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15강-죄 아래서(3;9-18)이근호130106

아빠와 함께 2013. 2. 7. 11:29

죄 아래서 (롬 3: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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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1-06 13:35 
죄 아래서

2013년 1월 6일                              본문 말씀: 로마서 3:9-18

(롬 3:9, 개정)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롬 3:10, 개정)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1, 개정)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2, 개정)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3, 개정)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롬 3:14, 개정)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롬 3:15, 개정)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롬 3:16, 개정)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롬 3:17, 개정)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롬 3:18, 개정)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이들을 일괄적으로 다루십니다. 사람들은 각자 생각하기를 다른 사람에 비해서 항상 우수한 존재로 살아간다고 자부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정말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되면 이런 소리는 쑥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일반인들 끼리의 만남이란 실은 각자 자기 이야기하고 싶어 만납니다.

자기 속에 한 맺혀 있는 것, 남에게 당한 분풀이 같은 것, 속상하는 이야기, 몸 아프다는 이야기, 이런저런 기운들을 쏟아내기 위해서 말 통하는 인간들을 자기 앞에서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막상 상대방이 자기 속에 너무 깊숙이 들어오게 되면 난감하게 됩니다. 서로 마주 보면서 이야기하는 사람을 막상 옆에 놓고 보니 서로 아뭇 소리 안합니다.

강아지는 키우는 재미로, 말 동무로 삼기 위해서 곁에 둡니다. 하지만 막상 그 강아지가 주인의 몸 속에 들어온다면 난감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자신의 주인공인지 아니면 강아지가 자신의 주인공인지 분간되지를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란 자기가 자기를 살려내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런 존재가 저만치 지옥이 다가온다면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대상화시켜서 그것을 지키려고 하지 마시고 아예 우리 자신이 말씀 속에 “풍덩” 빠졌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되면 말씀의 일관됨 속에서 우리가 빠져 나오지 못하고 같이 휩쓸려 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진리의 집으로 사용하시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매사에 하나님에게 말씀으로 당하기만 하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세상은 멸망해도 나만 살겠다는 생각으로 교회 나오시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나도 죽고 세상도 죽고 모두 다 죄인인고로 멸망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모두 다 같은 말씀 속에 녹아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를 가지고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이란 실내용은 없습니다. 그냥 뭔가 통과할 것을 통과시켜주는 용도의 관일 뿐입니다. 우리가 그 토해내는 것을 통제할 능력은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은 이런 식으로 취급하시는 겁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시편 시편을 인용했습니다. 시편 14:1-7에 보면, “[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다윗’이라는 단어 ‘시온’이라는 단어를 주의 깊게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이란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요 시온이란 우리가 생계를 위하여 터-잡고 사는 그 공간과 다른 특수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건에 의해서 비로소 명칭이 붙은 인물과 공간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건은 우리가 익히 점유하고 있는 바를 배경으로 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세계란 마치 ‘해저의 세계’와 같아서 바다 위에서 보면 모든 것들이 고요하게 바닷물 속에 잠겨있는 듯 하지만 그 안에 보면 산호초라든지 온갖 울퉁불퉁한 바위들과 계속들과 산봉우리들이 있습니다. 마치 베트남의 하롱베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은 각자 고요한 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권력의 등고선을 갖고 있습니다. 힘이 있는 자들에게는 부딪치지 말고 고개 숙여야 하고 무시할 것들은 과감하게 무시해야만 하는 그런 골짜기와 힘의 계곡 속으로 우리는 한 마리의 피라미로서 헤험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바로 육의 세계입니다.

육의 세계로서 육에서 생겨나지 않는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즉 영의 세계를 육의 논리로 따져서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식은 이것입니다. 일괄적으로 모두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그 어떤 차이도 없게 말입니다. 시편 14편에서는 특별한 인물과 특별한 지명을 거론합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이라는 인물과 ‘시온’이라는 장소입니다. 다윗 없는 시온이란, 즉 천국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에게 뭔가 특별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언약입니다. 시편 89:3-4에 보면,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 하셨나이다(셀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라는 존재가 특별남은 다윗의 재능이나 능력이 아니라 그에게 담아놓은 하나님의 언약이 오로지 하나님의 성실하심으로만 성취된다는 점입니다. 로마서 1:2-4에 보면,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사도를 통해서 이 하나님의 약속과 그 성실한 이행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모든 인간들을 일괄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은 모두 ‘자신이 자기를 살려내는 식’으로 살아가는 의도가 갖고 있습니다. 이 의도는 인간들 끼리는 서로 용납이 되지만 지옥을 몰고 오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의도가 나쁘면 인간이 아무리 경건되고 착한 일을 해도 모두 악마의 일, 즉 ‘거짓말’로 간주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온은 내게 없습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선택한 것은 구원이 가능한 시온을 만들어내기 위함입니다. 시온이라는 장소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없는 장소에 구멍을 뚫어서 구원을 성사시키려 합니다. 이 시온을 만들기 위해서 시온 이외의 모든 장소는 필히 망해야 하는 공간인 것을 증명하시고자 하나님께서 세상 일에 관여하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보는 바를 보게하십니다. 어떻게요? “친히 기르신다”는 점을 밝히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보고서도 하나님의 일을 알아채지를 못합니다. 그 정도로 우리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을 용서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 13-01-08 06:33 
15강-롬3장 9-18(죄 아래서)1301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3장 9절에서 18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2페이지입니다.
 


로마서 3:9-18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성경을 볼 때 우리가 성경 밖에서 성경을 보지 마시고 우리도 성경 안에 우리를 집어넣으시기 바랍니다. 풍덩, 하고 성경말씀 속에 우리를 집어넣게 되면 세상은 망해도 나는 살겠다, 하는 의식자체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 밖에 있으면 이 말씀을 지켜서 나 혼자라도 구원 받아야지, 그렇게 되지만 우리가 말씀 안에 들어가 버리면 그것이 용납이 안 됩니다. 놀이동산에 가면 롤러코스터라는 놀이기구가 있지요. 빙빙 도는 것도 있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도 있는데 밖에서 구경할 때 놀이기구가 무너졌다고 할 때 ‘무너졌구나. 참 안되었다.’ 하겠지요.
 


그런데 막상 본인이 롤러코스터를 타고 가다가 그게 무너졌다면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니지요. 자기도 같이 망하는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것은 우리를 바깥에 세워놓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냥 당하기만 하는 겁니다. 성경이 이렇게 간다고 하면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해요. 그렇게 가는 것으로 믿으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으면 나는 의인되어야지, 나는 악인 안 되어야지, 하고 발을 빼시면 안 됩니다. 우리도 여기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몰아넣으신 겁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여기에서 나는 예외로 쳐주세요, 빼주세요.”라고 되면 그 사람은 성경과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천국 가는 기술 배우러 온 학원생에 불과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태어난 것도 하나님께서 태어나게 하셨고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께서 살게 하는 것처럼 마지막 우리의 운명도 우리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손에 달린 거예요. 자꾸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려내는 방식으로 살려고 하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습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잖아요. 소용없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제 제사, 내 예배를 받아주옵소서.” 안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은 하나님 쪽에서 살려내는 방식만 사는 것이고 그렇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날 안 살려준다면 우리는 사는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세계에 대해서 상당히 거부감을 갖고 있어요. 역사라 하는 것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고 내 인생은 내가 하기 나름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말씀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모두를 한쪽으로 몰아세우는 겁니다. 예를 들면 지옥이 저만치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라는 주체가 거기에 대해서 마중을 나갈 수가 있습니까? 마중을 나갈 수가 없어요. 우리는 감당이 안 되고 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 무서운 지옥 앞에서 “나는 지옥이 와도 버텼다.”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데, 우리가 흠도 티도 없어야 하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덮어오는 지옥을 피할 수가 있습니까? 먹구름이 들이닥치고 소나기가 오면 그냥 흠뻑 맞을 뿐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그냥 당하기만 하는 것이 세상이기에 인간이 산다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겁니다. 아무 의미 없는 인생을 왜 사는가, 그것은 우리 주변에서 혹은 나라는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섞여 들어가는 겁니다. 우리가 필요 있다, 없다는 것을 내가 결정할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필요하다, 필요 없다는 것을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위해서 너는 이런 면으로 쓰인다, 그것 뿐입니다.
 


그것도 당하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할 때 그 진리를 내가 만들어내고 내가 연구해서 “이게 진리가 맞지요?” 하고 우리가 작성해서 기안 결재 받듯이 내 미는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 손을 떠나서 일이 잘 진척되고 있습니다.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해도 그렇게 올해도 그렇게 무슨 일이 일어나거든 “이런 일조차 다 진리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심하게 일으키셨구나.” 이렇게 생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새삼 고마울 것은 없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해서 우리는 날 때부터 이단이라는 뜻이에요. 이단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이나 행동을 잘못하고 교회를 잘못 선택해서 이단이 아니고 이미 태어날 때부터 이단을 선호하게 되어 있어요. 특히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라고 해서 우리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라 하니 결국 우리는 하나의 파이프라는 말이지요. 실속은 없고 물을 배출하는 배수관 역할밖에 안한다는 말입니다. 안에 내용은 없고 뭐가 통으로 있는데 안에 들어 있는 힘이 바깥으로 배출되고 통과하는 관 같은 것, 목관악기 같은 것처럼 우리가 쓰인다는 겁니다.
 


우리를 통과하는 것이 좋은 것이면 좋겠는데 온갖 더럽고 나쁜 것들이 다 통과한다는 거예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이 말씀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이 의도가 나쁘면 다 거짓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하고 아무리 좋은 복음을 이야기해도 그 의도, 그 노림수가 수상하고 노림수가 잘못되면 모든 착해 보이는 짓들도 다 거짓이고 악마적인 성향을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이미 의도자체가 진리가 뭐냐가 궁금한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으로 사는데 그런 의도가 충만한 것이 우리 속에서 파이프를 통해서 계속 생산되고 배출되고 있어요.
 


남은 죽어도 나만 살면 그만이다, 이런 뜻입니다. 제가 서울 가려고 직행 1번을 탔는데 먼저 타고 있던 80쯤 더 되어 보이는 노인 두 분이 둘이 앉는 좌석에 혼자씩 앉아놓고는 한 명이 뒷좌석에 앉은 사람을 향해서 거꾸로 보면서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시끄러웠어요. 한 오지랖 하는 제가 가만있을 수 있습니까? 이야기 내용은 커피가 어디가 맛있다는 그런 이야기에요. 노인네 소리 하면 기분 나빠 할 테니까 “아저씨, 시끄러우니까 같이 나란히 앉아서 조용조용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했어요. 그 소리에 예, 하고 두 노인이 같이 앉았어요. 그러더니 그 다음부터는 이야기를 안 해요.
 


‘야, 저기에 무슨 진리가 있다. 어떤 사태든 진리를 보여주는 거구나.’ 둘이 마주볼 때, 대상화 될 때는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싶다가 나란히 같이 앉으니까 둘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안 해요. 방금 전까지는 커피 이야기를 했는데 가만있어요. 왜, 가까워도 너무 가까워. 너무 가까울 때는 이야기가 안 되는 거예요. 뭔가 간격을 떼야 되는데 너무 가까운 거예요. 한발자국 다가서면 한발자국 두 발자국 물러나고, 이렇게 해야 계속 간격이 유지되는데 이것은 가만있으니까 ‘우리가 무슨 사이? 사귀는 사이인가?’ 너무 가까워서 말을 안 해요.
 


그래서 제가 또, 늘 깨닫고 있지만 또 깨달은 것이 있어요. 사람이 주여, 주여, 한다는 것이 그만큼 예수를 안 믿는다는 뜻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기도할 때 말이 많다는 것은 예수가 안 믿어진다는 이야기에요. 안 믿고 있다는 뜻입니다. 안 그래도 오후기도 다 빠져버리는데 이런 소리를 해서는 기도 할 사람 하나도 안 남아나겠어요. 여러분, 강아지를 키우는 것과 강아지를 삼키는 것과 차이가 납니다. 강아지를 키우면 예쁘다, 하지만 강아지가 목구멍 속으로 쑥 들어와서 내 안에 있으면 이게 뭐야, 이런 상태는 내가 원치 않는 상태인데, 내가 왜 강아지를 임신해, 내가 개인가, 내가 미쳤나, 강아지는 키우는 맛이지 삼키는 맛이 아니거든요.
 


그것은 오뉴월에 개 잡아먹을 때나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고 예수고 타인이고 누구고 간에 키우는 재미고 내 말을 들어줄 때나 타인이라는 것이 필요한 거예요. “가까이 오지 말고 또 너는 네 소리 하지 말고 그냥 내 말만 들어라. 내가 이런 하소연이 있고 이런 한이 맺혔고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고 제발 내가 이렇게 힘들고 어렵게 산다는 것을 알아줘.” 할 때만 상대방이 계속해서 필요한 거예요. 주저리가 계속 나와요. 친구사이에 전화하면서 수다 떨다 보면 한 시간도 넘어가고 두 시간도 넘어가잖아요. 그게 친구 아닙니까? 그런데 친구하고 한 집에 살아보세요. 할 말이 없어요.
 


너무 가까이 오지는 말고 적당히 거리 두면서 “너라는 존재는 내가 한 맺히고 괴롭고 어려울 때 그것을 ‘잘했어. 고생했어. 위로해줄게.’ 그런 역할을 하라고 네가 있”는 거예요. 사람이라는 것이 결국 자기가 자기를 살려내는 방식 외에 모르기에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어디에 포함시키는가, 진리를 보여주는데 우리를 거기에 포함시켜 버려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풍덩! 죄인밖에 없는데다 풍덩 집어넣어요. 그럼 우리는 여기서 강렬하게 이단적인 본성을 다시 한 번 발휘하지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이 기준은 대인관계, 사람과 사람사이의 만남에서 이것이 드러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 보면 교회 안 나가도 어진 사람 많고 교회 안 나가도 평생 착한 일 하면서 남에게 희생하고 남 안하는 것 오지랖 넓게 나서서 순교하고, 이런 사람들 교회나 하나님하고 관계없이 많이 있어요. 심성적으로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 와서 사람 좋아진다는 그런 것이 없어요. 교회 안 나와도 선비적인 심성 가진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고 부처 같은 사람들도 많아요. 악한 사람들도 많지만 착한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이들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는 이것은 누구에 마주침에서 비로소 나오느냐하면, 지옥을 만들고 천국을 만드신 하나님과 마주했을 때 인간은 하나님의 일에 동의 못하는 존재들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는 일방적인 일에 대해서 아주 핏대를 내고 거기에 대해서 강력한 거부의식이 우리 내부에서 솟구쳐 나오는 겁니다. “깨닫는 자도 없”다는 이것은 우리 사람과 사람사이에서는 이런 것이 없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서로의 속에 안 들어가기로 일종의 약속처럼 되어서 적당히 거리를 두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부부관계도 마찬가지고 부모자식 사이도 마찬가지에요. 자식을 삼키는 것이 아니고 자식을 키우고 아내는 남편을 키우고 남편은 아내를 키우는데 나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고 너무 속속들이 알아버리면 차라리 부부사이보다 혼자 사는 것이 낫습니다. 너무 힘들어요. 걸핏 하면 전화해서 “거기 어딘데? 스마트 폰 가지고 거기 한 번 비춰봐라.” 이래가지고 사람이 숨이 막혀서 살겠습니까? “등산 갔는데 진짜 등산 간 것인지 한 번 보자. 팔공산 간다고 나갔는데 진짜 팔공산인지 보자.” 이런 식이면 남편이 등산 가고 싶어 하겠어요?
 


사람이라는 것이 자기밖에 모르니 그 점을 서로 서로 인정해 주면서 살면 된다는 식으로 인간들은 굳이 터치 안하는데 왜 하나님은 나서서 “너는 너 밖에 모르지?” 하는 낯 뜨거운 이야기를 하시느냐는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싫은 거예요. “제발 나 혼자 살도록 좀 내버려 둬.” 어떻게 살든지 간에 그냥 좀 놔두라는 말이지요. 세상이 망해도 나만은 구원 받겠다는 거예요. 그런 인간들을 주께서는 한꺼번에 말씀 속에 집어넣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재료가 되어서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네 손으로 긍정하거나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나는 의인이 되겠다, 라는 소리 하는 그것이 나는 죄인이 맞구나, 하는 고백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누구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다 하는 이것에 대해서 우리가 분노하거나 짜증내거나 거부하지 마시고 ‘어, 하나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네? 나는 지금까지 나쁜 짓 한 적이 없기에 누가 뭐래도 내가 의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성경에 보니까 의인이 없다고 되어 있으니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그럼 이제부터 의인이 없다고 주장하는 하나님의 논리를 따라가야지.’라는 생각만 먹으면 아무 문제없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의인은 없다는 그 진리 위에서 내가 그동안 ‘나만은 그래도 의인’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했었구나, 하고 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인은 없나니” 앞에 자기를 세우면 이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을 위해서, 진짜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쓰임 받는 종으로의 모습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문제될 것이 전혀 없는 거예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이 이야기를 시편 14편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성령 받고서 했습니다. 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예언입니다. 우리가 성경 보면서 다윗이 시편14편 1절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라고 했는데 성경을 우리가 모른다고 칩시다. 성경 없이 세상 본다 합시다. 그러면 세상은 별 문제 없는 것처럼 보이지요. 대구의 TBS 지방방송의 광고에 보면 베트남문화여행 회원모집을 해요. 베트남 하롱베이라는 곳이 그렇게 좋답니다. 그곳 정경 사진도 많이 보여주면서 광고를 하는데 그곳이 아주 절경이에요. 하롱베이를 보면서 제가 느낀 것이 뭐냐 하면, 사람들이 보기에는 세상이라는 것이 각자 자기 일을 하면서 균등하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제가 보기에는 하롱베이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쪽으로 힘이 응축되어 있느냐, 하롱베이 절경의 바위들이 우뚝 솟은 듯한 거기에 대해서 고개를 숙이도록 되어 있어요. 그리고 힘이 없는 곳에서는 건방을 떨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러다가도 ‘어, 저 사람한테 잘못 보였다가는 내 출세에 지장 있다.’ 싶으면 그 앞에 거대한 암석덩어리가 서 있는 것 같은 겁니다. 꼭 해저탐험 하는 것 같아요. 바다를 위해서 보면 그냥 파도위에 아무것도 안보이지만 해저터널 안에 들어가서 보면 산호초부터 해서 온갖 바위들이 있어서 그 힘이 있는 곳에서 마주치고 부딪혀서 울기도 하고 반대로 자기보다 약한 곳에서는 골탕을 먹이기도 하기도 하지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권력, 힘의 등고선에 의해서 복잡한 계곡, 굴곡으로 짜여있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고개를 숙여야 되느냐, 누구한테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가, 그런 골을 누벼가는 작은 피라미같은 입장이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에요. 살기 참 힘들지요. 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때까지 가정에서 오냐, 오냐 키워서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들, 이미 회사에 입사하자마자 “우리 회사에서는 근무 중에 담배 못 피웁니다.” 하죠. 집에서는 담배 못 피우게 한다고 부모에게 그렇게 대들던 인간들이 회사에서 일과 중에 담배 못 피운다고 하면 “예, 부장님!” 하고 고개 푹 숙이고 들어가요.
 


누가 저렇게 길을 잘 들여 놓았는가? 본인이 알아서 기잖아요. 왜, 이것은 힘이 있는 곳이기에 여기서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그 애가 세상을 알아간다, 또는 세상을 배워간다는 겁니다. 힘이 있는 자, 권력이 있는 자가 누구인지, 높낮이를 따져가면서 부딪히지 말아야 할 때는 안 부딪혀야 되고 숙일 때는 숙여야 되고 함부로 해야 될 때는 함부로 해 줘야 되고, 그게 사람 사는 복잡한 동네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주 간편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이 눈치 저 눈치 볼 것도 없다는 거예요.
 


보편적으로, 일방성으로 그냥 나가버리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시편 14편에 보면 로마서 오늘 본문에서 읽었던 그 대목이 그대로 나옵니다. 그런데 로마서에서 안 나온 대목이 나와요. 끝부분에 나옵니다. 본문 이야기가 죽 나오고 끝부분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7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다윗의 시이니 다윗이라는 특수한 인물을 주목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시온이라는 곳, 그 특수한 공간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인간을 일괄적으로 처리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전부 다 죄인밖에 없다.’ 물론 인간 대 인간의 마주침에서는 그것이 안 나타나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할까요? 사람 대 사람의 모든 만남이라는 것은 자기 한 풀이, 자기 넋두리를 들어달라고 임시적으로 사용하는 대상에 불과한 거예요. 그 사람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를 위해서, ‘저 사람 대하는 것이 참 편해. 같이 살까?’ 그래서 사는 겁니다. 시어미와 며느리사이도 마찬가지고요.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나에게 힘이 된다 싶으면 나에게 고개 숙이고 힘도 안 되면서 나의 힘을 오히려 빼앗기겠다 싶으면 내 앞에서 꺼져라, 이렇게 하는 것이 세상인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자기가 자기를 살리는 방식에 편들지 않으시고 어떻게 하는가? 일괄적으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다 똑같다.’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갈구기 위해서 하신 것이 아니고 다윗이라는 특수한 인물과 시온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하나님께서 마련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시온은 쉽게 말해서 천국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있다는 거예요. 인간들이 사용하는 그 논리로서는 천국이 눈에 안 보입니다. 다윗이라는 특수한 인물도 눈에 띄지를 않아요. 생각해 보세요. 육에서 나오지 않은 천국이라 하는 것은 육의 논리로 따라가면 절대 파악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알고 있는 육의 논리로 따져서 공부를 하고 철학을 하게 되면 결국 인간만세, 그것으로 끝나지 천국이 있네, 이런 논리로 안 간다니까요. 인간의 육에서 나온 논리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 영에서 나온 논리 앞에서 인간의 육의 논리는 한계성을 갖고 있습니다.
 


찾아가고 분석해 봐야 천국에 도달 안돼요. 하나님의 방식은 뭐냐, 육에서 나온 인간은 영까지 도달이 안 되니까 인간을 어떻게 일괄 처리하느냐, “네가 똑똑하다고 아는 그것은 전부 다 죄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다 죄인밖에 없어.” 이렇게 일괄 처리하는 이유가 “이제는 너한테서 손 떼고 내가 영의 논리로 너희를 건져 줄 테니까 너는 그것을 듣고 믿기만 하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간단하고 쉽습니까? 지금 나 혼자 쉬운 것 같아요. 목사가 참 골치 아픈 것이 있어요. 저 사람은 무시해도 될 사람이고 이 사람은 고개를 숙여야 될 사람이고, 저 사람은 우리교회에 헌금을 많이 내기에 좀 우대해야 되고 저 사람은 백날 해도 자기 먹는 점심 값도 안내는 사람이니 무시해도 그만이고, 이런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생각한다는 것은 육적세상에서 하는 버릇, 저 사람이 고개 숙여야 할 대상인지 무시해도 될 대상인지, 이런 식의 세상 버릇을 교회 올 때 그대로 가져오니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하나 알려드릴까요? 이 세상 인간이라면 뒤에 반드시 붙는 것이 있어요. ○○시장, 시장이 붙어요. 17세기 근대 이후에는 무조건 붙는데 그냥 음악이 아니고 음악 뒤에 붙어요. 음악시장, 미술시장, 그리고 인간은 그냥 인간이 아닙니다. 경제인, 상품화된 인간, 이미 자본주의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시장이에요. 교회시장, 그쪽 교회 헌금 얼마 나오고 목사 월급이 얼마나 공짜로 애들 영어 가르쳐주고 노인들 복지시설 되어 있는 교회인지, 애들이 와도 목사가 설교 외에 아무것도 주는 것도 없고 가끔 초콜릿이나 주는 주일학교인지, 진짜 내가 돈 안 들여도 해줄 것 다 해주는 교회인지, 모든 것이 반드시 뒤에 시장이 붙어요.
 


정치판도 정치시장, 국회의원시장, 반드시 시장에 가서야 내가 누구인지 비로소 가치가 드러나고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규정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요. 그게 교회와도 마찬가지에요. 교회에서 내 가치는 어느 정도? 노동을 아무리 해도 시장에서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교환가치가 없으면 그것은 가격자체가 형성이 안돼요.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니 성경도 안보이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덮어버리고 다시 이 시장바닥에서 내가 가치를 높이는 것이 내 할 일이다, 해서 자기가 자기를 살리는 방식으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자꾸 주변을 이용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다윗이라는 특수한 인물과 시온이라는 특수한 공간, 다윗은 시온에 있었다, 다윗이 없는 시온은 없어요. 다윗은 특수한 인물이기에 다윗에게 무엇이 있는가, 하나님의 언약이 있습니다. 시편 89편 3, 4절에 보면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 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다윗에게 약속을 던져줬는데 그 약속은 아무리 인간이, 마귀가 방해를 해도 방해받지 않는 그 약속을 기어이 이 하나님은 성취시키겠다.”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장 처음 시작할 때 이렇게 되어 있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여기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내 구원을 내 수완과 능력에 맡기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일방적으로 “너는 뭘 해도 죄인이야. 가만있어라. 내가 다 한다. 너는 너를 가지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너의 머리나 가슴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가슴, 하나님의 머리, 예수님의 심장에서, 예수님의 사랑에서 나왔다는 것을 느끼면서 살아가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정말 구원받을 사람은 자기가 세상에서 요령껏 살아가는, 자기의 생계유지를 위한 그 수완을 접어버리고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할 줄도 모르고 알아도 아무것도 못 보는 이런 인간을 위해서 어떤 식으로 줄기차게 그리고 묵묵히, 꾸준하게 이렇게 다윗에게 주신 약속을 이렇게 성취해내셨는지 정말 놀랍습니다, 그것만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골로새서 3장 2절입니다. 이번 U튜브 설교에서 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참고로 제 U튜브 설교는 ‘이 근호 TV’ 치면 나옵니다. 강남 스타일만 보지 마시고.
 


골로새서 3장 2절에 보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보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인간들이 보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가 뻔히 보고 있어요. 참새가 날아간다,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것은 참새가 날아간다는 것만 보이지 하나님께서 길러줘서 날아간다는 것은 안 보이는 거예요. 인간이나 하나님이나 다 같이 보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하나님께서 길러주셔서 날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저 인간이 눈길을 걸어가네, 노인이 가네, 가다가 넘어졌네, 우리는 눈길을 걸어가던 노인이 넘어져서 ‘아이고 허리야, 정형외과!’ 그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데 그 보는 것을 하나님도 보셔요. 보시는데 주께서 잘 기르시나니, 그것이 우리가 보는 데서는 빠져있고 주께서는 그것을 집어넣는 겁니다. 주께서 잘 기르시는데 이번에는 정형외과 가면서 정형외과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한 번 보라고 거기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것이 진리에요.
 


어떤 분이 우리교회 홈페이지에 한 질문 중에 이런 것이 있어요. “성경에 보면 ~하라, 하는 것이 많은데 그것을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그런 조의 질문인데 제가 답변을 이렇게 했습니다. “참새가 먹잇감 얻기 위해서 그렇게 날개 짓하고 애를 쓰는데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르시나니.’라고 이야기를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생존세계에서 놀면 굶어죽는데 뭔가 힘 되고 도움 될 만한 사람 찾아다니면서 고개 숙이고 무시할 사람은 무시하면서 사는데 이 방식 자체가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방식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 6:31-33) “네가 백날 싸돌아다녀봐야 하나님 만나면 너는 지옥밖에 못갈 인간이야. 그러니 너는 네가 살아간다는 그것에 매진하지 말고 그 나라와 그 의,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준비된 그 천국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라.” 살아갈 때 어떻게 살아가는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은 철저하게 땅엣 것을 전부 다 체험을 해야 된다는 말이에요. 땅엣 것을 생각지 않기 위해서는 땅엣 것이 뭔지를 알아야 생각지 않을 것이 아닙니까? 지금 내 말이 이상합니까? 땅엣 것을 생각 안한다고 기도원에서 기도하고 있으면 그 기도원이 땅엣 것이라는 생각을 감히 못하잖아요. 땅엣 것을 생각지 않는다고 해서 이제부터 교회에서 산다? 교회가 땅의 일입니다, 교회가! 교회가 땅의 일이에요. 교회 부흥은 다윗에 약속에 들어있지도 않습니다. 우리교회 부흥되는 이런 것은 성경에 안 나와요. 성경에 안 나오기 때문에 우리 교인들은 우리교회를 아예 생각도 안 해요.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는 것은 이 세상 어떤 인간도 피할 곳이 없다는 거예요. 기도원에 가도 장사요, 교회가도 장사요, 집에 있어도 마찬가지고. 이 세상 어디가도 땅엣 것만 있는 세상에 우리가 갇혀 있다는 것을 혹독하게 느낄 때 비로소 ‘하늘의 것이라는 이것은 내가 능력이 있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것을 보게 하시는 그것은 친히 기르시고 그 나라와 의를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성실한 약속의 능력, 약속의 효과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일괄적으로 이렇게 일을 하셔요.
 


시편 14편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7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찾는 자 없습니다. 한 구덩이에 다 집어넣었습니다. 해저터널입니다. 힘의 암투와 힘의 균열이 요동치고 있어요. 진동의 주파수가 서로 얽히면서 혼동이 되어서 서로 영향을 주니까 예측이 불가능해요. 전부 인간들 밖에 모르는 그 세계에 끼어들어서 같이 큰 소리치고 스트레스 받아서 집에 돌아가서는 아내에게 고함치고 술 먹고 난리 피우는데 그러한 세상에서 꾸준하게 묵묵히 다윗에게 약속한 그것은 시온이라는 결실물을 가지고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그 일은 어디서 일어나는가?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주변부라 하는 것은 인간이 물고 뜯고 하는 그 근처거든요. 지난 주 설교한 것 다 잊으셨지요? 에덴동산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고 했습니다. 선악과와 생명과 그 위에서부터 아래로 흘러가요. 생명나무가 있는 그곳이 천국입니다. 그런데 생명나무 우리는 근처도 못가고 구경도 못합니다. 왜냐, 우리는 선악과에서 만들어진 세계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부러 선악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생명나무 세계로 가는 길을 차단시켜 놓았습니다. 접근금지 팻말 붙여서 접근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천국을 상상하고 예수를 상상해도 선악과 입장의 세계관에 준해서 육적인 논리 안에서 생명나무를 상상하기 마련이거든요. 어느 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지금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탈환하려고 애를 써요. 그 이유가 뭐냐, 성경에 보면 감람산에 메시아가 강림한다는 거예요. 예루살렘 근처의 산이 감람산이에요. 미국의 오순절 계통 혹은 세대주의, 쉽게 말해서 보수주의기독교에서 성경을 보기를, 메시아가 감람산에서 양쪽으로 펀 가름을 해서 심판한다는 거예요. 감람산에서 예수님 재림을 맞으려면 여기서 비행기를 타고 거기 가야 돼요.
 


지구 마지막 종말이다. 어떻게 할 건데요? 노아방주를 흉내 내서 생수를 한 3년 먹을 분량을 모아야 돼요. 비상약품도 필요하고 땅굴도 파야 되지요. 거기다가 자동소총도 준비해야 돼요. 식량비축 했는데 인류 최후의 날에 마지막 때를 준비도 안한 인간들이 몰려들어서 도움 받자고 할 때 다 물리치기 위해서는 무기도 마련해야 되는 거예요. 마지막 때를 위해서 사람들이 지금부터 준비를 하고 있는 거예요. 비상연락망 다 짜 놓고 자기들끼리만 연락하는 무전 연락망도 다 설치해 놓고.
 


그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온 걸까요? 노아 때는 방주에 들어가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는 것도 어려워요. 믿음이 아니면 못 들어갑니다. 왜, 빗방울이 안 떨어지는 상태니까요. 말짱한 해가 떠 있는 상태에서 방주 만들어 놓았으니 쓸데없는 것 만들어놓았다고 얼마나 손가락질을 받았겠어요. 지금 마지막 때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쓸데 없는 짓이고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손가락질 당할 이야기입니까? 그런데 그러한 수모는 노아 때뿐만이 아니고 그 뒤에 다윗 때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다윗을 몰고 다니면서 가는 곳 마다 욕을 억수로 얻어먹는 인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처음에 다윗이 잘나갔을 때는 사람들이 팬클럽 따라다니듯이 했거든요. 나중에는 “저거 깡통이다.” 처음에는 “다윗은 만만이고 사울은 천천이다.” 하고 “다윗은 갑이고 사울은 을이다.” 하다가 추종자들이 점점 없어지더니 나중에는 거지 떼로 변했어요. 따르는 사람들이 한 수백 명에 불과했어요. 골리앗 이겼을 때는 잘나갔습니다. 정치라는 것이 그런 것이거든요. 나중에는 수배자가 되어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한테 현상 붙은 신고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누가 믿었습니까? 다윗을 아무도 안 믿었어요. 그래서 다윗도 말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 그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 한 겁니다. 십자가 그 나무작대기만 믿지 마시고 거기에 얹힌 말씀도 같이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십자가.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데 왜 나를 사람 취급 안 합니까, 십자가. 그것은 바로 주변부에서 하나님하고 맞닥뜨리는 것이 겁나서 어정거리면서 노는 우리를 중심부로 몰아세우는 하나님의 놀라운 전략입니다.
 


같은 인간들끼리 놀지 말고 너는 진작 만나야 할 하나님을 만나도록 그냥 중심부로 몰아넣어 버려요. 중심부로 몰아넣으니까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런 논리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 그 죽으심에서 부활되었다는 그 사실에 항상 매일같이 맞닥뜨리게 만드는 겁니다. 천주교 신자들 안방에 가면 제단을 만들어놓았어요. 우리 고무도 천주교 신자니까 제가 봅니다. 보면 성모마리아가 거기 모셔져 있어요. 거기다 십자가묵주 목걸이도 걸어놓고. 고모가 어떻게 하는지 봤거든요. 아침 열시되니까 묵주 가지고 한 알씩 돌리면서 중얼중얼 기도해요. 끝나면 다시 주변부로 갑니다.
 


중심부라 하는 것은 세상 모든 것이 일괄적인 십자가처리, 십자가가 기준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변에서부터 우리를 그 앞에 모으는 작업을 쉬지 않고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중심부로 가기 싫어요. 우리는 중심부는 너무 무섭고 거룩해서 감히 나 같은 인간으로서는 가기 싫어요. 가기가 싫어서 자꾸 나보다 못한 인간들, 똑같은 인간들, 그냥 동창모임이나 가서 술이나 먹고 자기 잘난 체 하는 것, 정치 이야기나 하는 그것이 더 재미있어요. 그렇게 그쪽으로 가도 자꾸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몰아세울 때는 우리가 그 다음부터는 할 말을 잊습니다.
 


“주님, 또 그 나라 그 의를 또 잊었는데…….” 잊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이미 그 나라의 의와 매치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 의는 잊어버리고 그저 돈이나 챙기고 돈만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그 사람은 지금 자기 한 풀이 하듯이 누굴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고 지금 한 풀이 할 수도 없는, 우리를 구원하신 시온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게 바로 이 세상에서 다윗처럼, 예수님 제자들처럼 미움 받고 버림받지만 오늘 장로님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가 원치 않는 그 길, 생명 길로 주께서 요리 조리 몰고 가고 있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면 “에이 씨, 다음에는 잘해야지. 다음에는 저 사람 이용해야지.” 이렇고 있는데 “또 내가 잠간 잊었던 진리를 다시 깨닫게 되었네요.”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가 살아가는 것, 내가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를 살리는 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또 다시 깨닫게 하는 기회를 지금 계속 부여받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하나님의 그 영생, 복음, 천국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다윗처럼 특수한 인물로서 특수한 사명자로서 우리를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그 사명이 끊어지면 정말 우리는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아무것도 아닌데 남한테 안 지려고 안 꿀리려고 남에게 밑지지 않으려고 뭔가 큰소리 한 번 쳐보려고 주변부에서 설치고 다닙니다. 그러다가 걸려들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을 미리 만났습니다. 과연 의인은 아니었고 하는 의도가 다 노림수가 있었고 다 거짓말이었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것 자체가 말씀이 말씀대로 성취되어 가는 속에 우리가 말씀에 삼킨바 된 상태에 있음을 감사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