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지혜라는 인물 1402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7. 22. 11:42
2014-02-20 22:21:57조회 : 1396         

[14 대구강의] 잠언서1 - '지혜'라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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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구득영 (IP:203.223.97.152)

[14 대구강의] 잠언서1 - '지혜'라는 인물

                                                            14,02,10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복음으로 본 잠언' 이라는 보조교재를 가지고 사용하면서 강의를 하겠는데, 이 잠언서는 서로 짧은 문장들이 붙어있기 때문에 스토리도 없고, 서론도 없고, 그래서 한 문장을 봐도 전체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또한 전체를 봐도 하나로 묶을 수 없이 끊어진 것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잠언서를 주제별로 분류를 해보았는데, 잠언서에서 반복이 되면서 자주 등장하는 것끼리 모아보았는데 말이다. 물론 이 잠언서가 세상 전체를 모두 다루기는 하지만, 그래도 테마별로 중요시하는 것이 따로 따로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잠언서가 있다면, 이것을 이렇게 비슷한 것끼리 모으고, 거기서 또 비슷한 것끼리 모으고 하면, 그러면 결국에는 최종적인 것이 나오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오늘 보조교재가 그렇게 분류를 시켜본 것인데, 즉 예선전, 준결승전, 결승전,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잠언서가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잠언서를 보다 알기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말이다.

◈ 본론 - 선한 자에게 확정된 지혜 !!

먼저 보조교재부터 설명하고 본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는데, 그러니 이 보조교재를 집에 두지 말고 가지고 나와서 어떻게 분류가 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전체적으로 분류된 주제가 여기 보조교재 2페이지부터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본론 - 선한 자에게 확정된 지혜'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첫 번째로 뽑아낼 수 있는 것이, 잠언서에 나오는 여러 가지 교훈들 가운데서 '지혜' 라는 분, 그것을 그룹으로 뽑아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일단 여기 교재에 나오는 그 분류를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녹취자 - 목사님, '지혜'는 성격상 분류의 대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교재도 그런 식으로 차별되어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말입니다.)
 
* 0. 지혜에 대해서
* 1. 자식과의 관계
* 2. 종의 관계
* 3. 아내와의 관계
* 4. 친구와의 관계
* 5. 이웃과의 관계
* 6. 재물관리
* 7. 명예
* 8. 장수
* 9. 사업 경영
* 10. 왕과 백성
* 11. 음녀
* 12. 복
* 13. 저주
* 14. 가난한 자와 부자의 형편
* 15. 구제
* 16. 거만한 자와 지혜로운 자의 차이
* 17. 어리석은 자
* 18. 게으른 자
* 19. 부지런한 자
* 20. 의인과 악인
* 21. 기도
* 21. 마음 다스리기
* 22. 생명(목숨)
* 23. 보증금지

◈ 지혜, 지혜자 → 지혜 !!

지금까지 한 것을 예선전이라 보고, 이것을 또 분류해보자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구체적으로 다 나오는 것이고, 그런데 그 다음 준결승전에 가면 추상적이 되어서 '지혜'와 '지혜를 받아야 될 지혜자'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결승전에서는 '지혜'만 남게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지혜'와 '지혜자'로 분류되는 준결승전의 단계에서는 이것이 추상적인데, 여기에서는 그 밑에 예선전에 있는 '지혜'가 업그레이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이 말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나오는 '지혜'도 역시 다시 업그레이드가 되었고 말이다.

◈ 예수님이 곧 지혜 !!

잠언서에는 이 지혜를 지식의 차원이 아닌 어떤 특정한 인물로 보는데, 그래서 신약에 오면, 예수님께서는 이 솔로몬의 지혜를 자기 자신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서 8장에 보면 "태초에 내가 있었다" 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보통 말하는 지혜는 구체적인 산물이나 인물이 아니라 어떤 요령을 말하는데, 즉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는 것을 말이다.

(잠 8: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잠 8: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

그런데 잠언서에서는 지혜는 요령이 아니라, 추상적인 것을 넘어서서 구체적인 어떤 특정이 인물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한 인물이 되어버리면 "이 세상은 지혜로 만들었다" 라고, 그렇게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을 지혜롭게 만들었다" 라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되시는 분이 자신의 지혜를 담아서 이 세상을 창조했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최종결승에서 지혜가 나왔는데, 그러면 준결승에서의 지혜자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지혜를 받은 자를 지혜자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고 말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지혜를 받는 자들이 곧 이스라엘 백성들, 즉 천국에 가는 택한 백성들이라는 것이다.

◈ 에덴동산은 왜 완벽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렇게 최종적인 지혜인 예수님에 의해서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하면, 그러면 지혜의 반대는 무엇인가? 예를 들어서, 저주나 어리석음과 같은 것이 될 수 있는데, 즉 악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런 저주가 나오고 어리석음이 나오고 지옥이 나오고 사기꾼이 나오고 악인이 나오는지, 왜 그런 것이 나오는지 궁금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마음씨 착한 사람이 자기의 착한 마음을 담아서 완벽한 집을 지었는데, 그만 그 집에서 바퀴벌레가 나온다고 하면, 그것이 완벽이냐는 것이다. 며칠이 지나서 비가 새고, 또 도둑놈이 들어왔다고 하면, 그것이 완벽한 집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은 완전한 분인데, 그런 분이 에덴동산을 만들었는데, 그런데 그 에덴동산에 뱀이, 즉 마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도대체 작업을 어떻게 하셨기에 그런 일이 생기느냐는 말이다. 하나님이 완전하신 분이라고 하면, 에덴동산도 완벽해야 하는데, 마귀도 없고 죽음도 없어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만들었는데, 거기서 그만 선악과를 따먹고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이냐는 말이다. 부실공사가 아니냐는 것이다. 인간을 만들었는데, 그 인간이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솜씨가 기껏해야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느냐는 말이다. 

이 잠언서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의 지혜가 되시는 분이 자기 백성을 지혜자로 만들기 위해서 지혜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혜자는 지혜를 만드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수용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지혜자가 평소에 생각하는 것이, 아까 이야기한 저주와 불의와 같은 것이 마구 나오니, 음녀가 나오고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것들이 말이다.

◈ 이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가?

쉽게 말해서 "이 세상에 악이 왜 존재하는가?"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여, 이 세상에 악한 것들이 왜 존재해야 합니까?" 라고 물을 때, 그 답변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은 "악한 것이 존재해야 한다" 라는 것이다. 답변이 참 희한한데 말이다. "하나님이여, 왜 마귀가 있어야 합니까?" 라고 하니, "마귀가 있어야 한다" 라는 것이 그 답변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마귀도 없어야 하고, 죽음도 없어야 하고, 지옥도 없어야 하고, 물론 사기꾼도 없어야 하고, 그런 나쁜 것은 다 없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완전한 것이 아닙니까?" 라고 하면, 하나님은 "그래서 너희들이 지혜를 모르는 거야. 너희들은 너희 자신들의 편한 것만을 생각한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

이야기를 하다가보니 추상적으로 흐르고 말았는데, 그래서 이 잠언서에 들어가기 이전에 성경말씀을 한 군데를 살펴보고 제가 질문을 하겠는데, 누가 답변을 해보라는 것이다. 잠언서는 일단 접어서 표시를 해놓고, 마태복음 10장 28절을 보겠는데,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다들 무슨 뜻인지 알지 싶은데, 여기서 질문에 들어가는데, 만약에 이 말씀을 3살 먹은 아이에게 했을 때, 그 아이가 무엇이라고 하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저의 질문인데 말이다. 이 말씀을 쉽게 이야기하면, "성도는 이 세상에서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다" 라는 의미인데, 김일성이고 귀신이고 뭐고 간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두려워할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것을 3살 먹은 아이에게 하면, 과연 그 아이가 무엇이라고 하겠느냐는 것이다.

◈ 할아버지는 이 말씀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말을 바꾸어서, 이 말씀을 나이가 90이 넘은 분에게, 즉 숨은 쉬고 있고 말귀는 알아듣지만 거동을 할 수 없는 분에게, 내일 곧 파티마 병원의 영안실에 가야될 분에게 여기 마태복음 18장 28절을 이야기해주고, "할아버지는 이것을 믿습니까?" 라고 한다면, 그 할아버지는 도대체 뭐라고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면 그 할아버지는 "그래, 믿는다. 내 나이 90이 되도록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시달리면서 살아왔는데, 죽는 마당에 무엇이 두렵겠는가? 그래, 나는 믿는다. 지옥에 가지 않도록 믿는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 죽을 때가 되면, 이 세상에 대해서는 겁나는 게 없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3살 먹은 아이에게 말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엄마, 돈까스를 사줘. 나, 배고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게 무슨 말인지를 전혀 모르니 말이다. 그러니 그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곧 지혜의 차이라는 것이다. 지혜의 차이 말이다. 

그러니 지혜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 땅에서 어떻게 어떻게 해서 좀 살아볼까?" 라고 하는 것은 지혜를 전혀 모른다는 말이다. 그런데 90 평생을 살아보니까,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그냥 세월을 보내는 것이지, 아무런 의미도 없고 붙잡을 가치도 없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이 땅에서 더 살 이유를 이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는 말이다.

◈ 내가 어떻게 잘 죽는가?

그러므로 지혜라는 것은 "내가 어떻게 사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어떻게 잘 죽는가?" 라는 것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즉 어떻게 죽어서 하나님과 합류가 될지, 거기에 필요한 것이 지혜라는 말이다. 이것으로 잠언서 강의는 다 끝났다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이 잠언서를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내가 이 잠언서를 이용해서 어떻게 돈을 잘 벌고 풍족하게 사는가?" 라는 것이 지혜가 아니라, 물론 구약은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신약에서는, 이 신약은 새언약으로 모든 언약의 결론으로서 마감이 된다는 것이다.

신약인 마태복음에서는, 즉 마지막에 와서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지옥에 멸하시는, 즉 지옥으로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곧 심판주를 만나게 되니 말이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되던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데, 오래 살던 짧게 살던 말이다. 진짜 본격적인 인생은 죽고 난 다음에 시작되는데, 그게 곧 지혜라는 말이다.

◈ 딸을 시집보내면서도 홍수를 생각해야 !!

어제 낮 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노아홍수 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다가, 그렇게 하다가 갑자기 홍수가 임했다는 것이다. 그게 곧 지혜라는 말이다. 그런데 잠언서를 가지고 대심방을 하면서 들이대게 되면, 전하는 목사나 듣는 교인이나 공통 관심사가 무엇인고 하니, "어떻게 이 세상 문제를 잘 해결할까?" 라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이런 것 때문에 기도하고 난리 브루스를 춘다는 것이다. "지혜를 주옵소서" 라고 하는데, 멋진 남자를 만나는 지혜를 달라는 말인가? 돈을 잘 버는 지혜를 말하는가? 무슨 지혜를 달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 것은 지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지혜자로 살았던 자들이 누구인가? 12사도와 스데반 집사, 그리고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분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이미 우리는 죽었고, 우리 생명은 하늘에 있다" 라고 하는 관점에서 사셨던 분들이 정말로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살았던 분이라는 말이다.

◈ 요한복음 1장 - '이 세상은 어둡다' !!

요한복음 1장에서는 이미 "이 세상은 어둡다" 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마치 영화관에 갔을 때 온 주위가 다 캄캄하듯이,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어두운데 스크린에 밝게 스토리가 전개되는데, 그렇게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어둡게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이야기를 펼치신다는 것이다. 그게 곧 비유인데, 즉 "한 알의 밀알이 죽어서 열매를 맺는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이 세상을 어둡게 만들어놓고 천국 이야기를 함으로서, 이 어두운 세상보다 밝은 천국에 마음을 두게 만드는 영화, 그런 실제 다큐멘터리가 곧 성경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가 의자 밑을 살피고 하면 영화의 흐름이 다 깨지고 마는데, 영화관에 왔으면 영화를 봐야지, 팝콘을 먹는데 신경을 쓰고, 옆자리에 앉아있는 아가씨에게 작업을 걸고 하다가는 영화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서는 "이 세상은 어둡다. 내가 빛으로 왔으매,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둠을 더욱 더 어둠으로 만들어서 빛이 더욱 더 빛이 되도록 하겠다" 라고 하는, 그런 하나님의 전략,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이란 말이다. 천국에 가지 않을 사람들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해도 전혀 관심이 없는데, 이 세상에 관심이 있지 말이다.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 지혜는, 이 땅에 와서 분양이 !!

그래서 우리가 잠언서를 공부하면서, 이렇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왔을 때, 지혜, 자식, 종, 아내, 등등 말이다. 지혜가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는 것이 잠언서 8장에 나오는데, 그러니 "지혜라는 생명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하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그 지혜가 곧 생명이기 때문에, 그 지혜가 주어지게 되면, 그 지혜는 이 땅에 와서 분양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분배가 되는데, 다양하게 말이다.

(잠 8:34)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잠 8:35)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예를 들어서, 폭죽을 쏘면 어떻게 되는가? 올라갈 때는 하나가 올라가지만, 그것이 터지면 그야말로 온갖 색깔들이 모두 나오면서 터진다는 것이다. '펑', '펑' 하면서 밤하늘을 수놓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지혜가 '펑' 하고 터지게 되면, 그 안에서 튀어나오는 그 하나하나가 다 생명의 매개체로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말이다.

◈ 자녀들아, 지혜를 배워야 한다 !!

이런 지혜를 받는 사람을 '지혜자' 라고 했는데, 조금 전에도 언급했지만, 결승전 이전의 준결승에서의 '지혜'와 '지혜자' 라는 말이다. 그 지혜자가 구체적으로 이 잠언서에서는 왕의 자식이 되는데, 그래서 "자녀들아, 지혜를 배워야 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거늘" 라고 하면서 말이다.

(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지혜를 배워서 살아라" 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주신 그 지혜 자체에 생명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폭죽이라고 보면 되는데, 그렇게 모아져서 불꽃놀이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명이 터트려지도록 모여있다는 말이다. 그런 지혜가 구체화되는 것이 우리의 각 생활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 역시, '막 살아라' !!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 유명한 "막 살아라!" 라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막 살게 되면, 이미 지혜가 있는 사람은 막 살아도, 거기서 지혜가 펑펑 터지면서 생명이 나오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지혜는 천국에 가는 백성에게만, 즉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이방인들에게 하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자들에게만 유효하다는 것이다.

이제 잠언서 1장 1절을 보자.

(잠 1: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여기에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런데 다윗은 다윗 본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윗을 만드는 분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즉 다윗은 그림자인데, 여기서 '그림자' 라는 것은 실체가 따로 있다는 의미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컵이 있으면 이 컵에 조명을 비추면 어떻게 되는가? 그림자가 생기는데, 그것이 바로 그림자라는 말이다. 바로 이 그림자가 다윗이고 컵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고 말이다. 

◈ 불교에는, 결국 지옥은 없어 !!

그런데 불교에서는 본인들이 곧 그림자임을 모르는데, 자기들이 마치 실체인 것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을 져야하는데, 도를 닦고 착한 일을 하면 해탈이 되어서 극락생활을 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 세상에서 개판으로 살면 그 업보로서 고생을 좀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결국 불교에는 지옥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세상에서 잘못하면 무시무시한 지옥에 가지만, 거기서 아무리 고생을 해도 다시 태어나면 조금 더 편안한 자리로 배치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극락으로 가는데, 아무리 그 시간이 길다고 해도, 억만 겁을 돌다가 보면 결국은 해탈을 하게 되는데, 거기서는 다시 태어나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말이다. 그러니 지옥은 결국 없는 것인데, 즉 모든 인간은 다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불교에는 이런 기막힌(?) 희망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 하지만, 지옥에 갈 사람들이 있어줘야 !!

하지만 복음은 그렇지 않은데, 복음은 주님께 대드는 자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내어서, 그렇게 대드는 자가 있음으로서 주님의 주되심을 드러내는 것이 복음이란 말이다. 즉 지옥에 갈 사람들이 있어줘야, 그렇게 지옥에 간 사람을 벌하시는 주님이 따로 계신다는 것, 즉 심판주가 따로 있다는 것을 부각시켜서, 이 세상은 주님을 위한 세상이지 결코 인간을 위한 세상은 아니라는 것을 언급하신다는 것이다.

인간 중심의 세상이 아니라, 인간을 벌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주님 중심의 세상임을, 그것이 실제임을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십자가 사건이, 즉 어떤 분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남으로 말미암아서, 인류 역사상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다. 사람은 죽으면 끝인데, 그런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다.

아예 죽을 것 같으면 죽지도 말아야 하는데, 영원히 사실 분을 일부러 사람들에게 맞아죽게 만들어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세계관이 그 죽음 안에 갇혀있다는 것을 공개적이고 노골적으로 이 세상에 까발리는 작업을 수행하시고, 그 속에서 홀로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그분이 이 세상의 중심이었고, 그분이 곧 지혜였음을 알려주신다는 말이다.

◈ 이스라엘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그림자 !!

그게 복음인데, 그런데 이방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인간중심이기에, 신도 인간을 위한 신이라는 것이다. 어제 그런 설교를 했는데, 그런데 이스라엘은 무엇인고 하니,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위한 하나의 그림자라는 것이다.

여기에 이렇게 사람들이 살고 있고, 거기에 산이 있다고 하면, 해가 산 위에 지게 되면 무엇이 길게 늘어뜨리게 되는가? 긴 그림자인데, 물론 여기에 사랑하는 님이 있으면 님 그림자이고 말이다(ㅋㅋ). 바로 이 그림자가 이스라엘이고, 그 앞에 있는 실체가 장차 오실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는 것은, 실체가 가까이 왔다는 말이다. 즉 우리로 하여금 그림자지게 만들었던 그분이 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회개하라는 말이다. 바로 그 이스라엘 중에서 '다윗' 이라는 인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물됨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 다윗언약의 다윗과, 할례가 없는 골리앗 !!

그리고 이 다윗은 그 위에 올라가게 되면 다윗언약인데,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을 보통 평범한 인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주 특수한 인물로 만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세운 인물이 바로 다윗이란 말이다. 언약을 보여주기 위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다윗이 싸움을 누구와 했는가? 골리앗과 했는데, 어디 골리앗이 만만한가? 오히려 골리앗이 보기에 다윗이 만만하다는 것이다. 다윗은 어리지만, 골리앗은 어른도 함부로 대들 수 없는 골리앗인데, 그런 골리앗과 다윗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싸움을 붙이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골리앗이 보기에 다윗이 만만하지만, 하지만 다윗이 보기에 골리앗이 만만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윗이 보기에 골리앗은 덩치 값도 전혀 못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할례가 없다는 것이다. 즉 골리앗은 할례를 받지 않았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골리앗은 장차 오실 분의 그림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림자 바깥에 속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그림자를 따라가면, 이 그림자를 누가 관리해주겠는가? 그림자의 실체이신 분이 관리해주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의 그림자가 된 다윗은, 이 싸움은 자기 싸움이 아니라, 자기를 그림자로 만든 하나님의 싸움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삼상 17: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삼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 마귀 - '너는 독자적이야' !!

그러므로 성도는 독자적으로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만 활동하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실패나 성공을 염려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려움을 주는 것은 마귀인데, 마귀는 항상 인간을 독자적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이다.

"예수여, 니가 돌을 떡이 되게 해라. 여기서 뛰어내려라. 나에게 절하면 모든 부귀와 영화를 주겠다" 라고 말이다. 이것은 예수님과 아버지가 떨어져 있을 경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인데,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다. 나와 아버지는 떨어진 사이가 아니라 같이 있는 사이인데, 그러니 지금 니가 하나님의 뜻에 위반이 되는 짓을 하라고 해도, 나에게 먹히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는 왜 그렇게 나오는가? 일반 사람들은 모두가 죄가 왕 노릇을 하기 때문에, 주님과의 관계가 다 끊어져 있어서 그런 것이 먹혀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마귀는 사람들이 깜짝 깜짝 놀라게, 그렇게 경기가 들게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 우리는 전화벨 소리에 왜 놀라는가?

지금 우리가 이렇게 성경공부를 하고 있지만, 자기 휴대폰에 벨 소리가 울리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집에 또 무슨 일이 생겼나?" 라고 하면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긴장해서 받아보면 택배기사가 "물건을 어디에 둘까요? 경비실에 맡길까요?" 라고 하는데 말이다(ㅋㅋ).

그렇게 사람들이 깜짝 깜짝 놀라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사실상 우리의 인생은 없고 주님의 인생인데,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자기 인생이라고 오해를 하니 그렇다는 말이다. 자기 인생이라고 여기고, 자기가 챙기려고 하니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언제 스데반 집사님이 놀랐는가? 사도바울이 그렇게 경기를 일으키면서 살았는가? 밧모섬이 갇혀있던 사도요한이 놀랄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사람 때문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계시를 주시니 엎드릴 뿐이지, 사도요한은 놀랄 일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다윗은 남이 보았을 때는 개인이지만, 정작 다윗 본인으로 보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라고 하는 것은, 다윗 시점에서 보면 장차 오실 다윗의 자손까지 무엇으로 이어지는고 하니, 지혜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즉 지혜가 교량이 되어서 연결된다는 말이다.

◈ Bridge over troubled water ♪

사이먼과 가펑클이 부른 'Bridge over troubled water' 라는 노래가 있는데,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라고 말이다. 그렇게 뭔가 연결을 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 상태라는 말이다.

놀이동산에 가보면 다음과 같은 놀이기구가 있는데, 이렇게 가운데 막대기가 있으면 여기에 매달려서 빙빙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이 이렇게 가운데 있으면 우리가 매달려서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 광주로 말이다. 끈이 좀 긴 사람은 미국에도 가고 말이다. 그렇게 주님이 빙빙 돌린다는 말이다.

그렇게 주님의 종으로서 이 세상 그 어디에서 살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를 받은 지혜자의 모습이란 것이다.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지혜에 충만할 것이다" 라는 것이 에베소서에 나오는데 말이다. 잠언서는 한 구절, 한 구절 살펴봐서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데, 먼저 전체를 보고 세부에 들어가야 그 윤곽이 나온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 17절을 보자.

(엡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 내 안에 주님이 계신다 !!

여기에 나오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 이란 무엇인가? 성령인데, 우리가 성령을 받게 되면 다윗시대의 지혜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새언약, 즉 모든 지혜가 다 드러난 지혜의 종결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지혜가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내 안에 주님이 계신다" 라고 하는,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내 안에 생명이 있다. 내 안에 천국이 있다"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하나의 껍데기이고 주님의 그림자이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팔과 다리, 손가락, 발가락이라는 말이다. 주님에게 난 뽀로지, 주님에게 난 털,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아무튼 몸에 붙어있어서 떼고 싶어도 도저히 뗄 수 없는, 손가락이 따로 떨어져서 움직일 수 없듯이 말이다. 그렇게 붙어있기 때문에, 그 어디라도 다 주님의 몸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금요일에 울산에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우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라고 했는데, 우리는 열심히 움직인다고 움직이는데, 그런데 주님이 보시기에는 같은 몸에 붙어있기에, 우리가 아무리 움직여봐야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온 천지를 다 돌아다니고, 어떤 사람은 사업체도 여러 개를 운영하면서 열심히 사는 것 같지만, 아무리 그렇게 움직여도 맨 그 자리가 그 자리라는 말이다. 즉 제자리 뛰기를 하다가 힘이 빠져서 결국에는 죽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고정되어있는데, 확정되어있고 말이다.

그것을 '확정일자' 라고 하는데, 왜 아파트 전세계약을 하면 그것을 받아야만 하는데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 날리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 확정일자를 두고 '성령의 입맞춤'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고객님, 1500만원 ??" 이라고 하는데, 이런 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주님께서 이런 일을 시킬 리가 없다는 것이다.

◈ 마귀 - '바늘귀를 스치고 지나가라' !!

그래서 잠언서에 보면 음녀가 무엇인고 하니, 실체가 아닌 것을 실체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란 말이다. 예를 들어서, 실이 바늘귀를 제대로 통과하면 하나가 되는데, 그런데 그 바늘귀를 통과하지 않고 비슷하게 지나가게 되면, 그런데 멀리서 보면 마치 통과한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마귀가 바로 이러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것이 생명나무를 통과해야만 하는데, 그런데 잘못 겨냥해서 어긋나게 되었을 때, 그것을 죄라고 한다는 것이다. 빗나갔을 때 말이다. 천국에 골인이 되지 못하고, 지옥에 골인을 하면서 마치 천국에 골인한 것처럼 위장하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디를 통과해야 하는가? 십자가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런데 십자가를 빼고 고상함과 거룩함을 아무리 강조해도, 그것을 실이 바늘귀를 통과하지 못한 것이란 말이다.

연세가 많은 분들은 그 느낌을 알지 싶은데, 바느질을 전혀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해도 바느질이 안 된다는 말이다. 부자가 천국에 가려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해야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이다. 그 통과지점은 십자가인데 말이다.
 
◈ 잠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알려주기 위한 그림자 !!

일단 이렇게 이야기하고 여기서 잠언서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고 하면, "잠언은 다윗시대에 준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알려주기 위한 하나의 그림자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잠언의 내용에 보게 되면, 잠언대로 살아야할 우리 모두도 역시 그림자인데, 즉 장차 오실 예수님의 그림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악인과 선인이 같이 섞여서 양쪽이 다 그리스도를 보여준다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보낼 자는 지옥에 보내고, 그리고 천국에 갈 자는 천국에 보내는, 그러니 주님은 천국에만 보내는 주님이 아니라, 지옥에 갈 자는 반드시 지옥으로 보내시는 주님이라는 것을, 그것을 선인과 악인이 함께 살게 함으로서, 의인은 그것을 혹독히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아하, 저것이 바로 영생과 관계가 없는 것이구나" 라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지혜인데, 지옥에는 가는 이유를 아는 것이 말이다. 그런 것을 성도의 삶 속에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이 많은 잠언서의 말씀을 그 누가 다 지킨다는 것인가? 엄청나게 많은데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다 지킨 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분이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다 지켰다는 말이다. 그렇게 다 지킨 결과가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의 죽이심인데, 그리고 부활이라는 말이다. 즉 그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잠언서는 지혜를 보여주는 것인데, 그 지혜는 "나는 그림자입니다" 라고 하는 사실을 더욱 더 확신케 만드는 것,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내가 이것을 하게 되면 부자가 되겠지" 라고 하면서, 독자적으로 부자가 되고 독자적으로 멋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여, 이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지혜라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죄와는 전혀 상관없이 따로 생명으로 주어진 것인데, 그러니 우리는 뭐라고 해야하겠는가? "죄인인 주제에 감히 생각할 수도 없고, 도저히 끄집어낼 수도 없는 태도와 지식이, 그런데 그것이 저의 몸을 통해서 나왔습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 중에서 하나 예를 들어보면, 하도 많아서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모두 외울 필요도 없이, 필요할 때마다 이것을 보고서 하면 된다는 것이다. 여기 교재 5페이지에 나오는 '아내와의 관계' 중에서, 잠언 18장 22절을 보겠는데,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잠 18:22)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

◈ 아내와의 관계 - '여호와께서 보내주신 아내' !!

여기에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 라고 하는데, 즉 아내를 여호와와 연결을 시킨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그런 남편이 있는가? 자기가 잘나서 만난 것으로 여기지 말이다. 만약에 나이트 클럽에서 만났다고 한다면, 그 나이트 클럽에 감사하면 되는 것이지 여호와께 감사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런데 아내를 여호와께서 보낸 자라고 본다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아내가 더 예쁘고 요리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결코 아내가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땅에 그러한 여자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저는 개인적으로 아직(?) 한 사람밖에 모르는데(ㅋㅋ), 아무튼 여자든 남자든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완전한 여자는 없지만, 아무리 밥을 자주 태우고 반찬을 반찬가게에서 매일같이 산다고 하더라도, 자기 아내는 여호와께서 보내주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 곧 지혜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아내를 대하기를 천사처럼 대하면 그것이 곧 지혜라는 말이다. 천송이라고 여기면 말이다(ㅋㅋ).

◈ 아니, 나 같은 놈에게 이런 아내가?

설령 아내가 바람이 피워서 도망을 가는 경우가 있더라도, 자기에게는 있는 동안에는 "나에게 이런 아내가 있다니,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것이구나" 라고 하면, 그것이 곧 지혜라는 것이다. 물론 그게 평생을 통해서 1초 내지 2초 정도가 되지 싶은데, 그래도 "세상에 나 같은 놈에게 이런 아내가 다 있다니" 라고 하는 것이 곧 지혜라는 말이다.

특히 남자가 감기몸살에 걸렸을 때, 그리고 등이 가려울 때, 그리고 무릎에 눕게 해서 귀를 파줄 때, 그때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마구 밀려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그만 잠이 들고 마는데, 여호와께서 보내주신 아내의 무릎 위에서 말이다(ㅋㅋ).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성경에 아내와의 관계는 있는데 남편과의 관계는 없다는 것이다(ㅋㅋ). 그래서 예수님은 남자가 아닌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이다. 남자란 것은 죄인의 대표가 되었기 때문에, 그러니 여호와께서 도와주지 않으면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 천송이가 우리 집에 파견근무를 왔구나 !!

그러니 아내는 자기가 고른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보내주신 여자가 지금 파견근무를 나와있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다. 즉 천사가 우리 집에 파견근무를 와있다면, 그 사람은 그 천사로 인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미 생명을 얻었기에 그런 생각이 들지만 말이다.

어떤 분은 죽으면서 "아내는 마귀다" 라고 했다고 하는데, 어디 자기 아내만 마귀이겠는가? 모든 사람들이 다 마귀라는 것이다. 물론 자신도 마귀고 말이다. 그런데 마귀인 자기에게 여호와께서 왜 아내를 주셨는가? 생명을 주기 위해서 아내를 주셨는데,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 안목과 시선이 곧 지혜라는 말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완벽한 여자는 없는데, 하지만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 안목과 시선은 여호와께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 솔로몬은, 다윗과 예수님의 브릿지로서 첫 발걸음을 !!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하는 것은, 이러한 것이 참 어려운데 말이다. 1장 1절에서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라고 할 때는, 여기에서 솔로몬을 독자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잠 1: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그러므로 솔로몬은 다윗에게서 만들어졌고, 그 다윗은 다윗언약으로 만들어졌는데, 그러니 솔로몬도 역시 다윗언약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솔로몬은 다윗과 예수님 사이의 교량 역할을, 즉 브릿지 역할로서 첫 번째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는 말이다. 그게 솔로몬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연결하는가? 지혜로 연결하는데, 천지창조를 지혜로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혜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안 되고, "지혜가 누구십니까?" 라고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태초에 만드신 창조자도 지혜이고, 그리고 장차 오실 메시야도 지혜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의심하던 도마에게 직접 찾아오셔서, 자기 몸에 손을 넣어서 확인해보라고 하신 다음에도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에 얻게 하기 위함이다" 라고 말이다.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고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이미 하나님의 일은 개시가 되었다는 말이다.

(요 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 다윗은, 반드시 원수가 있어 !!

그러니 우리가 솔로몬을 이해하려면 먼저 다윗을 이해해야하고, 그리고 그 다윗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다윗은 전쟁을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전쟁을 한다는 것은 자기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적이 있다는 말인데, 즉 원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눈에는 주님의 원수가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돈을 떼먹고 도망을 간 개인적인 원수는 말고 말이다. "아하, 저게 바로 웬수짓이구나. 저게 비복음적인 것이구나. 저게 생명이 아니구나" 라고 말이다. 바로 그런 관점으로 사람을 만나도 만나고, 드라마를 봐도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쟁 개념으로서 말이다. 왜냐하면,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기 때문에 말이다.

◈ 그런데, 주님의 원수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그런데 그런 주님의 원수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이 세상은 누구 중심으로 돌아가겠는가? "나에게 이익인가? 손해인가?" 라고, 즉 "저 사람을 만나서 내가 얼마나 이익을 챙길 것인가? 아니면 손해를 볼 것인가?" 라고 하면서, 항상 자기 중심의 손익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것은 곧 자기 성공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 성공이 따로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자기가 실패할 두려움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성공해도 그 자리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이 공포로 다가오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기업을 하든지, 목회를 하든지, 모든 인간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고 하니, 성공을 하더라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다는 것이다. 그 순간에도 불안하고 초조해하고, 돌아서면 두려움에 떤다는 말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점점 더 증가되는데, 그 어느 순간도 마음 편히 쉬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죽을 때는 몰라도, 그 이전까지는 행여나 자기가 가진 것을 잃지는 않을까 싶어서, 집에 가스를 틀어놓지나 않았는지, 그렇게 항상 자기 소유가 날아가지 않을까 싶어서, 실패를 할까 싶어서 말이다. 성공을 해도 그런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어둠은 늘 같이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입장은 이 세상을 예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보기 때문인데, 그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중심은 미완료라는 것이다. 자꾸만 실패에 쫓기면서 "성공을 해야한다' 라는, 그러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그렇게 실패는 항상 뒤쫓아온다는 말이다.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

하지만 예수님 중심은 무엇인고 하니, 이미 실패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주님께서 승리했기 때문에 말이다.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합력해서 선을 이루기 때문에 실패는 없다는 것이다. 심판도 없고,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 와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것은 우리가 고집이 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고집, 즉 주님이 더 강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즉 우리의 죄보다 주님의 용서가 더 세고 강하기 때문에 말이다. 우리가 하는 그 어떤 짓거리보다도, 그것을 용서하시는 힘이 더 세다는 말이다. 그래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더 넘친다는 것이다.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롬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

제가 봉화에서 생활할 때의 일인데, 바케스에 물을 받다가 그만 그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바케스에 찌꺼기가 좀 있었는데, 그것이 물이 넘치다보니 그만 다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때 제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를 약 3분의 1정도를 읽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로마서 5장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라고 하는, 바로 그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 대목을 읽다가 밖에 나가서 바케스에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아하, 바로 이것이구나" 라고 깨달았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의 그릇이라고 한다면, 그릇에 아무리 죄가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은혜가 죄를 보고 넘치고 또 넘쳐버리면, 은혜가 그렇게 스스로 알아서 하는데 말이다. 과거 아담은 무죄의 상태였지만, 우리는 아예 적극적으로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넘친다는 말이다. 그 무엇을 해도 의가 넘치는데, 그것은 전혀 우리 솜씨가 아니란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잠언의 말씀을 보면서, 자기가 생각하지 못했지만 주님께서 주신 것이 새롭게 새롭게 매일같이 나오는 맛을 우리가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집에 가서 아내를 봐도, 그냥 보통 여자 가운데서 하나라고 여기면 안 되고, 여호와께서 보내셨다고 하는, 그 여호와 요소가 새롭게 넘쳐나야 한다는 말이다. 특히 남편의 경우에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아하, 여호와께서 보내셨구나.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구나. 주님이 일방적으로 내가 선택하기 이전에 선택하셔서, 나로 하여금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어서, 이제는 아내를 통해서 여호와와 함께 사는 식으로 인생을 살게 하시는구나" 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주었으면 참 좋겠는데, 물론 이론이지만, 실제로는 박이 터지게 싸우지만 말이다(ㅋㅋ)..

이상으로 서론부분은 했는데, 이러한 것이 정리되지 않으면 여기에 있는 것이 이렇게 아무리 많아도 진도를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서론을 이렇게 하지 않으면, 또 "목사님, 이런 것을 지키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까?" 라고 하는 엉뚱한 질문이 튀어나오기에 말이다.

하나님이 마련한 멍석은 우리가 치울 수가 없는데, 하나님이 영생을 멍석을 깔아주면 우리는 잠언을 가지고 뛰놀면 된다는 것이다. 마치 아이들이 놀이동산에서 놀듯이 말이다. 그때는 부모가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마음놓고 얼마든지 놀 수가 있는데, 그러니 우리도 안심하고 인생을 막 살면 된다는 것이다.

◈ 교재 - '잠언 속의 그리스도' !!

일단 오늘 프린트를 해서 온 교재는 다했는데, 그래도 다음 시간에도 계속해서 가지고 오셔야 하는데 말이다. 이제는 '잠언 속의 그리스도' 라는 책을 가지고 하겠는데, 여기에 제일 먼저 이렇게 머리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머리말에 그 제목이 '힘' 이라고 되어있는데, 여기가 벌써 10페이지인데, 대장간에서 페이지 수를 늘이려고 꼼수를 둔 것은 아닌지 모르겠는데 말이다(ㅋㅋ).

◈ 힘 - '사람이란 없다. 힘밖에 없다' !!

현대 물리학에서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사람이란 없다. 힘밖에 없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현대 물리학의 결론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에너지인데, 그 에너지가 뭉쳐지면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그 에너지가 헐겁게 뭉쳐지면 아메바가 되고, 조금 강하게 뭉쳐지면 파리나 모기가 되고, 더 강하게 뭉쳐지면 코끼리가 되고, 더 완벽하게 뭉쳐지면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분해하면 다시 에너지로 환원이 된다는 말이다.

인간을 쪼기면 세포가 되고, 그것을 쪼기면 단백질이 되고, 그것을 쪼기면 아메존(아미노산?)이 되고, 그것을 쪼기면 DNA가 나오고, 그것을 쪼기면 분자가 나오고, 그것을 쪼기면 원자가 나오고, 그것을 쪼기면 전자와 핵이 나오고, 그것을 쪼기면 소립자가 나오고, 그것을 쪼기면 쿼크가 나오고, 그것을 쪼기면 힉스가 나온다는 것이다.  

◈ 현대 물리학 - '인간은 태초창조의 운반체' !!

그렇게 빅뱅의 정보가 우리 인간 속에 들어있다는 것인데, 즉 137억년 전에 있었던 우주의 대폭발의 잔재가 인간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 태초의 창조를 운반하는 운반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구는 47억년에 만들어졌다는 것인데, 그것을 진화론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쪼개지면 힘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불교나 동양철학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즉 "모든 것이 기(氣)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고 또한 모아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가 흩어지는 것은 곧 죽음이고, 그리고 모아지는 것은 탄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다.

◈ 하지만 성경은?

하지만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누가 만들었으며, 누구를 위해서 만들었는가?" 라는 것이다. 그게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오는데 말이다. 모든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러니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것을 만들어진 우리 인간은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 대목인데, 만들어진 우리 인간이 거꾸로 소급을 해서 그 만들어진 경로를 파악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 Let it go ♪

제가 어제 그러한 예를 들었는데, 요즘 "Let it go" 라는 것이 유행하는데, '겨울왕국' 이라는 디즈니 만화영화에 나오는 노래인데 말이다. 눈사람이 여름에 하는 놀이가 그리워서 "야, 여름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라고 했지만, 그런데 막상 여름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만 본인이 사라지고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본인이 없으면 여름놀이를 할 주체가 없는데, 주인공이 그만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만들어진 것은, 그 만들어진 것을 찾는 순간 그만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싸우는데, 그때 야곱은 자기와 같은 피조물인줄 알았는데, 그런데 막상 싸움을 해보니 그분은 창조자라는 말이다. 그러면 인간이 창조자를 만났을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면 말이다.

◈ 죽음을 통과한 흔적이 있어야 !!

우리 인간이 창조주를 살아있는 상태로는 만날 수가 없는데, 즉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죽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해골이 나오는데, 그런 해골이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알아보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도 죽은 자가 되지 않고 산 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 앞에 죽음을 통과한 흔적을 가지고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그게 야곱이 자기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그 속에는 누가 있는가? 그림자로서 예수님과 연결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이미 죽었다가 살아난 분의 영이 먼저 야곱 속에 들어가면, 야곱은 죽어 마땅하지만 살아있는 채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물이 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께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는 무엇이 내장되어있는고 하니, 아브라함에게서 나왔던 이삭이 죽었다가 옆 수풀에 걸려있던 양 때문에 살아난, 그런 정보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었다가 살아나지 않으면 그 누구라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다.

◈ 인간의 모든 몸짓은 저주의 몸짓 !!

그러니 죽은 자가 스스로 "내가 어디에서 나왔지?" 라고 하게 되면, 그런 연구하는 몸부림이 더욱 더 그 사람을 죽음으로 가속시키는 페달을 밟는 것과도 같은 것인데, 그렇게 죽음으로 몰아넣고 만다는 것이다. 즉 "죄의 값은 사망이다" 라는 말이다. 인간이 어떤 연구를 한다고 해서, 아인쉬타인이 아무리 연구해도, 그것이 죄가 되고, 그 죄로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하는 모든 몸짓은 저주를 받는 짓인데, "인간은 왜 저주를 받아야 하는가? 죽을 수밖에 없는가?" 라는, 그 이유를 보태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하지만 인간들은 반대로 생각해서, 그렇게 안다는 것이 자기를 살릴 것이라고 여긴다는 말이다.

◈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지혜 !!

세상의 모든 지혜와 학문이 똑똑해 보이지만, 하지만 그것이 통 채로 어리석다는 것이 드러난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전서 1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십자가가 이 세상의 모든 지혜자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하지만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오히려 그들이 어리석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보면 말이다.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인간이 살려고 하는 종교, 철학, 학문, 예술이 결국은 어디를 통과하지 못하는가? 십자가 속에 있는 영생의 세계로 침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일종의 벽치기인데, 자동차를 가지고 무모하게 벽을 들이박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매스컴에 가끔 나오기는 하는데, 자기 가게를 들이박고 한다는 말이다.

◈ 너무나 연약하고 연약한 예수님 !!

그런데 스데반 집사나 사도바울이 남들이 보기에는 무모하고,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 것도 참으로 무모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서 자기를 지키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군병에서 뺨까지 얻어맞는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뺨을 때리고 나서 그들이 뭐라고 하는가? "우리 중에서 누가 당신을 쳤는지를 맞춰보아라" 라고 하는데, 그렇게 농담거리로 전락해버린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얼마나 연약하고 연약하냐는 말이다. 얼마든지 하늘의 천사들을 동원해서 자기를 괴롭히는 로마 군병들을 왕창 다 조지고 박살을 낼 수도 있었는데, 예수님은 분명 그런 능력이 있으면서도 맥없이 그냥 죽어버린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연약하고 연약하게 말이다.

◈ 성도는 죽기까지 이긴다 !!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힘으로 설치지 말라는 것인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힘이 우리 속에 충만하다고 하면,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이 곧 이기는 것이란 말이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데, 즉 "성도는 죽기까지 이긴다" 라는 것이다. 상당히 역설적인 이야기인데 말이다. 복음과 함께 죽음으로서 이긴 자가 된다는 것이다.

(계 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는 힘, 그것은 성령을 받은 성도 이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목회자의 특징이 무엇인가? 목회성공에 결코 목을 매지 않는데, 자기 유명세와 인기에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생계에도 얽매이지 않고 말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살린다고 하셨는데, 그러니 우리가 나대고 설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냥 놀면 되는가? 노는 것도 역시 주님이 시켜서 놀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도바울은 주님이 부지런히 일을 시키니, 자기는 주님의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 나는 무익한 종 !!

그렇게 성령을 받은 목회자나 성도는 날마다 주님께서 일을 시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종이니 말이다. 그래서 늘 생각하는 것이 "나는 무익한 종이다. 나의 할 바를 했을 뿐이다" 라고 것인데, 그런 이야기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눅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그러니 성령을 받은 목사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은 연구를 해서 아는 게 아니라, 그쪽에서 먼저 티를 낸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이제 그만 이야기하고, 어떻게 교회가 부흥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을 연구해야 한다고 말이다. 가만히 있어도 티를 내는데, 즉 "이번에 전도주일을 해서 수 천명이 왔어. 그래서 하늘나라가 확장되고, 이 동네에는 마귀가 다 도망가고 없어" 라는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노아가 몇 명을 전도했는가? 사실은 한 명도 하지 못했는데, 그래도 지금 천국에 가 있다는 것이다. 천국에 가는 것은 마음을 낮춘다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주께서 알아서 하실 문제라는 말이다. 주님이 말씀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믿어진다고 하면, 그렇게 우리가 그 말씀에 붙잡힌 종이 된다고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더 이상 자기 나름대로의 성공과 실패는 의미가 없는데, 여러분도 인생을 살아봐서 알겠지만, 성공을 했다 싶으면 거기에 옥에 티가 있다는 것이다. 기분이 째지려고 하는데, 그런데 꼭 그런 것을 훼방하는 요소가 튀어나온다는 말이다. "오늘 좋았는데, 그만 망치고 말았네" 라고 하도록 말이다. 

◈ 주님, 좋은 날씨를 주세요 ??

알다시피 제 딸이 이번에 결혼을 했는데, 결혼식을 앞두고 몇 주일 전부터 사돈어른이 좋은 날씨를 달라고 그렇게 기도했다는 것이다. 너무 춥지 않도록 좋은 날씨를 달라고 말이다. 그런데 사돈이 그렇게 기도를 열심히 한 효과인지 몰라도 결혼식 당일에 날씨가 따뜻하고 매우 좋았다는 것이다. 제대로 추워야하는데 말이다(ㅋㅋ).

기도를 히려면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할 텐데, 그런데 자기의 일과 관련된, 자기의 위상과 자기의 명예, 즉 아들을 잘 키웠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그저 복음만이 증거되게 하옵소서. 주님이 여기에 계심을 알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하는데 말이다. 왜냐하면, 일을 주께서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즉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말이다.

◈ 생존의 힘, 생명의 힘 !!

이렇게 '힘' 이라고 했는데, 그 힘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는 마귀가 구성하고 펼친 이 세상의 힘인데, 그것은 '생존의 힘' 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잠언서에 나오는 힘은 생존의 힘이 아닌 '생명의 힘' 이라는 것이다. 생존의 힘은 주인공이 자기 자신이지만, 반면에 생명의 힘은 그 주인공이 예수님인데, 우리는 그분의 그림자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형이 되고 이미지가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스타일이 되고 말이다.

그러니 살려고 잠언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살아났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잠언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하, 이런 아이디어로 살아났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이 잠언 말씀 하나 하나를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이루신 분이 따로 계시는구나.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서 그 혜택을 나에게 값없이 주셨구나" 라는 것을 항상 느끼면서 잠언서를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기껏해야 생존인데, 즉 "이왕 사는 것 나의 생존과 나의 명예와 자존심, 나의 이름밖에 모르는데, 그런데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다른 아이디어가 주어져서, 나 같은 인간도 말씀으로 용서를 받아서 살아갈 수가 있구나" 라고, 그것을 감사하면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 이근호 목사가 부정적이라고?

제가 설교를 하고 강의를 하면, "목사님은 너무 부정적으로 하십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 소리를 종종 듣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저의 강의를 들어보니까, 물론 부정적인 것 같지만 하지만 마지막에는 항상 감사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감사가 과연 부정적인 것이냐는 말이다. 그러면 앞에 긍정적인 것을 이야기하면 그 다음에 과연 감사가 나오느냐는 것이다.

그게 아닌데, 부정을 이야기해야 감사가 나온다는 말이다. "나 같이 못난 인간에게 웬 은혜입니까?" 라고 해야 감사가 되는 것이지, "역시 내 뜻대로 잘 되었어" 라고 하면, 그것은 자기 자랑이지 감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감사가 나오려면 앞에 부정적인 게 나와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무엇을 보고 부정적이라고 하면서 시비를 거는지 모르겠는데, 오히려 그런 심보가 부정적이라는 말이다(ㅋㅋ).

여기서 교재 10페이지에 나오는 '머리말, 힘'을 살펴보자.

** 이런 식의 힘의 논리와 구조로서 고착되어버린 이 사회에 구약의 잠언이 끼어들 여지가 있을까? 잠언은 지혜와 지식을 구분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묻게 되는 것이 지혜란다.

(잠 30:4)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러한 고백을 사도행전 8장에서 누가 했는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말이다. 그가 곧 사도바울인데, 그것이 이렇게 잠언서에 나온다는 것이다. 잠언에 수많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은 모두 예선전이고, 최종 결승전에서는 무엇인고 하니,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는 것이다.

(행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 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렇다면 그분이 누구인가? 그분이 곧 지혜인데, 지혜자가 지혜라고 부를 수 있는 바로 그분이라는 말이다. 그분이 천지를 창조하신 그 사나이이고 말이다. 즉 "지혜를 알면 곧 영생이다" 라는 것인데, 그게 잠언서 8장에 나온다는 말이다.

(잠 8:35)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이제 교재 11페이지를 보자.

** 즉 '나' 라는 이름의 힘으로 세상을 살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힘을 쳐다보지 않고 하늘을 보며 사는 사람들의 물음을 통해서 지혜는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세상 것을 쫓는다면 그 어떤 경우에도 천박한 심성일 따름이다. 힘을 빼야 지혜가 보인다. 힘없이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다.

그러니 지혜는 그냥 드러나는 게 아니라, 성도를 붙잡아서 성도로 하여금 자꾸 묻게 만든다는 것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말이다. "저에게 이런 아픔을 주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저를 낫게 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말이다. "하루에 세 끼를 주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말이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물을 수 없는 사람은 뭐라고 하는가? 항상 자기를 향해서,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지?" 라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만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은 지혜와 전혀 끊어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그림자는 아니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본 책은 2008년 8월 4일에서 6일까지 경북(경남?) 가야산 기슭에 자리잡은 가야산 호텔에서 열린 십자가 마을 여름수련회 강의를 녹취한 내용이다. 수련회가 끝나자마자 무더운 여름날 녹취를 하는데 힘을 소진해주신 한윤범, 오용익, 서경수, 최형중 목사님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이 부분이 중요한 대목은 아니지만 큰 소리로 강조해서 읽고 싶은데 말이다(ㅋㅋ). 이것이 2008년도의 것이니, 지금부터 우리가 살펴보면서 그동안 지혜가 얼마나 늘어났는지, 아니면 오히려 지혜가 줄어들었는지, 그것을 한번 알아보자는 것이다.

◈ 1강, 숨겨진 기준 !!

교재 13페이지에 보면 그 제목이 있는데, 스탠다드, 즉 기준은 기준인데, 그냥 기준이 아니라 그 앞에 형용사가 붙는데, '숨겨진' 이라고 말이다, '숨겨진 기준' 이라는 것이다. 제목은 원래 없었지만, 책을 만들면서 붙인 것인데 말이다. 이렇게 '숨겨진' 이라는 것은, 이게 실제 역사 속에서는 무엇인고 하니, 핍박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아벨 속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을 형이 알았다고 하면, 아벨을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인데, 아벨 속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이다. 평소에 가인도 동생 아벨을 사랑했을 텐데, 그런데 쓰나미처럼 무엇이 덮쳤는가? 죄가, 마귀가 덮치게 되니,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기 때문에 더욱 더 질투와 미움이 극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생아, 니가 하나님과 관련이 없다고 하면 계속해서 너를 예쁘게 여겨주겠는데, 하지만 하나님이 너의 제사만 받았기 때문에 도저히 안 되겠다"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벨과 내통을 하면서, 반면에 자기가 드린 제사는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인은 하나님에게 밟히고 차였다는 말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번 제대로 차여보라는 것이다. 당연히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밀려오는데, 그동안 정성을 다해서 맛있는 것도 사주고, 영화도 보여주고, 그리고 비싼 반지까지도 끼워주고 했는데 말이다. 그러니 그 배신감이 불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하지만, 각자의 생각이 숨겨진 기준은 아니기에 !!

아마 모르기는 해도 십자가 마을에서 떠난 분들 가운데서도 이런 경우가 있지 싶은데 말이다. 자기는 나름 열심히 봉사하고 사랑을 했는데, 사이트에 글도 올리고 헌금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자기가 그만 무시를 당했다는 생각이 들 때는, 그때는 복수심이 배나 증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런 자기 자신의 생각이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숨겨진 기준'이 아니라는 말이다. 무시를 당했다는 생각에 화가 나고 열을 받은 것도 다 좋은데, 하지만 그런 자기의 생각이 온 우주를 다스리고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숨겨진 기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 각각의 신들이 하나 하나의 기준으로서 !!

'그리스 신화'에 보면 신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왜냐하면 기준을 하나로 잡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태양이 지는 것은 아폴론에게 맡기고, 그리고 바다에 풍랑이 이는 것은 포세이돈에게 맡기고 말이다. 그렇게 각자의 신들에 의해서 이 세상 모든 변화를 설명한다는 것이다. 각각의 그 신들이 하나 하나의 기준으로서, 그해서 신들에게 다 맡긴다는 말이다. 

옛날에는 이 동네에 가면 이 동네의 신이 있고, 저 동네에 가면 저 동네의 신이 있기 때문에, 그 신의 법에 어긋나게 되면 난데없이 테러를 당하고 목숨을 잃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인이 하나님에게 뭐라고 하는가? 자기가 여호와를 믿다가 다른 동네에 가도, 그곳에서 자기 목숨을 잃지 않도록 좀 지켜달라고 요청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이사를 갈 때 신이 다르고, 떡을 찧을 때 신이 다르고, 결혼할 때 신이 다르고, 그렇게 다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집안에서도, 부엌에 가면 신이 또 따로 있고 말이다. 그래서 그때그때마다 뇌물을 다 바쳐야 하는데, 그게 워낙 많기 때문에 일년 스케줄을 따로 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음력으로 모든 달의 첫 날에 무조건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는 말이다.

◈ 김부자의 '달타령' ♪

그것이 바로 김부자가 부른 유명한 '달 타령' 이란 노래인데, 가사를 살펴보면 참 재미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새로 시작하는 달마다 첫째 날에 미리 제사를 드려서, 그 달에 재수가 없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고 상쇄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매달 첫째 날에 신에게 제사를 드린다는 말이다.

그것을 이스라엘에서는 '월삭' 이라고 하는데,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 달의 첫째 날을 제사를 드림으로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돌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월삭(月朔, New moon)' 이라는 단어 자체가 '새로운 달의 첫 날' 이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민 10:10) 또 너희 희락의 날과 너희 정한 절기와 월삭에는 번제물의 위에와 화목제물의 위에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 숨겨진 기준은 단 하나, 그게 곧 '지혜' !!

그렇게 하다보니 기준들이 너무 많은데, 그래서 나타난 기준을 총동원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 1강 제목이 무엇인가? 기준은 기준인데, 나타난 기준이 아니라 숨겨진 기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수많은 나타난 것들은, 그것들은 다양성이 아니라, 오직 숨겨진 기준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지혜' 라는 말이다.

그러면 그 지혜를 공개하면 되는데 왜 숨기는고 하니, 그것이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에게만 나타났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고 하니, 언약의 목적이 구원하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주하는 것에도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 축복이 있으면, 저주도 같이 !!

그래서 언약을 믿지 않는 자, 즉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지 않는 자는 무엇을 받는다는 말인가? 저주를 받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이 세상에 축복과 저주, 그 둘 다를 보여주신다는 말이다. 그렇게 축복과 저주를 보여주는 기능을 하신다는 것이다.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일종의 '태피스트리(tapestry)' 라고 할 수 있는데, 혹시 그것이 뭔지 아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천을 짜서 벽에 붙이는 가정용 장식으로서, 12제자의 만찬도 있는데 말이다. 집에 우풍을 방지하는 용도도 되고 장식하는 용도도 된다는 것이다. 옛날에 가구가 없을 때는 옷걸이도 되고 말이다. 

그와 같이 이 세상이 여러 천 조각으로 된 장식이라고 하면, 그렇게 이 세상에는 저주와 축복이 같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이 말이다. 그게 바로 세상인데, 그러니 이 세상에는 반드시 악마가 있어야 하고 이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세상답다는 말이다. 천국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옥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양쪽이 다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성에는 축복만이 아니라 저주의 속성도 있는데, 심판을 하시는 말이다. 그러니 이 둘을 통합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숨겨진 기준이고, 이 기준으로 지혜가 등장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기준이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지고 다른 민족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언약 자체가 언약적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에 말이다. 

이것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13페이지를 보자.

** (1강, 숨겨진 기준) - 지금 이 자리에 초등학생과 중학생과 대학생, 그리고 여러 연령층에 계신 분들이 와 계십니다. 심지어 아직 유치원에도 안 들어간 애들도 있어요. 이런 어린아이들까지 잠언을 대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증거하는 저로서는 대략난감입니다.

◈ 대략난감이지만, 그러나 !!

여기에 대략난감이라고 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제가 걱정할 문제는 아닌데, 성경말씀을 이야기하게 되면, 그것을 알아듣고 못 알아듣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붙잡혀있는 것이고, 저 자신도 이 말씀에 붙잡혀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을 주선하는 것은 주님의 소관이지, 제가 어떻게 설득을 시킨다고 해서 될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숨겨진 기준은, 아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엄마가 할 것이고, 엄마가 그렇게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기 반성이 될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강의를 함에 있어서, "우리 아이가 좀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해주세요" 라고 하는 요청보다도, 성경전체를 전달하고자 하는 저의 각오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가 나와야 할 텐데 알 수 없는 실패와 공포심이 거의 전부를 차지하면서 살아가다가 보니, 감사는커녕 초조와 불안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말씀을 주셔서, 이미 우리의 인생은 완료된 상태임을 다시 한번 깨달아서, 먹든지 마시든지 그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항상 감사가 넘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2,10 오후 3시에 마침. 

여보, 정말 고마워. 그런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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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 타령 ]
                                      김부자

달아달아 밝은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정월에 뜨는 저 달은 새 희망을 주는 달
이월에 뜨는 저 달은 동동 주를 먹는 달
삼월에 뜨는 달은 처녀 가슴을 태우는 달
사월에 뜨는 달은 석가모니 탄생한 달
달아달아 밝은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오월에 뜨는 저 달은 단오 그네 뛰는 달
유월에 뜨는 저 달은 유두 밀떡 먹는 달
칠월에 뜨는 달은 견우 직녀가 만나는 달
팔월에 뜨는 달은 강강 수월래 뛰는 달
달아달아 밝은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구월에 뜨는 저 달은 풍년가를 부르는 달
시월에 뜨는 저 달은 문 풍지를 바르는 달
십일월에 뜨는 달은 동지 죽을 먹는 달
십이월에 뜨는 달은 님 그리워 뜨는 달

 

 첨부파일 : 14대구강의('잠언'속의그리스도)1-'지혜'라는인물.hwp (65.5K), Down: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