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롬2장 17-21(유대인)1212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2장 17절에서 21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1페이지입니다.
로마서 2:17-21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유대인에 대해서 성경말씀으로 하나님은 언급을 하십니다. 유대인은 세상을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지극히 선한 것은 율법이고 그 율법에 대한 지식과 진리는 자신들만 알고 있고 따라서 하나님의 법을 모르면 다 어린아이고 하나님의 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자신들이 선생이고 그 선생 된 이유는 어린아이를 가르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총칭해서 유대인이라고 자부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런 유대인보고 하는 말이 ‘네가 왜 도적질 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너는 왜 도적질 하느냐? 남 가르치기만 하면 네가 가르친 그 율법이 너를 저주받게 하고 버림받게 한다면 네가 백날 가르친들 네 구원에 전혀 보탬이 안 되고 도움이 안 되었으니 너는 헛수고만 했잖아.’라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적이 유대인에게만 하는 지적이 아니고 오늘날 교회 다닌다고 자처하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거든요.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모른다, 모른다. 우리는 성경을 안다, 안다. 따라서 우리는 선생이고 그들은 우리에게 배워야 된다. 교회 다니면서 성경을 많이 아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성경을 가르치는 그것이 자기의 구원에 보탬이 되느냐, 하는 문제를 또 다시 우리 자신을 향해서 되묻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물음으로서 하나님이 노리고자 하는 것,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사람들도 자신의 가르침이라든지 뭔가 안다는 그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면 구원의 능력은 어디서 오고 어떻게 되는 것이 구원인가? 구원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계셔서 자신이 피 흘리신 그 값어치, 그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킴으로 말미암아 그 능력에 이끌려서, 하나님의 능력이지요, 우리가 만들어낸 능력이 아니고, 그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구원받는 겁니다. 그 능력에 한 번 빠지면 우리는 아무리 죄를 짓고 아무리 예수 안 믿겠다고 소리친다 해도 구원에서 제외되는 법은 없습니다. 천국 가는 길이 지옥 가는 길로 유턴 하는 법은 없다는 말이지요.
질질 끌려가듯이, 눈에 차 박혀 있으면 렌트카가 와서 질질 끌어내서 끌고 가듯이 우리는 천국에 가서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자기의 모든 것이 무장해제당하고 내가 나에게 가미하는 윤리나 도덕적인 것들도 다 무용지물이고 오직 예수님께서 이미 자신이 저질러 놓은 그 일로 인하여 그 능력이 이토록 죄인이 우리까지라도 의로 만들어내는 능력으로서 이끌어가는 것을 우리가 알 때마다 우리 자랑, 교회를 몇 년 다녔다든지 혹은 내가 목사입네, 하는 이런 자랑을 일체 입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그것을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왜 이것을 못했느냐 하면, 유대인들은 원래 자칭 선생님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인간들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가를 표본적으로, 모델 적으로 제일 먼저 보여준 것이 유대인이에요. 아담이 죄 짓고 난 뒤에 인간의 타락한 성품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불가능하게 구원하는 것을 뭐로 전환시키느냐하면 가능한 것으로 전환시키는 시도를 했습니다. 처음에 에덴동산에 있을 때부터 그랬는데 그것이 타락입니다. 타락이라 할 때 우리는 점잖게 살다가 나쁜 친구 만나고 나쁜 짓이 하면서 사창가 돌아다니고 술집이나 전전하면 그것을 타락이라고 하는데 그게 타락이 아닙니다.
구원은 불가능한 것으로 구원되는데 이것을 자꾸 무엇으로 변질시키느냐하면, 내가 만들어낸 나의가능성으로 구원을 잡을 수 있다, 내 것 만들 수 있다는 시도를 하는 이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그 선배 격이 누구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이고 유대인이에요.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게 되면 그것을 지키겠다고 나서서 지킨 내가 그만큼 우수한 존재, 향상된 존재가 되고 싶은 품성이 바로 타락이에요. 우리의 예상과 완전히 다릅니다. 저의 젊을 때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는 굉장히 유교적이었습니다.
뼈대 있는 집안을 매우 강조했어요. 그래서 뭔가 주입하려고 자꾸 잔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잔소리를 들을 때 그 아들이나 손자들에게 그때부터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누가 그 말씀대로 잘 지켜서 할아버지나 아버지로부터 칭송을 받아내는가, 그 경쟁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 경쟁은 자기가 자기에게 가미한 숙제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누가 더 완벽할 수 있는가? 음식을 먹을 때는 소리 내지 말고 먹어라, 흘리지 말고 먹어라, 신발 벗을 때는 꼭 가지런히 놓아야 되고, 문을 닫을 때 특히 여자들은 엉덩이를 보이지 말 것이고, 소리가 나서도 안 되고, 기침을 할 경우에는 밖에 나가서 해야 되고 ……, 이런 세세한 율법조항들, 그런 것을 주게 되면 그것을 지키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고 즐거움이 되고 말았어요.
그것을 잘 지키게 되면 식사시간에 식구들 앞에서 포상을 합니다. “누구는 이렇게 내 말을 잘 듣는다. 내가 장담하는데 그 애는 나중에 크게 성공한다.” (그래서) 제가 성공했잖아요. “크게 성공한다. 저렇게 하니 복을 안 받을 수가 없지.” 이런 식으로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기 말을 잘 들어서 지키도록 유도해나가는 분위기, 나중에 말씀을 보니 그것이 바로 인간의 타락이었습니다. 선악과나무, 이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그 의미가 다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에덴동산이 축복된 동산이거든요. 그 축복된 동산이 축복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생명나무와 선악과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훼손해 버리면 이것은 단순히 나무 한 그루 훼손한 것이 아니고 에덴동산 자체가 붕괴되고 와해되어버려요. 그것을 인간들은 몰랐던 거예요. 전체가 무너지는 것은 모르고 이것 따먹고 내가 하나님 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필요가 뭐가 있는가,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자기만 생각한 거예요. 마귀들이 생각한 것이 그거거든요. 선악과 따먹고 나니까, 선악과 안에 들어 있는 그 불가능한 능력이 인간 속에 오니까 인간들은 ‘드디어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가졌어. 됐어!’ 뭔가 가진 것으로 자기는 선과 악을 지킬 수 있다고 오해한 겁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내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 것을 아는 그것이 곧 실천이며 결과라고 잘못 생각한 거예요. 도둑질 하지 말라는 그것을 내가 알고 남에게 가르치고 그렇게 실천에 옮기면 그렇게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문장인 줄 알고 오해한 겁니다. 우리가 어떤 성경말씀을 지켰다고 오해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겁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가 필요치 않아요. 구원이란 심판하실 심판주로부터 용서받는 것이 구원입니다. 직업과 관계없이. 백수냐, 나이가 얼마냐, 직업이 뭐냐, 학력이 얼마냐, 남자냐 여자냐, 나이가 몇 살인가, 장애자냐 건강 하냐, 일체 묻지 않고 구원이라 하는 것은 심판을 당해야 될 당사자인 내가 심판 대신에 용서를 받아서 사랑을 입었다는 이것이 구원이거든요.
이것만 알면 세상 근심걱정 염려, 눈이 와서 차 꼴아 박았다는 이런 모든 것, 차가 눈밭에서 미끄러져서 뒹굴어도 뒹군 그 자리에서 구원을 받는다니까요. 차 세 바퀴 구르는 것, 그것이 저주가 아니에요. 저주는 차 눈에서 안 구르고 집에 정상적으로 오는 내내 차 안에서 저주받고 있는 겁니다. 따먹지 말아야 될 것을 우리 조상 아담이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아담 안에는 아담이 없게 되어버린 겁니다. 인간 속에는 인간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아니고 뭐냐, 기형입니다. 기형인 들이에요.
진짜 인간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 안에만 인간이 있어요. 그것을 참 사람이라고 합니다. 뭔가 문제가 있어요. 우리는 문제가 있어서 이 문제가 커져서 뭐가 되었느냐, 죄의 삯은 사망이라, 가 되었어요.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하는 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대형마트에 가서 카트에 물건을 가득 싣고 30분 동안 한 바퀴 돌았다 이 말이지요. 남자들은 한 20분, 여자들은 한 2시간, 이렇게 되겠지요. 카운터에서 계산할 때 76만 5천원, 24만 3천원, 죽 나오는데 카운터에서 계산기 두드리더니 “사망” 하는 거예요. 마지막 인생 돌고 끝날 때 카운터에서 하는 말이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사망이라는 말은 저주, 지옥이라는 뜻이에요. 직업과 관계없이, 나이와 관계없이, 어떤 무엇도 상관없이. 지난주에도 이야기했지만 가상존재, 인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인간이라고 우기면서 버티면서 살아온 거예요. 결국에는 인간이 아님이 들통 나 버렸어요. 한 줌의 흙이 되고 재가 되는 거예요. 그 이유에 대해서 유대인은 말합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썼는데 왜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죽어야 됩니까, 그 이유는 율법, 하나님의 법이 있는 것은 그것을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네 몸에 문제가 있어서, 기형이기 때문에 그 말씀이 요구하는 수준과 네가 지키겠다는 이것이 맞지를 않는 거예요.
말씀을 제대로 지키면 0.1초 내로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인 천국으로 바뀌어야 맞아요. 처음에 선악과가 손상되지 않았을 때는 에덴동산이었어요. 축복덩어리였습니다. 전부 다 기쁨밖에 없었어요. 뭘 해도 악한 것도 없고 눈물지을 일도 없었습니다. 스위치 하나 잘못 건드려 놓으니까 온 아파트가 정전이 되듯이 뭔가를 잘못 건드려서 거기서 추방되어서 밭을 갈아도 땀만 질질 흐르지 노동의 결과는 제대로 나오지 않은 채로 이마에 땀 흘리면서 죽고 부부 사이도 서로 뭔가 자기 흠을 감추려들고 남의 흠은 집어내려고 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남자는 아내를 구박하고 아내는 구박받으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여자의 일생을 노래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 없이는 못산다고 붙어서 그래도 살고, 뭔가 엉망진창, 진흙구덩이가 되었어요.
하나님의 작전은 이겁니다. 모든 것을 진흙구덩이로 만들어 놓고 그 진흙구덩이에서 보석, 거룩을 뽑아내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런데 진흙구덩이에 있으면서 진흙 안 되려고 하고 자기는 다이아몬드나 보석쯤 되는 줄 알고 거기서 버티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인, 죽음의 세계, 지옥 같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조건들을 재생산하는 겁니다. 이만하면 내가 선인 아니겠나, 이만하면 내가 의인이겠지, 라고 한다면 주님께서 “무슨 조건에 의해서 네가 큰소리를 치느냐?” “제가 이렇게 살았고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래? 그러면 이런 조건 집어넣어 주면 어떻겠어?” “어?” 그 조건 앞에서 우리는 돈에 굴복하고 탐욕에 굴복하고 그 동안 마일리지 쌓았던 모든 착한 것과 고상한 것, 얼추 말씀 수준에 도달했다고, 조금만 더 수치를 높이면 드디어 나는 흠이 없겠다고 장담했는데 사태가 일어나면서 쌓아놓았던 모든 공과와 성과들이 하루아침에 다 내려가요.
사법고시 합격해서 검사되었다고 고향마을에 “아무개 씨 둘째 아들 사법시험 합격” 플래카드 걸고 농협 앞에도 붙이고 초등학교 앞에도 붙이고……, 이 앞에도 있어요. “지묘초등학교 몇 회 아무개 행정고시 최종합격” 붙였다 이 말이지요. 그런 검사가 가는 데마다 돈 밝혀서 신문지상에 어느 부장검사가 뇌물 받았다고 나온다 이 말이지요. 그 동안 쌓아올렸던 모든 명예와 체신이 한꺼번에 추락된 위장술로 드러나는 그 때 그 시점, 그것도 세상 사람들에게나 그렇지 진짜 마지막에 우리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이 정도 위세는 위세 취급도 안 해요.
부자로 산다고 좋다고 했던 그 사람, 나중에 지옥 가서 물 한 방울도 아쉬워서 물 한 방울 찍어 달라고 외치는 이야기가 누가복음 16장에 나오잖아요. 그래서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요즘 내가 아주 큰 은혜를 받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예수님의 말씀 중에 하라, 하라, 하는 것이 그렇게도 많은데 왜 이것은 안 지키는지 모르겠어요. 불의한 재물로, 네가 뇌물을 바쳐서라도 좋은 친구 사귀어 놓으면 네가 죽고 난 뒤에 너에게 보탬이 될 것이다, 그런 뜻이거든요.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만 돈 먹이듯이 쓰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천국에 가기 위해서 너는 더러운 돈이라도 써라. 그것이 너에게 이익이다.” 그런 뜻이라는 말입니다. 갑자기 부흥회 멘트 비슷하게 되어버렸는데. 그 말씀의 진정한 뜻은 ‘이 세상에서 옳다고 하는 것은 믿지 말고 이 세상이 나쁘다고 할 때 오히려 그것이 네 모습이다.’라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을 비난했지만 사실은 우리가 이미 유대인 길에 들어섰습니다. 들어서서 성경말씀 좀 안다고 해서 ‘나는 지키는데 너는 왜 안지키나.’ 이런 식으로 유대인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내가 소지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내가 간직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구원은 불가능성으로 구원하는데. 항상 우리는 내가 미처 메우지 못한 미지의 것이 남아 있어야 돼요. 그 남아 있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내가 행하는 것, 내가 얻어놓은 것, 내가 가진 것, 이것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남아 있는 것, 미처 내가 손댈 수 없는 영역, 내가 감히 범접하거나 침범하거나 정복할 수 없는 영역이 우리들을 살려내요. 그래야 우리가 주님하신 일 앞에 항상 겸손할 수밖에 없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말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지난주에 헌금 좀 했다고 해서 ‘이번 주에는 눈이 이렇게 와서 차 막히는 바람에 예배시간 늦게 하십니까?’ 이렇게 따지고, 하여튼 인생에서 뭘 따진다는 것은 분명히 내가 이만큼 최선 다 했는데 왜 이 값을 안치러 줍니까, 왜 노동의 대가를 안 주십니까, 이런 투정과 짜증으로 나온다 이 말이지요. 그것이 미지의 것을 보지 못해서 그래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꼭 그림자놀이 같아요. 그림자를 잡았다 싶으면 벌써 빠져 있고. 님 그리워, 가사에 보면 달을 따라가는데 달을 잡아도 달은 저 앞에 가 있어요.
그처럼 아무리 잡아도 잡히지 않는 그런 거리감, 그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날이 가면 갈수록 ‘나의 나됨이 은혜입니다.’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갈수록 주님과 우리 거리는 점점 더 멀어져요. 얼추 따라붙었다고 했는데 전혀 따라 붙이지 않았어요. 오히려 따라 붙였다고 여기는 그것이 우리의 숨어 있던 타락의 본성을 노출시키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런 조건들을 주님께서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래서 ‘나’라는 인간이 사실은 인간이 아니었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인간은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선배 격으로 유대인들이 뭘 비교했느냐 하면 다른 나라하고 자기하고 비교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다른 나라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한다고 하니까 유대인들은 오해했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제시하면 구원하는 줄로 오해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내놓을 수 없고 바칠 수도 없는 어떤 것, 하늘에서 주신 것으로 구원되는데 그것을 모르고 내가 이만큼 성실하게 뭔가 내놓으면 그것을 근거로 해서 저쪽은 구원 안하고 우리는 구원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사실은 신앙생활 하면서 다들 그렇게들 유대인 같은 숨은 속성들을 드러냅니다. 목사들은 한껏 그것을 이용해요.
유대인들의 잘못이라 하는 것은 다른 나라하고 자기하고 비교할 때 그들만의, 자기나라만의 특징을 잡았습니다. 그게 뭐냐, 율법이라는 것이 우리한테 있고 저쪽 다른 나라에는 율법이 없으니까 율법이라는 것을 통해서 구원한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여러분, 한 주 지났다고 지난주일 낮에 한 것 다 잊어버렸지요?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연필 심 같이 심어준다고 했지요. 그렇게 연필심 같은 율법이 있다는 것을 구원 받은 것으로, 택한 백성이라고 간주하고 들어가자, 라는 것이 우리 선배격인 유대인들의 생각이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율법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물질의 생산, 또는 사물을 통해서 우리가 밥 먹고산다, 세상 사람들 모두는 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영양분을 위해서 곡식을 먹어야 되고 곡식이라는 것은 가만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고 노동을 통해서 농사를 지어야 되고 그래서 알곡을 맺으면 타작해서 그것을 입에 넣어야 우리가 산다는 거지요. 그러면 그 과정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좋은 하나님이고 우리 입에 곡식이 들어오고 영양분이 들어오고 양식이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면 그것은 나쁜 하나님이든지 마귀라고 간주한 것입니다.
이것을 고상하게 말하면 모든 종교, 정치, 윤리, 도덕이라는 상부구조 밑에는 반드시 경제라는 하부, 물질적인 것이 먼저 토대가 되고 그것이 잉여, 여분의 물질이 누적이 되면서 신학이니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니 세상의 종교도 되고 책도 읽고 놀러 가기도 하는 것이지 지금 당장 끼니도 거르는 판에 놀러 다니고 신 섬기고 노래 부를 정신은 없는 거지요. 세상의모든 기본은 물질적 경제적인 바탕이 근거가 되어야 된다는 것이 옛날도 그렇게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귀농하는 사람들 보면 귀농할 때 대충 살고 여분의 시간은 기타치고 노래도 하면서 작곡도 하고 가족끼리 놀러 도 좀 다니면서 산다, 서울 생활이 너무 빡빡했으니 이런 포부를 가지고 오거든요.
막상 귀농해서 하루 24시간 스케줄을 보니까 24시간 종일 하는 것이 뭐냐, 문풍지 바르고 겨울에 쓸 땔감 한다고 바쁘고 닭 모이 주고 어디 가지도 못해요. 이것은 가장 기본적이 의식주 해결하는데 24시간이 모자랄 판이에요. 의식주 해결하는데 급급해요. 서울에서는 돈만주면 다 됐는데 그게 안돼요. 손수 다 해야 돼요. 거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아하, 사람이 아무리 고상을 떨고 신사 숙녀인척 해도 돈이 있어야 되지 돈도 없는 신사가 어디서 기생집에 드나듭니까? 빈대떡이나 부쳐 먹으라고 하잖아요. 빈대떡 부쳐 먹는 것도 돈이 많이 들어요.
세상 모든 행동은 돈 버는 작업에 불과하고 돈이 있을 때는 돈 있는 행세한다고 철학을 논하고 윤리 도덕을 논하고 여행도 하지만 그것은 잉여, 내가 먹을 것 세끼 챙기고 난 뒤의 잉여 물에서 나온 것이고 그 잉여 물은 없는 사람 착취해야 된다는 마르크스의 이론도 있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그게 싫은 거예요. 그것은 이방종교고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으니까 사물로서 어떤 민족이나 국가를 구성하는 것은 저주받고 지옥 가는 이방민족들은 그렇더라도 우리는 정신으로 만들어보자, 해서 물질과 사물에 의하지 않고 정신에 입각해서 나라를 만들 수 있다, 라는 것을 그들은 시험한 겁니다.
그렇다면 사물이라 하는 것은 있어도 없는 것으로 간주해서 사물이 있는 것은 그 물질과 사물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재배치하는 거예요. 어떻게 배치하는가, 안식일을 지키는 겁니다. 안식일이라는 그 말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이 뭘 했느냐, 안식일에는 차 운전도 안하고 안식일에는 어떤 것도 상황을 변경시켜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해석해서 빵 굽는 것, 차 운전하는 것, 수화기 드는 것, 전기 사용 안하기, 청소할 때 빗자루 갖고 청소하다가 부러지면 수리 안하기, 책 읽는 것은 되지만 쓰는 것은 안 되기, 가방 들고 가면 안 되고, 노래 부르면 안 되고, 악기 사용하면 안 되고, 과일의 냄새를 맡아도 안 되고, 소포의 포장지를 뜯어서도 안 되고, 지금도 유대인들은 그렇게 산다니까요.
전화기 수화기 들면 안 되고 엘리베이터 타면 안 되고, 빗자루, 소포, 이런 것이 다 사물 아닙니까? 안식일이라는 것은 금요일 해지기 전 십분 전부터 시작해서 토요일 해지기 전까지가 되거든요. 그 시간대는 하나님의 거룩한 안식일이에요. 율법입니다. 이것은 정신입니다. 그것이 이방나라와 달라야 돼요. 특별히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은 말씀위주가 되고 율법 위주가 되는 거예요. 사물이라는 것은 그냥 있으면 사물이 아니에요. 사물에 의미를 주기 위해서는 이것은 하지 말라 혹은 하라, 이렇게 지키라는 말씀이 필요로 할 때 사물을 거기에 배치를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일반 날에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못 먹는 음식으로 나눴습니다. 이것은 레위기에 나오는 거예요. 돼지와 토끼와 낙타는 굽이 갈라졌지만 되새김질을 못하니까 못 먹고 말고기는 굽이 갈라지지 않았기에 못 먹고 생선 중에서 비늘이 없는 것은 못 먹고 상어 고래 미꾸라지는 비늘이 없어서 못 먹고(레위기 11장). 그러니까 상어나 고래나 미꾸라지는 그냥 그 자체로서 사물이 아니에요. 그런 사물은 없어요. 우리가 안 먹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사물은 의미를 얻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사물은 율법이라는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거예요.
새우, 게, 낙지, 오징어, 꼴뚜기, 조개, 지느러미 없어서 못 먹고. 유난 떠는 사람은 삼치, 꽁치, 가자미, 정어리, 넙치, 갈치 못 먹고, 지금도. 그게 유대인입니다. 그게 유대인이에요. 그게 1948년에 독립한 유대인이에요. 1917년 11월 2일 영국의 어떤 재상이 벨푸어 선언을 했습니다. 내가 유대인들을 다시 시온으로 모아서 독립시켜 준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1915에 맥마흔이라는 영국 외교관이 선언을 했어요. 1차대전 때 터키와 독일이 한패가 되어서 영국연합군과 싸웠거든요. 그때 오스만 터어키가 지배한 나라가 현재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전부 다 터어키가 지배했었어요. 옛날에 터어키가 잘나갔습니다. 16세기 이후에 그 주변 서남아시아를 다 지배했어요.
그래서 독일과 한패가 되어서 연합군과 싸우니까 연합군이 제안하기를 독일과 한편인 터어키와 전쟁을 해서 아랍공동체가 이기면 여러분의 땅을 독립시켜 주겠노라고 약속을 했단 말이지요. 그게 1915년에 약속을 했거든요. 그런데 1917년에 벨푸어라는 사람이 또 따로 선언하기를 흩어져 있는 전 세계 유대인들을 내가 모아서 나라 만들어준다는 약속을 하니까 그 약속에 대해서 화를 낸 사람이 아라비아 로렌스라는 영국 군인이 있었어요. 그 영국 군인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터어키와 전쟁해서 영웅이 된 사람입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영화도 나왔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붕 뜬 거예요. 왜 앞뒤 말이 다르냐 하는 거지요.
그래서 그 벨푸어선언에 의해서 1948년에 벤 구리온이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여기는 연합군이 점령한 땅을 우리에게 준 것이기에 합법적으로 우리 땅이다.” 해서 점령했고 거기 해변 가의 가자지구, 성경에 나오는 가사의 블레셋 민족, 팔레스타인 민족이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하고?” 하니까 “너희는 이 자리를 떠나라.” 지구를 떠나거라, 해서 중동전쟁이 일어난 겁니다. “왜 그 땅이 네 땅이냐? 우리라는, 나라는 인간은 없다. 다만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이 땅은 너희들의 땅이라는 그 율법에 의해서 우리는 여기 살 뿐”이지요. 그러면 블레셋 후손들은 왜 쫓겨나야 되느냐, “구약성경의 말씀에 의하면 너희들은 저주 받아야 돼. 종이 되든지 안 그러면 떠나든지.”
이게 유대인 정신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이론이 아니고 실제로 지금도 이스라엘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에요. 사람이 물질로, 돈으로 살 것 같으면 그런 특이한 민족, 유대인이나 이스라엘 나라라는 것이 만들어지지를 않습니다. 돈 벌기 위해서 교회 나오면 교회라는 것이 사실은 있을 필요도 없어요. 교회는 나라는 인간, 나라는 사물, 세포덩어리, 물질덩어리가 진정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 어떤 인생의 목적으로 살 것인가의 제 자리를 잡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을 나에게, 여러분 자신에게 적용시킨 그 결과가 뭐냐, 교회 와서 예수 믿기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뭐로 봅니까? 그게 바로 유대인이 하는 짓의 반복으로 본 겁니다. 우리는 교회 와서 하나님 믿는 것도 참 잘한 짓이며 이 훌륭한 일이 하늘나라에, 내 구원에 보탬이 된다고 장담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 내가 가진 돈을 하나님이여, 어떻게 사용하면 됩니까?”라고 물으면 성경말씀에 내용이 나오기를 “돈은 이렇게 쓰고 하루 일과는 이렇게 잡아야 되고 주일은 이렇게 지켜야 되고 성도라면 술 담배는 하지 않아야 되고 ……” 전부 다 말씀에 의해서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처럼 교회에서 율법적으로 가르치는 거예요.
유대인을 그렇게도 욕을 하면서 그 규칙, 규범에 맞추어서 우리가 제 2의 유대인으로 어느새 변환되고 있고 우리도 어느새 거기에 말려들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남을 가르치고 남은 우리에게 가르침 받고, 그것을 전도라는 이름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이것은 비현실이 아니고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에요. 지금 교회마다 그리고 수천 킬로 떨어진 이스라엘 나라 등등 현재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는 것은 단순히 생존, 이방민족들이 하는 밥이나 먹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밥 못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이스라엘 오지 않고 미국에 살고 러시아에 그냥 살았으면 오히려 더 잘 먹고 더 잘 살았을 사람들이에요. 독일의 노벨상 수상자들 보세요. 줄줄이 유대인들 아닙니까? 그렇게 잘나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살던 곳 다 버리고 오직 말씀 하나 지킨다는 일념으로 그들은 실제로 그 나라를 만들었어요. 1948년에 실제로 나라를 만들었다니까요. 미슈나라는 성경해석, 그들의 율법해석 책에 보면 지금 아홉 번째 제사가 성립되었습니다. 이제 하나 남은 열 번째 제사가 이루어지는 날에, 어디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는 날에 메시아가 예루살렘의 감람산에 강림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예루살렘 성전은 누가 쥐고 있는가? 이 황금 돔이 요르단과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 셋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빨리 그것을 차지해서 이스라엘 나라로 만들게 되면 그 나라는 메시아가 오는 거예요. 이것은 순전히 정신적입니다. 정신으로 나라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지금도 많은 종교단체들이 정신 하나로 거대한 단체를 만드는 겁니다. 구천지고 신천지고 다 마찬가지에요. 정신 하나 가지고 도 닦아서 만들 수 있는 거예요. 종교라는 것이 원래 그런 거예요. 그런데 이게 하나님 앞에 악한 것으로 지적받을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 바리새인들, 그 철저한 유대인 가운데 유대인, 율법의 완성자 중의 완성자, 율법의 흠이 없는 사람, 누구였습니까?
바로 이 로마서를 쓰고 있는 사울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며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이며 율법대로 하기 위해서 내 몸 하나 던져 넣은 사람이고 율법에 철저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구원에 가깝다고 여겼던 내가 세상에, 십자가를 알고 난 뒤에 내가 하는 모든 짓이 타락의 본질을 보여준 것일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그것이 오히려 다른 하나님을 상상토록 한 거예요. 엉뚱한 길로 자꾸 간 겁니다.
눈길에 차가 가는데 엉뚱한 길로 가서 자꾸 옆 차선의 차를 박는 거예요. 어, 어, 자신도 모르게 옆길로 간 겁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이렇게 옆길로 안 새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이것이었습니다. 박히도록 하는 겁니다. 삐질삐질, 차가 옆길로 미끄러져서 샌다고요. 새면 다른 차는 어, 어, 하고 다 피하는데 용감하게 나서서 박아라, 하고 자기 맨 몸을 갖다 대서 피가 터지게 만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박혀야 네가 엉뚱한 길로, 네가 지금 지옥 가는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주님은 지옥의 문 앞에서 서서 자기 온 몸으로 막는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는가하면 마태복음 8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문둥병자, 저주받은 자가 예수님 보고 ‘저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할 때 주께서 깨끗이 해 줬어요. 낫게 해주고 “그냥 가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예물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합니다. 레위기 14장에서 그 예물이 뭐냐, 새를 두 마리를 잡아서 한 마리는 물에서 죽이고 다른 한 마리는 산채로 있다가 물에서 죽인 새의 피를 살아 있는 새의 날개 죽지에 바릅니다. 다 발라서 그 동안 잡고 있던 살아 있는 새를 창공을 향하여 자유다, 하고 날려 보내라는 겁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그 창공을 자유를 얻어서 죄가 없는 채로 날아간 그 새로운 인간 존재는 그 날아간 것만 좋아하지 말고 누가 이렇게 날아가게 하도록 구원의 능력을 제공했느냐를 봐야 됩니다. 그것은 바로 죽은 새지요. 예수님께서 문둥병을 낫게 해 주시면서 이 제물을 바치라고 한 겁니다. 유대인들은 백날 율법의 절차를 그대로 지키기만 하는 거예요. 새는 율법대로 잡아야 되고 너는 날아가야 되고, 이것만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의 가능성, ‘하나님이여, 저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나는 예배시간에 참석했습니다, 오늘도 소중한 헌금을 드렸습니다, 오늘도 주일을 지켰습니다.’
맨 날 코앞에, 눈앞에 보이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자기가 구원받을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성경책을 보고 율법을 달달 외우고 신학박사가 되어도 자기가 기형인이라는 것, 처음부터 뭔가 문제 있다는 것을 인정을 안 해요. 삐질삐질 엉뚱한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사고방식만 만들어낸다는 것을 본인이 몰랐던 겁니다. 그 문둥병자 천만 다행입니다. 문둥병자 되었으니까 구원받았지요. 문둥병자 되었으니까 불쌍히 여겨 달라고 예수님께 했지요. 문둥병자 아니었으면 얼마나 잘난 체 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그 사람 문둥병 만들어 놓고 어느 날 자신을 찾게 만드는 거예요.
이것은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말씀하고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간통하다 현장에서 잡힌 사람인데 예수님이 데려온 것이 아니고 바리새인이 데려와서 돌려 쳐 죽이려고 했는데 주께서 땅에 뭐라고 쓰시고 죄 없는 자가 돌리 치라고 말씀 한 마디 하니까 다 도망가 버리고, 그들은 일종의 가마꾼이 되어서 아씨를 모시는 것처럼 간통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모시고 예수님에게까지 오게 한 거예요. 그 여자가 알아서 예수님 찾아온 것이 아니고. 그 여자를 고소한 자들이 그 여자와 예수님관계를 매칭 시킨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그 여인이 간통을 안했으면 예수님을 못 만났습니다. 간통을 해도 안 들켰으면 예수님을 못 만났어요. 간통을 했더라도 돈 주고 무마했으면 예수님한테 오지를 못했습니다. 이것은 대 낮에 간통하다 현장에서 잡혀서 우세 당하면서 예수님한테까지 끌려와서 주님한테 무슨 소리 들었느냐, “이제 네 죄가 없느니라.” 네 죄가 없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그 여자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죄를 지어야만 했던 겁니다. 이게 바로 사물 화된, 물체 화된 우리의, 하나님의 진정한 율법 앞에서의 우리의 제자리입니다.
이것은 불가능입니다. 간통하면 안 들키는 것이 우리의 가능함인데 그것을 들키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예상 못한 불가능함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불가능은 우리는 나 자신을 잘난 존재로 숨기려 하는 이런 일에 필요한 가능한 것만 작업을 하는데 그런 인간을 주께서는 우리가 감추고 싶은 것을 노출시켜서라도 기어이, “너는 이미 창세전부터 내가 딱 알아놓은 인간이야. 내가 너를 찍었어, 찍어 놓았다고! 너는 빼도 박도 못해. 나의용서와 나의 사랑에서 너는 못 벗어나.” 그렇게 찍어놓은 사람으로서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가든지 그대로 와야 돼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희미한 등불 밑에서 눈물 흘렸어도 그것은 상관없어요. 희미한 등불 아니고 백열등불, 환한 등불도 괜찮아요. 주님 앞에 오게 되면 어떻게 오게 되더라도 잃어버린 자를 건지는 것이고 탕자를 이 아버지가 받아주시는 하나의 절차에 해당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 절차 중의 하나로서 교회 온 거예요. 우리 힘으로 온 것이 아니고 주께서 오게 하신 겁니다. 점점 더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이제는 숟가락으로 밥 퍼서 넣는 이것도 내 힘으로 불가능해요. 나이 들어서 숟가락 들고 벌벌 떨고 해 보세요. ‘왜 이렇게 힘들지?’ 나중에 그것보다 더 심하게 치매 걸리면 ‘지금 밥 때인가? 내가 밥을 먹었나?’ 그렇게 돼요.
젊을 때 평소에 막 퍼 먹는 것도 그때는 몰랐지요. 내가 얼마든지 하면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입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께로 이끄시는 하나의 은혜인 것을 돌아보면 전부 다 은혜인 것을, 돌아보면 예수님의 핏자국이 다 묻어 있는 것을. “우리는 그 핏자국 필요 없습니다. 나는 내 힘으로 말씀 지킵니다. 내 힘으로 성경공부 해서 구원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살아온 거예요.
끝으로 한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금식 일에 금식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하고 같이 술 잡숫고 계셨어요. 그날이 금식 고난일인데 식사하면서 술 잡숫고 계셨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시비를 걸었지요. “왜 금식 일에 자기를 낮추는 금식을 하지 않느냐?” 지금 교회마다 3월 말에 금식 일을 정해 놓았잖아요. 우리가 그 때를 놓치면 안돼요. 그날 잔치를 벌여 버리는 거예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내가 온 이유를 너희가 몰라. 왜, 너희는 정상이 아니니까. 너희는 괴물이고 기형이니까 나 예수가 무엇 때문에 온지를 모른다. 병든 자라야 의사가 필요하지 건강한 자에게 무슨 의사가 필요하겠는가? 너희들이 율법, 율법 주장하는데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지 옛 부대에 율법을 담아버리면 부대도 찢어지고 포도주도 쏟아지고 포도주가 제 가치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모든 율법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담아버려야 돼요. 담겨야 비로소 율법이 제 값을 내는 겁니다. 십자가에 담긴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 앞에 뭘 해도 우리가 죄인인 것을, 그리고 용서받은 것을 보여주는,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너는 뭘 어떻게 해도 사랑할만하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모든 말씀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에서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나도 이런 죄인이었는데, 나도 이 말씀을 지키려고 애썼던 죄인이었는데 이제야 입을 열고 말합니다, 나도 죄인이었는데 이 말씀을 주님께서 다 지켜서 ‘너 이거 못 지켰지? 하지만 용서해줄게.’ 라는 말씀으로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라는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라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이것이 진정 하나님이 원했던 참 이스라엘이고 참 유대인이다.” 내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이것은 건방진 이야기입니다. 요한1서 2장 27절, 28절의 말씀처럼 ‘누가 너희를 가르치나 성령이 직접 너희를 가르치는데.’ 우리 자신이 조상 잘못 만나서 정신머리가 정상이 아니에요. 자기 밖에 몰라요. 그렇게 평생을 산다는 것을 미리 통보해 주시고 “네가 잘난 체 하지만 어떤 조건에 가면 음흉한 인간임을 들통 내는 사건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그럴 때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나를 찾으라. 원래부터 너는 그런 인간이었어. 이제야 네 바닥을 본 거야, 네 바닥을! 그 바닥 앞에서 ‘진짜 나는 죄인의 괴수다.’라는 고백을 통해서 십자가를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현실적으로 하나님 살아 있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라까지 만들고 원자탄까지 만든 그 유대인들, 어느 날 점차 우리가 닮아가고 쌍둥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권력을 가지고 하나님 권력이라고, 축복이라고 우겼던 우리들, 십자가 앞에서 그것이 숨겨진 우리의 타락의 모습인 것을 자인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