이죠. 또 간다는 말은 끝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또 가요. 또 끝이 아니라. 뭐야? 자꾸 반복하는 거예요. 언제 멈추지요? 모형이 모형으로서 이게 모형이네. 그림자네. 하고 들통 날 정도로 실체가 왔을 때는 이제는 이 짓을 이제는 안 해야 되지요.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만드는 거예요. 그만 해야 돼요. 

그래서 9장에 보면 그 다음부터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이겁니다. 어떻게 모형과 실체가 만나는가, 그 이야기를 하는데 이거 참 너무나 난해해요. 왜냐 하면은,  모형과 실체는 유사성이 있어야 돼요. 유사성이 있어야 되잖아요. 유사성이 없어버리면 되지를 않지요. 건축사 설계도 책상에 보면 자기가 지을 아파트 모형을 해 놨다 말이죠. 그 모형 모습하고 실제로 건축하는 아파트하고 모형이 비슷합니까? 비슷하지 않습니까? 비슷하지요. 축소해 놓은 거죠. 1000/1로 축소한 것과 비슷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하고 성소하고 비슷합니까? 비슷하지 않습니까? 완전 비슷하지 않지요. 그러니까 연결이 어려운 거예요. 예수님의 주머니에서 어린 양의 목걸이가 나온다면 이해가 되겠는데, 예수님의 주머니에서 제단의 작은 모형 미니추어 같은 것이 나온다면 이해하기 쉬운데. 주님의 주머니 털어 봐도 성소에 관련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 왜 이렇게 어려운가. 아까 제가 언급을 했어요. 인간 자체가 성전자체를 이미 우상으로 만들어버렸어요. 우상으로. 

제가 출애굽기32장에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섬긴다고 뭘 만들었지요? 송아지를 만들었지요. 그 송아지가 왜 여호와지요? 애굽에서는 송아지가 신이거든요. 자기는 지금 신을 묘사한 거예요. 그러나 신은 묘사해서는 안 된다고 본 겁니다. 지시와 명령이지 묘사할 문제가 아니거든요. 실적과 업적을 남기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지시와 명령이에요. 

예수님이 평소에 아버지 하늘나라라고 만든 게 있습니까? 예수님이. 예수님이 어릴 때 목수니까 “자, 이게 우리 아버지야.” 만들어놨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아버지와 어떤 관계였습니까? 지시와 명령을 따라서 순종했던 관계지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때가 되매, 매일 때가 되매. 말씀이 응하기까지. 매일 이런 이야기에요. 모든 스케줄 하나, 하나가 말씀대로, 약속한 대로 한 거예요. 

약속대로 사는 거죠. 성도가 그렇게 살면 되잖아요. 꼭 실적과 업적, 월급 올라가고 집안 잘되고 이게 문제가 아니고 주님의 약속 앞에서 약속 지시가 우리한테 늘 살아있으면 되겠지요. 약속이 뭐냐, 새 언약이고 그게 십자가인데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Nothing,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공짜로 희생으로 주신 것이지, 내가 힘들여서 얻은 게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 것, 이게 바로 지시에 따르는 성도의 신앙생활입니다. 

들어보니까 굉장히 간단해요. 간단하잖아요. 간단한데, 또 어느 순복음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이번에 기도해서 드디어 응답받았어요. 아파트를 안 팔려고 했는데 5배 더 받고 팔았어요. 주의 응답이에요.” 이렇게 나올 때, 그럼 우리는 갑자기 그런 소리를 듣고 가가지고 “저 집에 정수기 얼음 나온다는데 엄마 우리 집은? 우리 집 정수기 얼음 왜 안 나와?” ‘기도가 잘못되었는가. 꿇어앉아 기도해야 되는가, 나는 꿇어앉아 금식하지도 않았어. 기도 하는 둥 마는 둥 해서 성의 없다고 아예 응답 안 해주나.’ 이리 또 생각한다니까. 이리 또.  

신앙생활 잘 하다가 옆에서 긁어버리면 갑자기 화가 나가지고 “왜 나는 10년째 기도해서 응답이 없습니까?” 이리 또 나온다니까요. 그림자에서 실체로 연결하는 고리가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없어요. 우리는 온전치 못하거든요. 

그럼 10절 봅시다.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율법에 의하면 먹고 마시고 씻고 하는 이 여러 가지 씻고 하는 이 모든 것, 이 모든 것을 우리가 하는 것을 이제는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결국은. 다른 분이 여기서의 합당한 모든 내용은 다른 분이 이미 다 해버렸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그 분이 누구십니까? 

그 다음에 11절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 했지요. 자, 여기 개혁이라는 말을 했는데 개혁은 고친다는 말은 뭐예요? 지금 전해졌던 율법에서는 지시와 명령이 뭐냐 하면, 인간보고 뭐를 하라하는 거죠. 하라 했으니까 그들은 했을 것이고 했으니까 하기 전과 하고 난 뒤의 어떤 실적 같은 것이 나타났을 거예요. 성소를 만들라 하니까 성소가 생겼잖아요. 

그러니까 전에 것의 법은 뭐냐 하면, 손으로 쪼물닥 쪼물닥하면 뭐가 나온 거예요. 양을 씻으면 씻는 거고 양을 죽이면 죄를 씻는구나, 라고 인간의 행함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반면에 새로운 법은 일체 인간의 모든 행위를 차단시키는 그런 새로운 법으로 개혁이 됐다는 겁니다. 이게 개혁이에요. 인간이 끼어들 수 없게 만든 법의 조항이에요. 예수님만 초점에 맞추어서 새로운 법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그걸 가지고 11절에 나오지요.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장차 좋은 일은 제사장으로 오사 그 다음에 뭡니까?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그리고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아! 손을 떼라, 이 말입니다. 니 운명에 대해서 니 장래에 대해서 손을 떼라. 손 떼면 네가 답답한 건 알겠는데 니가 초조한 건 알겠는데 내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안하면 결국 나는 이 코너 끝나는 게 아닙니까? 

우리는 맨 날 우리 인생의 고난밖에 생각을 안 해요. 항상 자기의 이익이잖아요. “이렇게 기름 값 내리면 주유소 하는 우리 가족 망하는 거 아닙니까?” 이리 나와요. 아무리 고상하게 하나님, 예수님 찾아도요, 그건 둘러서 둘러 가는 하나의 경로에 불과하지 결국은 골인지점은 어디입니까? 나 자신에게 돌아오지요. 

“주여,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고마우신 분이군요.” 해놓고 실제로 나한테 이익이 있어야 주님을 섬길 요량과 의욕이 생기지요. 실패했는데 나에 대해서 아무런 무관심하고 나를 무시해버리면 우리가 무슨 재미로 주를 섬깁니까?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지금 교회에 나오는 것은 다른 더 재미있는 게 없기 때문에 나온다고. 그러다 교회 재미없으면 집에 있겠지요. 교회 재미있으면 못 가겠다. 

마지막으로 이거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지성소, 성소 다 사람 손으로 만들었습니다. 제비를 뽑으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제비를 안 뽑은 게 아니에요. 손을 다가가지고 접근해서 카메라로 찍으면 나타나요. 제비 뽑는 것이 나타난다고요. 성소를 뚝딱 뚝딱 만들고 제사장 옷을 장식하고 실제로 다 만들어요. 이것은 부정할 수 없어요. 진짜로 만드는데,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만들었다니까요. 그것을요. 

성도가 밥을 먹어요. 하지만, 성도가 밥을 먹는데 성도 입장에서는 주님이 함께 있어서 주께서 먹이게 하셨다고 참새를 먹이듯이 주께서 오늘도 먹인다고 본인이 그렇게 믿어지는 걸 어떻게 합니까. 믿어지는 걸. 또 달리 이야기해서 본인이 또 그게 안 믿어지는 걸 어떻게 합니까. 본인이 안 믿는 걸 내가 어떻게 해. 본인이 안 믿는데. 내 말이 틀렸으면 틀렸다고 이야기해야지. “목사님의 말은 맞는데요. 내가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걸 왜 나보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그 이야기는 뭐냐 하면, 안 믿는 나를 목사님이 믿게 해 주셔야지요. 이런 뜻이거든요. 그러니 제가 하는 일은 뭐냐 하면, 본인 문제에 본인이 개입 못하듯이 목사도 당신 문제에 개입 못합니다. 라는 말을 내가 이야기 했잖아요. 그건 오직 성령이 한다고요. 제자도 제자 구원 받는데 어떻게 못하고, 사도바울도 사도바울 본인 구원받는데 자기가 어떻게 못했어요. 성령 받은 사람이라도 자기 구원에 손을 못 대요. 

성령 받고 난 뒤에 자기가 손댄다. 그건 거짓말이에요. 그건 완전히 거짓말이에요. 그런 일 없어요. 성령 받고 난 뒤에 더욱 더 분명해진 것은 역시 내 구원에 대해서 내가 손을 떼어야 된다는 사실이에요. 손 떼는 방법이 막 사는 거예요. 

사람이 뭔가 자기한테 손을 댈라치면 거기서 실적을 기대하게 되고 그 기대된 것이 합치됐다고 여겼던 그것이 나의 모델이 되면서 나의 우상이 돼요. “나? 옛날에 기도해서 병 고친 사람이야. 그게 나야!” 하고 자기가 우상화되어 버려요. 우상화되어버리면 이것은 그리스도를 가리는 송아지형상이 되어가지고 우상숭배가 되어버린다니까요. 

영화감독이 작품을 만들었다. 벤허를 만들면서 “주여, 내가 어찌 이런 작품을 만들다니!” 감탄했다는 거예요. 감독은 벤허를 만든 건 좋은데 잊어야 돼요. “언제? 내가 언제 했는데?” 잊어야 돼요. 목사가 “내가 어찌 그런 설교를?” 해놓고 잊어야 돼요. “내가 뭐? 뭐 없어.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설교해서 구원받는 거 아니야.” 이렇게 되어야 돼요. “아, 목사님 덕분에 5000명이 모였습니다.” “뭐? 내일되면 다 갈 사람인데 없어. 나는 그리스도만 자랑할 거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러분 같으면 “아이고, 자식을 왜 이렇게 예쁘게 잘 키우셨습니까?” “뭐? 지 DNA인데. 뭐 없어. 아무것도 아닌데 DNA 잘해봐야 육이지. DNA 잘한다고 구원받는 거 아니고.” 그게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른 법을 이야기했는데, 그 다른 법이 기존의 법을 잠식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예요. 기존의 율법을 지키지 말고 예수님을 믿자, 가 아니에요. 예수 믿자! 가 아니라 기존에 예수 믿기 때문에 율법을 다 이룬 게 돼버려요.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하는 모든 것이 율법을 다 이룬 것이 돼요. 그게 애매한 거예요. 왜냐 하면, 우린 다 이룬 의인이 되고 동시에 율법을 하나도 못 지킨 죄인이 되고. 그게 아까 이야기한 성도의 애매한 존재론적 실존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예수님 믿는 것은 이미 모든 율법을 다 지킨 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사랑이 오게 되면 용서가 되니까. 우리는 모든 죄가 없는 의인이 됐지요. 창녀라 할지라도 의인되어서 가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럼 율법을 왜 줬는가, 율법을 통해서 죄 문제를 우리가 해결할 수 없음을, 죄진 우리가 죄 문제 해결을 못하고 다른 분이 오셔야 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율법을 줬고 언약을 옛 언약을 주신 겁니다. 이 언약을 통해서 우리가 온전하지 못한 것을 늘 깨닫게 만들고 온전한 다른 분이 와야 된다는 겁니다. 

왜 온전하지 못한가, 그 온전하지 못한 것이 우리가 가만히 있다가 예수님 오신 게 아니고 우리 손으로 예수님을 죽여 놓고 죽인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은 그 온전치 못한 것이 우리가 미흡한 정도가 아니고 근원적으로 우리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 죄를 싫어하고 의를 선호하는 그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는 그게 온전치 못한 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냥 이렇게 보면 돼요. 주님 앞에서 주님을 주되심을 위해서 그냥 이용당한 거예요.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Nothing에요. 낫싱이에요. 아무것도 아닌 자를 이용하셔서 주님의 자신의 명예와 영광만 드러내시는 작업을 성령을 통해서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건드리면 가만히 있지 않는 우리의 본성, 용수철처럼 튀어나오는 우리의 육의 본성, 그것을 믿음이란 이름으로 그걸 누른다 할지라도 눌려지지 않음을 인정케 하여주시옵소서. 차라리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죄인으로 드러나는 그것이 주님의 의인되게 하는 작업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