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야고보서와 로마서의 믿음(이근호)121003

아빠와 함께 2013. 2. 22. 12:21

20121003 특강(야고보서와 로마서에서의 믿음) - 상처뿐인 인생b

(강의:이근호 목사)

 

 

둘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마지막 부분에 전체에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이 전체냐, 우리가 전체냐? 하나님이 큰데 인간이 작게 포함이 되느냐? 아니면 우리가 큰데 그중에서 신이라는 세계가 포함돼 있느냐? 만약에 우리가 클 것 같으면 신을 골라잡을 수가 있습니다. 어느 신을 섬기면 유리하겠나? 어느 계명이 수월하겠나? 어느 것이 우리를 편하게 만들 수 있는지 선택할 수 있지만 이렇게 신이 커버리면 우리는 선택 당하게 되지 선택할 수 있는 권한마저 무산되죠. 하나님의 선택과 충돌을 일으키면 우리의 선택은 밀리고 하나님의 선택이 강해지겠죠.

 

그래서 어느 신이 크냐 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알아야 돼요. 참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저한테 상당히 죄송스러운데요. 어려워서 이야기라서.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직접 만났던, 모세도 직접 만났죠. 하지만 모세 말고 다른 백성들도 시내산 덩어리 채로 직접 만났던 적이 있어요. 산이 움직이니까. 그런 사람들이 알았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했으니까. 이 땅에 신이 많지만 진짜 신은 너희들에게 나타난 하나님밖에 없다. 나는 여호와다.

 

그런 신이 이스라엘 속에 들어왔잖아요. 재미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신이 인간 속에 왔을 때 신은 찾아오는 신마저 품어버리는 현상을 드러냈습니다. 신 안에 우리가 들어있죠. 재미있는 것은 우리에게 찾아오는 신, 그 안에 우리가 있다고 여기는 우리. 이 의식과 사상이 도대체 철학적으로 풀어낼 길이 없어요. 해결책이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다.”라고 믿는 우리는 또 어디 가 있느냐?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은 안에 있을까, 바깥에 있을까 하는 이런 문제가 생기거든요. “나는 예수를 믿는다.”라고 생각하는 예수를 믿는 나를 믿어버리면 내 믿음이 예수를 믿는 것인지 예수 믿는 나를 믿는 것인지 분간이 안 돼요. 일반 사람들은 그게 분간이 안 되고 헷갈리고 귀찮아서, “몰라. 일요일이면 교회 가고 얼굴 비치고 내 마음대로 살 거야.”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다가 사건이 터지면 문제 되는데 거기에 대한 해결책이 구약에 있습니다. 그 해결책부터 말씀드릴게요. 이 문제를 논리적으로 풀려면 논의 자체가 언어를 동원하기 때문에 풀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2페이지에 나옵니다. 밑에서 여덟 번째 줄에 보면, [예를 들면 어떤 직장인이 밤늦게 집으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실컷 얻어맞고 돈을 빼앗겼다고 치자. 경찰서에 그때 일을 진술하면서 무슨 이상적인 언어를 구사하겠는가? 그가 보일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찢어지고 멍들고 상처투성이 된 육체와 공포로 질려서 갈피를 못 잡은 정신상태다. 따라서 경찰관은 이런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 피해자로부터 어떤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진리 체제를 지식으로 확보하려고 해서는 아니 된다. 그의 몸이 곧 기록이다.]

 

강도한테 얻어맞고 돈 빼앗기고 터져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공포에 질려서 갈피를 못 잡는 정신상태, 이게 기록인 거예요.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렇게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고 하는데 자꾸 얻어터져. 그럴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못 믿어서 내가 저주를 받는구나. 그러면 철저하게 더욱 더 말씀에 매진하고 마음도 정갈하게 하고 진지하게 예수를 믿어야지.”라고 하면 더 터져요. 이제는 십일조를 해드려야지. 십일조하면 또 터져.

 

교회 와서 예수 믿어서 이런 감사한 일이 생겼습니다. 축복받았습니다. 간증을 백날해도 남의 이야기라. 더 터질 때 이게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진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특징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전혀 나한테 도움도 안 되고 이게 다 쓸데없는 짓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그리고 목사가 하는 모든 말은 사기고. 돈 빼먹기 위한 사기. 교회라는 가게를 차려놓고 손님 오면 돈 빼먹어야 사니까.

 

그러니까 뭔가 내가 지금 생각했던 그 세계관에서 아마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결부될 것이라는 여겼던 모든 것이 와르르 와해되는 사태를 직면할 때. 집에서 착실히 사는 게 아니고 바르게 살아야지, 성경공부 해야지 이렇게 하는데 갑자기 지붕이 무너지는 것, 나를 둘러싼 환경 자체가 찌부러지는 것 있잖아요. 이 환경에서 내가 반듯하게 살아야지 하는데 환경 자체가 나를 바르게 살도록 용납을 하지 않는, 환경과 더불어 같이 무너질 때

 

이걸 광주강의에서 ‘상태구원’이란 말을 했어요.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서 나를 천국 보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은 나의 구원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고 상태구원이에요. 보쌈을 하듯이, 처녀가 밭에 일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와서 너는 내 색시라고 데려가는 것처럼 완전히 그 사람이 알고 있는 걸 몽땅 고대로 싸버려요. 포장을 해서 몽땅 같이 가는 겁니다. 나무 옮길 때 나무만 달랑 옮기지 않잖아요. 가끔 길에서 트럭에 소나무 옮길 때 보면 둥그런 둥치에 새끼줄 감아서 흙덩어리 같이 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둘러싼 환경도 같이 구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니 예수, 성령, 모든 게 우리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우리 주변의 환경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준 거예요. 여러분, 세상이 아름답습니까? 아름다울 거예요. 언제 아름다우냐 하면, 자기 몸이 컨디션이 좋을 때만 아름다워요. 자기 몸이 아름답지 못하면 자살합니다. 자기 몸이 안 좋으면 아무리 멋진 나고 훌륭한 나라고 할지라도 자살하든지 해야 돼요. 몸이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더 나가봅시다. 몸이 좋다는 말은 몸이 좋도록 영양소 줘야 되지요, 기름 팍팍 때야 되죠. 그러니까 나라는 것은 환경 속의 나기 때문에 환경에 적응하는 나일뿐이기 때문에 지금 이 환경을 사랑함으로써 그중에서 나를 사랑하게 돼있어요. 나만 사랑하고 환경 미워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나한테 돈 대주는 부모와 나를 칭찬해주는 목사님과 이런 것이 집중해서 내가 사랑하고 싶은 나 사랑을 가능케 하는 환경이기 때문에 이게 소나무 밑둥치에요. 이걸 밧줄로 꽁꽁 묶어서 주께서는 구원합니다.

 

구원하게 되면 우리는 그 안에 담기면서 나를 나 되게 만들었던 환경 속에서 주님한테 묶여가면서 우리는 엉망진창이 되는 거죠. 다시 말해서 죄인이라고 규정받게 됩니다. 그것은 내가 죄인이 되는 게 아니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싶어서 죄인 되는 게 아니고 환경이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요. 그걸 못 세운다고요.

 

나는 가만있는데 주변에서 나를 가만 놔두질 않았던 겁니다. 나를 괴롭히고 왕따 시켰고 그래서 복수심이 생겼고 보란 듯이 살아서 나를 미워했던 부모 무덤에 소주 한 병 들고 가서 나, 이만큼 성공했습니다. 어릴 때 나를 인간 취급 안 했죠? 아버지, 이렇게 잘 될 줄 몰랐지요? 죽은 부모 앞에서 항의하고. 그것이 프로이드가 말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 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설정했던 목표에 내가 얼마나 능력 있는 자인지 죽은 아버지가 지켜보라는 거예요. 이것은 바로 프로이드가 지적했듯이 인간의 무의식 속에 담겨서 환경이 그 인간을 그런 식으로 몰아세운 겁니다. 이걸 흔히 하는 말대로 인간은 영물이라. 사람은 육체가 힘들면 견딜 수 있지만 자기 자존심을 건들면 어떤 사람은 죽어버립니다. 누가 주먹으로 안 때려도 누가 욕만 해도 사람이 잠을 못 자잖아요. 이상하지 않아요? 욕이란 1초 340미터 가는 음파에요. 그냥 음파가 왔다는 왜 잠을 못 이룹니까? 이게 아무리 봐도 이상하잖아요.

 

이것은 인간의 몸이란 구축된 쌓이고 쌓인 게 있어요. 그래서 철학에서 인간은 한 마디로 말해서 기억이다. 또는 기억의 덩어리다. 누적된 기억의 층이 오늘날 현재 자기 자신을 그렇게 판단하는 겁니다. 그걸 주께서 건드리죠. 건드린 사태가 욥기에요.

 

제가 야고보서와 로마서의 믿음과 행함 글을 쓰면서 논지의 흐름을 이렇게 잡은 겁니다. 야고보서와 로마서가 어디서 갈라지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따로 갈라진 겁니다. 예수님이 산상 설교했거든요. 산상설교에서 갈라져서 하나는 야고보서 색채로, 하나는 로마서 색채로.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그전에 구약에서 나오죠.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덩어리는 아브라함언약이 있기 전에 인간의 몸을 직접 다뤘던 사건이 욥의 사건입니다. 욥은 아브라함 시대 사람이에요. 욥기 1장 1절에 나오거든요.

 

아브라함 시대에는 언약을 줬지만 욥은 언약을 준 게 아니고 언약의 구현체인 몸에다 직접 건드린 겁니다. 건드리니까 욥은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 현재 내가 뭐가 잘못됐습니까?” 하나님이 건드려보니까 과거까지 나오죠. 그 과거에 대해서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차라리 나를 이 땅에 태어나지 말게 하셔야 옳지 않습니까? 나는 내 생일을 저주합니다. 그때 엄마의 모태에서 태어나지 말고 죽었어야 했는데 왜 태어나서 나로 하여금 이런 고초를 겪게 합니까?”라고 나온 거예요.

 

그걸 1페이지 밑에 보면, [언어체계 속의 믿음과 행함]이라고 그걸 제가 언어적으로 정리한 게 뭐냐 하면,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 [언어체계는 인간들의 행동체계를 표현한다. 인간의 의지는 의미에 기초하고 있다.]

 

내가 뭘 행해야 되겠다는 의지는 내가 이걸 알고 있다는 의미 때문에 그 의미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행동에 나선다는 게 인간의 언어체계가 되는 됩니다. 앞에 꽃이 있잖아요. 꽃이 있을 때는 그냥 무심코 있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꽃이라고 이름을 불러줄 때 그는 내게 다가와서 하나의 의미가 된다. 김춘수의 시인데 그 의미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저 꽃에 누가 건드리면 그 사람 가만두지 않겠다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정신환경을 이루는 거예요.

 

“내가 먼저 이름을 불렀어. 저 꽃은 내가 먼저 이야기했단 말이야. 네가 왜 늦게 와서 간섭하는 거야.”라고 하면 나라는 정신세계는 내 몸을 떠나서 이미 꽃까지 포섭을 시키고 내 영역 속에 있는 꽃이 돼버립니다. 그리고 나중에 와서 “장로님, 그때 내가 이쁘다고 한 꽃 잘 있어요?” 이거는 남의 집 꽃까지 신경 다 쓰는 거예요. 이미 자기가 그 꽃에다 의미를 붙일 때는 나의 확장 속에 포함되는 겁니다.

 

이걸 전에 강의할 때 거미줄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거미의 영역이 거미만 있는 것이 아니고 거미가 깔아놓은 거미망 속에 다 있지요. 가끔 아침마다 시찰해서 혹시 걸린 놈 있는지 보고 데려오잖아요. 사람은 몸이 있는데 몸의 확장체제가 자기 정신세계고 이것이 환경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끝까지 나올 때 아직 이야기 안 끝났습니다. 꽃이라고 불렀을 때 의미를 화살 쏘듯이 쏘잖아요. 내가 예쁘다고 할 수도 있고, 저것도 꽃이야. 나쁘게 볼 수 있잖아요. 그러면 어떤 사람에게 의미를 할 때 이유 없이 미운 사람 있잖아요. 아무 이유가 없어요. 무조건 저 인간 나오면 안 돼. 내가 싫어. 싫은 짓을 해서가 아니라 내가 싫으니까 그냥 싫은 거예요.

 

그렇다면 자기 영역 속에 포함된 모든 것에 싫다, 좋다, 선하다, 악하다 그 판정을 누가 합니까? 이게 두 번째 시간에 중요한데 판정을 누가 하겠어요? 내가 하잖아요. 나는 결국 심판관이죠. 그러면 나는 몸만 있다고 신이 아니라 몸이 가만있지 않고 자동적으로 내 몸을 절대주로 간주하는 새로운 정신체제를 하나의 신의 세계로 날마다 구축하는 겁니다.

 

어떤 애는 여섯 살 먹었는데 “너희 아버지 무슨 문제 있느냐?” 하니까 “아버지 때문에 내 인생 이만큼 살면서 골치 아파서 되겠습니까?” 6년 살아놓고. 인간이란 그냥 사는 게 아니에요. 어릴 때는 말 잘 듣지요. 벌써 미운 여섯 살 되면 부모 집을 자기 집으로 접수했어요. 그때부터는 아빠, 엄마한테 큰소리치기 시작합니다. “아빠, 엄마 싸우지 마. 아빠, 화장실에서 오줌 눌 때 똑바로 눠. 엄마, 반찬 다른 걸로 바꿔줘.”

 

 

원이 있다면 동심원이 안 되고 보통 가정은 아빠 중심, 엄마 중심, 자식 중심, 이렇게 동심원이 중심이 하나고 이걸 원하는데 실제로 이런 게 아니고 중심이 각자 따로 있어요. 세 식구면 셋, 네 식구면 넷 따로 있어서 결국 산다는 것은 화목하다는 것은 정치적인 협상의 결과죠. 협상을 배우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아빠가 교회 다니라 하면, 정치적 협상을 하는 거예요. “교회 나가면 돈 얼마 줄 거예요? 휴대폰 사줄래요?” 정치적 협상으로 나오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정리하느냐 하면, 근원부터 출생부터 파보니까 결국은 욥의 출생에 하나님이 간여했다. 왜냐하면 내가 결과를 미리 알았더라면 엄마가, “이제 나오너라.” “안 나갑니다.” “왜 안 나오는데?” 나이 오십 됐을 때 큰 고난 받기 때문에 겁나서 안 나간다고 버텼을 거예요. 여기서 욥은 모든 일은 하나님이 맡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뭘 모르느냐 하면, 왜 나는 얻어터지는 역할을 맡아야 되고, 나는 심하게 고난 받아야 되고, 착한 일은 다해놓고 그 보상은 전혀 없는 저주받는 이러한 몸으로 왜 태어나야 하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어떤 사람은 욥이 믿음이 없다고 하는데 믿음이 없는 게 아닙니다. 오해해서 그래요. 보통 우리가 ‘믿습니다’하면 믿음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믿음은 내가 주님께 다가갈 수 있는 그런 게 있어서 믿는다고 하는데 욥에 의하면 율법 있기 이전에 원초적으로 믿음이란 뭐냐 하면, 거가대교, 거제도와 가덕도와 연결돼있죠. 하나님과 몸과 연결돼있으면 연결된 다리를 믿음이라고 합니다. 누구 소유입니까? 누구 소유가 아니죠. 연결된 다리기 때문에.

 

그런데 믿음 없는 사람의 믿음은 이것은 신용카드 같아. “믿음 있느냐?” “여기 있습니다.” “믿음 컸나?” “예. 믿음 좋습니다. 키웠습니다.” 이런 거예요. 거가대교에 보면 다리만 있는 게 아니고 터널도 있죠. 터널 앞에 가서 무엇이 통과하느냐가 믿음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거예요. 축복이 통과하게 되면 그 사람은 천국 가는 겁니다. 통행시설을 주께서 걸쳐놓고 거기다 예수 그리스도가 공로로 다 이뤘던 모든 것이 여기서 다 통과하는 거예요.

 

그걸 성령의 은사라 하죠. 성령의 은사는 다른 게 아니고 예수님의 은사에요. 성령님은 그냥 다리에 불과하고. 예수님의 은사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이것은 우리의 성품을 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지상에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그 속성입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되면 어렵지만 여러분들 실력이 있기 때문에 더 나가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넘겨주는 전달해주는 속성은 예수님의 속성이고, 예수님의 속성은 예수님의 속성이 아니고 예수님과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완성된 속성이 예수님을 통해서 또는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겁니다.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속성이기 때문에 이미 아버지로부터 관계가 끊어질 우리로서는 그 속성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가 언약관계에요. 이 언약관계가 출애굽기 4장에서 이스라엘을 내 장자라 하지요. 아버지와 아들에서 이스라엘은 오해해서 자기가 아들이라고 우겼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아들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완전히 멸망시켰고, 이 세상에 아들은 한 분밖에 없어요. 예수님만 아들이고 나머지는 성령에 의해서 차후로 왔던 입양된 양자거든요. 입양된 양자기 때문에 아들이 아니에요. 그래서 독생자 아닙니까.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님밖에 없어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완성된 나라를 천국이라 합니다. 천국이란 개념은 인간의 아이디어로 거기에 들어갈 내용이 전혀 없어요. 인간은 기껏 극락을 좋아하죠. 지 살기 좋은데. 골프장 넣고, 여자 많고 이런 것. 코란에 나오는. 그런 식의 자기 편하고, 자기 행복한 나라 그걸 천국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걸 믿고 그걸 소망하고 있어요. 죽어서 좋은 데 간다는 겁니다.

 

우리는 죽어서 좋은데 가는 게 아니고 죽어서 엉뚱한데 가요. 거기는 예수님만 존경받고 아무도 존경받지 못하는 세계로 갑니다. 그래서 천국 가려면 지상에서부터 나를 존경 안 해도 좋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그 나라에서 버틸 수 있지 이 땅에서 존경받고 살면 그 나라는 들어가지도 못할뿐더러 들어가도 잘못 오셨습니다. 존경받는 저 밑에 지옥 불에 들어가세요.

 

그래서 천국에는 예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만 가게 돼있지 다른 사람은 못 갑니다. 사람들이 성경이 그런 게 있으니까 마치 자기가 그것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이해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이 우리 속에 기록돼야 돼요. 얻어터져야 돼요. 내가 생각한 천국 가려다가 진짜 천국 가서 얻어터져서 멍이 들고.

 

욥의 몸은 우리 몸으로 율법 지키기 이전의 문제에요. 3페이지 보면, 강도 만나 얻어맞고 돈 빼앗기고 상처받고 어떻게 자기 인생에 대해서 말로 표현 안 될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는 것. 이것을 저는 두 자로 이것이 바로 인생이다. 욥은 그걸 단시간에 압축해서 받지만 우리는 구십 평생 동안 적금 들어서 연금 타듯이 매일같이 아침마다 당해요. 상사한테 당하죠. 자식한테 눌리죠. 마누라한테 잔소리 듣지요. 남편한데 폭력 당하죠. 누가 목 졸랐어요. 목 조른 이유가 순대국 먹을래, 소고기국 먹을래? 그것 때문에 싸워서 아내가 남편 정신 차리라고 신고해서. 김경민은 완전히 마누라 패는 인간이라고 소문이 나버렸는데 그게 찢어진 나의 정신세계, 상처받은 정신세계. 인생 살면서 상처 안 받은 사람 나와 보라 그래요. 아무도 없지요.

 

하나님께서 나의 출생 전부터 관여했다는 증거가 그겁니다.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되게 돌아간다는 사실. 그러면서도 얻어맞기는 왜 얻어맞느냐? “주여, 세상이 내 뜻대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번지수를 잘못 안 거예요. 지 주제파악을 그런 식으로 보는 거예요. “내 뜻으로 되게 하옵소서.” 우기면서 새벽기도 나오고 있고.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옵소서.” 하고 새벽기도 나오는 사람 봤습니까. 그러니까 새벽을 깨울 이유가 없어요. 새벽기도해서 정치할 것도 아니고 말이죠.

 

성경을 모르니까 욥을 몰라요. 욥은 자기 출생 문제부터 하나님과의 파이프, 대로가 있어서 주께서 내가 관여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믿음으로 혜택 받은 사람은 그것이 믿음이고 선물이 되는 겁니다. 믿음의 선물을 통해서 예수님이 갖고 있는 믿음을 선물로 주니까 욥이 미치는 거예요. 지가 평소에 나름대로의 자기 세계가 있잖아요. 아까 했잖아요. 거미망, 이것이 다 깨져버려요. 자식 죄 짓지 말라고 기도했던 그 아버지가 기도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자식 열 명 다 죽었어요. 누가 있어야 기도하지. 한꺼번에 다 죽고 재산 다 날아가고. “누구야? 나를 망친 것이.” “너를 모태에서 태어나게 한 하나님인데 뭐 문제 있나?” “문제 있습니다. 나를 이렇게 힘들게 고생하는데 왜 태어나게 했습니까?” “그게 문제나?” “그게 문제입니다.”

 

인간이 몸을 지니고 있을 때 이미 인간의 몸은 선악과 따먹고 죄에서 만들어진 몸이거든요. 죄에서 만들어진 몸으로 감히 하나님을 섬기고, 천국을 가고, 믿음 생활한다는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거든요. 집 나간 탕자가 아버지 생각 안 합니다. 몽땅 망해서 들어오죠. 목자를 떠난 양이 목자 걱정해서 떠날 리가 없잖아요. 이미 목자를 떠난 양의 입장에서는 지 생각만 하지 목자 생각을 못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몸은 말도 안 되는 몸으로 살아오고 있는 거예요. 그저 자기를 감추는 용도로서 교회를 나오고 예수 믿는 척하고 하지 이것은 몸이 나를 가만두질 않아요. 나는 잘 믿고 싶지요. 몸이 돈 좋아하고, 세상 좋아하고, 인기 좋아하고, 자존심 챙기는 것 좋아하고, 남한테 꿀리는 것 싫어하고, 몸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단 말이에요. 로마서 11장의 말씀처럼 내 몸에 다른 괴물이 있어서 괴물이 나로 하여금 주의 말씀을 안 듣는 거예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돼요. 첫 번째는 몸이 주의 뜻에 안 맞는다. 두 번째는 더 중요한 문제, 주의 뜻에 안 맞는 건 구약 욥이고요. 신약에 오게 되면 몸이 주의 뜻에 안 맞는 정도가 아니고 주님께 반발한다. 이 지점에 되어줘야 여기서 야고보서나 로마서의 행함과 믿음의 실체가 나와요. 우리의 몸은 어떤 몸이다? 주님께 반발하는 몸을 갖고 있다. 이게 정립이 돼줘야 비로소 성경에서 말하는 야고보서나 로마서의 믿음과 행함이 여기서부터 출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현재 이 몸으로 야고보서, 로마서 읽어봐도 들어올 수 없는 연결 안 되는 것을 지 마음대로 해석하는 거예요.

 

이렇게 내 몸은 주님께 반발하는 몸이라는 이 지점에 들어서야 비로소 야고보서나 로마서 가는 길이 보입니다. 이 지점은 바로 십자가에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아버지한테 뭐라고 했습니까?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아버지는 아들을 버려야 되고,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께 버림받아야 되고.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모든 인간은 다 실제로 죽은 것이라는 걸 완성하기 위해서 아들은 버림받아야 되는 거예요. 그럼 아들이 갖고 있는 포지션은 어떤 포지션입니까? 아버지께 저주받은 자리, 버림받아도 당연한 자리가 예수님의 자리죠.

 

그 자리에 우리가 도달되지 아니하면 아들의 자리에 있지 않게 되고, 아들의 자리에 있지 않게 되면 그 동안 구약, 신약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말에 대해서 우리는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이 들통 나는 겁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인하여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그 자리에 우리가 같이 설 수 있을 때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십계명이 이런 뜻이구나 하고 이해가 되는데 우리는 그전에 엉뚱한 자리에 들어가서 “하나님이여, 나를 고생하라고 태어나게 했습니까? 하필이면 나한테 그렇게 하십니까? 그 이유를 대세요.” 이렇게 반발하고 나온다 말이죠. 거기에 무슨 답을 합니까? 예를 들어서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 영광 많이 돌렸잖아요. 구제와 고아와 과부를 돌보게 했다. “저도 구제 한 가닥 했습니다. 왜 내가 고생해야 됩니까, 하나님. 이걸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대한 정답을 이야기해보세요. 욥이 궁금해 했던 정답. 왜 없는 나를 태어나게 해서 고생시키고 환란주고 죽으면 괜찮은데 죽지도 않고. 그 해답이 뭡니까? 그게 언약자리거든요. 이게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언약 이전에 언약의 자리잖아요. 언약의 자리에 있는 율법의 완성, 말씀의 완성의 자리는 바로 축복의 자리가 아니고 아버지께서 버림받는 저주의 자리로부터 아들의 나라, 천국이 비로소 그 자리에만 배아가 되어 솟아오르는 거예요. 007 영화 마지막 보면 악한 닥터 노가 만들었던 비밀장소, 분화구가 올라오죠. 그냥 호수인데 물이 걷히면서 미사일이 올라오는 것처럼 분명히 저주 자리인데 저주받은 그 자리에서 올라오잖아요.

 

군에 가서 근무지 이탈했다고 온 국민의 지탄을 받았던 그래서 군대 두 번 갔다 온 싸이가 하는 말이, “국민들이 나를 용서해서 이런 혜택이 있습니다.” 그게 천국에서 외쳐야 되는 거예요. 나 같은 탕자를 주께서 용서하심으로 천국 가고 이렇게 된 거예요. 강남스타일이 우연히 나타난 게 아니에요. 복음을 위해서 나타난 겁니다. 우리는 완전히 강남스타일이라니까요. 이것은 못 생겼지 뚱뚱하지 까불지 인간도 아니지 군에도 두 번씩 갔다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사일 올리듯이 올려주는 거예요. 구원될 수 있는 그 자리는 우리가 만들 수 없는 자리입니다.

 

성령께서 그 자리를 만들어 줍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이렇게 돼있죠. 우리 가운데 돈 많은 자가 누가 있으면, 학식 많은 자가 누가 있으며, 우리 가운데 똑똑한 사람이 누가 있으면, 잘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천하고 못나고 버림받은 자를 택하사 가진 자들, 똑똑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 모든 공로를 돌리고 자랑할 것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걸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교회라는 거예요.

 

교회라 하는 것은 모이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터지는 사건입니다. 바람 같이 일어난 사건이 교회에요. 늘 모인다고 다같이 천국 가는 사람 아닙니다. 모이고 다음주 되면 몇 명 빠질 수 있고 모이는데 더 올 수도 있고. 그것은 어떻게 회원 모집하듯이 등록하고 이렇게 해서 천국 들어올 사람 아니에요.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 사람들 고려해서 아예 붙박이로 교회에 잡아놓기 위해서 뭘 하느냐 하면, 목돈 내라. 사람 심리가 목돈 내놓으면 욕해도 그 자리를 못 나옵니다. 지가 바친 게 있기 때문에. 그게 바로 오늘날 목회라는 거예요. 목돈 내게 만드는 수법이 목회라는 거죠. 목돈으로 못 빠져나오도록 합니다. 장로, 집사 장립할 때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계속 거기에 붙잡아매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건은 아니죠. 모일 때마다 “미쳤어, 미쳤어. 교회 안 나오던 내가 왜 또 나왔지. 이건 사건이야.” 이렇게 돼야 된다니까. 십년 다녀도 그 다음주일에 온다는 보장 없습니다. “십년 다녀도 올수도 있고, 안 올수도 있고 그건 내 마음이다.”라고 왔는데 다들 그렇게 와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일 때마다 감사한 거예요.

 

사건하면 할수록 우리의 상처는 더 주님한테 깨어지고 어디까지 깨어지느냐? 저주받아 마땅한 사람은 주님이 아니고 사실은 내가 저주받아야 되는데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저주받아 죽을 내 죄를 대신 졌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내가 받을 심판을 대신 받기 위해서 내 죄를 가져가서 아버지한테 버림받음으로서 그 자리가 바로 나의 자리이라고 고백이 되는 거예요. 이럴 때 십자가가 크게 보이는 거예요.

 

십자가가 크게 보이고 오래가면 좋겠는데 설교 끝나고 광고시간에 다, 십자가 설교 듣고, “맞아 내가 죄인이야. 사는 것도 감사해. 살 이유도 없어.” 하고 있는데 광고시간에 “제발 열한 시에 일찍 오시기 바랍니다.” 이러면 일찍 오는 것과 구원과 관계없는데.

 

정리해봅시다. 우리의 몸이 있는데 태어나는 것도 우리가 관여 못했습니다. 그냥 세상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그걸 존재가 아니고 실존이라 해서 사르트르는 실존이 먼저고 실존에서 의미를 달기 위해서 존재라는 것은 생각한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우리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어떻게 사느냐? 그게 아니고 의미라는 것은 내 실존에 보탬이 되고 도움이 될 경우에만 의미 있는 것이 인간의 진짜 몸의 본성이라고 밝힌 거예요.

 

신이 나를 만들었으니까 신을 믿자. 이것은 말도 안 된다는 거예요. 신이 나한테 무슨 도움을 줄 때만 인간은 신을 믿게 돼있고 사랑하게 돼있다 이 말입니다. 내 실존이 우선이 신은 나중이다. 이걸 나중에 타인이라 합니다. 우리말로 남이다. 남이니까 내가 꽃이라고 의미를 붙여줄 때만 그것이 나에게 꽃이 되듯이 신이든, 예수든 내가 신이라고, 예수라고 불러줄 때만 비로소 예수가 되고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없으면 하나님도 없는 거예요. 내가 있기 때문에 내가 신이라고 불러줬기 때문에 신이 있는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여기 있는 나를 사랑해줄 때만 그거는 신다운 것이고 만약에 내 뜻대로 안 해주면 나는 마귀라고 이름을 붙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올 때는 그 하나님에 대해서 내가 신을 마귀라고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나한테 유리한 쪽으로 해석을 조종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힘들게 하는 것은 앞으로 좋은 걸 주려고 하는 거지.” 일방적으로 자기 좋은 쪽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자기가 하나님 변호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거든요. “우리 같은 편이니까 내가 당신을 변호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누가 변호해주나. 나처럼 신에 대해서 잘 변호해주고 예수님 좋다고 하는 놈 누가 있어. 나 아니면 주님도 설움 받지 나 있기 때문에 주님은 사랑받는 거야.” 자꾸 신을 자기가 조종하려고 하는 겁니다.

 

실존으로 먼저 있고 실존은 내가 누구라는 걸 몰라요. 어떤 의미를 줄 때 비로소 나한테는 실존이 존재로 바뀌면서 “나는 나이다”에서 ‘이다’라는 보조어는 ‘나는’이라는 존재에 관한 술어거든요. 언어에서. 뭐는 무엇이다 할 때는 반드시 목적어는 주어의 존재를 표현해주는 목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다.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실존을 못 느끼고 나는 여기 있다. 심지어 내가 지옥 가도 어깨 두드릴 사람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힘내라. 지옥 누구나 가는 거야. 다른 사람 다 가. 내가 너를 위로해줄게.” 누가 우리를 위로해줘요? 여러분? 여러분이라고 하면 내가 의미를 줄 때나 여러분이지 북한의 김일성이 여러분이 아니거든요. 내가 의미를 안 줬다니까.

 

모든 것은 지옥 가도 나는 나고, 나밖에 없고, 나는 나를 사랑하고, 존재의 의미는 실존에서 타인에게 의미를 줘서 나한테 소급해서 받은 거예요. 그러면 실존인 내가 어떤 타인을 원하겠습니까? 거지, 노숙자에 의미 안 주죠. 누구한테 의미를 줍니까? 안철수, 이러면 의미주고. 문재인, 내가 되고 싶은 사람, 반 총장, 장동건, 하여튼 내가 되고 싶은 것에 의미를 줘서 저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을 통해서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장점에 흡수 통합되면서 새로운 멋진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거예요.

 

문제는 이것이 교회 와서 장동건, 안철수가 아니라 그 자리에 예수가 들어가는 게 문제에요. 예수가 자기 라이벌이 되고 목표가 되는 거예요. 예수처럼 살자. 테레사 수녀, 유명한 사람 좀 많습니까. 아직도 그 동네에 있는 사람 많아요. 예수를 본받자, 예수처럼 살자. 겸손하고 마음을 낮추고 욕심내지 말고 세상을 구제하고 베풀고. 이런 인간들이 결국 자기 몸의 뜻을 너무 사랑해서 예수처럼 살자는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하기 위해서 그런 수작을 벌이는 거예요. 마르크스가 웃습니다.

 

결국은 그런 일 하려면 뭐가 필요해요? 나를 위해서 투자해라. 실컷 설교해놓고 광고시간에 그러니까 돈 바쳐라. 예수를 본받자, 하나님을 섬겨야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은 결코 주님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어디까지 신처럼 군림할 수 있는가 임상실험에 나서는 거예요. 교회라는 걸 근거로 해서. 주기철 전기 읽고. 슈바이처 읽고. 심지어 부처부터 해서 불교에 유명한 도서까지 읽어서 내가 어느 정도까지 성스러운 존재로 탈바꿈하는지 그것 시험하는 겁니다. 장사 한두 번 하나. 다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속으로.

 

이 문제를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야고보서에서 어떻게 푸느냐 하면, 야고보서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간단합니다. 야고보서 4장. 인간은 나는 나라 했잖아요. 주어에 따른 보조로 야고보서 4장 14절에 “너희 생명은 안개”죠.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것은 개개인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단체로 집합개념으로 말해요. 모든 인간은 율법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나 착합니까?” 하는 그런 물음 자체가 성립 안 된다니까요. 주님의 뜻은 율법을 이루는데 있지 독자적으로 저 사람보다 낫습니까, 못합니까, 착합니까, 나쁩니까? 그런 질문은 율법이 갖고 있는 집합개념에 전혀 해당이 안 되는 거예요. 하늘에서 은사가 왔다는 말은, “너 받았나? 나 안 받았어. 조금 받았어? 많이 받았어?” 이렇게 비교하라고 은사 주는 게 아니고 어떤 은사를 받았으면 은사에 종속돼있지 사적인 자기 고유영역은 절대로 장만할 수 없는 거예요. 야고보서에서. 그건 뭐냐? 이스라엘 원래 취지가 그렇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든 취지가 개개인의 자질과 능력을 비교한다는 건 애초부터 하나님의 뜻은 없는 겁니다.

 

그 예가 엘리야 나오죠. 엘리야가 까마귀한테 얻어먹고 고생한 것이 엘리야 본인이 구원받기 위해서 그랬습니까? 아니잖아요. 엘리야 시대에 삼년 육개월 동안 비가 안 왔잖아요. 그런데 엘리야의 간구 때문에 비가 오지요. 그 기도가 엘리야가 물 가둬놓고 물 값 받으려고 한 겁니까? 그것도 아니란 말이죠. 그러면 엘리야 당신은 왜 삽니까? 내 재산 되는 것도 아니고 가문의 영광 되는 것도 아니고. 엘리야 당신은 왜 삽니까? 그러면 엘리야가, “글쎄요. 나도 죽겠어요.” 그게 정답이란 말이죠. 주의 영광을 위해서, 이게 아니라니까요. 나도 미치겠습니다.

 

이것이 두 가지로 나와요. 성경 전체에 노선이 두 가지에요. 하나는 인간의 몸을 통해서 존재가 나오고 존재는 타인을 통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 욕망하는 타인을 통해서 의미를 줌으로써 마치 타인과 같은 통속인가 착각하는 가운데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두는 거예요. 그런데 타인과 자기 사이에 갭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갭을 메우기 위해서 인간은 여기에 희망을 집어넣습니다. 희망이 악마의 최후의 무기입니다. 긍정적 사고방식, 적극적 사고방식. 사람이 희망이 없으면 자살합니다. 살 이유가 없어요. 사람은 희망을 잃으면 다른 희망으로 보충해야 돼요. 더 이상 메울 희망이 없으면 한강에 뛰어내립니다. 사람이 희망 때문에 살아요.

 

누가 죽었다. 내가 빠진 희망의 자리를 뭔가 메우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살 이유가 없어요. 왜냐하면 타인이 없으면 몸은 있는데 존재가 없어요. 인간은 존재가 없으면 못 살아요. 몸이 이상하게 자꾸 아파요. 그러니까 내가 되고 싶은 타인이 없으면 죽습니다. 우리는 내가 되고 싶은 타인이 있을 때 타인과 일치된다는 희망 때문에 사람은 버틸 수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악마의 유혹이고 아무도 유혹을 이길 수 없어요. 유혹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엘리야 같은 경우에는 나름대로 희망이 있지요. 그런데 그 희망을 사명으로 바꿔요. 주님 주신 사명이 인간이 갖고 있는 희망을 박살내버립니다. 이 사명은 자기가 만든 사명이 아니기 때문에 외부에서 침투된 거예요. 침투된 사명이기 때문에 자기가 걷어치워도 못 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득불 하는 거예요. 또 이 소리하니까 사명도 없는 것들이 부득불 한다고 하는데 가짜로 나오는 건 할 수 없고. 하여튼 우리가 아는 것은 사도 바울의 모든 일은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고 부득불. 이것 기억하시고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20121003 특강b.hwp (54.5K), Down: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