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강-롬3장 1-4(다 거짓됨)1212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3장 1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2페이지입니다.
로마서 3:1-4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사도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변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복음의 진수에 접근하고 있고 우리에게 그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질문 답변이 있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면 인간으로서는 필히 거기에 대해서 반발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복음이라 하는 것은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이기에 ‘나는 이런 이유로 인해서 못 믿겠다.’ 하는 이유들이 반드시 우리 속에서 나오기 마련입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만 믿어지도록 하나님의 복음은 그렇게 정해져 있습니다.
여기서 솎아내는 작업이 시작되는 겁니다. 안 믿는 사람을 배제시키는 작업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믿는다 하지 말고 우리도 안 믿어야 되는데 무슨 기적인지, 왜 믿어지는지, 오히려 믿어지는 것을 이상스럽게 여겨야 됩니다. 안 믿는 사람을 이상스럽게 보지 마세요. 그들의 생각에 대해서 같이 우리가 동참을 하고 그들의 안 믿는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동감을 나타내야 됩니다. 그들은 심사숙고해서 안 믿는 거거든요. 재수 없다고 안 믿는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애를 쓰고 노력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따지면서 생각을 깊이 하는 가운데 ‘역시 복음은 믿을 것이 못돼.’라는 결정을 내린 겁니다.
그 결정을 우리가 존중해야 되고 그 결정을 내릴만한 논리적인 것이 우리 마음속에 가득 들어 있어요. 항상 저들이 안 믿는다는 말은 사실은 우리도 안 믿고 있다는 거예요. 안 믿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깔 때 ‘그런데 미쳤지. 내가 왜 믿어?’ 이렇게 돼야 그것이 믿음이 되는 겁니다. 내가 똑똑해서 믿게 되어버리면 이것은 행함으로 믿는 것이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천국 갈 때 “내 행함이 아니다.”라고 되어 있어요. 행함이 아니고 선물로 주어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선물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개입되는 요소라는 말이지요.
장착된 내 내부에서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만들어내고자 노력해 봐도 생기지 않는 그 무엇, 외부에서 오는 거예요. 지구 사람들은 외계인들을 아주 싫어합니다. 지구는 지구사람들끼리 놀아야지 외계인이나 UFO가 등장하면 이것은 싫은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그것을 할 때 나의 자존심은 여전히 살아 있게 되거든요.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다는데 못한다고 해버리면 이것은 천국가도 기분 나쁜 것이 되는 겁니다. 외부에서 거저 주어진다는 언질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네 내부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보라는 이야기입니다.
네 내부에서 있는 어떤 고상함과 착함과 수고스러움도 절대로 하나님께서는 인정치 않는다는 겁니다. 구원받는 근거라고 나한테 내밀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사도바울이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변하는데 그 물음은 이미 사도바울이 복음 전하면 주변에서 핍박을 하면서 따지고 들었던 그 물음들을 종합한 거예요. 그렇게 묻고 답하면서 사도바울이 내린 결론이 뭐냐, “사람은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말은 뭐냐, 우리가 거짓되다는 것을 우리가 찾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거짓됨을 끄집어내도 내가 거짓되다 하는 것을 내가 찾아냈잖아, 해서 거짓된 것을 찾아내는 그것만큼은 거짓되지 않다고 우기는 그것이 인간입니다. ‘내가 거짓됨을 이렇게 발견했으니 나는 정말 똑똑한 거야.’ 거짓됨을 알아낸 그것은 거짓되다고 따지거나 몰아붙이지 말라고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인간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인간의 신학이 문제가 되고 교회가 문제가 되고 다 문제가 되는데 여기 사람은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는 이것은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명하려고 애쓰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이지요.
“네가 인생 살아가면서 이 말씀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내가 까발려 줄 테니까 걱정말고 가만있어. ‘아, 나는 거짓밖에 안 나오는구나.’ 하는 것을 알도록 내가 조치를 해 준다.”는 거예요. 어떻게, 그것이 말씀으로 되는 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 4절 끝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무슨 말입니까? 문장은 이렇게 번역을 해 놓았는데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이것은 막 비비 꼬인 것 같아요.
꽈배기를 오른쪽으로 꼬았으면 왼쪽으로 풀어줘야 되겠지요.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이것이 시편 51편 4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이 꼬인 것을 풀려면 시편의 이 구절 앞뒤에 붙어 있는 구절을 함께 보면서 이것을 봐야 됩니다. 앞에 있는 3절 말씀이 뭐냐 하면,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이 말씀이 뭐냐 하면 내가 선행되는 것이 아니고 죄가 앞에 먼저 있고 그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이땅에 태어났습니다, 라는 것이 3절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내가 있고 그 나의 행동이 잘못된 것을 죄라고 사람들은 그렇게들 알고 있는데 그게 죄가 아니라는 거예요.
죄라는 것은 죄가 먼저 있는데 그 죄는 우리가 몰라요. 죄가 뭔지도 우리는 모르는데 하여튼 죄가 먼저 있고 그 죄가 뭔지를 모르지만 그 죄가 뭔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 두 번째 만들어놓은 것이 인간이고 인간이 창조됨으로써 죄가 뭔지가 비로소 밝혀진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죄짓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더 알기 쉽게 말해서 교회 오는 것은 죄를 더 짓기 위해서 교회 나오셔야 된다 그 말입니다. 이 말을 사람들이 납득이 안 돼요, 납득이!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교회 나가는데 친구 만나면 “야, 네가 교회 가서 많이 착해졌냐?”
그 사람은 지금 교회가 착해지는 곳 인줄 알고 있어요.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느냐 하면 사람이 먼저 있고 사람이 죽어서 어디로 가기는 가야 되는데 좋은데 가야 되거든요.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돈 벌고 밥 먹고 살아야 되니까 죄를 안 지을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미안하잖아요. 사람이 살면서 죄 안 짓고 싶은 것이 본색인데 돈 벌면서 밥 먹고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는 사기치고 죄 지을 수밖에 없고, 그러다가 언젠가는 죽으면 시체 처리야 보람상조가 다 해주지면 그 뒤에 보람상조도 못해주는 것이 있다는 말이지요.
사는 것은 전반전이고 죽고 나면 후반전이 남아 있어서 그 좋은 곳에는 가야되겠는데 죄 지으면 지옥가고 좋은 일하면 천국 가니까 어쨌든 보험들 듯이 미리 당겨서 천국은 가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 죄를 안 짓는 방법이 없을까, 그렇게 나오죠. 그러니까 그 다음에 아하, 교회 가면 되겠다, 라고 하는 것이 교회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교회는 그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죄를 안 짓는 곳이 아니라 죄를 더욱더 짓게 만드는 것이 교회에요. 그래서 제대로 교회를 알면 친구가 “친구야, 너 교회 간다면서?” “음!” “요새 너 죄 많이 짓겠네?” “그렇지. 죄 많이 짓는다.” 이래야 바른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그 말이 뭐냐, 교회 가기 전에는 죄를 안 지었던 거예요. 본격적으로 죄 한 번 지어 봐, 이럴 때는 교회 오시라 그 말입니다. 왜, 죄 지은 자만이 천국가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은 말씀에 빠졌던 사람이 천국 간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성경에 숨겨놓은 죄의 개념이 따로 있어요. 교회 안 오니까 말씀을 모르는 거예요. 물론 교회 가도 마찬가지지만 하여튼 교회 오나 안 오나 말씀을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죄 지을 때만 죄고 죄 안 지으면 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진짜 교회 가서 진짜 복음 말씀 들어보니까 나보다 죄가 앞서 있고 그 죄를 보여주기 위해서 후차적으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누가 그렇게 자리 배치를 했느냐하면 바로 인간은 거짓되고 하나님은 참되다, 곧 하나님만이 참되기 위한 요량으로 하나님께 그렇게 계략을 꾸민 겁니다.
참 이제야 말한다, 정말! 다윗은 말하기를 “나보다 더 먼저 죄가 있습니다.” 이것을 앞에다 깔아놓고 그 다음에 4절 말씀이 오늘 로마서 본문에 나오는 말씀이고 5절 말씀이 뭐냐하면,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3절하고 같은 말씀이지요. 죄가 먼저 선행되고 그 다음에 내가 있다는 거예요. 부부가 자식보다 먼저 있잖아요. 부부가 먼저 죄 덩어리가 되었고 나는 그 부모의DNA를 가지고 자식이 된 거예요. 큰 죄에서 새끼 죄가 된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 땅에서 죄를 짓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고 당연한 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얼마나 착할 수 있느냐를 따지면서 세상 살지 말고 나는 어떤 교묘한 죄를 나타낼 수 있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생을 사는 겁니다. 복음은 지식이 아니고 운명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운명이라는 말이지요. 우리 쪽에서 처리할 문제이거나 국제적 조약이나 무역 분쟁 같은 조정에 나서서 조항을 수정할 입장이 아닙니다. 법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우리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만 참되시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죄가 먼저 있다는 것을 앞뒤로 깔아놓는 겁니다. 앞뒤로 깔아놓으면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있어요. 죄 사이에서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뭐가 꿈틀거리는 것이 있는 거예요.
꿈틀거리면서 그 안에서 뭔가 북한의 미사일 쏘듯이 툭 솟아오르는 것이 있단 말입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은 참되시다, 죄 속에서도 의가 나올 수 있느니라,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누구냐, 그게 바로 시편 51편에서 다윗이었고 그게 바로 유대인이었고 그게 바로 오늘날 성도입니다. 앞뒤로 죄 깔아놓고 그 가운데서 마사일처럼 솟구쳐 올라오는 것, 죄는 죄 밖에 없어, 라고 했는데 이것이 놀랄 일이지요. 분명히 죄에서 태어났고 죄에서 죽어야 되는데 그 속에서 의가 튀어나와 버렸으니까 도대체 이것이 누구작품이냐 이 말이지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작품인 것을 믿는 자가 구원받는 거예요. 어려운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입구가 없으면 출구가 없다는 말이 있어요. 뭔가 들어갈 때 ‘내가 왜 여기 있지? 나는 내가 알아서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내가 왜 여기 있지? 나 나가야 되겠어.’ 나가려고 하니까 출구가 보이지를 않네요. 왜, 입구가 없기에 출구도 없는 거예요. 영생 얻을 자 천국 가는 사람은 내가 이 땅에 어떻게 꼼지락 거리니까 그것을 입구 삼아서 들어갔더니 거기가 교회네, 교회 가면 천국 간다, 이런 식으로 내가 알아서 교회 나와서 천국으로 골인한다는 이런 식의 입구 출구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 20년, 30년 다녀도 천국에 못가는 사람이 태반입니다. 교회가 입구가 아니에요. 그 입구는 없는데 뭔가 생긴 나라, 그것이 성령 안입니다.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가 임신하려고 기도한 것이 아니에요. 그냥 어느 날 말씀이 오니 속에서 뭔가 꿈틀거리고 있었던 거예요.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부모가 죄 가운데서 태어났고 마찬가지로 나는 죄가 먼저 앞섰는데 그러면서도 뭔가 에일리언처럼, 외계인이 몸 안에 들어온 에일리언처럼 뭔가 속에 낯선 것, 내가 행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기도해서 응답받은 것도 아니고 내가 십일조를 했거나 성탄절 같은 절기 지키고 한 그런 것과 아무 관계없이 뭔가 내 속에 생겨나는 거예요.
그게 말씀덩어리입니다. 그 말씀덩어리 깨보니 “나는 거짓되지만 하나님은 나의 거짓됨에도 불구하고 거짓되게 하심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은 참되시다.” 하는 새로운 덩어리가 우리 속에 잉태할 때 그것을 성령 안에서 이미 너는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 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영이 너희 속에 임하면 너희는 그 외곽, 껍데기는 죄가 되어 버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마음껏 예수님만이 참되고 예수님만 진짜 하나님의 의인데 그 의로 말미암아 너는 구원받았다는 것이 껍데기에 불과한 우리에게 믿어진다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작업을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실시하기 위해서 이런 점이 유대인들한테는 다른 민족보다 우위에 있다, 또는 이익이라고 사도바울이 스스로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주고받고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이야기를 그냥 하면 될 것을 왜 질문하고 답변하면서 주고받는가? 방금 제가 뭐라 했느냐, 인간이 죄에서 태어났다 했잖아요. 죄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 인간의 죄라고 하는 것이 그냥 가만있는 것이 죄가 아니고 꼭 죄의 티를 다 내요.
방금 설명한 것이 복음임에도 불구하고 그 복음에 대해서 못 믿겠다, 하는 강력한 반발이 인간 내부에서 솟구쳐 올라옵니다. 그것을 희석시키기도 하고요. 무슨 귀신이 들어 있는지 괴물이 들었는지 하여튼 반발을 해요. 그 반발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미리 당겨서 그것을 ‘너희들이 이런 질문 하고 싶어서 환장했지? 내가 나한테 질문할게. 그리고 그 답변은 이렇다.’ 하고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주고받고, 또 주고받고 하는 거예요. 3절에서 말하기를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우리가 안 믿어주면 그만이지 뭐.’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럴 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못 믿겠다, 함으로써 너희들이 거짓되다는 것이 더 증명되었다.”라는 식으로 사도바울은 답변해 줍니다. 그러니 지금 성경 봐도 골치 아프지요. 정황 같은 것은 없고 다만 말로 그것을 따지려니까. 그러면 더 쉽게 접근하는 방법은 뭐냐, “사람보고 자꾸 죄인, 죄인 하는데 왜 사람이 죄인이냐? 그것을 한 번 증명해봐라.” 그런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함으로써 이것이 수월하게 풀릴 수가 있어요.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고령에 친구가 있어서 놀러 갔답니다.
동창생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잘 나가다가 “너 누구 찍었나?” 이렇게 했어요. “나는 ○○○ 찍었다.” 한 거예요. 그 때부터 그 친구 빼놓고 나머지 모든 친구가 집중포화를 하는데 온갖 공격을 다 해서 딸기 먹으로 갔다가 밉상 받아서 딸기도 못 먹을 뻔 했어요.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인간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 하지만 사람의 죄라 하는 것은 자기와 같지 아니하면 미워하게 되어 있어요. 서로 반갑다 친구야, 하다가 정치 이야기 투표 이야기 나온 순간 ‘너는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니다.’라는 이유 때문에 공격하고 미워하게 되니까, 저쪽을 미워함으로써 평소에 자기 결정을 자기가 사랑한 셈이 되니까 이게 바로 죄 아닙니까?
“이 웬수야, 너는 왜 나와 같지 않은데? 너 나한테 한 번 당해봐라.” 하고 공격해대는 거예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굴 만나든 뭘 하든 죄 아닌 순간이 없어요. 저 사람이 나와 같을까, 아닐까 따져보고 누구 찍었는데, 누구 찍었는데, 이러고. 저도 늘 위기를 만나지요. 초반부터 “목사님도 혹시 ○○○ 찍은 거 아니지요?”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말은 못하고……. ‘이상하다 다 그 분 찍는 것 같았는데 왜 떨어졌지? 이상해…….’ 거기서 말을 할 수가 있나! 누구는 촌스럽다고 미워하고 자기는 특별시라고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인기 없다고 미워하고 자기는 인기 많다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키 작다고 미워하고 어떤 사람은 키안 작다고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뚱뚱하다고 미워하고 자기는 홀쭉하다고 좋아하고, 세상의 모든 죄는 이 네 가지에 다 들어있어요.
전부 다 분류하고 규정하는 거예요. 이것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국가적인 문제가 돼요. 이주민과 현지인의 차이, 흑인이냐 백인이냐의 차이, 가진자냐 가난한 자냐, 자식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모든 구분, 이런 구분 속에서 인간은 자기만의 동질성을 갖추어 나가는 겁니다. 죄를 안 져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죄 짓는 것이 우리입니다. 방위 나오면 똥 방위 나왔다고 미워하고 자기는 현역 나왔다고 자랑하고, 이 모든 구석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만을 신으로, 자기가 기준처럼 정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한 정함에서 인간은 죄 안 지었다고 할 수가 없어요. 네 편인가 내 편인가를 맨 날 가르고 있는데 어떻게 죄를 안 짓습니까? 키 작다고 억울하게 밉상 받은 그 억울함을 누가 풀어줘요? 그러니까 그 모든 사람을 피해자로 만드는 결과에 우리는 평소에 관여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그냥 살아, 하는데 그냥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 닮은 사람은 다 피해자로 만들면서 그냥 사는 거예요. 이런 경우를 성경말씀은 그냥 두지 않습니다. 성경말씀은 처음부터 죄를 선행하게 한 것은, 죄를 먼저 앞세우고 그 다음에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을 만든 것은 우리 인간을 위해서 온 우주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위하여 우리가 피조물로 만들어져야 되기에 그래요.
모든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위하여 조성된 세계 속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 죽음 보다 앞서 있어요. 십자가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죄 지어야 했고 우리는 그 죄로 죽어야 했고 우리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이 어떤 식으로 효과 있게 엮여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류 역사는 있는 겁니다. 그 죄 있는 인류역사가운데 인간은 그 거대한 체제도 알지 못하고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자기가 돛대고 자기가 신이 되어서 나와 닮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해서 밉상 받을 각오해라,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 그 말이지요.
누구나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나는 나다, 이렇게 나오면 거기서 필히 폭력이 나옵니다. 폭력이 꼭 때려서 폭력이 아니라 말로서 폭력을 행사하지요. 같은 며느리 세 명이 있어도 “나는 둘째 며느리가 표현은 잘 안되는데 하여튼 이상하게 미워.” 한다든지 혹은 “셋째 아들은 행동 하는 것이 자기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정말 싫어.” 한다든지 “첫째 아들은 꼭 저희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정말 보기 싫어.” 이 폭력, 그 폭력이 상대방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래놓고는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 이렇게 나옵니다.
근원적으로 죄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을 통해서, 또 성경말씀을 통해서 죽 이야기를 합니다. 유대인을 통해서 한 말씀이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좀 어려울 수 있는데 참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 20장 5절, 6절에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비가 죄를 지으면 아들에게까지 3대 4대에 이르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아들이 아무리 착하려고 해도 아버지가 죄를 지었으면 그 죄의 벌은 계속 미친다는 이야기에요.
그랬던 그것이 에스겔서 18장 20절에 보면 그 말씀이 달라집니다. 어떻게 달라지는가하면,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말씀을 이랬다저랬다 하십니까? 출애굽기 20장에서 죄를 아들에게까지 3,4대에 이르기까지 갚는다고 했으면 아들이 아무 죄가 없어도 아버지의 죄 때문에 아들이 3, 4대에 이르도록 완전히 저주받는다고 해놓고는 에스겔 18장에 와서는 아버지의 죄는 아버지 저 혼자 담당하고 아들 죄는 아들이 담당하지 억울하게 아들이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는 법은 없다, 이렇게 나오신다는 말이지요.
왜 그런가, 하는 거예요.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죄를 값되”라고 해요. 죄를 값는다는 거예요. 그것은 인간을 갋는다는 뜻이 아니고 죄에 대해서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처벌을 통해서 “인간아, 죄 모르지? 죄라는 것은 이런 거야.”라고 보여주는 그것이 3, 4대까지 펼쳐져서 그 벌을 통해서 죄를 알게 하는 거예요. 골치 아픈데 쉽게 합시다. 죄가 뭐냐 하는 것은 죄를 어떤 식으로 용서하는 방식을 통해서 비로소 죄를 안다는 거예요. 죄를 사하는 방식이 피잖아요. 피라면 인간이 스스로 자기 지은 죄를 많은 분량의 선행으로 죄를 용서한다는 그것은 죄를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다, 그 말입니다.
죄를 씻는 방식이 벌써 설정되어 있기에 죄라는 것은 죄를 씻는 방식에 의해서 다시 규정되어야 되는데 인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스스로 죄를 지어놓고 죄 짓는 방식을 자기가 조작해 내는 거예요. 누가? 오늘날 한국 교회가 그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헌금 안 해서 저주 받았으니까 헌금 하면 복 받습니다, 이런 식의 저주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상식이긴 하지만 인간은 처음부터 죄인이잖아요. 죄인이 만들어낸 조작된 악마적인 죄와 구원관에 불과한 거예요.
진짜 하나님이 알려준 죄를 아는 방식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입니다. 그러면 피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야지, 피부터! 모든 죄가 뭐냐 하는 것은 피부터 시작되어야지요. 우리를 갋으려고 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죄가 뭔가를 드러내면 그만이에요. 왜, 이미 십자가가,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 역사보다 더 우선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다면 왜 에스겔은 아버지 따로 아들 따로인가? 에스겔은 종말이거든요. 마지막 때에는 모든 개념이 종결적입니다. 모든 개념이 더 확장되거나 발전되지 않아요.
에스겔 14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 있을찌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마지막 때에는 인간이 인간의 죄에 대해서 중심에 서는 것은 없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마지막 때에는 모든 인간에 대해서 구원하는 방식이 아버지 착해서 아들이 구원받는 방식이 아니고 아버지나 아들도 다 죄의 중심에서 빠지고 따로 중간에 돌고래 쇼처럼 솟구쳐 올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 솟구쳐 올라오는 것이 우리가 아는 십자가지요.
마지막 때니까 십자가가 올라오는데 십자가가 올라오기 전에 먼저 알아야 될 것은 뭐냐, 왜 육, 혈육적인 것은 자체 내에서 죄 씻음이 안 되느냐를 먼저 알고 있을 때 ‘아, 아버지 잘나서 내가 복 받고 아버지 못나서 내가 저주받는다.’는 인간적 지평에서 그런 소리는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이제는 하늘에서 따로 와요. 아까 했지요. 입구가 없으면 출구도 없다고요. 이것은 따로 주어지는 거예요. 그 따로 주어지는 것이 요한복음 9장에 나옵니다. 어떤 소경이 지나갑니다. 소경이 지나가니 제자들이 이렇게 했어요.
“예수님, 저 소경이 소경 된 것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이렇게 물었어요. 저 소경이 소경 된 것이 자기가 지은 죄 때문인지 그 소경이 아비가 죄를 너무 지어서 그 벌이 대대로 가계의 저주가 흐른다는 그것처럼 저주가 임한 것이냐고 묻는 거예요. 예수님의 답변취지는 이렇습니다. “제자들아, 너희들이 얼마나 죄인인 것을 본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소경을 너희들 앞에 지나가게 만들었다.”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저게 아버지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라고 묻는 네가 바로 죄인인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그 인간을 지나가게 했다.”고 한 거예요.
제자들은 자기가 소경이 아니라고 여긴 겁니다. 소경이 아니니까 ‘나는 소경이 아닌데 저 사람은 소경이다. 그럼 나는 복 받았고 저 사람은 저주받았다. 저주받았으면 저 사람이 누구 죄로 인해서 저주받았을까?’ 할 때 예수님 말씀은 “네가 저주받았다고 여긴 그 소경은 소경이 아니라고 여기는 네가 저주받은 인간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해서 역할로써 보여줬다.” 그 말입니다. 요한복음 9장의 해답이 그거예요. 누가 본다고 하니 소경이고 소경이라고 여기면 그것은 보는 자다,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요한복음 9장 마지막에 나옵니다. 41절에 나오죠.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보면서도 소경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제자들아, 너희가 눈이 있나?” “눈이 있습니다.” “그 눈 가지고 지금 뭘 보고 있느냐?” “예, 지금 저주 받아서 소경된 자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소경이야. 그런데 그 소경이 보이지 않는 눈을 가진 것은 보이지 않는 눈을 가짐으로써 예수님을 봄으로써 비로소 유일하게 소경임에도 소경이 아닌 자가 되어 버렸”어요.
우리의 눈, 상스러운 말로 하면 눈깔이죠, 우리의 눈, 우리의 귀나 코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알기 위해서 달아놓은 것인데 인간들은 그것을 자기 잘난 체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짓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눈과 귀와 코를 동원한 거예요. 그런데 그것으로 인하여 누가 소경이고 누가 핍박을 받느냐하면 예수님이 핍박을 받아서 십자가 피가 흘려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의 놀라운 전략입니까? 잘난 체 하는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은 못난 분으로 오셨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아, 저 분은 저주받아 마땅해.’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못 알아먹는 너희들이 오히려 된 통으로 저주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된 통으로 저주받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교회 가는 사람은 천당 간다, 라는 것이 얼마나 죄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교회에 십자가 지는 모습으로 오신 거예요. 크리스마스를 지킨다는 자체가 저주받은 티를 내고 있는 겁니다. 교회가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것은 다른 취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기헌금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노골적이에요. 봉투 돌리기 위해서 절기 지킵니다. 빙빙 돌리는데 돌리기는 뭘 돌려요. 돈 낼 핑계 삼아서 노골적으로 돈 내라, 그 거예요. 이웃사랑을 위해서 구제하고 어쩌고 하는데 내가 한다, 내가! 네가 왜 나서는데 네가?
사람이 남에게 구제함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지은 죄를 그런 식으로 상쇄되리라고 여기는 그것이 바로 혈육에 담겨 있는 거예요. “예수님, 저 사람이 소경된 것은 아버지가 죄를 지어서 그래요, 자기가 죄를 지어서 그래요?”라고 하는 것은 죄를 아버지와 아들사이의 혈육적인 관계의 지층에서 따져보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에요.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니까요. 예수님이 육으로 오신 것은 “너희들이 기껏 생각하는 것이 육밖에 없기에 결국 나를 밀치게 될 것이고 나를 싫어하게 될 것이고 미워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폼 나게 오시지 않고 육신으로 초라하게 오신 이유가.
“저게 뭐야! 돈 푼이나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별 볼일도 없는 게 잔소리나 해대고. 예수 믿어도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네.” 그런 소리를 일부러 듣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지난 금요일에 광주에 갔습니다. 오후 1시 20분차 광주행 고속버스를 탔는데 세상에 눈이 마구 쏟아져요. 그래서 표 파는 아가씨인지 아줌마인지 보고 물었어요. “광주까지 갈 수 있습니까?” 방글방글 웃으면서 “고객님! 갑니다.” 어쨌거나 믿어야지요. 믿고 차에 올랐습니다. 차에 오르자마자 기사가 하는 말이 “이상하다. 이런 날에는 배차를 중지시켜야 되는데 왜 운행을 하라고 하지? 어쨌든 가 볼까?”
기사부터 불안하니까 전화를 막 돌리다가 결국 시간되어서 가는데 벌써 조짐이 이상해요. “미안합니다. 88고속국도가 막혔다고 하니 구마로 가겠습니다. 구마고속도로 해서 남해로 돌아가면 한 20분 더 걸리면 갑니다.” 그래서 안심했지요. 20분이요? 20분만 더 걸린다고요? 구마고속국도 타고 내서까지는 잘 갔습니다. 내서에서 계속 내려가는데 꼼짝 안하고 1시간 그냥 서서 기다렸습니다. 그럴 때 문득 생각나는 것은 미국 동부에 폭설이 와서 20시간동안 눈 속에 갇혀서 기름 다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결국 걸어왔다는 그 뉴스 생각, 그러면서 한편으로 또 복음을 깨닫게 된 것은 ‘내가 갇혀 있어도 광주는 저기 있겠지.’ 인간은 아무리 고생을 해도 천국은 바로 거기에, 천국은 아무 관계없이, 이게 내서인지 마산인지 창원인지 관계없이 바로 광주는 거기 그냥 있는 거예요.
나는 꼼짝없이 눈에 갇혔고 1시간 뒤에 경찰도 오고 제설차도 와서 작업했어요. 어디 막히고 어디로 돌고, 그러다가 결국에 광주에 도착하니까 1시 20분에 출발한 것이 광주 도착하니 8시 30분인데 심지어 4시에 대구에서 출발한 차가 먼저 와 있네요. 뭔가 이렇게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 때 비로소 광주는 저쪽에 있다는 것이 보이더라는 말이지요. 인간은 육이기에 뭘 해도 항상 자기사정만 생각하는 거예요. 창세기에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위해서 우리가 차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죄안에 갇혀 있도록 만든 그것이 주님의 창조의 취지에요.
우리는 항상 자기 잘남, 나는 우수해, 나의 동질성, 나와 닮지 않으면 모조리 나의 원수, 이런 식으로 평생을 계속 가야 됩니다. 오랜 만에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평생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밖에 몰라야 되고. 자식 키워봐야 자식은 자기 맘 대로고 자기만 챙기게 되어 있어요. 난 여자들은 착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목요일에 KTX타고 내려오는데 대전에서 애하고 젊은 부부가 탔어요. 애가 떠드는데 부부가 덩달아 같이 떠드는 거예요. 밤 12시 20분이 넘었는데 떠들고 있어요. 그래서 애한테 주의를 주면서 “조용히 하자.” 하니까 엄마가 딱 눈을 치켜뜨면서 “왜 남의 애를 때리는데요?” 때리지도 않았어요. 보지도 못했으면서 때렸다고 여긴 모양이에요.
내 아이? 지금 80명 쯤 되는 사람들이 시끄러워 죽겠는데 자기는 자기 새끼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게 여자다. 누가 여자를 착하다고 이야기했나? 여자는 자기 새끼밖에 모른다.’ 국제평화? 남북이 어쩌고? 아무상관 없어요. 국가도 민족이고 뭐고 자기 새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는 것이 여자. 남편도 안중에 없고 자기새끼밖에 모르는 것이 여자. 아! 혈육, 이 혈육밖에 모르는 것, 혈육밖에 모른다는 사실, 그 혈육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혈육적인 안목으로 된 통으로 얻어맞아서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예수님, 그 예수님 따라가면 그게 바로 천국, 누가 따라가겠어요? 누가 자기혈육을 스스로 포기하겠습니까?
바로 여기서 믿음은 선물로 온다는 거예요. 선물로 와서 개과천선하는 것이 아닙니다. 술 끊고 담배 끊고 개과천선하는 것이 아니고 “야, 내가 하나님의 뜻에 말려들었구나.” 나는 평생 동안 내 자식밖에 모르고 나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계속 장착되고 유지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그래야 내 헛된 야망, 천국이 어쩌고 착해서 구원된다는 둥 교회 다녀서 복 받는 둥의 모든 악마의 사기술, 다단계 같은 그 악마의 사기술을 다 걷어내고 진짜 십자가, 선물로 주신 그 십자가, “주여, 나 같은 인간도 믿어지다니, 나 같은 인간이 십자가를 믿다니 이것은 횡재했습니다.”라는 그 고백,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입니다.
어떤 사람은 국악, 생황과 생금으로 크리스마스특집으로 연주 막 해요. 그래서 “야, 저게 진짜 찬양하는 것 같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진짜 찬양하는 것 같지가 않은데.” 진짜 찬양과 감사는 “나는 앞으로 계속 살아도 내 자존심 밖에 모르고 나는 그것만 챙길 거야. 나는 그것밖에 몰라.” 하는 그 자리를 유지하게 함으로서 바로 동방박사처럼 별이 보이도록, 그 십자가 보고 감격하도록 그렇게 조치하시는 하나님, 그게 바로 말씀이 이끄시는 삶이고 성령께서 함께 있는 성도의 특징입니다.
여러분들이 꿈틀거리지 마시고 여러분 속에 계신 분이, 말씀의 성령이 늘 꿈틀거림을 껍데기 같은 우리가 고백한다면 그것이 주의 증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다시 보면서 우리의 죄 값은 이미 십자가에 치렀다는 사실을 우리가 세상 어떤 것보다 더 귀하게 생각되고 감사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