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강-고후 1장 3-4(환란과 위로)160904-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장 3-4절입니다. 신약성경 286페이지입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위로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환란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위로는 뭐냐? 하나님의 위로가 어떤 사람에게만 주어지느냐 하면, 환란이 있는 사람에게만 위로가 위로답게 제시되게 되어 있습니다. “위로받고 싶으냐? 환란부터 받아라.”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환란의 성격이 어디서 온 환란이냐 하면,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시면서 주어졌던 그 환란이 성령세례 받은 자에게 그대로 반복해서 전달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받은 환란의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받는 환란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너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그렇게 만들고야 말리라.” 또는 “내가 너희들에게 그런 식으로 빠져나갈 데 없는 이 세상에서 기어이 빼내리라.” 하는 그 강조의 의미가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환란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본인이 이 세상에서 당했던 그 수모와 모욕감과 무시당함, 수치스러움, 그것이 그대로 성령세례 받은 성도에게 반복해서 제공될 때 그것이 환란입니다. 그 환란이 있는 사람에게만 주님의 위로가 의미 있게 다가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가졌던 그 환란의 정도와 그 속성은…, 지금 두 번째 또 이야기합니다만 다시 반복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목수의 아들처럼 보이고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러면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속했다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해서 개념정리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 세상인데 주께서 속했다, 이렇게 해도 되지만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이 세상 안에 예수님이 몰고 와서 새롭게 형성되어 있는,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이 세상이 아닌 구석, 영역이 새롭게 생산된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예수님만 달랑 오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더불어 예수님의 활동영역과 그 능력의 효과에 의해서 새롭게 형성되는 공간이 있어요. 그 공간에서 누가 거기에 끌려왔느냐 하면, 12제자가 일방적으로 간택되어서 그 속에 왔습니다. 열 두 제자들이 예수님과 더불어 고생을 하는데 열 두 제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고생을 하는데 그 고생하는 이유에 대해서 알 수가 없어요. 내가 이렇게 예수님 따라 고생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 같아요. 말을 잘 못했어요. 오늘날의 성도 같아요. 이상하게 별 일 안했는데 힘든 인생을 살게 되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구상한 내 인생은 찢어진다 할까요,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려요. 그 이유를 미리 말씀드릴게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생각한 내가 아니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나가 주님으로부터 새롭게 만들어지고 조성될 때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 나가 천국에 들어가는 나가 되는 거예요.
내가 나를 생각하는 그 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겁니다. 이유가 뭐냐? 내가 생각하는 나는 환란을 반기지 않는 나이기 때문에, 고난을 원치 않는 나이기에 그런 나는 그리스도와 공통영역을 구성할 수가 없어요. 동업이 안돼요. 사고방식이 달라서. 그럴 경우에는 그것이 둘이 찢어져야 되고 분리되어야 돼요. 나 자신이 두 종류의 나로 분리되고 찢어져야 됩니다.
그런데 분리가 되려면 내가 생각하지 않는 엉뚱한 내 인생과 나라는 것이 새롭게 만들어져야 돼요. 이것은 내가 기대한 것도 아니고 내가 예상한 것도 아니에요. “나 이러려고 인생 산 것이 아닙니다.”라는, 그야말로 주님을 만나면 반발과 반항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내가 보기에도 내가 낯설기 짝이 없는 존재, 그래야 됩니다. 그런 현상이 일어나야 돼요.
신학교 간 사람들에게 신학교 왜 왔느냐고 물어보면, 소명 받아 왔다는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지만 대부분이 하는 이야기는 이겁니다. 20대말고 30이상이나 40대, 50대는 좀 수상하고요, 40대쯤 되어서 신학교에 온 사람들은, 내가 이 신학교에 오려고 생각도 안했는데 사업을 하면 사업도 망하고, 다른 것을 좀 해보려고 해도 되지가 않고, 대체 원인추적, 원인조회가 안돼요.
대체 뭐가 잘못되어서 이 길을 와야 하는지. 이 길 아니면 다른 길이 없는지. 이렇게 자꾸 하나님 앞에 반문하게 되는 겁니다. 영어로 Why me? “왜 하필 저를 이 길로 가게 하십니까? 이것은 저의 성격에 영 안 맞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이 출애굽기 3장에도 나오지요. 모세가 항상 “저는 이 일 못합니다.” 심지어 예수님마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그냥 내게서 넘어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뭐냐? 내 뜻이 우세를 보이던 그것이 내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내 뜻보다 더 우세를 보이고 더 강하게 나를 일방적으로 완전히 끌어당기는 아버지의 뜻이 강렬하게 지배하는 그러한 예상 못한 새로운 나, 새로운 인생길을 주께서 마련할 때 그것이 바로 환란가운데 있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오늘 분문에서, 환란이 있는 자에게 위로를 준다는 이 말은, 그야말로 제가 보기에는 2천년 교회역사, 교회신학 속에 이 본문이 계속해서 오해되고 잘못 해석되고 있었어요. 네가 언제 2천년을 살았다고 2천년을 운운하느냐, 하지만 제가 총신도서관에서 면밀히 살폈습니다. 2천년동안 성경해석을 어떻게 해왔는가, 죽 살펴보고 다시 이 성경을 보니 맞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계속해서 생각한 것이, 왜 이렇게 성경해석을 교회가 되어서, 그것도 2천년이나 되어서 제대로 해석을 못해내는가, 교회가 되어서 앞장서서 성경을 엉터리로 해석하고, 엉터리는 좀 괜찮은데 아예 반대로 해석하는 이유가 뭐냐? 지금은 제가 알지요. 반대로 해석하는 것이 뭐냐 하면, “여러분이 주님 믿으면 고생 많이 합니다. 하지만 고생 한만큼 하늘나라 가는 사람이고 또 보상도 받습니다.”라는 식으로 해석을 해요.
“여러분이 예수님 믿어서 고생하세요. 예수님도 고생하셨으니 여러분도 고생하셔야 됩니다. 여러분 고생이 구원의 밑거름이 되어서 여러분을 구원시킵니다.”라는 식으로 2천년동안 교회가 해석해 왔고 지금도 그렇게 해석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제가 보기에는 완전히 잘못된 해석입니다. 어디서 잘못되었는가? 제가 약간 언질을 줘도 뭐가 잘못되었는지 말 모르겠지요.
교회가 그런 식으로 해석한 이유가 하나밖에 없어요. 사람을 어찌하든지 건지려고 하고 구원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하나님은 구원을 안 시켜주는 하나님이에요. 몰랐어요?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 사고방식이 이미 2천년 교회역사동안에 교회가 계속 자기세력화를 하고 자기 팬을 모집하고 자기권한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여러분을 구원할 테니 여러분은 교회가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교회가 하나의 구원 보내는 학원 같아요. 종합학원.
여기 와서 노트필기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면 나중에 시험합격 한다는 거예요. 교육 잘 받으면 나중에 천당 갈 수 있는 예비학원 같은 느낌이 들어요.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를 않습니다. 제가 아는 하나님은 예수님만 구원해요. 사람을 구원하지를 않습니다. 구원자체가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예수님 빼놓고 중간에 걸치고 있는 모든 인간을 떨어내는 작업이 구원 작업이에요. 이것이 제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언약에 합치되지 않으면 구원되지 않아요. 왜? 하늘나라는 언약이 완성된 상태가 천국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 세상에서 아담에 속한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언약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떨어내는 거예요. 떨어내고 오직 마지막 최후에 남은자는 누구밖에 없는가?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만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구원이에요.
지난 수련회에서 마태복음을 했는데 마태복음 강의할 때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라는 이름자체가 특이해요. 예수라는 이름을 두고 원어분석 하는 사람은 ‘구원자’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가 구원자기이기에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주장을 펼치고 싶은 겁니다. 그 논리의 바닥, 전제가 뭐냐 하면, 우리는 구원받아야 합당한데 내 힘으로는 구원이 안 되니까 뽀빠이 살려주세요, 이렇게 뽀빠이를 기다리듯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예요.
기다리면 구원자가 와서 기다리고 있는 나를 건져낸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럴 것 같으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미리 보낼 필요가 없어요. 아담이 죄짓고 난 뒤에 바로 예수님 투입해서 십자가 지게 해서 구원하면 되는 겁니다. 왜 예수님 오시기 전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예레미야, 에스겔, 숱한 선지자들, 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냈을까요?
그것은 네 주제 파악하라는 겁니다. 마태복음 23장 끝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요. 포도원비유를 하면서, 포도원을 만들어놓고 종들을 보내니까 주인이 보낸 종이라고 죽여 버리고, 또 죽이고 자꾸 죽이니까 마지막에 아들을 보내니까 이제 아들마저 죽이면 이 포도원은 우리 것이라는 식으로 유대인들이 살아왔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유대인들에게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네 주제파악을 하라는 거예요. 주제파악.
네가 원하는 구원이 뭔데? 네가 기대하는 천국, 하늘나라,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데요?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하늘나라에요. 내 잘난 맛을 유지해주고 그걸 긍정해주는 나라가 바로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국입니다. 사도바울은 옛날에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 만나고서 생각이 다 바뀌었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어떤 메시아를 원하는가? 요새 말로 어떤 예수인가?
여러분은 어떤 예수를 기다립니까? 어떤 예수를 원해요? 제가 설교 초반에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위로해주는 예수를 기다렸는데 위로해주는 예수는 없습니다. 환란 속에 있을 경우에만 위로가 위로답게 의미가 주어지지 그냥 맹숭맹숭 위로해달라고 하는 그 예수는 인간이 지어낸 우상입니다. 그런 예수는 없어요.
신앙생활 몇 년 했는지는 모르지만 새로 시작합시다. 하나님의 구원, 예수님의 구원은 우리가 구원될 수 없는 존재임을 부각하고 그걸 들춰내는 작업을 계속해서 하십니다. “너는 구원 될 수 없었어. 너는 탕자야. 너는 나를 버렸어. 너는 너밖에 몰라.” 네가 찾는 메시아, 네가 찾는 예수는 결국 예수를 찾는 본인이 예수보다 더 소중하다고 여기는 존재, 그런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귀하고, 그 다음에 내가 귀하기 때문에 신은 나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작성하는 종교, 그런 예수를 찾고 있어요. 그게 얼마나 조잡스럽고 조작된 가짜입니까? 왜 2천년동안 교회가 사람들의 구미를 맞추려고 했을까요? 모든 인간들이 자체가 주님 보기에 엉터리인 거예요. 죽은 자거든요. 죽은 자들이 자기가 살았다고 까불거리지요.
사람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사는 것이 힘드니까 위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찾고 있는 거예요. 고객만족이라고 고객들이 원하니까 영업하는 쪽에서, 사업하는 입장에서는 고객에 맞춰줘야 교회가 운영되니까 돈 챙겨서 생계유지하고, 노후대책하고, 목사로서 직업을 유지하고 그렇게 살고 싶은 거예요. 그래가지고 자기들끼리 놀려고 하는 그것이 하나의 괜찮아 보이는 직업이 된 거예요.
그래서 제가 20대에 신학교 가는 것을 수상하게 보는 거예요. 우리 교회에도 20대 신학생이 있지만. 말을 조심해야지요. 오늘 설교의 정답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정말 복잡한 것이 많은데 미리 말씀드립니다. 마네킹 눈에 권총 가지고 위협하면 마네킹이 겁을 냅니까? 안내지요. 환란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고 견디는 거예요. 이미 우리가 자기 자신을 마네킹으로 본다면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어떤 환란도 위험요소가 아니에요.
돌부처 같은 마네킹한테 돈 내놓으라고 위협하면 마네킹은 눈만 멀쩡히 뜨고 가만있지요. “겁나지?” 마네킹을 위협하는 자신만 땀을 질질 흘리면서 용을 쓰고 있어요. 아무것도 아닌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어요?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이 뭡니까? 이미 주님보기에 다 마네킹이라는 뜻이에요. 이미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은 죽은 자에요. 이것을 성령세례 받은 사람은 진짜 자기자아를 파악을 하는 겁니다.
죽은 자에게 실패성공이라는 것은 없고, 죽은 자가 착하다, 악하다, 선하다, 나쁜 짓 했다는 자체가 죽은 자에게는 해당되는 속성이 아니에요. 그게 나무랄 대상이 아닙니다. 너무나 본인이 누군지를 몰라요. 자꾸 살았다고 꿈지럭거리고, 살아가는 내 인생 어떻게 살까를 걱정하는 거예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가족단위로 되어 있어요. 제가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의 자아는 가족범위를 넘지 않는다고요.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의미는 가족범위를 넘지 않는다. 이 말을 왜 했느냐 하면, 나한테 중요한 것, 나한테 소중한 것, 나의 미래계획, 예상되는 나의 찬란한 나의 남은 생애, 이 모든 것은 기껏해야 가족범위 안에서 뱅뱅 도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수요일에 말씀드린 대로 노아는 특이한 가족이에요. 거기서 예상치도 못한 일, 같은 가족으로 묶여야 될 가족에서 저주 쪽과 축복 쪽이 분열되고 찢어졌다는 것,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분열된 거지요. 그런 분열이 일어나 줘야 주님이 손댄 가족이 돼요. 주님이 터치한 가족이라고요.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은 다른 것 없어요. 결혼해서 자식 낳아서 자식을 재료로 삼아서 짜깁기해서 그것을 자기의 영원한 보호막으로, 보자기로 삼는 거예요.
인간이 평소에 나오는 말들을 분석해 보면 그 말들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나에게 가족이 있다는 이것이 자기의 바탕의 힘으로 작용해요. 나에게 식구가 있다. 어떤 분은 맨날 교회에서나 어디서나 이야기합니다. “남편이 있습니까? 좋겠다, 남편이 있어서.” 또 어디에 갔더니만, “집 있어요?” 집 있고 가족 있으면 영원한 안식처입니까?
안식처라고 생각하지요. ‘자식 낳고 짜깁기하고 자식 둘 낳고 짜깁기 하고, 이놈의 자식들은 다 내 자식들이 나는 자식들에 둘러싸여서 살아야지.’ 나중에 그 놈의 자식들이 백조 되어서 다 날라 가는데? 백조 되어서 다 날라 가요. 구멍 뻥뻥 뚫려요. 나의 영원한 행복의 보금자리라고 여겼던 그 자식들이 전부 다 뿔뿔이 흩어져서 나중에 병들어서 유언할 때나 다시 나타나서 유산 가르는 문제가지고 싸워요. 자식들 다 찢어져요.
그 보호막 짠다고 평생 동안 고생고생 한 것, 꼬박꼬박 월급 받아서 그 보호막 짜는데 그게 누더기입니다. 결국은 구멍이 뻥뻥 나면서 아무 쓸데없는 짓거리를 평생 해 온 거예요. 그런데 그 가족이라는 보호막 짜기, 짜깁기 하는 그것, 그 외에는 할 일이 없다는 것이 문제에요. 인간의 존재라 하는 것은 가족의 범위를 못 벗어나지요. 모든 하루하루의 생활의 모든 것이 나의 보금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다 한 것인데 그것 말고 할 것이 없는데 어떻게 해요. 그것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내 혈통, 내 몸의 현재의 혈통을 내 힘으로 박차고 나갈 능력은 애초에 나에게는 없었다는 겁니다. 애초에 나는 내 몸에서 내가 아닌 나를 상정할 수 있는 자질도 없고, 능력도 없고, 아이디어도 없는 겁니다. 이러한 것을 못 벗어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것을 뻔히 아십니다. 우리 주님에게 고마운 점이 뭐냐 하면, 구원을 해줘서 고마운 것이 아니고 내가 모르는 우리의 실상을 알려주는 것부터 이미 고마움이 시작이 되는 겁니다.
알려줬다는 것은 마감까지 책임지겠다는 뜻이에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것을 영화롭게 하신다. 이것은 예수님의 자기스케줄이에요. 우리는 가족범위를 안 벗어나요. 그저 살아보자, 잘 살아보자, 행복하게 살아보자. 수요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다시 내게로 소급되는 나의 행복, 그 것 외에는 없어요. 그런데 그것이 내 스케줄이고 주님 스케줄은 따로 있다는 말이지요.
철도 없고,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도, 아무것도 모르고, 갈 생각도 안하고, 천국이라고 지어냈는데 지어내봤자 천국에 가서 자기식구들만 보듬어 안아서 살 엉터리 같은 생각만 하고 있으니 그것을 빼내서 그곳에 가는 그 작업에 대해서 이미 우리들과는 상종을 안 합니다. 복음의 기쁨은 뭐냐? 주님이 우리하고 상종을 안 한다는 것이 기쁨이에요.
마네킹하고 무슨 이야기가 됩니까? 이야기해봐야 어떻게 하면 우리 가족이 행복한가, 하는 그 엉뚱한 소리밖에 안 나오는데 무슨 대화가 되겠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께서는 여기에 환란을 집어넣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셨어요. 예수님께서 죄도 없으시면서 죄인이 되신 겁니다. 그것이 두 자로 세례라고 합니다.
조금 어려워집니다. 세례라는 말은, 우리가 먼저 받아 챙기는 것을 세례라고 보지 마시고 우리 보다 먼저 세례 받으신 분에서 세례의 진짜 본질을 찾아야 돼요. 예수님은 죄가 없는 상태에서 죄 있는 상태로 풍덩 빠졌는데 그게 주님이 받았던 물세례입니다. 세례요한이 깜짝 놀랐어요. “당신은 여기 와서 회개할 필요가 없습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내가 회개할 필요가 있는 이 바닥 속으로 풍덩 내가 뛰어 들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먹물 속으로 뛰어든 거예요. 깨끗한 그 몸체를 가지고 먹물 속으로 들어간 그것이 세례라는 말이지요. 그 세례는 물세례로부터 시작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세례는 물 세례로부터 시작해서 성령세례로 말미암아 마지막에 불세례까지 마감이 돼야 돼요. 그것이 끝이에요. 불세례, 예수님은 내가 받을 세례가 아직 남아 있다고 했거든요. 그 불세례가 뭐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 세례의 마감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 밖에 없는 인간 속에 풍덩 뛰어들어서 죄인이기에 받아야 될 모든 고난과 역경을 다 받습니다. 다 받는데 그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수치스럽다는 겁니다. 수치에 관련된 사항이었습니다. 인간은 밥 없어도 버틸 수 있지만 부끄러움을 당하면 못 버티고 자살해야 돼요. 참 이상하지요?
우리가 아는 과학에서는, “인간은 세포로 되어 있고, 세포는 영양소가 배급되어야 하고, 영양소는 탄수화물과 지방과 단백질이다. 그리고 무기물과 약간의 비타민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거거든요. 거기에 수치 이야기가 없고 자기의 이야기가 없습니다. 이과만 그런 것이 아니고 문과도 마찬가지에요. 문과에서도 자기 의라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현실에서는 집에 수십억 재놔도, 심지어 공직에 있더라도, 부끄러움을 당할 때는 아낌없이 북한강에 가서 자살하잖아요. 롯데 2인자. 전에 이야기했던 고교 7년 선배. 얼마 전에 죽은 포항시장은 5년 선배. 무슨 고등학교가 자살고등학교에요. 집에 양식이 없어요? 노령연금 안 받습니까? 왜 죽습니까? 본인이 너무나 본인을 몰라요.
내가 양식 때문에 산다. 양식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양식도 없지?”라고 놀림을 당하는 그것이 싫어서 살아요. 남들이 나를 놀리는 것이 부끄러워서 기어이 살아남고 보는 거예요. 남들 보란 듯이. 내가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주시하는 타인이 먼저 존재해요. 남들이 먼저 존재하는 거예요. 남들이 볼 때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날마다 그 때 그 때 구성을 하는데 이게 날마다 변하네.
날마다 달라져요.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너무 몰라요. 그래놓고 어딜 가요? 건방지게 하늘나라를 가요? 하늘나라 가려면 먼저 하늘나라에서 오신 분의 뜻을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주님의 뜻은,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아느냐? 네가 이런 사람이다.”라고 보여준 것이 뭐냐? 풍덩, 요단강 물에 들어가서 죄인이 되신 죄인으로서 수치와 모멸감을 당하고, 학대를 받고, 무시를 당하는 그 모습이 우리가 잃어버렸던,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애초에 몰랐던 진짜 우리의 본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본모습은 인간들에게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고, 이 모습 가지고 심판주 되시는 아버지 앞에 설 때 어떤 모습인가? 그것은 버림받아야 되지요.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이 가신 그 행적, 이것은 나와 예수님과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들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위해서 먼저 우리 앞에 지나가신 거예요.
연극무대의 주인공이 지나갈 때, 그 때 우리는 어떤 배우가 지나간다고 하지 말고 우리 모습이 저 모습이라는 것을 봐야 되듯이 주께서는 그것을 앞서서 보게 하신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고난 받음을 아무리 보여줘도 우리는 내 가족단위로 살기에 그 가족이라는 환상의 짜깁기, 그 범위 안에서, 그 바구니 안에서 벗어나지를 못해요. 죽을 때도 벗어지를 못합니다.
옛날 할머니들 보면 참 답답해요. 보통 딸이 연로하신 부모님 다 섬기잖아요. 딸이 그 모든 뒷바라지를 다 했으면 적어도 촌의 자그마한 밭뙈기는 그 딸에게 주는 것이 맞잖아요. 그런데 굳이 맏아들, 둘째 아들도 아니고 맏아들한테 주겠다는 그 고집, 맏아들이 뭔데? 본인소유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만. 정말 맏아들이 뭐예요? 뭐 길래 보증서서 주면 날리고 주면 또 날리고.
그래도 기어이 그 맏아들을 못 잊어서 죽을 때도 마지막 유언으로 맏아들에게 다 주고. 정말 억울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거든요. 예수님 이야기 백날 해 봤자 그 할머니 기도하는 것은, 맏아들 잘되게 하옵소서, 하거든요. 백날 기도하는 것이 맏아들 잘되게 해달라는 거예요. 성경을 본적도 없는 것 같아요. 기도를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몰라요.
가족범위 안에서 기도해 버립니다. 이 보자기가 천국가기 전에 이미 찢어져야 돼요. 낱낱이 찢어져야 됩니다. 이것이 어떻게 찢어지는가? 그것을 살필 때지요. 구약을 보겠습니다. 레위기 16장 29절에서 31절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레위기나 구약을 펼칠 때마다 제가 조마조마합니다. 구약인데, 구약은 밀림 같은데, 구약을 펼쳐서 이야기하면 교인들이 알아먹을까, 걱정이 됩니다.
구약 레위기 16장 29절에서 31절에,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칠월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이는 너희에게 큰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7월 10일에 지키는 속죄일입니다. 1월 14일이 유월절이지요. 15일부터 일주일동안 무교절, 5월에 맥추절, 7월 1일에 나팔절, 중간에 매월마다 월삭이 있고, 7월 10일에 속죄일, 그리고 그 다음부터 일주일간 수장절, 이게 구약에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있겠지요.” 있겠지요, 가 아니라 그 절기의 내용을 아시느냐고 묻는 거예요.
그게 왜 있는데요? 그 이유를 지금부터 설명합니다. 2천년동안 교회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왔습니다. “여러분들이 고생하시면 고생한 만큼 하늘나라에서 상을 받으시고 고생한 만큼 위로를 받아서 천국 갑니다.”라고 이야기했어요. 교회에서 성경을 가지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고난을 개인구원용으로 사용했습니다. “여러분이 고생하시면 여러분의 눈물을 씻겨주시고 다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야기했습니다.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주께서는 개인구원하지 않습니다. 레위기 16장에서 괴롭게 하라는 것이 나오는데 이 말은, 이것은 사람들의 본성에 호소할 수 없는 내용이에요. 사람은 본성상 괴로운 것을 기피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세포는 몸에 맞지 않는 것은 거부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면역세포 자체가 그래요.
인간은 일관성 있게 일정한 온도와 습도, 이 모든 것이 정상이 될 때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이 인간의 몸의 본능입니다. 괴롭게 한다는 이것은 기피대상이에요. 그래서 교회 나올 때 고생 덜하고 가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전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고난과 고생을 구분하라고. 고생이라 하는 것은 개인구원과 개인의 생계를 위해서 하는 겁니다.
‘내가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이렇게 고생했는데 하나님이 도와 줄 거야. 내가 구원받으려고 이렇게 힘든데 내가 마귀를 이기게 해주시고 반드시 천국가게 하옵소서.’ 유-튜브에 뜨는 모든 설교, 모든 교회의 설교가 자기 구원을 위해서 “고난을 받더라도 여러분이 이겨내시면 구원받습니다.” 그 이야기로 일관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구원받고 싶어요? 제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이게 교회가 해야 될 일이라고 모든 설교가 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런데 딱 두 가지로 구분해봅시다. 개인적으로 고생하면 구원받습니까? 고생을 근거로 구원되느냐는 그 말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구원은 십자가의 능력이지 고생의 능력이 아닙니다. 고난의 능력이 아니에요. 고난 받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뭔가 근원적으로 잘못되어 있어요. 교회 오면 찔찔 짜야 되고, 찡그려야 되고, 부족합니다, 외쳐야 되고.
그것은 옛날 바리새인들이 했던 짓이에요. 고난주간, 심지어 세례요한의 제자들까지 고난주간을 지킬 때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고 술 잡숫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결혼식에 신랑이 있는데 왜 울어야 되는가? 울 때가 있는데 결혼식에 신랑이 빠졌거든 울어라.” 주께서는 지금 혼인집 신랑으로 온 거예요.
그러면 신부가 신랑이 있으면 되었지 뭘 더 원해요? 나보다 신랑이 더 소중하다고 알면 이미 결혼은 성사된 겁니다. 나보다 신랑이 더 소중하다. 물론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현실의 신랑은 나를 위해서 있어야 되지만. 천국에서는 신랑이 나보다 더 중요해요. 나는 왜 만들어졌는가? 신랑을 위해서 만들어졌어요. 내 구원을 위해서 신랑이 오신 것이 아니고 신랑이 어떤 분인가를 알리기 위해서 사전에 신부들을 만들어놓았다는 것을 우리가 눈치 챌 때 이것이 구원인 겁니다.
이렇게 살아도 신부고 저렇게 살아도 신부에요. 신부가 혼자서 자기화장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부가 필요한 모든 것이 신랑이 알아서 제공해주게 되어 있어요. 내가 웨딩드레스 맞췄다고 해서 그거 천국에서 안받아줍니다. 확 벗겨버립니다. 우리가 입힌 웨딩드레스는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의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세례 받으셔서 죄인이 아니면서도 죄인으로 모멸 받을 때, 이것은 우리 힘으로, 우리가 가족단위 안에서 우리 힘으로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것을 홀로 이겨내면서 사셨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 의입니다. 사람은 단백질, 탄수화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남한테 자랑거리를 만들어내는 보람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거예요. 자랑거리, 그거 없으면 자살할 생각부터 먼저 하는 것이 인간이에요. 이런 인간을 무슨 수로 펜치나 드라이버 가지고 어떻게 스스로 고칩니까?
거기다가 교회에서 토마스 아 켐피스가 지은 책이 있잖아요. <그리스도를 본받아> 얼마나 유명한 책입니까? 그 책 보라, 청교도 책 보아라, 청교도 삶을 살아라, 그렇게 말하는 자신은 그렇게 살지도 않으면서. 개혁주의 성화론, 이게 다 뭐냐 하면, 펜치와 드라이버에요. 이래가지고 자기를 뜯어고치는 작업이에요. 자기가 거울보고 자기가 고치는 거예요.
괴물 만들기 쉬워요. 이게 괴물이에요. 백날 뜯어고치고, 나는 주를 위해서 이만큼 고생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서 이 정도까지 내려놨습니다, 백날 해 봐야 연출이에요, 연출. 일체 그거 하나님께서 안 받습니다. 손에 장을 지진다. 미국가기 전에 손에 장을 지져요. 절대로 그거 안 받습니다. 필요치 않습니다, 그런 것이.
“목사님, 성경을 보세요. 환란이라고 나오잖아요.” 환란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뜯어낼 수 없는 자기의를 뜯어내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맞춤 환경을 주셨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내게 주어진 그 상황을 환란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들 기대했는데 아들 낳고, 딸 기대했는데 딸 낳고, 그거 환란입니다. 딸을 원했는데 딸을 주셨다. “딸을 주셨군요.”하면 안돼요. 그것은 환란이 아닙니다.
이렇게 물어야 해요. “주여, 제가 딸을 달라고 했는데 왜 딸을 주십니까? 정말 이러깁니까?” 이렇게 나와야 돼요. 이것이 주의 응답이구나, 이렇게 좋아하게 되면 뭐가 날라 가지 않는가? 내가 기도했다는 자기의가 뜯겨지지를 않아요. “그때 농담처럼 했는데 진짜 그렇게 되어버리면 저는 어쩌란 말입니까? 이래가지고는 저는 기도 못합니다. 기도하면 응답되고, 기도하면 또 응답되고, 내가 무슨 재미로 기도합니까?”
다른 교인들은 이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왜 기도에 응답을 하시느냐는 말이지요. 그렇게 되면 기존에 내가 알던 나에게 계속 미련을 갖잖아요. 미련을 가지면 내가 소중해지고, 내가 소중해지면, 그래서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마음이 없다면 이것처럼 큰 환란이 어디 있어요? 나는 계속 내 잘난 체나 할 것이고, 내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간증집회하면서 돌아다닐 것이고, 차비라도 좀 받을 것이고, 이쪽으로 계속 나가볼까, 이런 생각도 할 수도 있고.
성경에서는, 네가 편안한 가운데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일부러 괴롭게 하라고 했어요. 2천년 교회가 이걸 빠트렸어요. 일부러 괴롭게 하라고. 이것은, 네가 살아보려고, 살아보려고 애쓰는 그 괴로움 말고, 낯선 괴로움이에요. 어떤 괴로움인데? “왜 저에게 갑자기 부자 되게 합니까?”라는 그 부자 되었다는 것, 남들이 좋아하는, 얼마든지 남들 앞에 자랑거리가 되고 나의 의의 재료가 될 만한 것들이 나에게 부담이 되고 나를 힘들게 했다는 그 괴로움, 그 괴로움을 누리라는 말입니다.
다른 민족에게는 영생이 없는데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영생이 주어진다. 다른 민족에게는 죄 사함이 없어요. 그래서 자기 죄를 자기가 알아서 책임져야 돼요. 결국은 지옥가지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죄 사함의 연기가 이스라엘의 진위에서 피어오릅니다.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그게 화장터라고. 항상 화장터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잖아요. 또 누가 죽었구나.
우리의 인생 안에, 그 진안에서, 제단위에서 계속해서 어린양의 제단의 연기가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릅니다. 연기가 피어오른다는 말은 그 연기와 더불어서 우리 죄도 같이 사라져 가는 거예요. 그게 오늘날 십자가거든요. “십자가로 사라져가는 것들을 바라봐야 할 나에게 왜 갑자기 내가 관리해야 할 25억을 왜 주십니까?” 이것은 환란이 되는 거예요. “누가 달라고 했습니까? 왜 주십니까?”
딸을 원했는데 아들이 나왔어요. 딸을 원했는데 또 아들이 나왔어요. 삼세번이라고 해서 또 딸을 원했는데 또 아들이 나왔어요. 이 사람은 왜 아들을 원했을까요? 아들이 가족단위에서 남에게 내 기도응답이라는 자랑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들을 주시지 않고 딸을 주시는 겁니까? 딸을 주시는 것은, 네가 아들을 원하기 때문에 딸을 주신 거예요. 이 말은 내가 아는 내가 아니고 다른 노선이 따로 철도노선처럼 천국까지 깔려 있어서 천국에 이미 가 계시는 예수님께서 지상과 연결되어 있는 사다리, 레펠이라고 합니까?
군인들이 특수훈련하면서 헬기에서 줄 타고 내려오잖아요. 그 줄이 나에게 내려오게 되면 나는 부자가 되었든, 자식출세가 되었든, 나한테는 낯선 것으로 다가올 때 그것이 우리에게 환란이 되는 겁니다. 자기의, 이제는 타인 앞에 자랑할 것이 없다. 모든 인간은 마네킹이니까. 너도 포함해서. 그동안 누구눈치 보고 살았는가? 지금껏 보아온 남의 눈치가 내 구성요소가 되고 말았어요.
‘네가 나한테 욕했지? 봐라. 내가 이거 한다.’ 심지어 뉴스에 보니 초등학교 때 자기 때렸다고 20대에 다 커서 다시 만나서 시비 걸어서 상해를 입혔다는 사건이 나왔어요. 제가 군에 있을 때 2개월 상관인데 하여튼 말썽꾸러기라. 그래서 소대장한테 많이 맞았어요. 그 사람이 제대하고 난 뒤에 예비군군복 입고 다시 자기가 있던 부대에 와서 소대장 불러내서 “당신 나에게 무슨 억하심사가 있었지? 왜 그렇게 때렸나?” 하고 시비건 적도 있어요.
내 가족단위, 내 가족 잘되겠다는 것은, 어릴 때부터 “너는 이런 사람이 돼야 돼. 이런 가족을 구성해야 돼. 이런 인생이 되어야 우리가 기뻐해.”라는 시선들, 눈총들이 그동안 너무 많았어요.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그들 때문이었어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때문에 살아간 거예요. 그러다 보니 누구기대? 주님이 어떤 기대를 하는지, 하나님 아버지는 날 어떻게 보는지, 전혀 무지몽매하게 살아온 겁니다.
여기에 성령의 세례를 주셔서 이제는 나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누구신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레펠 타듯이 미리 이 땅에서 주께서 내려와서 주님의 자기지체를 여기에 하나 둘 깔아놓은 거예요. 깔아놓고 주께서 회수하듯이 우리 인생은 살아집니다. 이것도 내 인생, 저 못난 인생도 내 것, 잘난 것도 내 것.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복음 안에서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네가 거지라도 괜찮고 강도라도 괜찮고 창녀라도 괜찮아. 내가 창녀 만들었고, 내가 거지 만들었고, 내가 강도 만들었기 때문에. 남들 눈 보지 마라. 너도 마네킹이고 저도 마네킹이다.” 아무 의미 없어요. 살고 죽는 것은 주님 손에 달렸습니다. 발걸음 세는 것도 주님 손에 달렸고 머리카락, 키가 자라는 것, 전부 다 주님 손에 달렸지 우리가 비타민 많이 먹어서 키가 큰 것이 아닙니다.
커봤자 몇 센티 크겠어요? 한 자나 크겠어요? “너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런 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제자들은 그랬겠지요. “주님, 저는 요? 저는 요?” “너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왜? 그 나라 의와 엮이고 연결된 겁니다. 우리의 가족범위를 넘어서서, 우리의 외곽에 있는 천국과 연결돼 있는 우리의 이 모습, 이 땅에서의 우리의 자기 의를, 남들이 지켜보는 우리의 자기 의를 분리시키고 분열시켜 뜯어내는 환경, 이 환경이 어떤 환경이든지 이것이 환란입니다.
아들 딸 생일이라고 “생일축하 합니다.” 하고 맛있는 것 먹고, 참 행복하지요. 사진도 찍고, 폭죽도 터뜨리고, 재미있지요. 그러나 하늘나라 입장에서 본다면, “주여, 자식 키운 보람이 있고 오늘도 이 시간이 참 행복합니다. 하지만 제가 하늘나라 간다면 이런 행복도 하늘나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럴 때 주께서 주시는 위로가 있습니다. “그래. 네가 생일 폭죽 터뜨리다 데든 말든, 생일케이크가 잘못되든 관계없이 하늘나라로 위로 받아라.” 이런 것이 진짜 위로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땅에서 어떤 경우라도 환란가운데 있었기에 늘 위로받았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성령 세례 받은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고생한다고 천국 넣어주는 것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스스로 자기 때린다고 더 착해지는 것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착해질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더 나빠질 필요도 없고, 주어진 환경자체가, 이 자체가 우리 죄를 알고, 우리 의를 뜯어내기 위한,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받기 위한 환란의 장소인 것을, 그 새삼스런 안목이 열려서 다시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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