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6강-우상의 형상(1;21-25)이근호121104

아빠와 함께 2013. 2. 7. 11:05

우상의 형상(로마서 1: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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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2-11-04 13:39 
우상의 형상

2012년 10월 28일                         본문 말씀: 로마서 1:21-25

(롬 1:21, 개역)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롬 1:22, 개역)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롬 1:23, 개역)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 1:24, 개역)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롬 1:25, 개역)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어린아이가 장난감 로봇을 갖고 놉니다. 그리고 누구를 만나든지 그는 로봇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로봇로 상호 의사소통이 된다고 아이는 생각합니다. 이로서 로봇은 아이에는 자신을 대신할 대체물이 됩니다. 곧 우상입니다. 인간들은 자기를 만들고 자기에게 의미를 주는 존재는 ‘신’이라고 여기고 주변에서 찾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인물 중에 그 누구도 신이 될 정도로 위대한 존재가 없음을 알고 하늘을 쳐다 봅니다. 아마 하나님은 저 하늘에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창세기 11:3-4에 보면, “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사람들은 탑을 한층한층 쌓아올려서 신이 계시다고 소문난 그 신의 세계에 접근하고 싶어합니다. 이런 의식이 바로 아이가 로봇을 갖고서 형성해낸 자기네들 만의 세계상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대기권 밖에는 어두운 진공만이 있음을 압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신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옛날 의식들을 미신이다  혹은 비-과학적이라고 놀립니다. 하지만 이런 과학적 인식에 준해서 실제 로겟트를 발사하면서 사람들은 돼지 머리를 바치고 엎드러 ‘알 수 없는 신’에게 제사합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있어 신이란 실은 자신의 속성을 담아 크게 확대시켜 놓은 자아 대체물입니다.

신이 담고 있는 바는 현재 자신 속에 자신이 담고 있는 내용이 일치해서 상호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그래야 신을 조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실제로 신을 보게 되면 바로 거울 속의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밖에 안됩니다. 옛날 바벨로니아라는 나라의 성문 앞에 ‘라마수’이라는 신화적 동물을 만들어 세워놓았습니다.

그 라마수라는 동물은 얼굴은 사람얼굴이요 머리칼은 독수리의 날개요 몸통은 사자의 몸통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처럼 지혜롭고 독수리처럼 날새고, 사자처럼 용맹해서 이 성을 침입해오는 악한 힘을 막아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한 겁니다. 서울 경복궁을 지키는 것도 ‘해태’라는 신화적 동물상입니다. 악한 기운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이런 짓들을 한 자들이 우리네 조상이다 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도대체 그들이 지키려고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이룩해놓은 자신들의 터전입니다. 따라서 신이나 우상이라는 것은 오로지 ‘자기 것’의 보존을 위해서 필요한 상상물입니다.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이해하는 식으로 신을 무의식 중에 만들어내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참된 하나님은 어디서, 어떻게 등장하는 것일까요? 바로 이러한 인간성을 공격하면서 등장하십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대자연 속에서 신을 찾고자 하는 인간들의 움직임을 하나님께서 읽어내시면서 그들의 마음에 주목하십니다. 인간 외부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인간을 거덜내십니다.

마치 그동안 인간들이 맨홀 뚜껑 위에 주저앉아 살아왔다면 바로 그들을 그 자리에게 비키도록 조치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깔고 앉은 자리에서 하늘을 항하여 나아가고자  신을 거론하지만 정작 그들이 앉은 자리가 사람들 자체를 뿌리채 보여주는 말씀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하늘의 별이나 달을 누가 만들었느냐가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이 하나님이 작용하시는 접선 지역입니다. 어둡고 더러운 마음으로 유발된 것이 바로 우상을 만들고 섬기는 원인입니다. 따라서 마음 내부로 들어가서 그 원인을 추적해내는 것이 바로 말씀을 역할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부터 인간은 자기 본색을 노출시킵니다. 그것은 바로 ‘살인의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살인의지에 준해서 행동하고 생각합니다. 놀라운 점은 인간 본인들이 이점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이 알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나서서 폭로의 계기를 촉발시키십니다. 직업상 달리 예물을 드릴 수 밖에 없는 실정을 감안치 아니하시고, 가인의 예물은 받지 않으시고 동생 아벨의 제물은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편애하신 겁니다. 제사를 드리면 고맙다고 넙죽 받으시는 그런 착한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이 예사롭게 여기는 것처럼 그렇게 착하고 순하고 어질고 훌륭한 분이 아니십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어느 부자청년이 찾아와서 예수님께 다름과 같이 여쭙니다.

“선한 선생이여”라고 말입니다. 그 부자청년은 자신의 선함과 착함이 예수님과 상호 통할 수 있는 속성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착하거나 선하거나 좋으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십니다. “너의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가나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고 말입ㄴ다.

예수님은 바른 말씀을 했습니다만 부자 청년은 근심하고 돌아서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도 다 이와같이 대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뿌리부터 말씀으로 작업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이란 더러움이 곧 출원지가 됩니다. 더러움이 더러움을 계속 낳는 겁니다.

우상과 연관해서 호세아 14:3-4에 보면,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말씀은 호세아 13:4의 말씀을 구체화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즉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그림을 그리고자 하십니다. 곧 세상 전체를 우상의 집합체로 간주하시는 겁니다.

즉 우상의 문제는 인간들의 마음 속까지 내려가면 인간 본인이 자신을 초인간적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신을 조작한 겁니다. 더러운 자기 마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자기 이상체로 나아가는 그 와중에 국가가라는 것이 있습니다. 국가는 자아를 지켜주는 자궁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국가가 무너지면 자기 존재가 위태롭게 됩니다. 따라서 자기를 대신해서 자기를 지켜줄 자궁을 관리하고 지속한 위대한 영웅이 필요한데 그 존재가 바로 왕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기가 생각해둔 우상을 위해 왕을 자진해서 만들고 대대로 세습화시켜서 초월적인 능력을 발휘해주기를 기대합니다.

왕이란 신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중재인입니다. 일종의 제사장이지요. 왕이 제대로 신의 능력을 일하게 되면 우리 자신들을 지켜주는 자궁의 원활하게 잘 돌아간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서 나올까요? 가인과 아벨을 조합해서 거기서 하나님께서 지상에 새로운  사건을 유발해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죽이는 자는 죽는 자를 유발시키는 겁니다. 모든 인간 속에 살인의지로 충만해있음을 밝혀냅니다. 내가 그리는 신, 곧 나 자신의 이상형에 흠집을 내는 자라면 신이라고 용서하지 않고 처단하겠다는 것이 바로 살인의지의 방향성입니다. 바로 살인의지에 대한 하나님의 대처가 출애굽에서 일어납니다.

애굽에 살던 모든 백성의 집에서 맏이가 죽게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히브리인이라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국가가 자신의 우성성을 지켜주는 자궁과 같은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흠없는 어린양’을 주인공으로 하여 새로운 사건을 유발시키십니다. 그것이 곧 십자가입니다. 즉 흠없으신 분의 죽음이 곧 하나님의 말씀 완성이요 하나님의 의이요 유일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리입니다. 이것만이 우상이 아닌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흠없는 분 앞에서 우리가 흠없는 고백할 수 있도록 늘 말씀을 볼 여지를 만들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11-06 09:30 
6강-롬1장 21-25(우상의 형상)1211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장 21-25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0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21-25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여기 보면 하나님을 안다고 했는데 보통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고 물어보면 하나님은 하늘에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늘이라는 곳에 찾아가 보면 거기는 대기권입니다. 대기권이 있고 아래쪽에는 구름이 있고 더 가보면 목성이 있고 토성이 있죠. 거기 뭐가 있어야 말이지요. 아무리 들여다봐도 하나님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옛날부터 자기가 사는 동네에 하나님이 안보이니까 아마도 세상은 누군가는 만들어 놓았을 것이고 누가 만들었는지 궁금해서 그 분을 찾는데 자기 동네에는 없으니까 어디를 쳐다보느냐 하면 위를 쳐다봐요. 저 하늘에 하나님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성경 창세기 11장에 보면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는 대목이 나와요.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는 이유가 거기에 나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우리의 이름을 그 하늘까지 높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탑을 쌓아요. 탑을 한 층 한 층 높여가게 되면 점점 더 지상에서 떠나서 어느 쪽으로 일이 진행하느냐하면 위를 향하여 진행하는 겁니다. 그러면 탑을 도대체 몇 층까지 쌓아야 하나님 발바닥이라도, 하나님 앉아 계시는 방석이라도 뚫겠습니까? 어리석거든요. 하늘에도 하나님이 안계십니다. 그래서 목회하는 목사 입장에서는 참 답답한 것이, 사람들이 자꾸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을 쳐다본다는 거예요. 거기 아무것도 없는데.
 

왜 그런가? 저도 상당히 걱정도 하고 고민도 돼요. 하나님이 없는데 있다고 자꾸 상상하는 그 자체도 문제가 되는데 오늘 아침에 여섯 살 먹은 태민이가 인사도 없이 오자마자 로봇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바로 저거다! 어린애에게 있어서는 로봇이 자기세계의 전부입니다. ‘아침 드셨어요?’ 그런 인사도 없어요. 다짜고짜 로봇이 다리가 부러져서 어떻게 고쳤다는 그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마구 내 뱉는 거예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키울 때 그게 바로 자기가 믿고 싶은 신,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만들어 내는 거예요.
 

실제로 있는 것은 자기 몸뚱이 밖에 없는데 자기 몸뚱이가 어디서 왔는지가 궁금하니까. 그게 왜 궁금한가, 사람 사는 것이 아무 이유가 없거든요. 이유도 없이 슬금슬금 아프고 죽어가고 있으니까, 살면서 무슨 이유나 목적이나 의미라도 있어야 되는데 그게 없으니까 짐승이나 동물도 아니고 기계도 아닌데 그렇게 사니까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신이 나를 만들었을 것이고 신이 만들어서 지금의 나가 있기에 내가 신을 섬기면 지금은 눈에 안보이지만 혹시 죽어서 신을 만나게 되면 나를 좀 잘 봐주지 않겠느냐 하는 식으로 신을 상상하는 거예요.
 

본문 25절에 보면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라고 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진짜 하나님을 피조물로 바꾸었다는 거예요. 그게 나쁘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신에 대해서 뭔가 만들 때 눈에 보이는 것 가지고 만들어야지 뭘 가지고 만듭니까? 만들 때 어떻게 만들겠어요? 라마수가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옛날 바벨론의 성 앞에 조각품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게 라마수에요.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고 깃털은 독수리의 날개이고 몸통은 사자의 몸통이고, 이렇게 조합된 조각물을 성문에 배치해 놓은 거예요.
 

나쁜 기운을 그 짐승이 막는다는 겁니다. 인간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날쌔고 사자처럼 용맹스러워서 모든 악한 기운을 다 없앤다는 뜻으로 한 겁니다. 그걸 누가 만드는가, 우리 인간선배들이 만들었어요. 서울 숭례문 앞에 해태라는 것이 있습니다. 해태는 신화에 나오는 동물로서 액운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걸 만들어놓은 그분들 역시 단군의 자손이고 우리 선배에요. 우리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우리도 해태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도끼 들고 ‘이런 미신이 어디 있어.’ 하고 설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인간은 다 자기가 속해 있는 자기가 만든 그 세계 속의 이야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시대가 발전하니까 해태라는 것은 없고 용도 없고 그런 것은 다 미신이고 천문학이 어떻고 물리학이 어떻고, 이렇게 하지만 그렇게 우리가 주장하는 이 시대도 20년 후에는 ‘20년 전 사람들은 왜 그렇게 미신이 많은지 몰라.’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법칙은 또 달라지니까. 성경에서 진짜 하나님이 이야기하기를 “너희들은 왜 하나님을 가짜로 만들었느냐?”하고 윽박지르시는데 인간이 생각하는 그 이미지라는 것은 자기가 경험한 것 속에서 만들어낼 수밖에 없어요. 자기가 보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만들어요? 자기가 느끼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만듭니까?
 

기껏 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 24절에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오늘 설교에 들어가는 출입구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대자연을 통해서, 달은 누가 만들고 별은 누가 만들고 달은 누가 만들었을까, 허리케인은 왜 불어와서 수십 명씩 죽도록 하는가, 신은 왜 자꾸 노하는가, 우리가 뇌물을 바쳐야 그 노가 풀릴 것인가, 이렇게 생각들 하면서 신을 인간 바깥에 있다고 여기는 그 모든 사고방식에, 하나님은 우리 내부에 들어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그렇게 이미지화 하고 형상화를 시키는 네 마음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느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인간의 마음이 더럽다는 예가 나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물었어요. 예수님 보고 선하다는 거예요. 놀라운 사실은 오늘날 한국교회도 예수님을 선한 분으로 보고 있습니다. 좋은 분이라고 생각하고 착한 사람이라고 보는 겁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선한 분이 아니에요. 사람이 신을 향하여, 어떤 초월적인 존재를 향하여 선하다고 보는 것은 본인이 그렇게 선해야 천국가지 않겠느냐 하는 자기 이미지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품성을 키우는 거예요. 이것을 뻥튀기 하는 겁니다.
 

‘나는 착한 것은 좋고 악한 것은 싫어. 따라서 나를 만든 신이 있다면 분명히 착한 분인데 나는 세상 살다보니 너무나 악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에 착한 하나님 앞에 내 악한 것을 용서 받아서 착한 하나님과 결합되면 그것이 바로 죽어서도 내가 영원히 살 수 있는 두 번째 고향이다.’ 이렇게 생각해서 교회를 찾아 나오거든요. 그거 아니거든요!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선하고 착한 그런 분이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니므니다! 하나님은 착하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분이 절대로 아니에요. 그것은 자기가 그런 신을 찾고 싶은 거예요.
 

자기가 양심에 좀 미흡하니까 찔리는 것이 있으니까, 뭐든지 신은 나보다 더 우수하고 월등한 진선미,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분이니까 나는 당신을 착하게 대우함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대우하는 나도 착한 범주에 넣어주지 않겠는가, 그러면 나도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지 않겠는가, 이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거예요. 나는 못됐지만 신은 착하고 못된 내가 착한 신을 찾았으니 봐주소,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것은 자기가 만든 신이에요. 신은 착하지 않습니다. 좋은 분도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핀잔을 합니다.
 

“나보고 선한 선생이라고? 내가 얼마나 못됐는지를 보여 주마.” 부자청년이 요새 말로 “내가 어릴 때부터 교회 다녔습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다 했습니다. 여기서 뭐가 더 부족합니까?” 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제부터 나의 못됨을 보여주마.” 해서 “네가 갖고 있던 모든 재산을 다 팔고 빈털터리가 되어서 나를 따라오너라.” 얼마나 주님이 못됐습니까? 얼마나 나쁜 분이에요? 이게 부자가 아니고 가난한 사람 같으면 그런 이야기를 안했을 거예요. 그 사람이 국회의원이었다면 “네가 모든 권력을 다 버리고……” 그렇게 나왔을 거예요.
 

부자는 돈이 있기 때문에 돈을 겨냥해서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대자연, 달은 누가 만들고 별은 누가 만들었고 세상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규명하고, 이것은 내가 되고 싶은 나……, 아까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이야기했지요, 내가 지상에서 점점 더 높아지는 나, 내가 되고 싶은 나를 확대시킨 거예요. 결국 신이라 하는 것은 만나보면 내 모습이라니까요, 내 모습. ‘어, 어디서 많이 본 사람 같은데? 내가 왜 저기 있지?’ 모든 인간이 스스로 조작해 낸 것이 신입니다. 자기에게 착한 것, 자기에게 잘할 수 있는 것, 그런 것을 뽑아서 꽃다발처럼 모아놓은 것이 신이에요. 신은 없기 때문에 그 없는 자리를 그냥 둘 수 없어서 인간은 자기를 키워서 거기에 놓는 겁니다.
 

거기에 놓고 내가 만든 신을 찾아가는데 거기에 방법과 방식이 동원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윤리와 도덕이라는 겁니다. 좀 더 착하게, 좀 더 완벽하게. 어제 소방관 한 분이 돌아가셨는데 그분은 교회집사님이시고 나이 50되도록 결혼도 안한 채 오직 교회에 충성하다가 50이 넘어서 결혼해서 그 여자 분과 함께 성지순례 가기로 준비되어 있었고 그동안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식으로 여러 곳에 기부했고 구제도 했답니다. 그랬으니 교회에는 오죽 충성했겠습니까? 교회에 헌금을 얼마나 때려 부었겠어요. 그렇게 착하신 분인데 그런 분이 그만 그냥 죽은 것이 아니고 매캐한 연기 마시고 불에 타서 죽었습니다.
 

착한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착한 자를 죽이시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어느새 교회 다니는 우리 자신이 우리가 우상화되어서 예수님은 간곳이 없고 예수 잘 믿는 나를 신으로 신봉하는 그것을 밝히 드러내시는 아주 못되신 하나님, 우리가 믿는 것은 결코 나(예수)를 믿은 적이 없다는 것을 완전히 까발려주시는 아주 마음씨 고약한 하나님입니다. 본문 24절에 보면 궁금한 것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했는데 더러움에 내어버려두었다는 이 말은 쉽게 말해서 ‘네 모든 것은 더러움에서 나왔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네가 더러움에서 나왔다, 더러움에서.” 그러면 우리는 “나도 알거든요. 나도 나쁜 마음먹은 적이 있고 나쁜 짓도 한 적이 있는데 내가 더럽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더러움을 씻어버리기 위해서 교회도 나오고 예수도 믿는 겁니다. 따라서 더러움이라고 일방적이고 극단적으로 몰아세우지 말고 더러운 것도 있지만 착한 것도 있다는 그 균형을 맞춰서 이야기를 해주셔야지 그냥 네 마음은 더러움에서 나왔다, 그렇게 한다면 그 모든 것이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느냐고 항의할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라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서 있던 그 자리에서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겁니다. 우리는 그냥 맨홀 뚜껑 위에 그냥 눌러 앉아서 살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눌러 앉아 있는 곳은 맨홀 뚜껑입니다. 그런데 공사차량이 와서 우리를 맨홀 뚜껑에서 밀어붙이게 되면 ‘어, 내 밑에 뚜껑이 있었네! 뚜껑을 열어보니까 거기서 진짜 하나님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을 우리는 누르고 앉아서 나를 우상화시켜서 하늘을 향하여, 하늘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그저 태양밖에 없는데 그 하늘을 향하여 탑을 쌓아가면서 ‘이만큼 착하면 되겠습니까? 이만큼 선하면 되겠습니까? 이만큼 교회 봉사하면 되겠습니까? 이만큼 성경공부 많이 하고 이만큼 신학공부 많이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겠습니까?’ 이러고들 있다는 말이지요.
 

눌러 앉아 있는 것은 모르고. 주께서는 “비켜라.” 해서 우리를 밀어버리면 우리가 그동안 선해지려고 한 그것 때문에 가리고 있었던 거기에서 하나님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튀어나오는가, 지금부터 그것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인간이 처음 시작할 때 제일먼저 일어난 사건이 살인사건이었습니다. 그 말은 뭐냐, 인간은 누구나 남을 죽이고 싶은 충동 위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살인의지입니다. 걸리기만 하면 누구든지 죽이겠다는 식이에요. 선악과를 따먹고 신이 되고 난 뒤에는 나만 신이 되어야 돼요.
 

나만 신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 신이라는 그 원형과 모델이 내 마음을 그대로 옮겨 담은 그런 신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럴 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이 나하고만 통하니까. 선악과를 따먹고 신이 되고자 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누가 뭐래도 절대적인 신이다. 따라서 세상 모든 것은 내 뜻에 맞춰서 돌아가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 그게 바로 가인이에요. 가인이 신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요새 말로 그냥 예배를 드린 거지요.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거절했습니다. 여기서부터 거절하시는 신, 성질 못된 신과 하나님께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는 이 착한 나, 이 나가 갖고 있는 이 착함, 선한 의지, 훌륭한 의지를 일체 받지 아니하시고 다 차버리는 못된 신, 가인은 누굴 죽여도 죽이게 되어 있어요.
 

참을 수가 없습니다. 왜 착한 나를 건드리는가, 내가 착하다는 것은 내가 보증하는데 누가 나를 건드리는가, 그 말입니다. 신이 건드리면 신을 죽이고 인간이 건드리면 인간을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습니다. 안 받을 것 같으면 다 안 받아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같은 형제간인데 가인의 제사는 안 받고 동생 아벨이 드린 제사는 받았어요. 제사에서 특이한 것은 없습니다. 직업이 달라서 양치는 자는 양을 바쳤고 곡식 거둔 자는 곡식 바친 것뿐이에요.
 

사전에 하나님께서 “곡식으로 하지 말고 양을 잡아라.” 이런 언질을 줬으면 왜 그 말을 안 들었겠습니까? 착한데, 착해서 시키는 대로 다 하는데, 안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전에 어떤 모범답안도 준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섬기라는 어떤 제시된 것도 없습니다. 그저 네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그대로 한 번 발산해 봐라, 정성 다하고 심령 다해서 곡식 바쳤더니 그 정성과 심령을 주께서 안 받습니다. 나는 착한 마음, 정성으로, 진지하게 바쳤는데 받지를 않았어요. 부글부글 끓습니다. 그런데 아벨 동생은 자기하고 다를 바가 없는데 하나님이 받았습니다. 가인은 그 동생을 죽여 버립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원했던 바를 드디어 찾아냈습니다. 바로 그거라는 겁니다. 바로 그거다! 가인은 자기 속에 뭐가 있는지를 본인도 몰랐던 겁니다. 가인과 아벨의 조합에 의해서 숨어 있던 하나님이 비로소 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교회지붕 꼭대기마다 세워져 있는 그 십자가에요. 사람들은 착한 예수님, 선한 예수님,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하나님을 생각하다 보니까 이것은 뭘 깔고 앉았느냐 하면 자기가 신이라는 그 진짜 모습, 위선이죠, ‘사실은 내가 신이야. 내가 얼마나 좋은 신이냐 하면 당신을 신이라고 인정해 줄 정도로, 나는 예수를 믿어줄 정도로 대단하고 훌륭한 사람이야.’라는 그 모습을 본인이 안 들키고 감추고 있었던 겁니다.
 

가는 곳마다 기도하고, 어딜 가도 교회 찾아 나오고, 십일조 하라고 하면 십일조 하고, 헌금하라고 하면 헌금하고, 목사 말도 잘 듣고, 목사 넥타이도 사주고, 이런 식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극도의 신앙심은 다 발휘해주는 겁니다. 주님은 그것 할 때마다 다 찢어버립니다. “이게 어디서 내 앞에서 착함을 드러내?” 다 찢어버려요.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딱 이겁니다. “너의 마음은 더러움에서 발생되었다.” 그 말을 들으면 그대로 우리가 동의하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 저는 신이 아니고 더러움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인정하면 되는데 그렇게 인정하려 하니 문제가 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나는 더러우며 나는 안개며 아무것도 아니며……’ 이렇게 되려고 하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문제가 ‘만약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럼 나는 뭐냐? 그동안 내가 애쓰면서 살아오고 자식 키우면서 노력하고 남에게 안 지려고 하면서 기어이 돈이든 권력이든 차지했던 그 모든 노력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면……?’ 죽는다는 것이 뭐에요,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다는 것, 없었던 것으로 해주세요, 라는 이것이 죽음이 아닙니까?
 

“뭐가 있었어요? 지금은 없네요.” 이게 무(없음)라는 말이지요. 모든 것이 없어진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수고로움도 결국 의미가 없는 거예요. 내가 의미가 없다면 자살하는 것이 낫지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잖아요. 물론 자살해도 보험금 타 낼 수는 있어요. 손해보험은 자살하면 보험금 없는데 생명보험은 나온답니다. 가락교회에서 제가 배웠어요. 그런 것이 있답니다. 그런데 자살해서 보험금 타내면 뭐합니까? 나한테 무슨 이득이 됩니까? 보험금 타겠지, 소고기 구워먹겠지……, 소고기 구워먹으면 뭐하는데요,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데!
 

예수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거예요. ‘말씀이 너를 살리지 네가 말씀 지키는 그것이 너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뿌리부터 쿵덕쿵덕 말씀을 박아 넣는 거예요. 건물 지을 때 항상 기초공사부터 해 나가잖아요. 그 기초에 말씀을 박아 넣어요. 박아 넣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하면, 내가 박아 넣었던 그 착함의 심지를 다 뽑아버려요. 종교적인 열심, 교회 50년 다닌 것, 이런 것 다 뽑아버려요. 목사가 어떻고 하는 것들 다 뽑아버려요. 다 뽑아내고 거기다가 말씀을 심어 넣는데 집어넣은 말씀이 뭐냐, ‘너는 더러움에서 탄생했다.’ 그것을 집어넣어요.
 

이것이 나의 작업 같으면 우리가 마음에 섭섭한데 우리가 오히려 그것을 감사하는 이유가 그것이 나의 작업이 아니고 모든 것을 말씀으로 제자리에 돌려놓는 주님의 작업에 우리가 말려들게 되었다는 것, 우리가 거기에 휩쓸리게 되었다는 이 사실이 우리를 얼마나 든든하게 만듭니까? 로마서 1장 17절에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믿음으로 살리라, 하는 것은 행함으로 살지 못한다는 언급한다고 제가 말씀드렸지요?
 

믿음으로 살리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그 모든 작업은 누가 하느냐, 우리의 의로움이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로움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의로움이 나와서 우리로 하여금 그 일에 같이 동참케 하고 편승하도록 당기는 거예요. “너 이리와! 이제부터 내 일에 가담해.” 하고 우리를 끌어 모은 거예요. 끌어 모으니까 우리 의는 파괴되는 겁니다. 파괴되는 그 것이 뭐냐, 하나님의 의의 창조에요. 파괴 없는 창조는 없습니다. 뭔가 내가 귀하다고 여겼던 것이 말씀에 의해서 파괴되거든 주께서 지금 건설하고 있는 줄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지금 건축허가 받아서 여기에 건물 짓고 있는 거예요. 무슨 건물, 하나님의 의가 오직 흠도 티도 없이 만들어진다는 그 건물 짓고 있는 겁니다. 사람은 떡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말씀으로 되는 거예요. 교회 와서 떡 해 갖다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주님 앞에 내놓을 필요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어요. ‘하나님, 가져왔습니다.’ 하면 다 뽑아버려요. 왜, 그 속에 자기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는 말은 ‘네가 시작한 것에 대해서 일체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으로 받아주지 않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내가 알려드릴게요. 하나밖에 없어요. ‘나는 무엇을 해도 하나님을 기쁘게 못합니다.’라고 믿으면 그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거예요. 그것을 시편 51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심령’이라고 한 겁니다. 울고불고 하라는 말이 아니고 처음부터 우리는 상한심령부터 출발했습니다, 라는 그것을 고백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남는 것은 이 뿌리로부터 말씀이 올라오기 때문에 우리가 매일 점검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별게 아니고 매일 같이 우리의 몸을 가지고 발생하는 주의 말씀을 우리는 확인하면 되는 겁니다.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우리가 돈을 안 사랑할 수가 없거든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돈을 사랑하게 만들어요. 사랑하게 만들어놓고 그것과 조합을 이루어서 말씀을 그 현장에 딱딱 대비를 시킵니다. 우리는 돈을 사랑하게 만들어놓고 그 옆에 보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이렇게 대비를 시켜서 돈을 사랑하는 너는 의미 없이 허물어져야 되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하는 그 말씀은 살아나되 그 살아나는 현장으로 ‘너’라는 그 지점을 내가 사용했다는 겁니다.
 

너의 몸, 너의 인생을 뭐로 터놓았느냐 하면 말씀이 오히려 너를 의인되게 하고 말씀이 너를 영생 얻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네 모든 행함은 의미 없음을 들춰내는 작업에 너를 집어넣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말씀을 보면 전혀 기분 나빠 할 이야기는 한마디도 들어 있지 않아요. 왜, 우리 자신이 바로 우상이니까. 그렇다면 그 작업을 어떻게 실시하느냐, 호세아 14장 3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아가 나옵니다. 부모도 없고 형제도 친척도 없는 고아, 고아의 입장으로 하나님께서 만들어놓고 ‘우리를 고아라고 지적하신 하나님께만 의지하겠습니다…….’ 그 당시 앗수르가 강대국인데 ‘앗수르를 의지하지 않고, 말을 타지 않고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않고 고아의 절망을 유지하는 식으로 살아가겠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절망을 유지해도 되는 이유가 우리가 넉넉하기 때문에 그래요. 말이 굉장히 어렵지요? 우리가 절망을 늘 유지해야 되는 이유가 절망보다 더한 절망이 온다 할지라도 이미 우리는 넉넉하게 주님의 손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 호세아 13장에 죽 보게 되면 출애굽 이야기가 나와요. 그 출애굽 이야기에 보면 아벨과 가인의 이야기 그것을 조합해서 진짜 하나님이 맨홀 뚜껑 열고 나온다 했습니다. 그 방식대로 진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고 지상에서 어떤 일을 만드시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일이 특이한 일이에요. 어떻게 특이한 일이냐, 가인과 아벨에서 아벨을 죽게 만들고 가인을 더욱더 악인 되게 하는 그 일을 만드십니다. 출애굽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구약성경 이스라엘을 통해서 진짜 하나님을 드러내는데 하나님은 출애굽 때에 애굽나라 모든 집안의 맏이를 다 죽입니다.
 

자식, 그것도 맏이를 죽인다는 것은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애굽의 맏아들을 죽였다는 그 말은 그 옆에 있는 이스라엘의 맏아들도 당연히 죽는 거지요. 이것은 좀 설명이 필요한데 이 설명을 할까 말까 했는데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빨리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자기존재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신을 찾는데 그 신이라 하는 것은 결국 만나봐야 자기초월적인 자아, 인간적인 자아의 모습이에요. 왜냐, 그것을 깨보면 자기가 원했던 것이 소복이 다 들어 있으니까. 내가 평소에 원했던 것을 신의 모습으로 이미지를 그려놓고 찾아가는데 그 찾아가는 과정 속에 뭐가 있느냐하면, 바로 국가라는 것이 있습니다.
 

국가는 일종의 자궁과 같은 거예요. 국가가 없으면 애는 위기를 느끼고 불안한 겁니다. 국가가 든든하면 안심하는 거예요. 그 국가를 책임지는 사람이 왕입니다. 왕을 사람들은 뭘 로 보느냐하면, 제사장으로 보는 거예요. 제사장이란 신과 인간 사이를 소통해주는 매개인, 중개인입니다. 두 자로 이야기하면 영웅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역사책이나 모든 사극에 보게 되면 항상 전쟁에서 승리한 자가 왕이 될 확률이 높아지고 일단 왕이 되면 그 왕의 핏줄은 특별한 핏줄이라고 사람들이 상징적으로 관념을 입히기에 대대로 세습화시켜서 “당신의 피는 우리보다 뛰어난 영웅적인 피를 가졌기에 우리를 지탱할 수 있는 엄마의 자궁 같은 이 국가를 견지하고 지탱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지금까지 배운 학문을 총 동원해 보세요. 그 이야기에요. 과학, 경제, 이 모든 것은 내가 속한 나라 잘되기 위함이고 그 나라가 없으면 우리는 이민 갑니다. 이 자궁 같은, 나를 지켜줄 나라를 찾기 위해서 미국으로 이민 가 버려요. 아직도 이민 안 간 것은 이 모든 것이 아직도 나를 지킬 만한 나라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그 나라에 우리는 세금내고 법 지키고 뽑을 사람 뽑는 거예요. 왜, 나는 대통령 할 위인이 안 되지만 나보다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착함과 성실함과 국민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그 마음이 당신에게 있기를 원하는 겁니다. 등록금도 반값으로 만들어주는 등 집안의 부모가 하는 일을 다 해줄 때 난 당신을 대통령으로 뽑을 용의가 되어 있다고 국민들은 다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 일체감, 단결심, 그것이 바로 내가 진정 신이라는 것, 나의 선택은 옳았다는 것, 나의 자유의지는 훌륭한 자유의지였다는 것을 내가 스스로 이 땅에 살면서 확인함으로써 나는 역시 선한 존재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 검증하고 싶은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살았습니다. 애굽은 그들의 자궁 같은 거예요. 엄마의 몸 같은 겁니다. 애굽 무너지면 히브리인들은 갈 곳이 없어요. 그런데 그 애굽이 지금 하나님에 의해서 무너지려고 합니다. 대대자손이 끊어지려고 합니다. 그것은 히브리인의 가정도 마찬가지에요.
 

저 집안 맏이가 죽는다는 말은 같은 자궁 안에 있기에 내 집안의 맏이도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이 애굽나라에 통째로 벌을 내렸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모세한테 알려주기를 “네가 함께 자랐던 1년 된 어린양을 잡아서 문설주와 문지방에 피를 발라라.”고 했습니다. 피를 바르라는 말은 인간들의 어떤 윤리적 도덕적 효험은 하나님 앞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고 착한 사람 되려고 하는 그 모든 시도는 다 헛방이에요. 예수 믿고 착한 사람 되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조치에 따라줘야 됩니다. 하나님의 조치가 뭐냐 하면, 남의 양이 아니고 함께 자기 집에서 1년 동안 자란 양이 죽어야 될 내 아들 대신 죽어주는 거예요.
 

대신 죽어주고 ‘내 아들은 이미 죽은 놈입니다.’ 라는 표시를 하라는 거예요. 어디다가? 하나님의 심판주가 찾아오는 입구에다가, 그 문 양쪽에 피를 발라놓는 거예요. 그리고 대신 죽을 양은 흠이 없어야 돼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죽을 양이 흠이 없다는 말은 안 죽고 버티는 우리는 흠이 있다는 것을 자백하고 흠이 있는 놈은 죽어봐야 소용도 없고, 흠이 있는 것은 진작 죽어야 되고, 흠이 없는 자가 내 인생을 연장시켜 줄 때, 내 인생을 대신 채워줄 때 비로소 흠 없는 그것이 나를 살린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하나님 만남에 있어서 내가 빠져야 됩니다. 내가 빠져야 돼요. 나의 헌금, 나의 전도, 나의 기도, 나의 설교, 나의 충성, 나의 교회봉사, 나의 모든 것은 빠져줘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하고는 상대를 안 합니다. 그것을 믿는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어떤 짓을 해도 나와 상대하지 않고 우리는 기다리면 나를 대신해서 하나님을 상대하신 그분이 얻은 성과에 우리를 적용시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사람을 보고 양이라고 했어요. 세례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옛날 출애굽 그때의 사건이 아직도 멈추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 출애굽사건이라는 원리원칙을 포기하거나 중지시키는 일이 없다는 거예요. ‘나는 너하고 상대안하고 너는 내가 준 혜택만 입으라.’는 거예요. ‘그런데 너는 내가 준 혜택은 생각 안하고 네가 끄집어낸 윤리와 도덕과 너의 착함의 혜택으로 네가 구원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고 네 위신이고 자존심일 뿐’인 겁니다. 우리가 교회 온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내가 나댈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거예요.


성지순례 앞두고 좀 참지. 사람을 살리려고 불을 끄는 것인데 자신이 죽어버리면 안되잖아요. 불을 끄다가 죽어버리면 그 죽음은 소방업무에 있어서 실패 아닙니까? 뭐든지 우리가 나댈 때는, 내가 행동을 하게 되면 그 옆에 주님의 말씀을 같이 봐야 돼요. 그래야 말씀의 도움을 받는 거예요. 그래야 어린양의 효과를 받는 겁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뭐냐, 이것은 나의 행함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이 행함은 하나님이 안 받는대. 그러면 이 내 행함이 이렇게 훌륭한데 하나님이 안 받지?’ 하고 옆자리를 같이 볼 수 있는 어떤 여지, 어떤 공간이 있어야 돼요.
 

오늘날 현대인들은 그 여지를 다 째버렸습니다. 말씀을 째버렸어요. 그냥 자기 몸뚱이가지고 ‘하나님, 최선을 다했습니다. 정성을 다했습니다.’ 맨 날 최선을 다 했대. 최선 다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냥 너 사는 대로 살라는 겁니다. ‘너 원래 돈 좋아하잖아.’ 남자들이 밖에 나가서 나는 남자다, 하지만 사실은 남자라 하는 것은 반찬뚜껑 열어주는 것 외에 아무 가치가 없어요. 반찬뚜껑 잘 안 열릴 때 그거 열어주면 ‘와, 남자는 남자다.’ 하지요. 그것 외에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나라는 신을 믿으니까 안 그런 척 하고, 뭔가 대단한 척 하고, 우주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손에 넣는 줄 알고, 심지어 나로 호 로켓 쏘면서 거기에 돼지머리 차려놓고 절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의 한계를 넘어가면 초월로 넘어가는 담벼락이 보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은 종교입니다. 초월하지 마세요. 그냥 사시라니까. 그냥 사시되 지금 서서히 무너져 가는 나, 그 무너져 가는 쓸모없는 나를 쓸모 있게 사용하는 것은 오직 말씀 안에서만 쓸모가 있는 거예요. 충분히 고물 되세요. 충분히 중고 되어야 되고 충분히 고장 나야 돼요. 모든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못하는 것은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난 거예요. 그런 것에 대해서 누가 가르쳐 준 적도 없고 가르쳐 줄 능력도 배울 능력도 없고 처음부터 우리는 그런 자질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질 자체가 없어요.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 치면 돌아서면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고 떠벌이는 자질, 재주, 그것은 안 가르쳐줘도 우리에게 충분합니다. 6살 먹은 태민이가 와서 “목사님, 어린양의 피로 어떻게 우리가 천국 갑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로봇의 다리가 부러져서 지금 본드로 어떻게 붙이고……, 전부 다 자기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태민이가 커서 오늘날 우리가 된 거잖아요. 결국 자기가 평소에 이야기하던 것만 이야기하는 겁니다. 신을 어떻게 섬겼고, 교회에 어떻게 봉사하고 충성했고, 전기가 안 들어오는데 예배시간이 늦어질 때 어떻게 고쳤고, 전부 다 자기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거하고 천국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네가 뭐라고 해도 이미 다 이루었으니까 그 다 이룬 것을 네가 평소에 하던 대로 드러내는 본색과 늘 대비하면서, 본문에 뭐라고 하느냐하면 25절,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비로소 이 말씀이 나오잖아요.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주님은 항상, 우상만 만들고 우상만 섬기는 재주를 갖고 있는 우리들, 나라는 우상을 만들어내는 그 재미로 평생을 살아가는 우리로부터 오히려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하는 찬양을 받으실 분으로 높입니다. 이 모든 작업은 우리가 열심히 한 작업이 아니고 주께서 지금도 이 자리에 있게 하신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태생을 우리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속에 쌓인 의지가 있어서 내 맘에 안 들면 다 없애고 싶은 충동을 우리는 억지로 억누르면서 하루하루 버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마저 익히 아시는 주님, 다 아시고 예수님을 대신 보내셨으니 대신 보내신 그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거뜬히 영생 주는 하나님의 의로움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으로 인하여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