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16강-율법 아래서(3;19-20)이근호130113

아빠와 함께 2013. 2. 7. 11:31

율법 아래서   (롬 3:19-20)

음성      동영상

 이근호 13-01-13 13:40 
율법 아래서
2013년 1월 13일                             본문 말씀: 로마서 3:19-20

(롬 3:18, 개역)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롬 3:19, 개역)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3:20, 개역)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사람들은 자신이 제일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끝은 모릅니다. 하지만 끝을 알아도 인간은 바뀌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인간’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육체’라고 부릅니다. 이는 논조의 시작을 인간이 출발하는 그 인간상에서 출발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디서 출발하는가? 율법에서 출발하시겠다는 겁니다. 율법, 즉 말씀에서 출발해버리는 인간은 중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보다 더 중요한 분이 따로 계십니다. 사람에게 있어 ‘나보다 더 중요한 존재’의 등장은 사람을 불행케 하는 게 아닙니다. 도리어 인생살이 전부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한꺼번에 다 풀게 합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나는 중요한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나보다 더 중요한 분”, 바로 그분에 의해서 비로소 우리가 있는 겁니다. 사람이 나아갈 길도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보다 더 중요하시고 먼저 계신 그 분’이 결정 하시니다. 그 결정된 바가 바로 지옥과 천국입니다. 사람에게 있어 이 두 지역 외에 다른 지역은 없습니다. 제 3의 지역도 없습니다. 내세의 다변화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 분은 말씀하십니다. “입 다물라!” 그리고 입을 막는 마스크들을 나누어주십니다. 그것 착용하고서 입 다물라고 말입니다. 제발 저주가 저주다운 모습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 피조물의 도리라는 겁니다. 입다뭄의 취지 안에는, “어떻게 저를 구원해 주실 용의가 없습니까?”하는 식의 부탁도 통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인간들이 자기 죄도 제대로 파악을 못한다는 겁니다. 사람이 아무리 죄를 지어봤자 자기가 해낼 수 있는 죄가 어느 정도 인지를 알지를 못합니다. 즉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죄도 모르고 저주도 모릅니다. 따라서 그 무지를 대체해서 나름대로 죄와 의와 거룩을 만들어냅니다.

그 예 중의 하나를 들어보겠습니다. 1757년에 다미앵이라는 사람의 처형 광경의 한 구절입니다. 그는 프랑스의 루이 15세 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정신병자입니다. “유황을 태웠으나 그 불길이 너무 작었기 때문에 죄수에게는 손등의 피부만 약간 상하게 했을 뿐이다. 그 다음에는 소매를 팔뚝 위까지 걷어 올린 사형집행인이 45센티 정도의 불에 달둔 쇠집개를 집어 들고 먼저 오른쪽 다리의 장딴지를, 그 다음으로는 넓적다리를, 그리고 오른팔의 근육 en 군데를, 다음에는 가슴을 찢었다.” 그 뒤의 이야기는 개가 그 고기를 먹을려고 대기해 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는 선이 악이 이기는 축제의 현장을 보고 싶어합니다. 성폭행범의 부모는 성폭행범이 공개적으로 찢겨나가는 것을 보고 싶어합니다. 사람은 공개적으로 악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해서 본인은 악 편에 서 있지 않고 정의와 거룩편에서서 모든 것에 판정을 내리는 자리에 있다는 그 자부심은 세상의 그 어떤 자리보다 더 큰 희열을 줍니다.

세상 모든 움직임이 자신의 판단 밑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아는 쾌감은 그 어떤 쾌감보다 절대적인 기쁨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과연 그럴 자격이 될까요? 야고보서 2:9-13에 보면,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4:11-12에 보면, “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고 되어 있습니다.

이 야고보서의 말씀은 율법의 집행자에 인간을 끼어넣어준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율법의 집행자에게 기대할 것은 오로지 긍휼 뿐이며 율법의 집행자에게서 일처리에 오류가 있다든지 태만해서 죄를 지어놓고 그냥 넘어가기를 고대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누구의 소속도 아닙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암석으로 된 산에서 눈사태가 일어나서 눈들은 모두 미끌어지고 말깧게 암석부위만 드러나는 것처럼 교회는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예수님만 말갛게 드러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교회 중에 인간도 끼어있으니 인간도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율법의 범주 밖으로 나아가지를 못합니다. 일종의 지평선에 둘러싸인채로 사는 겁니다. 율법은 바로 이점을 철저히 하시겠다는 취지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뭘까요? 율법은 십계명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네 모든 삶이 다 율법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47장에 보면, 형들로부터 미움받은 요셉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형들의 심리를 생각해봅시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점하다시피 누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독점하다시피 받고 삽니다. 결국 형들은 공모에서 요셉을 죽이고자 시도하다가 애굽으로 가는 장시치에 20므나를 받고 팔아넘깁니다. 이게 바로 율법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니 종교니 걷어치우고 나면 남는 것은 자기 잇속을 챙기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 모습들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저주 아래에서 심판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야곱과 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맏이가 되어서 유산을 많이 받겠다고 설쳐대는 그 모양새는 오늘날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몫입니다. 예수님의 긍휼하심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갑니다. 이러한 결정이 단지 이론으로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으로 구체적으로 주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나도 십자가 진 적이 없다”(고전 1:13) 즉 그 누구도 누구의 심판자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우선이지 우리 자신이 우선이 아님을 명심토록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1-17 17:12 
16강-롬3장 19-20(율법 아래서)1301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3장 19절에서 20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3페이지입니다.

로마서 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생중계가 이렇게 차질이 있어서 중요한 것을 놓쳤습니다. 그것은 장로님 기도내용이 얼마나 중요한 내용이었는지 정말 말로 다할 수 없어요. 거기서 중요한 단어 하나 나왔습니다. ‘당혹감’이라고. 우리의 의로 하나님 영광 돌린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아니 엉뚱하게 우리를 제치고 예수님의 자신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를 건진다고 한다면, 우리가 당혹스럽고 당황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러면 우리가 교회에서 충성 봉사한 이게 과연 어디로 날라 가 버리느냐 이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그 대가로 이 땅에서 복을 받는다고 그렇게 은근히 노리면서 교회 왔는데, 구원받는 것도 우리 의도 아니고, 이 땅에서 복 받는 것도 우리 행함도 아니고, 그것이 전부 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거저 주어졌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반응은 당혹함이고 황당함입니다. 그 당혹함과 황당함을 뭔가 하나님의 특별한 성령의 능력이 안 오면 이건 극복이 안 됩니다. 교회 20년 다니고 목사 하고 신학박사 하고 장로를 해도 소용없어요. 이게 극복이 안 되는 거예요.

‘나는 뭘 해도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존재다.’라는 것을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은 물론 자기가 안 다니니까 그건 제쳐두고, 교회 다니는 사람이 그걸 수용한다는 것, ‘나는 교회 다니면서 이렇게 일한 모든 것이 결코 나를 이롭게 한 것이 아니다.‘라는 그것을 서슴없이  수용한다는 것, 도대체 어느 정도 자존심을 부숴버려야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이 이야기를 장로님이 기도 내용에 담았는데 갑자기 생중계가 안 돼서 포함이 안 됐어요. 그래서 추가 첨가해 드리는 겁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설교 들어갑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들어보게 되면 얼른 봤지만 역시 봐도, 봐도 무슨 소린지 몰라요. 차라리 성경 책 펴지 않고 논어나 공자 또는 불경 책을 하게 되면 우리는 쉽게 이해가 됩니다. ‘여러분, 착하게 살고 싶죠? 착하게 살면 하늘에서 복 주시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못 사는 것은 여러분들이 힘들게 살고 사업이 안 되고 모든 가정의 우환이 있는 것은, 여러분들이 자연의 힘, 또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안 살기 때문에 벌 받고 있으니까 정신 바짝 차리시고 올해는 바르게 살면 복 주십니다.’ 이건 전혀 우리한테는 거부감이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경 로마서 3장 19절을 폈습니다. 우리는 뭔가 이해한다고 여기고 들여다봤습니다. 그런데 여기 19절에 보면 율법이 말하는 바는 하나님의 취지는 라고 이야기 해놓고, 하나님의 취지는 뭐냐,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마스크를 하나 주는 거예요. ‘성경을 보고 싶나? ’마스크 줄게.‘ 마스크가 무슨 용도냐? 우리 입을 틀어막는 용도예요. 마스크 정도가 아니고 마스크는 이 정도가 아닙니다. 완전히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영화에 나오는 정신병자 입을 틀어막는 그런 흉측한 강한 마스크라야 되죠.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아니 사람이라고 간주도 하지 않아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육체가 없나니“ 누굴 돼지고기로 아나? 하나의 물체 화 시켜요. ”육체가 없나니“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할 돼지비계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 말은 네가 죄라고 여기는 것은 아주 멀었다는 이야깁니다. ‘나 죄 좀 지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우기지 마라 이 말입니다. ’아직도 덜 지었어. 덜 지었다고.‘ 너는 아무리 죄를 지어도 내가 알아야 될 죄를 네가 그걸 다 실현시키질 우리는 못해요. 우리의 행동으로 나의 죄 된 행동은, 내가 죄 있는 것을 소급해서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죄를 져도 우리가 죄인인 걸 몰라요. 왜냐,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할 말이 있어요. 사회가 나를 버렸다. 부모가 나를 어릴 때 버렸다. 나도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사회가 사회 일원으로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유리창을 깨고 빵을 훔친 그것은 너무 배가 고팠다. 배고파서 빵을 훔친 건데 뭐가 흠이 되겠느냐, 왜 그렇게 말들이 많은지 몰라요.

세상의 자본주의에서 산다는 것은 돈의 흐름 속에 산다는 것이고, 이건 전부 다 빚입니다. 내가 빚 갚으면 누구 하나 파산돼 버려요. 그 정도로 모든 구조가 나 하나 산다는 것은 누구 하나 망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그걸 자랑스러워하면서 그렇게들 말이 많아요. 입에 마스크가 없으니까, 율법의 마스크를 단단히 줘서 우리가 예상 못한 어떤 죄에 갇혀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서 깨닫는 정도가 아니고 깨닫는 입장에서 거기서 구원이라는 것은 과감히 입도 떼지 못하게 하는 그러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깨닫게 하는 겁니다.

죄 지었으니까 이제는 구원 받고자 합니다. 이러면 죄를 아직도 몰라요. ‘내가 잘못 됐다’  라고 비는 것은 자기 잘못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그래도 내가 구원 못 받을 정도로 주님의 사랑 받을 자격이 없을 정도로 죄인은 아닐 거야, 아마.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이런 것을 자꾸 염두에 두고 있는 거예요. 노래 하나가 교인들 다 버려놨어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거 노래 바뀌어야 됩니다. ‘우리는 저주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렇게 돼야 돼요.

이것은 오늘 본문에 사람이란 말도 없고 육체 아닙니까? 우리의 모든 육체는 율법이 뭐라는 것, 말씀이 뭐라는 것이 우선되고 그 말씀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 다음에 차후에 인간이 있는 겁니다. 생명나무 선악과나무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사람 만들어진 거예요. 신부는 제 3일 째 만들어진 겁니다. 생명나무 선악과 만들어 놓고 그 취지를 위해서 인간을 만들어 놨어요. 인간을 위해서 선악과가 있다면 그 까짓 거 선악과 따먹고 생명나무 못 따먹었다 해도 그거 중요한 것은 사람인데 그 나무 하나, 그 나무 과실이 뭐 대수겠습니까? 부사 사과 만원에 8개인데. 과일이 그게 뭐라고 사람보다 더 중요해요? 그건 우리 생각이고.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사람을 죽이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지어내도 그런 하나님 못 지어내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지어낸 하나님만 섬기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자기에게 합당한 신도 인간이 제조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을 가졌습니다. 포이에르바하란 철학자는 말했습니다. 모든 기독교의 신이라 하는 것은 모든 종교의 신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가 신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바깥에 이미지로 만들어 놓은 신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했거든요. 그건 전적으로 맞는 이야기예요. 딩동댕~♬이예요. 기독교의 본질이란 책에서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언급을 하게 될 때 여기 22절에 보면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여기 차별이라는 단어, 야, 요거 평등 주장하는 사회주의나 아니면 이O O 대표가 있는 진보당이나 이런데서 아주 좋은 단어죠. 평등, 빈부격차가 없어진다는 평등, “차별이 없느니라“ 여러분, 차별이 없으면 살맛도 없어요. 차별의 폭을 메꾸기 위한 것이 인간의 삶의 동기가 됩니다. 내가 왜 힘들게 살아가는가, 내 목표를 걸어두고 목표와 나 사이에 격차를 만들고 그 격차를 내 능력으로 얼마나 좁혀나가는가, 한번 솜씨를 발휘하고 싶은 그런 여지 때문에 아직도 우리는 힘들고 어렵지만 세상 살아갑니다.

회사 사원들, 직원들 연초에 연수하면서 훈련시킬 때 작년보다 올해는 목표를 키우고 그렇게 목표를 숙제로 제공하고 그 숙제를 달성한 사람에게 정말 인간다운 인간이고, 훌륭한 인간이고 회사는 당신들에게 적절한 보상, 합당한 보상을 제공해 줄 것입니다. 만약에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면 ‘나가 주세요.’ 이럴 것입니다.

사람이 매일같이 새로운 목표를 걸어줘야 사람은 살맛이 나는 겁니다. 자전거는 세워둘 용도로 있는 게 아닙니다. 자전거는 달려야 되잖아요. 달릴 때 타는 사람이 불어오는 피부에 와 닿는 상큼한 그 바람, 그것 때문에 자전거 타지 않습니까? 자전거는 달려야 이게 쓰러지지 않거든요. 계속해서 달리는데 목표는 없다는 거예요. 목표와 목적은 그 과정 자체가 목적이요 목표예요. 그냥 달리는 그 자체가 목적이 돼요. 만약에 목적이 있다면 목적이 되면 날라 가 버리잖아요.

그래서 현대 철학자들은 인간에게 한계가 있다는 한계라는 말을 쓰지 않아요. 한계라는 것은 어느 지점에 가면 또 한계를 만들어야 돼요. ‘야, 요게 한계였어? 에이, 요정도 이겨냈는데? 또 뭐 목표를 정하지.’ 한계가 돼 버리면 한계는 이렇게 한계의 너머를 바라볼 수 있게 돼요. 그래서 현대 철학자들이 이걸 한계라 쓰지 않고 ‘지평’이란 용어를 씁니다. 지평선은 분명히 보여요. 보이지만 그 지점에 가보면 지평선이 저만큼 내가 간만큼 저리 물러서 있어요. 따라가 보면 또 저만큼 물러서 있네. 마치 밤에 달을 쫓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잡으려고 가는데 자꾸 물러가는 거예요.

결국 지평이란 말을 쓴 것이 합당한 이유가 뭐냐, 지평이라 하는 것은 이쪽 환경만 이야기하지 지평 너머는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이게 현대인들이 딛고 있는 딜레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이라는 지평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율법이란 걸 줘서 우리로 율법 안에 모두가 놓여있게 만듭니다. 그런데 율법이라는 것이 하나의 지평이 돼 버리면 그제사 우리에게 뭐가 주어지느냐, 잘 들으셔야 돼요. 그게 뭐냐, 질문을 하게 하심으로서 성경에 관심을 갖게 해서 하나님과의 대화를 성사시키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내 인생에 나한테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하는 거예요. ‘난 왜 이렇게 사나, 뭘 해야 내 목표를 달성하는지, 어떻게 다른 길은 없겠어? 다른 대안은?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다른 생각 없을까? 이런 질문들이 여기서 벌어지게 만드는 그 지평, 그 질문을 누가 하느냐?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한테 질문을 하거든요. 자기가 답변하고.

그런데 같은 성경을 펴면서도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나 말고 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자체가 해답 이예요. 끝났어요. 게임오버, 끝났어요. 지금까지는 이 세상에 남들이 있어도 중요한 내가 있다는 것이 그냥 중요할 뿐입니다. 그런데 나는 나보다 더 중요한 분이 따로 있어서 이런 말씀을 나한테 지금 퍼붓고 있다. 알려주고 있다는 걸 알 때 질문 해답이 뭐고 내용이 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 내가 여기 있는 것이 나는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중요하다 생각하는데 내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이게 안 중요할 수가 있구나.‘라는 걸 깨닫는 겁니다. 내가 70평생, 80평생, 90평생 사는 이게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거예요. 내가 중요하지 않으면 그동안 내가 고민하고 근심했던 모든 스트레스가 한방에 다 날라 가는 겁니다. 중요하지도 않은데 마치 거기 인생에 사활을 걸었어요. 이거 안 되면 자살도 감행할 정도로 우리는 그걸 전부로 여겼습니다.

결혼식 때 딸을 시집보내면서 엄마들이 울어요. 시집 안 가면 시집 안 간다고 그렇게 명절 때마다 닦달 내더니만 막상 시집가려니까 어떤 남자 손에 가면 엄마가 훌쩍훌쩍 울죠. 왜 그렇게 섭섭해 합니까? 내가 그토록 중요했다는 것이, 나한테 분명히 중요한 딸인데 이제는 내가 그 딸에게 중요하다한 것보다 더 그 딸을 중요하게 여기는 어떤 사내가 등장해버리니까 나는 그 자리에서 딸의 권한에서 일부 빠져야 되는 거예요. 빠져버리면 내 한부분이 잘라 나가버리는데 그동안 딸이 있을 때 이게 전부가 나의 영역이라 생각했는데 딸이 퉁, 하고 떨어져 나가면 그 빈자리 뭐로 채웁니까? 그 허전함을 뭐로 채워요? 이렇게 채우죠. ‘야야, 시집가거든 자주 전화해’ 그 빈자리를 전화 하는 걸로 채우는데 ‘엄마 걱정하지 마. 네가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할게.’ 요거 한 달 갑니다. 다음부터는 안 오다가 자기애를 낳게 되면 봐달라고 하면 자기애를 매개체로 해서 자주 전화하게 되죠. 그뿐 이예요.

분명히 저 딸은 나한테 중요한데 이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때 우는 것처럼, 인간은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데 사실은 내가 있으니까 나한테 중요한데 나 말고 또 다른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로 봤을 때 나는 사람이 아니무니었습니다. 나는 육체였습니다. 뭔 육체? 율법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이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차후에 태어나야만 했던 하나의 존재에 불과한 겁니다. 안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우리 서 경수 목사님께서 결혼식 때 하신 그 말씀, 요한복음 1장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나라는 인간은 그분이 없었으면 나라는 인간도 없었느니라. 그런데 드디어 내가 그를 만나다니, 영어로 he, 그분이 있다니, 그분은 내가 없을 때도 계셨었기 때문에 그분이 있다면 그분으로 말미암아 내가 있었기에 나는 그 관계를 끊어진 관계가 다시 이어진다면, 또 그분 있는 곳에 그분 때문에 내가 있듯이 그분 있는 곳에 나도 같이 있으리라. 그게 천국 아닙니까? 천국은 요양병원이 아닙니다. 천국은 위락시설이 있는 곳이 아니에요. 나 위주로 편리한 행복한 시설들이 갖춰진 그런 빌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나보다 중요한 분 앞에 내 모든 것을 제대로 바치는 그 관계성이 영원히 이어지는 곳이 천국입니다. ‘면류관을 받으시고 나의 찬송을 받으시옵소서.’ 그 관계가 생명이고 영생입니다. 인간은 창조주가 아니고 인간은 그냥 창조주로 인하여 만들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걸 한마디로 요약해 보면 나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데 그걸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면 사는 게 너만 괴롭다 이 말입니다. 그걸 또 다시 축약하게 되면 ‘잊어라.’ 누구를? ‘너를 잊어라’ 그런데 나를 잊으려면 나를 일찌감치 잊어버리면 이건 나를 잊어야 된다고 여기는 나를 잊을 수가 없기 때문에 잊지를 못하는 거예요. 무슨 말 하고 있습니까? 알아들으세요.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다 세는 것처럼. 나를 잊어야 돼, 하면 지금 내가 나를 잊은 거야? 안 잊은 거야? 그걸 판단하는 나를 또 상정해야 돼요. 그러니까 나를 잊을 수가 없어요. ‘나를 잊으라.‘ 하는 명령은 결국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나를 잊지 못하면 결국은 스트레스만 받아요. 그런데 그분이 있잖아요. 그분 생각만 하면 고 짧은 1초, 2초 동안에 ‘어! 지나고 나면 그 1초, 2초 동안에 나를 생각 안 했잖아.‘ 나를 생각을 안 할 정도로 그분의 진리에 흠뻑 취하게 되면, 성령에 취한다는 말 이예요. 취하게 되면 그동안 내가 나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스트레스 받는 모든 것을 철없이 잊을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마르크스는 종교를 마약이라 이야기했어요. 우유주사? 프로포 폴 이런 거.

하나님께서 내가 어떻게 즐거우냐 하는 그러한 네 심정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근본적으로 내가 누구냐 하는 존재, 나라는 것이 내가 즐겁든지 행복하든지 내가 있든지 없든지 그건 하나의 표면에 불과하고 그 표면 말고 그 표면을 뜯어내고 벗겨낼 때 진정 나는 누구냐 하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나를 통해서 또는 다른 이웃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내가 누군지 했는데, 이제는 성경을 펼쳐서 보게 되면 그분이 나오잖아요. 그분 보시기에 나는 뭣 때문에 이 땅에 있느냐? 그걸 발견하는 겁니다. 얻어 챙기고 소유하고 나 이만큼 복 받았다. 그 자랑 질 하라고 교회 나오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있는 껍데기를 벗겨내는 거예요. 그 벗겨내는 방법이 뭐냐, 산사태입니다. 알프스 산에 산사태 난 그런 이야기하죠. 또 히말라야 산맥이고 에베레스트산이고.

산사태가 난다는 것은 이런 거거든요. 원래 산이라는 광물, 또는 산이라는 암석층이 있어요. 거기에 살짝 외부에서 날아온 눈송이가 뭉쳐있는 거거든요. 산사태가 뭐냐 하면 그 묻어있던 눈이 중력의 하중을 못 이겨서 이게 밑으로 미끄러집니다. 미끄러지면 그 위에 텐트 치는 사람들, 알록달록 참한 등산복 입은 사람들도 그 밑의 지층이 쓸려내려 가니까 같이 쓸려가서 산사태 나서 파묻혀 죽잖아요. 어쨌든 간에 산의 입장에서 뭐냐 하면 쓸데없이 이것저것 걸치고 있는 것들이 미끄러지는 거예요. 입었던 옷에 불과하다 말이죠.

하나님께서 율법의 정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의 완성은 예수님이시니까 예수님의 취지, 예수님의 말씀, 다른 말로 하면 천국이죠. 천국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것저것 붙어있던 것들이 산사태를 만나서 쓸려가게 만드는 겁니다. 교회가 뭐냐 하면 바로 교회도 눈사태에 쓸려내려 갈 그런 집단 이예요. 정작 교회가 보여줄 것은 뭐냐, 교회라는 표면에 가려져 있던 그분! 예수님이 우리에게 뭘 행하셨던가, 우리에게, 전 우주에게 뭘 행했다. 그걸 아주 말끔하게 산뜻하게 깨끗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항상 그건 교회 있으면서 쓸려나가고, 교회 있으면서 쓸려내려 가야 되는 거예요. 종교집단, 교회 단체라는 것은 막상 있나? 그러면 곧장 없는 걸로 여기자. 있나? 없는 걸로 여기자. 이렇게 돼요. 모형이냐? 안 보이는 걸로 여기자. 항상 돋보이고 융기되듯이 돌출돼야 될 것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교회를 위해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 중에 하나가 나거든요. 나라면 교회라는 집단은 교회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 여기 있다.’ 이게 아니고 참, 이런 게 어려운데요. 교회가 예수님을 보여주는 방법은 교회 스스로 자기를 부정하면 되는 거예요. 간단한 문제예요. 교회가 있어야 예수님이 있지,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계속 교회가 예수님의 복음을 가리는 마귀적인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눈사태 일어나서 같이 밀려나가면 그동안 가려졌던 암석층이 나오면 그분이 예수님이잖아요. 그런데 그 교회 집단 속에 누가 포함돼 있느냐 하면 내가 포함돼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교회 쓸려내려 갈 때 누구도 쓸려내려 가느냐 하면 나도 쓸려내려 가야 한다 말이죠.

이론적으로 어려우니까 실제로 이야기하게 되면 나는 교회 나오는데 우리 남편은 안 나왔다. 하지만 ‘우리 남편이 교회 나오게 하옵소서.’ 기도했다 이 말이죠. 그래서 남편이 교회에 나온 거예요. 역시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 이러면 안 돼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러면 그 눈사태에 쓸려내려 갈 내가 또 거기 달랑 붙어있는 셈이 돼 버려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곧 내가 하는 일이 돼 버려요. 내가 같이 쓸려내려 가게 되면 ‘남편이 교회 오나 안 오나 교회하고 아무 관계없었어. 괜히 내 소원이고 내 마음이었어.’ 있으나 없으나 주님은 주님인데 왜 자꾸 내가 한동안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지? 이 바보같이, 바보같이. 이런다고요. 이제 남편 나왔으니까 우리 애인도 나와야지, ‘주여 우리 애인이 교회 나오게 해주옵소서.’ 또 이렇게 기도하게 되는 거예요.

계속해서 가리면 죽 미끄러지고 또 가리면 또 미끄러지고, 그러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내가 아니고 그분이 자꾸 드러나는 거예요.

원래 암석층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없어요. 모두 육체입니다. 육체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에 위반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을 육체로 실험도구로서 주께서는 차후에 만들어 놓은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무서운 분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천국이 얼마나 깨끗한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지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우리는 서로 질이 다른 두 인간을 주께서 일부러 만들어 놨습니다.

사람이 갈 곳은 지옥 아니면 천국, 천국 아니면 지옥, 둘 중에 하나밖에 없어요. 지금 현대 사회가 다변화를 이야기 하고, 다양화, 제 3의 영역, 이런 것들을 자꾸 주장하는데 어느 절대적은 진리는 없다. 전부 다 상대적이다. 서로서로의 직업을 존중해 주고 옹호해 주자. 그러면 우리는 소통이 된다는 평화의 공유철학에 이를 것이다. 전부 다 그런 것으로 교육 받고 그런 것이 진리라 여기는데 아무리 이야기해도 인간은 죽으면 갈 곳이 달랑 지옥 아니면 천국, 천국 아니면 지옥, 둘 중에 하나밖에 없어요. 그걸 교회에서 이야기해야지, 어디서 이야기합니까? 그걸 성도가 이야기할 수 있어야 돼요.

제가 얼마 전에 이야기했던가요? 우리 집에 빌라 옥상 3층에 눈이 많이 오는 날 가보니까 장독이 4개가 있다 했죠? 조그만 장독이 4개 있는데 거기 쌓인 눈높이가 장독 크기와 상관없이 눈높이가 똑같아요. 자로 안 재 봐도 똑같아요. 저거다. 남녀노소 직업을 불문하고 인간에게 덮여 있는 죄의 무게는 동일하다. 잘 났던 교도소에 있는 사람이나 교도소에서 나온 사람이나 변호하는 사람이나 판결하는 판사나 관계없이 머리 위에 쌓여있는 그 죄의 무게는 동일한 거예요. 그게 바로 로마서 3장 19절 이 말씀 아닙니까?

너희들, 개념이 같은 우리 너, 나, 너, 나 말고 그분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사람이 전부 다 동일하고 똑같은 거예요. 모든 사람이. 그리고 장독이 손이 있어서 ‘눈 왔네.’ 장독이 손이 있어서 자기 위에 있는 눈을 털어낼 수가 없어요. 손이 짧아서가 아니라 자기 위에 덮고 있는 눈을 10센티, 20센티 쌓인 눈을 자기가 털어낼 방도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왜냐, 인간은 죄라는 눈이 덮여있는 줄, 그것조차도 몰라요. 그것조차도 모른다는 말을 간단히 줄여버리면 몰라요, 그냥 몰라요. 그걸 하나 덧붙인다면 아무것도 몰라요. 인간은 아무것도 몰라요. 왜 그분을 모르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거예요.

19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축복아래 있게 하심이 아닙니다. 심판아래 있게 하심이라. 하나님이 얼마나 무섭고 의로운 분인지 그 하나님을 잘 안다는 그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서울 안 가본 사람이 꼭 서울 가본 것처럼 잘난 체 하는데, 진짜 하나님 만나 본 사람은 하나님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마음 같아서는 액자 하나 만들어서 여러분 집에다 하나씩 걸고 싶어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다 걷어치우고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나는 부정한 백성들 중에 포함돼 있구나.‘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를 제가 하나 책을 가지고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우선 글 내용부터 이야기하고 이게 어느 책인지 어떤 내용인지, 그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유황을 태웠으나 그 불길이 너무 작았기 때문에 죄수에게는 손등의 피부만 약간 상하게 했을 뿐이다. 그 다음에는 소매를 팔뚝 위까지 걷어 올린 사형집행인이 45센티 정도의 불에 달군 쇠 집개를 집어 들고 먼저 오른쪽 다리의 장딴지를, 그 다음으로는 넓적다리를, 그리고 오른팔의 근육 여러 군데를, 다음에는 가슴을 찢었다.‘  그리고 개가 그 고기를 먹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게 뭐냐 하면 1757년도 사형집행인이 다미앵이라는 프랑스 사람, 그 사람을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집행모습입니다. 유황을 태웠으나 불길이 너무 작았기 때문에 야, 피부만 태워서는 안 되겠다. 더 찢어야 되겠다 싶어서 45센티 불을 달군 쇠 집게를 가지고 오른쪽 장딴지를 찢었다. 그것을 몰래 숨어서 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축제 현장처럼 서울 광장에서처럼, 거기에 세워놓고 다미앵이라는 죄수를 공개처형하는 대목을 미셀후크라는 책에 보면 나와 있어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사람들은 왜 그걸 공개적으로, 보고 싶어 하느냐 하면 죄라는 것이, 악이 자기의 목전에서 이게 없어지는 데서 인간은 최고의 희열을 느끼게 돼 있어요. 실제로 악이 있는데 악이 저 유황불 불쏘시개로 없어진다 하는데서 상대적으로 나는 악을 물리치는 용감한 착한 사람의 대열에 나는 참여되고 있다는 이 의로워지는 이 기쁨, 내가 의롭다는 것, 나는 사라지지 않고 나는 버티고 산다는 이유는 뭐냐 그만큼 나는 의인이라는 자격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이 의로움, 자기 의죠.

악은 갈기갈기 쥐포 찢듯이 찢어져야 돼요. 악이 악으로 드러나면서 내 손에 의해서 완전히 전부 다 처형될 때 우리는 잠시나마 세상을 정의롭게 하는 집행자라는 그러한 최고의 희열을 우리는 만끽할 수가 있습니다. 뭐, 세상에 다른 즐거움? 이 즐거움이 최고라니까요. 악을 내 손으로 처단한다는 이 즐거움. 그 즐거움을 위해서 사람들은 정치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이만한 법에 의해서 자기가 대한민국이 돌아간다는 것의 우월 감, 그 쾌감을 어떻게 포기합니까? 그래서 3번 도전하고 4번 도전하고 대선에 도전하는 게 뭐냐 하면 모든 이 땅의 모든 대한민국의 국민은 다 내가 만든 법 안에 있고 그 법대로 움직일 때, 조정당할 때, 자기는 로봇을 갖고 노는 그 위치의 최고의 자리에 앉는다는 그 포만감. 그걸 어떻게 남들에게 빼앗겨요? 그건 진짜 돈을 억만금 줘도 차지하고 싶은 자리인데.

그런데 과연 인간에게 그러한 자격이 됩니까? 그럴 자격이 없어요. 성경 야고보서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누구야? 누구야? 집행자가, 어이, 법의 집행자라고? 누구야, 너를 집행자라고 임명한 사람이 누군데? 마귀가 그런 짓을 했어? 나는 어떤 인간도 법을 집행할 권한을 준 적이 없다’ 야고보서 2장 10절에 보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야고보서 4장에 보면 누가 형제를 판단하느냐 오직 판단자는 오직 구원하시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시는 하나님밖에 없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구원할 능력이 없거든 심판도 하지 말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남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여러분 십자가 졌습니까? 십자가 안 졌거든 말하지 마세요. 십자가 져서 그 십자가 피로서 남을 용서해서 용서의 능력으로 구원할 그런 재주 없거든 똑같은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세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아볼로파나 게바파가 누구고 바울파가 누구냐, 나는 누구 파, 누구 파, 무슨 파 없다. 내가 자랑하는 것은 내 파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 개인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자랑할 것은 뭐냐 하면 나를 위해서 죽으신 그 십자가 능력만 자랑한다는 거예요. 그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어느 누구를 위해서도 십자가 진 적이 없다.’

이 세상에서 구원 할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 어느 누구도 구원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예수님만이 구원할 자 없고 모든 사람은 구원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분, 그런 일을 하시는 분,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한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빼놓고, 자기들끼리 사형집행이라 해서 유황불에 태우고 찢고 난리들이다 이 말이죠. 그래놓고 ‘하나님이여, 내 손으로 악을 처단했습니다. 잘 했죠?’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너 이리와. 네 머리 위에도 지금 죄가 가득하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교회라 하는 곳은 법을 집행하는 곳이 아닙니다. 쓸려내려 가야 할 곳 이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 남기고 쓸려내려 가야 될 곳입니다. 그게 바로 교회다 이 말입니다. 여러 번 했지만 사도행전 20장 28절에 교회가 분명히 나옵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그래서 교회라는 그 명사 앞에 형용사가 붙어요. 교회가 뭐냐고 교회를 규정하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말이죠. 그게 뭐냐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그냥 교회가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목사 피가 아니고 장로 피도 아니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가 교회예요. 그런데 교회는 그 하나님이 사신 피 앞에 늘 상 말갛게 미끌어 가줘야 되는 겁니다. 말갛게 십자가만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곳이 교회이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그 쓸려내려 가는 속에 우리가 한 개인이, 목사도 포함이 돼야 돼요.

 이 말은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버리면 그 자기를 매일같이 움직이게 만드는 산사태의 지층 그걸 파악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늘 움직이고 있어요. 어디서 어디로 움직이는지 모르고 허겁지겁 따라가는데, 나중에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은 결국은 죽음이고, 일단 죽는 자리에 딱 오니까 과거에 잘났다. 못났다. 다 그게 다 헛방이고, 아무 짝도 소용없는 짓이고 지금 그 순간에 있는 것은 나를 구원할 수 있는 어떤 기준이나 능력이 자기에게 없다는 것, 이것보다 더 큰 절망이 어디 있습니까? 이건 엄청난 절망 이예요.

야산에 도박장 만들어 놓고 실컷 도박을 했는데 막상 계속 돈을 잃다가 마지막에 장 땡, 단풍 2장 쥐고 전부 다 올인 해서 그 판돈을 다 쓸려고 한 순간 ‘그 자리 가만있어.’ 누구 제의를 받고 와서 수서 경찰서에서 와서 SBS 카메라가 찍고 ‘드디어 도박의 현장을 잡았습니다.’

사람이 평생을 산다고 해도 결국 그것은 그분을 모르고 자기만 알고 하는 것은, 그저 자기를 위한 도박장만 계속해서 살아온 것 뿐 이예요. 거기서 성공과 실패를 논했고. 저는 TV를 즐겨 안보고 잘 안 봅니다만 금요일 날 서울에서 막차 타고 대구에 내려가거든요. 그러면 그 광명역에 TV가 나오는데 볼 것도 없고 시간은 40분 남았으니까 그걸 무심코 보는데 볼 때마다 속이 상해요. KBS에서 하는 강연백독이라는 건데 참, 지옥이 따로 없다. 이렇게 고생해서 옛날 몽골… 제빵해서 성공했다. 속으로 ‘이 사람이 성공하면 뭐하노, 성공했다고 잘했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그 성공하면 뭐하겠노, 그게 성공이냐, 도박장 개설해서 자기 판돈 따는 것 밖에 더 있어요? 그것이 자기를 구원하는 기준이었다 이 말입니까? 그분을 모르는데. 그 성공하려고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어요? 남한테 안 지려고. 남한테 서러운 소리 안 들으려고. 그러면 뭐합니까? 자기 위에 쌓인 죄 높이는 모르고.

이제 마지막으로 율법이 뭐냐, 그거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율법이 뭐냐 하면 우리의 실생활이 율법 이예요. 왜냐 하면 성경에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잡아서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보면 야곱과 에서가 서로 아버지의 유산을 탐내서, 옛날에는 맏이가 재산을 몽땅 다 가져가거든요. 몽땅 다 가져가고 동생한테 동냥 주듯이 주거든요. 그러니까 아버지의 유산, 빌딩 있고 부동산, 토지는 얼마 있고 주택 있는 그걸 누가 차지하느냐, 그 싸움을 에서와 야곱이 한 거예요. 그게 율법이라니까요. 성경 어렵지 않죠? 에서와 야곱이 유산 가지고 싸운 게 율법이고, 아버지한테 사랑받고 있던 그 요셉을 미워서 그 동생 요셉을 제거하고 죽이려고 하는 그 인간 속에 이것은 누구나 치밀어 오르는 그 울분, 그게 율법 이예요. 성경에 십계명만 율법이 아니고 그 내용이 나오잖아요. 그 내용을 왜 성경에 기록했겠습니까? ‘너도 똑같다.’ 이 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하나님’ 그건 바람에 휙 날라 가는 탄산가스처럼 날라 가면 그만이고, 정작 우리 속에 안 날라 가고 있는 게 있어요. 바람이 불어도 비가와도 날씨가 추워도 이 동한 기에도 결국 안 날라 가는 게 뭐냐 하면 ‘어떻게 하면 저놈의 것을 뽑아내느냐.’ 이게 진리라니까요. 이게 법이라니까요. 교회 백날 가도 소용없어요. 이미 우리는 율법에 뿌리박고 율법이 조사한 대로 우리는 우리 성깔대로 살아가는 것 뿐 이예요.

그러니까 그것이 그분 앞의 눈에 띄었을 때 마지막 죽을 때 우리가 잘한 게 뭐가 있습니까? 자기 욕심만 채워서,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았는데 ‘하나님 내가 욕심을 많이 아니고 조금 냈습니다.’ 이게 어떻게 흠도 티도 없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어요? 이것저것 다 계산해서 하나님께서는 뭐냐 ‘율법 외에 한 의’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이런 걸 감안해서 내가 사랑받을 자격도 없는 인간에게 불쌍히 여겨서(긍휼) 율법에 준해서 불쌍히 여겨서 늘 건지는데 다만 조건이 뭐냐, 율법에 준해서 네가 입이 100개라도 할 말 없는 저주 아래 마땅히 살아가고 있음을 그걸 인정하라 이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보이는 것은 자기 잘났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지 아니했으면 우리는 천 번이고 뭐고 지옥 가도 합당합니다. 하는 그 고백을 통해서 우리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고 하나님이 영광 받는 거, 그 처음부터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노림수였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그분을 몰랐습니다. 돼지 비계 같은 우리 자신만 알았습니다. 남한테 안 지려고 애쓰는 우리 자신이 이제 그분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알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그리고 그것이 말로만이 아니라 십자가 피라는 죽음이라는 실제적인 긍휼이 우리는 이제부터는 우리보다 더 중요한 능력인 것을, 우리를 살리는 생명인 것을 저희들이 받아들여서 우리 안에 생명만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