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41114b-히8장13절(몸과 언약) - 이 근호 목사
5절에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한다 했거든요. 상당히 하나님이 적극적입니다. 너희들이 해보고 안 되거든 오실 메시아의 피를 믿어라, 이게 아니고 애초부터 원치 않았다니까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아닙니다. 원치 않은 거예요. 너희들이 말씀 지키는 것을, 우리가 율법 지키는 것을 원치 않은 거예요.
요리를 다 했는데 철없는 철딱서니 없는 애가 건드리니까 “어휘, 저리가! 저리가!” 이리 훌쳐내는 거죠. 실제로 우리 집안 결혼식을 하는데 결혼 케이크를 딱 해놨는데 손님으로 온 애가 그걸 건드려버렸어요. 그래서 얼마나 혼측에서 짜증을 냈다고요. 누가 관리하는 사람이 말려야 되는데, 마포대교 근처에 있는 웨딩홀에서 했던 거예요. 말려야 되는데, 인간이 그걸 율법을 지킨다고 하게 되면 어딜? 하고 손댈 게 아닌데 유대인들은 이걸 지킴으로서 내가 의롭게 되어서 쫓겨난 그 하나님 나라에 내가 합류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가졌는데 사실은 그것은 하나의 제가 전체를 악마의 권세라고 했지요.
권세아래 있기 때문에 인간도 지 마음대로 못해요. 그냥 그러고 싶어. 그냥 착하고 싶어요. 나쁜 짓해도 그래도 내가 마음 하나는 착한 사람입니다, 라고 교도소 가서도 이야기하고 싶어. 전과가 늘어나도 그래도 내가 인간성 하나는 좋다, 나는 의리! 의리! 빼놓으면 없어, 그걸 꼭 하고 싶어. 이게 인간이에요. 그리고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사회가 나를 이렇게 망쳤고. 국가가 나를 이렇게 망쳤지 내 인간성 하나는 날 때부터 원래 착한 거야, 라고 하고 싶어 아주.
세월호같은 경우에 개인 탓을 국가 탓으로 돌리는 것은 전부다 그 인간의 죄악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의 우연한 교통사고를 가지고 국가가 책임져야 된다고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거예요. 나같은면요, 내 딸이 만약에 죽었다면 혼자 조용히 장례 치르고 입 다물고 끝나는 거예요. 주께서 죽이신 겁니다. 주신 자도 주님이요, 가져간 자도 하나님이요, 알아서 하시는 거예요.
첫 번째 강의할 때는 바로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셨다고 적극적으로 거부반응을 나타냈다. 그러면 뭐냐, 니가 손댈게 아니고 이걸 지키는 것은 한 몸을 예비했다는 거죠. 그 다음 문제가 끝난 게 아니고 더 큰 문제가 남았어요. 왜 더 큰 문제가 남았는가 하면, 하나님이 한 몸을 예비했지요. 한 몸을 예비했는데 우리는 우리 몸을 뭐로 봅니까? 우리도 한 몸이죠. 이걸 몸을 가지고 철학적으로 개별성 또는 개체성이라 이렇게 합니다. 어려운 말로. 개별성. 개체성. 왜 개별성, 개체성이라고 언급을 해야 되느냐 하면, 모든 가치는 모든 역량이나 성과는 인간이 개별적에서 개별들이 모여서 단합해서 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이룬다는 것이 철학의 기본목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개인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 하나의 개인의 역량이 모아져서 큰 역량을 이루어서 다른 나라한테 밀리지 않고 자립할 수 있는 국가가 된다는 이런 시민의식, 시민윤리 바로 철학과 윤리가 이런데 동원되거든요. 그러려면 개인에 대한 양육과 훈육과 교육이 무엇보다도 중요시되는 겁니다. 심리학이라는 것이 그냥 심리학이 아니고 앞에 붙는 게 있지요. 교육심리학이죠. 그냥 심리학이 아니고 교육심리학입니다. 가르쳐서 지금이 아닌 어떤 다른 모델로 전환시키는 심리학이에요.
학문이라 하는 것은 변화를 유발시켜야 되고 개선되는 결과를 낳아줘야 이게 교육의 효과 있지 그냥 안다, 알아서 뭐할 건데? 안 만큼 어떤 달라짐, 성과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교회 가서 이야기해보세요. “목사님, 믿습니다.” 하면 뭐라고 합니까? “믿으면 믿는 값을 해야지.” 그게 뭐냐, 돈 내라는 말이죠. 돈 내고 시간 바쳐라, 딱 그 2가지 아닙니까? 돈 내고 시간 바쳐라. “믿었으면 믿은 값을 해야지. 혼자 믿으면 뭐 하냐. 야고보서를 당신은 읽어보지 못했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성경에 나와 있는 데로 당신은 믿습니까? 입으로는 누가 못 믿어? 행함을 내놔야 되지.” 그렇게 목사가 이야기하면 행함을 보여주세요, 하는 그 목사 때려잡아버리세요. 그게 행함입니다. 왜냐 하면, 그 뒤의 행함은 아버지가 지 자식 때려잡는 기고 기생 라합이 거짓말하는 거예요. 그 행함은 인간의 행함이 아닙니다.
믿음이라 하는 것은 믿음의 주체가 덮쳐졌을 때와 본인이 만들은 믿음과 주체가 덮쳐지게 되면 본인의 믿음은 본인의 행함으로 전환되지만, 어떤 인간보다 더 센 분이 믿음을 줘버리면 내가 생각했던 행함이 아니고 내가 생각지도 못한 행함이 나와 버려요. 그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이 현실에 내가 어떤 조작을 하는 것이 아니고 주어진 현실 속에서 주님의 행하심을 증거 하는 일을 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어떤 일을 계산하려 하지 마시고 지금 주어진 일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냐, 내년 4월 달에 이사를 가던 3월 달에 이사를 가던, 그건 내년 되어 봐야 아는 기고 오늘 우리가 할 게 뭐냐 이거잖아요. 감사하면 되지요. 내일되면 내일 또 감사할 일이 생기고. 숙제 있으면 또 숙제하면 되고. 그게 행함이에요. 지금 뭐할 것이냐, 그것만 생각하면 된다 말이죠. 이것은 내가 주체가 아닌 다른 분이 주체가 된 행함, 야고보서의 이야기는 그걸 이야기하고 그게 로마서하고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에서 말하는 행함은 뭐냐 하면, “니가 주체잖아? 니가!” 니가 주체니까 나라는 내가 납득이 되는 주체를 니가 행함을 보여라, 이리 되면 그 행함은 목사 지의 일방적인 주체로 확인하기 위해서 어떤 타인을 통해서 성과로 자기가 챙기려는 시도밖에 안 되는 거예요.
지금 두 번째 시간이 첫 째 시간보다 더 난해한 것은 첫 째 시간은 간단했어요. 말씀은 준비된 몸이 한다. 그 몸은 아버지와 아들, 그 아들 되시는 분에게 다 일임되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손대지 말라, 이리 되는데 문제는 그렇게 해서 한 몸이 등장하고 우리도 한 몸이 되거든요. 한 몸이 되어버리면 문제가 이게 연결이 안돼요. 이게 문제에요. 왜 연결이 안 되느냐 하면, 몸이 있는 곳에 뭐가 생기느냐 하면 세계관, 영어로 하면 필드라 하는데 장 또는 세계관, 내 몸이 있으면 몸만 달랑 있는 것이 아니고 아우라처럼 뭔가 피어나는 나만의 세계가 나로 인하여 따로 장만이 돼요. 장만이 된다 말이죠.
여러분들은 드라마를 신앙생활 한다고 거의 안 보지만, 저도 거의 안 보는데 가끔 눈에 띠이면 이런 게 있어요. “니가 어디 니같은 주제에 뼈대 있는 우리 집안에 근본도 없는 것이(무생물지칭 할 때) 감히 우리 집안을 넘봐!” 니가 내 아들하고 애 낳았다고 할 때, 내가 이만하면 되겠어? 하고 다방에서 만나가지고 봉투에 넣어가지고 됐다, 이만하면 하고 미국이나 해외에 나가 있어라, 내 눈에 띠지 마라, 봉투 내밀잖아요. “어머니는 날 그런 여자로 봅니까?” 봉투 내밀지요. 그런 여자로 봅니까, 하고 집어넣어야 되는데.
근본도 모르는 것이, 근본이란 말은 뭐냐 하면, 저쪽 재벌집안에 3명이고 이쪽 집안이 3명이라면 숫자로서는 3:3 똑같잖아요. 그런데 이쪽은 근본이 없는 거거든요. 개별적으로는 3이지만 근본까지 포함해버리면 저쪽은 너무 잘살고 이쪽은 너무 뒤떨어지는 거니까 이쪽 장과 저쪽 장이 결합이 안 되는 거예요. 결합이 안 됩니다. 근본이 없는 것들이 누구냐 하면 성경에 보면 인간 자체가 근본이 없는 거예요.
제사장이 화려한 복장을 했잖아요. 여기 가슴팍에 완전히 보석을 깔아놨어요. 보석상을 해도 괜찮아요. 어깨에 보석 깔아놓습니다. 모자 쓰고 옷도 한 벌, 두벌 속옷도 입고 교황처럼 차림새해가지고 성전에 들어가는데 그 백날 들어가 봐야 죽습니다. 그거 거룩해 보이지요. 보석들이 깔아져있으니까 거룩해 보이죠. 피가 거룩이에요. 피가. 왜냐, 인간은 근본도 모르는 것들이. 어딜 감히 천국을 넘봐요. 근본도 없는 것들이. 근본도 없는 것들이 어디 감히 천국을 갈 수 있습니까.
따라서 인간의 몸이 개별적으로 예수의 몸을 믿을 수가 없어요. 인간의 몸이 가는 곳에 그동안 자기가 양육 받고 자기가 배웠던 모든 사고방식과 사상체계가 완전히 자기를 뒤덮여 쓴 채로 예수님을 대하게 돼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은 그동안 배웠던 것, 자기가 배웠던 것들이 자기를 사상을 온통 몽땅 다 가득 채워져 있어요. 윤리와 도덕이 그런 겁니다. 그래서 결혼할 때 집안보고 결혼하라는 말이 뭐냐 하면, 근본도 모르는 것들하고 하게 되면 이게 엉망진창 살기 때문에 제대로 자녀교육 잘 받았으면 예의범절 지켜놨으면 그러면 우리 집안하고 대충 맞다, 이리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사고방식을 누가 장식하고 누가 채웠는가 하면, 이게 바로 마귀가 채워준 거예요. 마귀가 채워 준 그 근본도 모르는 이 사고방식이 주님이 보시기에 이 근본도 모르는 사고방식이 예수님을 통해서 3가지로 정립이 돼요.
하나는 뭐냐 하면 ‘사람은 돈 없이는 못산다.’ 이것은 광야에서 마귀와 시험할 때 나타난 겁니다. 사람은 돈 없이는 못산다는 거예요. 양식 없이는 못산다, 이 말이죠. 돈이라 하는 것은 물건을 주고받는 물품교환 수단이 되기 때문에.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남 없이는 못산다.’ 사람은 외로워서 못 살아요. 돈 있어도 죽는 이유가 뭐냐, 외로워서 죽어요. 내 나이 영감이 다 됐는데 전부 자식들은 내가 죽고 난 뒤에 유산 문제로 자꾸만 다투니까 성질나가지고 80, 70넘은 노인이 갑자기 37살 청년으로 변해가지고 죽고 난 뒤에 완전히 새로 뒤로 와가지고 다시 회장님 돼가지고 그 회장 자리에 앉아가지고 자식들이 어떻게 하는가 살펴보는 그 드라마가 수목드라마에 나와요.
사람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 그 노인네가 장나라를 사랑하는 내용이에요. 그 자기를 사랑해주는 아가씨로 인해 사는 보람을 느끼는 겁니다. 남 없이는 못 살아요. 남이 박수를 쳐줘야 자기는 비로소 사는 보람을 느낍니다. 남이 알아줘야 되는 거예요. 옷을 왜 좋은 옷을 입습니까? 혼자 거울 보려고 좋은 옷을 입는 게 아니에요. 뭔가 구실만 있으면 동창회든지 구실만 있으면 그 옷 입고 나가요.
그래서 교회 올 때는 뭐냐, 자기 믿음 좋은 걸 티를 내기 위해서 일부러 나쁜 옷 입고 와요. “아이고, 권사님 저렇게 검소하고 수수한 줄 몰랐다.” 하지만 그 권사가 동창회에 가면 완전히 180도 바뀝니다. 뽐낼 수 있는 건 다 장착해서 모든 귀한 건 다 하고 어울리지 않는데 가방부터해서 모든 걸 명품으로 깔아가지고 없으면 가짜로 하던지 그리 가요. 참, 교회가 인간성을 버립니다. 교회에 와서 자랑하면 될 건데 꼭 교회에는 수수하게 와요. 왜, 남 없이는 못 살기 때문에. 욕해도 좋아요. 사랑해도 좋아요. 하여튼 욕하는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옆집에 사는 아파트 부부가 매일 부부싸움 하니까 “아이고, 매일 바가지 긁는 그런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고 기러기부부인가 비둘기인가 그렇게 답변을 하잖아요. 개콘에 보면 나와요. 301동, 302동 나와요. 아이고, 그런 바가지 긁는 마누라 있었으면 좋겠다.
이게 뭐냐 뛰어 내려라, 모든 인간이 당신을 메시아로 인정할 것이다. 왜, 모든 인간이 그런 속성을 자기가 다 심어놨기 때문에. 남을 의식하면서 비로소 사는 보람을 느끼는 거예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욕망을 유발하게 되어있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는 내가 안 봤으면 모르지만 본 이상은 잠을 못 자게 되어있습니다. 정말 백화점에 갔는데 내가 입었으면 딱 나한테 어울리는 옷을 0.2초만에 봤다. 보면서 ‘안 돼! 내 현재 입장에서는 살 돈이 없어.’ 분명히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는 맞아요. 맞는데 집에 가서 잠이 안 오는 것은 이성입니까? 감정입니까? 왜 이성적으로 정리가 안 되지요? 그 다음날 다시 가보니까 아직도 나를 사가세요, 하는 소리를 외치는 것처럼 아직도 안 가지고 갔어. 아무리 봐도 내 옷 같아. “안 돼! 이건 마귀의 시험이야.” 하고 돌아서지만 또 잠이 안 오는 걸 어떡해. 잠이 안 오는 걸 이성적으로 양 한 마리, 두 마리 해가지고 잠 올 문제도 아니고 “에이, 이번 달 긁어버리고 다음에 아껴 써야지.” 이렇게 해서 사지요. 사고 난 뒤에 참 잘 샀다, 이렇게 생각이 들지만 몇 개월 지나서 새로운 옷이 걸리면 새가다가 나오면 “에이씨, 괜히 샀어.” 이리 하잖아요. 홈쇼핑 중독이 다 그렇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돈 없이 못 사는 것, 이건 개별자보다 우선됩니다. 환경자체가 우선돼요. 인간은 상황이 우선이지 개인이 우선이 아닙니다. 상황에 적응하도록 되어있어요. 현대 생물학은 딱 한마디로 정립이 돼요.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 그걸로 끝입니다. 이 생물학에서 나온 심리학은 학교 심리학은 이거 딱 하나밖에 없어요. “니는 그래가지고 나중에 어른 되어서 이 사회에 적응하겠느냐” 적응하게 되면 교육 잘된 것이고 적응 못하면 낙오자가 되는 겁니다.
옛날에 14세기 16세기에는 적응 못하는 걸 가지고 정신병자라고 했거든요. 정신병자. 그 때 중세 때 정신병자는 뭐냐 하면, 계시 받는 사람이 정신병자였어요. 계시 받는 사람. 근대에 와서 정신병자는 뭐냐 국가의 헌법에 위반된 사람을 정신병자라 해도 그 다음부터는 집단수용하게 되어있어요. 옛날에는 수용이 안됐었어요. 앞으로는 어떻게 정신병자 될 줄 모르지요.
지금 현대에 와서 정신병자는 위선자가 아닌 자가 정신병자가 돼요. 위선자가 아닌 자. 자기를 위선하지 않고 다니는 사람을 다 정신병자라고 해요. 그러니까 정신병자는 솔직한 사람이 정신병자 돼요. 꾸며야 되고 싶게 말해서 거짓말할 줄 모르는 사람이 정신병자 돼요. 만약에 어떤 목사가 거짓말 못한다, 그러면 그 교회에서 쫓겨나야 돼요. 그리고 갈 교회 없어요. 거짓말 해줘야 교회가 되고 목회가 돼요. 왜요? 그래야 모든 사람이 “내게 거짓말 해봐!” 라는 쪽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제발 내게 거짓말해서라도 믿음 있다고 이야기해주고 천국 간다고 이야기해줘. 내게 거짓말 해 봐!” 유명한 소설 있잖아요. 전부 다 거짓말로 소통. 그 교회에서 바자회 한다면 ‘거짓말의 바자회’ 거짓의 바자회가 되는 거예요.
거기서 바로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다. 이런 소리 하는 것은 이단이에요. 그래서 내가 설교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이단인 듯 이단 같지 않은 이단이라고.
문제는 이것이 갇혀있다는 거예요. 결국은 우리는 아무리 예수님이고 하나님이고 삼위일체가 좋다고 해도 아무리 좋아도 돈이 생길 때의 기쁨만큼 주님의 기쁨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주님이 기쁘다, 기쁘다, 그건 자기가 스스로 최면 걸면 돼요. 최면 거는데 좋은 환경이 새벽제단이거든요. 불꺼놓고 기도만 할 때. 한 쪽은 난로 스토브 켜놓고 뜨거워하는데 그 뜨거움인지 아니면 성령의 뜨거움인지 분간도 안 되는 그런 공간에서 뜨거워보세요. 나중에 보면 성령의 뜨거움이 아니라 벌겋게 난로가 가열해서 뜨거워요. 주여, 주여 하면서 고요함 가운데 그런 기쁨 주님의 기쁨을 하게 하옵소서. 아무리해도 그리고 난 뒤에 새벽기도 나가가지고 아침 10시에 로또 당첨 되어보세요. 이 돈이 주는 기쁨이 아침의 새벽기도 은혜 받은 것보다 더 기쁩니다.
그리고 누가 와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는 소리를 하면 그 기쁨은 당신은 위대합니다, 하게 되면 주님이 주신 기쁨보다 더 크고 그리고 내가 바랐던 그것을 누가 제공할 때, 내 원대로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예수 없어도 살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드는 겁니다.
이 세 가지 한꺼번에 이루기 위해서 사람들은 뭐 드는가 하면, 제가 주일 낮에 했잖아요. 보험 든다고 했잖아요. 이것을 상처 나지 않기 위해서 보험 들어놓는 거예요. 온갖 보험 예수 다 나옵니다. 불교는 이 원인들이 개인의 몸에서 나왔다고 보는 거예요. 불교는. 따라서 이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무엇을 족쳐야 되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족쳐야 되지요. 여자들이 미장원에 가서 세속적인 자랑을 하니까 아예 뿌리 채 깎으면 되지요. 뿌리 채 홀랑 깎고 절에 가면 되지요. <산장의 여인> 그 여인이 중 된 것처럼 머리카락 홀라당 깎고 목탁 치면서 하는데 문제는 이게 삼손이라는 게 문제에요. 머리카락이 자라요.
늙은 여성은 젊은 여성이 그렇게 부러워요. 왜, 계속 머리카락이 자라난다는 자체가 너무나 부러워요. 하지만 늙은 여성은 이제 머리카락이 빠져. 그러니까 수도원이나 여성들 사이에 그 자체적인 질투와 질시 그 탐욕 이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수녀들 가운데 학력 차, 니 고등학교 나왔나? 어느 대학 나왔노? 이 수준 차는 견디기 힘들 정도에요. 그리고 여성들 간에는 니 절에 올 때 얼마내고 왔나? 이 돈 문제, 세상에 어디에 가도 내 몸이 있는 이상은 이 필드, 이 영역은 같이 따라오는 겁니다. 우리는 꿈에서 깨어날 방법도 모르고 평생 꿈만 꾸다가 꿈속에서 그냥 사라져가는 거예요. 이 꿈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절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이걸 없애는데 없앨 방법이 없지요. 절 자체가 이걸 모아놨으니까. 돈 되는 큰 절 가고 싶어 하고 신부도 큰 성당 가고 싶어 하고. 그 다음에 신부도 인기 있는 신부이고 방송에 나와 가지고 인기 있는 신부되고 싶고 시도 좀 쓸 줄 아는 수녀 되고 싶고. 세상 부귀영화는 신부가 되어가지고 소위 유지, 그 동네 유지할 때 어떤 개통식 할 때 앞자리에 앉는 유지 있잖아요. 큰 교회 당회장 앉고 옆에 신부 앉고 그 옆에 그 동네 뒷산의 중 앉고 그 다음에 국회의원 앉고 경찰서장 앉고 그러잖아요. 그 동네에 같이 앉고 싶어 하는.
이것은 벗어날 수 없어요. 그러면 해결책이 있어야 하는데 내 몸이 있는 이상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죽여 버립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이걸 죽여 버리지요. 그런데 첫 째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못 죽는다고 했어요. 인간은 죽지를 않습니다. 이 세상에 죽을 수 있는 분은 딱 한 분밖에 없어요. 예수님만 죽습니다. 그 예수님의 죽음을 죽지 않는 인간에게 성도에게만 자기 백성에게만 그 죽음에 덮쳐버려요.
그러면 그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으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진짜 죽음을 경험합니다. 그 진짜 죽음이 뭐냐 하면,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했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십자가에서 외쳤던 그 외침, 그것은 예수님 아니면 아무도 그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어느 누구도 그런 경험, 그런 체험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의 신비에요.
십자가는 십자가 믿고 피 믿고 구원 받으라고 준 십자가가 아니고 그 구원 받고자 하는 내가 죽어 사라져야 한다는 그걸 통보해 주는 그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에요.
“이제는 구원 없다! 나는 구원 받고자 하는 너를 죽였으니까 더 이상 구원 없는 거야. 인간은 구원 없는 거야.” 인간의 구원, 인간이 구원 받는 건 없습니다. 인간이 구원 받는 건 없고 이제 있는 것은 예수님 몸이 구원 받는 거죠. 예수님 몸만 구원 받으면 예수님과 함께 죽음에 참예한 자만 예수님과 함께 구원 받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로마서6장 한 번 봅시다. 여러분들이 오후가 돼서 잠 좀 오게 되면 같이 읽어볼까요, 이렇게 하겠는데 지금 생생하기 때문에 제가 읽겠습니다.
로마서6장 1절, 2절에 에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했잖아요. 죄에 대해서 우리가 죽을 수가 없어요. 왜, 우리는 죄를 모르기 때문에. 내가 지어낸 죄는 하나님 앞에서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지어도 그게 죄인지 아닌지 몰라요. 우리가 생각하는 죄라는 것은 온전한 죄가 아닙니다. 온전한 죄는 예수님만 알지 우리는 몰라요.
따라서 죄를 지어놓고도 우리는 이건 죄고, 이건 죄 아니고, 죄 아니고 하는 그 죄마저 죄인 줄을 우리가 몰라요. 따라서 여기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 할 때, 이 우리는 우리 능력으로 요 문장에 나오는 요 체험을 우리가 실시될 수가 없어요. 죄에 대해서 알아야 죽던지 말든지 하지 죄를 모르는데 무슨 죽어요. 우리는 헌금하는 게 죄 아닌 줄 알고 예배 참석하는 게 죄 아닌 줄 알고 있거든요. 헌금할 때 돈이 얼마나 아깝다는 것을 다시금 새롭게 느끼고. 예배 참석하면서 ‘하나님, 안 올 수도 있었는데 믿음 좋아서 왔습니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거예요.
이게 뭐냐, 탐내지 말라, 하는 순간에 우리는 탐을 내게 되어있어요. 무슨 어떤 행동을 하면서 우리는 거기에 동반해서 자기 잘난 맛, 자기 잘난 체, 그러니까 아까 두 번째 뭐라고 했습니까? 남으로부터 인정받는 거 했지요. 남으로부터 인정받는 그 남 속에 누가 들어있는가 하면, 하나님 예수님 다 들어있어요.
내가 사는 이유는 남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사는 겁니다. 헤겔이란 철학자는 이걸 그 제자가 이야기했지만, 그걸 ‘인정투쟁’이라 해요. 이 세상은 뭐냐, 투쟁을 하는데 투쟁하는 이유가 뭐냐, 서로 내 인정을 해달라는 투쟁, 그것이 세상이라고 했어요. 따지고 보면 진짜 맞는 말이에요. 다 인정하는 게 뭐냐 하면, “그래, 형님 우리 아버지 유산 다 가져가소.” 내가 형한테 다 맡기겠다. 더러워서 안하겠다. 이 말은 곧 무슨 뜻입니까? 돈을 포기하는 대신 뭐를 인정받겠다? 돈을 초월한 동생이란 것을 형제로부터 인정받겠다는 거예요. 그 놈이나 돈 가진 놈이나 똑같은 놈이지. 자기 딴에는 거룩한 순교라도 한 것처럼 하지요. 무슨 순교자가 있어요. 이 세상에 거룩한 순교자는 없습니다. 죄인인데 순교자만 있을 뿐이지 거룩한 순교자는 없어요.
성도는 다 순교자입니다. 왜냐 하면, 죄에 대해서 죽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죽은 자요, 그 다음에 뭡니까? 의에 대해서 산자 하기 위해서 죽였는데 의를 알아야 살지요. 그러니까 죄에 대해서 다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 3절 보세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언제요? 언제 우리가 죽었는데요? 어디서 죽었는데? 로마서6장3절 이것이 언제 이렇게 됐습니까? 언제? where? 언제 이런 일이 있었지요? 언제? 말씀이 갖고 있는 시간관은 우리가 개별자로 있는 시간관과는 달라요. 개별자라는 말 알지요? 개별자라는 말은 남과 다름없이 내 나름대로의 세계관과 구원관 내 나름대로의 하나님과 내 나름대로의 인생관이 따로 챙기는 걸 가지고 개별자라 합니다.
우리는 몸만 두고 개별자가 아니고 몸에서 형성된 나, 그게 누구한테 배운 것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익혀진 거죠. 이미 남들이 가졌더라도 본인한테의 몸이 또 본인이 만들면 본인 개인의 것이 되어버려요. 그러니 사람은 각자 인정투쟁, 서로 지 잘난 맛에 투쟁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개인의 체험 속에서 주님의 시간을 개인이 포착하지를 못해요. 왜냐 하면, 개인의 시간은 과거밖에 기억을 못해요. 현재라는 것은 딴 게 아니고 과거의 누적을 현재라고 합니다. 기억의 누적이에요. 인간은 기억의 덩어리에요.
인간의 몸이 있잖아요. 인간은 몸에 대해서 아는 게 아니고 자아를 알아요. 자아는 몸하고 다르거든요. 몸은 세포로 되어있는 걸 몸이라고 하고 자아는 거기서 나온 이미지인데 인간은 자아에 집착하지 몸은 생각 안한다니까요. 자아는 허상인데 허상에 매달린다고요. 허상은 어디서 나오느냐, 그동안 몸이 이 세상의 자연세계와 주고받던 교류 상호협동 했던 그 모든 체험에 기억창고에요. 기억창고. 기억덩어리라니까요. 과거덩어리에요.
그런데 인간은 과거 있습니까? 없습니까? 과거라는 게 실제로 있습니까? 없습니까? 과거의 특징이 뭐냐, 날아가 버린 게 과거든요. 여러분들이 만약에 과거에 집착하면 지금 못살아요. 왜 못 사는가 하면, 내 늙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짜증나서 못 살아요. 내일 되면 또 늙을 거 아닙니까. 화딱지 나서 못 살아요. 자꾸 늙어요. 사진 꺼내보세요. 작년 사진 꺼내어보세요. 화가 더나요. 왜 작년만큼도 안 되느냐 내 얼굴이. 작년에는 화장발이 받았는데 작년보다 화장발이 먹히지를 않아요. 얼마나 화가 났으면 흰머리 다 뽑아가지고 긴 머리 소녀가 완전히 파마소녀로 다 만들어놔요. 60넘으면 왜 긴 머리가 안 되지요? 천 경자가 긴 머리 하니까 흉해요. 80넘어서 긴 머리하니까 보기에 안 좋다 하지요. 짧은 머리하던지 파마해야 되는데. 왜 긴 머리가 안 됩니까? 내가 용서가 안 돼. 본인이 용서가 안돼요.
본인이 용서가 안 된다는 말은 누가 누구한테 정죄한다? 내가 나를 미워할 수밖에 없어요. 멈추지 않고 늙어가는 쪼그라드는 내가 용서가 안돼요. 그런데 그 걱정은 내일 되면 또 해야 돼요. 내일되면 또 꼬라박으니까. 그러니 사람이 짜증나서 살수가 없습니다. 힘이 들어서 못 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기껏 방법이 뭐냐 하면, 그냥 집에서 놀지 말고 일에 몰두하세요. 일에 몰두하는 순간만큼은 어서오이소, 할 때만큼은 잊어요. 잊고 그 다음에 나를 칭찬해 주는 사람을 찾는 거예요. 동창회라든지 동우회, 산악회라든지 낚시회라든지 교회에 가가지고 “아이고, 권사님 한 인물 났습니다. 가을되니 훤합니다.” 이런 소리 들어가지고 거짓말인 줄 알지만, 내가 이만큼 해줬으면 그 만한 인사는 해줘야지, 주고받는 게 있어야지 해가지고 하는데 “아이고, 권사님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렇게 해주는 그 재미, 그러니까 주변에 사람이 있고 이렇게 할 때, 사람은 그나마도 숨 좀 쉬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첫 째 시간에 인간은 이미 죽었다고 했지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었어요. 죽었다는 것은 니가 살아있는 니 몸 가지고 죽었다, 를 규정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규정하느냐 그 다음에 두 번째 시간에 나오는 거예요. 로마서는 그렇게 하고 해답 없이 놔두고, 해답을 히브리서10장에서 찾아봅시다.
오늘 해답의 중요한 키포인트는 ‘언약’입니다. 자, 언약을 설명하는데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언약은 누가 준겁니까? 하나님 아버지. 누구에 대해서 주는 겁니까? 아들에게 줬고. 아들에 대해서 죽는다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기 살과 자기 피죠. 예수님의 살과 피가 모아지면 뭐가 되지요? 그리스도의 몸이 되지요. 몸이 깨어지면 죽게 되면 뭐가 나옵니까? 살과 피가 나오지요. 그 살과 피를 다시 모으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의 몸이 되지요.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이 살과 이 피가 하나님 아버지가 세우신 새로운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이죠. 그걸 다시 모으면 예수님의 몸이 새 언약이 되겠지요. 자, 그렇다면 예수님의 몸이 새 언약이 된다 이 말이죠.
우리의 자아는 기억덩어리, 사실은 자아라는 게 없어요. 몸이 있을 뿐이지 인간은 자꾸 몸을 자아라고 보는데 자아는 없어요. 몸이 있을 뿐이에요. 그런데 몸을 그냥 몸이라고 하는 사람 아무도 없고 이 몸이 나입니다. 나. 나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전에 에고하고 셀프라고 이야기했지요. 셀프라고 해도 되고 오브젝트 주체라고 해도 괜찮아요. 주체. 이것은 부산강의에서 라이프니츠 들어보고 참고하시고요, 동영상에는 안 찍혔고 음성에만 찍혔습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부인하라 했거든요. 마태복음16장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그러면 거기에 뭐가 있다? 영생이 있지요. 그러면 자기가 죽어버리면 몸이 없어집니까? 몸이 있습니까? 자기를 부인해도 뭐는 남아요? 몸이 남아있지요. 그동안 우리가 몸에 관심 없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자기가 중요하지 자기 몸은 안 중요하거든요. 혹사시키더라도 심지어 자살을 하더라도 자기만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한 천국은 어디에 갑니까? 몸이 가야 돼요? 자아가 가야 돼요? 우리는 자꾸 자아가 가는 천국을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천국의 주인공은 누구에요? 자기가 더더욱 의시 댄다 말이죠. 이 세상에서 자기 미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예를 들어서 이 세상에서 자기 딸을 유괴해서 죽인 어떤 아저씨가 있는데 천국 가서 반갑다, 친구야! 할 수 있습니까? 내 딸을 죽였는데. 그게 영화 <밀양>이에요. 니가 가는 천국 같으면 나는 안 가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아와 자아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몸을 어떻게 하는가. 자아가 내 몸의 주인공하지 말고 이 몸을 주인을 바꾸면 되겠지요. 내 몸은 내 몸이 아니고 누구 몸이다? “내 몸은 나를 만드신 분의 몸입니다.” 라고 몸을 드리면 된다 말이죠. 그 몸을 드리면 돼요. 자아 말고 우리 몸의 주인이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담의 몸을 갖고 왔습니다. 아담의 몸을. 그래서 예수님을 인자라고 해요. 인자. 인자라는 것은 사람의 아들이거든요. 진짜 인간의 아들은 아담의 아들은 나밖에 없고 너희들은 아담의 아들인 줄 모른다. 너희는 자아의 아들이지 아담의 아들이 아니에요. 진짜 어려운 말이지요.
우리의 아버지는 이만큼 훌륭하다, 그건 아버지 자아의 이미지지 아버지의 그 몸의 아들은 아니에요. 예수님께서는 육신으로서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서 스스로 아담의 몸에 진짜 인자가 된 거예요. 진짜 인간이 된 거예요. 인간이 되어놓고 인간된 몸으로 어디 가느냐, 언약에 뛰어듭니다. 언약에 뛰어들어요.
그 한 예가 뭐냐 하면, 다니엘 세친구가 예를 듭니다. 다니엘 세친구가 포로 잡혀왔잖아요. 그런데 마르둑 신을 믿는 바벨론에서는 자기가 여호와 믿는 유다를 삼켰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 아가리를 빌려온 거죠.
큰 고기가 요나를 삼켰습니까? 요나가 큰 고기의 혜택을 입은 거예요? 어떻게 된 거예요? 고기가 요나를 먹을 때는 잡아먹으려고 먹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큰 고기를 준비하사 요나를 살리는 물속에서 일종의 잠수함 역할을 하라고 이용한 거죠.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제대로 된 언약의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서 바벨론을 이용한 거예요.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삼켰다고 했는데 삼켰다는 이것이 나중에 찢습니다. 속에서 나오는 인자의 나라가 더 커져버리면 바깥의 포장지가 찢어져요. 찢어진 것을 미국강의에서는 망사스타킹이라고 했는데, 찢어져요. 째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에게 무엇을 하게 하는가 하면, 금 신상을 섬기게 했고 금 신상에 절하지 않는 자는 풀무불에 집어넣는다 이 말이거든요. 여러분들이 불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것을 아십니까? 어떻게 알지요? 우리 중에 아무도 경험해본 적 없습니다. 왜냐 하면, 뜨겁기 때문에. 단백질은 600도 이상 되면 타버려요. 세포가 단백질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것은 타가지고 죽는다는 사실을 화장터에서 우리는 목격합니다. 본인은 경험하지 않았지만 자기가 눈으로 목격한 바에 의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내 몸에 하나의 아우라, 하나의 장이 돼요. 내 몸은 절대로 절벽에서 뛰어내려서는 안돼요. 왜? 뛰어내리면 죽는 거야. 아프면. 물에 빠져서 물고기에 죽는 거야. 이건 하나의 아우라라. 우리의 새로운 세계관이 있습니다. 그 마르둑 세계관이 뭐냐 하면 불 속에 들어가면 누구든지 죽는다, 입니다. 그 죽는다를 통해서 누구든지 자기 안에 전부 다 예속할 수 있고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다니엘 세친구도 니가 뭐 별개냐, 하고 한 거예요. 그리고 다니엘 세친구도 알아요. 지가 통뼈도 아니고 지가 불 속에 들어가면 죽는 걸압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가면 그 사자에게 뜯긴다는 것을 알아요. 다 알아요.
요셉이 꿈을 해몽할 때, 이 꿈의 해몽을 본인이 못 한다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다니엘이 느브갓네살 꿈을 해몽할 때, 꿈 해몽을 내 실력으로 절대로 못한다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다만 다니엘 세친구와 그리고 바벨론의 차이점이 뭡니까? 다니엘 세친구와 아브라함과 요셉은 자기가 부인된 거예요. 꿈 앞에서. 이 자아라는 게 허풍이라는 걸 알아요. 그냥 허세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요. 실제로 나를 다루는 게 아니고 주께서 내 몸을 다루는 거예요.
나는 딸이 시집 잘 갔으면 좋겠고 어떻게 하면 좋겠다. 그러다가 내가 죽으면 딸도 없어져요. 내가 일단 살고 난 뒤에 딸이 시집가면 좋겠다. 잘되면 좋겠다. 내 남편 잘됐으면 좋겠다가 있지 일단 내가 살고 난 뒤에 그 다음 문제거든요.
그런데 내가 오늘밤에 내 영혼 데려가면 저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예수님이 누가복음12장에서 하신 말씀이잖아요. 누가 되겠어요? 그것 보고 어리석은 자여. 자꾸 왜 니 자아를 생각하느냐, 오늘 밤에 니 영혼, 몸을 데려가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왜 자꾸 니는 자아를 붙들고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 자아는 우리의 자아가 확장되면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이에요. 불 속에 들어가면 죽는데 결국 느브갓네살과 다니엘 세 친구의 싸움은 결국 지금 오늘날 우리가 누구하고 싸우느냐,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싸움이에요.
“주여, 저 자아 잘되어야 됩니다.” 주님께서는 “니 오늘밤 니 영혼 데려가면 누구 것이 되겠느냐?” “아이고, 저한테 그런 말 하는 게 아니고요. 에이, 그렇게 하지 마시고요, 좋게 이야기해야지. 내가 좋게 이야기하면 좋게 이야기해야지. 죽는다는 그런 부정적인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그래가지고는 교인들 안 나오니까 그러면 주와 동업이 안 되잖아요. 좋게, 좋게 갑시다.” 다니엘 세친구가 불 속에 들어갔습니다. 인간들이 납득이 되는 불속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심지어 7배나 올린다고 소방관들 죽었어요. 그래서. 불 올리는 포항제철의 보일러공도 죽었다니까요. 너무 뜨거워서 죽었어요.
여러분, 홍해강가에 홍해를 건너가는 사람은 죽습니까? 삽니까? 이 질문 자체가 잘못 된 게 어린양의 피를 믿은 사람은 살고 같은 인간이라도 뒤따라온 애굽 군대는 죽지요. 그럼 같은 문제입니다. 불 속에 들어간 사람은 죽습니까? 삽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된 사람은 살고 언약이 없는 사람은 죽습니다. 따라서 거기에 세 사람 들어갔는데 거기에 누가 있었습니까?
4번째 사나이, 마치 하나님의 아들 같은 천사와 같은 분이 있어가지고 거기서 강강수월래, 브루스 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손잡고 춤을 추고 있었지요. 이걸 바깥에서 봤다 이겁니다. 봤으면 불 경계선 누가 죽은 자요? 누가 산 자입니까? 자, 불을 경계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살았다는 자들이 사실은 죽었고 사실은 죽은 몸이고 자아는 살아있고 그 자아가 죽을 몸을 붙들고 있을 때 그 자아는 가짜 허풍에 불과한 자아가 되는 겁니다.
그 허풍이 죽을까 싶어서 벌벌 떠는 거예요. 하지만 그리스도 언약 안에서는 누구도 안 죽어요. 아무도 안 죽어요. 마귀 믿어도 안 죽어요. 예수 안 믿어도 안 죽어요. 왜? 마지막 죽은 날에 다시 살려내기 때문에. 불신자도, 불교 신자 중도 성철 스님도 죽은 자도 마지막에 살려내거든요. 김수환 추기경도. 다 살려낸다 이 말입니다.
주께서 만든 몸을 주께서 허비를 하지를 않아요. 그 몸은 반드시 다 살려내는 몸으로 영원히 살 몸으로 만들어서 한 쪽은 지옥으로 한 쪽은 천국으로 분류 작업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 강의에 첫 번째 했지요. 안 죽으니까 문제라는 말입니다. 안 죽으니까. 사람이 죽으면 그만 같으면요, 해보다 안 되면 죽으면 자살하면 그만이에요. 그러나 자살해도 안 죽어요. 자살하면 자아만 죽지 몸은 안 죽는다니까요. 헛짓한 거예요. 헛짓. 처음부터 죽은 놈은 죽인 거예요. 죽은 놈이 죽은 거라니까. 그래서 죽기 전에 주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니는 백날 해봐야 헛짓하고 있다.
주님의 언약이 무슨 뜻인가 하면 이거에요. 요거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참, 중요한 이야기인데. 어려우니까 쉽게 해봅시다. 지금 예수님의 몸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했잖아요. 그리스도가 죽었다고 하는 것은 아담의 몸에 들어갔기 때문에 죽었지요. 그 몸은 들어가자마자 주님께서는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모든 아담은 저주받게 되어있어요. 이 사항은 변동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 죽게 되어있어요. 예수님도 포함해서 다 죽게 되어있어요. 죽는 다음에 저주받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예수님만이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다. 달랑 예수님 만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부활의 첫 번째 퍼스트 첫 번째 부활이에요. 첫 번째. 우리 인간의 시간에서는 에녹이 먼저 부활된 것 같기도 하고 엘리야가 먼저 부활된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된 것 같은데. 나사로가 예수님보다 먼저 부활 된 것 같지만 부활의 첫 열매는 그들이 아니고 예수님이 첫 열매에요. 왜냐 하면, 부활이란 말은 우리한테는 없는 거예요. 없는 세계에 보낸 거예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세계를 주께서는 만든 거예요. 처소를 만든 거예요. 애초부터 없었는데 주의 부활하심으로 처소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처소를 만들고 난 뒤에 예수님의 몸은 어디에 가있는가 하면, 지금 새로운 천국이 예수님의 몸에 가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은 이미 예수님의 언약 안에서 몸이 사라지는 게 아니고 죽은 몸이 되지요. 요게 오늘 마지막 강의의 제일 중요한 부분입니다.
몸이 없어진 게 아니고 어떤 몸이 된다? 죽은 몸이 되지요. 죽은 몸.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몸이 살았다고 보잖아요. 성도만이 성령 받은 십자가의 부활의 영을 받은 자만이 내 이 몸은 이미 죽은 몸이에요. 그러니까 흙에 속한 몸이고 흙에 속한 몸이기 때문에 후패해야 되고 간이식 해야 되고 온 머리 다 빠져야 돼요. 왜, 흙은 흙으로 돌아가야 되니까. 하늘에 속한 형상은 따로 있고 흙에 속한 형상이기 때문에 원칙대로 되어야 돼요. 그 되어가는 모든 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줬던 그 언약대로 시행되는 과정인 것을 성령을 통해서 믿게 되게 되면 그 사람은 언약 속에 함께 있는 겁니다.
다니엘 세친구와 네 번째 사나이와 함께 있는 것처럼 그 사람은 주님의 관계에 있어서 죽어도 산 자가 되는 겁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여기서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영생이라는 말이 우리 몸이 죽는 거와 상관없어요. 죽어도 영생이에요. 살아도 영생이고 죽어도 영생이에요. 이게 믿어져야 되는 거예요.
그럼 이걸 믿어지려면 어떻게 하느냐, 안 믿으면 돼요. 우리가 이 사실을 안 믿고 다시 자아로 돌아오는 겁니다. 자아로 돌아와도 주의 성령께서는 우리의 자아를 가만두지 않고 예수님의 소속된 몸으로 간주해가지고 오늘도 너희에게 내 증인되라고 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라고 나에게 어떤 일을 시켰다는 사실을 그 짧은 순간에, 사랑도 0.2초라는데, 0.2초만에 그렇게 짧은 순간에 우리에게 일깨워줘요.
늙어가는 거 염려할 필요 없고 죽는 것도 염려할 필요 없고 내가 사업 망해가는 것도 염려할 필요 없고 형광등 꺼져가는 것도 염려할 필요 없고 부르면 되니까. 쫓아오니까. 마치 대기해놨다는 듯이 오니까.
세상에 예수 믿는 거, 가족 하는 거, 그거 주님의 소관이지 내 가족 내 구원 받는 것 주님 소관이지 내 소관 아니에요. 내가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마치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었듯이. 내가 설득하고 양육하고 교육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다만, 주께서 나를 통해서 고넬료처럼, 베드로처럼 만나게 해줘가지고 어떤 계기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는 그 일은 하게 하시되 그 일까지도 누구 소관이다? 주님 소관입니다.
느브갓네살이 풀무불 만들 때, 주의 뜻대로 된 것이고 가고 싶지 않더라도 그 풀무불에 들어가야 될 그 다니엘 세친구도 주의 뜻대로 들어간 것이고. 태죽어도 괜찮아요. 괜찮은데 타죽는 기능을 한 게 아니고 안 타죽는 기능을 해서 네 번째 사나이 만나게 한 것도 주께서 하신 것이고. 거기서 다시 기어 나와서 늙어 죽어도 그것도 누가 하신 것이고? 주께서 하신 것이고.
그 어떤 것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더라도 주의 은혜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주의 은혜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효과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10절에 보면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시간개념이 달라져요.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는 과거의 몸이 아니고 이미 시간을 초월한 그런 주님께 소속된 몸으로서 이제는 후패하기만하면 되고 늙어 머리카락 빠지고 흰머리 되고 눈꺼풀 덮이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작업을 주께서는 언약대로 해주십니다.
“이래도 나를 믿나? 이렇게 늙어도 나를 믿나?” “주께서 믿게 하셨는데 왜 저보고 이야기하십니까?” 라는 고백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몸과 언약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기회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몸을 가지고 영생을 만들어내시는 그 작업을 오늘 우리 생애를 통해서 우리 인생을 통해서 지금도 하고 계시니 이 사실이 믿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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