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일일 울산 수련회 - 제1강
2010,04,10 강의 이근호, 녹취 한윤범
2010-04-16 18:06:35 | 조회 : 2303 |
20100410a 울산특강 - 야고보서a | 이름 : 한윤범 (IP:119.192.174.1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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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0a 울산특강 - 야고보서
(강의:이근호 목사)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야고보서 하기 전에 신명기 27장 16절 봅시다.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17절,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18절,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19절,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20절, “계모와 구합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21절, “무릇 짐승과 교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다음에 “자매 곧 그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과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장모와 구합하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다음에 24절에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모든 백성이 거기에 대해서 ‘아멘’하는 거예요. “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이게 신명기 28장 들어가기 전에 27장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알기에는 이스라엘이 축복을 받는 나라라고 알고 있잖아요. 오히려 축복을 받는다는 것 때문에 무엇이 노골적으로 등장하느냐 하면, ‘왜 사람이 저주를 받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 축복을 받아야 될 사람만이 그 정보를 공유하게 되는 겁니다. 축복을 받아야 될 사람은 저주가 뭔지도 모르는 채 축복이 오는 게 아니고 충분하게 저주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돼요. 그래야 축복이 값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방금 이야기한 걸 그림으로 해봅시다. 이스라엘 집단이 있는데 신명기 27장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러이러한 자는 저주받는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다음에 28장에 보면 축복받는다. 궁금한 게 뭐냐 하면, ‘저주를 받으면 받지 뭐. 저주받을게. 저주가 별거냐.’ 이렇게 나올 수 있잖아요. 저주가 상당히 구체적으로 저주가 나와 있습니다. 28장 저주가 어떻게 구체적인가 그것부터 보고 계속 설명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28장 16절에 보면, 성읍에 저주 받는데, 17절에 구체적입니다. 광주리와 떡 반죽이 저주받고, 그 다음에 18절에 네 몸의 소생과 토지가 저주받고, 쭉 저주를 받습니다. 그 다음에 21절부터 구체적으로 나오죠. 여호와께서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고, 22절에 폐병 들게 하고, 이 재앙들이 너를 칠 것이며, 25절에 누가 오게 되면 일곱 길로 도망치게 되고, 26절에 네 시체가 공중의 새들의 밥이 될 것이며, 그 다음에 27절에 보면 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개창으로 너를 칠 것이며 너는 치료를 얻지 못할 것이며, 28절에 눈멂과 경심증, 29절에 약탈당할 것이며, 30절에 네가 여자와 약혼했으나 다른 남자가 약혼자를 차지할 것이고, 30절에 집을 건축했으나 완공되지 못하고, 포도를 심었으나 과실을 맺지 못하며, 31절에 나귀를 다 빼앗길 것이며, 33절에 토지소산과 수고한 것이 네가 알지 못하는 놈이 다 가져갈 것이며, 다른 민족에 압제를 받을 것이며, 35절에 종기가 나게 될 것이며. 종기난 사람들 유의해야 되죠. 그 다음에 38절에 보면, 네가 종자를 심을지라도 메뚜기가 와서 다 먹을 것이며, 벌레가 일어서 소출이 없을 것이며. 그 다음에 54절에 보면, 좀더 구체적으로 나가서 특히 57절 봅시다. 그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의 낳은 어린 자식을 음식물이 없으니까 자기 자식을 자기가 먹을 것이라고 돼있어요.
방금한 이 저주, 이런 것 어기면 저주받는다 할 때는 그 말씀에 신경 쓰다가 방금 신명기 28장에서 이러한 것들이 저주라고 한다면, 우리는 화가 나서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이런 저주를 받게 됩니까? 따지게 되는 거예요. 저주가 원인이 되고 그 결과가 28장에 나열 돼있다면, 만약에 원인 편에 서 있다면, ‘그까짓 저주 좀 받지.’ 그런데 결과 편에 섰으면 ‘우리가 뭐가 잘못되어서 이런 저주를 받습니까?’ 하는 거예요.
저주를 받는 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율법의 구조 안에 놓여있는 대표적인 사람이 되는 겁니다. 방금 제가 강의 시작해서 한 이야기가 뭐냐 하면, 내가 나를 보호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 뜻입니까, 뜻이 아닙니까? 이게 뜻이 아니고 하나님은 율법을 보호하는 것, 율법이니까 법이라 할 수 있죠. 법을 보호하는 게 이스라엘 존재 이유, 뜻이라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이스라엘이 희한한 민족이죠.
보통 민족은 아비가 자식을 낳으면 가정이죠. 가정은 어떤 관계냐 하면, 혈육적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가정에 속한 모든 사람은 내가 낳은 자식을 위하여 또는 자식은 부모를 위하여 가정을 보호하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모든 노력과 모든 정신을 가정 보호에 대해서 혈육적인 것에 대해서 모든 걸 쏟아 놓습니다. 이걸 인간이라 하죠. 사람이라 하는 것은 혈육 중심이고, 혈육은 자식과 부모 관계가 기본이고, 거기서부터 삼촌, 동서 나오지만 기본 정신은 아비와 자식, 가족이 가장 기본이 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의 몸은 기본을 지키기 위해서 노동하고 애쓰고 여기다 투자를 한다 이 말이죠. 이거는 바로 이방민족, 이방나라에서 누구나 그렇게 하죠. 이거는 하나님 찾고, 부처 찾고 관계없어요. 누구나 그렇게 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오늘 강의하는 게 야고보서거든요. 야고보서에서 강조하는 것이 율법의 구조다 이 말이죠. 우리가 야고보서를 공부하려면, 야고보서 1장 1절에 “흩어진 열두 지파”라고 돼있지요. 여러분 강의안 다 읽어 오셨죠. 우리 가운데 안 읽어온 사람 없잖아요. 그래서 행복한 사람 아닙니까.
야고보가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줬다. 열두 지파를 뭉치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의 특이성은 항상 이방민족과는 다른 식으로 존재하는 나라라는 겁니다. 다른 민족과 다르다는 말은 다른 민족은 이렇게 살아가는데 흩어진 열두 지파, 이스라엘은 이렇게 살아간다고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뭐냐를 말씀드리기 위해서 신명기 27장과 28장을 거론한 거예요. 거론해보니까 보통 이방민족은 자기 가족과 혈육적인 것에 신경 쓰는데 반해서 이스라엘은 뭐라고요? 내가 나를 보호해야 할 보통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말씀을 보호하기 위해서 결과적으로 나왔던 것이 이스라엘이란 말이죠.
이스라엘보다 법이 먼저고, 축복과 저주를 결정하는 그 법을 이 세상 모든 민족 가운데 유일하게 이스라엘만이 하나의 그릇이 되어서 담아서 보여주는 나라가 흩어진 열두 지파, 이스라엘이며 그것이 오늘날도 분명히 있다고 여기면서 예수 믿는 예수님 형제 야고보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야고보 보기 전에 어디서 떠나야 합니까? ‘우리 가족 중심, 내 중심, 나는 나를 보호하면서 평생을 살아갈 거야.’라고 그런 생각에서 뭘 벗어나야 됩니까? 나는 내가 원인이 되어서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니고 내가 여기 있다는 자체가 하나님이 하시는 율법의 능력에 의한 하나의 결과물로 여기는 거예요.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게 바로 무서운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구나를 보여주기 위해서 모였다면 우리는 흩어진 열두 지파에 해당되는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방금 한 제 말이 ‘우리가 법을 지키겠습니다.’ 하는 말과 같은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까? 틀린 말이죠. 우리가 법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우리는 우리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결과물로 생겼다.
네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다시 하면, 내가 나를 보호하듯이 평생을 살 수 없고 네가 지키고 보호해 줄 것은 따로 있다. 하나님의 법을 보호하기 위해서 너는 이 땅에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 라는 것이 야고보서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야고보서 봅시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를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을 1절에서 누굴 제시합니까? 몸무게로 같은 열두 지파라고 할까요, 키로 할까요? 같은 남성이면 남성, 여성이면 여성끼리 결정하는 겁니까?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을 1장 1절에서는 뭘 제공합니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죠.
그렇다면 우리 의견 말고, 우리가 밥 먹고 살기 힘들어하는 이 세상 우리 말고 야고보의 뜻을 제가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야고보의 뜻은 흩어져 있다는 겁니다. 흩어져 있는 것은 하나의 결과죠. 원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인이 되고,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발생된 결과물이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란 말이죠.
이 생각하고, ‘우리가 천국 가기 위해서 우리가 뭘 행해야 되고 뭘 믿어야 되고 그러면 천국 갑니까?’ 이 생각하고 사고방식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내가 여기 있는데 죽어서 좋은데 가겠다. 이건 누가 누굴 보호하는 겁니까? 세상에서 보호하는 정도가 아니고 죽어서도 좋은데 가서 좋게 살겠다는, 내가 나를 보호하는 식이 된다고. 내가 주어가 되고 내가 목적어 되는 것, 이 사이에 행함이 들어오겠죠.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이라 하는 것은 행함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행함은 주어와 목적어가 무엇을 누가 시켜서 누가 지시해서 어떤 결과가 나왔느냐? 이것은 전부다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으로 빠져버려요. 거기다 뭘 집어넣느냐 하면, 법이 들어가고 이 법은 반드시 행함으로 등장한다 이 말이죠.
어떻게? 우리가 평소에 아침에 애들 늦잠 자면 어떻게 합니까? 말로 합니까? 흔들어 깨우죠. 일어나라고 강제로 일으키죠. 내 자식을 지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남이 자식이 아니고 내 자식을 학교에 빨리 등교시키기 위해서 그 사이에 나의 행함이 개입되죠. 행함이 개입되어서 강제로 일으켜서 가듯이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법을 이루기 위해서 행함이 동원되죠. 그 행함을 보이라 이 말입니다. 그 행함으로 네가 믿는 지를 보겠다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믿습니다.’ 하면 그 주어가 내가 믿을만한 걸 골라서 믿습니다가 돼버려요. 그 ‘믿습니다’ 하는 것은 주님의 행함이 아니고 내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디까지? 나중에 죽어서 좋은데 가려고, 천국가려고 내가 나를 천국 보내기 위해서 내가 나에게 어떤 강제성을 발휘하는 것, 계속해서 ‘너는 믿는 자 돼야 돼. 믿고 있지, 믿고 있지.’ 계속 나한테 재촉하고 책망하고 독촉하는 거예요.
‘어제도 믿었지만 오늘도 믿어야 돼. 나는 믿어야 돼. 그래야 구원받아.’ 이것은 전혀 야고보서에서 이야기하는 행함이 아닙니다. 왜? 원인이 내가 원인이고 결과가 나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웃 사랑도 안 되고 주님의 영광도 되지 않고 자기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도 없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천 명, 만 명 교인 모아봐야 소용없습니다.
이것은 흩어진 열두 지파가 아니라 그냥 정체성이죠. 기독교란 유대감에 불과한 겁니다. 유대감이란 돈 문제 끼어들면 다 깨집니다. 교회에 돈 문제하면 유대감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돈 빌려줬잖아. 집사님 왜 돈 안 갚습니까? 이렇게 나오면 깨지게 돼있죠.
이해했다고 하고 아까 신명기 27장 다시 합시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축복이야기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에 이렇게 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러면 저주를 주시는 분이 원인이 되고, 우리는 저주받는 자체가 결과가 되죠. 그냥 저주주면 저주받아야 돼요. 축복주면 그냥 축복받는 겁니다.
축복과 저주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나오는 행함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행함을 수용하는. 만약에 땅콩을 모종 둘 때 씨앗을 뿌리면 나중에 봄 되면 싹이 나잖아요. 그처럼 주님의 행위가 뿌려놓으니까 어떤 것은 저주가 올라오고, 어떤 것은 축복이 나온다면 그럴 때 이스라엘은 정말 이스라엘다운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그걸 필리핀이나 노르웨이나 아일랜드 사람에게 한 것이 아니고 그게 바로 열두 지파, 이스라엘에게만 하나님께서 그 민족에게만 그렇게 한 거예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이란 열두 지파는 다른 민족과 달리 무엇을 봐야 되느냐 하면, 혈육적인 것, 우리가 원인이 되어서 우리에게 결과가 주어지는 그것과 하나님께서 어떤 원인이 되어서 우리에게 결과로 주어졌다는 이 두 가지가 서로 대비되는 서로 충돌되는 두 가지 사고방식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양쪽 다 보여줘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날 흩어진 열두 지파와 똑같은 그런 원칙 속에 여러분들이 놓여있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열두 지파가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면 제가 이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이야기 안 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원인이란 말을 했지만 하나님이 어떤 원인이 되어서 다른 민족에겐 일어나지 않는 왜 이스라엘만큼은 자기가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인이 되고 자기는 모종밭처럼 저주 뿌리면 저주 일어나고 축복 뿌리면 축복 피어나고 왜 그러한 하필이면 우리에게 그런 일이 있는가 하는 그 점에 대해서는 이야기 안 했습니다.
열두 지파죠. 이걸 한 곳에 모을 때 그게 이스라엘 나라죠. 이스라엘 이름이 네 자이지만 전에 처음 이름이 두 자였습니다. 야곱이었어요. 야곱은 야곱이 이름 바뀌어서 이스라엘 되고 여기서 열두 지파가 나왔다면 야곱에게 담겨있는 하나님의 원인이 있다. 이 원인이 열두 지파까지 파급되니까 퍼져나갑니다. 이스라엘이 뭐냐? 왜 이스라엘이 축복과 저주를 보여주는 모종판이 돼야 되는가? 그것은 야곱이 태어날 때 없는데서 태어났거든요.
야곱은 하나의 텅 빈 무대죠. 무대가 되면 커튼이 있고 무대 뒤편에서 배우가 나오죠. 마이크 있고 조명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며 여기에 등장하면 이 사람이 야곱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야곱이 등장할 한 사람 더 등장해요. 둘이 쌍둥이 됩니다. 이 쌍둥이가 모든 우주 삼라만상의 비밀이에요.
이 야곱과 에서가 나타나기 전에 사회자가 말하기를 ‘이제부터 하나님의 계획인데 여러분 무대 위에 펼쳐집니다. 자 나오세요.’ 할 때 한 사람이 나올 줄 알았는데 여기에 쌍둥이가 나와요. 서로 마주보면서 싸우고 있는 거예요. 승자에게 축복이 돌아가고, 패자에게 저주가 돌아가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원인이 되어서 하나님의 원인자가 축복과 저주를 보여주는 무대장치를 마련한 겁니다. 이 무대는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란 무대에 주인공이 없었는데 없던 주인공이 등장하니까 승자는 축복을 받고, 패자는 저주받고.
이 시점에서는 무엇이 축복인지 무엇이 저주인지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까 신명기 28장 봤지요. 뭐가 저주였습니까? 하여튼 우리 몸에 평소에 노동하는 그 현장과 몸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하등에 빈틈이 없도록 촘촘하게 심판을 내려요. 차라리 죽여 버리면 좋을 거예요.
그런데 이 저주라 하는 것은 살고자 하는 힘과 죽이고자 하는 힘, 양쪽 다 그 모습을 드러내는 이 현장을 저주를 보여주는 겁니다. 아까 아버지가 자기 다리에서 나온 자식을 자기가 먹을 때 그걸 저주라 했지요. 신명기 28장에서.
여러분 신명기 28장 사람들이 촘촘히 안 봐요. 들어가도 복을 받고 축복하고 끝납니다. 심방 가서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런 이야기 안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하나의 예언으로 보기 때문에. 씨가 돼요. 제가 오면서 아는 집에서 점심을 먹는데, 박사교회 다니던 전에 알던 집사님 댁인데 그 윗집도 박사교회 다니는데 그분이 평소에 ‘나는 70도 못 되서 죽을 거야’ 하다가 67 되서 죽었어요. 말이 씨가 되어 죽었답니다. 그 소리 듣고 저는 그랬어요. ‘나는 100살도 못 되서 죽을 거야.’ 아마 99살??
축복을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던 축복받게 돼있고, 저주를 이야기하면 아무리 피해도 따라가면서 저주받게 돼있다는 그런 운명을 보통 예언이라 하기 때문에 이게 말씀의 위력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주를 안 좋아하는데
저주의 구체적인 것은 모르지만 저주라 하는 것은 살고자 하는데 만만치 않은 것, 여기서 나오는 것은 고통과 수고와 슬픔이 나오겠죠. 이것을 저주라 한다 말이죠. 하나님께서 아예 이 인간을 죽이면 되는데 절대 죽이지 않아요. 살려두니까 살고자 하는 거죠. 살고자 하려면 내가 살아야 되니까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와야 되니까. 그러니까 이 저주라는 것은 아담이 죄짓고 난 뒤에 보편적인 모든 인간에게 다 해당되는 거예요.
그런데 쌍둥이가 싸우는데 싸우는 이유가 저주성 때문에 싸우는 거예요. 아직 축복이라는 것은 둘 다 해당이 안 돼요. 서로 싸우는 것은 아버지의 축복을 많이 받아내기 위해서. 쉽게 말하면 내가 너보다 편하게 풍족하게 살고 싶어서 그 복을 따내기 위해서 쌍둥이끼리 싸우는 겁니다.
그러면 승자가 축복 받고, 패자가 저주 받는데 한쪽은 승자가 되고, 한쪽은 패자가 되는 원인은 싸워서 이기려고 하는 내가 저 사람과 싸워서 이기겠다는 행위가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해야 되는 거예요. 똑같이 둘 다 밥 먹고 살려고 열심히 하는데 한쪽은 이해 안 되게 돼있어요. 왜? 주님께서 미워하기 때문에 그렇고, 한쪽은 그 사람의 행동과 상관없이 자꾸 복을 받게 돼있어요. 왜?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면 이건 인간의 행함이란 아래층 위에 사랑과 미움의 층이 있어서 행함과 상관없이 사랑 줄 자에게 사랑주고, 미움 줄 자에게 미움을 주는 겁니다. 이 사실을 이 밑에 있는 쌍둥이는 둘 다 몰라요.
이스라엘이 아말렉하고 전쟁할 때 여호수아가 칼 들고 섬겼잖아요. 그런데 전쟁의 모든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들의 칼 솜씨하고 전혀 상관없이 모세가 지팡이를 들면 승리하고 모세가 지팡이를 내리면 패배하죠. 사람들은 모세만 보이는 거예요. 모세가 지팡이를 드는 게 아닙니다. 지팡이가 모세를 가지고 노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면 승리하고, 패배케 하면 패배하는 겁니다. 그 점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민족이 흩어진 열두 지파, 옛날의 이스라엘, 오늘날 교회를 두고 이야기한 겁니다.
성경이라 하는 것은 굉장히 특이해요. 사랑이냐 미움이냐, 미움이냐 사랑이냐? 여기서 결판 나거든요. 그래서 여러분 벌써 야고보서 결론부분에 이미 접촉했어요. 율법을 대할 때 ‘뭔데 저렇게 사랑하십니까?’라고 율법을 대하신다면 그게 율법의 완성이에요. 쉽게 말해서 내가 율법을 지켜야지. 행위의 원인을 나한테 둔다면 이거는 둘 다 살려고 죽어서 좋은데 가려고 싸우는 꼴밖에 안 되고 이거는 전혀 축복과 관계없고,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사랑 덕분입니다.’라는 그 순간 그 사람에게 아로마 향기 같은 사랑의 향기가 발산됩니다. 그것이 율법의 모든 완성을 이루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법이 왔냐?’ 그럼 내가 이것 지켜서 축복 받은 사람 되겠다고 설치면 이미 그것은 저주받은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원인 자체가 자기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아무리 애써도 항상 그 사람은 자기 실적과 업적을 자꾸 검토하게 마련입니다. 이만큼 기도했는데 얼마나 챙겼을까? 자꾸 자기가 원인이 되었으니까 어떤 결과에 대해서 원인 수정에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가죠.
그걸 제가 고상하게 이야기한다면, 기존 관계에서 빠져나오라. 얽히고설킨 기존 관계에서 흩어진 열두 지파는 거기에 얽매이지 말고 빠져나오면 돼요. 빠져나오는 방법이 야고보서에 마지막 장에 보면 이렇게 돼있습니다. 어떤 농장에서 일을 하는데 품삯을 못 받았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고용주가 다 가져가고 노동자에게 품삯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억울하다 하니까 야고보서 하는 이야기가 이른 비, 늦은 비 있으니까 조금만 참으면 심판주가 문 앞에 있으니까 주께서 다시 오시게 되면 네 모든 고통과 억울함을 풀어줄 것이다 했어요.
그게 뭡니까? 지상에 있는 고용자와 사용자의 기존 관계에서 빠져나와서 주님의 하실 일에 맡겨라. 제 말이 어렵죠. 이걸 실천에 옮긴다는 것이 말이 안 되죠.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으니까 너와 나의 관계에서 벗어나서 나와 너 사이에 흩어진 열두 지파라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집어넣어라 이 말이죠. 왜? 이분이 현재 나를 구원해주신 원인자이기 때문에. 원인자인데 이스라엘에 의하면 사랑의 대상으로 그냥 어디 가도 사랑받기로 그렇게 사랑을 줬기 때문에 사랑 받은 자는 기존의 나와 너 일대 일 직접 관계에서 빠져나오면 원인자에게 예속된 사람이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야고보서의 내용은 뭐냐 하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관계에 있기에 이것이 사랑이 되느냐를 율법으로 보여주겠다 는 것이 야고보서의 주제가 되는 겁니다. 야고보는 흩어진 열두 지파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사랑의증거가 뭡니까? 사랑의 증거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요. 주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미 사랑을 받았어요.
야고보서 2장 1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됐습니다. 이미 믿는 너희라는 열두 지파고 야곱처럼 사랑을 받았어요. 그 사랑이 원인이 되어서 현재 우리라는 결과물이 나왔는데 그 사이에 어떠어떠한 것이 사랑으로 모종을 부어놨는데 이것이 사랑, 저것도 사랑, 이것도 사랑 온 천지에 사랑이 올라오는 거죠. 그 사랑이 어째서 사랑이냐를 율법으로 보여주는 것, 그것이 야고보서의 주제가 된다는 거죠. 참 쉽죠.
좀 더 나가봅시다. 이제는 골치 아파요. 그래서 여러분 이미 결론부분에 접촉했는데 과정이 복잡해요. 사랑을 할 때는 반드시 미움이 관련되어서 사랑이 나와요. 왜냐하면 사람은 날 때부터 원인자가 ‘나’입니다. 반드시 내가 어떻게 했기에 이런 것이 주어졌을까 반드시 찾게 돼있습니다.
심지어 고3이 시험을 치는데 시험문제가 자기가 다 아는 것만 나왔다 합시다. 그래서 평소에 일 등할 애가 아닌데 자기 반에서 일 등 했어요. ‘선생님께서 어떻게 내가 아는 문제만 냈을까?’라고 물을 때 ‘내가 평소에 선생님께 잘 했는가?’ 했는데 선생은 아마 생각 없이 문제를 냈는데 애가 다 알아 맞춘 거예요. 그럴 때는 원인을 나에게서 찾으면 안 되죠. 야고보서 특징은 원인을 나에게서는 찾지 맙시다.
그러면 내 안에 뭐가 둘둘 감겨 있느냐 하면, 철에 구리선 감으면 전기가 생기듯이 나라는 자석막대에다 코일 감아서 하면 전기 발생되죠. 반드시 나라는 것에 율법이 감겨 있어서 율법이 완성되면 사랑이 나옵니다. 사랑이란 전기에너지가 나와요. 하나님께서 법을 줬으면 나는 사랑이란 율법에 의해서 담겨져서 있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눈 뜨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나라는 주체는 사라지고 날마다 하나님의 법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나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에 보면 우리를 안개라 하죠. 야고보서 4장 14절에 “너희는 잠간 보이는 안개니라” 우리가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물방울, 우리는 있으나마나 우리한테는 의미 없는 하나의 물방울이라고 생각이 드십니까? 드신다면 하나님 법에 잠겨있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이런 생각이 안 드니까 문제라는 거예요. 안 드니까 우리 주체가 다시 죽었던 주체가 생생하게 살아나는 거예요.
‘주님이여 제가 뭘 하면 이 도시에서 성공할 수 있습니까?’ 야고보서 4장을 안 보니까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감겨야 되는데 우리는 아무 감긴 게 없어. 맹탕이라. 감긴 게 있긴 있다. 자식 애들, 시어머니 관계, 남편 관계 이런 관계에 있죠. 율법에 의해서 감기질 않으니까 생생하게 살아있으니까 내가 안개라 하니까 안개를 거부하는 거예요. 저는 안개 되기 싫어요. 주님이 알아요. 우리는 안개 도기 싫어하는 줄 알아요. 알기 때문에 우리에게 원인을 찾지 않잖아요.
그래서 야고보서를 할 때 사랑이란 걸 쉽게 이야기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어려운 게 야고보서 그런 구조 자체를 누가 반발하느냐 하면, 오늘날 21세기 자본주의사회에 사는 소위 교육을 받은 우리가 극구 자꾸 밀어내요. 이런 구조 안에 있는 내가 되기 싫다는 거예요. 나는 내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 되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남들처럼 그렇게 살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야고보서 2장에 뭐가 있느냐 하면, “세상에 벗하는 자들아 너는 하나님의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이런 게 또 있어요. 마치 DNA처럼 둘둘 감겨있으니까. 이 부분에 안개, 이 부분에는 세상과 짝하고 살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그래도 우리는 용서 받았잖아요.’ 하면 이 밑에 보면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가 나와요.
그래서 이것이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고 전부다 한 줄로 이어져있어요.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너희에게 주어졌음으로 너희 현재 구조는 단독적인 구조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법에 의해서 둘둘 감아있는. 그러면 우리는 뭘 알아야 돼요? 이것이 감기지 않은 사람이 받을 저주, 하나님의 미움 이것을 겸하여 같이 받아야 되죠.
야곱이라 사람이 축복이란 개념을 알려면 반드시 쌍둥이, 우리는 우리의 쌍둥이를 찾읍시다. 쌍둥이 찾기 쉬워요. 조금만 경주에 나가면 세상 구경하고 있다고. 어떤 유명한 사람은 그림자라고 하죠. 우리의 어두움, 우리의 그림자. 우리 있으면 여기에 항상 따라붙는 것이 쌍둥이 같이 따라붙는 것. 우리의 그림자니까 그림자의 특징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 절대로 우리가 미국 가고, 영국 가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어두움이에요. 양쪽 다 해당돼요. 쌍둥이니까 이런 몸도 가능하고 또는 항상 따라다니는 그림자.
여기에 무슨 성화론 같은 것 성립 안 돼요. 성화론 해서 점점 더 그림자가 옅어지고 이런 것 없어요. 나이 구십이 되고 얼마가 되도 항상 그림자는 오히려 길게 늘어뜨리죠. 내신 성적이 이만큼 된다 해도 그림자는 점점 더 짙어지는 겁니다.
이만큼 성숙된 것을 포기 못하죠. 성숙되기 전까지는 개판 같은 인생 같으면 자기 과거에 대해서 쉽게 잊어버리고 난 과거를 생각 안한다고 잘라내고 싶지만 만약에 착해보세요. 2008년도부터 2010년까지 계속 착해보세요. 이걸 어떻게 떼어냅니까? 못 떼어내죠. 이런 것들이 전부다 내가 원인이 되어서 이만큼 훌륭한 사람 되었다는 자기 축복과 저주, 다른 이방나라적인 요소가 계속 붙는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를 해석하려면 이러한 사랑과 미움, 미움과 사랑, 우리의 어두운 면 이런 경우를 양쪽 다 설명해줘야 돼요. 우리가 설명하는 게 아닙니다. 야고보 자체가 짝을 맞춰요. 그 짝 중에 하나 봅시다. 야고보서 1장 8절 누가 읽어보세요.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보세요. 우리의 어두운 면 나오잖아요. 어두움은 우리와 관계없는 게 아니고 우리가 살아있는 한 이런 조로 내가 원인이 되어서 이런 결과가 계속 나온다 이 말입니다.
그럼 사랑이 취소됩니까? 사랑이 취소되는 게 아니에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저주와 짝을 이뤄야 사랑이 사랑답게 되는 겁니다. 사랑이란 미움과 짝이 될 때 사랑의 값을 하고, 축복이라 하는 것은 바로 저주와 관련돼있을 때 축복이 축복으로서 부각이 되는 겁니다.
여기 8절에 보면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다. 누가 이렇게 했어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누가 이렇게 했다고 합니까? 내가 정신을 안 차려서 내가 신앙생활 제대로 못하니까 이런 결과가 나왔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주받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항상 원인을 자기한테 찾아요. 내가 정신 똑바로 차리면 이런 일 없을 건데 내가 정신 못 차려서 이렇게 된다는 거예요.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의 축복이 뭐며,저주가 뭐며 이런 게 저주구나.이런 게 축복이구나를 보여주는 하나의 바탕, 모종판에 불과한 거예요. 이걸 아는 사람이 에서가 아니고 야곱이라 이 말이죠. 야곱 차원에 들어가 보면 아는데 이게 에서 차원에 들어가 보면 계속해서 원인을 자기한테 찾는데 해결점도 없는데 계속 찾고 있는 거예요.
차 많이 밀리죠. 늦게 오셨는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신명기 27장에서 이러이러한 자는 저주받는다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라고 화답했습니까? ‘아멘.’ 이러한 경우는 하나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유일한 민족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사랑받았는데 저주이야기 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그것은 여전히 우리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하나님은 흩어진 열두 지파의 속성상 반드시 축복을 이야기하려면 저주를 이야기해야 되고, 사랑을 이야기하려면 미움을 이야기해야 되는 겁니다.
이런 것이 다 있을 때 우리는 ‘내가 복 받는 것이 내가 원인이 아니었구나’를 비로소 깨닫는 거예요. 이런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아멘. ‘아멘’ 말했다고 저주 안 받는 게 아니에요.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날마다 깨우치는 유일한 구원받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구원받았기 때문에 저주받았다고 이야기해야 되는 겁니다.
지금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해 보면 성경 찢어버립니다. 성경, 옛날 신화 책으로 나한테 부담주려고 하느냐 하고 외면해버려요. 이런 자는 저주받을지어다. 아멘. 그걸 수용한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받았다는 증거기 때문에 받는 거예요.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구약과 야고보가 연결돼야 돼요.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축복과 저주의 원인은 스스로 축복, 저주받는 자에게 행함이 있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자기 행함으로 저주받아야 되지 축복 받기 위해서 행함 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다 했습니까? 사랑받는 자와 미움 받는 자가 따로 있기 때문에 사랑받는 자는 이 사실에서 이 차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겁니다. ‘사랑 때문에 복 받았구나.’ 이렇게 하지 이 사람은 행동 때문에 저주받고, 나는 내 행동 때문에 복 받는다는 것에 머물러있는 게 아니고 내가 복 받는 것은 사랑 때문에 복 받고, 이 인간이 저주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필히 미워하기 위해서 그 사람은 사랑의 차원에 눈이 감기도록 어떤 경고에도 주님의 말씀의 축복이 들리지 않도록, 수용되지 않도록, 믿음이 생기지 않도록 그렇게 계속 조치를 해주시는 겁니다. 그 원인을 찾아내는 거예요. 그 원인의 관계를 야고보서에서는 율법관계로 표현한다. 이게 지난 40분 동안 한 내용이에요.
그렇게 되면 구약하고 야고보서의 차이가 뭡니까? 구약도 율법 중심, 야고보란 신약도 율법 중심 그러면 차이점이 없지 않습니까? 아까 제가 이야기했죠. 인간 속에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감겨 있다. 야고보서는 이걸 ‘지혜’라고. 지혜는 특징이 하늘에서 오게 돼있고, 두 번째 특징이 중요한데 구조다. 구조적으로 짜여져 있어요.
영화 보면 레이저 광선입니까? 보안 장치하는데 보물이 있고, 중요한 모나리자 있고, 세계에서 제일 큰 다이아몬드 있고 도둑놈이 훔치러 갈 때 그냥 눈으로 보면 맹탕이지만 안경 끼고 보면 선들이 있잖아요. 미션 임파서블 보면 있지요. 중앙에 보물이, 다이아몬드 있고 옆에 선이 있잖아요. 졸리란 배우 보면 유연성이 있어서 기어이 도둑질해서 빼내잖아요.
그것처럼 지혜의 특징은 야고보서 1장에 하늘에서 오고, 두 번째는 이게 구조적이라서 건드리면 폭파하게 돼있습니다. 온 천지에 구조로 돼있어요. 아까 야고보서 4장에 우리는 안개죠. ‘안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왜 안개냐.’ 이렇게 나오면 폭발하게 돼있다고. 어느 도시에서 내가 장사해서 이득을 보리라. 이것 폭파하게 돼있어요.
그걸 벗어나려면 야고보서 4장 15절에 보면,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고 할 때 레이저 광선을 통과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루 스물네 시간 가운데서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리니 몇 번 생각하십니까? 우리 인간적으로 솔직하게. 죽기도 하리라는 것은 아예 없잖아요. 우리 머리에 죽기도 하자는 있어서는 안 되잖아요. 만날 우리는 ‘우리 이렇게 살자.’ 사는 것만 있지, ‘여보 주의 뜻이면 죽읍시다.’라는 말을 아침 눈 뜨면 합니까? 우리는 미션 임파서블. 안 돼. 우리는 다 걸려.
우리를 감싸고 있는 말씀의 구조에서 밖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어떤 때는 착각해서 홀로 있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사건을 주셔서 이 구조를 우리가 법에 의해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이 법이 사랑이고, 이 법을 야고보서는 거울이라 해요.
거울이야기 골치 아픕니다. 이상한 나라 엘리스 이야기 동원돼야 되고, 제가 이 이야기는 안 하겠습니다만 [미녀와 야수] 이야기해야겠습니다. 그것하고 10분 쉽시다. 거울을 들여다봅니다. 야고보서 1장 23절 누가 읽어보세요.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곧장 잊어버리죠.
재미있는 것은 거울 보면 거울 안에 어떤 아저씨가 있죠. 제가 거울 본다면. 거울에 봤던 것이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내 본 모습은 전면 거울을 봐야 되죠. 그럼 날마다 우리는 뭘 봐야 됩니까? 거울을 봐야 되죠. 우리는 거울 속에 있죠. 몸이 있으면 전부가 거울 속에 있는 거예요. 거울을 하나님의 율법으로 보는 겁니다. 율법에서 너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 평소에 보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겁니다. 율법 안에서 흩어진 열두 지파야. 하나님 율법 안에서 너는 어떤 모습인가를 평소에 얼마나 생각하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추적해야 할 것은 이렇게 우리를 감고 있는 율법이, 아까 야고보서 2장에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생겼던 너희들이 되죠. 영광의 주 믿는 믿음을 받았으니. 믿음이라는 건 운반체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어떤 믿음의 내용을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생긴 현상이 흩어진 열두 지파가 되었는데 지파의 특징은 우리가 사랑을 받았단 말이죠. 율법으로 칭칭 감긴 그런 사랑을 받은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설명하면 여기서 의문점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뭘 했기에 또는 어떻게 했기에 우리로 하여금 단독으로 살지 않고 사랑의 율법으로 칭칭 감게 하는가? 뭔가 칭칭 감는다 하니까 어떻습니까? 상당히 부담되잖아요. 우리는 옷 입는 것도 귀찮아서 집에 가면 편하게 입는데 뭔가 늘 칭칭 감고 있으면 우리는 끊고 이러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우리에게 부담이 되는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 사랑을 입었다고, 믿음을 입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 관계가 잘 연결이 안 된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란 말이죠. 그걸 제가 설명 드리고 10분 쉬겠습니다.
[미녀와 야수]란 동화가 있어요.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어떤 아버지한테 딸들이 있었는데 주인공 미녀가 막내딸이에요. 아버지가 막내딸 좋아하고 막내딸도 아버지를 좋아했는데 다른 딸들은 시기 나는 거예요. 아버지가 ‘내가 너희에게 선물하고 싶은데 어떤 것 하면 좋겠느냐?’ 하니까 딸들은 이층 집, 고급 자동차 하는데 이 딸은 아버지가 부담될까 싶어 하얀 백합 한 송이가 필요하다고 했거든요.
아버지가 그 이야기를 듣고 백합을 꺾기 위해서 야수가 사는 마법의 성에 가요. 백합을 꺾는데 야수한데 걸렸어요. 타협을 합니다. 꽃 한 송이 가져가도 삼 개월 후에 당신의 목숨은 간다. 그래서 삼 개월만 사는 조건 하에 백합을 줬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딸이 내가 너무 철없는 걸 원해서 가슴 아파서 자기 아버지 대신 죽기 위해서 드디어 마법의 성에 들어가요.
삼 개월 있다 보니까 그만 정이 들었네. 이제는 야수가 미녀를 좋아해요. 하여튼 미녀는 어디가도 다 좋아해.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미녀가 가려하니까 일주일만 가는데 나중에 야수가 미녀가 보고 싶어서 상사병으로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이 미녀가 다시 야수한테 옵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 사랑에 탄복해서 야수와 결혼하기로 했을 때 야수는 야수의 탈을 벗고 멋진 왕자님이 되었다는 그 이야기 나오거든요.
여기서 하나님께서 저주받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바로 아주 위험스러운 야수의 모습으로 왔을 때 진짜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야수 속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서로가 서로에게 저희들끼리만 눈치 채는 그런 방식을 사용한 거예요.
방금 제가 뭐라 했습니까? 사람에게 율법이 휘감아있는 것이 귀찮고 짜증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 해놓고는 왜 야고보서는 더 휘감아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해서 완전히 사도 바울하고 대판 싸울 판인가. 왜 자꾸 우리는 안개니라 하고, 모든 것에 혀로써 형제를 참소하면 저주받고, 두 입으로 찬양하면 안 되고, 세상과 원수져야 되고, 율법을 다 지켜야 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율법 지킨 자도 아니고.
성경 전체를 보게 되면 잔뜩 우리에게 마치 철조망 같은 그런 것이 휘감기게 한 것처럼 느끼게 할 거예요. 그래서 루터는 말하기를 이걸 지푸라기 성경이라 했어요. 예수님을 담는데 지푸라기나 뱀이나 이런 식도 있지만 사실은 별로 설득력 없고. 하여튼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보다는 못하다는 그런 이야기한 거예요.
어쨌든 간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면 다 벗어버려야 되는데 시원하게. 더 꼬이게 만들고 힘들게 만들고 하는 것은 이 미녀가 야수 속에서 사랑을 발견했을 때 야수 속에서 사랑만 사랑한 것이 아니고 뭐까지 사랑했습니까? 그 사랑을 평소에 위험스런 야수의 모습으로 했던 그 자체 전체를 사랑하게 되겠지요.
보통 사람들은 율법을 사랑합니까? 율법은 짐이잖아요. 그런데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이 짐이 아니고 그 자체 전체 껍데기까지 포장지까지 합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증거들로 하나의 동아줄로 그렇게 볼 때 비로소 제대로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고 야고보는 이야기하는 겁니다. ‘믿습니다’ 말로만 혀로만 누가 못하느냐 말이죠. 그렇게 믿습니다하지 말고 율법의 행위가 네 몸에서 발산 된다면 그야말로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사랑을 이해하는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10분 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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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신명기 27장 말씀을 !!
이제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는데, 야고보서를 공부하기 이전에 먼저 신명기 27장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에 신명기라는 것이 있는데(ㅋㅋ), 27장 16절부터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신 27: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 27:17)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 27:18)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 27: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 27:20) 계모와 구합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 27:21) 무릇 짐승과 교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 27:22) 그 자매 곧 그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과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 27:23) 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 27:24) 그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 27:25) 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 27: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 저주를 받을 것이라 !!
신명기 28장 들어가기 전인 27장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오는데, 즉 26절에도 나오듯이,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들 알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나라라고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오히려 축복을 받는다는 것 때문에 무엇이 노골적으로 등장하느냐 하면, "왜 사람이 저주를 받는가?" 라고 하는, 그 이유에 대해서 축복을 받아야 될 사람만이 그 정보를 공유하게 되는 겁니다. 즉 축복을 받아야 될 사람은 저주가 뭔지도 모르는 채로 축복이 오는 것이 아니고, 충분하게 저주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축복이 값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방금 이야기한 것을 그림으로 한번 그려보겠는데, 오늘은 앉아서 하기는 다 틀린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아무튼 이스라엘 집단이 여기에 이렇게 있는데, 그러면 이 신명기 27장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이러 이러한 자는 저주를 받는다" 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그 다음 28장에 보면, 축복을 받는다고 되어있고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저주를 받으면 받지 뭐. 저주를 받을게. 저주가 별 것인가?" 라고, 그렇게 나올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신명기 28장에 보면 저주가 나오는데, 그것도 상당히 구체적으로 저주가 기록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먼저 신명기 28장에 저주가 어떻게 구체적인지, 그것부터 살펴보도록 하겠는데, 일단 신명기 28장 16절 이하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 28:16)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신 28:17)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신 28:18)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신 28:19)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신 28:20)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공구와 견책을 내리사 망하여 속히 파멸케 하실 것이며
(신 28:21) 여호와께서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가 얻을 땅에서 필경 너를 멸하실 것이며
(신 28:22)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상한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케 할 것이라
(신 28:23)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
(신 28:24)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서 필경 너를 멸하리라
(신 28:25) 여호와께서 너로 네 대적 앞에 패하게 하시리니 네가 한 길로 그들을 치러 나가서는 그들의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네가 또 세계 만국 중에 흩음을 당하고
(신 28:26) 네 시체가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짐승들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들을 쫓아 줄 자가 없을 것이며
(신 28:27) 여호와께서 애굽의 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개창으로 너를 치시리니 네가 치료함을 얻지 못할 것이며
(신 28:28) 여호와께서 또 너를 미침과 눈멂과 경심증으로 치시리니
(신 28:29) 소경이 어두운데서 더듬는 것과 같이 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네 길이 형통치 못하여 항상 압제와 노략을 당할 뿐이니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
(신 28:30) 네가 여자와 약혼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그와 같이 잘 것이요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포도원을 심었으나 네가 그 과실을 쓰지 못할 것이며
(신 28:31) 네 소를 네 목전에서 잡았으나 네가 먹지 못할 것이며 네 나귀를 네 목전에서 빼앗아감을 당하여도 도로 찾지 못할 것이며 네 양을 대적에게 빼앗길 것이나 너를 도와 줄 자가 없을 것이며
(신 28:32) 네 자녀를 다른 민족에게 빼앗기고 종일 생각하고 알아봄으로 눈이 쇠하여지나 네 손에 능이 없을 것이며
(신 28:33) 네 토지 소산과 네 수고로 얻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 민족이 먹겠고 너는 항상 압제와 학대를 받을 뿐이리니
(신 28:34) 이러므로 네 눈에 보이는 일로 인하여 네가 미치리라
(신 28:35) 여호와께서 네 무릎과 다리를 쳐서 고치지 못할 심한 종기로 발하게 하여 발바닥으로 정수리까지 이르게 하시리라 …
(신 28:57) 그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의 낳은 어린 자식을 가만히 먹으리니 이는 네 대적이 네 생명을 에워싸고 맹렬히 쳐서 곤란케 하므로 아무 것도 얻지 못함이리라
◈ 저주, 저주, 저주 !!
여기 28장 16절을 보면, 성읍이 저주을 받는데, 17절에서 구체적이란 겁니다. 즉 광주리와 떡 반죽이 저주받고, 그 다음에 18절에서, 자기 몸의 소생과 토지가 저주받고, 계속해서 저주를 받는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21절부터 구체적으로 나오는데, 여호와께서 몸에 염병이 들게 하고, 22절에는, 폐병이 들게 하고, 또 재앙들이 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25절에서는, 누가 오면 일곱 길로 도망치게 되고, 26절에서는, 시체가 공중의 새들의 밥이 될 것이며, 그 다음에 27절에 보면, 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개창으로 치는데, 그런데 치료는 불가능하고, 28절에서는, 눈멂과 경심증, 29절에서는, 약탈을 당할 것이며, 30절에서는, 여자와 약혼을 했지만 다른 남자가 약혼자를 차지할 것이라고 합니다.
30절에서는, 집을 건축했으나 완공되지 못하고, 포도나무를 심었지만 과실을 맺지 못하며, 31절에서는, 나귀를 다 빼앗기고, 33절에서는, 토지소산과 수고한 것을 알지 못하는 놈이 다 가져갈 것이며, 다른 민족에 압제를 받을 것이며, 35절에서는, 종기가 나게 될 것이며, 종기난 사람들 유의해야 되는데 말입니다(ㅋㅋ). 그 다음 38절에 보면, 종자를 심어도 메뚜기가 와서 다 먹을 것이며, 또 벌레가 일어서 소출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붕 뛰어서 54절을 지나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아가서 특히 57절을 보면,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의 낳은 어린 자식을 어떻게 합니까? 음식물이 없으니 자기 자식을 자기가 먹을 것이라고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정말 끔찍하지 않습니까?
◈ 하나님의 율법의 구조 안에 놓여있어야 !!
방금 읽어본 이러한 저주와 저주들, 즉 "이러 이러한 것들을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했을 때는, 그 이전에는 말씀에 신경을 쓰다가, 방금 신명기 28장에서 이러한 것들이 저주라고 하게 되면, 우리는 그만 화가 나서 그만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이런 저주를 받게 됩니까?" 라고 따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저주가 원인이 되고 그 결과가 28장에 나열이 되어있다고 한다면, 만약에 그 원인 편에 서 있다면, "그까짓 저주를 좀 받지 뭐" 라고 하다가, 그런데 결과 편에 섰으면 "우리가 무엇이 잘못되어서 우리에게 이런 저주를 퍼붓습니까?"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주를 받는 자가 되어야만, 하나님의 율법의 구조 안에 놓여있는 대표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 법인가? 가정인가?
방금 제가 강의를 시작해서 한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면, "내가 나를 보호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닙니까?" 라고 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은 율법을 보호하는 것, 물론 이 율법이니 '법'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하나님은 "나의 법을 보호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이고 뜻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거기서부터 이스라엘은 참으로 특이하고 희한한 민족임이 드러나는데, 보통 민족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자식을 낳으면,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소위 '가정'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런 가정은 어떤 관계인고 하니, 혈육적인 관계라는 말입니다.
◈ 인간은, 가정밖에 몰라 !!
그렇다면 그 가정에 속한 모든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가 낳은 자식을 위해서, 또는 자식은 부모를 위해서, 그렇게 가정을 보호하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모든 노력과 모든 정신을 기울여야만 하는데, 그렇게 혈육적인 것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쏟아 놓는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두고 '인간'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혈육 중심이고, 그런 혈육은 자식과 부모 관계가 기본 핵심이며, 거기에서부터 삼촌이나 동서, 올케 등등이 나오지만, 그러나 그 기본은 아버지와 자식인데, 그렇게 가족이 가장 기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족이 기본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의 몸은 그 기본을 지키기 위해서 노동하고 애쓰고, 그렇게 여기에 투자를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것은 바로 이방민족, 즉 이방나라에서 누구나 그렇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을 찾고, 부처를 찾고 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데, 어느 누구나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 흩어진 열두 지파 !!
그런데 오늘 우리가 공부하려고 하는 것이 '야고보서' 인데, 이 야고보서에서 강조하는 것이 율법의 구조라는 겁니다. 우리가 야고보서를 공부하려면, 먼저 야고보서 1장 1절에 보면 "흩어진 열두 지파" 라고 되어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강의교재를 이미 다 읽어 오셨지요? 제가 십자가 마을에 올려놓았는데, 물론 그렇게 매끄러운 문장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 읽지 않은 분은 없지 싶은데, 그래서 우리가 행복한 사람이 아니냐는 겁니다(ㅋㅋ).
(약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 12지파, 즉 이스라엘은 무엇인가?
여기에 보면, 야고보가 이 편지를 누구에게 주었느냐 하면,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주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열두 지파를 뭉치면 이스라엘인데, 이 이스라엘의 특이성은 무엇인고 하니, 항상 이방민족과는 다른 양식으로 존재하는 나라라는 겁니다.
이렇게 이방민족과 다르다는 말은, 즉 "다른 민족은 저렇게 살아가는데, 그런데 흩어진 열두 지파인 이스라엘은 이렇게 살아간다" 라는 것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하려는 야고보서가 그렇게 시작이 된다는 말입니다.
◈ 이스라엘은, 축복과 저주를 결정하는 유일한 민족 !!
그래서 이 이스라엘이 무엇이지, 그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제가 신명기 27장과 28장을 먼저 거론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살펴보니까, 보통 이방민족은 자기 가족과 혈육적인 것에 신경을 쓰는데 반해서, 이스라엘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자기를 보호해야 할 보통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계시, 즉 하나님의 말씀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래서 결과적으로 나왔던 것이 이스라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보다 법이 먼저고,축복과 저주를 결정하는 그 법을,
이 세상의 모든 민족 가운데서 유일하게 이스라엘만이 하나의 그릇이 되어서,
거기에 담아서 보여주는 나라가 곧 흩어진 열두 지파, 즉 이스라엘이며,
그것이 오늘날에도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있다고 여기면서,
예수님을 믿는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가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 아하, 나는 말씀의 결과물로서 !!
그러면 이 야고보서를 보기 이전에 우리는 어디에서 떠나야만 합니까? "내 가족 중심, 나 중심, 나는 나를 보호하면서 평생을 살아갈 거야" 라는 생각에서, 도대체 무엇을 벗어버려야 됩니까? "나는 내가 원인이 되어서 어떤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니고,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의 능력에 의한 하나의 결과물로서 여기에 있다" 라고 여겨야 한다는 겁니다.
즉 지금 우리가 이렇게 펜션에 모여있는 것도 그렇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금 여기 펜션에 모여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을 보여주기 위해서, 즉 "아하, 이것이 바로 그 무서운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로구나"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여 있다고 하면,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흩어진 열두 지파에 해당된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을 위해서, 맛있는 저녁식사만 생각하면서 모인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방금 제가 한 말, 즉 "내가 법을 지키겠습니다" 라는 말과 이게 서로 같은 말입니까? 아니라면 틀린 말입니까? 전혀 다른 말인데, 즉 "내가 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겠다" 라는 뜻이 아니고, "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결과물로 생겼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전혀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고 하니, 다시 말씀을 드리면 "내가 나를 보호하듯이 평생을 보호할 수 없고, 니가 지키고 보호해 줄 것은 따로 있다. 즉 하나님의 법을 보호하기 위해서, 너는 이 땅에 사명을 띠고서 태어났다" 라는 것이, 그것이 바로 이 야고보서에 나오는 첫 번째 의미라는 말입니다.
◈ 이제 야고보서 본문을 살펴보겠는데 !!
이제 야고보서 본문을 보겠는데, 여기 1절에 보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 1절서, 이렇게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를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을 누구로 제시합니까? 구심점을 말입니다.
그 구심점을 몸무게로 해서, 즉 서로 동일한 몸무게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열두 지파라고 할까요? 아니면 키로 그렇게 할까요? 남성이면 남성끼리, 여성이면 여성끼리, 그렇게 끼리끼리 알아서 결정을 하는 것입니까?
(약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 구심점 -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
다시 말해서, 지금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를 모을 수 있는 그 구심점을 여기 1장 1절에서는 무엇으로 제공을 하느냐는 겁니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의견 말고, 즉 우리는 이 세상에서 숨쉬고 먹고 살아가기도 힘들어하는데, 그런 세상에서 우리의 뜻 말고, 그런 것은 별 의미가 없고, 지금부터는 제가 야고보의 뜻을 지금부터 이야기해 드리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 그러면 왜 흩어져 있는가?
야고보의 뜻은 한 마디로 말해서 "흩어져 있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흩어져 있는 것은 하나의 결과로서, 즉 그 원인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데, 그렇게 예수님 때문에 발생된 결과물로서 흩어져 있는 것이 곧 '열두 지파' 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러한 야고보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 즉 "내가 천국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 되고, 그리고 무엇을 믿어야 한다" 라는 생각하고, 그 사고방식 자체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완전히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 '내'가 '나'를 보호하는 !!
다시 말해서, "내가 여기에 있는데, 내가 죽어서 좋은데 가겠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누가 누구를 보호하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서 보호하는 정도가 아니고, 죽어서도 좋은데 가서 잘 살아보려고 하는, 그렇게 '나'를 보호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천국에 가려고 하는 것이 "내가 나를 보호하는 전형적인 방식" 라고 말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즉 "무엇이 무엇을" 이라고 하는, 즉 '나' 라는 것이 주어가 되고, 또한 '나' 라는 것이 목적어가 되는데, 물론 그 사이에 행함이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러나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은, 그 행함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행함은 주어와 목적어가, 즉 "누가 누구를 시키셔, 어떤 결과가 나왔는가?" 라는 것인데, 이런 것은 전부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에서 빠져버린다는 겁니다. 여기에다가 무엇을 집어넣느냐 하면, 법이 들어가고, 이 법은 반드시 행함으로 등장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 예찬아, 일어나야지 !!
예를 들어서,
아침에 아이들이 늦잠을 자면 어떻게 합니까?
그냥 말로 합니까? "일어나라"해도 계속해서 자면, 흔들어 깨우죠. "야, 일어나" 라고 강제로 일으키죠.
내 자식이 지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즉 남의 자식이 아닌 내 자식을 학교에 빨리 등교시키기 위해서,
그 사이에 나의 행함이 개입되죠.
그렇게 부모의 행함이 개입되어서 아이를 강제로 일으켜서 학교에 보내듯이,
예수님께서 살아계시고 그 예수님께서 자신의 법을 이루기 위해서, 거기에 행함이 동원되죠.
"그 행함을 보여라" 이 말입니다 "그 행함으로 니가 믿는 지를 보겠다" 라는 겁니다.
◈ 내가 믿습니다 ??
그런데 만약에 "내가 믿습니다" 하면, 그 주어인 '내'가 믿을만한 걸 골라서 믿는 것이 되어버리는데, 그러니 그렇게 "내가 믿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행함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인데, 어디까지 말입니까? 나중에 죽어서 좋은데 가려고, 즉 천국에까지도 그렇게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나를 천국으로 보내기 위해서, 내가 나에게 어떤 강제성을 발휘하는 것",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너는 믿는 자 되어야만 해. 믿고 있지. 그렇지? 믿고 있지" 라는 것인데, 그렇게 계속해서 자기 자신에게 재촉하고 책망하고 독촉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어제도 믿었지만 오늘도 믿어야 돼. 나는 믿어야만 돼. 그래야만 구원을 받아" 라고 하는 것은 전혀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그 모든 것의 원인이, 즉 '내'가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가 바로 '나'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에서는 이웃사랑도 안 되고, 주님께 영광도 되지 않고, 또한 자기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도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식으로 교인을 천 명이든, 만 명이든, 제 아무리 모아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흩어진 열두 지파"가 아니라 그냥 정체성인데, 즉 '기독교' 라는 유대감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유대감은 돈 문제가 끼어 들면 그냥 다 깨어지는데, 교회 안에 돈 문제가 그만 불거지면 유대감이 뭐고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돈을 빌려줬잖아. 집사님, 그런데 왜 돈을 안 갚습니까?" 라고, 그렇게 나오면 다 깨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 다시 신명기 27장을 !!
여러분이 일단 이해를 했다고 치고, 아까 본 신명기 27장을 다시 하겠는데, 여기 신명기 27장을 보면 축복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즉 "만약 이렇게 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저주를 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그분이 원인이 되고, 우리는 저주받는 자체로서 결과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저주를 주면 그냥 저주를 받는데, 물론 축복을 주면 그냥 축복을 받는 것이고 말입니다.
◈ 이스라엘은 일종의 모종밭 !!
그러니 축복과 저주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행함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행함을 수용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 땅콩을 모종할 때, 그 모종밭에다 씨앗을 뿌리고 나중에 봄이 되면 싹이 거기서 나는데, 그처럼 주님의 행위를 뿌려놓으니까, 어떤 것은 저주가 올라오고, 어떤 것은 축복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될 때에, 이스라엘은 어떻게 됩니까? 정말이지 이스라엘다운 이스라엘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필리핀이나 노르웨이나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한 것이 아니고, 물론 대한민국도 아니고 말입니다. 바로 그것을 열두 지파에게, 즉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민족에게만 하셨다는 말입니다.
◈ 두 가지 사고방식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
그렇다면 이스라엘이라는 열두 지파에게 있어서, 우리는 여기에서 그들을 다른 민족과는 달리 무엇을 살펴보아야 되는고 하면, 혈육적인 것, 즉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나에게 결과가 주어지는 것" 이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어떤 원인이 되어서 나에게 결과로 주어졌다는 것", 바로 이 두 가지가 서로 대비되고 서로 충돌되는, 그런 두 가지 사고방식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렇게 양쪽을 다 보여줘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그렇게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도, 바로 그런 원칙 속에 저와 여러분들이 동일하게 놓여있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열두 지파가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들도 그렇고 말입니다.
◈ 이스라엘은, '내'가 아닌 '하나님'이 원인이 되어서 !!
그런데 그 원인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까지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물론 "하나님이 원인이다" 라는 말은 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어떤 원인이 되어서, 즉 다른 민족에게는 일어나지를 않는데, 왜 유독 이스라엘만큼은 자기 자신들이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원인이 되어서 그렇게 되었는지를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마치 모종밭처럼, 즉 저주를 뿌리면 저주가 일어나고, 또한 축복을 뿌리면 축복이 피어난다는 겁니다. 왜 하필이면 그런 일이 그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왜 얼어나는지, 아직까지 그 점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여기 이렇게 열두 지파가 있는데, 이것을 한 곳에 모았을 때 그게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인데, 그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이 4글자이지만, 이전에 처음 이름은 원래 2글자였다는 겁니다. 바로 '야곱' 이었는데, 즉 야곱이 이름이 바뀌어서 이스라엘 되고, 여기서 열두 지파가 나왔다고 하면, 이 야곱에게 담겨있는 하나님의 원인이 있을 것이고, 그 원인이 열두 지파까지 파급되고 퍼져나간다는 말입니다.
◈ 야곱은, 하나의 텅 빈 무대 !!
그렇다면 이 이스라엘이 무엇인고 하니, 즉 왜 이스라엘이 축복과 저주를 보여주는 모종판이 되어야 하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야곱에게 달려있는데, 이 야곱이 태어날 때에 없는데서 태어났다는 겁니다. 즉 야곱은 하나의 텅 빈 무대라는 겁니다. 여기가 무대라고 하면, 커튼이 있고 무대 뒤편에서 배우가 나오는데, 물론 마이크와 조명도 이렇게 달려있고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 드디어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거기에서 배우가 등장하게 되면, 그 사람이 바로 야곱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야곱이 등장할 때는 혼자가 아니라 한 사람이 더 등장을 하는데, 그래서 두 명이 되는데, 즉 쌍둥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이 쌍둥이가 바로 모든 우주 삼라만상의 비밀이라는 겁니다.
◈ 서로 싸우는 쌍둥이의 등장 !!
이 야곱과 에서가 나타나기 전에 사회자가 말하기를 "이제부터 하나님의 계획인데, 그것이 여러분이 보는 가운데 무대 위에 펼쳐집니다. 자, 나오세요!" 라고 했을 때, 관객들은 한 사람이 나올 줄로 알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쌍둥이가 등장하는데, 그것도 서로 마주보면서 싸우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승자에게는 축복이 돌아가고, 패자에게 저주가 돌아가는 식으로, 즉 하나님께서 원인이 되어서, 그 원인자인 하나님께서 축복과 저주를 보여주는 무대장치를 마련했다는 겁니다. 이 무대는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이 되는데, 즉 '이스라엘' 이라는 무대에 원래는 주인공이 없었는데, 그런데 그렇게 없던 주인공이 등장하니까, 승자는 축복을 받고, 패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 신명기 28장 - 너무나도 촘촘한 저주 !!
아직까지 이 시점에서는 무엇이 축복인지 무엇이 저주인지, 그것이 구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런데 아까 신명기 28장에서 보았듯이 무엇이 저주였습니까? 거기서는 드러나는데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의 몸, 그리고 평소에 노동하는 그 현장과 이 몸에 대한 그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하등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고 아주 촘촘하게 심판을 내린다는 겁니다. 차라리 죽여 버렸으면 더 좋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저주'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살고자 하는 힘과 죽이고자 하는 힘, 그 양쪽이 다 그 모습을 드러내는 그 현장을 저주로서 보여주는 겁니다. 즉 아버지가 자기 다리에서 나온 자식을 자기가 잡아먹을 때, 그것을 저주라고 했다는 겁니다. 참 엽기적인 내용인데, 신명기 28장 58절에서 분명히 그렇게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신명기 28장을 촘촘히 보지 않는데,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그렇게 축복만 하고 끝낸다는 겁니다. 목사가 심방을 가서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는,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말씀을 하나의 예언으로 보기 때문에, 즉 말이 씨가 된다고 여긴다는 말입니다.
◈ 나는 100살도 못 되어서 죽을 거야 ??
제가 여기에 오면서 어느 가정에서 점심을 먹는데, 박사교회에 다니던 전에 알던 집사님 댁인데 말입니다. 그 윗집도 박사교회에 다니는데, 그분이 평소에 "나는 70도 못 되어서 죽을 거야" 라고 하다가, 그만 67이 되어서 죽었다는 겁니다. 즉 말이 씨가 되어 죽었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소리를 듣고 뭐라고 했는고 하니, "나는 100살도 못 되어서 죽을 거야"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99살까지는 살지 싶어서 말입니다(ㅋㅋ).
아무튼 축복을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던 축복을 받게 되어있고, 또 저주를 이야기하면 아무리 피해도 따라가면서 저주를 받게 되어있다고 하는, 그러한 운명을 보통 예언이라 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말씀의 위력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튼 야곱과 에서가 등장할 때, 저주의 구체적인 것은 모르지만, 그러나 저주라고 하는 것은 살고자 하는데 있어서 만만치 않은 것, 물론 여기에서는 고통과 수고와 슬픔 등이 나오는데, 보통 그런 것을 저주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그럴 바에는 하나님께서 아예 그런 인간을 죽이면 되는데, 그런데 절대 죽이지 않고 살려두니까 어떻게 되는고 하니, 자기도 그만 살고자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살고자 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살아야 되니까,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와야 된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저주라는 것은, 아담이 죄를 짓고 난 뒤에 보편적인 모든 인간에게 다 해당이 된다는 말입니다.
◈ 저주성 때문에 싸우는데 !!
그렇게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에게 해당이 된다고 하면, 그러면 쌍둥이가 이렇게 싸운다고 하는 것은, 그 싸우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바로 그 저주성 때문에 싸운다는 겁니다. 아직까지 축복이라는 것은 둘 다 해당이 안 되고 말입니다. 그렇게 서로 싸우는 것은 아버지의 축복을 보다 더 많이 받아내기 위해서, 쉽게 말하면, "내가 너보다 편하고 풍족하게 더 살고 싶어" 라는, 그러한 복을 따내기 위해서 쌍둥이끼리 싸운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싸우면 승자와 패자가 결국 갈라지게 되는데, 즉 승자는 축복을 받고, 패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쪽은 승자가 되고, 한쪽은 패자가 되는 원인은 무엇인고 하니, 싸워서 이기려고 하는 '나' 자신이 저 사람과 싸워서 이기겠다는 그 행위가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다" 라는 것이란 말입니다.
◈ 난, 너를 사랑해 !!
다시 말해서, 똑같이 둘 다 밥을 먹고 살아보려고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그런데 한쪽은 일이 안 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그것은 주님께서 미워하기 때문에 그렇고, 그리고 다른 한쪽은 어떻습니까? 자기의 행동과 전혀 상관없이 자꾸 복을 받게 되어있는데, 왜 그런고 하니, 주님이 사랑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고 하니, 인간의 행함이란 아래층 위에는 사랑과 미움의 층이 따로 있어서, 즉 행함과 상관없이 사랑을 줄 자에게는 사랑을 주고, 미움을 줄 자에게 미움을 준다는 겁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여기 아래층에 있는 쌍둥이는 아직까지 둘 다 모르고 말입니다.
◈ 오히려, 지팡이가 모세를 데리고 놀아 !!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할 때 여호수아가 칼을 들고 설쳤는데, 그런데 전쟁의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칼 솜씨와는 전혀 상관없이, 산 위에서 모세가 지팡이를 들면 승리하고, 또한 모세가 지팡이를 내리면 그만 패배를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에는 모세만 보이게 되었는데, 하지만 사실은 모세가 지팡이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지팡이가 모세를 데리고 논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승리토록 하면 승리하고, 패배토록 하면 패배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민족이 바로 흩어진 열두 지파, 즉 과거의 이스라엘이고 오늘날의 교회를 두고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경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특이한데, 즉 "사랑이냐? 미움이냐?", 혹은 "미움이냐? 사랑이냐?" 라고 하는, 여기에서 결판이 난다는 겁니다.
◈ 아로마 향기와 같은 !!
그래서 여러분은 벌써 야고보서의 결론부분에 이미 접촉을 했는데, 여러분이 율법을 대할 때 "제가 무엇이관데 이렇게 사랑하십니까?" 라고 하면서 대한다면, 그것이 곧 율법의 완성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율법을 지켜야지" 라고 하면서, 그 행위의 원인을 '나'에게 둔다면, 그것은 자기가 살려고 하는, 즉 죽어서도 좋은데 가려고 싸우는 꼴밖에 안 되는데, 그러니 그런 것은 전혀 축복과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제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사랑 덕분입니다" 라는 그 순간, 그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아로마 향기와 같은 사랑의 발산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모든 율법의 완성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아로마 향기를 맡아보셨지요? 헤이즐넛 향기밖에 몰라요?(ㅋㅋ)
◈ 저주란, 원인 자체를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것 !!
그런데 그렇지가 않고 "법이 왔는가? 그러면 내가 이것을 지켜서 축복을 받은 사람이 되겠다" 라고 설치게 되면, 이미 그것은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원인 자체가 자기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러니 그런 사람은 제 아무리 애를 써도, 항상 자기 실적과 업적을 자꾸만 검토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이만큼 열심히 기도를 했으니, 어느 정도는 챙겼겠지" 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꾸만 자기가 원인이 되니까, 어떤 결과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면 그 원인수정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이 언제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 '나와 너' 라는 관계에서 빠져 나와야 !!
그것을 조금 고상하게 이야기한다면, "기존관계에서 빠져 나와라"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얽히고 설킨 기존 관계에서 우리 흩어진 열두 지파는, 거기에 얽매이지 말고 빠져 나오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빠져 나오는 방법이 바로 야고보서에 마지막 5장에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회사에 취직해서 일을 하는데 그만 품삯을 받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고용주가 다 가져가고 노동자에게 품삯이 주어지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억울하다고 하소연을 하니까, 이 야고보서에서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있다는 겁니다. 즉 조금만 참으면 심판주가 문 앞에 있으니까, 즉 주께서 다시 오시게 되면 그런 모든 고통과 억울함을 풀어준다는 말입니다. 즉 그것이 빠져 나오는 제대로 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약 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약 5: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지상에 있는 고용자와 사용자의 기존관계에서 빠져 나와서 누구에게 맡기라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하실 일에 맡겨라" 라는 겁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더 어렵지 싶은데, 왜냐하면 그것을 실천에 옮긴다는 것이 말이 안 되니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으니까, '나와 너'의 관계에서 벗어나서, 그러한 '나와 너' 사이에 무엇을 집어넣으라는 겁니까? 만약에 우리가 흩어진 열두 지파라고 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 사이에 집어넣으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만 합니까? 그분이 현재 '나'를 구원해주신 '원인자'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즉 예수님이 '원인자'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의하면 일방적인 사랑의 대상으로서, 즉 그냥 그 어디를 가도 사랑을 받기로 되어있는데, 그렇게 일방적으로 사랑을 주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방적인 사랑을 받은 사람은 기존의 '나와 너' 라고 하는, 그런 일대일의 직접적 관계에서 빠져 나오게 되면, 그렇게 되면 원인자에게 예속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 야고보서의 주제 - 주님의 사랑을 율법으로 !!
그러면 이 야고보서의 내용은 뭐냐 하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가 도대체 어떤 관계로 되어있기에, 바로 그것이 사랑이 되는지를, 그것을 율법으로 보여주겠다는 것이 이 야고보서의 주제가 된다는 말입니다. 율법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편지를 하게 되는데, 즉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의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 사랑의 증거는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라는 겁니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의 증거인데, 그러니 주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미 사랑을 받았다는 말입니까? 받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당연히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고보서 2장 1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약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곧 사랑의 증거 !!
여기에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믿는 너희' 라는 것은 열두 지파인데, 그러니 이미 야곱처럼 사랑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 사랑이 원인이 되어서 현재 우리라는 결과물이 나왔는데, 그런데 그 사이에 어떠한 것들을 사랑으로서 모종을 부어놓았는지, "이것이 사랑, 저것도 사랑, 요것도 사랑" 이라고 하면서, 온 천지에 사랑이 마구 올라온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싹이 그야말로 모종판의 모종처럼 그렇게 새파랗게 올라온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사랑을, 그것이 어떻게 해서 사랑인지를 율법으로 보여주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야고보서의 주제가 된다는 말입니다. 참 쉽죠잉(??).
◈ 원인을 '나'에게서 찾지 맙시다 !!
여기서 좀 더 나가보겠는데, 이제는 골치 아프지 싶은데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결론부분에는 접촉했는데, 그런데 그 과정이 복잡하다는 겁니다. 아까 사랑을 할 때는 반드시 무엇과 관련이 되어있다고 했습니까? 반드시 미움이 관련되어서 사랑이 나오는데, 왜냐하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그 원인자가 곧 '나'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그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내가 어떻게 했기에 이런 것이 주어졌을까?" 라고, 반드시 그렇게 자기에게서 원인을 찾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고3 학생이 모의고사를 치는데 시험문제가 자기가 다 아는 것만 나왔다고 하면, 평소에는 일등을 할 아이가 아닌데 그만 자기 반에서 일등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어떻게 내가 아는 문제만 냈을까?" 라고 의아해하면서도, "아마 내가 평소에 선생님에게 잘해서 그런가봐" 라고, 그렇게 여겼다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선생님은 어떠한고 하니,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 시험문제를 냈는데, 그런데 그 학생이 그만 다 알아 맞추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럴 때는 그 원인을 '나'에게서 찾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로 그와 같이, 이 야고보서 특징을 "원인을 나에게서 찾지 맙시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나'에게 율법이 감겨 있어서, 사랑의 전기 에너지가 !!
그렇다면 '나' 라고 하는 것 안에 도대체 무엇이 둘둘 감겨 있어서 그러한고 하면, 마치 철 막대기에 구리선을 감으면 전기가 생기듯이, 이 '나' 라는 자석 막대기에다 코일을 감으면 전기가 발생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 라는 것에 율법이 감겨 있어서, 그 율법이 완성되면 사랑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사랑이란 전기 에너지가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법을 주게 되면, '나' 라는 것은 사랑이란 율법에 의해서 감겨진 상태에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눈뜨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 라는 주체는 그만 사라지고, 날마다 하나님의 법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나'가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 자기 자신이 안개라는 생각이 든다면 !!
야고보서 4장 14절에 보면,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라고 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두고 안개라고 하는데, 즉 우리가 잠깐만 있다가 없어지는 물방울, 즉 우리는 있으나마나한 존재라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이 정말이지 의미 없는 하나의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물방울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하면, 그런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 법에 감겨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생각이 안 드니까 문제라는 겁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니까, 우리의 주체가, 즉 죽었던 주체가 다시 생생하게 살아난다는 말입니다. 즉 "주님이여, 제가 무엇을 하면 이 도시에서 성공할 수 있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약 4: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 저는 안개가 되기 싫어요 ??
그렇게 우리는 야고보서 4장의 말씀을 보지 않으니까,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감겨야 되는데, 그런데 아무 것도 감긴 것도 없이, 그냥 맹탕이라는 겁니다. 물론 감긴 것이 있기는 있는데, 자식새끼들, 또한 시어머니와의 관계, 그리고 지긋지긋한 남편과의 관계 등등, 그런 관계에 감겨있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율법에 의해서 감기질 않으니까, 즉 자기가 생생하게 살아있으니까, 그래서 성경에서 자기를 안개라고 하면 그 안개를 거부한다는 겁니다. 즉 "저는 안개가 되기 싫어요"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것을 주님이 아시는데, 우리는 안개가 되기 싫어하는 줄을 말입니다. 그렇게 잘 알기 때문에, 우리에게 원인을 찾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사랑이란 것을 방금 쉽게 이야기했지만, 하지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어려운 것이 무엇인고 하니, 야고보서의 이런 구조 자체를 누가 반발하느냐 하면, 오늘날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소위 그래도 교육을 받았다고 하는 우리 자신이 극구 자꾸만 밀어낸다는 것입니다. 즉 "그런 구조 안에 있는 내가 되기 싫어요. 나는 내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될 거예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남들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야고보서 2장에 보면 뭐가 있는고 하면, "세상과 벗하는 자들아, 너희는 하나님의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라고 한다는 겁니다. 또 그런 배경이 있다는 겁니다. 마치 코일처럼, DNA 구조처럼 둘둘 감겨있으니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칭칭 감겨있는데, 이 부분은 "너희는 안개니라" 라고 하고, 또 여기 이 부분은 "세상과 짝하고 살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라는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 "하지만 우리는 용서를 받았잖아요?" 라고 하면, 여기 아래에 보면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라는 부분이 또 나온다는 말입니다.
(약 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에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이러한 것들이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고 전부가 한 줄로 이어져있는데, 그 줄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 인데,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너희에게 주어졌음으로, 너희 현재 구조는 단독적인 구조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법에 의해서 둘둘 감겨져 있다" 라는 겁니다.
◈ 쌍둥이를 찾습니다 !!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알아야 됩니까? 이것이 감겨지지 않은 사람이 받을 저주, 즉 하나님의 미움, 이것을 겸하여 같이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야곱이라 사람이 축복이란 개념을 알려면, 자기는 반드시 쌍둥이를 찾아야 하는데, 그래도 우리도 우리의 쌍둥이를 찾아야 하는데, 사실 이러한 쌍둥이는 찾기 쉽다는 겁니다.
여기서 조금만 나가면 쌍둥이가 있는데, 여기 보문단지에 나가면 벚꽃 구경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세상구경을 하고 있는 자들이 바로 우리의 쌍둥이인데, 어떤 유명한 사람은 그것을 '그림자' 라고 했는데, 즉 우리의 어두움, 그것이 곧 우리의 그림자라는 겁니다. 즉 우리가 이렇게 있다고 하면, 여기에 항상 따라붙는, 마치 쌍둥이 같이 따라붙는 것이 바로 우리의 그림자라는 말입니다.
◈ 그림자는 되려 점점 더 짙어질 뿐 !!
이 그림자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인데, 우리가 미국에 가고, 영국으로 가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어두움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쌍둥이라고 해도 되고, 또한 그림자라고 해도 되는데, 그렇게 양쪽에 다 해당되는데, 즉 쌍둥이니까 붙어있는 이런 몸도 가능하고, 또는 여기에 이렇게 있으면 평생을 항상 따라다니는 그림자라고 해도 되고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무슨 성화론이 성립이 되겠습니까? 안 된다는 겁니다. 성화가 된다고 해서, 점점 더 그림자가 옅어지고 하는 그런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나이가 90이 되고 그 얼마가 되더라도, 항상 그림자는 오히려 길게 늘어뜨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산 위에 올라가서 내신성적이 이만큼 되었다고 해도, 그림자는 되려 점점 더 짙어질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만큼 성숙되었다" 라고 하면, 우리는 인간은 오히려 그것을 결코 포기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차라리 그렇게 성숙되기 이전에는, 그야말로 개판 같은 인생이라고 여겼다면, 그런 자기 과거에 대해서 쉽게 잊어버리고, 즉 "나는 과거를 생각하지 않는다" 라고 잘라내고 싶어했지만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잘리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가 착하다고 여기게 되면, 즉 2008년도부터 2010년까지 계속 착해보라는 겁니다. 그것을 아까워서 어떻게 그런 성과를 떼어낸다는 말입니까? 절대로 떼어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전부가 다 무엇인고 하니, "내가 원인이 되어서, 이만큼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 라는 자기의 축복과 저주, 즉 이방나라적인 요소가 계속해서 붙는다는 말입니다.
◈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
그래서 이 야고보를 해석하려면, 이러한 사랑과 미움, 미움과 사랑, 즉 우리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그런 양쪽의 경우를 모두 다 설명해줘야 된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야고보서 자체가 기가 막히게 짝을 맞춰준다는 말입니다. 그런 짝 중에서 하나를 살펴보면, 야고보서 1장 8절 누가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약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여기에 보면 우리의 어두운 면이 나오는데, 즉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런 어두움은 우리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자기가 원인이 되어서, 이런 결과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랑이 취소가 되는 겁니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사랑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저주와 짝을 이뤄야만 사랑이 사랑답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사랑이란 미움과 짝이 될 때 사랑의 값을 하고, 또한 축복이란 것도 바로 저주와 관련이 되어있을 때, 그 축복이 축복으로서 부각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8절에서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자기가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자기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해서, 그래서 그러한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는 말입니다.
◈ 저주받은 사람의 특징은?
그러니까 저주받은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면, 항상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다는 겁니다. 즉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렸으면 이런 일이 없을 텐데" 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가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해서 일이 엉망으로 되었다고 여긴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이며, 저주가 무엇이지를 보여주는, 즉 "아하, 이런 것이 저주구나. 이런 것이 축복이구나" 라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바탕화면이라고 할까요? 아무튼 그런 모종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에서가 아니고 야곱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차원에 들어가 보면 알 수가 있는데, 그런데 그만 '에서'의 차원에 들어가 보면, 계속해서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게 되는데, 물론 해결점도 전혀 없는데, 그렇게 계속해서 찾고만 있다는 말입니다.
◈ 처음부터 새로 다시 !!
(이때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옴. 과연 누굴까?) 차가 많이 밀리지요? 늦게 오셨는데, 그렇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겠습니다. 들으신 분은 복습 삼아서 정리를 하면 되고 말입니다.
신명기 27장에서 하나님이 "이러이러한 자는 저주를 받는다"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이라고 화답을 했습니까? "아멘!" 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이러한 경우는 어떤 경우인고 하니, 하나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발생한, 그야말로 이스라엘이 유일한 민족이고, 결코 다른 민족에게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 "아니, 사랑을 받았는데, 굳이 저주 이야기를 할 필요가 무엇이 있습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능상 저주가 좋지 않은 것으로 여겨서, 자꾸 저주가 떨어져나가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우리는 우리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흩어진 열두 지파의 속성상, 반드시 축복을 이야기하려면 저주를 이야기해야 되고, 또한 사랑을 이야기하려면 미움을 이야기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런 두 가지가 모두 있을 때, 우리는 "내가 복 받는 것이 내가 원인이 아니었구나" 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는 겁니다.
◈ 저주를 받을지어다. 아멘 !!
그래서 "이러이러한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아멘" 이라고, 그렇게 '아멘' 이라고 했다고 해서 저주를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서, 자기는 저주를 받아도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날마다 깨우치는, 그런 유일한 구원받은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즉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고 이야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보면 그만 성경을 찢어버리려고 하는데, 즉 "성경이라는 옛날 신화책으로 나에게 부담을 주려고 하느냐?" 라고 하면서 외면을 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러이러한 자는 저주받을지어다. 아멘" 라고 하는, 그것을 수용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그래서 '아멘'으로 받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 축복과 저주의 원인을 '율법관계'에서 !!
그런 점에서 구약과 야고보서가 연결이 되어야 하는데, 물론 굉장히 어렵지만 말입니다. 바로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축복과 저주의 원인이 스스로 자기가 축복을 받을 짓을 해서 받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는 겁니다. 물론 저주도 그러하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인간도 자기 행함으로는 저주를 받아야만 되는 것이지, 축복을 받기 위해서 어떤 행함을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은 우리 인간에게 있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아까 설명을 다 했는데, 즉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랑을 받는 자는 이런 행함의 차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하, 주님의 사랑 때문에 복을 받았구나"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저 사람은 저런 행동 때문에 저주받고, 나는 나의 이런 행동 때문에 복을 받는다" 라는 것에 머물러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복을 받는 것은 오직 사랑 때문에 복을 받고, 저 인간이 저주를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필히 미워하기 위해서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 사람은, 그런 사랑의 차원에 눈이 감기도록, 즉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말씀의 축복이 들리지 않도록, 수용되지 않도록, 믿음이 생기지 않도록, 그렇게 계속해서 조치를 해주신다는 겁니다. 바로 그러한 원인을 찾아내는 것인데, 그 원인의 관계를 이 야고보서에서는 '율법관계'로서 표현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지난 40분 동안 강의한 내용이라는 겁니다. 맞지요?
◈ 야고보서 - 지혜, 구조 !!
그렇게 되면 구약성경과 야고보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구약도 율법중심, 야고보서라는 신약도 율법 중심, 그러면 차이점이 없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겠는데, 그런데 아까 제가 이야기했는데, 우리 인간 속에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칭칭 감겨져있다고 말입니다.
야고보서는 그것을 두고 '지혜' 라고 하는데, 이 지혜는 그 특징이 첫째는 하늘에서 내려오도록 되어있고, 두 번째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이것이 중요한데, 즉 '구조' 라는 겁니다. 즉 "구조적으로 짜여져 있다" 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영화를 보면 나오는데, 일종의 보안장치로서, 레이저 광선인데 말입니다. 왜 아주 귀중한 보물이 있는데, 즉 모나리자와 같은 그림이나 세계에서 제일 큰 다이아몬드를 도둑놈이 훔치려고 할 때, 그냥 눈으로 보면 맹탕이지만 안경을 끼고 보면 선들이 보인다는 겁니다.
그것이 '미션 임파서블' 이란 영화에 보면 나오는데 말입니다. 아무튼 그 중앙에 엄청난 다이아몬드가 있고, 그 옆에는 광선들이 거미줄처럼 있다는 겁니다. '안젤리나 졸리' 라는 여배우는 아주 유연성이 있어서 그 광선들을 피해서 기어이 물건을 훔쳐내고 말입니다.
◈ 지혜의 특징 - 폭발, 폭발, 폭발 !!
그와 같이, 이 지혜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야고보서 1장에서는 먼저 하늘에서 내려오고, 두 번째는 이것이 구조적이라서, 즉 건드리면 그만 폭발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온 천지가 구조로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야고보서 전체가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아까 야고보서 4장에서 "우리 인생은 안개이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안개와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내가 왜 안개냐?" 라고, 그렇게 나오면 폭발하도록 되어있다는 겁니다. "어느 도시에서 내가 장사해서 이득을 보리라" 라는 것도, 역시 폭발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벗어나려고 하면, 야고보서 4장 15절에 있는 말씀을 봐야 되는데, 즉 "주님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라고 했을 때, 정말이지 그렇게 했을 때는 졸리처럼 우리가 레이저 광선을 무사히 통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약 4: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약 1: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 오우 노, 미션 임파서블 !!
그런데 우리가 하루 24시간 가운데,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리니" 라고, 그렇게 몇 번을 생각하십니까? 인간적으로 솔직하게 말입니다(ㅋㅋ). "죽기도 하리라" 라는 것은 아예 없다는 겁니다. 우리 머리에는 그런 것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매일같이 우리는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이렇게 살자" 라고 하는, 그렇게 사는 것만 있지, "여보, 주의 뜻이면 죽읍시다" 라고 하는 말을 아침에 눈을 뜨면 하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에겐 그야말로 미션 임파서블인데, 즉 우리는 그 레이저 광선에 모두가 다 걸린다는 말입니다. 전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미션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우리를 감싸고 있는 말씀의 구조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도록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어떤 때는 착각해서 자기가 홀로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때는 하나님께서 사건을 주셔서, 즉 이런 구조, 즉 우리가 법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 법이 곧 사랑인데, 그것을 야고보서는 '거울' 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 잠시, 거울 이야기를 !!
거울 이야기를 하려면 골치가 아픈데,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라는 동화가 동원되어야 하고, 여기서 그것은 제가 하지 않겠습니다만, 그러나 '미녀와 야수' 이야기는 좀 해야되겠는데, 그것만하고 10분을 쉬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거울을 들여다보겠는데, 누가 야고보서 1장 23절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약 1:23) 누구든지 도를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여기에 보면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곧장 잊어버린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거울을 들여다보면, 그 거울 안에 어떤 아저씨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제가 거울 본다고 하면, 그 안에 머리가 허연 어떤 핸섬한(?) 아저씨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돌아서면 어떻게 됩니까? 곧장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기 본 모습을 보려고 하면, 이러 저리 옆으로 틀어서 봐도 안 되고 전면거울을 봐야 되는데, 그러면 날마다 우리는 무엇을 봐야 됩니까? 거울을 봐야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우리는 거울 속에 있다고 할 수가 있는데, 즉 몸이 있으면 전부가 거울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거울을 바로 하나님의 율법으로 본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율법에서 너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것을 평소에 보고 있는가?" 라는 것을 묻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율법 안에서 흩어진 열두 지파야.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너는 너의 어떤 모습인가를 평소에 그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가?" 라는 것을 묻고 있다는 말입니다.
◈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추적해야 할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우리를 감고 있는 율법이, 조금 전에 살펴본 야고보서 2장에 보면 뭐라고 했습니까?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라고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라는 것은 운반체니까, 즉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어떤 믿음의 내용을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생긴 현상이 흩어진 열두 지파가 되었는데, 그런 열두 지파의 특징은 바로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겁니다. 율법으로 칭칭 감긴 그런 사랑을 말입니다.
◈ 왜 사랑의 율법으로 칭칭 감기게?
그러면 제가 이렇게 설명하면 여기서 의문점이 뭐냐 하면,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을 했기에, 또는 어떻게 했기에 우리로 하여금 단독자로서 살지 않고, 사랑의 율법으로 칭칭 감기게 하셨는가?" 라는 것인데, 사실 뭔가를 칭칭 감는다고 하니까 어떻습니까? 상당히 부담이 된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는 옷을 입는 것도 귀찮아서 집에 가면 편하게 노팬티로 있고 싶은데 말입니다. 아닌가요? 그런데 뭔가를 항상 칭칭 감고 있으면, 우리는 끊으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심정인데,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고, 즉 믿음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러한 관계가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그것만 설명하고 10분을 쉬도록 하겠습니다.
◈ 잠시, '미녀와 야수'를 애청하겠습니다 !!
모두들 아시겠지만 '미녀와 야수' 라는 동화가 있는데,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어떤 아버지에게 딸들이 있었는데 주인공인 미녀가 막내딸이란 겁니다. 아버지가 특히 막내딸을 좋아하고 막내딸도 아버지를 좋아했는데, 그런데 다른 딸들은 그것이 시기가 난다는 겁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내가 너희들에게 선물을 하고 싶은데 어떤 것을 하면 좋겠느냐?" 라고 하니까, 다른 딸들은 이층 집, 고급 자동차 등등, 그렇게 하는데 이 막내딸은 아버지에게 부담이 될까 싶어서, 자기는 하얀 백합 한 송이가 필요하다고 했다는 겁니다.
아무튼 아버지가 그 이야기를 듣고는 백합을 꺾기 위해서 야수가 사는 마법의 성에 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백합을 꺾는데 그만 야수에게 걸리고 말았는데, 그래서 타협을 한다는 겁니다. "꽃 한 송이를 가져가되, 3개월 후에 당신의 목숨은 내가 가지고 간다" 라고 해서, 그 아버지도 "내가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 라고 해서, 그래서 3개월만 사는 조건아래에 백합을 주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막내딸이 어떻게 하는고 하니까, 자기가 너무 철없는 것을 원해서 아버지가 그만 죽게 되었으니, 너무나도 가슴 아파서 자기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죽기 위해서 드디어 마법의 성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3개월 있다가 보니 그만 정이 들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야수가 미녀를 좋아한다는 겁니다. 아무튼 미녀는 어디를 가도 다 좋아하는데 말입니다(ㅋㅋ).
그런데 그만 이 막내딸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이 와서 미녀가 일주일 동안만 휴가를 받아서 나가게 되는데, 그런데 그만 또 어떤 소식이 들리는고 하니까, 이 야수가 미녀가 보고 싶어서 상사병으로 죽어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미녀가 다시 야수에게로 오는데, 그래서 미녀는 결국 야수의 그 사랑에 탄복해서 야수와 결혼하기로 했는데, 그때 야수는 비로소 야수의 탈을 벗고 멋진 왕자님이 되었다고 하는, 그런 스토리의 동화라는 겁니다. 가슴이 뭉클하지 않습니까?
◈ 미녀는, 야수의 전부를 다 사랑했기에 !!
제가 빨리 쉬자고 하는 여러분의 의견을 무시하고 굳이 왜 이런 동화를 이야기하는고 하니까, 물론 이것은 하나의 예를 든 것인데, 즉 하나님께서 저주받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바로 아주 위험스러운 야수의 모습으로 왔을 때, 진짜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그런 야수 속에 사랑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자기들끼리만 눈치 채는, 그런 방식을 사용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입니다.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고 하니, 방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 사람에게 율법이 휘감아있는 것이 귀찮고 짜증이 난다는 겁니다. 즉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해놓고는, 그런데 왜 야고보서에서는 더 철철 휘감아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사도바울하고는 대판 싸울 분위기를 만드느냐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야고보는 왜 자꾸만 우리를 보고 안개라고 하고, 또한 혀로써 형제를 참소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고, 또한 두 입으로 찬양을 하면 안 된다고 하고, 또한 이 세상과는 원수가 되어야 되고, 그리고 율법을 다 지켜야 된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율법을 지킨 자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 루터의 지푸라기 발언은?
우리가 이 야고보서 전체를 보게 되면, 잔뜩 우리에게 마치 철조망과 같은 것이 휘감겨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되지 싶은데, 그래서 루터는 말하기를 "이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성경이다" 라고 했는데, 물론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을 담는데 지푸라기나 뱀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 그런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고, 하여튼 루터는 이 야고보서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보다는 못하다는 식으로, 그렇게 주장을 했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간에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했으면,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벗어버려야 되는데, 속시원하게 말입니다. 그런데 이 야고보서는 왜 더욱 더 꼬이게 만들고, 힘들게 만들고, 그렇게 율법으로 칭칭 감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무엇인고 하니까, 마치 미녀가 야수에게서 사랑을 발견했을 때, 미녀는 그 야수 속에 있는 그 사랑만을 사랑한 게 아니고 무엇까지도 사랑했다는 말입니까? 야수가 평소에 아주 위험 천만한 야수의 모습으로 있던, 바로 그 전체를 모두 다 사랑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야수의 모든 것을 다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율법의 행위가, 몸에 감겨서 발산되어야 !!
그런데 사람들은 율법을 사랑합니까? 사랑하지 않습니까? 율법은 짐인데, 그런데 정말이지 사랑하는 사람은, 그 율법이 짐이 아니고 그 전체를, 즉 껍데기까지, 포장지까지도 다 합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증거들로, 그렇게 하나의 동아줄로서 감겨져있다고 하는 것을, 바로 그렇게 볼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야고보는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믿습니다" 라는 것은, 말로는, 혀로는 누가 못하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 말로만 "저는 믿습니다" 라고 하지 말고, 그 율법의 행위가 우리의 몸에 감겨서 발산이 된다고 하면, 그것이야말로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10분만 쉬고 하겠습니다.
2010,04,17 오후 10시에 마침. - 녹취 '구'
목사님, 강의 중에서 야고보를 한번도 사도라고 부르지 않던데, 특별한 이유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