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10c 울산특강 - 야고보서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합니다. 야고보서 2장 12절 봅시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1절에 보면,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이 이야기는 율법 바깥에 있는 자처럼 나는 너를 다루지 않겠다. 하나님께서 너를 율법 밖에 세워놓은 자로 다루지 않겠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하는 말에 대해서 이의를 걸면 율법 바깥에 있는 사람 맞다 그런 뜻이에요. ‘모든 율법을 지키더라도 하나라도 어기면 다 어긴 것이 되었느니라.’라는 말에 대해서 기분 나빠? 기분 나쁘다면 율법 밖에 있는 인간이야. ‘맞지요. 그렇지요. 그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는 사람은 율법 안에 있는 사람이라서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 말이죠. 율법이라는 게 어떻게 자유하게 하느냐 하면,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율법에 의해서 살게 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 마치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 때문에 존재하는 것처럼 지금은 우리 주님 때문에 존재하게 된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받을 자유는 주님 때문에 우리가 존재한다면 그 말은 곧 하나님 법 때문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가 된다는 겁니다. 주님 때문에 존재한다고 해놓고 ‘나는 법 싫어’ 이렇게 돼버리면 그들은 율법 바깥에 있는, 주님조차도 율법 안에 있는 사람인데 주님조차도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계시는 분인데, ‘나는 주님은 좋지만 율법은 싫어’ 하는 이것은 율법 바깥에 있는 사람 맞구나 하고 등장하는 거예요. 여기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13절에 두 자로 ‘긍휼’이라 합니다. 사도 바울 같은 경우는 율법을 지키다, 지키다가 오히려 율법이 우리를 저주케 하는 걸 알고 ‘주여 율법 말고 또 없습니까?’ 하니까 로마서 3장 21절, 율법 외에 한 의가 주어졌죠. 그렇지 율법이 아니고 우리 대신 경건치 않은 자, 죄인 된 자, 하나님을 버린 자를 위하여, 원수 된 자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인 되었구나. 율법 말고 다른 노선으로 되었구나를 알겠는데 야고보서는 그게 아니고 ‘네가 긍휼히 입은 것도 다 율법 때문에 긍휼 입은 걸 알아?’ 이런 뜻이란 말이죠. 율법 외에 긍휼이 온 게 아니고 율법 안에서 긍휼이 온 거예요. 왜? 우리가 긍휼이 만든 생산품이기 때문에 우릴 뜯어보면 안에 긍휼이 튀어나온다 말이에요. 풍선에다 물 넣으면 바늘로 찌르면 물 나오듯이 우리는 긍휼을 담는 풍선이고, 안에 출렁출렁 긍휼을 담고 있으니까 나온다 이 말이에요. 주님께서 바늘로 찌르든지, 칼로 찔러보자. 찔러보면 16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3절에 보면,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저도 말 어렵지만 제 책 보고 어렵다는 사람 많은데 성경에 비하면 유도 아닙니다. 보세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앞뒤가 안 맞아요. 우리가 아는 상식은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주체성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긴단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 불쌍한 인간아. 심판받는구나. 내가 심판 면제해줄게. 불쌍한 것 내가 건져줘야지 누가 건져주겠느냐? 이리 나와. 너는 심판에서 면제되었어.’라는 자체를 긍휼로 보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심판이 없어야 되는데 그 이야기를 야고보가 분명히 하면서도 만약에 긍휼을 안 내놓으면 심판을 받는다고 돼있지요. 사실은 뭐냐? 그것이 긍휼을 안 내놓으면 내가 너한테 긍휼 준 적이 없다는 사람이 된다 말이죠. 결국 주체가 누가 됩니까? 지금 긍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란 말이죠. 긍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한 사람은 긍휼 입은 사람이고, 내가 불쌍한 놈이니까 주께서 긍휼 줬다고 자기 주체를 주장하면 긍휼을 못 입은 사람이고. 여러분 마음대로 이해하세요. 하나님 긍휼이 필요하다고 ‘주세요, 주세요’ 해서 받은 사람은 그런 식으로 긍휼을 준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은 뭐냐? 위에서 받은 은사는 율법의 완성으로 오는데 꼭 세상은 뭐냐 하면, 내가 필요한 것을 얻어내겠다는 식으로 긍휼도 그런 식으로 이해하니까 그건 빈껍데기 긍휼이고, 믿음도 그런 식으로 예수 믿으니까 그건 행함이 없는 믿음이고 죽은 믿음이고. 전부다 내 주체성을 갖고 얻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위에서부터 오는 것이 없었던 하나의 티내는 신앙생활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보고 그 다음에 뭘 보느냐 하면, 여기 2장 8절에 봅시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10절에.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긍휼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그러니까 풍선 안에 긍휼이 들어있다. 긍휼이 여기 있는데 우리는 긍휼이 들어있는 걸 모르고 인간의 본성대로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도라 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세속과 위에 있는 은사를 다 같이 갖고 있기 때문에. 야고보서의 말씀을 보게 되면, 2장 2절 보면, 만일 교회에 더러운 옷을 입고 온 사람 같으면 저리 가거라 하든지 뒤에 앉으라 하는데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은 여기 좋은 자리가 있다고 하잖아요. 이 이야기를 왜 합니까? 아직도 이런 본성이 우리에게 있잖아요. 있는데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이런 자는 율법에 의해서 범죄가 되는데 안에 위로부터 오는 긍휼이 있으니까 이런 것과 대비적으로 이것은 세속적, 이것은 위로부터 왔구나하는 것을 아는 도구로써 우리를 사용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뭐냐 하면, 행함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걸 드러내면 되면 되는 거예요. 이게 우리가 갖고 있는 자유가 되는 겁니다. 이건 잘못된 거구나. 잘못된 것을 행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에요. 잘못된 것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동시에 이것도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같이 행동이 나와요. 이거는 나하고 상관없다고 말을 할 수 없는 거예요. 2장 5절에 보면,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 부요하게 하시고” 이것도 사람 환장하게 만들어요. 가난한 자를 택했으면 부자 되게 만들어야지 부자 된다는 소리 없고 믿음에 부요하게 했어요. 누가 믿음 달라 했어요? 돈 달라했지. 도대체 하나님은 말이 안 통하는 분이에요. ‘어렵습니다’ 하면 우리가 항상 예상하기에는 어렵지? 어렵습니다. 힘들지? 힘듭니다. 반드시 뒤에는 ‘그래 돈 줄게.’ 이래 나와야 될 텐데 ‘어렵지? 참아라.’ 이게 뭐예요? 그 말은 우리 속에 세상보다도 위에서 오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루신다는 겁니다. 어떻게? 힘들게. 때로는 가난하게. 형편 어렵게. 그렇게 다루면 다룰수록 우리 속에 위로부터 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걸 깨닫게 하는 식으로 우리를 사용한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6절에 보면,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이게 누굽니까? ‘너희’라고 돼있고, 2장2절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았고. 똑같은 너희가 이렇게 구조적으로 양쪽, 세속과 거룩을 다 같이 보여줍니다. 2장 17절에 보면, 너희가 믿음있다 해놓고 그런 것은 귀신도 믿는 믿음이라 해서 어떤 특정 개인으로 믿느냐, 안 믿느냐가 아니라 믿는 자라면 이런 식으로 전부다 이해가 된다는 거예요. 지금 야고보가 하는 이야기가 전부다 속속들이 ‘내 이야기네. 남 이야기가 아니고 내 이야기야.’ 속속들이 이해되는 것이 그것이 바로 흩어진 열두 지파 너희에게 하는 이야기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보면 볼수록 우리는 즐겁지요. 사람이 누가 이야기할 때 자기에 좋은 말로 하게 되면 들을 땐 좋지만 기분 나빠요. 놀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자기의 솔직하게 하게 되면 기분 좋아져요. 사람이 일기 쓰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일기를 쓰면 일기는 자기 대화상대자에요. 자기가 또 자기를 만들어내니까. 그때부터 대화할 상대가 없는데 일기를 쓰게 되면 대화할 상대가 있는 거예요. 야고보서는 우리를 만들 필요 없이 우린 율법을 보고 거울을 보는 거예요. 율법이 이런 것은 저주받을지어다, 이런 것은 저주받을지어다. 아까 제가 첫 시간 했지요. 그냥 한 게 아닙니다. 이것 때문에 다 이야기한 거예요. 신명기 27장, 28장 이럴 때는 저주받을지어다. 우리가 만날 이야기하는 거예요. 저게 바로 내 모습이고 내가 지금 하는 행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긍휼 받았으니까 혹시 우리에게 어려운 사람 오게 되면 내가 도와줄 때 내 힘이 아니고 내 속에 있는 긍휼의 힘으로 도와주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주님께서는 순종이라고 보고 행위라고 보는 거예요. 사실은 그게 믿음이죠. 진짜 주님께 받은 믿음이 그 모습이다. 그러니까 행함 없는 믿음은 나는 인정치 못하겠다는 것이 야고보의 생각입니다. 그 다음에 3장 봅시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받을 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이것은 뭘 염두에 두었느냐 하면, 아까 서서 쉬는 시간에 목사님들하고 이야기했는데 그 점을 이야기해봅시다. 예수님께서 주님 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줬습니다. 믿음이라 하는 것은 율법 완성을 주었다. 율법 완성이란 율법이라는 행위를 우리에게 줬다고 보는 겁니다. 열두 제자가 있습니다. 열두 제자는 세상에 대해서 야고보가 되기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게 해주셔서 선생 된 겁니다. 그럼 선생 된 사람은 개인적인 사적인 자기의 의견을 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야고보는 ‘NO’라고 합니다. 절대로 사적인 의견이나 개인적인 의견은 해당이 안 됩니다. 이것은 선생뿐만 아니고 성도도 마찬가지고. 주님께 뭔가 위에서부터 왔다면 이 선생 된 자는 생각이 예수님 생각하고 같아야 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 생각은 산상설교에 나와 있죠. 산상설교는 마태복음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누가복음 6장에 봐도 유사한 내용들이 나오고, 마가복음도 중간 중간에 나와요. 요한복음에는 안 나와요. 그렇다면 이 우리는 야고보에게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뜻과 그러한 교훈들이 그대로 전수받는 이들이야말로 진짜 선생으로 합당하다고 보는 겁니다. 3장에서. 그렇다면 많이 선생 되지 말란 말은 결국 뭔 뜻입니까? 예수님의 생각과 같은 말을 해야 될 텐데 그건 누가 조정하는가? 위에서부터 온 은사가 조정하게 돼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다시 봅시다. 16절. “속지 말라” 17절.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왜냐? 주님은 한분이니까. “그는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그렇다면 예수님으로부터 이러한 은사가 오게 되면 선생들은 자기 의견을 할 수 없죠. 그러면 무엇을 자제해야 됩니까? 무엇을 죽여야 돼요? 소위 자기의 개성, 자기의 주체성을 박살내야 되겠지요. 그 이야기입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3장 6절) 그 뒤에 나오는 것이 10절에 봅시다. “한 입으로 찬송가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야기는 어디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에 거짓 선지자를 유의하라는 것과 너무나 유사한 대목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구분하라? 세속적인 것과 위로부터 오는 것을 항상 구분하라. 15절에 보면,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 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한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이런 열매를 맺히는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바로 철저하게 어디에 감길 때? 주님이 주신 하나님에서 오신 율법의 완성의 은사를 받을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럴 경우에 그 사람은 위로부터 오는 것만 증거하기 때문에 소위 선생 될 만 하다 이야기하는 겁니다. 항상 이렇게 이야기할 때 이것이 옳습니다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저것은 바로 지옥에서 올라오는 것이고 세상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4장을 봅시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이 이야기의 초점은 3절에 보면,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이 대목이죠. 이걸 설명해보겠어요. 제복을 입었다. 보통 옷을 입게 되면 옷이라는 건 신분을 이야기합니다. 제복을 입으면 사람이 착해집니까? 안 그러면 그 사람이 합당하기 때문에 제복을 입는 겁니까? 그 사람이 합당하기 때문에 신분을 입는 거죠. 야고보서는 주님으로부터 믿음이 와서 자기 백성, 흩어진 열두 지파를 이런 신분이 되었느냐를 확인합니다. 확인했으면 여기서 그들이 옛날에는 이런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주님으로부터 이런 대우를 받는 사람이라고 확인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전에 속했던 이런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만약 직장생활하고 있다면 ‘이제는 우리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하고 잊어버리겠는데, 자꾸만 여기서 뭐냐? 옛날에 우리가 살던 그 시절에 그 모습을 계속해서 이야기해서 이 제복에 합당한가를 항상 확인하는 작업에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야기할 때 네가 성도라는 것,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를 항상 확인하는 걸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행함을 유발하죠. ‘네가 그렇게 행동해서 되겠느냐’는 식으로 우리 자체를, 우리 자리를 확인시키는 겁니다. 우리는 그걸 통해서 행동 나오게 되고. 세상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 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졸지에 하나님께서 뭘 만드는 겁니까? 전에 있던 우리 세계와 지금 새로운 세계 사이를 뭐로 갈라서버리게 만듭니까? 원수지간으로. 이 말은 곧 우리 주님께서 세상을 볼 때 이런 식으로 본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말을 성도가 들으면 그때부터 어떤 작업에 나서야 됩니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되죠. ‘하나님이여 어째서 세상이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까? 그것이 궁금합니다.’라는 식으로 나가야 되겠지요. 그것은 네가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확인해야 할 네 문제라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행함으로 나오는 거예요. 제가 왜 이 이야기 하느냐 하면, 아까 아브라함 이야기 나오죠. 기생 라합 이야기 나오죠. 그때 율법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그때 율법 없었지만 하나의 삶이 있었지요. 아브라함, 기생 라합의 삶은 세상과 더불어 분리된 삶이었습니다. 그럼 여기서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율법을 우리에게 준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알게 하느냐 하면, 왜 세상이 하나님께 원수 될 수밖에 없는가를 그걸 점차점차 드러내는 식으로 살게 되면 그것이 곧 율법에서 이야기하는 행함에 해당되는 겁니다. 이것을 더 나가보면 율법 조항을 지킨다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율법 조항을 지키는 그 주체가 등장하다는 것은 야고보서에서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 야고보서의 내용을 손쉽게 시원하게 한 마디로 말해서 뭡니까? 물으신다면, 우리 주변에 이미 하나님과 원수 된 구조와 긍휼 된 구조 사이에 우리는 구조적으로 놓여있다고 보죠. 뭡니까? 포지션. 하나의 점으로 놓여있는 거예요. 샤벳 속에 있는 딸기 하나처럼 요구르트 안에 딸기 하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출렁이는 이 세상에서 놓여져 있는 겁니다. 우리는 온 몸으로 그걸 그 괴로움을 느끼는 거예요. 느끼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다시 느끼는 겁니다. 이래서 우리가 아파해야 되고, 이것이 시험이고, 이래서 세상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확인하는 가운데서 더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 입었다는 것이 또다시 날마다 확인되는 겁니다. 야고보서는 한 번 읽고 치울 것이 아니라 평생토록 계속해서 우리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어제는 야고보서 2장에 대한 이야기, 오늘은 3장에 대해서 또는 십 년 후에는 1장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하고, 이십 년 후에는 3장에 대해서 했던 걸 또 보게 되고. 항상 야고보서라 하는 것은 젤리 속에 또는 묵, 고체도 아닌 것이 액체도 아닌 것이 약간 딱딱한 속에 들어있는 이런 묵 속에 녹아져있는 흔들리면 같이 흔들리면서 ‘그래서 세상은 원수구나’ 이걸 늘 확인해야 됩니다. 결국 우리는 율법의 사람이고, 말씀의 사람, 말씀이 만들어내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이래 되면 다 아는 거예요. 4장 7절.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방금 이야기한 걸 설명하면, 세상은 우리 주변에 마귀가 깔려있다. 그런데 우리는 뭘 확인해야 된다? 마귀를 마귀라고 이야기하는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성도로서 확인된다. 이런 구조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있다, 없다? 못 벗어난다. 그게 야고보서에요. 젤리 속에 있는 하나의 막대기라 보면 되죠. 흔들리면 같이 흔들리는 거예요. 우리는 항상 우리 행동의 원인을 나한테 두기 때문에 이젠 원인이 하나님께 있는데 우리는 평소에 생각하기를 원인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내가 행동함에 따라서 결과가 주어진다고 학교에서 그렇게 배우지요. 심지어 교회에서까지 그렇게 가르치니까 문제가 큽니다. 당신 주변의 친구가 누굽니까?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어떠냐고 그걸 이야기해보라고 하나님은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게 아니고 ‘내가 이렇게 행동했더니만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라고 자꾸 자기 행동에다 원인을 둬버리면 이건 야고보와 관계없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잘난 게 돼요. 그게 아니고 이미 우리는 우리가 원치 않는 환경 속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환경을 이야기해줘야 되고 세상구조를 이야기해줘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야고보서에 끼어들 수 있는 하나의 말씀이 되는 거니까. 4장 6절 봅시다.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라는 구조 속에 우리가 놓여있다 이 말이죠. 그걸 싫어하십니까? 그러면 수상합니다. 신분적으로 잘못된 제복이에요. 신분적으로 문제 있어요. 하지만 이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그렇다는 걸 체험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젤리처럼 이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금 같이 놓여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8절 끝에 보면,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며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이것은 누가복음 6장에 나오는 이야기죠. ‘웃는 자야 슬퍼하라. 우는 자여 기뻐하라.’ 서로 반대가 되는 구조 속에 너는 특이한 구조로서 같이 살아가고 있다. 얽매어져 있다. 서로 안 맞는 관계 속에. 야수가 모든 사람에게는 야수이지만 미녀한테는 사랑하는 사람이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는 원수지간이지만 너희들한테는 오히려 주님의 사랑이 더욱더 깊이 느껴져야 된다는 이런 관계 속에 우리가 놓여있는 겁니다. 그 관계를 제가 설명을 약간 더 깊이 하겠습니다. 제가 책을 하나 썼는데 강 장로님한테 넘겼습니다. 한시적이지만 제목은 [잠언 속의 그리스도]라 하는 겁니다. 잠언은 지혜죠. 지혜는 구조로 돼있습니다. 구조가 오게 되면 우리는 매트릭스, 침대 밑에 뭐가 있습니까? 매트릭스. 매트릭스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행렬’이라 하지요. 그냥 용수철, 아까 이야기한 레이저 보안장치, 우리 안에 놓여있는 거예요. 놓여있으면서 우리는 특이성. ‘특이성’은 철학적 용어인데 쭉 가다가 푹 꺼지는 거예요. 가다가 올라가든지 또는 가다가 내려가든지, 이 꺾이는 점. 세상 사람이 다 ‘예스’라 할 때 나한테 오면 뭐가 되냐? ‘노’라고 하는 꺾이는 점, 이걸 철학에서 특이성 또는 특이점이라 하는데, 곡선이 가다가 중간에 꼭지점 같은데, 특이성 속에 성도가 놓여있어요. 세상이 대세가 흘러가다가 만약에 여기서 큰 강물이 흘러가는데 성도가 하나 있다면 여기 와서 전부다 바보, 병신, 미친놈 특이성이 주어지죠. 특이성 밑에 뭐가 있느냐 하면, 주님과 함께 있죠. 주님의 말씀. 다른 사람들은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 되죠. 주님 앞에선 세상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죠. 특이점에서 말씀이 올라옵니다. 아까 4장 4절. 너희들은 세상과 짝하지 말라. 세상은 하나님과 원수다. 세상과 짝하는 여자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특이성이 올라오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그냥 가는데 이걸로 인하여 우리는 특이성을 나타내서 찌그러진 하나의 지점, 그걸 아까 제가 포지션, 하나의 점이 되는 거예요. 하나의 점이 되면 어떤 면이 좋으냐 하면, 사람이 넓어버리면 여기 자식도 있고, 남편도 있고, 돈 걱정, 건강 걱정, 여러 가지 걱정 있는데 점점 찌부러지는 거예요. 나중에 이렇게 되죠. 이걸 안개라 하는 거예요. 안개로 살면 되는데 자꾸 이걸 넓혀버리면, 시어머니 걱정, 돈 걱정, 펀드 날려서 벌써 까먹은 것 온갖 걱정 하니까 이 걱정 끝나면 이 걱정해야 되고, 이 걱정 끝나면 이 걱정해야 되고. 자식 열 명 같은 바람 잘 날 없다고 전부다 걱정 다 해야 되잖아요. 주께서 말씀을 줘버리면 ‘세상은 다 원수니라’ 하면 그 말씀 가운데 찌부러져 응축이 돼서 ‘주여 안개입니다’ 하고 고백이 나오죠. 이럴 때 이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신분 속에 하나님의 제복을 입은 백성이라 할 수 있다 말이에요. 이것 한 2초 갑니다. ‘주여 그래서 구원은 됐고, 이제 가려고 하니까 차 밀리는데 몇 시에 가야 합니까? 경주 쪽으로는 도저히 못 가겠습니다. 부산으로 돌아갈까요?’ 또 걱정이 되죠. 광주까지 가야 될 걱정, 대전까지 가야 될 걱정 또 넓혀집니다. 넓혀지면 위에서부터 은사가 오면 찌부러져서 하나의 안개로 만들고, 안개로 만들었다 또 퍼지고. 바다 위에 내밀었다, 들어갔다, 내밀었다. 천국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가고 천국에 올라갔다 내려가고. 완전히 내려갔으면 서해안에 있는 초계함 돼버리고. 완전히 저주고. 우리는 성도가 되어서 성령께서 끄집어내주면 우리는 새삼 안개에 불과하구나 하다가 다시 내려가면 여기는 어두운 세상이 돼버리고. 만날 누구한테 안 지려고 하다가 여기 오면 져도 괜찮구나. 지면 안 돼. 져도 괜찮구나. 완전히 미친 거죠. 그래서 성경을 보셔야 돼요. 성경을 보게 되면, 주님이 보는 관점과 내가 평소에 나의 주체의 평수를 넓혀서 보는 것과 완전히 달라요. 내가 넓히다 보니까 힘이 필요하고 힘이 필요하다 보니까 세상과 짝해야 돼요. 세상과 짝해야 힘이 들어오니까. 힘이 들어오는 건 좋은데 우린 그만큼 안개 되는 건 멀어지고.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우리의 신분을 확인하는 쪽으로 야고보서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 다음에 11절에 보면,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왜냐하면 재판자는 따로 있다. 이것도 주체가 크게 되면, 전에 이야기했죠. 인간의 주체라 하는 것은 힘의 응축이라고. 2킬로짜리, 3킬로짜리 누가 더 셉니까? 역시 3킬로짜리가 세지요. 그러니까 누가 누굴 무시합니까? 이쪽을 괄시하고 무시하겠지요. ‘아이고 인간아. 내가 너 같으면 죽었다. 너 왜 사노?’ 그런데 여기에 만약에 5킬로짜리가 왔다면, 둘 다 인간들. 상당히 비판이 있을 수밖에 없죠.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주님 앞에 서면 이 사람도 점이고, 이 사람도 점이고, 이 사람도 점이고. 이 사람도 안개고, 이 사람도 안개죠. 점의 특징은 크기와 면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냥 포지션이에요. 위치. 무슨 위치로? 율법만 보여주는 율법이 나오는 위치로 보는 거예요. 아까 성경에 나오잖아요. 어떻게 한 위치에서 찬송이 나오고, 어떻게 한 위치에서 저주가 나오느냐? 이 말은 뭐냐 하면, 주체를 보지 않고 하나의 점으로 포지션으로 보기 때문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정답은 우리가 포지션을 알면 찬송 나오고, 포지션이 아니고 넓어지면 저주 나오고 그래요. 저주 나오는 걸 닫아버리면 찬송 나오게 되고. ‘주여 저를 안개로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는 포지션이 나오는 겁니다. 포지션이 되면 우리는 뭘 봅니까? 그림 그려봅시다. 우리가 하나의 포지션이 되면 율법의 입체적인 매트릭스에서 어떤 사람을 A이라 하고 이걸 만약에 B라 한다면 하나의 포지션이 된다면, A가 B를 비난할 수 없지요. 왜냐하면 각자각자 율법이 용솟음치는 율법이 나오는 샘이니까 너는 그런 식으로 율법의 어떤 면을 드러내고 나는 이런 식으로 드러내고 서로서로 형제가 (비방할 게) 없는데 만약에 포지션이 아니고 여기 하나 있고, 여기 하나 있으면 여기는 항상 기죽게 돼있어요. 왜? 이쪽이 너무 힘이 세니까. 여러분들이 이걸 하나님 은혜로 포지션, 찌그러들어야 돼요. 이것이 많이 보이면 구조가 안 보여요. 내가 너무 커버리면 나와 관련된 것들이 보이질 않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법정이란 사람인데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이 포지션인 걸 모르기 때문에 남들이 은혜로 살아온 걸 모르기 때문에 죽고 난 뒤에도 간섭하고 있습니다. 내 책은 내지 말라고. 사람이 소유가 얼마나 많았으면 죽고 난 뒤에도 영향을 끼치려하겠어요. 이래야 돼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여러분 덕분이기 때문에 포지션이기 때문에 내가 죽고 난 뒤에 책을 낸든 말든 여러분 마음대로 하세요.’ 왜? 이걸로 내 인생은 포지션 끝~ 나머지는 화장을 하던, 매장을 하던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이렇게 나와야 진정한 무소유 아닙니까. 진정한 무소유는 예수 믿는 사람밖에 없어요. 점으로 왔다가 안개로 없어지고 나머지 하는 일은 내가 영향을 입히는 것이 아니고 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자식을 대할 때 오늘 자녀들 많이 데려왔죠. 하나의 포지션이에요. 부모가 간섭할 게 못 됩니다. 공부를 하던, 놀던, 축구를 하던 하는 건 좋은데 다만 걔를 하나의 덩어리로 보지 말고 포지션, 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어줄 필요는 있지요. 아빠. 내가 이번에 성적이 떨어졌어요. 괜찮아. 네가 꼴등을 해야 일등이 하는 애도 있을 것 아니냐. 그거는 하기 쉬운데 뭐가 하기 어려우냐 하면, ‘아빠. 처음으로 일등했어.’ ‘자식. 공부 열심히 했구나. 임마. 일등해도 꼴등한 애를 생각해야지.’ 이게 오늘 본문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일등했다고 꼴찌 한 애를 비난하지 말라. 왜? 결국 점에 불과하니까. 그래서 하는 말이 네가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12절. 네가 뭔데 다른 점을 하느냐 이 말이죠. 둘 다 점 자랑합니까? 그건 말도 안 되거든요.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이제 마지막으로 어려운 것 합니다. 진짜 어려운 건데. 야고보에는 역사가 없어요. 왜? 야고보는 주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가 없어요. 사람이 주체를 인정해버리면 하나의 공을 인정해버리면, 이 안에 과거, 현재, 미래가 흐릅니다. 미래가 흘러버리면 현재라 하는 것은 과거가 나의 원인이 되어서 과거에 이렇게 살았기 때문에 오늘날 내가 되었다는 현재를 주장하게 되고 그렇게 과거, 현재, 미래를 하게 되면 내가 과거에 이렇게 해서 오늘날 된 것처럼 나의 미래도 지금 나에게 어떤 것을 희생하고, 어떤 것을 노력하게 되면 나는 미래의 찬란한 내가 된다. 과거, 현재, 미래가 살아있게 돼요. 어느 도시에 가서 일을 하면 내가 미래에 부자 된다. 이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포지션이기 때문에. 응축이 돼버려요. 응축이 돼버리면 나의 역사가 없어요. 나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요. 그럼 나는 왜 있습니까? 이건 하나의 사건으로 봐요. 주님께서 자기 믿음을 담아낼 그릇으로 만드는 거예요. 마치 이스라엘을 구원하듯이 우리를 자기 십자가 사건, 구원의 사건, 주님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이 완성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사건으로 있는 겁니다. 주님의 마지막 사건이 뭡니까? 재림이죠. 그럼 우리 안에 뭐가 담겨있습니까?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만 있으면 돼요. 그래서 삯을 못 받은 노무자야 뭐하라? 참으라. 뭐가 있기 때문에? 주께서 곧 오신단다. 초림과 재림. 그게 이른 비와 늦은 비. 그게 야고보서 5장 7절에 나오죠. 이게 뭐냐 하면, 자기 삯을 부자가 다 가져갔어요. 너무 억울해서 울부짖습니다. 하나의 포지션으로. 이게 모세 율법에 보면, 고아와 과부의 부르짖음을 누가 듣는다? 하나님 아버지가 들으시고 갚아주신다고 돼있거든요. 그 율법 구조를 그대로 오늘날 우리 자신이라는 포지션으로 장착해버려요. 장착이란 말 알지요. 권총 차는 것.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미는 없어요. 율법의 정신이 우리에게 장착이 돼버리면 우리는 율법이 이런 겁니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매개체가 될 뿐이에요. 하나의 역할, 탤런트, 무대의 시나리오대로 연기해야 될 연기자에 불과한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연극을 해야 되느냐 하면, 삯을 못 받고 고아와 과부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억울함을 당하는 그 연극 역할을 우리가 하게 되는 겁니다. 여기 돈 떼먹힌 사람들 많습니다. 저의 집도 사기 당했어요. 옛날에 신학교 가기 전에. 그때 250만원인가. 먹을 것 안 먹고 국수 먹고 살았는데. 돈 떼먹히고 난 뒤에 처음으로 주왕산에 놀러 갔어요. 소용없다. 율법이란 것이 어떤 정신을 갖고 있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피해보는 역할을 담당하는 포지션으로 사용했을 경우에 그 다음에 나올 것은 뭐냐 하면, 돈 갚아 달라 하지 말고 그 다음에 사건, 기다려라. 주께서 오신다는 사건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겁니다. 이거는 성도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이기 때문에 나오지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이런 사건이 안 나오게 돼있습니다. 시작한 사건이 성도라면 그 마무리 사건도 우리 속에 들어있어서 우리에게 튀어나오게 돼있어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9절에 보면,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이 점을 보고 하나님께 은혜를 받지 못했으면서도 믿는 척하는 사람은 원망 안 해야 자기가 마치 구원되는 줄 알고 원망도 참는 거예요. 그러면 우울증 걸리죠. 그런 것이 아니고 확인 차원에서 사기를 당했다면 사기당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 뜻이 있어서 사기를 당한 것이고, 사기를 당하게 하셔서 사기꾼을 만나는 것도 만나고 싶다고 만나는 게 아닙니다. 사기 치는 걸 이길 수 없어요. 사기 치면 당할 수밖에 없어요. 속인다는데 무슨 재주로 우리가 안 속아 넘어갑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사건은 우리 사건이 아니고 항상 시작한 사건이 주님의 의해서 마무리된 사건들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어떤 일을 할 때 이 일은 주님께서 마무리하셨습니다가 나올 때 그야말로 심판 받지 않고 구원받은 사람 맞다 이 말입니다. 주께서 마무리하셨습니다. 잊어버렸던 야고보서를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세상이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잊어버렸는데 이번에 사기 사건을 통해서 역시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 것이 야고보서 말씀대로 맞는군요. 그동안 내 마음이 두 가지 마음이었습니다. 풀의 꽃 같이 섞어질 세상 영광 찾았던 것도 나였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이 거기에서 표면화되어서 떠오르는 거예요. 온천에서 수증기 떠오르듯이 숨었던 야고보서가 막 떠올라요. 난 사기 당했는데 하여튼 말씀은 좋다고 막 올라와요. 잊어버렸던 말씀이 올라오는 거예요. 환란이 인내를 낳는 것은 야고보서 1장에 나왔지요. 시련이 온 것은 너희에게 인내를 배우게 함이라. 그런데 이걸 믿음 없는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까 그들은 시련 받지도 않으면서 일부러 시련 때려가면서 인내를 조작해내요. 그것 소용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입술로만 하는 행함이 안 나오는 가짜 신자라 할 수 있지요. 10절에 “형제들아 주의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그 다음에 11절에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여기 긍휼이 말로 혀로만 긍휼이 오는 게 아니고 긍휼이 나를 나 되게 하는 마무리 사건으로 주어진다는 겁니다. 이걸 믿느냐 하는 거예요. 이걸 믿는다면 참는 행위가 나올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거짓말이죠. 사건이 터지지 않는데 조작된 행함은 행함이 아니죠. 그냥 입술로만 믿음 한 거죠. 다시 합니다. 믿음이 말로만 긍휼로 오는 게 아니고 머리로만 지식으로만 긍휼이 아니라 우리에게 사건화 되어서 오기 때문에 그 긍휼이 주님의 사건으로 오게 되면 처음부터 온 긍휼도 사건 되고, 마무리되는 사건도 긍휼이 되죠. 그 긍휼이 뭐냐? 욥의 결말을 보아라. 그러면 욥에다 누굴 합니까? 우리를 집어넣죠. 제가 만약에 야고보서를 쓴다면, 욥의 인내를 보았느냐 하지 않고 거기 나사로의 인내를 보았느냐 이렇게 할 거예요. 왜? 그 결말을 보아라. 그 결말이 뭡니까? 거지였잖아요. 거지라도 좋다는 거예요. 왜? 천국 가니까. 멋진 하나님의 작품 아닙니까. 저는 욥보다 이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욥이 처음에 어려움 있어도 나중에 부자 됐죠. 그럴 때 뭘 배우라고 합니까? 욥의 믿음을 보아라. 욥의 믿음은 행함이 뭐가 나왔습니까? 인내죠. 그러면 인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조작 만들어줘야 돼요. 구조적으로. 인내, 인내 하는 것은 우리가 말로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할 때 했죠. ‘여러분 인내하세요.’ 다른 말로 하면 마음대로 사세요. 그게 인내입니다. 마음대로 사는 게 왜 인내냐 하면, 마음대로 사는 것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에게 인내의 경과 중에 있다고 믿어지는 거예요. 그게 내가 마음대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인내의 여정인 겁니다. 마음대로 사시면 그게 인내에요. 마음대로 사는 게 고난이고. 이걸 육적인 사람들은 몰라요. 사도 바울에는 육과 영이잖아요. 야고보에는 육과 영이라는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까 이야기한 주체성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주께서 그냥 다루는 거예요. 홈쇼핑 제품 가운데 이런 게 있어요. 넣고 썰고, 넣고 썰고 가루로 만드는 것, 파쇄기. 구성이 삼종 세트 삼 개월 할부로 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감자, 고구마, 양파로 다뤄요. 여러분 천사들. 인내 보고 싶어요? 욥 들어가. 넣고 썰고, 넣고 썰고. 보이죠. 나오잖아요. 인내 나오잖아.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사건화, 그게 나와 줘야 행함이 나오는 거란 거예요. 인내라는 것을 배워서 인내를 하게 되면 인내의 행함이 아닙니다. 그냥 현재 살아가는 전부가 인내고 내 삶의 전부가 믿음에 합당한 행함으로 보자. 다만 내가 세상을 좋아할 때 나오는 그 행함은 무엇과 비교되면서? 이것은 위로부터 오는 것과 이건 세상에서 오는 것과 그걸 구분만 된다면 살아가는 모든 것이 인내요, 이것이 믿음의 행함입니다. 따라서 행함 하지 마세요. 사는 게 행함이에요. 다만 야고보서대로 구분만 된다면.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이건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가? 마태복음 5장이죠. 헛맹세 하지 말고 아무 맹세하지 말라 하는 것.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여기에 보면 맹세한 자는 죄가 되고, 서로 원망하면 심판이 되고 원망하지 않으면 심판에서 면하면. 이 모든 것은 무엇이 위에서부터 온 것인지 무엇이 세상적인 것을 우리가 구분한다는 자체가, 이걸 그냥 ‘그렇습니다’ 하고 수용한다는 자체가 ‘이것 내 삶이네’ 이렇게 받아들이는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은 흩어진 열두 지파 이스라엘에 해당된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13절에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병들었다? 주체 누가입니까? 주님이 주체가 된다는 걸 인정하면 그 영혼이 구원받은 영혼이 된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기도하게 되면 그 자를 어떻게 할 것이냐?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병 낫았다는 걸 누가 판정합니까? 우리가 판정하죠. 뭘 보고 판정합니까? 병들었을 때는 어떤 걸 아느냐 하면, 건강한 것과 대비해서 알죠. 그러면 어떤 사람이 병들었다면 반드시 건강한 걸 염두에 두죠. 건강한 사람들이 어째서 건강한 겁니까? 주께서 건강하게 해주셨기 때문에 건강하잖아요. 이 사람은 병들었다는 것은 주께서 병들게 하셨기 때문에 병들었겠죠. 그런데 주께서 병들게 하셔서 기도하게 되면 이 사람 속에서 두 가지가 나오죠. 자기가 원인이 되는 것과 주님이 원인이 되는 게 나오겠지요. 죄가 뭡니까? 자기가 원인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사람이 병들었다는 계기를 통해서 자기가 원인이 되면 항상 인간은 세상의 죄와 짝하게 될 거라 말이죠. 그러면 야고보서에 나오는 모든 말하는 죄와 관련돼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이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말은 무엇과 관련돼있습니까? 모든 것이 세상과 짝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함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이 사람은 건강과 병의 구조에서 벗어나게 되죠. 그러면 이 사람이 병들었다는 것에 대해서 새로운 안목으로 바라보게 되죠. 이 사람의 영혼은 구원이 되고 그 다음에 자신이 아플 때는 병에 대해서 남이 기도하기 보다도 본인 자신이 파악하게 되겠죠.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병든 사람이 있다. 주위 사람들이 기도하란 말은 이 사람 속에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변에 구조적으로 연관성을 갖고 있다 말이죠. 이 세상 모두가. 병든 사람이 내가 될 수도 있고, 남이 될 수도 있고. 이 모든 게 구조적으로 돼있는 것처럼 주님도 우리와 사이가 병들고 건강하고 모든 것이 구조적으로 돼있겠죠. 바로 이 구조를 파악하는 것, 그렇다면 그 사람이 병들고 어려운 것, 인내와 시련 이런 걸 자기들이 알아서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겁니다. 주위 사람들이 기도함으로서 그 사람들이 미처 몰랐던 새로운 구조에 대한 눈을 뜨게 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이 병들고 어렵고 하는 이 모든 것은 인간 손에서가 아니라 누구 손에 맡기는 겁니까? 하나님의 손에 하나님의 구조 속에 다시 자기 자신을 확인케 하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병들고 건강한 것은 하나님께 맡겨야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건강하게 해주면 건강한테 그 건강이란 의미가 반드시 뭐가 동반돼야 돼요? 이런 것이 바로 죄였습니다를 깨닫는 식으로 건강하게 해주면 건강한 거예요. 주께서 건강하게 해주는데 반드시 따라오는 것은 내가 바로 주님 앞에 죄인이었습니다를 병행해서 일어나야 됩니다. 이 이야기가 사도행전이나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병 고침의 특징이에요. 이 병 고침은 항상 기적이 아니고 표적입니다. 표적의 특징은 뭐냐? 그 안에서 예수님께서 내 몸을 관여한다는 예수님이 등장할 때 예수님이 하신 복음이 등장할 때 이건 표적이 되고, 만약에 기적이라 하는 것은 다시 어디로 돌아갑니까? 내가 아쉬웠던 것이 내 것으로 돌아올 때는 기적이 돼버려요. 오병이어가 표적입니까, 기적입니까? 이게 표적인데 사람들은 그걸 빵 생긴다고 기적으로 봤잖아요. 막상 예수님이 이야기하니까 그들은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고 다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 영혼은 구원되지 않죠. 야고보서에서 기도하라는 것은 항상 예수님께서 어떻게 병 고쳤는가를 염두에 둡니다. 그래서 병이라 하는 것은 죄와 관련돼있고 죄라는 것은 그 사람의 단독이 아니라 항상 예수님과 구조적인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을 그 사람들이 깨닫지 못할 때 세상과 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그런 결과를 낳았다 이 말이죠. 그래서 세상과 짝할 수 없는 것은 그 사람이 주님과 연관성이 없다고 보고 그들을 위해서 우리가 기도해주면 이것으로 이 사람은 병 낫는 것은 주님께 맡기되 그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는 그 다음에 병 낫고 안 낫고는 주님 손에 맡길 수 있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엘리야 이야기해봅시다. “엘리야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 즉” 재미있죠. 비 오기를 기도한 게 아니고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죠. 누구 약 올릴 일 있습니까?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뜻이 구조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북쪽 나라는 저주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기도는 뭐냐? 병든 자가 있든 누굴 위해 기도하든 간에 우리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린 율법에서 하나의 젤리처럼 젤리 속의 알갱이처럼 젤리가 흔들리면 같이 흔들리는 것처럼 우리는 빡빡하게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꽉 짜여진 채로 여기에 말씀을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늘 기도해야 됩니다. 사적인 거지만 저도 이렇게 기도해요. 제가 보기에 성도들이 교회 오는 것도 자기 뜻대로 오고, 안 오면 때려치우고 그러는데 성도 그 사람의 구원이 문제가 아니고 그 사람이 교회 안 나오고 돌아다닐 때도 주님께서 은혜 주시거든요. 햇빛과 공기 그리고 차 사고나 모든 일들이 주님의 뜻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내가 원인이라. 내가 유능해서 이만큼 돈 벌었고, 내가 교회 가는 대신에 가게 열어서 부자 되어서 십일조 많이 낸다고 전부다 원인을 자기한테 찾는 거예요. 내가 보기에는 주님이 주신 은혜인데 그걸 놓쳐버리는 거예요. 그럼 목사가 해야 될 것은 그 사람을 빡빡하게 만드는 거예요. 말씀에 갇혀서 하나의 포지션, 당신은 어디가도 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달라고 그렇게 나름대로 인간적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게 한 3분 만에, 2분 만에 끝나지만 하여튼 나름대로 제발 여러분 자식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보기에 부모밖에 안 보이지만 부모가 돈 대주고 용돈 주는 그게 아니고 주님 주신 것 아닙니까. 제발 눈 열려서 네 곁에 주님 있다. 주님께서 널 돌보신다는 것을 선인과 악인에게도 햇빛 주시고 공기 주신다는 걸 알도록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로 산다는 것을 위에서 오는 은혜를 알도록 그렇게 간절히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행함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하나님의 은혜로 은사 입고 위로부터 오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늘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는데 바쁘다보니까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은 뒷전이고 남 따라 잡기 위해서 남보다 더 많은 노력과 세상적인 것과 짝해야 된다는 그런 법칙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왠 은혜인지 왠 기적인지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긍휼이 샘솟듯이 하나의 포지션으로 튀어나오게 하시니 그것이 우리를 살리게 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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