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야고보서 울산특강2(이근호)100410

아빠와 함께 2013. 2. 22. 12:11

20100410b 울산특강 - 야고보서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합니다. 


지혜는 두 가지, 하나는 하늘에서 나오는 것이고, 구조적이라 했습니다. 야고보서 3장 15절. 지혜는 어디서부터 오죠? 위로부터 오죠. 구조적이라 하는 것은, 제가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늘나라에 이스라엘 있어요. 구원받은 이스라엘이 그대로 지상에 내려오면 축복 받은 자와 저주받은 자를 확연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무엇이 저주인가를 들추어내는 식으로 이스라엘이 여기서 활동한다고 돼있어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지혜의 활동에서 이스라엘 되었기 때문에 그 하늘의 이스라엘이 그대로 내려오면 지상에서 활동하는 겁니다.


괴테란 사람의 [파우스트]에 이런 글이 있어요.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 보통 태초에 요한복음 1장에 말씀이 있잖아요. 말씀을 행위로 본 겁니다. 이것은 행위 없는 말씀이란 절대로 드러나지 항상 말씀이 우리에게 올 때는 행위로 드러내는 거예요.


만약에 말씀이 그냥 말씀으로 드러날 경우는 우리가 주체가 될 때 입을 벌려서 말하면 그냥 말만 전달되죠. 그러면 말만 전달하는 것은 누가 주체냐 하면, 내가 말한다. 주체가 우리한테 있는 겁니다. 이 자체가 저주가 돼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칭칭 감겨야 되고, 율법은 행위로 등장해야 되는데 만약에 말로만 해버리면, 이 자체가 저주가 되고 이 사람(율법에 의해 감긴 사람)이 축복이 되는 겁니다.


위로부터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 은사가 우리로 하여금 행위 하도록 그렇게 만드는 힘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남들 보기에는 그 사람이 행했다고 보는데 진짜 말씀에 의해서 본 사람은 주체를 자기에게 돌리지 아니하고 하늘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혜의 능력이라고 자꾸만 자기 이야기 안 하고 하늘에게 이런 것이 주어졌다고, 그걸 우긴다고 말하면 안 되는데 실제인데,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점에서 행위라 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에서 비롯될 수 없고 하늘에서 온 지혜가 우리에게 행위로 주어지느냐? 그럼 이 구조는 뭐냐? 구조는 바로 축복과 저주의 구조로 돼있지요. 왜냐? 이스라엘이 내려오면 무엇이 저주인가를 들추어내는 식으로 행동하게 돼있어요. 무엇이 저주인가, 무엇이 하나님 법에 어긋나는가를 들추어내는 식으로 흩어진 이스라엘은 활동하게 돼있다.


왜 그런가? 이 지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지혜기 때문에. 그 배후에 예수님의 지혜가 주어지게 되면 그것은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무엇이 법에 어긋나는가, 하나님 사랑에 어긋나는가를 들추어내는 식으로 활동하게 돼있습니다. 들추어내는 매개체, 수단으로 흩어진 열두 지파가 작용하게 돼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본격적으로 야고보서에 들어가 봅시다. 야고보서 1장 1절.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2장 1절.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여기서 ‘주’와 ‘흩어진 열두 지파’와 어떤 연관성이 있느냐? 이걸 먼저 생각해봅시다. 이걸 설명해야 야고보서 전체가 이해되니까.


제가 지금 주님하고 열두 지파의 연관성을 정리하지 아니하면 사도 바울의 로마서나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에 나오는 개념들이 왜 야고보서에 안 나오는지 몰라요. 그러면 사도 바울 개념들이 어떤 게 나왔습니까? 십자가 나왔지요. 제가 지금 적는 것은 사도 바울의 편지에는 나오는데 야고보서에는 전혀 안 나오는 것을 설명합니다.


‘십자가’ 나오지요. 고린도전서 1장에. 그 다음에 ‘성령’ 나오지요. 야고보서에 성령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사로잡힌 자’ 이런 용어도 안 나오고. 또 뭐가 안 나오느냐 하면, ‘주님의 소유된 것’ 이것도 안 나오고, 그 다음에 ‘부활’ 이것도 안 나오고, ‘하나님 나라’도 안 나와요. 대충 이렇게 봅시다. 성령, 사로잡힌 자, 주님의 소유된, 영생 이런 것도 안 나오고. ‘믿음으로 구원온다’ 이것도 안 나와요. ‘언약’도 안 나와요.


만약에 그럼 이걸 다 뭉쳐서 한 마디로 말하면 뭐냐 하면, 구원받은 자의 주체성이 성립되죠. 구원받은 자는 이러하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이런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건 다른 말로 새로운 피조물이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새로운 피조물이란 것을 야고보서는 인정을 안 하는 거예요. 새로운 피조물을 인정을 안 하니까 이런 용어들이 나올 이유가 없다 이 말이죠.


새로운 피조물이 돼버리면 새로운 피조물에서 그 다음 나올 게 행함이 나오겠죠. 새로운 피조물로 구원은 완료가 되고 완료된 상태에서 행함이 나온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편지라면, 야고보서는 어떤 인간에서 나오는 행함은 구원이 완료된 원칙에서는 해당이 안 된다는 겁니다. 법에 의한 행함이 나와야 그러니까 구원이란 개념이 어떤 인간이 구원받았다가 그걸 구원으로 보지 않고 뭐가 나오면 그것이 구원받은 현상으로 보는 거예요. 이 말 참 어렵다.


‘저 구원받았습니다.’ 야고보는 그건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닌데. ‘주님 저 구원받았습니까?’ 하나님은 너 구원받은 것 관심 없거든. 그러면 하나님의 관심사가 뭡니까? 주 예수님께서 위로부터 지혜를 주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의한 사랑이 발산되게 돼있는 것, 나타난 그 현상을 하나님께서는 약속한 열두 지파가 형성됐다고 보는 겁니다. 개인이 어떻게 구원받는가가 아니라 열두 지파가 열두 지파 값을 할 때 그걸 하나님께서 원하는 바가 되는 거예요.


노선이 그 노선이에요. 이쪽 노선이 아닙니다. 이쪽에서는 새로운 피조물 되었으니까 그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한다는 관점이 아니고, 야고보서에서는 하나님의 법이 어떻게 지금 열두 지파란 매개, 수단을 통해서 모종을 통해서 역시 주님께서 모든 율법이 다 이루었다는 것이 실제로 구체적으로 다 드러날 그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의 목적을 다 이루었다고 보는 겁니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가 나오는데, 야고보서에는 이런 게 안 나오고, 영생, 부활, 십자가, 인간은 뭘 믿어야 구원받습니까가 안 나오면 뭐가 나오는가? ‘지혜’가 나오죠. 지혜란 것이 첫째는 하늘에서 위로부터 왔다. 두 번째, 구조. 그럼 이 지상에는 뭐가 있습니까? 하늘과 땅 양쪽을 보여주는 그 기능을 흩어진 열두 지파를 통해서 보여주게 되면 이런 게 하늘에서 오는 거구나. 이것이 바로 세속에 물든 더러운 세상이구나를 안다면 그걸 밝혀낸다는 그 자체로서 게임오버, 그 자체로서 하나님 뜻은 이뤄진 거예요.


너는 안개니라 할 때에 ‘안개 맞습니다.’ 하면 내가 어느 도시에서 이득을 보던, 손해를 보던 그건 관계없어요. 손해를 통해서 내가 안개구나. 이익을 보면서 아는구나. 살고 죽는 것은 내 뜻이 아니고 하나님 뜻에 의해서 살고 죽는구나. 이걸 안다면 그것으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걸 통해서 주께서 우리를 사용하고 싶은 목적은 다 이룬 거예요. 이해하시겠습니까? 철저하게. 예수 믿어서 펀드를 얼마 이익 봤고. 그런 것 계산하지 말란 말이죠.


우리 안에 뭐가 감겨 있다? 그냥 하나님 주신 은사, 법이 완성된 형태에서 칭칭 감겨있는데 이것은 위로부터 온 거예요. 위로부터 온 말씀이 우리를 칭칭 감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위로부터 온 지혜의 능력 때문에 항상 어디가도 우리는 구조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결국 행함이라는 것은 위와 아래의 날카로운 대비를 보여주는 행함이다. 이것이 야고보서의 특징입니다. 무엇이 위에 있는 거고, 무엇이 땅에 속한 것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행동을 하도록 하는 것이 야고보서의 특징이란 말이죠. 너무나 하나님께선 이기주의야. 하나님은 너무 자기밖에 몰라.


[회복]이란 영화가가 있어요. 김종철 감독이 만든 독립영화인데 그것은 전국의 개봉관에 몇 군데 있긴 있는데 그게 워낙 장사가 안 되서 시간별로 해서 회복 영화 보려면 인터넷에 들어가면 전국 개봉관이 나와 있어요. 그것 보고 봐야 하는데 거기에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소위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게 주된 내용이 되는데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하는 짓거리가 나와 있어요. 난 허리띠인줄 알았어요. 허리띠보다 얇고 폭이 한 3~4미리 이 안에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주로 신명기 말씀들이 들어있어요. 이걸 허리띠처럼 만들었어요. 휘어지게 만들어서 이걸 자기 몸에다 감아요. 머리에 감았고 연결 되어서 손목까지 감아요.


그래서 왜 하십니까? 하니까 감독이, 성경에 나온다는 거예요. 이마에 띠를 띠우고 손모가지에도 이것으로 한다는 겁니다. 성전을 그리워하면서 언젠가 성전을 보러 온다는 거예요.


왜 이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지 신명기를 통해서 봅시다. 신명기 30장 1절 봅시다. 우리가 신약성경을 전혀 모르고, 구약 유대인들이라고 치고 봅시다.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 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그 다음에 6절 봅시다.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10절에 봅시다. “이 율법책에 기록한 대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돌아오면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그리고 14절에 보세요.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11절 봅시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이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이것을 입에 갖고 있으니까 네가 지킬 수 있다고 돼있죠. 성경에.


유대인들이 이미 어려운 것도 아니고 무거운 것도 아니고 행할 수 있는 성경을 우리에게 줬다는 말은 우리가 행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기 때문에 지켰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유대 지도자가 하는 말이 하여튼 신약성경 이상하다는 거예요. 신명기에 우리가 분명히 지킬 수 있는데 왜 우리 보고 못 지켰다고 이야기하고 이것을 대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걸 지킴으로 보게 했다고 이런 소리 하느냐 이 말이죠. 중간에 누가 농간을 부렸느냐 하면, 바로 사도 바울이란 사람이 구약 해석을 자기 마음대로해서 어디서 계시를 받아서 인간들을 다 버려놨다는 거예요.


분명히 성경말씀을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줬는데 이걸 로마서에 이거는 도저히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지키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저주 아래 있게 하죠. 갈라디아서 같은 경우에. 그 율법을 대하면 대할수록 그 노선이 저주 노선에, 율법을 지킨다는 말은 이미 그 사람은 저주 노선에 있다는 것을 확인 차원에서 준 거예요. 누구든지 모든 율법을 항상 쉬지 않고 계속 지키지 아니하면 너희가 저주 아래 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란 이상한 놈 하나 등장해서 소위 기독교란 새로운 희한한 교회가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란 하나의 랍비인데 그 랍비가 까불다가 죽었단 말이죠. 그 말은 자기는 하나님이라고 우기지만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죽인 거예요. 그런데 시체 숨겨놓고 그분이 부활했다고 속여 놓고 부활한 예수를 직접 다메섹에서 만났다고 해서 사도 바울이 신약성경을 만들어서 하니까 우리가 유대인 입장에서 이 이단을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고 핍박을 한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유대인 중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너희의 귀와 눈이 닫힌 채로 성경을 봤기 때문에 성경이 그렇게 보인다는 겁니다. 그럼 눈이 열린 채로 만약에 신명기를 보고 모든 것을 보면 모든 성경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증거로써 미리 준 것인데 예수님이 다 이뤘다는 걸 못 믿기 때문에 아직도 구약을 쥐고 저주를 받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인이 하는 말이, 너하고 나하고 소통이 안 된다. 도대체 말이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제가 그 영화를 보면서 야고보가 그 중간에 끼었다면 어떻게 이야기했을까? 하는 겁니다. 야고보는 율법을 어떻게 봤습니까? 사도 바울은 좀 비껴주고. 사도 바울은 끼여서 말이 안 되니까 야고보를 사도 바울 자리에 집어넣자. 야고보서를 집어넣었을 때 과연 유대인들이 야고보서에 대해서 어떻게 비난하며 야고보는 그들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세상적이라고 할 것이냐? 그들이 열심히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율법을 지켰다고 주장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율법의 성취를 이야기하는, 행함을 이야기하는 야고보는 그들에 대해서 뭐라고 비판할 것인가? 상당히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알고 싶다.


주 개념이 있습니다. 주 개념을 찾아야 되는데 주 그리스도니까. 주님 되시는 분이 그리스도로 오셔서 그리스도께서 본래의 자리인 주께 가는 겁니다. 주의 자리가 오른손의 자리에요. 전에 우리교회 나왔던 어떤 장로님이 저한테 물었어요. ‘목사님. 오른손의 자리가 무슨 의미입니까?’ 성경에 오른손의 능력으로, 주께서 오른손에 계시고 우리들도 나중에 주의 오른편 보좌에 앉을 것이다. 왜 왼손이 아니고 오른손이냐? 오른손이 뭐하는 곳이냐?


오른쪽이 뭐하는 곳이냐 하면, 신약 식으로 이야기하면 은닉된 분이 바깥에 자기를 드러낼 때 주체로서 드러날 자리가 오른손의 자리다. 반드시 은닉된 분, 숨어있는 하나님이 드러낼 때는 오른손이라는 인간적인 표현을 써가면서 내 오른손에서 자신의 주체, 나는 이런 하나님이라고 드러내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지상에 일을 하게 되면 지상에 일어난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만이 일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신 분이 이 세상에 관여해서 일을 해서 하나님의 주체되신 분을 드러낼 때 사람들이 영광을 돌릴 때 비로소 숨어있는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이 피조세계에 직접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안에서 행함을 하죠. 사건을 벌이고 일을 하지만 직접 하나님이 관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낮추사 살피시고 하는 것은 주님의 오른편, 주의 자리에서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주의 오른편, 주의 자리라는 것은 뭐냐 하면, 오른쪽이란 의미는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둘로 갈라져서 두 분의 식으로 창조를 했고 지금도 모든 걸 운영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다. 한 분이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할 때 이 한 분 뒤에 다른 분이 계셔서, 얼른 보면 두 분이죠. 이것을 오른편으로 연결된 상태로 이야기해서 나의 오른쪽의 자리에서 이 일이 일어났다. 이렇게 해서 한 분됨을 두 분이 일하시면서 그걸 세상에 나타날 때는 한 분으로 일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그러면 오른편의 자리를 뭐냐 하면, 출애굽기 15장에 보니까 능력의 자리죠. 능력이 나타나는 자리.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게 될 거예요.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일을 하신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학자들이 뭘 따지느냐 하면, 하나님이 만약에 일하시면 자연이 곧 신이라는, 하나님과 자기가 일치가 돼버려요. 일치가 돼버리면 단독적으로 하나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전체가 부분과 섞여버리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소위 이걸 범신론이라 하죠.


하나님은 범신론도 아니고 관계가 끊어진 단독적으로 계시는 분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피조물로 계시지 않으면서도 계시는 식으로, 오른편에 계신 자리에서 하나님과 관여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을 규정하는 모든 것을 사전에 전부다 차단시켜 버렸어요.


피조물에 있어서 하나님은 오직 자기와 같이 하나의 대상물로 전락한다는 그것에 머물고 말지 하나님에서 오른편이 나타나서 거기서 능력이 일한다. 이런 식의 계산 하의 하나님은 인간에게는 도저히 나타나지 않도록 돼있습니다. 선악과 따먹기 이전도 마찬가지고 이후도 마찬가지고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 피조세계, 피조물과 하나님 사이를 구분하는 거예요.


‘주께서 내 주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죠. 또는 시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이렇게 돼있죠. 신약에 보면 ‘주께서 주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주가 양분되는 것은 기존에 있던 다윗, 인간의 왕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한다는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다윗이 깨질 때 이 다윗의 자리에 주님의 오른편에 있는 주님이 이걸 차지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우리 인간 보기에 그렇게 보이지만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들춰내기 위해서 인간의 죄를 마음껏 들춰내게 만들고 만들면서 죄와 주님과 만나게 되는 거예요. 그 유대인들은 율법이 주어진 것은 뭐로 보느냐 하면, 축복이냐 저주냐를 유보된 상태, 아직 결정된 것이 없는 상태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해석하기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한 걸로 보는 거예요.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모든 신은 ‘주께서 주에게’ 이런 것을 모르고 그냥 주님 앞에서 자기가 하나의 섬기는 대상물로 보는 겁니다.


그러면 이 주님이라 하는 것은 누가 만들어내는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내 범위 안의 주님이죠. 이 사이에 그들은 율법을 주니까 이 율법을 이해하기를 기존에 있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율법이 왔다고 이렇게 오해를 한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출애굽기에서 신명기로 나아가면 갈수록 율법이 오히려 뭘 예고하느냐? 그들의 저주를 예고하게 되는 겁니다.


신명기 30장 봅시다. 구약학자들이 그걸 풀어낼 수 없었는데. 31장 29절.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한 길을 떠나서 여호와의 목적에 악을 행하여” 이렇게 돼있지요. 32장 15절. “그러한데 여수룬(이스라엘)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며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29절. “그들이 지혜가 있어서 이것을 깨닫고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였으면”


결국은 신명기에서 모세가 예언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주고 축복과 저주가 그들은 유보된 상태, 잘만 하면 복 받고, 못하면 저주받고.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전라도인지 경상도인지 항상 유보된 상태로 봤는데 대전 쯤 유보된 상태로 봤는데 그게 아니고 그들이 지킨다는 말씀 자체가 뭐까지 포함시켰다? 결국은 너희들은 부패하고 하나님을 버릴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 어디 포함돼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율법 속에 이미 포함돼있단 말이죠. 율법을 지키려 하다가 율법이 덮친 거예요. 위에 형광등 달려다가 지붕에 매달린 격입니다. 형광등 달려다가 갑자기 지붕이 내려앉았어요. 형광등은 코앞에 달려있고.


그들은 무슨 구조를 몰랐는가? 신과 인간 사이에 하나님과 주님께서 개입하셔서 주님이 율법을 줬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던 겁니다. 왜? 인간은 모든 것이 범죄했기 때문에. 이미 죄악에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죄인 줄 몰랐어요. 하지만 율법 안에 이미 자기가 부패하고 하나님을 버릴 것인가가 다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버렸는지 몰라요. 다만 그들이 멸망당한 걸 보니까 신명기 28장, 29장, 30장, 31장, 32장 보니까 그들이 이방나라에 포로 잡혀가고 약속의 땅을 떠난 걸 보니까 우리가 아무리 율법을 지켜도 지킨 게 아니구나를 비로소 그들은 알게 될 것이란 거예요.


사울이란 사람이 아무리 율법을 지켜서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등장하니까 그 십자가 앞에서 그동안 내가 지킨 율법은 율법 지킨 것도 아니구나를 아는 겁니다. 빌립보서 3장에 나오지요. 내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고 율법으로서는 흠이 없는 자인데 예수님을 만나니까 나는 죄인 중의 괴수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은 인간을 지키라고 준 것 같지만 그 자체 안에 하나님의 오른손, 하나님의 주의 자리, 주님이 주님을 드러내가 위해서 율법으로 자기 백성에게 찾아온 겁니다. 찾아왔을 때 율법대로 그들이 나중에 복 받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로 돼요.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서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러면 불쌍히 여기는 긍휼 안에 이 율법에 예언된 대로 우리는 긍휼을 받았다는 게 나와야 된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율법을 지켰다는 말은 다른 말로 우리는 긍휼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우리는 긍휼 아니면 우리가 지켜서 구원 못 받습니다가 다 드러나야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야고보서가 만약에 펜션처럼 집이라면 이게 야고보서라면 이걸 뜯어보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평면도가 돼요. 뾰족한 게 있고, 부엌 있고 설계도면을 다 합치게 되면. 수직적인 게 아니고 수평적인 게 되잖아요. 3차원이 2차원이 되잖아요. 하나하나가 속된 것과 위에서 온 것과의 차이가 나오겠지요. 그 차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우리가 이런 식으로 구원됐다는 것을 우리 안에서 주님이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액션으로. 그러면 이것이 바로 진짜배기 흩어진 열두 지파 이스라엘의 본래의 모습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제가 여러분 이해됐다고 이만큼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시 할게요.


유대인의 생각하고 야고보가 생각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다. 이 주 개념은 시편 110편에 보면,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고 있어요. 그래서 어쨌든 간에 축복 받고 저주는 안 받으려고 애쓰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주님께서 일을 시켜서 율법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켰습니다.


야고보가 예수님의 형제로서 또는 제자로서 알게 된 것은 뭐냐 하면, 우리 형님이 또는 우리 주님께서 주의 자리에 앉았다는 이 말은 우리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멸망당할 이 사람들, 흩어진 열두 지파를 왜 흩어지게 했는가? 율법대로 이들은 멸망당해야 된다는 것을 비로소 우리 예수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이들이 이스라엘이 전부다 흩어지고 멸망당해야 될 이유는, 이스라엘은 우리 성도를 이야기합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이 멸망당하고 흩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율법의 미완성이 아니라 율법이 온전히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보는 겁니다. 율법의 약속대로 예언대로 됐다. 그 예언대로 됐다는 증거가 뭐냐? 예수님의 주의 자리에 올랐다는 거예요.


주의 자리에 올랐으면 주의 자리에서 주님을 드러내는 식으로 율법을 실시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주님이 오게 되면 그동안 인간들은 신이 있고, 인간이 있고 여기에 율법을 지키겠다는 이런 관계, 하나님 있고 내가 있고 나는 율법을 지킨다는 이런 관계가 깨어지고 여기에 주님이 들어가 버리죠. 그러면 주님께서 다 이루신 것이 하나의 결과물로 오늘날 우리가 여기 있다고 되는 겁니다.


율법 안의 내용이 주님께서 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완성되었다는 그 내용으로 율법 안의 내용이 채워진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율법은 주님께서 다루기 때문에 율법에서 행함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행함이 나올 때 축복과 저주가 나오는데 저주받는다는 내용이 옛날 유대인들이 알고 있던 내가 행동 잘못하면 저주받는다고 되지만, 여기 나오는 축복과 저주는 바로 그러한 사고방식, 주님 없이 주님이 연관되지 않고 축복받겠다고 여기는 자체가 오늘날 예수님이 주로 계신 이상은 저주받아 마땅한 태도가 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만약에 지금 유대인들을 만난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는 예수님의 주 되신 자체를 모른다는 거예요. 야고보와 사도 바울이 만나서 이야기하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십자가 이야기하고, 복음 이야기하고, 새로운 피조물 이야기하고, 영생 이야기하고, 언약 이야기하고 하잖아요. 야고보는 말하기를 그건 다 내가 안다는 거예요.


아는데 그러한 모든 것이 안다고 머물러버리면 그건 개인의 주체성으로 끝나는 거예요. 나는 이걸 아니까, 이걸 믿으니까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니까 ‘그래 난 믿습니다.’ 그럼 구원받았지요. 자꾸 구원을 개인의 주체성으로 모아지는 거예요. 개인의 주체성으로 모아지면 그것이 뭐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주 되심의 현재 말씀대로 움직이는 것에 대해서 이것이 그것하고는 관련이 없는 겁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가 다가 아니라 행함이 나와야 돼요. 그렇게 되면 개인의 주체성으로 나오지요.


그러면 율법이라는 것을 내가 여기 있고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을 것이냐, 예수 십자가를 믿어서 구원받을 것이냐? 이럴 경우 어떻게 하던지 간에 개인의 주체성이 살아 있잖아요. 이 십자가 율법을 전부다 예수님의 주체성에, 주님에 묶어버리면 결국 이 인간은 율법의 완성으로서 예수님께서 다 이뤘던 하나의 결과로써 나온다 말이죠. 나와 버리면 주체성에서 벗어나서 그 자체가 율법이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는 하나의 도구로써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 야고보의 이야기입니다.


야고보가 요한복음과 어떻게 유사한지를 요한일서 3장 17절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그 다음에 18절.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것을 사도 바울의 복음을 오해한 사람 같으면, ‘나는 진리가 자유케 한다고 해서 기분 좋을 줄 알았는데 예수 믿으면 구원받을 줄 알았는데 야고보뿐만 아니고 요한은 이 양반 왜 이렇게 하노?’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뭐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러면 그 사람의 문제점이 뭐냐? 뭘 염두에 둡니까? 내가 구원받았다는 개인 주체성을 아직도 포기 못하고 있는 거예요. ‘나 구원받았잖아.’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교회도 구원받기 위해서 나온 거예요. 이것은 애초의 율법 정신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 야고보 이야기입니다.


율법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일하느냐가 관심사지, 내가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그렇게 물었다가 멸망당한 것이 이스라엘, 옛날 이스라엘 그런 식으로. 그게 바로 세속적이고. 하나님의 뜻은 관심 없이 주님을 마음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고 사실은 자기가 자기 사랑하는 것밖에 안 되니까 그거는 마음으로 정성으로 다 퍼부어도 주님은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속아 넘어가지 않을 진짜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네 속에서 움직이는 하늘에서 온 은사가 지혜가 있으면 그걸 내놔보란 말이죠. 칭칭 감겼으면 칭칭 감긴 것을 내놔보란 말이죠. 머리 감고 손목 감고하지 말고 그런 건 유대인들이 하는 짓이고. 그냥 말씀이 살아서 사랑으로 펄펄 나와 보란 말이죠. 그 다음에 나와 보면 또 문제되는 것이 나오면 측정은 누가 합니까? 목사가 합니까? 캘빈은 목사가 한데요. 목사가 자기도 못하는데 뭘 해요.


여기선 그게 나오면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확정짓는 것이 아니고 하여튼 너는 구원받았어. ‘목사님. 이런 게 나왔는데 구원받았죠?’ 그걸 목사한테 묻는 게 아닙니다. 누가 구원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그것 자체에 대해서 신경 뚝! 그걸 신경 안 쓰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란 말입니다. ‘목사님. 저 구원받았어요, 안 받았어요? 행함이 또 필요하다고요. 혀로만 하지 말고. 행함, 진실함. 그러면 저 구원받은 것 맞지요?’ 그렇게 나오지 말라니까.

그러니까 믿음에다가 행함을 첨부해서 야고보대로 이러면 진짜 구원받았지요? 그걸 누구한테 묻습니까? 그걸 왜 물어요. 하나의 로보트가. 로보트가 자꾸 자기 돌아보면 로보트가 아닙니다. 괴물입니다. 그건 완전히 귀신이에요. 그런 식으로 하면 귀신도 그런 것 안다 이 말이죠.


야고보나 요한일서에서 하는 것은 인간의 주체성으로 구원받느냐 하는 것은 이미 사도 바울에서 다 아는 이야기니까 이제는 내가 구원받느냐, 네가 구원받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뭔가 나오게 돼있다니까. 그냥 발산하게 돼있다니까.


여러분 해를 보고, ‘더 세게 밝혀라.’ 그러면 태양이, ‘그래 알았어’ 하고 밝아집니까? 달보고, ‘스위치해서 밝게 해봐.’ ‘알았어’ 하고 달이 스스로 조절해서 할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달은 그냥 해한테 햇빛 받아서 발산할 뿐이잖아요. 그게 바로 오늘날 성도라는 겁니다. 거기다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하고 끼어들어가느냐 말이죠.


그 예가 야고보서 2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 나오죠. 기생 라합이 행함을 보여줬습니다. 무슨 행함입니까? 참 이런 게 어려워요. 율법이라는 것은 우리가 알기는 모세 언약부터 율법으로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야고보는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한 것,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 백성의 정탐꾼을 숨겨준 것 이게 다 율법에 해당이 돼요. 하나님 뜻에 해당이 됩니다.


해당이 되면 이 사람들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지시를 받아요. 아브라함은 주 예수를, 그때는 예수님이 아니죠. 하여튼 예수님이 살아계시지만 믿지요. 영광의 주를 알고 있고, 기생 라합도 영광의 주를 알고 있다는 겁니다. 야고보가 그렇게 이야기해요. 영광의 주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능력이 임해서 나왔다는 거죠. 나왔는데 이것을 가지고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나 인간들이 원하는 율법의 진짜 행위에 해당되고, 순종에 해당되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주님의 능력으로서 아브라함을 사용하고, 기생 라합을 사용한 것은 이 세상에서는 순종이고 행함이 된다는 겁니다.


이게 아까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 안에 사랑이 포함됐다는 것을 언제 압니까? 미녀가 야수를 사랑할 때 비로소 껍데기는 야수라도 속에, 참 그건 몰랐지. 안 왕자님이 있는 걸 몰랐지. 하여튼 야수라도 왠지 사랑하죠. 오늘 주제네. ‘왠지’ 왠지 주님이 사랑스러울 때는 야수가 됐던, 벙어리가 됐던 상관없이 사랑하니까 비로소 야수 틀을 벗어버리고 진짜 멋진 왕자님이 나왔듯이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이 왠지 하나님 뜻에 움직이다 보니까 순종이 되고 행함이 된 거예요.


이게 바로 현재 사도 바울,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로 모든 걸 다 아는 입장에서는 아직도 내가 구원받았지요? 이러니까 행함 나오니까 행함대로 해주겠습니다. 구원받았지요? 어려운 사람 말로 혀로 하지 않고 돈 내서 고아를 돌봤으니까 믿음+행함을 첨부했으니까 진짜 보증수표 맞지요? 라고 아직도 자기 주체성에 신경 뚝! 신경 쓰지 말란 말이죠. 그거는 사랑도 아니고 행함도 아니고 순종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을 구약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했던 겁니다. 그런데 자기 주체성에 의해서 야고보에 의하면 위로부터 지혜가 없었기 때문에 땅에 있는 욕심에 의해서 대하다보니까 그들은 그냥 세상과 짝할 수밖에 없었고 진정한 율법을 지킬 수가 못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제 서론 뚝. 조금만 하고 쉽시다.


야고보에서 위로부터 오는 지혜와 그 다음에 세속적인 걸 구분해요. 왜냐하면 지혜는 첫째, 위로부터 오고, 두 번째는 구조적이죠. 이 구조적인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흩어진 열두 지파를 이용한다 했지요. 이쪽 세속적인 것은 혀로만 아까 이야기한 귀신들도 믿는 믿음을 주장하고, 위로부터 오는 것은 행위로 보여주죠.


그런데 야고보서 할 때 우리가 여기에 있으면, ‘목사님. 저는 믿음으로 하지 않고 행위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야고보서 해석이 또 틀려요. 우리를 어디다 집어넣느냐 하면, 우리의 주체를 없애버리고 우린 여기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의 행위로 둘둘 감겨있어요. 감겨 있어서 여기서 뭘 찾을 수 없느냐 하면, ‘나는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를 찾을 수 없어요. 이 자리에 가면 너는 위로부터 믿음을 받았으니 이제는 너는 세속에서 말하는 믿음과 세속적인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행위를 보이는 사람으로 순종하는 사람으로 사용한다는 겁니다.


그게 야고보서 마지막 5장에 엘리야가 나오죠. 엘리야가 기도했더니만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죠. 그걸 뭐로 보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드러나는 순종이고 행위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엘리야는 순종 행위 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래야만 되는 거예요.


바알과 아세라가 제단해서 자기를 찌르면서 할 때 엘리야는 그냥 하나님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근데 그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순종 잘하잖아. 이게 바로 내가 원했던 행위야.’라고 주께서 믿음을 받은 사람은 그렇게 다뤄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사람은 뭘 아느냐 하면, 저런 것이 세속이라는 걸 충분하게 아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 믿음을 받은 사람은 구조적으로 무엇이 위로부터 오는 것인지, 무엇이 세속적인 것인지 그걸 구분하는 눈이 열린 사람이 야고보서에서는 흩어진 열두 지파라는 겁니다. 참 쉽죠.


새삼 행위에 의해서 구원받을 생각은 아예 이미 그런 시절은 끝난 거예요. 주님이 계신 이상은 뭘 하면 구원받습니까, 뭘 어떻게 안 하면 저주받습니까? 저주와 축복이란 개념은 완전히 없는 거예요. 다루어지는 개념밖에 없는 겁니다. 저런 걸 가지고 세속이라 하는 거구나. 하는 겁니다.


1장 2절에 봅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게 말이 안 돼요. 시험을 만나거든 그러니까 힘든 일을 만나거든 ‘기뻐하라’죠. 그러니까 이거는 여러분 가운데 스물네 시간 가운데 혹시 어려운 가운데 기뻐하시거든 그것은 위에서부터 온 것이니 내가 주체가 되어서 내가 행위를 발휘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아직도 구원개념에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주께서 내가 뭔데 이렇게 다루십니까?’ 이렇게 돼야 돼요. 남들 같으면 비난하고 원망해야 될 자리에 시험받을 때 왜 내가 즐거워해야 됩니까?


그리고 난 뒤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여기 4절에 보면,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주체가 누구죠? 위가 주체가 돼요. 왜? 주님께서 모든 율법을 다 이뤘기 때문에. 다 이룬 율법을 내가 이루지도 못한 것을 내 것처럼 집어넣어버리는 겁니다. 칭칭 감아버려요. 집어넣는다는 말은 사도 바울 개념이니까 사도 바울은 성령이 와서 집어넣고,


구약에서는 거울 보듯이 항상 구조적으로 나는 어떤 구조에 레이저 광선 속에 포함돼있는 율법 속에 갇혀있어서 율법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요. 우리가 밥을 먹든지 오줌을 누던지 뭘 해도 항상 그 자리에 누가 있습니까? 우리 곁에는 세속과 위로부터 오는 은사가 항상 그 구조에 같이 있어요.


만약에 축구를 한다. 상대방이 반칙 들어온다. 저게 세속이구나. 그런데 나는 다른 선수가 욕했다 해서 머리 까진 선수 지단이 박았잖아요. 저게 세속이구나. 자기는 박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안 박더란 말이죠. 심판이 알아서 퇴장시키겠지. 이러고 마는 거예요.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뻐하라.


모든 순간에서 말씀이란 구조에서 우리는 한 발자국도 성도는 죽을 때까지 안 벗어나는 거예요. 계속해서 이게 위에서 오는 거고, 이게 바로 세속이구나. 라는 것을 보는 그 사람들이 흩어진 열두 지파입니다. 그게 야고보에요. 사도 바울 다 안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 사도 바울을 문자로 보면 그게 뭐가 된다? 자칫하면 나의 주체성으로 굳어져버리면 이것은 아주 위험한 게 되죠. 그래서 그 용어들이 하나도 여긴 없어요.


그 다음에 9절에 보면,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미쳤나.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 말씀으로 또 구원받으라고 돈 깨나 있는 사람이 부족합니다  이래 나오면 때리고 싶어. 그냥 성질대로 살아. ‘나 부족합니다.’ 이게 더 미워. 목사들 성경책 옆에 끼고 강단에서 부족합니다. 할렐루야. 목소리 깔지 말고 네 목소리 내. 그게 더 미워요.


손양원 목사가 자기 아들 죽고, 살인자를 양자하고. 그러지 마세요. 제발. 속이 울렁거려요. 그냥 사람 죽였으면 양자하지 말고 교도소 보내면 최고입니다. 교도소 보내서 ‘예수 믿으라’ 하면 이게 최고에요. 양자 삼아서 어떻게 하고, 그거 순종 아닙니다. 그거 행위 아닙니다. 혀로만 입으로만 하지 말라 해서 집 팔아서 고아원 방문하고. 그냥 성질대로 사시면 성도는 어떤 경우라도 율법의 구조의 완성에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 증거가 뭐냐? 이게 세상이고, 저게 위선이고, 이런 게 진실함이라고 깨닫게 됩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풀의 꽃 같이 사라짐이라. 11절에 나가면, 모든 것은 다 말리우고 꽃이 떨어져도 세상 것은 다 사라지고. 제가 이야기하는 야고보서의 특징은 뭐냐? 세속의 운명과 위에서 보는 운명의 차이점을 이야기한 겁니다.


그 다음에 16절.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것”은 다 어디서부터입니까? 위로부터죠. 그러면 ‘속지 말라’ 하는 것은 어디에 속지 말라는 겁니까? 위로부터 오지 않는 땅에서 그냥 있는 것에 대해서 마음 두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평소에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이 땅에 것만 추구하고 있는데 희한하죠. 세상 것에 마음 두지 말라는 거예요.


이걸 인간의 힘으로 세상을 끊을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그런데 위로부터 오는 지혜가 오게 되면 내가 평소에 추구한 것이 위에 것이 아니고 세상 걸 추구했구나를 안다 이 말입니다. ‘목사님. 그걸 모르면 어떻습니까?’ 모르면 그거는 성도가 아니기 때문에 물을 필요가 없죠. 내가 알아서 구원받는 법은 없어요. 하여튼 위에서 온 사람은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칭칭 감겨있는 율법의 행함으로 나타나는 거지, 어떻게 내가 율법을 지켜서 위를 쳐다볼 그건 없어요. 그냥 티내는 것밖에 안 되는 위선입니다. 소용없고.


위로부터 오는 게 아니고 세상 것은 다 섞은 것이구나를 알게 되면 이미 구원받은 사람 맞는다는 뜻이다 이 말이죠. 그런 사람이 만약에 뇌물 받는다. 그러면 찝찝하죠. 내가 받아서 뭐 할 건데. 오만 불 봉투에 넣고 갔는데 내가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모르죠. 이런 것이 바로 위에서 은사를 받은 사람은 저걸 받아 처먹으나 안 먹으나 내가 사는 것은 주께서 오는 은사인데 내가 저기에 대해서 영향 받을 필요 없다는 자유함이 오는 거예요.


어디 나오느냐 하면, 1장 25절 다같이 읽어볼까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이게 바로 사도 바울에서는 말이 안 되죠. 사도 바울에서 율법이라는 것은 오히려 속박케 하기 위해서 우린 율법 아래, 우리를 죄 아래 두기 위해서. 여기선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란 말이죠.


이게 사도 바울하고 이미 차원이 다르잖아요. 사도 바울은 주체가 문제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십자가는 예수님 홀로 죽었습니까, 같이 죽었습니까? 같이 죽었기 때문에 같이 죽었다는 주체가 등장해야 돼요. 십자가라는 것은 ‘너 때문에 죽었어.’ 널 이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율법이 가미되어서 우리가 갑자가 죄인이 돼야 돼요. 저주받은 자가 되어야 비로소 십자가와 저주받은 자를 껴안고 같이 죽었다고 할 때 우리는 주와 함께 죽고, 부활될 때 같이 살아나게 되는데


야고보 같은 경우에 관심사가 우리가 아니고 율법에 있어요. 율법이 어떻게 우리를 해방케 하는가, 자유하게 하는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우리를 사용하게 되죠. 그 자체가 우리가 누구한테 속박되면 그게 자유라는 겁니다. 스스로 인간이 되려고 하면 힘든데 누가 바구니에 담겨서 살게 되면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되잖아요. 문제는 자기가 하게 되면 자기가 힘들지만 옆에 조수석에 앉아 가게 되면 자유 아닙니까.


율법이 우리를 구원받게 한다면 우리는 우리 속에서 뭐가 나옵니까? 나는 이렇게 모든 율법의 완성이 내 몸을 통해서 발산된다. 이것만 조수석에 앉아서 발산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자유하냐 말이죠. 이걸 주체로 생각한다면 내가 해야 되기 때문에 힘들지만 율법이 나로 하여금 행하게 한다면 그것만큼 자유로운 게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 야고보서에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한 말씀이 너로 하여금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한다면 너는 이미 흩어진 열두 지파고 이미 주님으로부터 믿음을 온전하게 받았다는 증거란 뜻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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