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강-롬3장 5-8(의와 불의)1212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3장 5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2페이지입니다.
로마서 3:5-8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성경 안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가 사도가 스스로 질문하고 답변하는 형식이 되니까 대체 사도가 무엇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변을 하는지 이 말씀 속에 들어가는 것조차 우리 입장에서는 참 힘겹습니다. 사도바울의 관심사와 현대인들의 관심사가 너무 다르니 우리가 생각하고 관심 갖고 있는 것들 가지고 성경본문 속에 들어갈 때 뭔가 충돌되는 것이 경계선처럼 우리 안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을 뚫어야 되는데,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뚫고 들어갈 때는 반드시 나에게 경제적인 이득이 있느냐를 고려하면서 뚫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여기 있다가 어디를 간다고 한다면 ‘가서 뭐 할 건데? 가면 나에게 무슨 이득이 있고 도움이 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서 가는 겁니다. 성경 말씀을 보자고 하거든요. 보면 무슨 이익이 있는데요? 교회 가자하는데 교회 가면 어떤 수익이 있는데요? 어린 애들 같으면 크리스마스에 빵 주면 빵 먹으로 가겠지요. 이 성경말씀을 어디에 써먹을까요? 취직하는데 써먹을까요? 아니면 장사하는데 써먹을까요? 아무 쓸데없는 논쟁, 우리에게 도움도 안 되는 이 논쟁에 우리가 발을 들어놓을 이유가 뭐가 있느냐는 겁니다. 전혀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잘못인 게 뭐냐,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줘야 된다고 자꾸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주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싫으면 말고.” 그렇게 나와요. 하나님은 통보를 하시는 분이지 우리보고 구걸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천국이 텅텅 비었으니 제발 와주세요.”라고 요청하시는 분이 아니고 “가만있어보자. 천국 갈 내 백성, 내 사람이 누구더라?” 하고 찾아서 집게로 뽑아서 집어넣는 식, 바구니에 집어넣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가라지는 오지 말라고 하고 자기 백성만 핀셋으로 집어넣듯이 하는데 그 핀셋 역할 하는 것이 복음이고 그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예수님의 행하신 것으로 우리는 아무 행한 것도 없이 천국에 산다는 말을 들을 때 그 다음의 우리의 태도는 이래야 돼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우리도 한 착함 하고 한 경건하고 있는데 우리의 착함과 경건은 인정도 못 받고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것을 물어야 돼요. 만약에 그것을 묻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대단히 수상한 사람입니다. 뭔가 자기 나름대로 한 것 가지고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입장에서 참 고마운 것은 그런 사람들 축출해서 그런 사람들 천국에 넣어주지 않는 방어막처럼 이 본문이 성경에 나와 있으니 교회 와서 잘 놀기는 놀았는데 로마서 3장 8절의 내용이 뭐냐고 할 때 “그딴 것에는 관심이 없어.”라고 했을 때에 이 말씀에 관심이 없다는 말은 결국 그 사람이 알고 있는 십자가도 건성으로 아는 십자가에 불과하고 그 사람이 아는 예수도 가짜 예수일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이 로마서가 쓰여졌다고 로마서 1장에 분명히 되어 있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사도바울의 내 입에서 나가는 이야기는 다 복음이라는 말이지요. 과연 복음에 대해서 관심 있는 사람은 내 말에 이끌려서 복음의 핵심에 도달하게 되어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로마서 1장 읽어보고 2장, 3장, 읽어보니까 여기서 들어가는 입구부터 뭔가 치고 박는 논쟁들이 있더라는 말이지요. 저쪽에서 화살을 쏘고 대포 쏘고 그러면 이쪽에서 다시 화살도 쏘고 대포도 쏘고, 이렇게 죽기 살기로 싸우는, 이것은 단순히 돈을 더 버나 덜 버나의 싸움이 아니고 혹은 내가 인기가 높은가 안 높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이것 해결 안 되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궁극적이고 제일 중요한 문제를 놓고 양편이 서로 양보 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 대목을 사도바울은 스스로 묻고 답하면서 우리에게 내 놓는 거예요.
대통령이 바뀐다, 이것은 변화잖아요.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뀐다, 겨울 되어보면 우리가 다 압니다. 좀 있으면 봄이 될 건데요. 눈 와봐야 다 녹을 것이고 나중에는 덥다고 짜증 낼 것이고. 세상은 그 자리에서 돌고 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변하지 않는 것, 우리가 바다 속에 있든지, 하늘 끝에 가든지, 우리가 몇 십 년을 살든지, 우리가 여기 살다 이민 간다 할지라도 전혀 구애받음이 없이 그리고 상관없이 구원받을 수 있는 그 원칙이 오늘 본문에 들어 있습니다. 뜸들이지 않고 직접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우리가 변화한다는 것은 우리가 본래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 있기에 그런 거예요.
우리의 본래의 자리, 진짜 나 자신을 제대로 아는 자리가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버리면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았느냐, 내가 어느 정도 지위에 올랐느냐 하는 것은 아무 문제꺼리가 되지 않습니다.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예수님, 날 어떤 기준에 맞추어서 심판할 것입니까?” 그게 제일 중요한 문제에요. 예수님이 갖고 있는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그 심판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기준만 안다면 우리는 진리를 안 것이 되고 진리를 안다면 우리는 그동안 미처 흘리지 못했던 눈물을 그 자리에서 감격스럽게 다 쏟아내도 괜찮아요.
전부를 알았으니까, 최종해답을 알았으니까. 더 이상 다른 해답은 없다는 그 사실을 알았으니까. 남겨진 미흡한 것, 숨겨놓은 어떤 다른 내용은 없다는데서 오는 그 환희, 감격, 그게 바로 우리 본래의 자리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십자가인데 십자가 앞에 우리가 설 때 비로소 우리는 모든 것의 내막을 알게 된 그 자리에 서 있는 겁니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면서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 내가 나 된 것이 내 노력이 아니고 내 수고가 아니었군요, 예수님께서 천국백성 만들기 위한 수고와 노력이 나를 그동안 아우라처럼 감싸면서 이곳까지 끌고 왔군요, 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타난 복음이고 이것은 우리가 만든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의,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선물 받을 자로 앞에 내세우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만든 의는 소용이 없는 것이고 우리는 맹탕, 그야말로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빈 깡통이고 천국에 들어갈 만한 어떤 것도 장만하지 못한 입장에서 백 프로 예수님의 혼자 다 이루신 하나님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장착되고 우리 속에 들어옴으로써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이 “너 천국에 들어와. 왜, 너는 나로 인하여 의인되었으니까.”라는 통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그런 최종지점까지 가야 안 되겠습니까?
그런 진리 모르고 철학박사니 법학박사니 하는 것, 대통령이니 하는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잠시 웃는다는 것은 곧 있으면 울어야 될 시점이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웃은 만큼 울 때가 올 거예요. 그러나 마지막 것은 기쁨의 눈물 외에는 뭐가 있겠어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종의 것은 이 십자가복음뿐입니다. 이 십자가복음만이 마지막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최종적인 것입니다. 제가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서로 결혼을 맹세한 사이에서 결혼반지가 백개 천개가 필요치 않고 단 한 개가 있어도 충분하잖아요. “내가 당신과 결혼하겠습니다.” 하고 발가락 손가락마다 다 끼우지 않고 단 한 개만 있어도 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교회가 부흥되고 사업이 잘되는 축복 말고, 병 낫는 것 말고 단 하나의 기적만 있으면 충분해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내가 아파도 구원받고 망해도 구원받고 거지도 구원받고 창녀 되어도 구원받고 깡패 되어도 구원받고 남 살인을 해도 구원받는다.” 하는 이 마지막 결혼 예물, 그것은 바로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중간에 걸러내는 작업들이 있어요.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 하는 이것을 걸러내야 돼요. 걸러내는 작업에서 사도바울은 복음 앞에서의 웅성거림, 십자가는 다 이루었는데 그 앞에서 십자가에 대한 잘못된 이해, 그 잘못된 이해로 인해서 되돌아가는 사람도 많은데 그렇게 되돌아갈 사람은 되돌아가도록 하기 위한 논쟁들을 끄집어 낸 거예요.
이 논쟁을 우회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평소에 품고 있는 우리 이야기고 우리가 궁금했던 이야기이니까 이것을 피하지 말고 그냥 속으로 들어가야 되고 돌파해야 돼요. 이 먹구름 속으로 들어가야 거치는 상태가 어떤 상태인줄을 알 것이 아닙니까? 상당히 힘든 작업이지만 저와 여러분이 이 먹구름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이제부터 좀 힘들겠지만……여기 5절부터 힘들어요.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이 말을 왜 집어넣었느냐, 우리는 여기부터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면 우리는 지키면 됩니다, 얼마나 간단한 논리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현실이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한 마디 하면 열 마디 백 마디 핑계들이 막 나온다는 거예요. “하나님, 그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잘못 조치한 겁니다.”이런 식으로 무슨 말들이 복음 앞에서 그토록 많은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나님이 뭘 주게 되면 그냥 소나 개나 고맙다고 받아먹잖아요. 인간은 되먹지 못해서 그렇지가 않아요. 뭔가 주게 되면 “나한테 이런 것을 주신 분은 앞으로 나오소. 나에게 하나님 당신이 점검 받고 평가받아야 돼.” 이러고 있는 거예요. 개나 소나 주게 되면 고맙습니다, 하고 범사에 감사하면 그만인데 “나한에 이런 것 준 자는 앞으로 나와! 무장해제 하고 나에게 평가받아. 당신이 뭘 주든지 내가 판단할거야.” 하나님을, 창조주를 피조물인 내가 판단하는 겁니다.
어려운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해야 되겠네요. 항아리 안에 당구공이 있다면 그 당구공은 항아리 밖으로 못 벗어납니다. 그래서 항아리 안에 당구공이 다섯 개가 있다, 하면 그 당구공 다섯 개는 가만있어요. 그것을 귀속이라 하는데 인간은 이렇게 하나님께 귀속된 존재가 아니고 포함되는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다섯 명이 있네.” 하면 그 소리 듣고 인간이 항아리 밖으로 기어 나옵니다. 기어 나와서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서 “나 빼놓고 네 명이 있네.” 하고 하나님처럼 자기가 평가하는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을 믿으면 인간이 믿는 그 하나님을 인간인 자기가 키를 더 키우고 몸무게를 키워서 그것을 내려다보면서 하나님은 여기 있고 인간인 나는 여기 있으니까 하나님이 인간인 나를 이렇게 했구나, 라고 들여다보는 제 삼의 인물을 본인이 만들어요. 예수님이 사랑을 하게 되면 “예수, 너는 뭔데?” 하고 예수보다 키를 더 키워서 높은 자리에 올라앉아서 예수를 자기가 평가한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부처보다 낫구먼.” 이런 식이에요. 인간이 신을 포함시켜서 자기 안에 신을 집어넣고 집어넣는 그것을 그대로 신에게 바칩니다.
그렇게 바쳐놓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신에게 바쳐진 내 모습을 신과 포함해서 나를 더 큰 영역으로, 더 큰 공간으로 키워서 그것을 나라고 여기고 그것을 또 들여다보고 있는 우리,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믿고 싶어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존재, 그게 인간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교회 오는 것은 착한 짓 하기 위해서 교회 오는 것이 아니고 나쁜 짓을 더 하기 위해서 교회 온다 했지요. 오늘 본문은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절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믿지 못하는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서 “너는 백날 믿는다고 해도 믿는 게 믿는 것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도대체 하나님 앞에 굴복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개나 소가 되기를 싫어합니다. 이사야 1장에 보면 나옵니다. 소도 자기 주인 아는데 인간은 자기 주인도 모른다고. 왜냐하면 “누구야, 내 주인이! 내 주인 되는 하나님은 나와 보라고 해.” 이래서 기어이 자기 주인마저 자기의 종으로서 전환시켜야 만족하는 우리, 그런 인간이 믿기는 뭘 믿어요.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센데 믿기는 뭘 믿습니까? 자기가 하나님을 가르치고 훈계하고, “하나님이 이렇게 나오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답지 못합니다.” 이런 식으로. “산타클로스가 어떻게 정문으로 와? 굴뚝으로 와야지.” 이런 식으로.
“이렇게 나오시면 하나님답지 못하지요. 이렇게 되어야 하나님다운 겁니다.” 기도라는 이름오로, 회개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자꾸 하나님 앞에 가르치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 많던 욥이 막상 진짜 하나님이 등장하니까 유구무언, 아무 말을 못해요. 그런데 우리는 말이 너무 많아요. 저부터 그렇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말이 많아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지 못하도록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백퍼센트 순수하게 하나님의 작품으로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하나님의 손길로만 새로운 피조물,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은 인간을 제작해서 하나님이 만든 천국에 넣어주기 위해서는 무엇을 떨쳐버려야 하느냐하면, 내가 내 구원에 기여하고 보탬된 것, 이런 것을 털어내는 작업이 병행해서 수행되는 겁니다.
어떤 물체가 빠른 속도로 내달리면 어설프게 걸치고 있는 것들이 다 떨어지잖아요. 우리를 그렇게 몰아서 다 털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라 하는 것은 죄를 지었기에 믿어도 자기가 판단해서 믿을 만 해서 믿는 거예요. 그런데 믿을 만 하다는 것이 반드시 전제가 깔려 있는데 그 전제가 뭐냐, 내 생계에 지장이 없는 한 믿겠다, 그리고 내 자존심을 훼손하지 않는 한 나는 하나님을 믿을 용의가 되어 있다, 그리고 내 가정과 국가의 역사와 전통을 손상시키지 않는 한, 이 가정의 풍속을 손상시키지 않는 조건이면 얼마든지 믿겠다, 이 세 가지.
세 가지 하면 첫 번째 두 번째 것은 다 잊어버려요. 내 생계에 지장이 없는 한 교회 나가주겠다, 첫 번째. 두 번째는 내 자존심까지 훼손하면서까지 예수 믿고 싶지 않다. 그런 하나님은 나는 싫다. 내 자존심을 챙겨주고 빛내준다면 하나님을 믿을 용의가 있다. 세 번째, 인간의 역사와 전통, 인간이 만든 이 찬란한 문명의 가치를 보존한다면 내가 믿어주겠다. 이것이 신앙입니까? 그 세 가지 신앙을 신앙이라고 우기는 인간은 오지 말라고 주께서 십자가라는 말뚝을 박아 놓았어요. “네가 피의 의미를 모르지? 아마 모를 거야.”
이 세 가지를 다 갖춘 민족이 있었습니다. 그 민족이 예수님당시에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유다민족이었습니다. 이 이스라엘나라가 우리의 선배들이에요. 이스라엘 민족이 이렇다는 것은 우리가 이렇다는 소리와 같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언급하면서 그들을 통해서 성경을 주셨는데 그게 창세기부터 로마서까지 계속 흘러내려온 거예요. 그 성경내용에 처음부터 나온 것이 인간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 에덴동산부터 나왔습니다. 에덴동산에 뭐가 있느냐, 에덴동산에는 강이 있었어요. 여러분이 아시지요? 에덴동산에 강이 있고 그 강에 의해서 온 세상이 생명으로 가득차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이미 이스라엘에게 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그들은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인간들의 이러한 자기주장을 비유로 하면 새라고 보고 싶어요. 새는 자기 맘대로 까불거리고 팔딱거리지요. 조금만 자기들에게 손해가 된다 싶으면 훌쩍 그 자리를 떠나 버리고 이익이 될 성 싶으면 금방 다시 몰려들지요. 나한테 뭐가 이익이냐 불리하냐,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새 말고 움직이지 못하는 바위라고 생각해 봅시다. 새라 하는 것은 자기 인생관을 자기 맘대로 피할 수도 있고 바꿀 수도 있고 새로 제작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문제가 뭐냐, 새가 백 마리가 있으면 백가지의 세계관이 튀어나와요. 천 마리가 있다면 사람마다 자기 세계관이 다 있어요. 나는 이것이 나에게 이익이다, 이런 것이 전부 다 달라요. ‘나는 누가 대통령이 되면 좋다.’ 이런 것, ‘나는 흑인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것이 각자 다 다르거든요. 새마다 각자 짹짹 거리면서 자기 소리밖에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세상을 보는 눈이 백이면 백 다 다릅니다. 그런데 바위라고 생각해 봅시다. 바위는 등신 같아요. 새가 날아와서 똥을 싸도 그냥 다 얻어맞아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새라고 만들어놓았는지 아니면 바위로 만들어놓았는지를 제가 묻는 겁니다. 에덴동산에 강이 있고 그 강으로 적셔서 온 세상에 생명이 있게 했다, 그러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그냥 뒤집어씌우는 것 같은 거예요. 5층 위에서 양동이로 물 쏟아 부으면 아래 있는 사람은 온통 다 젖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수에 의해서 다 뒤집어쓰면서 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혼자가 까불어대고 혼자서 자기 말 다 하고 “나는 이런 세상이 좋겠습니다.”하고 요구하거나 촉구하거나 할 자격이나 권리가 없어요. 우리는 뒤집어 쓴 인생이라니까요!
현대철학가들이 인간을 둘로 나눠요. 하나는 존재로 나누고 하나는 실존으로 나누는데 존재란 옴팍 뒤집어씌우는 식으로 살아가는 돌멩이 같은 것, 난로, 생각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사물, 영어로 하면 thing, 덩어리 있는 그대로, 그 있는 그것을 존재라고 하고 실존이란 있기는 있으되 내 임의로 내 시간을 만들고 내 역사를 만드는 것을 실존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에게만 해당되고 동물이나 나무, 바람이나 주전자 같은 것에는 해당이 안 된다는 겁니다. 돌멩이 같으면 역사가 흘러가면 가는대로 비바람을 그냥 다 맞지만 실존적 인간이 되어버리면 인간은 흘러간 것 역사에서 자기한테 좋은 것만 따 와서 그것으로 자기위주의 새로운 사슬을 새로 만들어내요.
“나는 세상을 이렇게 살아왔다.” 이것이 인간마다 다 들어 있기에 인간마다 세상을 경험했던 그 의미가 다 달라요. 이것이 바로 실존적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실존대로 살자는 거예요. 그런데 철학가들은 그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합니다. 성경에 보면 그것이 바로 문제라는 거예요. 내 나름대로의 세상이 어디 있어요? 그렇게 되면 신이고 부처고 세상 모든 것은 나의 실존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되어버려요. 그 말은 내가 나에게 우상이고 나는 나를 섬긴다는 그 주장을 정당화 하면서 하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복음을 주고 천국 보내려 하거든 이 존재가 아닌 실존에 맞춰서 납득이 되도록 나에게 설명하라.” 하는 그 주장들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들인 우리를 건지려면 우리와 협의해야 되고 우리의 동의를 구해야 하나님과 우리사이가 좋은 관계가 된다는 겁니다. 마치 이웃 간에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면 좋은 관계가 되듯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지 말고 우리 의견을 들어서 참조해서 “아하, 그러면 내가 고려하지.” 이렇게 서로 납득이 되는 공통분모를 만들어서 하면 천국이 좋은 세상이 된다는 거예요.
그런 주장에서 나오는 것이 뭐냐, 하나님이 의롭다는 것은 일방적으로 심판한다는 것, 하나님이 심판한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달라는 식으로 지금 사도바울을 공격하고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습니까? 천국 가는 것은 인간의 행함의 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을 앞장세워서 앞장세우신 그 예수라는 분의 행하심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빼는 식으로 우리를 천국에 넣어준다고 이야기할 때 그 복음을 방해하는 반대파들이 뭐라고 하느냐하면, “그렇다면 우리의 실존, 우리의 장래를 위해서 행하는 모든 침착함과 경건함과 착함, 이 모든 가치는 찾을 길이 없지 아니한가? 따라서 인간도 위하고 하나님도 위하는 면을 찾아보자.”하는 거예요.
“만약 사도바울 당신같이 이야기해버리면 어떤 논리의 모순이 있느냐하면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버리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진짜 유일하게 영원히 남아 있는 의라면 우리는 점점 더 죄를 지어줘야만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죄를 지어줄 때 죄 지으면 또 용서가 날아오고 죄 지으면 또 용서가 날아오니까 그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가치를 더 높이기 위해서 우리는 더욱 더 죄를 짓는 수밖에 없지 아니한가? 그러니까 사도바울 당신이 하는 이 모든 것이 엉터리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논리와 이론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복음을 믿을 수가 없다.” 하는 겁니다. “우리는 실존하는데 왜 우리를 존재, 돌멩이 같이 아무것도 못하는 병신 같은 것으로 모독하면서 이야기하는가?”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들의 주장은 이겁니다. 하나님의 천국 가는 그 의로움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용서하심으로 하지 말고 우리 인간이 그 만큼 기여했다, 보탰다, 하나님도 일 했지만 우리도 거기에 반응해서 이정도 했으니까 우리 행함도 보태서 천국 가는 식으로 할 때 인간의 실존의 가치도 살아 있으니까 우리가 기분 나쁘지 않은 방식으로 기쁘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 그런 제안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에요? 제가 처음에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게 되면 인간은 가만있는 존재가 아니고 건방지게 하나님이 일을 해 놓은 것을 받아놓고는 거기다가 자기 일을 가지고 그것을 덮쳐버린다고 했지요.
이게 원래 에덴동산에 만들었던 그 인간 아닙니다. 그 인간 아니니까 쉽게 말해서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은 인간이 아니에요. 에덴동산에 발원한 그 생명수를 받는 그 인간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은 방향성이 있어요. 동산 중심에서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방향성이 있습니다. 에스겔 4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성전의 설계도를 제시하는데 그 새로운 성전의 특징이 뭐냐, 문지방에서 물이 나온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 지구상 200여 나라 70억 인구가운데 예배당 중에서 물 나오는 예배당 봤습니까? 물이 안 나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새 성전이라 하는 것은 거기서 물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우리교회도 물탱크 만들어서 가끔 주일에 터뜨려 볼까요? 새로운 성전은 반드시 이 땅에서 수모당하는 성전의 모습을 띠고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성전 만들라고 하는 것은 깨지기 위한 성전이에요. 깨지는 성전, 그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 깨질 때 비로소 “너희들의 세상의 구조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와도 버림받는 존재로 만들어버릴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세상”이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본인이 악함 속에 포함되어 있으면서 그 악함 속에 포함된 인간이 그 포함된 바깥에 나와서 “어이, 저건 선하고 저건 악하다.”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그 속에 빠져나와봐야 그것은 악함의 늘어짐, 악함의 확장에 불과하기에 그래요. 껌 씹어서 잡아당겨 보세요. 길게 늘어지잖아요. 우리가 세상 밖에 나가서 세상 바라본다 해도 그 사람은 세상 밖에 나간 것이 아니고 끈적끈적하게 자기 악함을 그대로 유지한 채 고무줄처럼 그냥 바깥으로 늘어난 것뿐이에요. 신학을 하든지 뭘 하든지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뭐냐, 내 생계에 지장 없는 한 예수 믿겠다, 내 자존심을 안 건드린다면 믿겠다, 내 역사와 전통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 믿겠다, 이것 아닙니까? 인간은 돌멩이가 아니고 실존이니까. 끈적끈적해요.
인간은 계속 끈적끈적 거려요. “하나님을 믿기는 믿는데요, 내가 지금 생활이 어려워서…….” 자꾸 끈적댄다 그 말이죠. 누가 자꾸 잡아당겨요. 역사와 전통이 잡아당기고 자기자존심이 잡아당기고, 밥 못 먹을까 싶은 것이 잡아당기고, 죽는 것이 두려워서 잡아당기는 거예요. 에덴동산에서 발원한 물은 선악과 생명나무가 온전한데서 흘러나온 물이었다면 마지막의 물은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의 보좌에서, 버림받은 자의 그 최종자리에서 나온 그 물이 우리를 살려냅니다.
우리는 새가 될 수 없고 우리는 그냥 바위입니다. 그 생명수에 뒤집어씌우면 그것이 영생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절부터 보면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하나님이 누군가를 앞장세운 분이 이 땅에 오셨는데 그 오신 분이 처참한 죽음이라는 결과로 이 땅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참한 양, 깨끗한 양이 아니고 어린양, 일찍 죽음당한 어린양, 죽임당한 어린양이 비로소 깨지면서, 주사약이 들어 있는 작은 약병이 깨져야 그 안에 있는 주사약의 효과를 볼 수 있잖아요, 그 연약한 어린양이 깨질 때 그 안에 담겨 있던 생명이 우리 생명으로 주입되는 겁니다.
바로 그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했어요. 그 방법 없는 다른 신은 신이 아니고 가짜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거예요. 쓴 잔, 깨어짐, 그것을 놓치면 다른 길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 거예요. 그 깨어진 버림받은 분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생 지금 다른 길로 새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꼴 보기 싫다고, 나가라고 그 분을 들어낸 겁니다. 들어내니까 사도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다시 이 안에 집어넣은 거예요. 사람들은 그걸 또 들어내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복음을 왜 복음이라고 우기느냐, 하고 외부로 들어내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 날마다 그렇게 들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날마다 들어내요. 내 생계에 도움이 안 되고 내 자존심을 세워주지도 못하고 내 찬란한 역사와 전통, 내 수고와 노력을 인정치 않는 하나님을 내가 미쳤다고 믿나, 내가 왜 믿어, 보탬도 안 되는데, 나는 돌멩이가 아니야, 나는 실존하는 거야, 나는 나의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내 역사의 주인공, 내 역사의 주체를 나는 포기하기 싫어, 이것이 계속해서 끈적거리는 거예요. 우리의 고집입니다. 껌을 씹어도 아주 심하게 씹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또다시 예수님을 바깥으로 집어던지는, 추운데다 갖다 버리는 작용들이 계속해서 우리 속에서 올라오는 거예요. 듣기 싫다고! 처음에 성전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성전은 하나님의 계시다, 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해했어요.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까 이제 복 받고 영생 얻는다고. 하지만 그 성전이 사라졌습니다. 그 성전이 사라질 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성전, 물 나오는 성전, 에덴동산과 같은 똑같은 성전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오늘 본문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에 도달했습니다.
새로운 죽음을 우리를 가지고 만들어내는 겁니다. 우리는 교회 올 때 더 멋있게 살려고 오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짐작도 못하고 예상도 못한,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죽음을 우리를 재료로 해서 만들어내고자 하는 겁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요 11:25,26)는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이것은 평소에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노렸던 그 목표점과는 전혀 다른 예상 밖의 엄청난 축복이죠. 내가 목표를 잡아서 “내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 하겠습니다.”라는 생각들…….
제가 젊었을 때 교회 교인들 결혼식에 가게 되면 목사님들이 주례를 하거든요. 늘 빠지지 않는 멘트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이 부부가 하나님 안에서 잘 맺어져서 국가와 민족과 교회를 위해서 큰 기둥 같은 일군이 되기를 바랍니다.” 했어요. 그래서 제가 누굴 만나서 그랬어요. “기둥 확 뽑아라. 내가 자네에게 부탁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제발 성과를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 ‘나, 이런 인간입니다.’ 하고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제발 마음을 좀 낮춰라. ‘아무것도 나는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것밖에 못합니다.’ 하는 식, 건방떨지 말고 그 정도로 좀 살아다오.” 그냥 그런 부탁이죠 뭐.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죽음으로 만들어내는 이유는 우리 힘으로 생명나무를 따먹지 못하게 한 적극적인 조치의 일환이에요. 우리 능력, 내가 이것 때문에 예수 믿었습니다, 그 소리를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따라서 나는 이것 때문에 예수 믿었습니다, 하는 것은 백퍼센트 가짜입니다. 그것은 전부 다 가짜에요. 이것 때문에 예수 믿었습니다, 하는 것은 아직도 뭔가 노림수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나는 예수를 믿기 싫어했고 안 믿으려고 작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위층에서 바가지가지고 피를 부어버리니까 옴팍 뒤집어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니어도 남들이 먼저 눈치 채서 “너 예수 믿지? 너 예수쟁이지?” 하는 이것이 하나의 운명이 되고 말았어요.
나는 실존이 아니었으며 하나의 존재에 불과했어요. 에덴동산은 방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위에서 아래로, 라는 방향성이에요. 그 방향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이스라엘 속에 만들라고 했고 그 만들어진 성전에서, 성전의 동쪽에서 물이 나와요. 동쪽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북쪽으로 가도 동쪽으로 다시 모아지고, 동쪽에서 나온 그 생명수가……에스겔서 47장에 잘 나옵니다. 처음에는 물이 발목에 차고 그 다음에는 무릎에, 그 다음에는 허리까지 차고 그 다음에는 물을 건너서 내가 가지를 못해요.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겔 47:4,5)
이것은 완전히 귀속된 거예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 바깥으로 나가지를 못해요. 물이 완전히 내가 건너지 못할 엄청난 물로서 우리에게 채워졌습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오는 어린양의 보좌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온 물입니다. 한 번 나오고 말거나 혹은 단수조치 된다든지 그런 것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나와서 생명수 강가에서 다시 에덴처럼, 그것보다 더 화려하고 더 웅장하게 열두 생명나무를 맺히게 하는 거예요. 천국에 가서 “저 나무는 내 힘으로 따먹었다.” 이런 소리 할 필요도 없고 하지도 않을 거예요. 하지도 않을 사람만 미리 뽑아서 구원하시니까.
완전히 생명나무자체가 모든 공로를 예수님에게만 돌리는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서 우리를 새로운 죽음 속에 몰아넣습니다. 나의 목숨이 끊어지는 그것 말고 새로운 죽음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을 접속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돌멩이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나의 자존심의 죽음, 나는 더 생계를 유지해도 2013년이 되어도 별 볼일 없다, 그래서 우리는 2013년도에도 구호를 외쳐야 돼요. “2013년도에는 올해처럼 아무것도 아니다. 되어봐야 돌멩이다!” 이게 구호가 되어야 돼요. 역사와 전통이라는 것도 다람쥐 체 바퀴 도는 것이고. 우리의 역사와 전통이라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오줌 누고 똥 누는 것, 밥 먹고 잠자는 것, 그것이 우리의 역사와 전통이에요. 나머지는 그냥 상상의 산물일 뿐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흔히들 말합니다. 교회 역사가 2천년이라고, 2천년 역사가 아주 찬란하다고. 그 허접스러운 것들 다 쓸어버리고 거기에 십자가만 하나 꼽으면 돼요. 2천년 기독교 역사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교회 몇 년 역사 그것 확 치워버리고 누가 다녀갔든지 십자가만 계속 꽂혀 있어야 돼요. 그 십자가에서 생명수가 계속 흐르면 그걸로 족한 거예요. 생명수 먹고 사는 거예요. 우리는 병아리입니다. 물먹고 삐약삐약, 외치고 물먹고 또 외치고, 그것뿐입니다. 닭 되었다고 “나는 이제 물 안 먹고 그냥 이것저것 주워 먹을 거야.” 그런 닭은 죽습니다.
새로운 죽음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는가? 그것을 죽음의 효과라고 하는 겁니다. 본문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롬 3:6,7) 하는 이 이야기는 뭐냐,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십자가 지게 만들었다고 해서 가룟유다의 기여도를 천국에서 고려해서 보너스를 줘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가룟유다보고 “내가 다른 짓은 몰라도 네가 십자가에 예수 못 박도록 고소한 것은 참 잘했어.” 이렇게 칭찬 받을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인간이 어느 정도 기여하면 천국에서 어느 정도 보상받는다는 것을 아예 차단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인간이 잘남을 모아놓으면 그것이 역사가 되고 전통이 돼요. 그 어설픈 상차림을 전부 다 치워버리고 십자가를 꽂아놓으면 우리가 상상하는 세계 말고 우리로 하여금 그런 짓 자체가 하나님이 새로운 죽음을 만드는 하나의 재료로서 우리를 집어넣는 작업으로서 우리를 이 역사 속에 살게 하는 겁니다.
“너는 망상을 떨고 있고 허상을 만드는데 그 허구와 허상들이 이 새로운 죽음의 재료가 된다.”는 겁니다. 다 재료로 집어넣으면 거기서 뭐가 기다리는가, 예수님 죽음의 일방적인 사랑이 기다립니다.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대상화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나 여기 있고 저기에 사랑의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그냥 친구사이고 아는 사이죠. 그쪽에서 가까이 오게 되면 “가까이 오지 마세요.” 하고 물러나지요. 왜, 간격이 너무 좁으니까. 좁아지게 되면 감당이 안돼요. 내 것을 지킬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남자 쪽에서 다가서면 “어, 왜 이러세요?” 하고 물러나지요. 좀 다가서게 되면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고 또 물러나요.
이것은 “당신은 어디까지나 나의 대상으로 남고 판단은 내가 할 것이다.”로 남아 있는 관계, 이것은 사랑의 관계가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저쪽에 잡아먹히는 거예요. 잡아먹히면 어느새 우리는, 그 사랑에 잡아먹히면 그 사랑의 우물 안에 우리는 바가지처럼 동동 떠 있는 상태가 됩니다. 춘향전에서 이 도령이 춘향이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요. “어화둥둥 내 사랑,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저리 보아도 내 사랑…….” 앞태를 봐도 내 사랑이고 뒷 태를 봐도 내 사랑이고, 그 장면을 공간으로 생각하게 되면 지금 사랑이라는 그 속에 바가지처럼 춘향이가 떠 있는 상태, 그게 예수안의 상태입니다.
“앞태를 보자, 뒤태를 보자.” 앞뒤좌우 어디를 봐도 항상 사랑 안에,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주신 사랑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귀려고 하지 말고 아예 삼키움을 당해버리면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짓을 해도 법으로부터 해방 된 거예요. 어떤 법으로부터도 해방된, 그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오는 그것은 일방적으로 양동이로 퍼주듯이 일방적으로 생명수를 퍼주는 그 관계, 그것을 함축해서 한마디로 이야기한 것이 뭐냐, 십자가에서 내 뱉는 하나님의 의라는 기쁜 소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사랑 안에 있으면서도 꾸물대면서 무슨 불만이 이러쿵저러쿵 많은지, 이제 다가오는 해에는 이런 불만보다도 사랑의 무중력 상태에서 둥둥 떠다니는 재미, 즐거움으로 어떻게 해서 법에서 해방되었는지, 무엇으로부터 우리가 사랑받고 있는지 그 재미를 느끼고 그 이유를 아는 한해가 되게 하옵소서. 에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