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강-롬2장 11-16(양심과 율법)1212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2장 11절에서 16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1페이지입니다.
로마서 2:11-16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하나님이라는 말보다 더 많이 나오는 말이 있어요. 율법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그렇게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조물주라는 표현을 했는데 이세상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고 누군가 만드신 분이 있는데 그 분을 하나님이라고 하자,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인간 있고 하나님 있고 자연이 있고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충분히 안다고 생각하는데 왜 오늘 본문에서 율법, 율법, 율법, 왜 율법을 자꾸 등장시키는 겁니까?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 있고 우리 인간이 있고 그래서 인간이 ‘우리는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하고 자인하고 고백하고 섬기면 되잖아요. 그런데 율법이라는 것이 왜 여기에 끼어드는 겁니까? 그냥 정화수 떠놓고 흰 온 입고 빌면 정성이 되고 정성이 지극하면 복 받는 것 아닌가요? 무식한 사람은 교회 나와도 구원을 못 받는 셈이 되지 않습니까? 진짜 하나님은 하나님이 대자연을 만들었다, 그 정도 알면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쳐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율법이라는 것을 사다리로 걸쳐 놓았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원숭이 믿지 말고 코끼리 믿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여우 믿지 말고 해바라기 믿지 말고 참새 믿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으로 가는데 참새를 통해서 간다든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이런 식으로 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시냇물 가지고 하나님 이야기하고 그런 식으로 하지 말라는 거지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려준 율법이라는 것이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없는 이방인에게는 14절에 본성으로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요. 양심이 율법이요 양심이 율법이다. 양심을 구체화 한 것이 율법이고 율법은 우리 양심이라는 것을 또렷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의 속에는 인간 눈으로 보이는 것, 이런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렇구나. 그래,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맞아.’ 이렇게 쉽게 나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여기 연필이 있습니다. 연필은 나무라는 재질로 되어 있고 그 안에 심이 박혀 있습니다. 그 심 같은 역할을 하나님께서 심어줬다는 겁니다. 연필로 뭔가 쓰려고 하는데 나오는 것이 없어요. 보니 심이 없어요. 심이 빠져버리면 연필의 기능을 못하는 겁니다. 온도계 안에는 빨간 수은이 들어 있지요. 수은을 빼버리면 무슨 온도를 잽니까? 하나님과 인간이 통하는 핵심이 율법으로 주어졌고 또 율법이 주어지지 않은 이방인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양심이라는 것이 연필로 하면 심이라든지 온도계 안에 들어 있는 빨간 수은 같은 것은 만들어 진 그 상태로 그대로 있는 거거든요. 아무 요동이나 변동이 없단 말이지요. 그런데 15절에 보니까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게 연필심 혹은 온도계의 빨간 수은이 가만있지를 않아요. 뭔가 투쟁을 하는 겁니다. 요란스러워요. ‘하나님, 내가 양심적으로 잘했는데 왜 나를 이런 식으로 내 인생을 망칩니까?’ 이런 식으로 상당히 요란스러워요.
‘내가 뭘 잘못했기에 내 운명이 내 뜻대로 안 풀리고 꼬이는 겁니까? 내가 뭘 잘못한 것이 있다고 내 몸을 다치게 만들고 아프게 만들고 일이 이렇게도 안 풀리게 만듭니까? 내가 더 이상 어떻게 해야 되는지, 내 속을 까뒤집을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내 순수한 마음을 하나님께 보여서 주께서 복을 나에게 팍팍 내리십니까? 할 것 다 했는데, 십일조도 했고 전도도 했고 다 했는데 뭘 어쩌란 말입니까?’ 라고 상당한 소란이 우리 내부에서 일어납니다. 양심을 우리가 무시해버리면 세상에서 신이 사라져 버려요.
양심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들이 과학자들인데 과학자들은 양심을 거론하지 않습니다. 양심을 무시해버리면 세상 모든 것은 물질이고 세상 모든 것은 에너지고 물질덩어리에 지나지 않아요. 따라서 신을 구태여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신이 없으면 마음이 좀 편한 것 같은데 뭔가 우리 속에 신이 없다, 없다, 해도 우리 마음이 편치가 않아요. 쥐가 서너 마리 들어왔는지 마음이 우당탕 거려요. 그게 뭐냐, 내가 그다지 나쁜 짓을 안 한 것 같은데 왜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안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누군가를 탓할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자 나와! 내가 멱살 쥐고 흔들 테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지 꽂듯이 율법을 줬는데 율법 이전에 준 것이 있습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줬습니다. 창세기 7장에서 방주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가 궁금하지요? 안 궁금해요? 궁금하면 500원! 뭐가 들어 있느냐, 깨끗한 짐승 7쌍씩과 더러운 짐승 2쌍씩이 들어 있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물로서 멸망한다고 했어요. 이것은 도저히 하나님으로 납득이 안돼요. 하나님께서 만들 때는 자기 좋으라고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책 꾸기듯이 이렇게 꾸기면 되겠어요? 자기가 만들어놓고 자기가 꾸기고, 이것은 하나님으로서 앞뒤가 안 맞는 행위가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는 것이, 만들었으면 그냥 키우면 되는데 그게 아닌 거예요.
집에서 고양이나 강아지 키우면서 예쁜 고양이, 예쁜 강아지, 그러다가 갑자기 ‘아이고, 내 강아지 오늘 밤에 삶아 치울게.’ 이러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귀여우면 안 죽여야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으면 안 죽어야지요. 그게 하나님답잖아요. 만들었으면 굳이 손 안대도 모든 일이 잘 풀리도록 해 줘야지요. 그럴 때 하나님이고 그런 하나님일 때 인간에게 대우받는 하나님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물로서 세상 멸망한다 할 때 그 심보가 뭐냐는 겁니다. 자기가 만들어놓고 자기가 멸망한다 하고, 장난도 아니고 놀이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이냐는 말이지요.
방주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깨끗한 짐승과 더러운 짐승이 그 안에 있는데 더러운 짐승이 더 많아요. 깨끗한 짐승 7쌍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심판이면 더러운 것을 조져야 되는데 그 방주 안에 있다는 그 한 가지 이유로 인해서 그 더러운 것이 무사히 홍수심판을 극복하고 새 땅과 새 하늘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나중에 밝혀져요. 그 안에 있는 일곱 쌍의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죽여 버립니다. 심판, 더러운 것을 더럽게 갋아야 되는데 갋지 아니하시고 그 더러운 것에 주어지는 모든 저주를 아무 흠도 없고 잘못도 없는 짐승을 잡아서 거기에 덤터기를 씌워서 그것을 잡아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줍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다. 그 정신이 우리한테 연필 심지처럼 꽂혔는데 그게 뭐냐, 그게 율법이라는 거예요. 율법 안에는 사실은 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심이 들어 있지만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부분이 엉망입니다. 율법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쪽에서 어느 정도로 더럽고 추악하고 멸망되어야 되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율법이라는 것을 다 떼 내어 봅시다. 그러면 남는 것이 뭐냐, 이런 자는 이래서 망하고 저런 자는 저래서 망한다. 이런 자 저런 자 다 떼버리면 남는 것은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한다. 그 둘을 합쳐보면 네가 이렇게 살아도 망하고 저렇게 살아도 망한다. 너는 망하기 위해서 태어났어야 해, 그런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자기 뜻을 나타낼 때 이렇게 나타냅니다. 아주 특이하고 놀랍기도 하고 의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 없는 분을 죄인으로 만들어서 쏘옥 세상에 내 놓았습니다. 죄가 없는 의인을 죄인으로 만들어놓고 그분을 앞장세워서 하나님 자신의 본연의 뜻을 우리 앞에 제시했다고 되어 있어요.
죄가 없는데 왜 그것을 구태여 죄인 만듭니까? 그것은 모든 인간이 자기 내부적인 투쟁의 결과로 나는 잘났어, 역시 나는 의로워, 누가 뭐래도 나는 역시 살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야, 라고 다 우기기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피해가서 ‘그렇게 너희가 의인 못되어 환장을 했구나. 그래 잘났다 잘났어. 내가 진짜 하나님의 뜻을 보여줄게.’ 하고 진짜 의인을 진짜 죄인으로 만들어서 우리 앞에 제시했습니다. 끝났어요. 게임 오버! 그렇다면 교회 와서 하는 수작이 전부 다 무슨 수작이에요?
잘난 나를 더 빛내기 위해서 교회 온 거잖아요. 그러면 그것은 그 자체가 악마입니다. 악마 보고 싶어요? 궁금해요? 악마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로 하는 것이 악마에요. 이마에 뿔나고 그런 것이 악마가 아닙니다. 그것은 괴물이고 악마라 하는 것은 곱상하게 생기고 피부도 하얘요. 피부 하얗다는 것은 장담 못하겠습니다만 하여튼 예뻐요. 아주 마음도 곱고 아주 여려서 꼭 강수지 같아요. 톡하면 터질 것 같고 눈물 주르르 흘리는 그런 쪽. 어쩌면 그렇게도 수작을 부리는지. 하나님은 인간을 멸망시키는데 나는 그 중에서 빼달라는 거예요. 나는 그 부류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한다, 그 이야기는 나한테 하지 말라는 거예요. 나는 이래도 안 망하고 저래도 안 망하고, 율법 앞에서도 안 망하고 율법 없이도 안 망하고. 정작 진짜 죄 없으신 분은 이 땅에서 죄인으로 살아갔는데.
부탁합니다. 제발 이 땅에서 죄인으로 살아가 주세요. 제발 부탁합니다. 교회 안 나오는 사람 보면 전부 다 자기가 못났다는 생각은 안 해요. 나름대로 다 훌륭한 점을 움켜쥐고 있어요. 예수님하고 비교하라고 그렇게 해도 예수님하고 비교 안하고 다른 사람하고 비교해요. 절에 가는 사람, 성폭행 범, 이런 것과 비교해요.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의인을 일부러 죄인 만들어서 내 세움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보여줬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저주받을 인간이고 이 땅에서 자기가 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이것은 완전히 반전이에요. 하나님은 반전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몰라요. 뭐든지 반대되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어떻게 하면 내가 죄인 값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렇게 살아가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고 반대로 ‘내가 어떻게 하면 남에게 해코지 않고 내 존재 자체로서 내가 의로운 사람으로 복을 받을 수밖에 없는, 복이 팍팍 와도 당연한 존재로 살겠습니까?’ 하면 그것은 악마에 속하고, 그런 겁니다. 율법이라는 것을 주었을 때 그리고 양심을 주었을 때 우리가 감당이 안 되는 것이 우리 속에 침투된 거예요. 감당이 안 되니까 우리는 분투노력하고 있는 겁니다. 뭔가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그게 뭐냐, 변명이라는 겁니다. 이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평생 동안 남에게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면서 신의 뜻을 하나님의 사랑을 온 이웃에 펼치기 위해서 내 가정과 내 일생 전부를 다 바쳤습니다, 라는 식으로 안 망해도 되는 사람인양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찾던 마귀의 본 모습입니다. 이 세상은 마귀를 천사로 수용하고 진짜 천사 같은 사도를 마귀 대장으로,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분류를 시켜버립니다.
이 사도바울이 옛날에 뭐 했던 사람이냐 하면, 내가 어디까지 의로울 수 있느냐., 인간의 의로움의 한계, 그 끝은 어디냐를 시도한 사람이에요. 그것을 쉽게 말해서 도 닦는다, 그렇게 보면 됩니다. 도 닦음의 마지막 지점, 최고의 지점, 도 닦아서 드디어 영적세계로 훌쩍 뛰어넘었다 하는 그 최고 정점의 자리를 찍어 보는 겁니다. 그것을 했던 사람입니다. 의인중의 의인이요 율법의 흠이 없는 사람. 그렇게 분투하면서 자기내부에서 율법적으로 혹은 양심적으로 치열한 싸움을 하는 거예요. 그랬던 그가 무슨 축복을 받았는지, 이게 복음이구나, 이게 기쁜 소식이구나, 내가 죄인임을 아는 것이 기쁜 소식이라는 거예요.
이 모든 시도가 바로 죄의 극단을 다 보여준 거예요. 내가 어느 정도까지 도를 닦아서 도를 틀수 있느냐, 라고 시도한 그 모든 노력, 종교적인 노력, 교회 나와서 충성 봉사하는 그 모든 노력, 신을 향하여 자기를 절제하고 자기를 관리하고 자기를 낮추고 부인하는 그 모든 노력, 그것이 죄라는 거예요. 그게 내가 궁금했던 죄고 마귀의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세상 과학자들이나 물리학자들을 보게 되면 그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뭐냐 하면, 어떻게 물질이 정신과 엮이고 정신이 어떻게 영적으로 엮이는지가 풀리지를 않아요.
쇳덩이 보고 도 닦아라, 도 닦아라, 하면 나중에 쇳덩이가 사람 됩니까? 피노키오 같으면 모르겠어요. 나무로 인형을 만들어놓고 내 아들아, 하면 사람 되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을 분석하고 쪼개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DNA를 연구해 보니까 인간이라는 것이 탄소화합물이에요. 화학에서는 그것을 유기물이라고 합니다. 탄소화합물은 분자로 되어 있고 분자는 원자로 되어 있는데 거기서 어떻게 정신이 나오고 영이 나오느냐는 말이지요. 그래서 내린 결론이 뭐냐, 정신도 없고 영도 없고 인간은 오직 물질 덩어리다, 에너지 덩어리다, 그게 내린 결론의 전부에요.
그런데 창세기 2장과 3장에 보면 신기한 것이 있어요. 선악과나무를 심어놓았거든요. 그 선악과나무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고 했어요. 현대 과학으로 보면 선악과 나무속에 독성이 있어서 그것을 먹으면 세포의 기능, 즉 PH농도에 교란이 일어나서 세포기능이 원만하지 못하고 미토콘드리아의 기능이 저하된다는 이런 식의 것들이 선악과 안에 들어 있습니까? 참 이상한 것이, 선악과를 먹었는데……, 아담도 늙어죽고 하와도 늙어죽지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늙어죽는 것뿐만이 아니고 지금 분명히 약속하지 않은 것까지 벌을 받아요.
그 좋던 에덴동산까지도 무너지고 거기서 추방됩니다. 이것은 사전에 없던 이야기에요. 선악과 따먹으면 네 몸은 죽고 너는 에덴에서 쫓겨난다, 선악과 따먹을 때 이 조항은 없던 조항이라니까요. 죽더라도 에덴동산에서 죽으면 참 좋겠는데 그것이 아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요. 이 말은 에덴동산의 각종 과실과 각종 모든 식물은 자체적이고 물리적인 메카니즘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그 말씀, 심지, 양심의 소리 혹은 율법의 소리, 그 율법의 소리를 받쳐주기 위해서 그런 물질세계가 존재하는 겁니다.
말씀에 위반했더니 그 좋던 에덴조차 마치 뒤에 배치되어 있는 연극무대처럼, 막이 내려앉듯이 같이 무너져 내린 거예요. 그 다음에 갑자기 인간은 땅으로 쫓겨나고 거기는 가시와 엉겅퀴가 있어서 인간의 노동의 대가만큼 주어지지 아니하고 실정이 그렇다보니 인간의 마음은 짜증이 나고 ‘이게 뭐야! 내가 노동을 했는데 왜 노동의 대가가 제대로 안 주어지는 거야?’ 이런 식으로 짜증이 나고 그 원망의 소리는 하나님 당신 탓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게 되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보고 박수를 치면서 ‘이제야 네 본색이 드러나는구나.’
인간이라 할 때 인간이 죽는 것이 아니에요. 죽음이 인간을 삼키는 겁니다. 지난시간에 했잖아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느니라, 다시 말해서 사망이라는 메카니즘을 통해서 사망의 세력이 얼마나 센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이 그 속에 말려든 겁니다. 인간보다 죽음이 먼저에요. 죽음이 있고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은 태어나서 죽고, 죽고, 저래 죽고, 이래 죽고, 죽어야 되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인간은 안개라 했고 안개라 하는 것은 그 기능을 다 했다는 거예요. 써먹을 대로 다 써먹었으니 버리자, 폐기처분 하는 식이에요. 인간은 어떤 다른 이유와 다른 목적을 위해서 쓸모없이 태어났다가 쓸모없이 사라지는 겁니다.
저는 욥기를 보면서 깜짝 놀랄 대목을 봤어요. 아, 이게 지혜구나! 그 지혜를 여러분과 공유하기를 바랍니다. 욥기 35장 6절에서 7절에 보면 그 네 번째 엘리후라는 친구가 등장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네가 범죄한 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네가 네 손으로 무엇을 받겠느냐.” 네가 죄 지어봐야 하나님께 꿈쩍도 안할 것이고 네가 착해봐야 하나님께서 감동 먹을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너는 착한 값을 달라고 이야기하고 죄 지으면 벌 받을까봐서 벌벌 떠는데 네가 하는 행동에 의해서 벌 받고 네가 하는 착한 행동에 의해서 복 받고, 그런 입장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대심방할 때 교인들 사기 칠 때 그 따위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이 집구석이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어겨서 안됐습니다, 이런 식으로 헌금이라도 좀 하라고 그 따위 소리들을 하는데! 세상에 돈으로 좌우되고 인간의 행동에 좌우되고 ‘내가 나쁜 짓 하니 약 오르지?’ 그런데 눈 꿈쩍할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진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우리가 죄 짓는다고 하나님의 뜻이 철회되거나 그런 것이 없고 우리가 착한 일을 한다고 감동 먹어서 ‘네가 그런 사람이었나? 내가 미처 몰랐네.’ 이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무슨 하나님이 개인하고 상대하는 하나님이 어디 있어요.
이렇게 보면 돼요. 인간이 노래하고 춤추고 웃고 즐기고 폭탄주 먹고 하는데 그것은 전부다 자기가 가짜라는 뜻이에요. 본인이 생각하기에 본인이 종잡을 수가 없어요. 이 중에 어느 것이 내 모습인지 본인은 춤추는 가짜고 노래하는 가짜에요. 이 환경 속에서는 이렇게 변신하고 저 환경 속에서는 저렇게 변신하고, 완전히 독수리오형제 같아요. 환경 따라 상황 따라서 우리는 해까닥해까닥 하는 거예요. 남쪽에 사니 그렇지 북쪽에 가 보세요, 김정일 동지, 이러고 있을 사람들이에요. 우리 권사님도 다 마찬가지에요. 북에 있었으면 지도자동지, 이러고 있었을 거예요. 자기가 살자고 하는 짓은 뭔가 앞뒤를 안 가립니다. 똥오줌 안 가려요. 자기가 살겠다는데 무슨 똥오줌을 가립니까?
그래놓고 우리가 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상황이 안받쳐줘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난 잘하려고 하는데 친구가 같이 죄짓자고 해서 죄 지었습니다, 이런 변명과 핑계와 송사, 우리 마음은 대단히 요란스럽습니다. 지금도 요란스러워요. 쥐가 열 댓마리 들어 있어요. 그런데 성경은 쥐가 들어있다 하지 않고 그것을 마귀 들렸다 합니다. 일곱 귀신이 들어와서 저희끼리 싸우고 난리가 났어요. 조금만 착했으면 이런 벌은 안 받잖아, 이런 식으로 마귀가 마귀 속으로 막 통과하고 그때 또 다른 마귀가 와서 어쩌라는 말이냐, 나는 최선을 다했다, 자기가 자기보고 이야기하고 참 시끄러워요.
조용히 해라 임마! 하나님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속 앓이, 우당당탕! 매일 내부적인 적들을 겪습니다. 이유가 뭐냐, 선악과를 따먹게 될 때 하나님께서 분명히 했습니다. “네가 선과 악을 알 이유가 없다. 네가 선과 악을 알지 말라는 말은 네가 선과 악을 다룰 수 있는 입장이라고 내가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는 선과 악, 악과 선을 네 손으로 다루라고 만든 것이 아니에요. 선과 악을 다루는 것은 만들어진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이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실 그 선과 악 다루는 것을 주제넘게 만들어진 피조물인 인간이 그 영역을 넘어서서 침범한 거예요.
원래 선과 악은 누구를 다루게 되어 있느냐 하면 악마를 다루도록 되어 있어요. 악마는 천사입니다. 인간이 아니에요. 천사를 다룰 때 선과 악으로 다루는데 거기에 악마가 인간을 집어넣었어요. 마치 하나의 볼모처럼. “나를 치고 싶다면 하나님 당신이 만든 인간을 같이 쳐라. 그러면 당신 스스로 모순된다. 자기가 만든 인간을 자기가 치니까 어떻게 거기에 대처하는가 보자.” 마귀가 이런 식으로 인질극을 벌인 거예요. 우리는 멋도 모르고 선악과 따먹고 좋다고 하면서 거기에 있고.
하나님이 보고 싶습니까? 하나님을 보기 이전에 먼저 악마가 뭔지를 봐야 돼요. 선과 악을 계산하니까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양적 개념이에요. 성과의 측정이 가능한 거예요. 모든 경영이라든지 정치 경제 문화 과학의 그 특징이 뭔지 알아요? 양으로 측정이 가능하도록 시도한다는 겁니다. 그래프로 그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하는 겁니다. 사업할 때만 그래프가 아니에요. 인간 내부에 있는 ‘내가 어느 정도 착한가, 내가 몇 퍼센트 더 착한가?’ 지금 문재인과 박근혜가 오차범위 내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어요. 사람은 그것을 무지하게 재미있어 해요.
왜냐, 자기 내부를 닮았거든요. 평소에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릴 때 착한 일 많이 하셨습니까? 커서 여분의 착함을 나쁜 곳으로 돌려도 아직까지 착함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오늘 밤에 죽어도 양적으로 계산해서 ‘계산해 볼까? 음, 15퍼센트가 남네. 천국!’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까 50퍼센트만 무조건 넘으면 되는 거예요. 선과 악 중에서 선이 50퍼센트 악이 49퍼센트가 되면 그 사람은 합격되는 것으로 그렇게 우리는 다짐에 다짐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교회고 절이고 무슨 종교고 상관없어요. 우리는 그 마음으로 절에도 가고 교회도 가고 그래요.
어떤 착한 사람 보게 되면 ‘아하, 내가 요새 착함이라는 패를 모으는 일에 소홀 했구나.’ 그러면 연말에 고아원 가서 비축을 더 해놓는 겁니다. 착함의 창고에 착함을 많이 비축해 놓습니다. 어차피 연말에 술고래가 될 것이니 그때는 나쁜 짓 쪽으로 착함이 소비가 될 것이니까. 착한 일 많이 하면 나쁜 짓 몇 개해도 봐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욥기 35장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아까 본 6절과 7절에, 그런 선악의 게임이 하나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인간의 본색은 인간의 자기 조절, 선과 악의 양적 측정, 그것을 계량이라 하는데 그 계량으로 자기 딴에는 이만큼 먹고 산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에 보면 인간의 그런 자질까지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밀어 넣어 버립니다.
그러면 거기서 뭐가 나오는가, 악마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창세기 4장에 보면 이렇습니다. 창세기 4장 한 대목을 읽어드릴테니 이것이 남의 이야기인가 생각해 보세요.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라멕이라는 사람 이야기인데 그 자리에 괄호를 쳐서 빈 공란으로 두시고 거기에 저와 여러분 자신의 이름을 집어넣어 보세요.
“누구든지 날 건드리는 놈은 참혹한 꼴을 당할 것이다. 이 괴롭고 괴로운 세상에서 내가 나라는 자립적인 존재로서 버틸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날 무시하지 마라. 날 건드리면 신이고 뭐고 잔혹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북한에서 맨 날 하는 소리가 우리 건드리면 서울이 불바다가 될 것이다, 그거잖아요. 안 그래도 지금 가스 터지고 불바다인데요. 우리는 우리 가장 깊숙한 곳에 내가 스스로 ‘이것은 선하고 이것은 악하다, 라고 스스로 판정하는 내 위주의 판정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놈은 신에게 벌을 받든지 나에게 벌을 받든지 하여간에 참혹한 저주가 있으리라.’라는 외침이 우리 내부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인터넷 뉴스 보니 지난주에 나왔어요. 블랙 이글이라는 공군 전투기가 있는데 그게 공중을 날다가 추락했습니다. 나중에 살펴보니 조종사의 실수가 아니라 정비사가 정비를 잘못해서 생긴 일이었어요. 조종사 하나 키우는데 7억인가 든다는데 정비사의 실수로 전투기는 추락하고 조종사가 죽었어요. 애통해 할 가족들 생각해 보세요. 사고비행기를 정비했던 정비사의 상관인 공군준위가 자살을 했습니다. 왜, 내 부하의 실수로 블랙 이글이라는 고가의 비행기와 조종사까지 잃게 해서 그 가족들을 애통하게 했으니까 내가 거기에 대해서 담당자로서 책임을 진다고 자살을 했어요.
어떻습니까? 고귀한 희생정신, 군인정신 아닙니까? 부하를 자기 손으로 죽여서 참혹은 최후를 맞도록 할 수가 없으니까 차라리 그 칼로 자기를 찔러버린 거예요. 그게 바로 마귀의 모습입니다. 욥기의 엘리후에 의하면 그것이 하나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세상을 어떻게 자기중심으로 봐요. “나에게 해코지를 하든지 싫은 소리를 하면 너는 나에게 아마 저주를 받을걸. 저주 받게 될 거야. 저주 받잖아, 봐!”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 교회 가면 그런 사람 많아요. 목사부터 “여러분, 당회장, 하나님의 사자를 건드리면 벌 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목사부터 날 건드리면 저주받는다고 나오니까 그걸 장로가 배우고 장로가 배우면 장립집사가 배우고 장립집사가 배우면 서리집사가 배우고 온 교인들이 다 배워서 누가 더 마귀다우냐를 시합하는 것 같아요.
인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은 뭐냐, 날 건드리면 벌을 77배나 받는다는 이 심보, 이것이 연필심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나는 이렇게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에 의해서 망한다고 신이시여, 나보고는 이야기하지 말고 나는 빼주세요. ‘그래, 너는 안 망해도 돼.’ 라고 한마디만 해주시면 신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나와요. 이게 바로 송사요 변명입니다. 내가 나한테 벌하고 내가 나한테 상주고. ‘너는 착한 일 많이 했으니까 이제 나쁜 짓 좀 해도 돼. 한 달간 푹 쉬어. 왜, 착한 일을 워낙 많이 했으니까.’
내가 스스로 나에게 칭찬해주고 ‘그렇게 네가 나쁜 짓 많이 했으니 손들고 있어. 앞으로 너 밥 먹지 마.’ 스스로 죄 지었다고 금식하고 미안하다고 헌금 좀 더 하고, 그게 하나님의 뜻일까요? 아니면 마귀의 뜻일까요? 16절에 보면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여기에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일부러 예수님을 빼봅시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여, 제 양심 관리한다고 애먹었습니다.” 분명히 이렇게 나와요. “주요, 율법에 의해서 저는 흠이 없습니다. 죄를 지었지만 착한 일 많이 해서 그것을 이미 보상했습니다. 제 안에서 이미 상쇄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가는 거예요.
뭐만 빼버리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것만 빼버리면. 예수님만 빼버리면 우리는 내 양심껏 성실하고, 진지하고, 양심껏 올바른 마음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순전한 마음으로 하게 되면 하나님께 사랑받는 대상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누구만 빼버리면, 예수님만 빼버리면 그렇게 돼요. 그런데 예수님을 집어넣으면 어떻게 되는가? 요한복음 3장 18절에 예수님을 집어넣은 결과가 나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예수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안 믿으면 벌써 너는 심판 받았다.’ ‘나 잘났습니다.’ 하는 것이 이미 저주의 수감자로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말이지요. 다시 정리하게 되면,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 악과 선을 저울에 놓고 그것을 양적으로 측정해요. 그래서 좀 더 많이 기우는 쪽이 자기 쪽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선 쪽으로 많이 기울면 선인이 되고 악 쪽으로 많이 기울면 악인이 되고, 그런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없으면 그래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내가 그랬던 사람인데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에 의해서 이미 확정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게 뭐냐, 예수님은 의인임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모습으로 왔다는 겁니다. 그럴 때 저를 믿는 자는 의인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양적 개념, 측정개념, 측량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겁니다. 사랑, 미움, 이것은 우리가 행동으로 그것을 어떻게 받쳐주는가, 여기서 행동으로 양적으로 추가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뺄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사랑을 받았는데 나쁜 짓을 했다고 해서 사랑이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사랑은 그냥 사랑하는 것이고 미움은 그냥 미워하는 거예요. 사랑과 미움은 상대에 따라서 취소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시는 분, 미워하시는 분에 의해서 결정권을 갖고 있습니다.
사랑하면 무조건 사랑하는 것이고 미워하면 무조건 미워하는 거예요. 이것은 이유도 달지 마세요. 우리 행함을 거기에 첨가하지 마세요. 첨부파일도 필요 없어요. 말라기 1장 2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합니다. 끝! 게임 오버, 끝났어요. 왜 주의 사랑을 우리가 양적으로 계산합니까? 사랑을 조금 받았느니, 많이 받았느니, 그렇게 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내놓고 하나님이 말씀했어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내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양으로 측정하지 말라 그 말입니다. 내가 이처럼 사랑하사, 측정하지 말라. 그런데 누가 내 행동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사랑했습니까?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 분이 사랑인 것을 믿는 자에게는 어떤 일을 해도 심판받지 아니한다. 왜, 너희들은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야곱은 사랑을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생명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과 미움 가운데서 사랑이 미움을 이기면 사랑 쪽에 속하고 미움이 사랑을 이겨버리면 우리는 미워하는 사람이라고 분류될 수가 있어요.
아무리 하나님이 날 사랑해도 나는 그 사랑 다 믿지 못하고 나는 내 뜻대로 안되면 하나님이라도 무조건 밉습니다, 할 때는 미움이 사랑을 이긴 거예요. 반대로 내가 아무리 하나님께 미운 짓을 해도 이미 사랑받은 자에게는 그것을 죄라고 드러내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마저도,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이것마저도 이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나를 매일같이 새롭게 조립해내고 있습니다, 라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사랑 쪽에 속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레미콘 안에 들어 있는 자갈처럼 생각해서 한 바퀴 돌때마다 매일같이 새롭고 조정되고 새롭게 구성되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짜기에 주제파악을 못합니다. 박자가 달라질 때마다 다른 춤을 추고 환경에 따라서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지만 주께서는 그것을 굴리고, 굴리고 또 굴리고 굴려서, 굴릴 때 마다 로또복권 숫자 끄집어내는 것처럼 매일 빙빙 돌리면서 계속해서 이래도 사랑, 저래도 사랑, 어화둥둥 내 사랑,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저리 보아도 내 사랑, 앞에서 봐도 사랑 뒤에서 봐도 사랑, 항상 어디서 봐도 모든 것이 사랑인 것을, 어떤 사랑, 네가 나를 미워하는 그 미움마저도 이겨낸 사랑.
엘리후는 이야기하고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네가 죄를 지은들 나에게 무슨 영향이 있으며 네가 선을 행한들 그것이 선이 되겠는가? 왜,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행함과 율법을 묻지를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 사랑이 너의 죽음마저 이기는 겁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깊다 했으니 아무리 우리가 깊은 질곡에, 죽음에 빠지더라도 사랑은 거뜬하게 거기서 우리를, 너를 사랑한다는 음성으로 우리를 사랑의 나라로 데려갈 수가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 건드리면 저주받아라, 하는 음성이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악마의 음성이고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고 양심의 본성인데 그런 속셈은 감추면서 양심껏 살았습니다, 바르게 살았습니다, 하는 변명들을 하지 않게 하옵소서. 주께서 이미 아시고 십자가 죽으셔서 우리를 위해서 쓴잔을 마셨사오니 우리도 기쁘게 그 쓴잔을 마시면서 이게 사랑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남은 여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