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03 특강(야고보서와 로마서에서의 믿음) - 상처뿐인 인생a (강의:이근호 목사)
다같이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을 갖고 죽여주신 선물의 내용이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그 선물이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는지 그 내막을 말씀을 통해서 알고자 합니다. 우리보다 더 귀한 것이 우리 속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저희들의 평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교재에 보면 [야고보서와 로마서의 믿음]이라고 돼있지요. 보통 공부하게 되면 이걸 한 번씩 읽어보고 오시는 게 좋습니다. 다들 바쁘시니까 그런 요구를 제가 할 수도 없는 거고요. 읽어본다고 해서 이해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듬성듬성 뛰어가면서 중요한 것을 말씀드리는 식으로 해보겠습니다.
1페이지 위에 보면, 할 뻔 한 것과 아예 안 한 것. 다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할 뻔 한 것과 이미 일을 저지른 것과 같을 수가 없지요. 그런데 이건 우리 생각이고 하나님 생각은 달라요. 하나님 생각은 할 뻔 한 것도 이미 한 걸로 돼있습니다. 창세기 20장에 보면, 아비멜렉 추장이 나오는데 사라라는 아브라함의 부인을 아브라함이 누이동생이라고 하니까 아브라함이 먼저 원인제공을 했지요. 아비멜렉은 편하게 사라와 동침하려고 했는데 할 뻔 한 거죠.
20장 6절에,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란 항상 하나님 앞에 놀아난다는 거예요. 사람이 개인적으로 “나는 잘했다, 못했다. 이건 잘한 거야. 큰일 날 뻔했어.”라고 할 수 있는 권한이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박탈돼있습니다. 그러니 초장부터 이야기하지만 그냥 사시는 대로 사세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중요하지 내가 반듯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한테 통하질 않습니다.
반듯하게 사는 것이 복을 받을 수 있는 어떤 계기가 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구약 때 사람들이 오해를 한 것이고 신약에 오게 되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입니다. 어떻게 밀어붙이느냐 하면, 사는 것도 죄다. 살아있는 것도 죄다. 사는 것 자체가 죄다. “하나님, 살아서 잘 살까요, 못 살까요? 주께 영광 돌릴까요, 말까요?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나의 삶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뭐라고 해도 일단 살아있다는 자체가 죄를 유출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구미에서 불산 탱크, 이 사건 얼마 전에 났지요. 불산이란 것은 유리나 소독약 또는 정제공장에서 옥탄가가 높이는데 꼭 필요한 요소가 불산이에요. 그 탱크가 불나버렸으니까. 경원대학 근처가 완전히 쑥대밭이 돼버렸어요. 노랗게 돼버렸어요. 탱크에 들어있지만 그 안에 불산이란 독성이 들어있는 거예요.
우리가 몸이라는 탱크 안에 갇혀있지만 이게 터지면 온 천지에 죄를 발산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야기했잖아요. 네 속에 새롭게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네 속에서 나오는 게 더 더럽다. 바깥에 나올 때 거룩한 것인가, 속된 것인가? 하고 내가 검사해서 “하나님, 이것은 안 합니다. 이것은 합니다.” 내가 검수관이 되어서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배척하기를 이전부터 우리 속에는 우리가 손댈 수 없는 엄청난 죄가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착한 것은 하고, 나쁜 것은 안 하겠다는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죄 아닌 게 없는 셈이 되지요. 모든 게. 신약에 와서 주님께서는 “너, 죄인이야.”라고 이미 일방적으로 단정 짓고 모든 이야기를 시작하는 거예요. “너는 죄인이야.” 할 때 그 짧은 문장을 말하기 위해서 무려 창세기부터 신약까지 오는 긴긴 시간들이 그만큼 소비가 되었습니다.
그냥 우리 인간들끼리 놀아라. 놀다 나중에 신약에 가면 너희들의 죄인인 줄 안다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따로 만드신 나라가 있었고, 그 나라가 이스라엘이죠. 야곱의 족속이죠. 야곱의 민족을 방문하듯이 풀어주면 죄를 아는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 민족을 만드시고 거기다가 하나님의 약속, 언약을 따라 붙이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언약과 만나는 민족은 유일하게 이스라엘밖에 없는 거예요. 그 민족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자기 속에 내장돼있는 죄는 다 까발려지고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대치는 혹독한 거예요.
이 이야기가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내가 예수님 올 때까지는 이방나라에 그냥 방치했다. 방치했다는 제 표현이고 성경대로 하면 봐도 못 본 척 묵인한 거예요. 묵인했다가 마지막 때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소매 걷어붙이고 이제 너희들도 옛날 이스라엘처럼 똑같은 신세에 들어간다.
이렇게 보니까 모든 성경의 내용은 성경 구절 하나 잡아당기면 마치 칡넝쿨 엉키듯이 고마마나 감자 같이 하나 잡아당기면 줄줄이 다 올라오는 식으로 성경해석이 지하에는 그렇게 연결돼있습니다. 파리 시의 하수구처럼 전부다 연결돼있습니다. 그걸 우리가 칼질해서 끊을 수가 없는 거죠.
이스라엘에게 속한 모든 말씀이 이방나라까지 다 연결돼있다는 사실이 언제 드러나느냐 하면, 이사야. 다른 오바댜나 하박국과 구분해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은 대선지서라 합니다. 학자들이 그렇게 이름을 붙였는데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에 와서 드디어 이스라엘을 다루던 하나님의 징벌의 영역이 이스라엘이 서서히 무너져 주저앉으면서 그 하나님의 무서운 약속이 주변나라들까지 확장된다는 내용이 다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암몬은 어떻게 되고, 바벨론은 어떻게 되고, 앗수르는 어떻게 되고, 애굽은 어떻게 된다는 내용이 나와요. 그전에는 그런 내용이 없어요. 흘러나오는 겁니다.
여기서 오늘 강의 첫 번째 중요한 게 등장해요. 하나님의 말씀이 방축을 넘어버리면 죄에 따른 저주와 심판의 범주가 확장된다는 원리. 죄가 이스라엘에게 내렸던 댐이 터져버렸으니까 예를 들면 이스라엘이 나중에 궁극적으로 바벨론에 잡혀가죠. 이스라엘을 바벨론이 품고 있으면 이스라엘에 적용했던 그 저주가 품고 있는 바벨론나라 전역에 미칩니다. 그러면 바벨론이 점령한 공간이 넓지요. 바벨론 다음에 메대파사, 그 다음에 헬라, 마케도니아, 그 다음에 로마, 요한계시록은 거기까지 해요. 그 나라에 이스라엘을 저주했던 저주가 확장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망하면서 죄 확장을 위하여 적용된 새로운 기준을 새 계명이라고 이야기해요. 새 계명이니까 십자가죠. 예수님의 피와 살.
새 계명이 되니까 옛날에는 십계명으로 닦달내시는 하나님께서,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이 탐내지 말라지요. 탐내지 말라는 계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닦달내던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의 운명과 더불어서, 방금 제가 뭐라 했습니까? 저주의 범주가 댐을 넘어서 확장되죠. 확장되게 되면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바벨론에게 확장되고 그 다음에 계속 확장되어서 마지막 기준이 새 계명, 곧 십자가죠.
십자가가 와버리면 그 다음에 첫 번째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의 모든 명령과 지시는 무엇을 위함이라? 극단적으로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 주어진 거예요. 왜? 범주가 오고 오는 세대에 다 퍼지니까. 이렇게 되면 이런 소리는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뭐냐 하면, 예수님 믿기 전에 율법으로 죄를 알았기 때문에 나는 죄인이구나. 그러면 이 죄를 어찌 할꼬? 어! 십자가가 있었네. 십자가 믿음으로 이제는 죄인에서 벗어나서 의인 되었으니까 성령이 가득 찬 입장에서 사도 바울의 권면과 모든 명령을 성령 없던 시절에는 못 지켰는데 이제는 본격적으로 사도 바울의 명령과 지시를 지키면 본격적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유일한 참된 이스라엘이 된다는 사고방식은 여기서 전부다 거짓말이에요. 왜? 마지막 시대는 새 계명 시대입니다. 어렵게 말해서 제한된 집단체제에 적용되는 그 계명이 개인의 영적까지 파고들어온다. 신약에서.
이야기를 다시 해보겠습니다. 아비멜렉은 사라와 동침할 뻔 했지 동침은 안 했지요. 그런데 할 뻔 한 것과 행한 것은 엄연히 차이 난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할 뻔 한 것은 죄가 아니고 일을 저질러야 죄가 된다고 하지요. 그런데 아비멜렉도 그렇게 신약에 오면 새 계명이니까 산상설교에도 있듯이 여자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최진실이나 이영애, 예쁜 사람을 보고 음욕을 품을 수가 있거든요. 아파트 침입해서 동침한 건 없잖아요. 음욕을 품었을 뿐인데 주님께서 동일하게 한 걸로 본 거예요. “했지?” “품었습니다.” “했지?” “품었습니다.” 이 차이.
예를 들어서 사도 바울의 디모데전서에 의하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 하잖아요. “너, 돈 사랑했지?” “사랑할 뻔 했습니다.” “그래도 한 거야.” “아닙니다. 사랑할 뻔 했는데 발 뺐습니다.” “아니야. 할 뻔해도 한 거야.” “적용이 너무 완벽합니다. 너무 심합니다.” 그러니까 심한 게 새 계명의 시대라니까. 그러니까 예수 믿고 새 사람 되었으니까 이제 말씀 지켜볼까? 그건 무슨 뜻이냐 하면, 말씀으로 자기를 제대로 위장해보겠다는 거예요. 예수 믿으니까 간섭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도대체 할 뻔한 게 죄가 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있는 자체가 죄의 덩어리로 살아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솔솔 빼내면 돼요. 속에 들어있는 죄를 바깥으로 내놓으시면 되는 겁니다. 일부러 죄를 질 필요 없어요. 사태가 일어나게 되면 잠복된 죄가 폭발하듯이 나오게 돼있습니다.
제가 글 하나 썼지요. [글은 과시가 아니고 폭발이다.] 그냥 터져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이 뭔데 인생을 이렇게 꼬이고 힘들게 합니까? 오늘 아침에 나올 때 [천사의 선택]이란 드라마에 나왔던 이야기에요. 그걸 제가 미리 예언해서 지난 주일에 이야기했잖아요. 은실이란 사람이 교회 찾아가서 그런 이야기한다고. “하나님이여 내 인생을 뭐 때문에 힘들게 하고 꼬이게 하는 겁니까?” 그게 뭐냐 하면, 자기가 그 동안 좋은 것만 채택하고 나쁜 것은 배척했기 때문에 내 안에 뭐만 누적돼있다? 착하고 선하고, 천심이라. 하늘의 마음, 천사의 마음만 있다고 본 거예요. 자기는 천사가 되고 싶어서 모든 걸 천사의 선택으로 하고 싶단 말이죠.
막상 일이 터지니까 누구한테 따집니까? 이 세상 운전하는 대빵 나와! 신의 주권사상? 주권사상 주장하는 대빵 나와! 뭔데 내 인생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노골적으로 이야기했죠. 은실이란 주인공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교회 가서 따지는데 오늘날 우리는 노골적으로 안 하고 할 뻔했죠. 그런데 할 뻔한 것도 죄가 되는 거예요. 할 뻔한 건 잠복돼있어서 계기가 되면 욱하고 나오게 돼있단 말입니다.
신약은 뭐냐 하면, 십자가 지신 예수의 몸과 우리가 만져지는 몸과 마치 [황야의 무법자]처럼 마지막 결투장면 아닙니까. 장고와 산초가 마지막 대결하듯이 신약은 뭐냐 하면, 죽어가는 몸과 이미 죽음을 경험하고 살아난 그리스도의 몸과의 마지막 일대일 대결하는 모습, 그게 신약이에요. 신약의 모든 성경해석은 죽음을 품고 해석해야 됩니다. 목사가 강단에서 설교할 때 “여러분은 안 보이지만 저는 죽음을 품고 있습니다. 이 설교 마치고 각혈하고 죽는다 할지라도 저는 감사합니다. 오늘로 마감입니다. 끝났습니다. 나는 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죽는 겁니다.”라는 마음가짐으로 해석하고 설교를 해줘야 합니다.
만약에 자기 죽음을 품고 있지 아니하면 어떤 경우가 생기느냐 하면, 설교 끝나고 난 뒤에 몇 명이 은혜 받았느냐? 은혜 받은 사람도 돈 안 되는 사람은 은혜 받아 소용없고, 돈 있는데 돈 안 내는 저 인간이 은혜 받아야 되는데. 돈 내면 이번에 교회당 옮겨볼까? 이런 것. 헌금은 많이 나오는데 월급은 오년 째 스톱이 돼있고 보너스도 안 주고. 이런 것. 이게 뭐냐 하면, 죽음을 품고 설교를 안 할 경우에는 자기의 영향력인데 이걸 성경에서 우리가 감추었던 몸의 죄가 나오는 거예요. 죽거나 죽을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이 몸으로 설교를 바르게 하고, 전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심방 가고, 기도하고, 죄입니다.
그러면 죄냐, 아니냐를 어떻게 판정하느냐 하면, 설교하고 내려오니까 “목사님, 설교하신 것도 죄입니다.” 할 때 아멘 하면 되는데 “설교한다고 며칠 째 고생했는데 이게 왜 죄냐?” 이렇게 나온다면, 죽을 뻔한 인간이구나. 어떤 교인이 헌금을 했는데 “집사님, 헌금한 것도 죄입니다.” 이러면 “얼마나 은혜 받아서 감사함으로 성령의 역사로 성령의 감동으로 했는데 이게 왜 죄냐?”고 나오면, 아니야. 당신은 당신 주체파악을 못했어.
그러면 우리의 몸은 결국 로마서 7장에 보면 이중적 몸을 갖고 있는 거예요. 하나 터지면 하나 마크하기 위해서. 죄가 작열하는 몸 있고 그 바깥에 그걸 커버하기 위해서 온갖 좋은 건 다 토핑하는 자기를 매일같이 장식하는 종교적인 행위와 노력과 선교회비 내놓고 봉사하는 이런 것. 진짜 나를 숨기면서 사는 것이 바로 신약이 밝힌 신앙생활이고 종교생활이에요. 어떻게 하면 교묘하게 나를 숨길까? 내 죄가 안 들킬 수가 있는가? 그래서 남 보기에 나도 이만하면 가치 있다고 보는가? 하는 것.
여기 교재 첫 번째에 제목 바로 밑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노동은 그 자체로서는 가치 없다] 이게 무엇을 염두에 두고 썼느냐 하면, 1867년부터 마르크스란 사람이 [자본론]을 썼어요. 1883년도 마르크스가 죽어요. 엥겔스란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책을 냈는데 그전에 나왔던 1759년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이란 책을 내요. 모든 가치는 인간의 노동에서 나온다고 했어요. 이 국부론을 마르크스는 백번이나 읽고난 뒤에 아담 스미스가 모르는 게 있다고 했어요.
노동의 가치가 상품 되는 게 아니고 뭔가 빠진 거예요. 물건을 사용하는 걸 사용가치라 합니다. 사용가치+(아담 스미스는 이 더하기를 빠뜨렸다)교환가치가 있는 겁니다. 이걸 상품이라 하고, 상품가치에 돈을 표시할 걸 가격이라 해서 교환가치를 발휘하려면 쥐고 있으면 안 되고 시장에 나가서 교환해야 되거든요.
그러면 인간의 노동이란 상품화 되지 않으면 인간의 가치는 없는 거예요. 인간 노동 자체는 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마르크스나 아담 스미스나 현재 자본주의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무조건 인정하는 노동효과에요. 나의 몸의 가치가 시장 통에서 팔릴 때 가격이 매겨지면서 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유일한 가치가 되는 거예요. 이걸 로마서 10장에서는 자기 의라고 하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라는 것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예배당 짓고, 전기세 내고. 자본을 모으려면 교인들의 가치가 모아져야 돼요. 교인들의 가치를 인정해주기 때문에 “내 노동의 가치를 하늘에 계신 우리 예수님도, 하나님도 내 가치를 인정해주는구나.” 교회 목사님이 십일조 가치 있다 하니까 이 교회 다닐 만 하다. 왜냐하면, 교회에 예수님이 좋아서 다니는 게 아니고 내 몸의 가치가 하나님한테도 인정받는다는 사실, 시장 통에서 일반 경쟁사회에서도 인정받고 교회에 계신 하나님께도 인정받으니까 인정받는 만큼 헌금하고 주는 게 있고 받는 게 있고. 그러니까 헌금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는 인간의 가치, 축복 받은 겁니다. 이렇게 가치를 높여줘야 교회에 헌금이 계속 들어오게 돼있어요. 그럴 때 그 돈으로 자본주의사회에서 교회는 유지하고 번창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와 전혀 맞질 않아요.
그러면 로마서나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가치는 무슨 가치냐? 우리가 자기 노동, 자기 의, 세상에서 그렇게 배웠고, 이걸 위해서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부모가 닦달하면서 “그렇게 놀면 시장에서 노동 가치가 떨어져 아무도 쓸 사람이 없어. 그러면 너는 죽는 거야.” 이렇게 가르치니까 노동가치, 사용가치 스펙 쌓기 위해서 열심히 하잖아요.
그러한 버릇이 교회에 와서 성경말씀 보면서 큐티하는 이유도 자기 스펙 쌓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하늘나라 상급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내 안에 나를 저주할 죽음이 들어있다는 걸 밝혀내려고 보지 않는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우리의 모든 것이 과연 로마서에서 그게 바로 가치 있다는 거예요. 마음껏 그렇게 살고 그것으로 인하여 누가 돌아가셨다? 우리 예수님이 피 흘려 돌아가셨다.
성령이 오게 되면 나의 몸의 모든 시선이, “십자가에 저 분이 왜 달리셨을까? 미쳤어. 미쳤어. 왜 죽었어? 내가 죽이려고 하지 않았는데 왜 죽은 거야?”라고 십자가가 크게 보이고 점점 내 안목의 많은 퍼센트를 차지하면서 들어오는 거예요. 십자가가 가까이 보이게 성령께서 인도할 때 그것은 성령께서 잡아당겨 질질 끌고 십자가에 데려갑니다.
세상에 빠지다 보면 다시 세상이 질질 끌어서 “너는 시장에서 가치 있는데 왜 스스로 가치를 부정적으로 보느냐? 왜 자학해? 그러지 마. 너는 쓸모 있다고 많은 사람이 널 기다라고 있다.”고 밀당, 밀고 당기고. 우리는 하나의 허수아비처럼 성령이 당기면 성령으로 가고, 세상에 일곱 귀신이 들어오면 일곱 귀신이 들어가고. 제가 광주에서 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했다고. 놀던 귀신이 어디 가겠어요? 우리 몸에 들어오죠. 그러니까 자신의 의와 자신의 노동가치 생각하면 귀신이 일곱 개 왔다가 여섯 개 정도 들어오고. 그것으로 왜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하면 여덟 개 들어오고. 그리고 그럴 뻔 했을 때는 두 개 들어오고.
여러분이 걱정되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냥 사세요. 그냥 사시는 것이 왜 좋냐 하면, 포지션 문제 때문에 그래요. 위치, 지점. 인간의 몸은 자기 발바닥 밑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잖아요. 인간의 몸은 그 사람의 언약적 포지션이 있어요. [매트리스]라는 영화에 보면, 시커먼 안경 쓰고 양복 입은 요원들 있잖아요. 요원들은 지 마음대로 못 움직여요. 포지션대로 컴퓨터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잖아요. 인간은 자기는 내 몸밖에 없지만 내 몸을 움직이는 어떤 발판 같은 게 있어요.
동계올림픽에 보드 타죠. 보드 타고 내려오는 게임 있잖아요. 각자의 보드가 자기 발밑에 깔려 있는 거예요. 이 보드는 우리는 그것이 눈에 안 보이고 느껴지지 않지만 그것에 실려서 이동하는 겁니다. 초밥 집에 가만있으면 초밥 만들어져서 회전판이 돌아가면 그처럼 우리가 하나의 쟁반에 담긴 초밥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선택을 하고 뭘 할 때 우리의 포지션이 그런 사태를 유발시킨 분과 관련되어서 우리의 태도와 반응을 나타내게 돼있습니다. 점잖은 체 해도 쑤시면 나오잖아요. 그것은 우리의 뜻대로 안 되고 우리 속에 깔려있는 그것과 그 사태와 관련을 지었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대하여 후차적으로 반응할 뿐이에요. 점잖은 체 해도 소용없어요.
부부간에 결혼 초에 사랑한다 해도 그때는 그 포지션이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 되는 포지션이고 오년 뒤에는 입에서 무슨 소리 나올지 모릅니다. 내 인생 물러내라는 소리 나올지 몰라요.
로마서나 야고보서나 포지션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이 말은 우리에게 그 말씀을 지키라는 게 아닙니다. 오해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거기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말씀의 초밥 집에서 그냥 사태에 따라서 밀리면 밀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지난 오후에 그런 설교했습니다만 바다 한 가운데 있는 스티로폼이 물결치면 어떻게 됩니까? 그냥 물결 타고 와서 해변에 와있단 말이죠. 우리 인생이란 내가 선택한 게 아닙니다. 그래 내가 선택했어. 백날 해봐야 소용없어요. 밀리면서 들어온 자리가 이 자리에요.
그게 예레미야에도 나옵니다. 바벨론 나라 장군이, “어느 나라를 치지? 군사는 많고.” 그래서 점을 쳤어요. 예루살렘을 치라는 점괘가 나와서 치니까 예루살렘이 멸망했어요. 웃기죠. 예루살렘에서 바벨론 쳐들어오지 말라고 백날 기도해도 소용없어요. 바벨론 장군은 지 마음대로 못하고 포지션이 바벨론으로 하여금 예루살렘 쪽으로 진격하게 된 겁니다. 모든 게.
왜 예루살렘을 그렇게 구박하고 해야 되고 파괴해야 되느냐 하면, 예루살렘이라는 것이 구원받는 사람의 중간과정에 이 나라가 포함됩니다. 제가 중간과정이라는 이야기를 했지요. 중간과정이란 말은, 시작은 자기들이 해요. 시작은 “하나님이 우리 편이다. 나는 선택한 민족이고 거룩한 족속이다. 거기다 말씀을 주셨네. 율법을 지킴으로써 다른 나라와는 차별화된 거룩한 민족이구나. 율법 잘 지키자. 열심히 지키자.” 나오는 게 중간과정이에요.
이렇게 지켜서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지가 지킨다는 그 율법에 의해서 멸망당하죠. 멸망당한 중간과정이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탕자가 되지요. 탕자에게 구원하는 것은 이미 저들은 할 것이 다 해봤잖아요. 다 해보니까 자기가 자기한테 거룩하기 위해서 쏟아 부은 투자가 결국 자기로 하여금 더욱 더 죄를 짓게 만들죠. 더욱 더 죄를 짓는 것은 간음한 사람이 두 번 한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을 죽이는 거예요. 하나님 죽이는 그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어요.
죽이게 만들어놓고 더 이상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 하나님을 죽이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 확정된 상태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서 아흔아홉 마리 양은 놔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가는 식으로 예수님이 와버리면 이 사람의 다음 행적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 공로가 아니고 누구 공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 그것뿐이죠.
어제 태국의 어떤 목사님이 저한테 전화를 했어요. 막 따지듯이. “많은 목사님들이 이 목사님의 글에 대해서 설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는 것을 아십니까? 왜 이 목사님은 예수 믿는 사람이 그 다음에 어떻게 사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안 해주느냐?” 그래서 이야기했어요. “다음이라는 것은 용서 받은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끝난 겁니다.” 그러니까 그 분이 하는 말이, “용서 받은 건 인정하는데 사도 바울의 명령과 지시는 어떻게 하느냐?” 이러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왜 우리가 용서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걸 죄라는 범위를 깊이 있게 들춰내기 위해서 구약보다 더 깊이 있는 말씀을 우리에게 준 겁니다.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죄를 더욱 더 드러나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주께 용서받고 감사한 것밖에 없습니다.”라고 하니까 “알았습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제가 아까 포지션이라 이야기했는데 더 성경적으로 말하면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육이 육을 판단하는 그 이상의 것이 있어요. 몇 년 전에 나왔던 영화에 [천사와 악마]란 영화가 있는데 로마가톨릭, 천주교가 역사 속에서 천주교교리를 비판하는 프리메이슨 또는 일루미네이트 또는 장미십자가단 그러니까 비밀결사단체, 천주교가 전하는 교리 자체에 대해서 공격하는 사람들을 핍박을 해왔어요. 소위 똑똑하고 과학적이고 지식이 있는 사람들을. 핍박을 해왔던 그들에 대해서 복수하기 위해서 과학적으로 복수해서 반물질 무기로 해서 바티칸 자체를 폭파시키는 음모에 대한 소설을 영화화한 거예요.
여기에 톰 행크스가 주인공으로 수사를 돕는 과학자로 나왔는데 물어요. “실례지만 교수님은 믿음이 있습니까?” 하는 질문이 나와요. 답변을 그대로 적어볼게요. “믿음은 선물이기 때문에(에베소서2장8절) 아직 나는 그 선물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지금 놀리는 겁니까? 복음에 대해서 비아냥거리는 거예요? 믿음은 선물이기 때문에 나는 당신들이 이야기하는 걸 안다는 거예요. 허접스럽게 이야기하는 신부나 목사들보다도 훨씬 더 많이 아는 거죠.
교회에서는 믿음은 선물이 아니고 행함의 상급이잖아요. 행해야 믿음이 증거 된다고 보잖아요. 나는 교수기 때문에 그 정도는 능가했다는 거예요. 아직 선물 못 받았기 때문에 나는 안 믿습니다. 그러니까 선물 안 주신 분의 책임이지 선물 안 받은 나에게 믿음 없다고 닦달내지 말라는 그 뜻입니다. 이 이야기를 누가 알고 있어요? 그 사람이 알고 있지요. 그럼 그 사람은 결국 성경에 나오는 믿음은 선물이라는 에베소서 2장 8절의 내용을 누가 품고 있습니까? 이 사람이 품고 있지요.
주일날 오후설교에 상추에 돼지고기를 싸먹으면 그게 상추쌈입니까, 돼지고기쌈입니까? 상추쌈이잖아요. 고기로 상추를 품은 게 아니니까. 보다 많은 부분이 작은 부분을 소지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톰 행크스가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뭐가 더 크다? 하나님이 준 말씀보다 내가, 내 의식이, 내 정신세계가 더 크니까 내 정신세계에 기독교 경전도 포함돼있고, 불교의 불경도 포함돼있고, 이슬람교의 코란도 포함돼있고. “어느 쪽을 골라잡으면 천당 가겠나?”라고 생각해서 그 중에 하나 골라잡았다면, “이제 기독교 가정이니까 기독교로 해야지.” 그 사람이 가는 나라는 누구 나라에요? 예수님의 나라가 아니고 자기가 돛대가 되는 지 나라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가치가 있는 거예요. 박수치면서 진작 그렇게 이야기하지. 교회 나가서 목사, 장로 되지 말고 그런 고백을 해야 되는 거예요. 태산이 아무리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로다 하듯이 신이 아무리 높다 해도 나는 신보다 더 신. 이게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의 타고난 천재적인 기질입니다. 그 천재들이 교회에 다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모여서 뭐하느냐? 프리메이슨. 우리는 신이다. 이러고 있어요. 예배부터 경건 되게. 파이프오르간 울리면서 하는 짓들이 김 신, 최 신, 박 신, 신들의 집합. 목사 신은 저기 있고. 이래서 당신은 신이 맞는다고 긍정해주는 긍정적 사고방식의 설교가 강단에서 나오는 겁니다. 뒷자리에 앉아있는 예수님이 박수치면서 “그렇다. 내가 원했던 교회다. 이게 교회다.” 그게 바로 교회인 거예요. 이게 바로 기독교역사입니다.
이걸 우리가 모른다고 하면 안 돼요. 우리 몸을 내가 만든 게 아니에요. 누가 만들었는지도 몰라요. 부모는 그냥 수단일 뿐이고 죄가 만들었다는 것이 시편 51편의 내용입니다. 죄가 어미를 이용해서 죄가 온 거예요. 그래서 율법이 오기 전에도 죄가 있었다. 율법이 있다는 것은 어떤 사물이, 실체가 있다는 것이고 실체가 있다면 그림자가 있다는 것이고. 죄가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율법과 죄가 비교가 되는 겁니까? 사람과 기차가 비교가 되는 거예요? 하나는 구체적인 물질이고 하나는 추상적인 개념인데 비교가 됩니까? 이게 로마서에서 마구 혼용됩니다. 미치겠어요. 이걸 어떻게 해석이 안 돼요. 비교될 수 없는 것을 비교시켜요.
그래서 가치라는 것은, 우리 몸이 살아야 되니까 비교하는 식으로 하는 것이 가격이고 돈입니다. 나의 노동의 가치를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가격 대비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비교하는 겁니다. 졸지에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가치가 폭락을 해버렸어요. 가치를 높이려면 어떻게 합니까? 이민 가면 돼요.
그래서 사람은 자기 가치를 어디다 포지션을 놓게 되면 업그레이드되는가? 늘 이걸 계산하는 거예요. 울산공장에서 일하다가 돈 더 줄게 하면 짐 싸서 다른 회사 스카우트 되잖아요. 우리 몸을 내가 말릴 수가 없어요. 내 몸이 계속해서 잠복돼있으니까.
그래서 할 뻔한 것과 한 것과 다른 것이 아니라 사실은 같은 거예요. 들썩거려요. 어디 스카우트 안 하나. 마음이 들썩해서 남편은 아내한테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 알아주는 남편이라는 것을 아내에게 과시하고. 아내는 박수치고. 되면 한 통속 되어서 같이 움직이고. 세상이라는 게 이런 거예요.
그러한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조종되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진 것이 바로 옛 언약입니다. 그 언약 속에 인간의 가치가 전혀 담겨 있지 않은 새로운 자식이 나오는데 그 이름도 희한하죠. 이스마엘이 있는데 그건 아브라함의 노동가치가 있다고 제쳐놓고 이삭으로 하나님께서 그 다음부터는 아주 냉혹하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인간을 두 줄로 세울란다. 이삭 같은 성령에 속한 노선과 이삭 외에 약속에 속하지 않는 것은 한꺼번에 세워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노선이라고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나오잖아요. 이것은 우리에게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 포지션이 그렇게 주께서 정한대로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율법이 행함이냐, 믿음이냐는 것은 믿음 가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 가져봤자 그것은 내 가치를 나는 안 믿었다가 믿었다 해서 믿음도 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항목 속에 포함될 뿐이지. 그런 믿음은 아까 톰 행크스 믿음과 똑같은 거예요. 선물이 나를 장악한다고 생각해야 되는데 너 선물 받았고, 나 선물 받았고. 선물 가졌으니까 그걸 모아놓은 그릇은 나고. 그러니까 내가 주님보다 더 넓고 말씀의 세계보다 내 세계가 더 넓어요.
그러다 뜻대로 안 되면 교회 가서 기도하기를 “왜 하나님께서 나를 힘들게 합니까?” 주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실례지만 누구신지요?” “제가 주께서 목마를 때 마실 걸 주었고, 입을 걸 주었고.” “아닌데. 너 아닌데.” “우리 목사님이 그렇다고 했는데.” “그것은 같은 통속이니까 그렇지. 사기 당해놓고 어디 나한테 와서.” “왜 그럼 그런 사기 치는 목사를 보냈습니까?” 그것은 니가 당하고 싶어서 환장해서 그런 거지. 교회 올 때부터 나는 이런 가치 있다는 걸 알아달라고 우쭐대고 싶어서 환장해서 교회 나와서 잘난 척했기 때문에 그런 놈들을 짝을 맞추는 거예요. 지 잘못이지요. 백날 복음 이야기해도 듣지도 않고 교회가 섞었느니, 한국교회 문제가 있느니. 왜 한국교회가 문제 있어. 지가 문제 있는데.
그래서 저는 야고보서, 로마서를 하면서 간출하게 줄였어요. 3페이지에 [약속의 실체는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의 행함과 믿음이 성령을 통해서 지상에 일어나게 된다. 이 성령이 일으키는 사건의 바탕이 두 가지 색채를 보이게 된다.] 밑에 그라타주 기법(바탕에 여러 가지 색을 칠하고 그 위를 검정색으로 덮고는 칼 등으로 긁어내는 기법)이라고 돼있지요.
시커멓게 해놓고 칼로 긁어내면 밑의 색깔 칠한 것이 나오듯이 색깔을 두 가지로 봤어요. 하나는 유대인을 긁어내는 것은 로마서고, 그 다음에 이방인을 긁어내는 것은 야고보서고. 그래서 표현의 차이가 나는 거예요. 야고보서는, “우리 이스라엘은 아직까지 안 죽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우신 이스라엘이 죽을 리가 있느냐. 우린 안 죽었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이스라엘이 되었어.”라는 것이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율법의 기능으로서의 행함과 믿음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로마서는 유대인을 조지죠. 2장에. “니가 유대인이야. 유대인이 그따위 짓을 하나? 니가 할례를 행했어. 마음에 할례를 행해야지. 육체에 할례를 행하면 되나.” 혹시 이중에 마음에 할례를 행하는 방법을 아십니까? 어떤 칼을 쓰면 되겠습니까? 마음인데 마음을 어떻게 쨉니까? 말이 안 되죠. 로마서는 말이 안 되는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로마서는 뒤 배경, 예수님의 십자가가 주제기 때문에 십자가가 우리와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그동안 사주했던 보이지 않는 악마와 상대해서 십자가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이 로마서고, 야고보서는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옛날의 이스라엘은 온전히 율법의 완성체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뒤의 이야기는 10분 쉬고. |
첨부파일 : 20121003 특강a.hwp (51.0K), Down:18 |
'야고보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고보서와 로마서의 믿음(이근호)121003 (0) | 2013.02.22 |
---|---|
야고보서와 로마서의 믿음(이근호)121003 (0) | 2013.02.22 |
야고보서 울산특강3(이근호)100410 (0) | 2013.02.22 |
야고보서 울산특강2(이근호)100410 (0) | 2013.02.22 |
야고보서를 가까이!(아고보서 울산특강1)(이근호)100410 (0) | 2013.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