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롬2장 1-4(판단과 회개)1211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2장 1-4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0페이지입니다.
로마서 2:1-4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예수님의피로 용서를 받아서 천국 간다, 기독교에 대해서 모든 것을 뭉쳐버리면 그것 하나 나온다고 우리가 알고들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방금 읽었던 로마서 2장 1절에서 4절까지의 내용은 불필요한 것으로 보이기 쉽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시면 구원받습니다, 이럴 때는 상당히 우호적이고 우리를 무지 예뻐하고 사랑한다는 느낌을 주는데 오늘 본문말씀 로마서 2장 1절에서 4절의 말씀,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오히려 네가 판단 받아서 네가 지옥가고 네가 멸망 받는다.’는 과격한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가 예수 믿고 싶어도 뭔가 우리로 하여금 삐지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가 있지요.
한 번 믿어보려고 하는데, 교회 와서 천국 가보자고 하는데, 하나님을 좋아할 것 같은데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해 버리면 기분 나빠서라도 ‘내가 그럼 하나님 안 믿는 수가 있어요.’ 하는 식으로 마음속에서 울분 같은 것이 솟구쳐 올라오는 겁니다. 십자가 피로서 용서받아서 천국 갑니다, 얼마나 우호적입니까, 얼마나 다정다감해요. 그런데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네가 오히려 판단 받아서 지옥 간다. 그래서 멸망당하고 저주받는다.’ 이것은 우리를 상당히 기분 상하게 만드는, 교회 오려고 해도 발길을 다시 끊게 만드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지요.
이단과 복음과의 차이점은 이단은 어쨌든 간에 사람들을 믿게 하고자 하는 겁니다. 사람들을 납득시켜서 어쨌거나 한 사람이라도 더 건지려고, 한 사람이라도 더 천국가게 한답시고 애쓰는 반면에 복음은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이렇게 나와요. 그래서 한국교회가 이단이라는 말을 해도 과한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하는 그 말씀처럼 ‘예수님 사랑 안 해요? 안하면 말고!’ 이렇게 나오는 교회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을 사랑 안하지요? 교회고 뭐고 다 깨고 헤어집시다. 모여 봐야 소용도 없으니 각자 자기 집으로 가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나오는 교회를 보셨습니까?
그런 교회 어디 있느냐는 것이 궁금해요? 궁금하면 500원! 사도바울은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에요. 절대로 사람을 꾀이려고 그리고 종교단체를 만들려고, 자기가 교주 노릇 하려고, 많이 끌어 모아서 ‘하나님, 저 많이 끌어 모았습니다.’ 그것 자랑 질 하려고 그렇게 움직이는 분이 아니에요. 사도바울뿐만 아니고 모든 사도가 다 그래요. 성령 임한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어디서 문제가 되는가, 이게 문제가 돼요. 예수님의 피로 우리가 용서 받는다고 하니까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어디로 팍 돌아서느냐 하면, 예수님의 피를 매일같이 기념하게 되면 우리는 구원받는 사람 맞다, 이런 쪽으로 나가는 거예요. 예수님의 성만찬이라든지 이런 것을 반복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고방식은 성도의 바른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예수님의 희생을 이용하려는 심보에 지나지 않아요. ‘그거 괜찮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용서한다? 그렇다면 그것마저 내 소유로 만들면 나는 구원받을 수 있겠네.’ 그렇게들 생각하는 겁니다. 성경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런 인간들의 노림수가 어떻게 전환되어 왔는가를 보여줘요. 피를 발라서 구원받는다는 그 모세언약의 율법에 의한 제의, 제사라는 것이 이스라엘 후대에 들어가게 되면 그 피를 사회적 불의에서 흘려진 피로 의미가 전환됩니다.
제사를 매주, 매 절기마다 드렸는데 제사를 드린 그들이 사회에 나가서 하는 꼬락서니하고는 오히려 사회에서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고아와 과부를 무시하고 그들의 돈을 빼먹는 그들에 의해서 억울하게 사기를 당했던 그 눈물과 피, 그 피가 어린양 바치는 그 형식적인 피를 대체하는 겁니다. 사람을 꼭 칼로 죽여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죽이는 것도 죽이는 것도 말로 하는 것도 죽이는 것이거든요. ‘너희들이 그렇게 사람들을 죽여서 너희 속에 피가 가득한데 내가 그 피 묻은 손으로 거룩한 성전에 와서 주여, 거룩한 분이여, 라고 한다고 해서 내가 그 기도를 듣겠느냐.’라는 것이 이사야 1장의 이야기입니다.
‘너희들은 피 덕 보려고 성전에서 제사 하지? 하지만 너희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 온 세상에 그 억울한 피, 사회적으로 불의를 당해서 생기는 그 피를 유발시켜놓고 그 피는 무시하고 형식적으로 어린양의 피를 발랐다고 해서 용서받는다는 말인가?’라고 이사야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계적으로, 형식적으로 어떤 형식을 그대로 되풀이하면 거기서 고정적인 신의 은총과 능력이 나에게 와서 나를 구원할 것인가, 이렇게 하나님의 희생과 그 피를 이용할 생각만 잔뜩 갖고 있어요. 이것저것도 가지지만 그 중에 하나 예수의 피도 가져서 모자람이 없이 나는 구원받겠다는 그러한 시도, 그런 시도가 우리 선배격인 이스라엘백성들이 다 창안했고 이미 다 해 본거예요.
‘성전의 어린양으로 제사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우리가 이 약속대로 믿으니 하나님도 약속대로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는 계약서에 도장 찍었습니다. 둘 다 약속 지키기! 안 키기기 없기!’라는 식으로 그들은 제사제도를 마치 자기들을 구원하는 유일한방식으로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그 방식을 피해가는 하나님인줄 상상도 못했지요. 하나님은 제사 드리는 그 거룩한 현장에 계시지 아니하고 인간들의 욕심과 탐욕이 자아냈던 그 억울한 자리에 우리 주님이 계실 때에 예레미야는 손들고 이야기합니다.
요새 말로 하면 예레미야가 큰 예배당 문 앞에 서서 오는 사람한테 마다 손을 가로지르면서 외칩니다. “돌아가세요. 이곳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아닙니다. 누가 이곳을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라고 사기를 칩니까? 경건을 빙자하는 이 사기꾼들에 속아 넘어가지 마시고 여러분들이 일하는 가정이나 사회나 직장에서 여러분의 욕망과 욕심에 의해서 억울하게 피해보는 사람을 찾아보세요. 거기 그 억울한 울부짖음이 곧 하나님의 울부짖음입니다.”라고 예레미야는 소리쳤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게 되면 “처음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까? 간편하게 구원의 효과 주는 확실한 것, 약을 하나 털어먹으면 위장병이 낫는 것처럼 확실하게 구원 주는 것 같은데 왜 처음 약속과 다릅니까? 왜 다른 소리 하십니까? 그러면 고아와 과부에게 착한 일을 하는 그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예수의 피를 믿는 그것은 엉터리이고 피고 뭐고 다 취소하고 행함으로 착한 일 하기, 그렇게 구원받습니까?”라는 식으로 나올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그겁니다. 예수 피, 피 하지 말고 네가 지금 살아온 행적과 지금 살아가고 있는 그 현장을 경유해서 예수님의 피로 가라, 그 말입니다. 교회 나와서 하는 짓거리, 사회 나가서 하는 짓거리, 집안에서 하는 짓거리, 그런 것을 경유해서, 통과해서 가시라는 말입니다. 동구청 옆에 재래시장이 하나 있어요. 평화시장인가. 어느 날 도넛을 하나 사먹고 싶어서 가는데 입구에서 팔지 않고 그 중앙 통로 잡채를 비롯해서 이것저것 다 파는 그 통로를 다 경유해서 그 끝에서 팔고 있어요. 입구에서 팔면 달랑 사서 그냥 집에 가면 되는데 온 시장 구경을 다 하게 만들고 그 끝에서 만두와 도넛을 파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가 시장입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저 시장 끄트머리에 내 인생이 이렇다는 것을 다 까발려지면서 저 끝에 예수님의 피가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구약에 있고 난 뒤에 신약의 십자가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 너부터 가지마. 나부터 갈게.” 이것이 없어요. “어이, 모세! 내가 직접 가지.” 그것이 아닙니다. 노아 거쳐야 되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게 평화재래시장이라, 모든 것을 다 거치고 거치고, 어린양 잡고 제사 드리고 안식일 지키고 십일조 하고 그 모든 것을 백날 해도 소용없어, 다 그것이 소용이 없고 끝에 가서 십자가 피 흘림,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얍삽한 이방인들은 ‘이거 뭐 한 번 지난 것인데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지.’ 하고 구약성경은 팽개치고 ‘아이고, 그 바보들! 메시아 죽인 사람들, 우리는 똑똑하지. 우리는 예수님 안 죽일 거야.’ 이렇게 자기 맘대로 자기 분수도 모르고 아무런 경과도 없이 그냥 우리는 예수님 믿습니다, 하고 예수 믿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입에 알약 털어 넣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고혈압 약 먹고 혈압 낮추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너무 얍삽해. 구약의 경과를 겪게 되면 거기에 뭐가 나오는가, 처음에는 낙원이 있었는데 그 낙원이 깨졌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이 정말 구약성경이 존재하는 이유를 안다면 ‘아, 지금 내가 사는 동네가 낙원이 아니구나.’ 이게 사람 살만한 곳이 못돼요. 처음에 하나님이 낙원을 만들었고 그 다음에 사람을 만들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에덴동산과 사람은 서로 부합되게 되어 있어요. 조건만 맞으면 낙원은 낙원입니다. 낙원을 깨뜨리지 않는 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17절에 보면 그것을 깨뜨렸잖아요. 창세기 2장에서 분명히 약속을 했다고요. ‘다른 것은 다 먹는데 선악을 아는 나무는 먹지 말라.’고 했단 말이지요.
우리는 십자가를 알기 전에 그것을 경과해야 돼요. 그것을 경유하고 와야 돼요. 그러면 우리가 흔히 예수 믿겠다, 하는 이 세상은 결국 그 낙원이 깨어진 상태에서 만들어진 그 ‘나’라는 인간도 결코 사람답지 않으면서 사람이라고 우기는 심보를 가지고 감히 예수님의 피를 언급하고 믿고자 덤벼든다 그 말입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이단은 사람을 꾀이는데 주안점이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을 받을 만합니다. 당신은 구원받을 자격이 있어요. 이것과 이것을 아시면 당신은 구원받습니다.” 사람을 꾀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진짜 복음은 “꺼져라! 가라! 어디서 감히 너 같은 인간이 예수 피를 믿어. 가, 가, 가! 노아방주는 여덟 명 밖에 없었어. 다른 사람 안와도 아무 상관없었어. 오지 마, 오지 마, 믿지 마!” “왜요?” “너는 에덴동산을 깨뜨렸잖아. 하나님이 주신 것을 깨뜨렸잖아. 깨뜨릴 때 에덴동산만 무너진 것이 아니고 너라는 본래 인간성도 같이 무너진 것”이에요. 정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에요. 정상적인 인간도 아니면서 어딜 구원을 넘봐. “하나님, 저 어때요?” “어떻기는 뭘, 너는 저주 받아야지 뭘 어때?”
“제 판단과 제 해석은 어떻습니까?” “어떻기는? 엉터리지.” “왜요?” “세상자체가 엉터리니까.” 우리는 세상의 산물이고 세상이 자아낸 것이거든요. 옛날 중국유교에 보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부자관계가 아니고 군신관계에요. 유교에 정통하고 신봉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따르면 나이 30이 되도록 아버지를 못 만납니다. 아버지를 만나기전에 외삼촌 집에서 교육을 받아야 돼요. 왜냐, 아버지의 자리는 사적인 자리가 아니라 공적인 자리가 되어서 아버지를 알현하려면 나이 30이 될 때까지 아버지를 알현할 만한, 아버지를 신으로 대할만한 교육을 충분히 받고 난 뒤에 아버지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중국에서는 가족관계보다 더 우선시 되는 것이 국가관계에요. 가족이라 하는 것은 국가를 이루기 위한 근간이 되고 장차 국가에 가족이 무엇을 이바지 할 것이냐를 먼저 가족 안에서 계산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 돌아가시면 3년 상 치르죠. 아버지는 죽은 조상을 미리 당겨서 만나는 것이 아버지에요. 그래서 아버지가 기분이 좋다 할 때는 자식도 아버지와 같이 식사를 하지만 아버지 몸이 아프다고 식사를 못하면 자식도 식사를 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 아버지의 자리가 한 개인으로서의 아버지인 가장이 아닙니다.
국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대대로 조상과 연속성을 갖고 있어야 돼요. 그리고 모든 가정은 국가의 질서를 이루는 뿌리로서 이미 사고방식 자체가 군신관계로서의 연습을 가정마다 해야 되는 겁니다. 우리 어릴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아버지가 숟가락을 들지도 않았는데 어딜 감히 숟가락을 들어요. 이것은 다정다감한 아버지와 아들사이가 아닙니다. 하나의 직장상사와 종의 관계에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본문에 나오는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라는 이 말은 인간의 판단이라는 것이 대체 어디서 흘러나오는 판단으로 우리가 판단하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국가적인 안녕과 번영을 위해서 사적인 가정도 자기 권리나 자기주장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것, 그런 판단, 그런 진리체제를 중국에서는 교육 받아왔고 유교의 그 영향권속에 대만, 한국, 일본, 베트남, 캄보디아 같은 나라들이 다 들어 있는 겁니다. 거기서 안중근 의사도 나오는 거예요. 윤봉길 의사도 다 거기서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럴 때 자기 딴에는 판단을 잘했다고 여기지만 그 판단은 자기시대에서나 써먹고 동의할 판단에 지나지 않아요. 인간은 내면적인 불안감이 있어요.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것이 있습니다.
장래가 어떻게 될지, 이런 불안이 있는데 쉽게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가정이 우선이냐, 사회가 우선이냐, 하는 그 숙제가 평생 살아가면서 충돌을 야기 시킵니다. 가족의 의리가 중요 하냐, 아니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가족의 욕심 그리고 나의 욕심도 중도 포기를 해야 되느냐? 뭔가 깨달았다든지 신앙이라는 것은 먼지 털듯이 다 털어보면 남는 것은 내 가족위주냐 아니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우리나라 위주냐, 나라가 없으면 우리는 전쟁 중에 포로 잡히는 것 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나라도 필요한데 나라 잘되기 위해서 법을 정하면 우리는 그 나라의 판단을 우선시해서 나의 개인적인 고집도 포기를 해야 되는데 마음으로 당기는 것은 내 가족위주고 내 새끼 위주인데요. 속여서라도 군대에서 빠지고 싶고 속여서라도 외국학교에 보내고 싶은 것이 부모의 심정인데.
그러니까 교회를 다니고 절에 다니는 것은 먼지 털듯이 다 털어보면 전부 다 낭비입니다. 헌금하는 것도 낭비고 가만 따지고 보면, 냉철하게 객관적으로 보게 되면 가정을 위해서 내가 있는지 아니면 나라를 위해서 내가 있는지 그 싸움이고 충돌이고 그 심적인 갈등이 실제 세상이며 거기서 내가 어떤 판단을 해야 나라도 잘되고 덩달아 가문의 영광도 빛내는가, 그 판단만 달랑 남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판단과 해석과 평가를 쉬지 않고 매일같이 하는 거예요. 나라를 위하자니 가정이 울고 가정의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려 하니 국가가 나를 부르는구나!
전쟁터에 나가는 계백장군처럼 전쟁에 나가기 전에 자기마누라와 자식들을 다 베면서 내가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할 때 그것이 얼마나 그 시대, 백제 황산벌 시대에 옳은 판단이었고 진리적인 판단이었습니까? 국가라는 명분, 대의명분, 남을 이롭게 한다는 그 명분, 그것을 위해서 과감하게 사사로운 자기의 정마저 자폭하듯 포기할 수 있는 그 대의명분, 우리나라 독립투사들처럼,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태극기 들고 운동장 돈 그 선수처럼. 그걸 두고 사람들은 박수를 보내면서 영웅이다, 훌륭하다, 옳은 판단이다, 아마 주님도 저런 모습일거야, 우리 예수님도 저렇게 희생했다,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잖아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겁니다. 사람의 모든 희생이라 하는 것은 미래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미리 자기 몸을 하나 던져 보는 겁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도박판이에요. 도박판에서는 좋은 패를 많이 가지고 있어야 돼요. 그래서 인도종교에 보면 좋은 패를 많이 갖고 있다가 그것을 다 써먹게 되면 죽어서는 질 낮은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거예요. 불교에서는 업보라 하는데 살아 있을 때 좋은 패를 많이 갖고 있어야 돼요. 피사리 같은 것 말고 홍단이나 청단 같은 것, 광, 단풍같이 좋은 패를 많이 갖고 있으면 나중에 죽어서도 질 좋은 인간으로 환생이 된다는 겁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교회 왔다고 달라질 리가 있습니까? 같은 인간인데, 같은 인간인데! 교회 왜 왔는데요? 좋은 패를 가져서 자기행운과 바꾸기 위해서 바꾸기 위해서 오잖아요. 이 판단이 더러운 판단이 된다는 겁니다. 국가를 위해서 자기 하나 희생하는 그것이 왜 더럽고 질 떨어지는 판단이 되느냐 하면 구약을 경유하게 되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기 때문에 이미 낙원자체가 공사장 지붕 무너지듯이 무너졌어요. 에덴동산 자체가 이미 무너져서 폐허만 있는 죄 많은 세상에서 진정 의롭다는 것이 어떤 자태로 나오느냐 하는 겁니다.
죄가 없는 상태에서 죄지을까, 말까 하는 중립지역에서, 선과 악이라는 중립지대에서 그렇게 한다면 인간 말이 맞아요. 나라를 위해서 몸 바치면 거룩한 일이고 남에게 사기를 치면 나쁜 일이고, 그 말이 맞아요. 하지만 이미 인간세상이 이미 에덴동산이 무너진 죄악 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의는 어떤 방식으로 나오느냐 하는 겁니다. 그럴 때 기존에 안 망하려고 버티는 인간들의 판단에 의해서 오히려 죄인으로 몰리고, 죄인으로 다루어지고, 취급받고, 공격받는 모습으로 참된 의가 솟구쳐 올라온다는 겁니다.
이런 복잡한 이야기는 간단히 해서 무슨 이야기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이 그냥 감나무에서 감 열리면 따먹는 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무슨 내용이 확정되어 있느냐하면, 마지막 심판 날이 확정되어 있습니다. 심판 날이 가까이 왔는데 어떻게 할래, 그 심판 날을 염두에 두고 세상을 판단할 때 너는 어떻게 판단해야 되느냐는 그것이 예수님에게서 나온 판단입니다. 본문 4절에 보면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나오는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는다는 것은 뭐가 배후에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거예요. 죄 많은 세상을 이제는 철거해서 수습할 날이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겁니다. ‘에이 더러운 것, 다 쓰레기처리 해서 지옥 불에 집어넣어야지.’ 그 계획이 이미 확정된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거예요. 예수님 피를 보고 ‘피를 찍어 발라라. 피를 이용하라.’ 그 말이 아니고 ‘도대체 이 피는 누구 때문에 흘린 피란 말인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내가 흘린 피는 너희에 의해서 흘려진 피’라는 겁니다. 그 피를 보면서 하나님의 마지막 저주와 지옥과 심판조치는 당연하고 마땅하고 합당한 심판조치임을 미리 눈치 채라는 이야기에요.
더 이상 제가 무슨 말을 여기서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은 모든 것이 심판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는 모든 판단은 ‘내가 어떻게 이 더러운 세상에서 의로운 인간이 될 수 있는가?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반짝반짝 빛 날수 있는가?’ 와 관련된 판단과 평가를 우리는 제공하게 되는 거예요. 제가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지 않습니까? 예수 피 믿으면 구원 받는다, 는 너무 간단한 이야기, 왜 로마서 2장에서의 ‘판단하는 사람아, 너는 오히려 판단 받고 저주받는다.’는 과격한 이야기를 구태여 하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꾀이려면 이러한 꼬임에 훼방되는 이야기는 안하는 것이 좋은데 왜 이런 거치는 돌 같은 이야기를 하셔야 되느냐는 말이거든요.
그 이유는 결국 진정한 회개라는 것을 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나쁜 짓 했습니다. 회개합니다.’ 그것은 회개가 아니고 반성이에요. 그러면 회개를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뭘 반성하기 이전부터, 우리가 반성하나 안하나 나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발견하라는 이야기에요. 내가 좋은 패를 많이 가졌는가, 나쁜 패를 많이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가지고 있어봐야 똥이고 오줌이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네가 너를 관리하고 네가 너를 살리려는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미 확정된 시나리오만 받아들이면 된다는 거예요.
얼마나 내가 나쁜 존재이기에 주께서는 십자가의 피를 흘렸느냐, 그것만 받아들이면 돼요. 그것이 얼마나 나쁘냐 하는 것은 로마서 2장 1절에서 4절의 이런 말씀, 이런 말씀을 들이대게 되면 ‘딱 이네. 나보고 하는 이야기네.’라고 우리가 수긍하면 되는 거예요.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라는 것이 자기의 막연한 미래의 불안감 때문에 생긴 거예요. 어떻게든 안 죽고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편하고 여유롭게 살 수 있느냐, 그것 때문에 모든 종교라는 것이 있는 겁니다. 이단들이 꾀일 때 그것 가지고 꾀입니다. 한국교회 전체가 이단이니까 누구라고 할 것도 없지만.
그리스에 델포이라는 곳이 있어요. 경제적으로 어려운 그리스에는 신전이 한 두 곳이 아닙니다. 직접 안 가봤습니다만. 델포이신전 구석에 가면 다리 세 개 달린 의자에 누구 하나 앉아 있어요. 피티아(phthia) 점쟁이가 앉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거기 와서 물어요. “내가 무슨 사업을 하나 구상중인데 잘 되겠습니까, 잘 안되겠습니까?” 하면 피티아는 “가만있어 보세요. 내가 신의 계시를 받아야 합니다. 오, 아폴론 신이시여, 나에게 계시를 주소서.” 불을 피우면서 이렇게 하게 되면 계시가 내리는데 그때 피티아가 온 몸을 벌벌 떨어요. 비명도 지릅니다.
그러면 보는 사람들이 ‘와, 신의 계시가 왔다.’ 피티아가 이제 계시를 전합니다. “나의 말을 들으라. 네 사업은 이렇게 해야 될 것이다.” 하고 여 사제는 제정신이 돌아옵니다. 신의 계시가 임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는 말이지요. 피티아라는 델포이신전에는 사람들이 줄을 섰어요. 꼭 번호표 받아서 기다리는 은행 같아요. 거기 재벌들, 삼성 현대가 재벌들 다 있습니다. 이게 바로 막연한 불안감, 오늘도 살았듯이 내일도 살아야 되겠는데 내일은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로 살고 싶은데 미리 장래를 눈치 채서 실수를 줄여서 성공을 가져다주지 않겠느냐, 그게 모든 인간의 종교심입니다. 그게 모든 인간의 판단이에요.
중국에서는 또 어떻게 하는가? 중국에서는 벌건 부지깽이를 가지고 합니다. 거기서는 아무나 못하고 왕이 해야 돼요. “이번에 기장 농사가 잘 되겠는고?” 하면 “임금님, 잠시 기다려주옵소서.” 하고 벌겋게 단 부지깽이로 거북이 등짝이나 소뼈를 지집니다. 지지고 며칠 뒤에 거북이 등짝에 갈라진 금을 보고 ‘이렇게 갈라졌구나.’ “올 기장 농사는 잘 되겠습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한자의 원형이 거북이 등짝 쪼가리에서 나온 거예요. 모든 언어라 하는 것은 신의 언어로 봐서 신의 언어란 지금일이 아니고 미래에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언어라 생각하고 언어를 분석하게 되면 미래의 어떤 예언이 나온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중국의 임금은 살아 있는 신의 발바닥처럼 임금을 보는 것이 곧 신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간주하기에 임금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복장을 달리 하면서 의식을 취합니다. 겨울이 올 즈음에 검은 옷을 입고 깃발을 들고 북서쪽에 섭니다. 신하들이 그것을 보고 ‘우리 신께서 이제 겨울을 시작하는 모양이다.’ 봄이 되면 녹색 옷을 입고 북동쪽에 서요. ‘아, 북동쪽에서 재수가 오는 모양이다.’ 가을이 되면 흰 옷을 입고 남쪽에 서요. 여름이 되면 붉은 옷을 입고 서쪽에 서고 동쪽은 비워놓습니다.
사람들의 모든 판단은 뭐냐, 지금까지는 내가 판단했으니까 미래에 대해서는 내가 판단을 못하니까 효과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판단을 빌려 들어서 그것으로 자기 앞길을 미리 예측하고 대비해서 막연한 불안감을 해소하겠다는 이 사고방식, 그 사고방식을 우리가 과연 벗어버릴 수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런데 현대에 있어서 과학이 발달되고 난 뒤에는 그런 신의 이름, 종교이름으로 미래를 예측했던 것이 시들해졌어요. 이젠 재미가 없어요. 그러니까 깨어라, 이런 것도 다 착각이고 신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본적도 없고 다만 아직도 순진한 사람들은 교회 다녀서 신에게 복을 기대하는데 주술사나 점쟁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직접 주술사나 점쟁이가 되는 식입니다.
자기가 점쟁이가 되어서 기도를 두 손 모아서 하면 효과가 있을까, 꿇어앉아서 하면 효과 볼까, 금식을 해 볼까, 자기가 피티아같은 점쟁이가 되고 사제가 되어서 자기가 신과 결합해서 장래를 미리 대비하려는 시도를 하는 겁니다. 거기서 나온 것이 뭐냐, 자기가 좋아하는 판단과 해석들이 지금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유발되어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목사가 하는 일이 참 쉽지요? “당신은 이런 행동 하셨습니까? 복 받습니다. 당신은 이런 행동 안하고 나쁜 행동 했어요? 저주 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맞장구만 쳐주면 돼요.
개인의 심성에 비춘 양심의 가책대로 잘했다 싶으면 칭찬해주고 못했을 때는 위로해줘서 “주께서는 용서하십니다. 이런 처방을 받으세요. 기도를 이렇게 하시고 헌금을 하시면 다시 원상복구 됩니다.” 그런 것만 해주면 그들은 밥 먹고 사는 겁니다. 옛날 종교인이나 지금 종교인이나 똑같은 거예요.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찾고자 하는 것이 교인들의 심보입니다. ‘사기라도 좋으니까 희망을 다오.’ 나를 속이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스스로 그런 희망에 속고 싶은 거예요. 희망, 그 비전이라는 것에. 그게 바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러운 것을 찾아다니는 그 선악과 따먹은 DNA, 그 더러운 속성의 확장입니다.
아무도 거기서 벗어날 위인이 없고 그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우리는 판단하고 해석하고 평가합니다. 뭐가 진리냐 하는 것은 구색에 불과하고요 실 이익이 뭐냐, 실제로 나에게 이익 되는 것이 뭐냐,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리새인들아, 너희들이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서 나를 내쫓는구나.” 바리새인들은 국가위주에요. 이 나라가 여호와 믿는 나라로 단결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어떻게든 나라가 잘 되기 위해서는 모든 이단은 다 배척해야 되는데 그 이단의 대장으로 걸려드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합니다. “네가 스스로 재판관이 되었구나. 내가 진짜 하늘나라 재판하는 것을 보여주랴?” 하고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이렇게 무시하는 것은 용서를 받되 성령을 거부하면 지금 이 시대에 오는 시대에 아무도 용서함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1)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용서입니다. 용서, ‘내가 온 것은 용서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보여주기 위해서 왔다.’는 겁니다. 용서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서 우리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그냥 죄인으로 태어난 거예요. 우리는 태어난 자체가 상한 심령이고 죄인으로 태어난 겁니다. 이유를 댈 필요도 없어요. 태어난 그 자체로 우리는 죄인 된 겁니다. 따라서 죄인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심판하실 분이 용서를 하느냐, 아니면 용서를 안 해주느냐, 그것으로 끝장나는 겁니다. ‘내가 너를 용서해줄게.’라는 것이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판단이에요.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유명한 말씀인데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라고 하시면서 그 뒤에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진주, 그리고 거룩한 것은 이 땅에서 얼마나 큰 수모를 당하는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의 징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것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여러분이 보고 싶다면 하나님의 복음, 우리를 용서하시는 그 용서하심이 누구한테 짓밟히고 누구한테 모독 받고 누구한테 몰가치하게 취급받는가, 그렇게 무시하는 것이 여러분의 가족일수 있고, 여러분의 직장 동료일 수 있고, 교인일 수 있고 국가 일 수 있고 어쩌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하려고 준비된 것을 필요 없다고 밟고 찢고 또 밟아버리는 개 같은 짓을 매일 같이 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나는 내 가치를 돋우기 위해서 교회 나왔는데 교회에서 목사가 하는 소리가 ‘우리는 개만도 못합니다.’라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 한 번 믿어주려는 착한 마음씨를 발휘하러 왔는데 하나님 쪽에서 믿지 말라는 판단처럼 내려오니까 ‘그러면 나도 기분 나빠서 못 믿겠다.’ 이런 식으로 갈라설 수밖에 없어요. 전혀 우리의 판단과 다릅니다. 우리의 판단은 명예와 위신과 돈,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러운 것, 명예와 위신과 돈, 그 이야기 빼놓고 할 이야기가 없잖아요. 어린 아이가 뜨거운 태양을 가지고 놀면 안돼요. 손 다 뎁니다. 어린아이는 모래만 쥐고 놀잖아요.
우리가 기껏 노는 놀이, 모래장난은 명예와 위신과 체면과 돈, 이런 것만 가지고 노는 겁니다. 그래서 나한테 이익이냐, 손해냐, 기껏 그런 판단만 나와요. 그러나 예수님은 태양을 품고 우리보고 타죽으라고 하는 판단을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이런 입장에 네가 놓여 있다. 그러니까 이 용서가 주어지거든 아무소리 하지 말고 내가 죄인입니다, 하고 그 용서를 그냥 받아들여라. 받아들이게 되면 그때부터 너는 예수님이 당한 수모를 같이 당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가 얼마나 저질이었으면 흘린 피 이겠습니까?
우리가 저질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깊숙이 몰아가고 더욱더 심화시키는 피예요. 달랑 찍어 발라서 나는 구원받았다는 식이 아니고, 그 피 앞에서 나의 판단은 전부 다 에덴동산을 무너뜨리게 하는 판단, 그 외에 다른 판단은 나에게서 나올 수가 없구나, 그저 좋은 사람이나 좋은 패, ‘나는 이만큼 좋은 패인데 네 패는 어떤 패냐?’ 이런 식으로 자기 자랑거리 만들기 위해서 하루하루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고 그 행동의 결과를 예측하고 평가하는 심보, 이것은 마지막 때에 용납되지를 못합니다.
끝으로 4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참, “용납하심과” 봐줄 때, 봐줄 때 알아서 피 믿으라 그 말이지요.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그리고 참으심도 그냥 참으심이 아니에요. 길~이 참으심, 길~이, “또 봐주자, 또 봐주자! 언젠가는 철이 나겠지.” 길~이 참으시는 그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이것과 예수님의 피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점쟁이한테 점치듯이 행운이 찾아올까 싶어서, 좋은 스펙 쌓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자기의 장기로서 추가시키기 위해서, 그것이 행운으로 변하는 부적처럼 아는 자기의 야심과 욕망밖에 모르는 저희들, 십자가 피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우리의 모든 판단은 저주받을 판단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이런 판단을 무시하시고 일방적으로 용서하시는 주님의 용서하시는 손길에 피가 묻어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