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강-롬3장 27-31(행위냐 믿음이냐)1302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3장 27절에서 31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3페이지입니다.
로마서 3:27-31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성경이란 우리가 아는 상식에 의하면 구원을 받게 하는 책입니다. 구원이란 다른 말로 하면 구출되었다는 뜻입니다. 구출되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경계선이 있는데 이쪽 동네에서 살다가 이제는 난데없이 이쪽동네에서 살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쪽 동네하고 다른 쪽 동네는 섞이지 않는 동네입니다. 섞이지 않을 뿐만 아니고 이쪽 동네에 있는 사람이 다른 쪽으로 들어갈 재주도 없고 능력도 없는데, 이쪽동네에 있는 사람들은 다른 쪽 동네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도 없는데, 뭔가 탈출이라는 것이 되어 그 다른 쪽 동네에 오고 나서 비로소 전에 살던 그쪽 동네도 알고 전에 살던 그 동네가 어떤 동네인지도 알고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는 입장, ‘아, 내가 살았던 저 세상이 그런 세상이었구나. 그런데 어떻게 내가 저 세상에 살지 않고 여기서 살게 되었지? 아, 이걸 구원이라고 하는구나.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그것이 구원이 아니고 착하게 사는 것도 구원이 아니고 너희들이 착하게 살아도 그쪽 동네에 살 뿐이지 이쪽 동네 이야기는 아니야.’라고 지적할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입장에 놓이게 된 것,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것이 구출 당했다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은 이것을 설명하려고 이것을 말로 설명 안하고 사건으로 설명한 것이 홍해사건이었습니다. 애굽 군사도 인간이고 건너온 인간도 인간인데 이쪽 인간은 홍해를 건너왔는데 똑같은 인간인데 저쪽 인간은 못 건너왔다는 말이지요. 부모한테 효도를 안했습니까, 살인을 했습니까, 간음했습니까, 도둑질을 했습니까, 탐을 냈습니까, 십계명을 지킨 자는 건너오고 못 지킨 자는 남고, 그런 것이 있었습니까?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냥 하늘이 길을 열어준 거예요. 길을 열어서 받아들일 자는 받아들이고 안 될 놈은 안 돼, 해서 바다를 봉합해 버리니까 따라오다가 못 따라온 겁니다.
경계선이 있는데 이 경계선이 이쪽 동네와 다른 쪽 동네를 구분하는 경계선입니다. 경계선이 고정되어 있고 그 자리에 늘 있으면 우리는 ‘들어갈까, 말까? 들어갈까, 말까? 에라 들어가자.’ 하고 우리 원대로 들어갈 수가 있는데 이 경계선 자체가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경계선 자체가 다가와서 우리를 삼켜버리니 우리가 임의로 2년 뒤에 건너가야지, 3년 뒤에 건너가야지, 5년 뒤에 교회 나가서 건너가야지, 할 입장이 못 됩니다. 그냥 들이닥치니까요. 옛날에 총각은 많고 아가씨는 적을 때 방법은 보쌈해서 데려가는 방법밖에 없어요.
밤중에 들이닥쳐서 보쌈해서 채가는 거예요. 성경 사사기 마지막 장면에도 여자가 없어서 보쌈 해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냐민 지파가 여자가 모자라니까 파티 장에 가서 여자들 보쌈해서 데려가는 거지요. 비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게라도 강제로 장가들고픈 생각이 들 수 있지요. 어쨌든 남자가 많고 여자는 적으니 선착순으로 납치하듯이 데려가는 거예요. 성경에서 그런 모습이 나왔다는 것은 우리에게 뭘 의미하느냐하면, 우리가 결정을 해서 건너 갈까 말까, 건너갈까 말까, 나중에 건너가자, 그런 입장이 못 되고 그냥 우리를 보쌈해가는 그 보쌈이 예상 밖으로 덮쳐서 탈출시켜 놓고 그 다음에 뒤돌아서 물끄러미 보면서 ‘내가 놀던 시절이 저쪽 세계구나.’하는 겁니다.
여기서 똑똑한 사람은 알거예요. 첫째, 왜 천국이라는 것은 인간세계에서 못 들어갈 수밖에 없는 세계인가? 대체 천국이란 곳이 원리상 인간이 사는 세상과 어떻게 다르기에 이쪽에 살던 사람이 자기 원리를 가동해서는 못 들어가는가? 두 번째, 이미 천국에 와 버리니까 저쪽 세계와 이쪽 세계가 차이나도 너무 차이난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그 차이가 너무 나기에 말로 표현이 안 될 정도입니다. 우리 인간세계에서는 안 되는 것이 없어요. 힘들어도 여러 번 시도하면 기어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저는 등산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등산은 힘듭니다. 하지만 힘들기에 올라갈 이유가 있어요. 힘들기에 오기가 나서 더 올라가고 싶은 거예요. 숨이 턱까지 차서 헉헉거리면서도 고지가 바로 저긴데, 눈길 헤쳐가면서 힘들기는 하지만, 내가 미쳤다고 이 고생을 하나 하지만 정상이 있는 이상은 이 모든 것을 보상해 주잖아요. “힘들었지? 그래 수고했어.”하고 등 토닥거려주고. 힘들지만 부지런 떨면서 설치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태산이 높아도 못 오를리 없다고 그래도 언젠가는 그것을 해 낸다는 원리, 바로 전에 우리가 살던 세상입니다.
희망이 나를 잡아당겨주는 원천이 되는 거예요. 지금은 좌절하고 어렵더라도 언젠가는 된다는 그 포부가 좌절하는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원동력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조폭용어로 네 글자로 ‘하면 된다.’는 거예요. 군대용어로 까라면 까, 그런 거거든요. 뭐든지 안하려고 하지 말고 하면 언젠가는 되게 되어 있어요. 지금 멀어 보여도 찬찬히 하게 되면 ‘어, 벌써 도달했어.’ 하고 이미 목표에 도달되어 있는 원리, 그 원리가 현재 탈출하지 못하고 구원되지 못한 이 세계에 통용되는, 유일하게 납득이 되고 전부 다 동의하는, 모든 인간이 다 동의하는 그 원리의 그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 그것이 분명히 진리고 그렇게 인생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라고 우리가 알고 있는데 그 원리가 어떻게 해서 이쪽 나라 천국 가는데 훼방이 되고 왜 방해가 되느냐 하는 겁니다. 얼마 전에 목사님들과 함께 가지산에 소풍을 갔어요. 등산이라고 차마 못하겠는 게 차타고 정상까지 올라갔는데 그게 무슨 등산입니까? 소풍을 갔는데 제가 김밥 들고 갔는데 다른 목사님들은 이미 구원받은 원리를 적용했어요. 아무것도 안 가져왔어요. 정말 아무것도 안 가져왔어요. 김밥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진짜 뻔뻔함의 극치를 보는 것 같아요.
등산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식으로 도를 닦는 것이 아니고 이 무거운 덩치를 들고 직접 발로 밟아서 올라가야 돼요. 눈길에 미끄러지면서도, 한 걸음 미끄러지면 두 걸음 올라가고, 이렇게 올라가야 등산이거든요. 도 닦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등산하듯이 올라간 그것이 이 세상의 원리라면 천국은 뭐냐, 그냥 잠자는 거예요. 등산과 잠을 구분해야 됩니다. 잠들게 되면 이게 자기의 모든 것을 중력에 맡깁니다. 그렇게 찧고 까불다가도 사람이 잠들게 되면 그렇게 까불어대면서 자기 자랑하고 과시하던 것도 고요해져 버려요.
그래서 얼마 전에 했잖아요. 잠든 아내의 모습이 그토록 아름답다고. 잔소리를 안 하기 때문이죠. 고요해 지는 순간입니다. 노숙자도 잠자면 고요하고 대통령후보도 잠자면 고요하고 잠들면 다 똑같아요. 바로 천국의 원리는 자기에게서 드디어 손을 떼는 원리입니다. 잠잘 때 자기가 자기를 조종합니까? 그것은 아직 잠이 덜 든 거예요. 수면 내시경 할 때 깨어 나보면 벌써 내시경 다 끝나 있잖아요. 잠잘 때는 마지막 남은 자기관리랄지 그런 것마저 알 수 없는 힘에 내 맡기는 거예요. 잠잘 때는 박사도 석사도 학사도 구분이 없고 강도니 창기니 도둑이니 사형수니 그런 것도 다 관계가 없어요.
잠든 사람과 다른 잠든 사람을 비교해 보세요. 누가 더 착하고 누가 더 의인이고 누가 더 나쁜가, 그런 티가 안 납니다. 잠잘 때 나쁜 사람은 막 발로 차면서 자고 착한 사람은 곱게 자고 그런 것이 있습니까? 그런 것이 없어요. 잠들면 그 사람의 행함이나 윤리나 노력이나 도덕으로 서로 상호 비교하지를 않습니다. ‘어, 잠들었네.’ 이것으로 끝나버리는 거예요. 잠들 때는 둘 다 같은 존재에요.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잠 들었다고 보는 겁니다. 모든 인간을 잠자는 기준으로 보는 게 천국에서 보는 겁니다.
잠 들었다 치고 ‘한 번 건져 볼까?’ 이렇게 나오시는 거예요. 이미 잠들었다고 보고. 제가 성경에 없는 소리 하는 것 같은데 없는 소리 하는 것이 아니에요. 에스겔 37장에 보면 모든 인간이 해골입니다. 해골이라 치고 ‘한 번 건져 봐?’ 하고 말씀이 들어가니까 살아나기 시작한 겁니다. 그게 바로 이미 탈출이 되어버린 천국에 사는 사람의 특징이 그겁니다. 힘 빼라, 그 말이지요. 인생에서 폼 잡지 말고 힘 다 빼버리라는 말이지요. 잠들었다고 제가 표현했지만 요한복음 11장에는 죽었다고 되어 있어요.
죽었으니까 자기 나름대로의 의사, 포부, 희망, 기존의 세상에서 그렇게도 추앙받던 것들, ‘꿈이 인간을 살린다. you raise up~, 당신이 나를 일으켜 세우기에 나는 산 위에 우뚝 설 수 있습니다.’ 한다든지 또 어떤 사람은 아버지 노래하면서 울고 또 어떤 이는 엄마노래 하면서 울고 노래하는데, 울고불고 책보고 노래하고 춤추는 이 모든 것도 혼자 살아 있다고 여기니까 “혼자서 울고불고” 하지만 전부 다 잠자고 있을 때는 아버지도 없고 엄마도 없고 처제 동서도 없고 장인장모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장인장모 이야기하니까 또 하나 생각나네요. 미국에서는 사위와 장모사이가 별로 안 좋은 모양이에요. 좋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억지로 맞춰서 여행을 갔던 모양입니다. 여행을 갔는데 반갑게도 객지에서 장모님이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여기서 장례를 치릅시다.” 했어요. 이스라엘은 장례비가 5천불이면 되는데 미국가면 5만 불이 든답니다. 그래서 “여기서 후딱 장례 치르고 빈 몸으로 귀국합시다.”라고 하는데 그 사위가 극구 말리면서 미국 가서 5만 불짜리 장례식 치러야 된다고 한 거예요. 주위 사람들이 ‘평소에 사이가 안 좋아서 본래 심성이 장모 생각했구나.’ 해서 “그렇게도 장모를 생각했나 봅니다.” 하니까 사위 왈, “그게 아니고 이스라엘에서 장례를 치르면 나중에 장모가 부활한다니까요. 부활하게 되면 꼴 보기 싫은 장모를 또 봐야 하니까.
사람을 볼 때에 내가 밉다, 좋다, 저 자식은 사랑 한다, 혹은 밉다, 이것은 본인이 도를 닦아서 점점 더 높은 곳으로 내 쪽에서 하나님계시는 저 곳으로 힘차게 나아가자, 일곱 번 넘어져서 여덟 번 일으켜 주겠지, 라고 힘차게 나가는 것은 등산하는 것이거든요. 다른 말로 하면 종교생활, 또는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것은 구원이 안 되었으니 그 짓이라고 해야 되는 거예요. 구원이 안 되었으니까 그 짓이라도 해야 마음에 좀 위로가 돼요. 왜냐하면 구원이 안 되었기에 아는 것이라고는 등산하는 원리밖에는 없으니까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맨 날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내가 지금 날 어떻게 더 잘 관리하느냐? 내가 날 관리하기 나름에서 내가 구원도 되고 내가 관리를 소홀히 하게 되면 나락에 떨어져서 지옥에 간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존재가 지금 살았다고 착각해서 하는 짓이라는 말입니다. 그 원리밖에는 나올 것이 없으니까. 그런데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그래, 나도 저렇게 살았었어.’ 나도 저런 식으로 인생이 뭔지도 모르고 남 뒤 따라 다니면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등산하듯 올라가면 되는지 알고 착하게 살면 그 높은 곳에서 하나님 만나서 그동안 수고했다고 등 두드려주면서 위로해줄 줄 알고 살아왔었어요.
문제가 십자가에요. 사람들은 그래서 십자가를 죽여 버렸는데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 아시지요. 교회 띄엄띄엄 나와도 그것은 알 겁니다. 이 강도가 독일에서 신학박사 받았습니까? 아니죠. 이 강도가 목사 안수 안 받았지요? 십일조 했습니까? 그것도 한 적도 없지요. 이 강도가 전도 몇 명 했습니까? 한 명도 안했어요. 등산은요? 저 높은 곳에 올라갈 생각도 안했어요. 옆 사람 등쳐먹기 바빠서 ‘나는 착하게 살아서 착한 하나님을 만나자’ 이런 생각도 한 적이 없어요. 저 밑에서 ‘나는 나쁜 놈이다.’ 하고 나쁜 짓만 하고 평생 살아온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신학박사도 아니고 삼위일체도 몰랐고 아무것도 모르고 행한 것도 없는데 덜렁 천국을 가버렸어요. 그러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성공한 거예요. 왜 우리는 그런 강도를 부러워할 줄 모르느냐 그 말입니다. 제가 가슴 아픈 것은 “부럽다, 강도야!” 이렇게 나와야 할 텐데 “부럽다, 신학박사야!” 이렇게 나오면 그것은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에요. “아이고, 나는 언제 목사님처럼 되 보나.” 이게 부러워지면 도대체 구원 받았다고 도저히 말할 수가 없어요. “목사님, 참 강도가 부럽습니다. 정말 강도가 참 땡 잡았네요.” 이렇게 이야기가 돼야 할 텐데 “당신도 잘만 하면 강도 될 수 있습니다. 아직 솜씨가 부족해서 가스관 타는 것이 서툴러서 그런데 조금만 더 하면 강도 될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될 때 여기서 어려운 문제가 발생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이 참 충격적이지요. 27절에 보면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이 한 마디. 예수님께서 신학적으로 어떻게 재림하신다는 등의 이야기를 많이 해도 막상 진짜 구원받은 강도보고 이야기해 보라고 해보는 거예요. “당신 구원 받았는데 자랑 좀 해 보소. 당신이 이런 고생을 해서 구원되었다고 이야기를 해 봐요. 자리 마련해 줄 테니 해 보세요.” 그럴 때 강도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겠습니까? “자랑할 데가 어디뇨.” 이 말 나오겠지요. 자랑할 데가 없다는 이 말은 우리의 자랑 질 때문에 자기가 자기 구원을 지금 막고 있다는 그 말입니다.
그런데 자랑할 때는 자랑할 만한 것이 있기에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이 본문에서는 행함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행한 것에 대해서 ‘행했더라도 내가 이제 자랑 질 안해야지.’라고 하는 것도 자랑 질입니다. 그런데 방향을, ‘행했다. 착한 일 했다. 성경에 보니까 자랑하지 말라고 했고 예수님만 자랑하라 했지. 이제부터는 내가 한 것도 예수님이 했다고 이렇게 자랑 질 해야지.’ 그것도 자랑 질입니다. 방향, ‘내가 뭘 행했다. 그걸 자랑하지 않아야지. 겸손하고 자기부인을 해야지.’라는 그 방향이 잘못되었어요.
방향을 어떻게 잡는가, ‘자랑할 데가 없다.’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자랑할 데가 없다.’라고 방향을 그쪽으로 잡아버리면 자랑할 데가 없는데 이런 행동을 했다, 한다면 그것은 100퍼센트 자랑할 데가 없는 겁니다. 왜, 처음부터 출발이 ‘자랑할 데가 없다.’부터 출발했기에 그 다음부터 나오는 헌금이고 설교고 강의고 뭐가 다 자랑할 것이 없음, 왜 자랑할 것이 없는가를 증거하고 증명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이런 저런 행함을 우리로 하여금 느끼게 만드시는 거예요.
행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움직이니까 행하는 거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그것을 잠자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우리는 등산하고 있는데 “등산 많이 했지? 그것 잠자고 있는 것이다. 죽은 것이다.” 그렇게 보십니다. 본문 28절에 보면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좀 어려우니 다시 설명해 봅시다. 방향이 자랑할 것이 없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뭔가 인간이 움직여도 자랑할 것이 없다, 자랑할 것이 없다, 죽 되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 일단 행해놓고 성경을 자기가 이루기 위해서 ‘그래, 자랑 안해야지.’ 하면 이것이 어디에 해당되느냐하면, 이게 믿음에 해당되지 않고 행함에 해당되는 거예요. 이 말이 내 딴에 쉽지만 혹시 어렵게 들린다면 그만큼 한국교회가 사기를 쳐서 그렇습니다. “바르게 사세요. 말씀대로 사세요.” 밑에 먼저 깔아놔야 할 것이 있어요. ‘자랑할 데가 없다.’ 이것을 먼저 밑에 깔아놔야 할 텐데 “말씀대로 살려면 행해놓고 자랑 안하면 되잖아요.”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열심히 자기가 도 닦고 등산해 가면 결국 높은 경지에 이른다는 버릇이 그대로 있기에 구원 받지 않은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본문 28절에 보면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라고 되어있는데 간추려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사람이 믿고 어떤 행동을 할 때 믿는다, 행동한다, 이것이 사람에게는 구분이 안돼요. 믿는 것도 행동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나 느끼는 것이나 다 행함에 포함되어 있어요. 인간이 자기가 있는 이상은 본문처럼 믿음 따로 있고 행함 따로 있는 식으로 구분이 안 되는 겁니다. 뭔가 믿습니다, 하는 것도 행함의 범주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이 굉장히 어려운 거예요. 믿는다는 것도 행함의 일종이에요. 안 믿는 것도 행함의 일종이에요. 무슨 기준이냐, 내가 살아 있고 내가 살아 있는 이상 살아 있는 티를 낸다. 그러면 이것은 따로 믿음이고 따로 행함이고, 이것이 안돼요. 한 덩어리, 살아있는 나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과 움직임……, 행동한다는 것은 생각이 있어서 행동하는 거잖아요, 행동은 그 이전을 당겨보면 생각한 것이 이미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에 행동 이전에 생각이든 상상이든 이것이 전부 다 행함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믿음과 행함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구분을 해놓고 있기에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이냐 하는 겁니다. 이 어려운 것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28절에 보면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 이 대목에 해석이 나와 있어요. 아까 말한 대로 구출, 구원이 이쪽세계에서 저쪽세계로 되잖아요. 그런데 이쪽세계, 구원 안 받은 세계에서 모든 행함은 내가 행동하는 그 자체가 이유를 묻거나 따지지도 않고 자기에게 의로운 거예요. 내가 있다는 자체가 의롭기 때문에. 무조건, 무조건입니다. 내가 하는 생각과 행동, 이것은 일단 무조건 착하고 바른 거예요.
혹시 내가 실수해서 남에게 피해를 입힌다면 그것은 반성하고 사과하면 그 자체로 또 나에게 추가적으로 나를 의롭게 만드는 겁니다. “당신 논리대로라면 반성을 안 한다면?” 반성을 안 하게 되면 시간적 여유를 주는 거예요. 예를 들어 사람을 죽였다. 수원에서 중국인이 사람을 죽였다. 여대생을 토막 내서 죽였다. “사형시키라, 사형시키라!” 하는데 우리나라 법원에서는 사형을 언도하지 않고 무기징역을 언도해 버려요. 혹은 사형선고를 내렸더라도 집행을 안 해요. 왜냐, 지금은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하지만 살아생전에 시간적인 여유를 많이 주면 언젠가는 아다리가 될 것이 아닌가? 사람심성이 착하기에 한 25년 6개월쯤 지내다 보면 “잘못했습니다. 유족들에게 사과합니다.” 그렇게 착하게 될 수 있는 그 때, 그 기회를 사형을 시킴으로 박탈할 자격이 국가에게 없다는 취지로 사형집행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쪽세계의 심보가 뭐냐, 사람들이 죄를 지어도 용서를 하는 이유가 그 사람을 사랑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용서하는 내가 더욱더 예뻐지고 착해지기에 용서하는 거예요. 그리고 행여 내가 잘못했을 때 내가 남을 용서했기에 용서했다는 그 스펙이 쌓인 것,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저주받을 일이 있더라도 그동안 착한 일을 너무 많이 했기에 그 일부를 떼어내서 그 죄를 덮어줄 수 있는 비축된 여분의 선함을 누적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하는 겁니다. 왜? 착하니까. 누가? 내가, 내가 착하니까.
28절에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할 때에 이 말씀이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떤 인간도 의롭지 않거든!” 그런 뜻이에요. 저는 그렇게 보이는데 다른 사람은 그렇게 안 보이는 모양이에요.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이렇게 성경에 나왔다는 것은 “누구야? 성경에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의롭다고 주장하는 그 엉터리 같은 인간은 누구야?” 그런 뜻이라니까요. 방금 제가 예를 들은 것은 “나는 무조건 의롭거든.”라고 하는 거예요. 무조건 의롭다 치고 잘못한 것은 반성하면 되고 또 두 번 다시 조심하면서 그런 일을 안 하면 되고 나쁜 일 빼놓고 나머지는 의로운 일이 되고, 이렇게 따져도 의롭고 저렇게 따져도 의롭고 어화둥둥 내 사랑, 이렇게 봐도 나는 예쁘고 저렇게 봐도 나는 예쁜 거예요.
그런데 성경 로마서 3장 28절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그런 식으로 사니까 하나님의 눈에는 전혀 의롭지가 않은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은 자기는 의롭다고 여기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전혀 의롭지 않다고 여기니까 사람들은 자기 의로움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조치가 필요한 거예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잔디밭에는 들어가고 싶은데 보니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있다고 한다면 방법은 간단해요. 그 팻말 자체를 뽑아서 없애 버리면 이젠 내가 잔디밭에 들어가도 되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 하니까 ‘죽으면 안 되지. 죽음은 무서워.’ 할 때 마귀가 “이 바보야! 선악과 따먹으면 죽는다, 는 그 자체를 네가 없애버리면 죽는 것도 없잖아.” “아하, 그렇구나. 바보같이.” 하고 그것을 뽑아버리면 이젠 죽는 것도 없고 정죄함도 없다, 라고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누구야? 선악과 뽑은 놈 나와!” 그렇게 되었어요. “도로 꽂아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던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의롭기 때문에 아무도 의인이 없어요. 예수님이 이런 말을 했거든요. 이 세상에 의인이 있다면 주님이 오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이 말씀하신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 중풍 병 걸린 사람이 있었거든요. 병자의 친구들이 병자를 떠 매고 예수님한테 왔어요. 사람들이 죽 줄서서 있는데 대기표 뽑아보니 아직 멀었어요. 그래서 무슨 수가 없나 하다가 지붕을 뚫고 내려온 거예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수고한 것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중풍 병 낫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내려오니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한 거예요.
이것은 중풍병자나 친구들이 사전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이 소리를 듣기 위해서 지붕 뚫고 내려간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병들지 않은 상태에서 이쪽 세계에서 살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지붕 뚫고 온 병자를 이쪽세상에서 건강한 사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저쪽 세계에서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신 거예요. 그게 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한 겁니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병 낫는 것과 죄 사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쉬우냐고 했어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마 9:5) 라고 했어요.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예수님은 저쪽 세계를 생각하고 있는데 아직 구원되지 못하고 이쪽 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이쪽 세계에서 중풍병자가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갇혀 있는 사고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는 거예요. 그러면 내 뜻과 희망과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가 뭘 행해야 된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내가 지붕 뚫고 행해서 병 고쳤으면 그것은 내 행함으로 말미암아 병 고친 것이 되잖아요. 그렇게 되면 자기가 대견하고 착하게 되지 자기의 죄가 드러날 어떤 기회도 만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의인은 없고 나는 무조건 죄인이야.’라고 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등장하신 것은 천국으로 구원해 주기 위해서 오신 거거든요. 그냥 이 동네에 살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고 그 쪽 세계의 원리를 이야기한 겁니다. 그 세계의 원리는 뭐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죄에요. 죄기 때문에 그 쪽 세계에는 올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라고 했거든요.(마 9:6)
“너희들은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느냐? 내가 세상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가 몰랐느냐?”라고 이야기한다고요. 그러니까 병 나은 사람도 의아해 하고 주변 사람들이 다 병 고치러 와서 ‘무슨 의사가 저런 소리를 할까?’ 하고 의아해 하는데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이 뭐냐,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상황도 마찬가지에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한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 하면, 그 시기가 고난주일이라 유대인들이 자기들 스스로 자책하고 금식하는 절기로 지키는 날이에요.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그러고 있는 상황이죠. 그런데 그 상황에서 주님께서는 죄인을 데리고 음식 잡수러 가셨어요. 그러니까 회개하고 자복하던 유대인들이 “너희들은 왜 고난기간에 와 금식과 자책을 하지 않고 음식 먹으면서 시시덕거리고 있느냐?” 하니까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지 자기를 스스로 죄인이라고 하는 그런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한 거예요. 오늘날 교회 다니는 모든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시는 말씀이 더 어려운 말씀이 나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 9:17)
담으면 터져서 쏟아져버리고 담으면 터져서 쏟아져 버리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됩니다. 그릇 같으면 포장지도 신상품으로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옛날 사고방식 가지고 주님의 일을 담을 수가 없다.’ “담을 수가 없는데 그것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지.” 바로 아까 이야기한 강도, 세리, 창녀, 불의한 청지기입니다. 정말 이해하기 힘들어요. 어떤 회사 직원이 있는데 기분 나빠서 사장한테 보복하는 식으로 자기가 아는 거래처 장부 다 조작해서 이렇게 했어요. “당신 내가 편의 봐 줄 테니 내가 회사 잘리거든 당신도 내 편의 봐줘야 됩니다.” 이런 식으로 해 놓고 퇴직을 했어요. 횡령 실컷 한 직원이 “잘 먹고 잘 살아라.”하고 회사 문 나서는데 그 때 예수님이 만나서 등 두드리면서 “훌륭한 사람아, 이 불의하고 훌륭한 청지기야!” 잘 보세요. ‘훌륭한’, 그 다음에 나오는 말, ‘불의한’ 청지기.
“네가 네 장래에 대해서 감 잡았구나. 네가 얼마나 혹독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이미 감 잡고 있다니. 세상에 이런 똑똑한 자를 다 봤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그쪽 세계에서만 통하는 원리입니다. 이쪽 세계에서는 말이 안돼요. 무슨 횡령한 사람을 두고 등 두드려 주면서 하는 말이 그냥 훌륭한 청지기가 아니고 “훌륭한 불의한 청지기야.” 이렇게 돼요. 듣는 청지기 상당히 기분 나쁠 수가 있어요. “아이고, 이 훌륭한 나쁜 놈아.” 이것과 똑같은 소리거든요. 이 훌륭한 나쁜 놈아, 라는 이야기를 할 때 비로소 그 사람은 내가 예수 믿는다는 그것도 행함에 속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도 나의 착함을 내놓고 자랑 질을 위한 수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아, 내가 구원받기 전에 이쪽 세계에서 놀던 가락이 어디 갑니까? 참 끈질기네. 구원받은 나까지 발목을 잡네.’ 여기서 놀던 사고방식이 성경을 해석하는데 그대로 다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강도를 보세요. “강도님! 구원 받은 강도님은 자랑 질 한 번 해 보세요.” 강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27절 말씀 그대로에요. “제가 자랑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자랑할 것이 있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자기자랑을 유지 보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여야 되는 거예요.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부활해 놓고 성령이 오니까 그 다음부터 뭐냐, 믿음과 행함이 유일하게 그때 처음으로 갈라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믿음과 행함. 예수님에게 믿음이라는 것은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어요. 믿음이란 뭐냐, 믿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아니고 “저의 어떤 행위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어요. 믿음이라 하는 것은 등산을 하든지 뭘 하든지 그냥 잠자게 되면 다 손을 놓아버리듯이 믿음이라 하는 것은 손을 다 놓은 상태가 믿음입니다.
손을 놓은 상태가 믿음인데, “이 근호 목사님 말대로 손을 놓은 상태가 믿음이니 아무것도 안 하렵니다.” 한다면 그 아무것도 안하는 그것이 행함이에요. 왜 그런가, 아까 한 것 다시 합니다. 출발점이 “자랑할 데가 없습니다.” 하면서 악착같이 행하세요. 왜 그런가, 이미 우리는 선악과 따먹고 이 세상에서 죽은 자거든요. 죽은 자가 되면 죽음이라는 테이프가 서서히 풀려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서서히 죽음이라는 테이프가 풀어지면서 살아가는 모든 것이 ‘왜 우리의 모든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행위만 나타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우리 인생이에요.
악착같이 사셔야 돼요. 등산을 하든지 하든 악착같이 살아야 돼요. 그래서 나의 이런 착함과 고상한 행위가 왜 나로 하여금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를 확인시켜 주는가를 봐야 돼요. 왜 그것이 기쁘냐 하면, 자랑할 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자랑할 것이 없으면요……, 죽 음을 미리 일찍 안다는 것은 부질없이 저주에 안 시달려도 돼요. 이미 주님께서는 죽은 자로 간주하고 우리를 그쪽 세계에서 끌어당겼기에 이미 죽은 자가 죽을 짓 하는 그것이 뭐가 이상합니까? 죽은 자가 죽을 짓 하는 그것이 자연스런 현상 아닙니까?
저주받을 자가 저주받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인데 왜 행여 올해도 저주받을까 싶어서 안절부절 하느냐는 말이지요. 그것은 아직까지 안 죽었다는 그 말 아닙니까? 왜 안 죽고 싶은가? 자랑 질 하고 싶어서. 죽은 해골이, 그 뼈다귀가 자랑을 해 보았자 바짝 마른 것을 자랑합니까? 성립이 안 되잖아요. 자랑 질 하고 싶으니 내가 살아야 하고 살아서 자랑 질 하고 싶으니 자랑 질을 할 만한 것만 뽑아서 남에게 나타내야 하는데 그것을 남이 안 알아주니 안 알아준다고 또 화를 내고 화가 나니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 악순환.
자기 딴에 열심히 했는데 자기가 기대했던 기대치에 이르지 못하니 또 원망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하고 또 돌아오고. 거기다가 주님께서 이야기합니다. “자랑 질 하지 말라.” 네가 여기 있다는 것을 자랑 질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그런 이야기를 했지 않습니까? “나의 죽음을 절대로 적에게 알리지 말라.” 가만 따지고 보면 쓸데없는 말을 했어요. 알려봐야 누가 손해인데요? 우리의 죽음은 우리가 안 알려도 주께서는 이미 알려줬습니다.
“이미 너는 죽었다.”라고 이야기해 준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그냥 잠자듯이 잠속에서 꿈을 꾸듯이 하면서 이것은 그냥 잠자는 것이라 생각하시고 이미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시면서 살아가시면 되는 겁니다. 그 삶이 어떤 삶이냐, 여기 31절에 보면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이 모든 것은 행함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가? 믿음은 힘에서 나와요. 사람이 잠자고 있을 때는 자기 힘이 완전히 0이기 때문에 타인의 힘에 의해서 움직여지게 되어 있어요.
사람이 잠에서 깨면 자기가 애쓰지만 잠잘 때는 남이 들춰 업고 가도 몰라요. 그것은 나 말고 타인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님의 율법을 저지하려는 나쁜 힘이 있어요. 그 나쁜 힘을 인간들은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보고 “네 행한 것 가지고 자랑 질 하지 말라.”라고 하고 일단은 제켜 놓고 인간을 자랑 질 하게 만든 그 배후의 악한 영을 보고 “빨리 나와. 숨지 말고 나와.” 하고 불러내는 거예요. 마태복음 12장 31절에 보면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마태복음 12장 32절에 보면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네 행위를 보고 지옥 간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너를 받치고 있는 신이 악령이라면 더 이상 나에게는 사함이 없다. 왜, 그 악령은 너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성령을 상대로 해서 성령이 하는 일을 다 쓸데없는 일로 공격하는 악한 영의 싸움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어떤 사람 생각하기를 기독교는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다 용서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불교와 기독교는 따지고 보면 동일하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3장 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그 자비 많은 사도바울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왔느냐 하면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정죄 받는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오신 뒤에 모든 인간이 다 사랑받는다는 말도 아니고 예수님 오신 것은 ‘진짜 필히 정죄 받을 자를 기어이 내가 들춰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일서 5장 16절에 보면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는 겁니다. 죄라고 해서 다 용서받는 것도 아니고 죄라고 해서 다 용서 안 받는 것도 아니고 죄에 두 종류가 있는데 용서 받는 죄가 따로 있고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는데 그 죄를 위해서 네가 기도하거나 용서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17절에 보면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하나님이나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단순히 몇 명 건지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고 그동안 인간을 장악했던 힘, 권세자에 대해서 대결구조로 가져가는 겁니다. 우리는 멋도 몰라요. 지금 영적 싸움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그저 우리는 코앞에 있는 것만 가지고 자랑 질 하면서 살아온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 인간 보고 “쉿, 자랑 질 하지 마라.” 이렇게 해 놓고 “네가 구원받는 것은 네 행위로 안 돼. 너는 그냥 가만있어. 너는 그냥 자고 있으면 돼. 열심히 행동하는 모습으로 자고 있으면 성령이 와서 보쌈 하듯이 데려가게 되면 비로소 너는 그 때 뒤돌아보면서 ‘내가 마귀에게 속아도 단단히 속아서 그냥 한평생 자랑 질 하면서 살았구나. 우리는 실상 자랑할 것도 없고 그냥 잠자는 상태의 죽은 것에 불과한데 살아 있네, 하고 까불어대는 그 윤리도덕이나 종교행위나 경건스럽다는 이 모든 것이 다 헛짓이구나. 차라리 강도가 되어서 구원받으면 그런 것이 다 아무소용 없는데 자랑 질 할 수도 없는 것들을 자랑해 왔구나.’ 하는 겁니다.
예수 믿었거든요, 뭐 믿었거든요, 이런 것도 다 자랑 질이에요.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자랑 할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소리 하라고 구원시켜 놓았습니다, 라고 고백한다는 말입니다. 끝으로 빌립보서 2장 13절에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냥 내시경이 아니라 수면내시경, 우리를 잠재워 놓고 우리 안에서 진짜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에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 우리는 그냥 수면내시경, 우리 속에서 다 관찰하시고 착한 일을 시작하시고 마무리 하시는 것도 역시 하나님. 우리가 자랑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돌아가는 사실에 대해서 저희들이 알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율법 주시고 말씀 주신 것은 우리보고 지적한 것이 아니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악마의 악마성을 들춰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율법 주셨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촐랑대면서 나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식으로, 자랑하는 식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뭘 해도 자랑할 것이 없음을 오히려 복음으로 여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