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강-롬2장 24-29(할례)1212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2장 24절에서 29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2페이지입니다.
로마서 2:24-29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또는 사도가 사람을 꾀이려면 좀 알아듣는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이게 무슨 이야기에요? 알아듣지를 못하겠어요, 무슨 이야기인지. 할례니 무 할례니,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해요. 성경말씀은 못 알아듣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설교를 그 취지를 살려서 못 알아듣는 설교를 하겠습니다.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는 성경의 취지는 분류작업 때문에 그렇습니다. 똑똑하니까 구원받아라, 이런 것 없습니다. 잘났으니 천당가거라, 이런 것 없습니다. 분류작업 자체의 취지에 대해서 동감을 해줘야 돼요.
이것은 내 똑똑함과 관계없고, 착함과 관계없고, 내 노력과 관계없이 이 보이지 않는 영원한 천국에 왔구나, 그런 사람으로 달라지기 위해서 성경말씀은 이렇게 무슨 말인지를 모르게 하는 겁니다. 특히 할례라는 이야기는 옛날 유대인이나 서로 아는 이야기지 히브리민족 말고 다른 민족한테는 생뚱맞은 이야기입니다. 할례라는 것은 뭐냐, 골로새서 2장에 보니까 벗기는 거예요. 까는 거예요. 소시지나 혹은 바나나, 뭔가 겹 주름이 되어 있는 것을 벗기는 겁니다. 겹으로 되어 있는 것을 깐다는 것은 의미가 겹 층을 이룬다는 겁니다. 표면을 까뒤집음으로서 내부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한 약간의 수술은 유대나라를 하나로 묶는 문신 같은 겁니다. 옛날 나치가 유대인 골라낼 때 바지 벗겨 보는 겁니다. 그래서 할례(남성생식기 끝이 벗겨져 있는 상태)가 되어 있으면 유대인이고 없으면 유대인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골라서 수용소에 보낸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이고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했던 그 표시가 오히려 적들에게는 차별대우를 받고 혹독한 시련을 받는 빌미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러면 할례를 하지말까요?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용으로 문신된 사람이 대중탕에 들어오면 더럽다고 다 피하잖아요. 마치 약점인양, 문신처럼 신체에 고정적으로 새겨져 있다는 것에 대해서 문신 없는 외부에서 문신 있는, 할례 있는 쪽을 학대하는 빌미로 사용하는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고맙게도 분류작업의 수단으로 적들마저 활용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당해도 좋은 거예요.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내려오는 일종의 성격처럼 되었는데 유대인들은 어느 나라 가서도 사는 것이 굉장히 당당합니다. 당당한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자기가 올바른 진리의 자리에서 살기에 누구 앞에서도 당당한 거예요. 누가 얼마나 잘났어, 가 아니라 혹은 누가 얼마나 가졌나, 그것 가지고 당당한 것이 아니고, ‘네가 깔고 앉은 방석이나 내가 깔고 앉은 방석 좀 보자. 네 방석은 변화하는 것이 요동치는 것이고 상황 따라 수정이 가능한 방석을 깔고 앉았지만 나의 이 자리는 진리의 자리, 변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의 자리, 나는 부족해도 이 자리가 나를 구원한다.’는 그 당당함, 그 자신감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어느 나라 가도 단결케 하고 동질성을 유지하는 거예요.
중동전쟁이 벌어졌다, 미국에 있는 직장 다니던 멀쩡한 사람들 군장꾸리고 군복입고 자기 돈 내고 이스라엘로 가서 아랍과 전쟁한다는 말이지요. 그 당참,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세월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 하나님의 문신 같은 것, 신체에 새긴 것, 할례 받았다는 것, 이것은 깡패 조직처럼 창안해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것은 어렵게 이야기해서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에 의해서 할당받고 있는 존재라고 보는 거예요. 달리 이야기해서 하나님의 예정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할당받은 존재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존재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증거를 대라면? “자, 할례다!”
유대인들에게 할례란 굉장한 자부심이에요. 누가 말하기를 사람이 우선이라 했는데 유대인들에게는 할례가 우선이에요. 유대인이 대통령 선거한다면 구호가 “할례 없는 자는 대통령 떨어진다.” 사람이 아니고 할례가 우선이기에. 하나님이 새겨준 문신, 하나님이 할당한 존재의 자리, 그것은 우리가 잘잘못을 떠나서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 같은 겁니다. 하늘나라 갈 수 있는 운명이 나에게 자리를 할당했기 때문에 그 자리를 꿰차고 있는 한 그 운명의 선을 따라서 하나님과 합류한다는 그 믿음, 그것에 비해서 돈이나 노벨상을 땄다는 것들은 별로 중요치도 않은 문제에요.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에게 그렇게 전도를 해도 꿈쩍도 않는 이유가 할례 때문이에요. 사도바울도 사실은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예수? 웃기고 있네. 어디서 이단이 하나 등장해서 까부나.” 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 잡아 죽였습니다. 누군가를 함부로 공격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은 사는데 있어서 자신감 있다는 거예요. 돈이 떨어지고 사는 것이 좀 어렵고, 그런 것은 내가 지금 꿰차고 있는 할당된 운명에 비해서는 다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거예요. 교회 가서 유대인들 흉내 내봐야 유대인들이 웃습니다. 그랬던 그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할례를 포기한 것이 아니고 할례의 범위를 확장시켰습니다.
할례가 유대인들만 받는 문신 같은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그것을 오늘 본문처럼, 할례는 육신으로 표시 내는 것은 하나님한테 안 통한다. 진짜 하나님이 원했던 할례는 마음의 할례라 해서 할례라는 해법을 이방인들, 일반사람들에게까지 확대시켰습니다. 확대시키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유대인들에게 적용했던 것, 할례를 행하면 약속의 자녀가 되어서 복을 받고 할례가 없으면 이방인이 된다는 이 규칙, 이 범주가 같이 마음의 할례와 더불어서 확장이 되어버렸어요. 확장공사를 해버린 겁니다.
그러면 육신의 할례가 없다 할지라도 마음의 할례를 받으면 이것은 유대인에게 약속한 아브라함의 복을 우리도 같이 받을 수 있는 기회가, 그러한 효력이 우리에게 제공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받으려면 어떻게 하는가? 할례라는 것에 대해서 제가 설교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까는 거지요. 까져야 돼요. 까진다는데 할례 자체의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까질게 없어, 그러면 그 사람은 마음의 할례조차 받을 기회를 놓치는 겁니다. ‘나는 까져야 돼. 뭔가 껍질이 벗겨져야 돼. 왜, 나는 껍질을 뒤집어쓰고서 인생을 살아가기에. 매사 남들 앞에 나설 때 껍질 외에는 보여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식으로 살아가기에.’라는 것을 먼저 자인해야 돼요.
성경에서 구원받는 백성에게 표시를 낼 때 껍질을 벗기는 부위를 어느 부분을 채택했느냐하면 바로 남성 생식기 끝을 채택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인간의 DNA가 나오기 때문이거든요. 그것을 예수님은 어떻게 설명하는가, 이렇게 설명합니다. 할례란 육적 허물을 벗기는 것이라고 해요. 성경 참 어렵습니다. 골로새서 2장 10절의 말씀인데 ‘할례란 육적 허물을 벗기는 것이다.’ 그러면 피부과에 갈까요?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해석했느냐하면, 아브라함 자신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어떤 사건이 있어서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자체가 바뀝니다.
아브라함이라는 뜻은 많은 사람의 아버지라는 뜻이고 아브람의 뜻은 그냥 아버지라고 이름 불린다는 정도의 뜻입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면서 아브람출신의 자식은 저주 받고 지옥 간다는 겁니다. 사람으로 난 자식들은 처음부터 지옥가게 되어 있어요. 지난주에 설교한 내용 중에 아담 속에 아담이 없다고 했잖아요. 모든 아담은 원래 만든 아담이 아니에요. 그래서 다 죽어야 되기 때문에 수도관 물 흐르듯이 죽고, 죽고 계속 죽어야 됩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이 누구를 낳고 얼마를 살다가 죽고, 또 죽고, 죽음의 사슬로 이어져간다는 말이지요.
아무리 자식을 낳아도 죽은 자식을 낳은 거예요. 자식을 열두 명 낳아도 다 죽은 자식이라니까요. 무슨 계기가 없으면 죽은 자식이 살아 있는 자식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두 개의 노선을 집어냈어요. 죽음으로 통하는 자식 따로 있고 영생으로 통하는 자식 따로 있다, 그렇게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 분류 계기가 뭐냐, 충분하게 자기 육적실력을 발휘를 해줘야 돼요.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가 애를 못 낳으니까 하갈이라는 종과 동침을 해서 자식을 낳았는데 이름이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이 여기 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의 육의 실력과 능력을 보여준 거예요. 인간의 육은 쉬지 않는구나, 인간의 육은 멈추지 않는구나, 뭔가 발산하고 폭발하는구나, 그 폭발 뒤에 나온 것은 바로 자식인거예요. 남녀 간에 결혼해서 동침한다는 이것, 누가 이야기했듯이 결혼은 미친 짓입니다. 동침할 때 그것은 자기 정신머리로 동침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정신을 바짝 차려서 어떤 성관계하는 그것은 임금이나 그렇게 하지요. 합방 날짜 맞추고 합방 할 때도 주변에 궁녀들이 배치되어서 진짜 튼실한 자식을 낳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만 일반 사람들의 동침은 정신머리가 확 가버려요.
처녀들은 모르겠지만 정신이 다 나간다고요. 이것은 미친 짓이에요. 이것은 인간의 내부에 있는 근원적인 욕망은 인간의 이성이 잠재울 수 없는 겁니다. 내가 자식을 낳은 것이 아니고 나조차 육에 복속되어 있고 종속되어 있어요. 생물학적인 이 본성을 성경에서는 육이라고 하고 그 생물학적 본성은 육과 더불어 주체할 수 없는 죄가 발산되니까 “마음껏 너의 육적인 것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라. 드러냈나?” “드러냈습니다.” “자식 생겼나?” “생겼습니다. 이름이 이스마엘입니다.” “그래? 못 들어간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실컷 내 밑바닥, 내가 깔고 있는 방석의 밑바닥까지 드러냈는데 구원을 받지를 못해요. 그런데 그 전에 이미 이름은 바꿔놓았습니다. 아브라함, 너는 많은 사람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이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드러내 봐라, 드러내 봤자 할 수 있는 것은 기껏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고 아브람의 자식 그냥 저주받을 이스마엘만 계속 낳는 거예요. 다음에 또 낳아봐야 마찬가지입니다. 또 자식 낳아봐야 저주받을 자식만 또 낳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 하나님이 찾아옵니다. 안 찾아오면 안돼요. 세 명의 천사가 파견되어서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찾아와서 그냥 밥이나 잡숫고 가면 아무 일도 안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찾아와서 하는 중요한 미션이 있습니다. 돈, 양과 염소와 부동산 투기, 이런 것 안 하십니다. 뭘 줄까, 무슨 맛있는 것을 줄까, 이런 것 안하십니다. 얻어먹는 것은 천사가 얻어먹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접촉했을 때 단 한 가지 일만 합니다. “네가 다른 혈통의 사람이 될 것이다.” 그것뿐이에요. “내가 자식을 낳을 것인데 그 자식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이 될 것이다.”
운명이 할당한 존재, 예정하심에 의해서 할당받은 존재의 자리, 그리고 우리라는 것은 그 자리가 이끄는 대로 갈 수밖에 없는 그 자리, 당당한 자리, 변치 않는 자리, 하나님이 보장하는 자리를 주시면서 이렇게 합니다. “할례를 행해라. 누구든지 할례를 행하지 아니하면 백성이 아니고 할례를 행하면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거기서 나온 사건이 바로 할례에요. 문신 같은 표시였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 진정 우리가 약속된 백성이라면 우리가 우리에게 최면 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약속한 것, 하나님이 반드시 구원 하마, 하고 보장된 육신에 새겨진 흔적이 바로 할례라는 겁니다.
그 할례는 겹 주름으로 되어 있고 그 겹 주름은 벗겨져야 됩니다. 벗겨줄 때 벗겨졌다는 그 사실에 주목해야 돼요. 뭔가 벗긴다는 것, 찢어진다는 것, 찢어지고 뭐냐, 이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선 것은 찢어져야 한다는 사실, 인간이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찢어져야 되는 거예요. 겉과 안쪽이 분리되어야 되고 분류되어야 된다는 사실이에요. 그러면 겉, 떨어져나갈 것은 뭐냐, 그것은 인간의 생물적인 욕망, 생물적인 욕망과 욕구와 주체할 수 없고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그런 데서 발산된 것이지요.
라캉이라는 철학자는 그것을 이렇게 보았습니다. 태어난 애는 동물이나 마찬가지에요. 애가 태어나서 어떻게 정신적인 인간으로 이전되는가의 그 절차, 순서, 메카니즘에 주목했습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상상하게 되는데 뭘 상상하는가, 거울속의 모습을 보고 그 모습이 자기 모습이라고 상상하는 데서부터 인간의 자의식이 생겨난다고 했습니다. 생후 6개월 전이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거울입니다. 거울은 반사되는 표면만 있지 그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유리가 그렇잖아요. 앞에 뭔가 있기는 있는데 보면 없잖아요.
TV에 사람 나온다고 뜯어버리면 그 속에 사람 들어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라디오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인간은 생물적으로는 표면적인 것으로 출발해서 그 뒤에 숨어 있는 깊이를 인간이 상상해서 채우는 식으로 자아를 생각하는 겁니다. 청소년들이 연예인들을 좋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어린애들이 신데렐라나 백설공주 같은 동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그것은 일종의 이미지, 껍데기라는 말이지요. 껍데기로부터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 안쪽을 자기가 마저 채움으로서 그것이 마치 현실인양 꿈으로 여기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그 안에 있는 것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겁니다.
내가 말해도 참 어렵다! 어려운데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동방신기 노래를 그냥 들으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동방신기 멤버들의 아침 반찬이 무엇이며 점심은 어디서 먹고 잠은 어디서 자고 친구는 누구며 생일은 언제인지, 동방신기는 그냥 노래 부르는 가수인데 그 배후에 대해서 계속 캐묻는 거예요. 이 버릇이 어른이 되어도 멈추지 않습니다. 대선주자들은 주로 뭘 입을까, 이런 거요. 목사님이 들고 온 가방이 뭔지, 그런 것, 뭔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그 사생활까지 다 알고 싶고 궁금한 것, “궁금해요? 오백 원!” 그런 것을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이렇게 성장하는 가운데 집안에 아버지가 “너는 그렇게 살면 어린애 되는거야. 이제 너는 어른이니 어른의 세계를 알아야 된다.” 해서 말을 하고 명령을 하고 종속을 시키고 지시를 하죠. 그것을 언어가 만들어 낸, 상상이 아닌 상징이라고 합니다.
그 상징은 누가 주는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주는 겁니다. 이 아버지의 이름이 가정에서는 아버지요, 학교가면 선생님이고 교회 가면 목사요, 믿음생활하면 하나님, 예수가 되고 군대 가면 상관이 됩니다. 특히 아버지나 어머니의 영향력이라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는데 고생하다가 자기가 성공했다 싶으면 아버지무덤에 가서 “아버지! 제가 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합니다. 평생 아버지의 이름에 종속되는 거예요. 왜, 아버지가 나를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바꾸어준, 바로 그 상징계가 아버지의 이름인데 아버지를 대신할 사람이 누구냐, 세 글자, 대! 통! 령! 국가가 되는 겁니다.
나의 상상을 현실로 바꿔주는 것은 훌륭한 대통령을 만나야 되는 거예요. 대선 앞두고 어울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간은 짐승이에요. 60조의 세포덩어리일 뿐인데 세포덩어리가 어떻게 정신적으로 살아가는 겁니까? 처음에는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족하다가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왜 죽으려고 합니까? 어떻게 해서 물질세계에서 정신세계로 이동하는가, 그것은 바로 언어라는 것, 누가 날 명령해준다는 거예요. 그 명령이 나에게 인이 박혀서 그것이 평생토록 모델삼아서 따라가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겁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자살해버려요. 왜, 나는 그 명령에 따라줘야 그것이 내가 되는 거예요. 명령자가 있어야 나는 나답게 되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15살 먹은 애들이 서로 사랑했는데 여자애가 나쁜 놈한테 잡혀가서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14년이 지났어요. 그 남자애는 떠나간 여자 친구를 찾겠다고 형사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 여자 친구를 찾았지요. 이 수연이라고. 보고 싶다, 그 이 수연. “내가 다시 이수연이 되면 안 되겠느냐?” 수연이가 하는 말이 “나는 이 수연으로 살고 싶지 않다. 이 수연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고 조이로 살고 싶다.”고 했어요.
보고 싶은데! 형사가 된 그 남자친구(정우)는 그 때의 그 수연이 나하고 짝을 맞춰야 그게 바로 내가 그리는 나의 현실적인 모습인데 네가 빠져버리면 나는 이 세상에 살 이유도 목적도 없는 겁니다. 자식이 없을 때는 그냥 살다가 부모가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자식이 없으면 자기도 없는 거예요. 인간은 물질로 사는 것이 아니고 정신으로 산다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대체 나라는 것이 뭔가 정신으로 뒤집어 씌워야 돼요. 그런데 할례는 뒤집어씌운 그것을 까라, 하는 겁니다. “너한테 그동안 뒤집어씌운 그 육, 육이 아니라고 오인하는 그것을 까뒤집으라, 그 말이지요.”
보고 싶기는 뭐가 보고 싶은데? 인간이 보고 싶은 것은 뭐냐, 자기 자신이 상상했던 그 현실을 보고 싶은 거예요. 이 수연이가 보고 싶은 것이 아니고 과거의 그 한때 아름답던 그 모습을 그리워하는 겁니다. 세상이 과학위에 있다고 하는데 과학이라는 것도 없고요, 인간은 자기가 상상한 현실만 세상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것을 정지화면이라고 합니다. 원래 위성이 정지된 것처럼 보여도 정지된 것이 아닙니다. 지구가 돌면 지구 자전속도와 동일한 속도로 돌아줘야 맨 그 자리에 같이 있거든요. 사람들은 세계를 볼 때에 자기가 같이 가면 세계도 같이 가 줘야 하는 거예요. 같이 안가주면 울어버립니다.
그 세계가 있어줘야 되는 것은, 아버지가 아버지답고 엄마가 엄마다워야 하는 것은 비로소 나는 내가 생각했던 그 자리, 내가 생각한 현실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육에서 정신이 될 때 아버지의 명령, 누군가 지시한 그 권위, 카리스마에 의해서……, 학교에 가면 선생님의 말을 잔소리로 들으면서도 뭔가 보란 듯이 ‘내가 좋은 대학에 가서 선생님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야지.’라는 뭔가 자극을 받을 수 있고 비전과 꿈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사람들을 본인들이 찾아다녀요, 본인들이.
물질에서 정신으로 정신에서 영으로 갈 때 어떻게 하느냐, 영으로 갈 때는 목사한테 한 수 배워서 성경을 보면서 예수를 가지고 예수가 자기의 육을 가리는 하나의 영적인 새로운 세계라고 해서 그 세계에 천국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기처럼 안 되면 지옥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교회생활이에요. 주께서 말합니다. “그것도 까라!” 그것도 까버려요. 보통사람이 교회 와서 좋은 소리 들었다, 윤리적인 교훈을 들었다, 그것은 까는 것, 할례가 아니고 반대로 자꾸 덧입히는 거예요. 교회가 사람을 망친다니까요. 벗겨내는 것이 아니고 자꾸 덧입는 곳이에요.
좋은 소리 들으면 자기가 좋은 사람인 줄로 착각하잖아요. 사도바울에게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하나님에 의해서 완전히 껍데기가 홀라당 까진 사람이에요. 사도바울은 까진 남자, 그 전까지는 생식기만 까진 남자지만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자신이 구상한 모든 세계관이 다 까져버렸어요. 다 홀라당 다 벗겨졌습니다. 과연 이것이 인간으로서 가능한 문제인가? 과연 인간이 자기 위선을 스스로 벗겨낼 수 있는 능력이 자체 내에 있느냐, 없습니다. 골로새서 2장 11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그렇게 해놓고 그리스도의 할례가 어떤 식이냐, 12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이것은 뭐냐, 세상이 나와 함께 돌아가는 정지화면이 아니고 나와 함께 돌아가는 것은 죽음이 나와 함께 돌아가는 겁니다. 마약하는 사람이 마약 없이는 못살 듯이, 도박하는 사람이 도박 없이는 못살 듯이, 도박이 나의 정지화면이고 마약이 나의 정지화면이 되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듯이 지금 모든 인간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너 할례 행해야 돼.” “그까짓 거 병원에 가서 포경수술 하지요.” “아니, 그것 말고 마음의 할례를 행해야 돼.” 이것이 영원한 하나님의 할당된, 예정된 존재의 자리라고 할 때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죽음을 억지로 덮어씌우는 살고자 하는 모든 것의 껍질을 벗겨내라, 그 말입니다.
지는 금요일에 서울 의존교회에서 강의 중에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인간의 자아라는 것은 가만있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자아는 끊임없이 외부를 향하여 소리치고 있습니다. “살려주세요!” 말을 하든지 길을 가든지 숟가락 가지고 밥을 뜨면서도, 우리 보기에는 그냥 손을 내 밀었다, 숟가락을 잡았다, 숟가락에 밥을 실었다, 입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보이지만 그 모든 한 동작 한 동작에는 뒤에 괄호처럼 생략된 것이 있습니다. 숟가락을 들면서 (살려주세요), 밥 푸면서 (살려주세요), 입으로 숟가락이 들어가면서 (살려주세요), 어떤 동작도 다 그래요.
어린 애들 보세요. 밥 안 먹고 만 날 튀김만 먹으려고 한다면 애가 젓가락 들면 엄마가 팔을 탁 치지요. 애는 그냥 왕 하고 울어버리잖아요. 왜, 살려달라고 하는데 엄마가 나의 살려달라는 이 원초적인 욕망을 방해하느냐, 그 말입니다. 엄마는 이것 먹고 살아도 나는 이것 먹고 살겠다는 거예요. 모든 인간의 행동은 다 ‘살려주세요.’가 있어요. 우리 교회 와서 예수 믿겠다는 것도 다 살려달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답변은 그 반대입니다. “살기는 뭘 살아? 이미 죽어가고 있으면서 뭘 살아. 너는 자꾸 너를 정지화면으로 보는데 너는 교회 오나 안 오나 죽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죽게 되어 있는데 그러면 교회를 왜 와야 되는가? 우리의 감추어진 육적인 욕망, 멈출 수도 없고 숨길수도 없는 것을 그대로 까발리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왜?” “올해도 우리 가정의 안녕을 위해서 교회 옵니다.”라는 그 솔직한 기도를 그대로 노출시키라는 거예요. 그게 교회에요. 노출시켜놓고 욕은 되게 얻어먹지요. 도대체 인간은 할당받은 존재, 분배받은 존재기 때문에 분배하신 분이 관리하지 내가 관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 우리는 분배를 받아 놓고 그 분배하신 분과는 관계를 끊어버리고 분배받은 나, 나 자신이 나를 관리하다 보니까 기껏 하는 것이 꾸미는 것, 감추는 것, 그 재주밖에 없어요.
의존교회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욥 이야기를 보세요. 사람들이 성경에서 욥 이야기를 보거든요. “욥 이야기 보면 거기에 뭐가 있습니까?” 하면 “부자고 자식도 많은 욥이 있었는데 나중에 자식들도 다 죽어버리고 난데없이 아파서 기왓장으로 온 몸을 긁고 있다가 하나님을 만나서 전보다 곱빼기로 축복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들 이야기해요. 그러면 욥이 아픈 자리에서 하나님한테 질문을 했는데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이 있어야 되거든요. 욥이 하나님께 받은 질문에 대한 응답, 해답이 뭐였던가요?
사람들은 몰라요. 욥이 질문한 것이 욥만 질문한 것이 아니고 우리도 매일같이 하나님을 향하여 질문하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이 뭔데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이유나 들어봅시다.” 그게 욥기입니다. 해답이 궁금하지요? 하나님의 해답은 이렇습니다. “내가 너를 힘들게 하는 이유는 너를 보고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내가 너한테 할당한 욥 너의 자리 때문에 욥의 자리를 네가 알도록 하기 위해서 너를 힘들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욥의 자리가 뭐냐, 장차오실 예수님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자리를 깔고 앉으면서도 지금 깔고 앉아있는 방석은 안보이고 내가 보이는 거예요. 내가 보이니까 주님께서 내 엉덩이에 눌려서 피 흘리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은 안 보이고 그 눈에 보이는 덩치만 어떻게 관리할까, 그래서 “이래가지고는 밥 못 먹고 삽니다. 대책을 마련해 주세요.”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세상 불신자들은 그냥 방치해 버려요. 원래 그게 네 역할이면 방치 하겠는데 주께서 분류작업에 의해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우리의 육체적인 멈출 수 없는 욕망,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이 모든 것이 자기 욕망을 주체 못해서 쳐다보는 그것만 쳐다보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것이 짓눌려서 터져버린 주님의 그 피를 다시 보도록 방향을 틀기 위해서, 그것을 회개라고 하는데, 방향을 틀어서 나를 보다가 나를 안 보게 되는 인생관을 우리에게 부여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왜 자꾸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라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간단했습니다.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네가 아느냐?” 사람들은 황무지를 생각 안하고 비 내리는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 하나 하나가 빗방울처럼, 사람을 만날 때 너도 하나의 빗방울 나도 하나의 빗방울, 빗방울이 서로 마주치게 되면 이것은 하나의 우발적인 마주침, 내가 나밖에 모르니 자기만 필연이고 자기 빼놓고는 나머지는 다 우발적인 거예요. 그런데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이유는 이 세상은 나라는 것을 내가 나한테 질문할 자격이 없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꾸 질문하고 자꾸 하나님 앞에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이나 나한테 질문할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어요.
질문은 누가 하느냐, 하나님이 우리보고 질문해야 됩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우리가 그 질문이 들려오지 않으니까 내가 내 인생문제를 나한테 질문해야 되는 거예요. 남들은 안 그런데 나는 왜 그런가? 요한복음 7장 22절에 보면 할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할례를 주었다. 그런데 그 할례의 의미가 뭐냐, 사람을 건전케 하고 완전하게 치료하는 것이 목적이다, 할례를 행하시는 주님께서 오셨다는 말은 예수님의 눈에 보기에 누구나 하나님의 합당한 인간이 아니도 다 병들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몸에 문신 같은 할례는 했는데, 그래서 자신은 하나님 믿는다고 당당했는데 예수님 보기에는 그런 할례를 했다는 것은 사실은 육적인 탐욕을 가리기 위한 종교적인 수법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그런 종교적인 수법으로 마치 영적인 존재가 된 것 같이 행세하는 그들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신 거예요. 교인들은 교회 와서 오늘도 뭘 로 걸치면 되겠습니까, 오늘도 뭘 로 위장하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뭘 로 위장하면 내 전신을 가릴 수 있습니까,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런 식으로 가리는 할례 말고, 또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율법의 기능을 적용시키지 말라는 거예요.
마음의 할례, 벗겨야 되는데 마음의 할례라는 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안식일에 사람들을 낫게 한 것처럼 예수님이 직접 우리를 다루어야 될 문제입니다. “질문은 무슨 질문이야. 질문하지 말고 비켜. 네가 깔고 앉은 자리 좀 보자.” 라고 우리가 만든 우리 자리를 보게 하시는 겁니다. 욥이 처음에는 자식이 많고 믿음이 좋다는 소리를 들었고 몸도 건강했는데 깔고 앉은 그 욥의 자리가 예수님의 자리이기 때문에 욥은 어떤 관계에 들어가느냐 하면,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만들어졌다는 새로운 관계를 하나님께서는 성사시킵니다.
“목사님, 신앙생활이 뭡니까?” 뭘 행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지금 예수님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주께서 나를 다루고 있는가?”를 늘 기억하고 그것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이에요. 보통 자궁에서 애가 나올 때 보통 탯줄을 끊는데 이것을 자르지 말라 그 말입니다. 자르면 신앙생활 아닌 것이 되고 안 자르면 신앙생활이 돼요. 자르면 신앙생활 끊어지는 겁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 거예요. 예수님이 주시는, 그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그 힘으로 봉사하라, 베드로전서 4장에 나오거든요.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이렇게 보면 돼요. 할례라 하는 것은 육에서 영으로 연결되는 유일한 지점, 그 장소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장소를 우리가 소유하는 식으로는 간직할 수 없어요. 문신 새기듯이 할례 받았다는 식으로는 할 수 없고 우리의 육의 껍질을 다 벗겨야 되는데 육 벗겨봐야 또 육 나오고 또 벗겨도 육이 나오니까 우리로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십자가지신 그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이 죽을 수밖에 없던 그 관계 속에 우리가 놓여 있고 그 관계의 끝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용서 받는다는 하나님의 의가 거기에 놓여 있습니다.
끝으로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관계를 우리 쪽에서 접근한다고 해 봅시다. 예를 들어서 율법 하나를 지키면 다 지킨 것이 될까요? 아니면 율법 하나를 억면 다 어긴 것이 되느냐, 그 말입니다. 율법이 많은데, 365가지로 많은데 그 중에서 한 개를 지켜도 다 지킨 것이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하기를 율법 지킬만한 것은 지키고 나머지 여분은 나중에 믿음 좋을 때 세월 가서 신앙 좋을 때 나머지는 마저 점령하겠다는 식으로 율법을 관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하느냐, 율법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것이 돼요.
이 어려운 말을 왜 하는가 하면, 우리가 행동을 할 때 착한 행동을 했기에 복을 받고 나쁜 행동을 했기에 저주받는다고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요소를 뽑을 때 요소와 요소를 묶는 전체적인 원리를 건드리지 않고는 뽑을 수가 없어요. 자기 딴에는 하나를 뽑았다고 하지만 다른데서 종소리가 다 들리는 겁니다. 나는 이것 하나 어겼는데 주변에서 딸랑, 딸랑, 왕, 왕, 왕, 시끄러워요. 다 어겼다, 시끄럽다는 말이지요. 이 말은 우리 쪽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켰다고 해서 그것이 지킨 것이 아니고 그것 하나 어겼다고 그것만 어긴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율법은 종으로 되어 있어서 뭘 하나 건드리면 저쪽에서 소리 나게 되어 있어서 우리는 그냥 그 왕, 왕 울리는 그 소리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이 말을 왜 하고 싶으냐하면, 교회 와서 목사님 말씀 듣고 ‘그래 이것 하나 순종해야지.’하는 그 자체는 사기다 그 말입니다. 이것은 육적이고 나쁜 인간을 좋은 인간 만들기 위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오는 그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그 짓을 되풀이하는 것밖에 안돼요. 그것이 다 헛짓이라는 것을 언급하기 위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 오는 이유가 뭐냐, 주의 복음을 들음으로서 우리가 행동 안하고 싶어도 행동 하게 되어 있고 행동하고 싶어도 행동 못하게 하도록 세상의 모든 것이 법제화 되어 있고 그 법속에서 우리는 같이 왕왕 종소리 들어가면서 살아가는 이것이, 이런 안목으로 세상이 보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받은 입장이기 때문에 그런 눈으로 살아간다는 거예요. 나쁜 짓을 하면 ‘저 사람이 나쁜 게 아니야. 다 나빠.’ 누가 착한 일 하면 ‘저 사람이 착한 일을 해도 그 착한 일 했다고 해서 복 받는 것이 아니야.’ 라는 식으로 볼 수 있는 그 안목,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넣어주는, 그 관계 속에서 넣어주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안목, 새로운 질서인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정지화면 되는 거예요. 어디를 가도, 바다 속에 가도 예수님 계시고, 산에 가도 계시고, 항상 예수님이 거기 계셔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것은 “네가 좀 잘했다고 복 받을 거 같아? 그것 때문에 복 받는 것이 아니야. 네가 좀 실수 했다고 저주받을 것 같아? 그것 때문에 저주가 오는 것이 아니야. 네 몸 자체도 예수님을 위하라고 예수님의 손으로 만들어진, 예수님으로부터 예정되어 할당받은 예수님의 지체로서, 사랑받기로 할당받은 존재”가 오늘날 우리의 변화되는 모습입니다.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주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으니 우리야 말로 진정한 마음적인 유대인이 되는 겁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모든 것이 주님의 사랑이라고 범사에 감사하는 이 모습이 주님의 작품이요 우리는 어디가도 제발 당당해야 됩니다. 사람이 우선이 아니고 말씀이 우선이었던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가리는 것, 위선 떠는 것, 이제 그만하게 해주시고 날마다 속에서 올라오는 그 위선을 날마다 벗겨내는 그 작업이 오히려 축복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