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18강-예수 믿는 자(3;25-26)이근호130127

아빠와 함께 2013. 2. 7. 11:35

예수믿는 자 (롬 3: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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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1-27 13:28 
예수 믿는 자

2013년 1월 27일                            본문 말씀: 로마서 3:25-26

(롬 3:25, 개역)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 3:26, 개역)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믿는 자는 없습니다. 단지 늘 생산될 뿐입니다. 사람들이 믿는다는 우기는 것은 자신이 은근히 기대한 기적을 소유하고자 하는 소유욕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면서 자기 능력으로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미지한 영역에 대해서 신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기적으로 이루어지거나 채워지면 그 때사 신의 존재를 인정해주겠노라고 나섭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믿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의 내용이란 벌써 자기 자신의 이해력으로 수용 가능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믿음의 내용이란 인간들에게 있어 수용 불가능한 내용입니다.

25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제안은 세상 사람들이 요구하거나 원했던 바가 아닙니다. 따라서 아무리 믿고 싶어도 영 마음이 가지 않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익히 아는 내용을 “믿으라”고 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인간들이 하나님마저 자신을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뭐든지 만져보고, 쓰다듬어주고, 씻어주고, 이쁘해주고, 다독거려주면서 결국에는 마음에 드는 것은 자기 품으로 가져가는 버릇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요모조모 따져보고 믿겠다는 겁니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법에 하나님은 말려들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인간이 하나님 고르는 것은 자신의 판단력과 분석력과 과감한 결단력을 믿는 바가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을 믿고 삽니다. 자기의 결심 외에는 아무 것도 믿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경향을 죄라고 규정하고 싶어하십니다. 방법은 이러합니다. 인간들이 좋아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것을 내놓으면서 믿으라고 요청하시는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거부하겠지요.

이러한 거부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아들의 피로서 화목제물을 세운다’는 표현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천국에 살고 있는 자들은 어떻게 해서 거기에 도달된 겁니까? 아무리 믿도 믿는 자가 없는 판국에 말입니다. 그것은 ‘믿는 자’, 곧 ‘의인’은 하나님에 의해서 친히 생산되는 겁니다. 불신자, 죄인들을 재료로 해서 도가니 속에서 믿는 자, 혹은 의인이라는 생산물이 나오게 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믿음’이란 생산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모습을 띠게 됩니다. 요한복음 20:8에서 제자들은 ‘빈 무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믿었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빈 무덤에서 아무 것도 본 게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취지에 호응하는 식으로 등장되는 믿음입니다. 믿게 된 이유는 자신에게서 찾지를 않는 자가 진정한 믿는 자입니다. 요한복음 2:24-25에 보면,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기를 믿는 이유를 가져오라고 요청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친히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25절의 말씀처럼 ‘그의 피’와 ‘화목제물’을 세우는 이 작업은 사람들이 관심 두는 작업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람들이 극히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해서 세워지는 작업입니다.

즉 인간들은 극도로 불신자로 들통 내는 작업이며 바로 이 작업이 그러한 작업이라는 것을 믿으라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겁니다. 화목제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나라의 특수성을 언급해야 하고, 그 특수성을 언급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언급해야 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지도 못할 내용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다가오시는 겁니다.

요란스러운 기적의 축제를 가지고 사람에게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어 있기에 평생토록 꿀통에 빠진 파리처럼 뻑뻑힌 일상을 보내게 됩니다. 행여 내가 하는 이 행위로 인해 내일과 장래가 어떤 식으로 전개 될 것인지에 대해서 몹시 염려하면서 계속 선과 악 개념 사이에는 시달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면 축복이요 악을 저지르면 저주가 주어진다는 이 저주스러운 영역에 계속 머물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화목제물이 나오는 레위기 3:1-5에 보면,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희생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거든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문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그는 또 그 화목제의 희생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취할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단 윗불 위에 있는 나무 위 번제물 위에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느낌이 어떠합니까? 대단히 참혹하고 파멸적인 현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뜯고, 쪼개고, 불태우고, 죽이고, 피 흘리고 처참한 광경을 보여주고 있는 여기에서 제물 태어고 나오는 그 기체를 하나님께서 흠향하시고 궁극적으로 만족하신다는 겁니다. 참 이상하죠? 우리가 정성드려 바친 것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친히 죽이시는 그 작업 현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는 겁니다.

로마서12:1-3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우리가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도리어 바쳐진다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이 제물이 되어져서 하나님께서 활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친히 작업하시는 그 바가 곧 사람들이 감히 상상치도 못한 하나님의 의가 되신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를 금속 녹이니 도가니 같은 역할을 하는 제사법을 통해서 새로운 상품으로서 의인을 생산해내십니다.

그렇게 나온 의인들만 죽음의 불이 피어있는 유리바다를 건너서 천국에 도달될 수가 있습니다.(계 15:2) 즉 하나님께서는 저주의 불바다를 견딜 수 있도록 친히 화목제물을 만드는 작업 속에 참여 시키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랑할 것은 이 화목제물, 곧 십자가 피 밖에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도록 친히 우리를 상대로 작업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1-29 16:27 
18강-롬3장 25-26(예수 믿는 자)1301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3장 25절에서 26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3페이지입니다.


로마서 3:25-26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그 다음 말이 뭐냐,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기적을 원해서 그런 거예요. 그 기적이란 사람들이 “하나님, 이런 기적을 베풀어주니 고맙습니다.”라고 기적의 항목을 우리 마음에서 다 알고 있어요. ‘우리가 못한다고 여겼는데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으니 기적이다. 이 기적은 내가 한 것이 아니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이 맞다. 나는 그 기적을 보고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기적을 믿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왜냐, 우리가 은근히 기대하는 바를 믿는 것은 믿음에 해당되지를 않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하면, 하나님께서 제시한 믿음의 내용이 따로 있어요. 사람들이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그 기적을 하나님께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것을 믿으라고 제시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우리가 믿어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의로우심을 받아서 천국 가는데 여기에 필요한 믿음이라는 것은 우선 “그의 피”가 들어갑니다.


아무의 피가 아니고 “그의 피”입니다. 그의 피가 들어가고 그래서 화목제물을 세우게 되면 너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어서 천국에 합류해서 영생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원한 것이 아니에요. 식당에 가면 우리가 주문해서 먹잖아요.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엉뚱한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제가 식당에 갔는데 “개고기 드시겠습니까?” 한다면 저는 황당하지요. “개고기 못 먹습니다.” 냄새만 맡아도 “윽!”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먹을수가 있겠어요?


하나님께서 우리 보고 “이 피를 믿어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에 가면 더 과격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 사람들이 다 가버렸습니다. 다 가는 것이 정상이에요. 다 갔다고 봤는데 보니 몇 명이 남아 있더라는 말입니다. “너는 왜 안 갔지?” 이렇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되묻지요. 예수님께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


그 중간을 끊어버리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고 돼요. 그것을 다르게 문장으로 만들어보면 하나님이 믿음의 내용으로 제시하는 것은 사람들이 은근히 나름대로 믿고 싶은 기적들이 있기에 하나님이 “이것 믿어야 살 수 있어.”라고 제시하는 것은 아무도 믿을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니 믿는 자는 없습니다. 오늘 설교 끝났네요. 아무도 믿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면 아무도 믿는 자도 없고 믿을 맘도 없는데 여기에 의로운 사람이 등장하고 변화 산에서 이미 엘리야와 모세는 천국에 가 있는 것이 드러났잖아요. 그러면 그렇게 간 사람들은 도대체 뭐냐, 믿는 사람도 없는데 그 사람들은 뭐냐는 거지요.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습니다만 믿는 자를 하나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생산해 내는 겁니다. 내가 믿겠다고 나서면 믿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하시게 되면 안 믿어야 되는데, 믿고 싶지도 않는데, 믿어도 나에게 수익이 보장된다는 보장도 없고 오히려 손해만 날지 싶은데 하나님에 의해서 믿어지는 거예요. 쉽게 말씀드려서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내 접시에 담아서 먹고 싶은데 주님께서는 내가 먹을 음식을 주지 않고 못 먹을 수밖에 없는 음식을 놓아두고, 그 다음에 그 못 먹는 음식을 먹게끔 나라는 인간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쉽게 한다고 했지만 굉장히 어려운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제 딴에 더 쉽게 해보겠습니다. 어린애들 같은 경우에 갖고 노는 인형이나 애완견이 있다면 우선 인간은 뭐든 손대고 맛보고 어루만져서 자기 소유로 삼게 돼요. 맘에 든다고 그러는 거지요. 그런데 이런 인간의 습관상 누구한테까지 그런 짓들을 하느냐하면, 맛보고, 손대고, 어루만져보고, 점검해보고, 개나 인형처럼 가지고 놀려는 그 습관을 가지고 예수님에게까지 적용해서 예수님을 자기 소유화시키는 겁니다. 자기 소유물로 사용하려는 거예요.


뭔가 좋은 것이 있으면 자기 자신에게 끌어당겨서 지금 보다 더 나은 자신이 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우리가 자진해서 가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하게 되면 그 제공하는 것이 일종의 폭탄의 장약 같아서 주께서 집어넣으면 뻥, 하고 주님 주신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폭발해 버려요. “어딜 함부로 소유를 해? 네가 뭔데 나를 소유해? 네가 날 소유해 놓고 하는 말이 ‘믿습니까, 믿습니다!’ 하는데 그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성경을 자세히 본 사람 같으면 성경 전부가 이런 난해한 이야기로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20장 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고 난 뒤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가 봤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있어야 할 시체가 없고 비어 있어요. 시체가 없으니까 제자들에게 그것을 신고했습니다. “제자들이여, 예수님의 무덤에 가 보니 무덤의 돌문이 열리고 시체가 없어졌습니다.”라고 한 그 대목이죠.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들이 뭘 보았습니까? 그들이 아무것도 본 것이 없어요. 그 안에 예수님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빈 무덤만 봤어요. 빈 무덤만 봤는데 “믿더라.” 뭘 믿는데요? 뭔가 본 것이 있어야 믿지요.


9절에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어루만지고 다듬고 예쁘게 해주고 정성들이고 키워서 ‘이만하면 내 품에 안겨도 되겠지.’라고 가지고 와서 내 소유로 하는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전히 자기가 지배자가 되고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제발 좀 목사들아! 사기 좀 치지 말라.” 사도들도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사기 칠 수밖에 없어요. “여러분들이 소유할만한 예쁘장한 예수님을 소개할 테니 많이들 소지하시고 천국 가세요.” 이것은 사기 치는 거예요. “너, 예수님 봤어?” “못 봤어.” “너는 봤어?” “못 봤어.” “믿더라.” 이렇게 돼야 돼요.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요 20:29)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그래서 간증집회라는 것이 사기라는 말이지요.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것이 믿어지느냐, 그래서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예수님께로 갈 수가 없는 겁니다. 무덤에 갔다고 해서 자기의 월급이 더 올라갔습니까? 자기 집안에 화목해졌습니까? 예수 믿는다고 해서 자기 땅 사놓은 게 값이 올라간 거예요? 아니면 승진을 한 겁니까?


제자들이 예수 믿고 난 뒤에 획득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획득한 것이 있다고, 그러니까 여러분도 나처럼 예수 믿으면 얻을 것이 있다고 하는 이것은 보이스피싱, 사기입니다. 사람들은 사기라도 좋으니까 그런 예수를 전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예쁘장한 애완견 같은 예수 한 마리 키워보렵니까? 집에 예수 한 마리 들여놓아 보세요. 가정에 행운이 깃들고 화목할 것입니다.”라는 긍정적인 멘트들, 열 두 제자들은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지를 않았습니다. 성령 받은 사도들은 절대로 그런 식으로 살지 않았어요.


요한복음 2장 24-25절,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너, 나 믿고 난 후에 소득이 얼마나 올라갔나?” “없습니다.” “바로 그렇지. 바로 그거야 그거!” 예수 믿고 난 뒤에 이런 증거가 있으니까 이런 증거를 가지고 소급해서 예수님이 살아계신 것이 맞습니다, 라고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기가 믿을만한 증거를 가지고 들이대는 것에 호응하지 않습니다. 저리가라고 합니다.


“나는 너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미리 알기에 새삼스레 어떤 업적을 들고 와서 주님 뜻입니다, 하는 것에 내가 감동받고 감화 받을 내가 아니다.”하는 거예요. “내가 너희들 만들고 그냥 주는 것이지 너희들이 가지고 나와서 바친다고 그것을 좋아라고 받는 내(예수)가 아니”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나다나엘이 혼자서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했습니다. 그 근처에 어떤 인간도 없었고 나다나엘 혼자 있었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하는 말이 “나다나엘아, 네가 무화과나무에 혼자 있었구나.”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처럼 우리가 우리 쪽에서 신앙이 될 만한 것, 경건한 것이 될 만하다고 여기는 것을 조립하는 것, 이것이 폭파되어야 됩니다. 폭탄 투입해서 완전히 박살나야 돼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선이니 악이니 하는 그것도 같이 폭파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죄는 사실은 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죄라고 지적함으로서 그것으로 인하여 내가 상대적으로 의롭고 양심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뽐내기 위한 하나의 수작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예수님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생각하는 죄라는 것은 우리가 짐작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죄입니다.


어찌되었든 우리가 알고 있는 죄는 무조건 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폭파되기 전, 주님이 찾아오기 전에 그냥 자기가 폼 내고 경건 되게 살려고 하는 짓에 불과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가 그 죄가 아니라면 죄 씻음이라든지 의라는 개념도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짜 죄의 개념인가?


25절에 봅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 이 안에서 비로소 진짜배기 죄가 나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진짜 죄라고 여기는 것이 이 안에서 나옵니다. 화목제물, 이것을 설명하려면 이스라엘을 설명해야 돼요. 또 뭘 설명해야 되느냐하면, 이스라엘이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 단독적으로 만나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있어요. 율법인데 그 율법을 이스라엘이 수용해서 이스라엘내부에 구체화시킨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야기해야 돼요.


경기가 좋지 않다, 북한에서 핵실험을 하려고 한다, 미국이 대통령 취임식을 했고 한국도 새로운 대통령이 나왔다, 기름 값이 오른다, 이 모든 우리의 관심사에 폭약을 집어넣는데 그게 뭐냐,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것을 쏙 집어넣으려고 하는 거예요. 지금 전혀 세상 사람들의 궁금해 하지도 않고 듣고 싶지도 않는 이야기인 로마서 3장 25절을 쑥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이것 집어넣으려고 하니 옛날 이스라엘 이야기를 해야 돼요. 이스라엘이 제사법으로 어떤 명령과 지시를 받았는지 그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거든요. 우리가 쓸데없이 죄의식을 느낍니다. 죄도 아닌 것을 죄라고 여겨서 자기가 그 진흙탕 안에서 죄책감 가지고 몸부림치면서 살아온 거예요. 정작 죄는 전혀 엉뚱한데 자기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그 죄가 죄인 줄 알고 그것 때문에 스스로 벌을 세우는 짓을 하면서 평생을 살아가는 거예요. 양심의 가책이 되니 어쩌니 하면서. 양심에 가책 되어서 지옥 간사람 있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스승을 버렸다고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요즘 학교 선생님을 패고 지갑의 돈을 터는 이런 학교에서 선생님 팔았다고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교정에서 목매고 자살하는 학생 봤습니까?


가룟유다를 보세요. 얼마나 진정성 있게 진지하게 인생을 살아간 사람입니까? 상 줘야 될 사람이지요. 그런데 지옥 갔습니다. 그리고 마귀 들린 사람이에요. 진짜 죄를 몰라요. 진짜 죄는 이스라엘이라는 특수한 국가, 하나님이 만드신 특수한 국가에서만 밝혀지는 겁니다. 공자, 맹자, 노자, 소크라테스, 전혀 죄를 모릅니다. 석가모니도 죄 몰라요. 레위기 3장에 보면 화목제물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제가 얼른 읽어보겠습니다. 감을 잡아 보세요.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희생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거든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찌니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문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그는 또 그 화목제의 희생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찌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취할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단 윗 불 위에 있는 나무 위 번제물 위에 사를찌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 :1-5)


이것 하고 누가 국무총리 되었다는 것과 어느 것이 이해하기 쉽습니까? 딱 느낌이 뭐냐, 조지는 거예요. 뜯고 씹고 맛보고 즐기고, 하는 것처럼 태우고 찢고 지지고 피 흘리고 각을 뜨고, 이것이 하나님이 아주 흡족해 하고 즐겨 기뻐하시는 냄새, 향수가 된다는 겁니다. 레위기보다 좀 알기 쉬운 것을 말씀 드릴게요. 로마서 12장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찢고 자르고 지지고 각 뜨고 피 흘리고 태우고, 몽땅 다 태우고, 간이나 이런 몇 부위 빼고 나머지는 다 태울 때 재가 되면서 냄새가 화학구성물인 기체로 되어서 올라오고 그 냄새를 하나님께서 흠향하시면서 기뻐하시고 그 제물에 참여된 모든 자에 대해서 하나님의 재생산된 하나님의 의가 발생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서 받은 제사를 세자로 이야기하면 도가니, 금속을 제련해서 순수한 금속으로 다시 만드는 도가니, 그냥 도가니가 아니고 뜨거운 도가니에서 하나님의 의인도 생산되고 하나님의 의도 생산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간추려 봅시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가 없다고 했으니 아무도 믿지도 않는 그 인간을 가지고 친히 도가니를 만들어 놓았어요. 도가니를 만들어놓고 거기에 뭘 집어넣느냐하면, 아무도 믿지 않으니까,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되니까, 자기 딴엔 믿는다고 해도 다 엉터리고, 그걸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죄인을 재료로 사용해서 나중에 의인이 생산되는 생산 공정을 주님께서는 화목제물이라는 도가니를 통해서 친히 손대서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렇게 만들어 낸 것만 천국에 갈 수 있어요. 왜냐하면 천국은 이 세상과 격리되고 분리되어 있는데 그 분리된 그것을 구약 출애굽기에서는 홍해라고 이야기하고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불이 붙은 바다라고 되어 있어요. 홍해는 물이 넘치는 바다라면 요한계시록에서는 불이 붙은 바다를 건너서 어린양의 피를 발라서 하얗게 된 사람은 천국에 다 집합하게 되어 있습니다.


천국에 가려면 무엇을 견뎌야 되는데 그게 뭐냐,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서 새롭게 양산되고 생산된 그 제품, 정련, 완전히 정제된 그 상품만 천국에 넣어줍니다. 천국 가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흠도 없을뿐더러 티도 없어요. 흠도 티도 없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살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왜 흠과 티가 없습니까? 인간의 모든 감정은 육체의 연약함에서 오는 것이거든요. 인간이 성질난다, 그것은 몸에 무슨 이상이 있어요. 몸이 아프면 모든 것이 짜증나고 그 짜증은 타인을 통해서 풀어야 되거든요. 그러면 그것은 이웃사랑이 아니고 식구들도 덩달아 화내게 되어 있고 그게 하나의 범죄가 되잖아요.


인간의 몸은 모든 것이 날 때부터 흠과 티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홍해바다, 그 불이 붙은 바다를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티 없음과 흠 없음은 생각 안하고 바다 건너가지도 않고 자기가 스스로 생각했던 자기 기준에 입각해서 “나는 흠이 많아. 나는 티가 많아. 나는 많은 죄를 지었어.” 그러면 묻지요. “무슨 죄를 지었는데?” 부흥회 가서 없는 죄도 만들어내고 옆 사람이 가슴을 치면서 회개를 하니까 부러워서 나는 무슨 죄 지은 것이 없을까 해서……. 교회 올라오는 계단에 보면 무슨 시신이 하나 있을 거예요. 제가 귀뚜라미를 밟아서 그게 죽어 있을 거예요. 그 귀한 생명을 멋도 모르고 밟았으니 그대로 납작 뭉개져 죽었지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 남한테 피해 안주고 존재 할 수가 없어요. 방귀를 뀌어도 가스로 남에게 피해를 주게 되어 있는데 사람은 살아가면서 아무리 훌륭한 아버지 어머니라도 나중에 늙어서 80넘어 치매 걸리면 자식들이 죽을 맛입니다. 그때마다 상투적으로 내뱉은 핑계가 뭐냐 하면 “내가 너 키울 때 고생 많이 했다.” 그러면 자식이 거기에 대해서 되받습니다. “낳기는 왜 낳았는데?” 이것은 백날 해봐도 결론이 나지 않는 논쟁이에요. “누가 낳으라고 했고 키워달라고 했나?” 키울 때는 예쁘다, 예쁘다, 해 놓고는 왜 돌아서서 딴 소리를 하느냐는 말이지요. 키울 때 고생 많이 했다면 예쁜 짓 한 것 다 돈으로 쳐달라는 말이지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밖에 모르기에, 그저 자기가 훌륭해서 천당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천당 가기 위해서 자기 기준에 의해서 흠도 티도 없다고 자꾸 살피다 보니 점점 더 선악이라는 질곡에 빠지고 있어요. 저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꿀통에 빠진 파리, 움직이면 그저 느껴지는 것이 ‘내가 혹시 행동 잘못해서 저주받은 것이 아닌가?’ 또는 ‘내가 이렇게 착한데 내일쯤 되어서 복이 오지 않을까? 복이 오는 소리가 막 들리는 것 같은데?’ 꿀통이 끈적끈적해서 ‘내가 잘했는가, 못했는가?’ 그것이 자기의 정신세계를 완전히 질식 상태에 빠뜨리고 맙니다. 말이 그렇지 지금 교도소 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수감자에요.


기껏 힘들다고 벗어나려 하는 것이 자살, 번개탄. 그게 완전히 마귀한테 속아 넘어간 거예요. 선악과 따먹으라고 해서 덜렁 따먹었지요. 자기 딴에는 없앤다고 따먹었는데 없앤 것이 아니고 따먹고 난 뒤에 아예 우리 안에 장착되고 말았어요. 이제 본격적으로 선악과 티를 팍팍 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베드로가 이런 질문을 예수님한테 했는데 그 질문은 사실은 우리도 하고 싶은 질문인데 고맙게도 베드로가 대신 해줬어요. “예수님, 예수님은 형제를 용서하라고 했는데 몇 번 용서하는 것이 용서입니까?”


그게 몇 번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걸 왜 묻느냐는 거예요. 그걸 묻는 심보가 뭐냐 하면, 사는 게 무섭다는 거예요. 두렵다는 겁니다. 장래가 불안정하다는 겁니다. 장래가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살다가 내 장래가 어떻게 될지 자기 자신이 미덥지가 않는다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한 세 번? 그 정도 하는 거라면 그 정도는 믿어진다는 겁니다. 왜, 세 번 정도는 용서했기 때문에. 앞으로 원수지는 일 생겨도 꾹 참고 세 번 만 넘어가면 그것으로 천국가기에. 천국 가는 것도 용서하는 것도 전부 다 자기가 알고 있는 선악 기준에 준해서 그런 식으로 자기에게 칭찬도 하고 격려도 하는 식으로 하는 겁니다.


어항에 있는 금붕어가 물에 뜨는 법을 알겠습니까, 물에 가라앉는 방법을 알겠습니까? 물고기는 물에 뜨는 방법을 알아서 뜨는 것도 아니고 물고기가 물에 가라앉는 방법을 몰라서 안 가라앉는 것도 아니고 물고기는 어떤 방법이 아니고 그냥 떠 있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해놓고 보니 너무 심오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그러면 그것보다 더 심오한 이야기를 할게요. 아침에 눈을 뜨면 대지의 온 사방이 환하잖아요. 여러분, 낮에는 왜 환한지를 아시겠습니까? 생각해 본적이 없으시죠? 그게 태양 때문에 환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침 되면 늘 상 환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한테는 아침이 되면 환해야 그것이 나를 잘 대우하는데 합당한 환경이라고 여기는 것에 우리는 익숙해져 있어요.


태양에 대해서 고마워할 줄 모른다 그 말이지요. 태양이 없으면 아침이 되어도 깜깜해요. 노르웨이 같은 극지방에 가까운 북유럽에 가면 그것을 느낀답니다. 낮인데도 환하지가 않다는 거예요. 위도가 너무 높아서죠. 우리는 당연히 깜깜한 밤에 살아야 되는데 웬 떡인지 은혜인지 태양이 있어서 아침 7시경이 되면 훤해지더라는 말이지요. 고마워해 본적이 있습니까? ‘오늘도 태양이 떴다. 너 아니었으면 오늘 회사 못 갈 뻔했다.’ 이렇게 고마워한 적이 있어요? 사람은 주제파악을 못해요. 태양 없이는 한 순간도 못산다는 것을 모르고 마치 자기 힘으로 노력하면 자기가 사는 것처럼 자꾸 어떤 방법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물고기가 어떻게 물에 뜨지? 물고기한테 물어보세요. 물고기는 그런 방법 같은 거 몰라요. 이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물고기가 물에 뜨는 이유도 모르면서, 태양이 있는 이유도 모르면서 마땅히 태양이 날 위해서 매일같이 떠 줘야 된다고 생각하는 그 오만함, 자만심, 그것이 태양에 대해서 뿐만이 아닙니다. 내가 아는 죄가 죄고 내가 아는 선은 선이라는 이 되도 않는 오만과 자만심. 헌금 하면 착한 일이고 헌금 안하면 나쁜 일이고 교회 오면 착하고 안오면 나쁘다고 여기는 그 오만함과 자만심.


그것은 홍해 바다 건너기 전, 인간들의 이쪽 세계에서 자기들끼리 오해를 해도 너무 오해한 거예요. 갇혀 있는 상태에서 오해를 해도 너무 한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서 사도바울은 저쪽의 영을 받았기에 바른 소리를 합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네가 뭔가 행해서 의로울 수가 없다. 네가 어떤 행동을 해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빛이 왔으나 사람들이 어두움에 속했기에 빛을 빛이라고 알지 못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 1:5-10)


그 빛, 그 태양이 누구라는 말입니까? 예수님 본인을 이야기하거든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사람이 눈을 뜨면 태양이 있으니까 마땅히 태양이 떠야 되는 줄 알지만 태양이 없다면 우리는 그냥 캄캄한 것이 우리한테 정상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이야기를 해요. “너희들은 빛이 없다. 태양도 없다.” 그냥 캄캄하고 어둠인데 문제는 자기가 어두운 줄을 모르고 있다는 게 문제에요. 빛이 떴습니다. 빛이 떴으니 어두움에서 그동안 자기가 알았던 여러 가지 개념들, 이것은 죄고 이것은 천국이고 이것은 지옥이고 이것은 예수고 이것은 하나님이고 이것은 삼위일체고 이것은 교회고 교회는 이렇게 해야 되고, 이런 모든 것들은 다 어두움이 조작해 낸 사기입니다, 사기극. 한국교회는 사기단체라고 보면 돼요, 사기단체. 다단계도 아니고 하여튼 이것은 사기단체라고 보면 돼요. 인간들 스스로 조작된 겁니다.


진짜 천국 가는 사람은 교회 믿어서 가는 사람이 없어요. 천주교는 더 심하고. 천주교는 성당 아니면 지옥 가는 줄 알아요. 영세 안 받으면 지옥 가는 줄 알아요. 그것은 다 조작된 거예요. 계속 배후에서 마귀가 장악해서 인간들로 하여금 인간들이 납득이 되는, 인간들이 이해되는 식으로 고객확보하기 위해서 그런 짓들을 한 거예요. “너희들이 윤리 도덕적으로 이런 것들이 악한 것을 알지? 악할 때는 예수의 피로 용서받아야 돼.” 죄도 모르면서 예수 피가 적용이 될까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개한마리 키우듯이 예수님을 쓰다듬고 예쁘다고 하고 키우고 목욕시키면서 나의 예수라고 안방에다 집어넣는 거예요. 십자가를 볼 때 마다 예수님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가요.


십자가는 소유용이 아니고 오히려 날마다 우리를 폭파시키는 능력으로 옵니다. 십자가 안에 있다는 것은 ‘나는 믿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믿은 것이 없다.’ 그런데 주께서는 믿도록 날마다 세상을 보는 눈을 새롭게 바꿔지게 하는 겁니다. ‘네가 세상에서 떠다니는 것은 나의 힘, 의로운 나의 능력’이라는 것, 그런데 ‘그 능력이 너의 종교적인 행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화목제물, 자신의 피를 가지고……, 레위기에 나오는 찢고 지지고 태운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한 거예요. 그것은 일종의 건축사무소의 책상위에 있는 모형입니다.


모형이라는 뜻은 거기서 시간개념이 빠져있는 거예요. 모형은 내일이 된다고 해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거든요. 피노키오도 아닌 바에야 한 달 뒤에 가도 맨 모형 그대로지요. 인간은 자기에게 의미를 두기에 자꾸 자기에게 시간요소를 집어넣어서 자기하고 남이 자꾸 달라진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모형 화되면 어제의 나나 오늘의 나나 똑같아요. 모형은 그냥 모형일 뿐입니다. 어떤 모형, ‘너는 백날 살아봐야 그냥 죄인의 모형’ 죄인은 이런 모습이라는 그 죄인이 모형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저 예수도 안 믿고 자기만 믿고 사는 모형인데 그 앞에 화목제물, 친히 자신의 피로 말미암아 완성하신 그 화목제물, 십자가에서 나오는 그분의 피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놓고 그것을 도가니에 집어넣어서 그 속에서 천국갈 수 있는 사람으로 제조해내는 과정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것을 통보해 주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게 되는 겁니다. 전에는 ‘내가 이런 것도 부족하고 저런 것도 부족하기에 죄인’이라고 여겼는데 살아가면서 느끼는 점이 뭐냐, ‘나는 나밖에 모른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이런 식으로 하면 구원되고 천당 갈 거야.’ 하는 그것도 따지고 보면 나밖에 모르는 행동에 지나지 않아요. 그것마저 주님 보시기에는 죄가 되는 거예요. 왜, 예수님한테 관심이 없고 자꾸 자기에게만 관심을 보이면서 자기안의 폐쇄적인 것 밖에 모르니 그것이 바로 죄잖아요.


제가 우리 교회나 십자가마을에 글을 올립니다. 글을 읽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지 올립니다. 거기에 진화론과 창조론의 논쟁을 주제로 한 글을 올려놓았습니다. A4용지로 20쪽의 글을 올려놓았어요. 좀 보다가도 지루해서 대부분 끝까지 안 볼지 싶어요. 결론만 후딱 보고 말 것 같은데. 거기 보면 이렇게 해 놓았어요. “이 세상은 진화된 것이지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그쪽을 향하여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은 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하는 그 사람들에게 죽었어요.


누가 천지를 만들었는가, 라고 질문하는 자체가 잘못되었어요. 왜냐하면, ‘누가’를 집어넣으면 그 ‘누가’를 요청하는 ‘나’는 안 죽게 돼요. 나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 됩니다. ‘나는 믿는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을.’ 이것은 전혀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왜냐, 하나님이 창조한 그것을 내가 손으로 예쁘다고 쓰다듬고 내 소유로 집어넣어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을 믿는 나는 살았다.’라고 되기에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거지요.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 회로가 ‘역시 믿을 놈은 나밖에 없다.’는 식으로 되돌아오는 회로에 불과한 거예요.


“나는 예수를 믿는다.” 이것도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거기에 나도 들어가고 예수도 들어가니까 둘 중의 한쪽으로 주도권이 쏠려야 되는데 내가 예수를 믿어주니 예수는 내가 믿어주는 대상에 불과하고 역시 주도권은 누가 쥐고 있는가, 역시 내가 쥐고 있는 거예요. 앞 뒤 다 빼버리면 결국 나는 나만 믿은 거예요. 나만 믿는다는 그 사실은 누구나 그러한데요, 거기서 멈추지 말고 ‘그의 피로 인한 화목제물’ 앞에 자기 자신을 세워보세요. 아, 나만 믿는 이것이 바로 죄고 바로 이런 죄인을 주께서는 도가니에 하나의 제물로 집어넣어서 내가 손대서는 도저히 될 수 없는 죄인을 주님의 화목제물, 예수님이 죽었다는 그것을 근거로 해서 우리로 하여금 의인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 작업은 우리 좋으라고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좋으라고 한 일이 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26절에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말릴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에 말려든 거예요. 하나님께서 자기 좋으라고 한 그 작업에 우리는 그냥 말려든 겁니다. 말려들어서 우리는 하나의 생산품이 된 거예요. 생산품이 되어서 뒤돌아보니 세상 어떤 인간도 통과할 수 없는 진노의 불바다를 우리는 어린양의 피, 화목제물을 완성했다는 그 피 때문에 보니까 벌써 이미 건너왔어요. 이미 건너와 버렸어요.


보니까 “나도 넣어 달라.”고 하면서 천당 가려고 애쓰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에요. 그런데 천사가 막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안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천사가 막고 있고 십자가를 믿는 본인은 외롭기도 하지만 ‘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올 수 있구나.’ 아무나 천당 가고 싶다고, 손든다고 보내주는 것이 아니고 다른 이는 허락되지 않았는데 너희에게는 허락되었다(마 13:11)는 그 말씀처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요 15:16)는 그 말씀처럼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요 6:65)는 그 말씀의 적용을 우리에게 해 주신 덕분에 우리는 우리 몸에 완전히 말씀의 재봉틀로 문신을 새겨놓은 거예요.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올수 없다는 것이 등짝이며 온 몸에 문신으로 새겨져 있고 오직 창세전에 택한 자만 사랑 받는다(엡 1:4)는 이것도 써있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살아갈 때마다 풀풀 말씀만 증거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저는 아무리 신자라고 해도 말씀에 관심 없는 것을 신자라고 할 수가 없어요. 사기가 아닌 복음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를 그냥 덮쳐서 말씀대로 그냥 생산해낸다, 이것뿐입니다. 결국 외칠 것은 이것뿐이에요.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 15:10) 이것뿐이에요. “우리가 자랑할 것이 어디 있느뇨, 우리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롬 3:27, 갈 6:14) 그러면 다른 사람이 “뻔뻔하구나. 돈만 밝히면서 자기잘못도 회개하지 않고 뻔뻔하구나.” 여러분, 올해는 제발 좀 뻔뻔합시다. 누가누가 더 뻔뻔한지 뻔뻔함의 극치를 보이는 교회이기를 ……,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는 그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 하여튼 알아서 제발 주님만 자랑할 수 있도록 뻔뻔하게 살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기준이 있는데, 이스라엘 통해서 제사법, 화목제물도 있는데 자꾸 우리는 거기에 관심은 없고 자기 맘대로 도사가 되어서 훌륭한 사람 되어서 남에게 신앙 좋다는 자랑 하려고 그따위 식으로 평생을 교회 다니고 있습니다. 이제는 성령께서 폭파시켜주셔서 ‘너는 처음부터 죄인이야.’라는 그 소리가 기분 좋은 소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