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설교

안식일을 더럽히지 말라(사56:1-2)이근호080730

아빠와 함께 2013. 2. 10. 10:56

안식일에 대한 이 놀라운 설교를 들어보세요

성수삼촌!,경숙아!

 

더럽히지 말라

2008년 7월 30일                     본문 말씀: 이사야 56:1-7

(사 56: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은즉』

(사 56:2)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

(사 56:3)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

(사 56:4)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사 56:5)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

(사 56:6)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사 56:7)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오늘 본문에서 ‘더럽히지 말라’ 혹은 ‘손을 금하여 악을 행치 말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인간이 이미 알고 있는 선과 악의 개념가지고서는 이 본문 말씀의 뜻을 밝혀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이 자기 딴에 ‘안 더럽혔다’고 우기지만 실은 그 ‘지켰다’는 것 자체가 이 하나님 말씀의 더럽히고 악을 행한 것이 됩니다.

인간이 열심히 살고 바르고 산다는 것은, 기존의 인생관에서 뻗어 나온 가지나 줄기에 불과합니다. 전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실하고 착한 인간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인간’을 원하십니다. 만약이 기존 인간형으로 착하고 바르게 산다면 그 누구라도 바리새인을 따라갈 자가 없습니다. 이 점은 예수님도 인정했습니다.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입니다. (마태복음 5:20) 예를 들면, 남자 100m 달리기 세계 신기록이 9초 76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100m를 9초 76보다 더 빠르게 달리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과연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수평적으로 아무리 인간들끼리 경쟁하고 혹은 자체적인 양심을 걸고 스스로 경쟁에 나서도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천국은 쉽게 넣어주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열심히 하는 인간’이 아니라 아예 ‘다른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안식일 더립히지 말라’라는 이 말씀에 대해서 기존의 인간들이 이해하는 바와 ‘다른 인간’으로서 이해하는 바가 다릅니다.

기존의 인간들은, 자신들이 품고 있는 수준을 염두에 둡니다. 이것은 자신의 선한 양심과 치밀한 논리적 이성과 투철한 의지력으로 달성할 수 있는 그런 안식일을 염두에 두고 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합니다. 마치 ‘주일을 잘 지키기 위한 교인 수칙’ 같은 것을 만들어서 그 수칙에 따랐는지 아니면 위반했는지를 가지고 ‘안식일을 지켰음’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러나 반면에 ‘다른 인간형’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인간’형은 실은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인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이 잃어버린 자임을 잊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되찾음의 기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경우가 벌어져도 자신이 ‘잃었다가 되찾은 자’라는 인식 속에 있다면 구원받은 기쁨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형’인 성도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로마서 8:28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자기 코 앞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말씀 완성의 능력으로 자기에게 발휘되고 있음을 압니다. 예를 들면, 택배회사에서 배달된 물건이 비록 자기 아파트 앞에 놓여 있어 아직 뜯어보지 않더라도 이미 자기 것임을 아는 것처럼, 말씀이 자기에게 알려졌다는 것 자체가 이미 완성의 능력이 그 속에서 뿜어져나와 자신에게 쏘아대고 있음을 아는 자가 곧 ‘다른 인간형’입니다.

특히 안식일의 경우, 안식일 자체로 그 안에 ‘완성’의 상태를 품고 있습니다. 창세기 2:1에서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다 이루셨다는 기념일로서 안식일을 만드셨습니다. 이는 곧 안식일 계명으로 자기 택한 백성에게 주어졌다는 것 자체가 이제는 이미 완성된 차원에서 자기 백성을 다루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마치 영화 촬영하면서 카메라를 전선처럼 공중에 설치해놓고 그 선을 따라 재빨리 이동하면서 지상의 활극을 공중에서 촬영해대는 것처럼, 하나님은 안식일을 완성을 보여주는 카메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안식일에는 제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 제사에는 제물의 희생과 피가 소모됩니다. 그런데 그 제사로 인하여 안식일 제사에 참여한 모든 이에는 ‘죄용서’라는 완성의 상황을 은혜로 받게 됩니다. 따라서 이것을 아는 자들은 안식일의 더럽힐 리가 없지요. 그렇지 않고 기존의 인생관을 유지하는 자들은 나름대로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기 방도를 연구하고 실천에 옮기는 것으로 안식일은 지킨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즉 자신이 행하시는 일 속에 안식일 법의 완성이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온전한 완성, 더 이상 모자람이 없는 완성을 위하여 예수님의 오셨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더럽히지 말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공로를 더럽히지 말라는 말씀으로 대신할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골로새서 2:14-17에 보면,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흐르고 있는 그 현장에 서서 “당신 안식일 지켰시오”라고 명령하는 것이 이 얼마나 피 흘리신 예수님을 모독하고 모멸하는 발언입니까? 이단들의 특징은 인간의 행함으로 달성할 수 있는 그 목표치에다 ‘말씀 완성’을 놓아두고 있습니다. 소위 말해서 ‘복받은 사례’를 미끼로 해서 인간의 실천력 발휘를 유도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완성된 안식일’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사와 동행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눈을 뜨지 못해 그 동행자가 예수님인 줄 알지를 못한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듣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식당에서 식사하는 중에 눈이 열리니 그 동행자가 곧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것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이 동행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그 전부터도 이미 동행해오고 계셨습니다. 그 증거로서 결국 예수님의 공로와 십자가의 죽으심과 그 능력으로 천국에 들어가게 됨을 인생 도중에 군데군데 알아가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착한 일’이란 전에 인간이 미리 짐작한 그 착한 일이 아니라 늘 주님의 동행하시면서 내려주시는 그 지시에 따르는 것이 착한 일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법입니다. 독자적으로 말씀을 지키는 것은 기존의 육적인 인간형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미
‘다른 인간형’이 된 성도는 동행하시는 분에게 모든 완성의 주도권이 있음을 아는 자입니다. 사람이 말씀을 멀리하면 자연적으로 자기 규칙에 매여사는 미완성의 불안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공로를 완성됨을 나의 열심의 완성으로 대체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