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받은 축복
2013년 2월 10일 본문 말씀: 로마서 4:1-8
(롬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롬 4:10, 개역)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사도의 편지가 무척 난해합니다. 쉽게 믿게 하지를 않습니다. 특히 어려운 내용이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하고 직접 일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누구든지 나름대로 신을 알고, 본인이 알고 있는 신을 섬기면 그것으로 신을 섬기는 것이 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증거로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과 다윗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는 곧, 누구든지 아브라함과 다윗과 관련지은 그 하나님의 구원방식이 아니라 누구라도 구원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각자 나름대로 자기 구원을 성사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구원방식과 아닌 특수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방식은 구원받는 모든 자들에게 일반화됩니다. 그 특수성이 오늘 본문은 다음과 같이 표현됩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않는 자’ ‘일한 것이 없이’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됨을 분명히 보이기 위해 구원받아야 될 모든 이들은 ‘일을 아니할지라도’와 ‘경건치 않는 자’와 ‘일한 것이 없이’라는 자리로 소집됩니다. 사실 인간들은 모두 나름대로 구원욕구에 갖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삶이 장난이 아닙니다. 너무 힘듭니다.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무슨 아부나 수작도 부릴 용의가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지만 제발 죽어서는 이런 고생이 보상받기를 원합니다. 죽어서는 이런 생존에 시달림이 없이 마음 편하고 풍요하게 살고 싶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나름대로 내부적으로 법을 창출합니다. 즉 “하나님이 내리시는 말씀과 지시는 충실히 따르자. 그러면 무슨 좋은 날이 있겠지”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구원이라면 구태여 메시아가 출현이 필요치 않습니다. 오히려 메시아가 없다면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메시아가 주어진다면 모든 인간은 구원받지 못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메시아를 위한 구원이 새삼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구원’이 아니라 ‘메시아 구원’입니다.
이 메시아를 위한 구원으로 인하여 인간의 구원욕구는 접어야 합니다.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너무 말이 많습니다. 너무 나불댑니다. 로마서 3:19의 말씀처럼 차라리 율법이 주어진 것은 ‘인간의 입을 막음’용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이 지시에 따르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인간이 도저히 부응할 수 없는 것을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취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 요청함이란 딴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하여금 죄를 자백케 하는데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할례’를 하라고 하시면서, 할례를 했다고 여기는 자를 무할례자로 만들어버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그 어느 인간도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 말라고 해서 안했고 하라고 해서 했을 뿐인데 스스로 반대의 결과인 자가 자기라고 자백하라면 누가 자백하겠습니까
음행을 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음행한 자라고 고백하라면 어떻게 이 요청에 부응하겠습니까? 아무도 부응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자기 의로움으로 입을 나불됐다고 죄인으로 간주해버리십니다. 즉 ‘일을 아니할지라도’와 ‘경건치 않음’과 ‘일한 것도 없이’의 자리에 그냥 머물러 있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정죄하십니다.
인간은 내부적으로 자신의 행한 것을 자기가 판정을 내립니다. 그렇게 되면 행한 이나 판정내리는 이나 동일인이 되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내부에서 법이 만들어집니다. 자기 의로움을 위한 법 집행자입니다. 이러한 식으로는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인간의 구원욕구를 파괴하고 오직 메시아가 출현해야 될 그 이유를 증거하시는데 주력합니다.
다윗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생에 상처를 냅니다. 인간을 분질러 버립니다. 그리고서 그 안에 커다란 구멍이 있음을 발각시킵니다. 인간 사회란 실은 자기 안의 구멍을 숨기기 위한 공간입니다. “나는 누구누구와 친하다. 나는 누구와 잘 아는 사이며 나는 이런 면에서 성공했노라”고 하지만 실은 자기 안에는 여전히 큰 구멍이 뚫려있습니다.
상처란 상처가 생긴 그 지점에서나 치료가 됩니다. 그 지점은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시고 구원될 자가 그곳에 몰아서 부어넣습니다. 그곳이 바로 십자가이고 성도는 근원적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죄를 지으므로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죄인이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결단과 결심과 선택은 본인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된 것만 강요받듯이 선택할 뿐입니다. 다윗이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한 것도 하나님께서 그 죄를 짓도록 강요하신 겁니다. 그리고 다윗이 사무엘하 24장에서 인구조사를 사단의 부추김에 의해서 행한 것도 인간과 성도의 진면옥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인구조사를 실시하게끔 하신 하나님께서 벌칙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제시합니다. 7년 동안 이스라엘 나라에 기근이 들게 해줄까 아니면 석달 동안 다윗왕이 적들에게 쫓겨 다니게 해줄까 아니면 3일 동안 이스라엘 전역에 전염병이 돌게 해줄까 이 셋 중의 하나를 골라라 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밀어붙침입니다. 다윗은 거부할 처지가 못됩니다. 다윗은 제일 짧은 기간을 선택했지만 결과는 7 만명의 백성들이 병으로 죽게 됩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제단부지로 구입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므로서 비로소 이스라엘에 내린 재앙을 철회했습니다.
이로서 다윗이 본인이 지은 죄가 본인의 의로만 마감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대신 희생해서 용서해주심’이라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기능에 다윗은 미리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인생이란 마치 유리 표면에 묻어있는 먼지와 같아서 비만 오면 다 쓸려내려가 가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바닷가 모래 위에 손가락에 그린 그림 같아서 파다가 오면 금방 다 지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라는 꼬챙이로 하나로 꿰어지는 인생이어야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방식이라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무진 각종 일을 시키진만 그것이 모두 ‘일한 것도 없이’가 되도록 상황을 몰아가서 오직 예수님의 용서하심에만 율법 완성이 있음을 말해주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용하여 십자가를 반복적으로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