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9강-하나님의 관심사(2;5-11)이근호121125

아빠와 함께 2013. 2. 7. 11:14

하나님의 관심사 (롬 2:5-11)

음성      동영상

 이근호 12-11-25 13:44 
하나님의 관심사

2012년 11월 25일                           본문 말씀: 로마서 2:5-11

(롬 2:5, 개정)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롬 2:6, 개정)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롬 2:7, 개정)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롬 2:8, 개정)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롬 2:9, 개정)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롬 2:10, 개정)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롬 2:11, 개정)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세상은 시작점이 있고 끝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진노, 그리고 그 ‘날’이 나옵니다. 특정 날짜로 세상 망하는 날이 지정되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구태어 사도가 언급할 필요가 없을게 아니겠습니까? 가만히 두어도 저절로 망하니까요. 이 끝날을 언급하는 이유는 복음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 배경으로 시작점과 끝점을 언급할 수 밖에 없습니다. 끝점은 영생얻을 자와 저주받을 자로 갈라집니다. 뱀의 혀 끝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시작과 끝 점 중간에, 이 갈라짐을 결정하는 지점이 있어야겠지요.

그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 즉 십자가를 언급하십니다. 십자가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영생과 저주라는 속성으로 모든 것이 마감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의의는 로마서 8:33-34에 의하면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가 됩니다. 죄는 분명히 지었는데 십자가를 안에서는 그 죄가 ‘의’로 전환되어 있어 버린 겁니다.

이것은 죄지은 우리가 잘한 짓을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를 지은 우리를 상대를 하신 예수님께서 옳은 일을 하셔서 그 죄마저 의로 전환되게 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 죄가 공로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죄인들이 필히 등장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말보다 마차가 앞선 것과 같습니다.

원래 수레 앞에 말이 있어 수레를 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수레가 앞서고 말이 뒤쪽에  있다면 도무지 말도 되지 않겠지요. 사람들의 논리는 이러합니다. 원인이 결과보다 앞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천지는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하면, 인간들은 다음과 같이 묻게 됩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지요?”

세상이 멸망한다는 말을 하면, 사람들은 “망하는 당사자에게 허락 맡고 멸망시켜서 멸망시켜야 되는게 합당하지 않는가요?”라는 식입니다. 실은 하나님의 뜻은 이러합니다. 모든 게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생겨나야만 하는 것들입니다. 세상 시작과 끝이라는 것도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위함입니다. 죽음이 존재보다 앞선 겁니다.

즉 ‘죽기 위하여 존재해야만 하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기 위해서 세상은 존재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유대인과 헬라인’을 따로 구분하고 강조하는 투로 쓰여져 있습니다. 이 말은 복음이라는 것, 십자가라는 것,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 유대인과 헬라인 구분지음과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인간이라고 다 같은 인간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통해서 특별히 보여주고 싶은 하나님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메시아를 고대하는 자들에 의해서 메시아가 살해당했다는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겁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세계를 어떤 식으로 보았기에 하나님 자신이 사람들에게 맞아주는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실체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저 하나님 말씀이다 하고 지키기만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 말씀이 자기네들의 숨은 진실을 까발리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기원전 586년에 남, 북 이스라엘이 다 망했을 때도 그들은 “우리는 힘이 없어 망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성신 받은 선지자들의 생각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우상을 섬겼기에 마땅히 망해야함”이라는 생각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주변 나라에 비하면 너무 초라하고 힘이 부족했기에 망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자기보다 강대국이 집어삼켰기에 자신도 힘을 키우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 유다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천상회의까지 첨석하다 내려온 성신받은 선지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에 저주받았다는 겁니다. 그 속성이 일관되게 움직이게 되면 결국 그들은 자기네들이 손꼽아 기다린 그 메시아를 자기 손으로 실해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십자가 피를 그렇게 생산된 겁니다.

즉 인간의 근원적 죄,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복을 따내겠다는 주장에서 비롯된 겁니다. 예레미야 44:17-18에 보면,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반드시 실행하여 우리가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 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궁핍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합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본심입니다. 그들은 혹시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짐짓 그들이 원하는 바가 충족되리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을 하나님께서 놓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십니다. 이것은 곧 이념입니다. 이념은 마음의 태도를 묻게 됩니다. 마음에서 비로소 자발성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그 죄를 파악할 능력이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 이세벨과 아달랴라는 두 여자가 나오지만 정작 오늘날의 잣대로 보면 그들이 그토록 나쁜 여인이라는 인상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망하면서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에 준해서 새로운 ‘유리 구슬’ 같은 것들을 남겨두었습니다. 그것은 곧 ‘성령 안’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안에 있을 경우에만 ‘정죄함’이 없는 겁니다. 인간의 그 어떠한 노력으로도 유리 구슬 밖에서 유리 구슬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3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의 마음에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면 세상적인 이득과 상관없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안다는 유대인들이나 말씀도 모르는 짐승같은 헬라인이나 모두 다 그들 마음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이 그들의 본심입니다. 이것은 십자가 앞에서 그대로 노출하고 인정하는 겁니다. 이것이 정죄함이 없는 사람들의 사는 모습입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존재 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선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11-27 13:39 
9강-롬2장 5-11(하나님의 관심사)1211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2장 5절에서 11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0페이지입니다.
 


로마서 2:5-11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본문 5절에 “진노의” 그 다음에 “날”로 되어 있습니다. 달력에 날자 표시를 해놓는 이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진노, 심판하시는 특정 날이 있다는 거예요. 그것을 우리는 마지막이라고 봅시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봅시다. 성경내용은 간단하게 되어버려요. 시작이 있었으니 끝도 있으리라, 끝은 하나님의 진노로 끝이 나게 됩니다. 그리고 7절에 보면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여기서 영생이 또 나와요. 시작했다, 끝났다, 끝에는 진노 받을 사람과 영생 받을 사람이 나타난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시작과 끝 그 중간에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이것을 로마서 1장에서는 기쁜 소식, 두 자로 하면 복음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이야기하는 것은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 전제는 시작이 있고 끝날 날이 있는데 그 시작과 끝날 날을 염두에 두시고 여러분들이 복음이라는 것, 하나님의 의가 왜 나타나야 하는가를 여러분이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라는 조로 사도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마지막이 있다는 것, 진노의 날이 있다는 것, 그리고 영생 얻을 자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중간에 하나님의 의가 있다면 그 다음부터 우리가 궁금한 것이 있어요.
 


처음 시작할 때는 같이 시작했다가 마지막에는 뱀의 혓바닥처럼 서로 만날 수 없고 화합될 수 업는 두 개의 노선으로 갈라지거든요. 그 갈라지는 갈림길, 갈라지는 갈림길에 무엇이 기준으로 제공되었기에 둘로 갈라지느냐 그 말입니다. 그 기준을 객관식 문제로 낼게요. 마지막 때에 한쪽은 지옥가고 한쪽은 영생 얻어서 천국 가는 갈림길에 놓인 그 기준이 뭐냐? 객관식으로 문제를 내 드릴 테니 속으로 맞춰보세요. 1) 교회 2) 가정 3) 대통령선거 4) 십자가. 자, 십자가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복음이고 교회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가짜에요.
 


그 갈림길, 마지막에 영생을 얻을 것이냐 지옥 갈 거냐를 결정하는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왜 교회가 아닌가, 교회는 충성 하는가, 안 하는가, 그것으로 결정되는데 교회는 근본적으로 우리 죄를 다 들춰내는 역할을 해주지를 못합니다. 교회는 척, 척, 척만 하면 돼요. 믿는 척, 전도하는 척, 찬송하는 척, 헌금하는 척, 그 척만 하면 때우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이런 말씀 있어요. 성경이 이런 점에서 참 어려워요. 9절에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라고 했어요. 그냥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환란과 곤고가 있다’고 하면 될 것을 왜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라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구분지어서 이야기하느냐 하는 이 문제, 이것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고 10절에 봐도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여기도 유대인과 헬라인을 구분지어 놓았어요. 왜 구분지어 놓았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그 의가 지옥이냐 천국이냐를 결정하는 갈림길입니다. 왜, 모든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것이 전제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냥 복음을 믿으세요, 하면 되는데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 이것을 왜 구분지어 놓았느냐 하는 거지요. 그 이유가 제가 방금 전에 객관식으로 문제를 내면서 교회입니까, 십자가입니까, 라는 취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형식적인 것으로 소속되고 등록되면 자동으로 영생 얻고 축복받는 쪽으로 사람들을 소복이 모아놓았어요.
 


지금도 싸우고 있지만 얼마 전에 가자지구를 폭격했던 유대인들, 뉴스에서 유대인들을 보게 되면 뭔가 머리에 쓰고 있어요. 유대인 표시를 하기 위해서 머리에 뭔가 쓰고 있어요. 텔아비브라는 것이 뭐냐, 지중해 북쪽지점에 있어요. 남쪽에는 가자지구가 있지요. 거기에 무장 단체사 쏜 로켓이 막 날라 오거든요. 이 이야기는 오늘 본문에 유대인이 나오니까 하는 이야기에요. 여기에 유대인과 헬라인을 구분지어 놓았는데 그 유대인들이 시작과 끝이 있다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서 그것을 어떻게 소화시키는가 하면 자기 안에서 형식적인 조직체로 전환을 시켜 놓은 겁니다. 그것이 오늘날로 하면 교회라니까요.
 


시나고그(회당, Synagogue)라는 것이 모인다는 뜻이거든요. 여러분은 신학을 전공하지 않았지요. 구약에서 마지막 나오는 성경이 말라기입니다. 그 다음에 신약성경이거든요. 말라기와 신약성경 사이에 400년의 간격이 있어요. 400년 동안 뭘 했을까요? 400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 이야기를 이번 겨울수련회에 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해도 안 올 사람은 안 오지만. 성경 구약 끝나고 신약이 될 때 400년의 기간이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 400년동안 사람들이 가만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뭔가를 했어요. 그 400년간 만들어놓은 것이 있어요. 유대교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 재료가 뭐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이디어를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은 다 끄집어냈어요. 이런 사실을 우리가 빠뜨릴 수가 없습니다. 교회나 교회 목사들이 사람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서 천국에 보내주려고 하는 그 모든 시도는 그 400년 기간에 미리 선수 쳐서 다 해 본 겁니다. 그리고 그400년 간 그들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끌어서 천국 보내려고 한 그 노력이 결국 무엇을 야기 시키는가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게 만든 거예요. 사람을 종교적으로 구원시키고자 노력했던 그 노력이 결국 사람을 지옥에 더 가깝게 가면서 인간의 죄의 깊이를 다 보여준 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보고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너희가 하나님의 자손이라고? 과연 그럴까? 내가 보기에 너희 애비는 악마다. 너희는 악마의 자식이고 뱀의 새끼다.” 이렇게 욕을 했습니다. 왜 거저 준다는데, 거저 준다는데 행동으로 폼을 잡았느냐는 말입니다. 인간은 폼 잡는 이것이 타고 났습니다. 거저 준다는데 왜 폼을 잡았느냐는 말이지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책 제목도 있어요. 제가 제목을 그렇게 정했습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물을 수 있는 죄가 날라 가 버렸다는 겁니다. “너 죄 있지?” 하고 다가서도 “어디 갔지?” 없어졌어요.
 


이 땅에서 밥 먹고 살려고 노력한 그 모든 죄가 사라졌어요. ‘누구십니까? 누가 함부로 내 허락도 없이 내 죄를 가져갔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 보면 내 죄가 거기 다 있는 거예요. 귀중품을 우리가 어디에 보관합니까? 은행에 보관하잖아요. 도둑이 들어와서 이 아파트에 무슨 귀중품이 있나 싶어 보는데 아무것도 없어요. 결혼반지고 뭐고 하나도 없어요. 이것이 어디에 있는가, 은행에 넣어놓은 거예요. 물론 있는 집 이야기지 없는 집은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의 그 많던 죄가 어디로 이전이 되었는가를 보니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들어 있어요.
 


그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의 피가 쏟아집니다. 그러면 우리가 평생 동안 살아보겠다고, 살아보겠다고 애썼던 이 모든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만나서 죄가 의로 바뀌는 거예요. 이 말은 아주 조심스럽게 해야 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죄지은 것이 의로 바뀌었다 할 때에 어떤 점에서 조심해야 되느냐하면, 내가 죄지은 짓이 잘한 짓이라고 바뀌면 곤란합니다. 내가 죄 지은 것을 잘한 짓으로 하는 그것이 아니고 네가 죄 지은 것은 죄 지은 것이고 그것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의로 바뀌어 지는 거예요. 의로 바뀔 때는 나의 의로 바뀌어 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로 바뀌어 지는 겁니다.
 


더 쉬운 말로 번역하면 하나님의 멋진 솜씨로 바뀌는 겁니다. 죄를 재료로 뭔가 레시피가 들어갔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의로움으로 맛있는 요리가 되어서 하나님의 천국 보좌에 바쳐지는 겁니다. ‘이 인간이 이렇게 죄를 지었는데 나 예수가 이것을 이렇게 의로 바꿨으니 아버지 하나님 저 잘했지요?’라고 내세울 수 있는 그 꺼리, 재료로서 우리의 죄가 거기에 뽑혀서 가는 겁니다. 우리로서는 부끄러운 설명이 되겠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회개함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한 짓이 예수님을 저렇게 아프게 했구나, 예수님을 이렇게 죽게 한 요인이 되었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죄를 지었는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피를 흘렸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 말을 해도 참 어렵게 한다, 할 수 없어요, 이 복음은 사람의 이해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거든요,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다, 이렇게 되면 그것은 아니거든요. 이렇게 돼요. 예수님께서 피 흘릴 것을 이미 작정을 하셨고 그 예수님의 피가 왜 필요한 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후차적으로 자기 택한 백성이 죄를 지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렵다는 말을 먼저 언급한 겁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죄밖에 지을것이 없는 이유가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더욱더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것은 논리상 어떻게 돼요? 말이 앞서고 마차가 뒤에 붙는 거예요. 원래는 그래야 됩니다. 그런데 수레가 앞에 있고 말이 뒤에 있는 격이 되어버려요. 그것을 우리가 성령 안에서 용납이 돼야 됩니다. 그것을 설명할게요. 제가 설교 시작하면서 성경전체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했잖아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이것에 대해서 ‘목사님, 우리가 그것은 이해가 됩니다.’ 하는데 그것은 이해가 될 말이 아니에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말이 절대로 이해될 말이 아닙니다. 이것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기적을 받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거예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들어서 시작이 있고 끝도 하나님이 마감하신다, 이것을 누가 믿습니까? 이것을 믿을 사람이 없어요. 왜 그런가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만들었어요? 그래요? 그러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어요?” 대번에 입이 근질근질 하면서 이 소리가 튀어나오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이 끝을 만들었다고? 끝을 네 마음대로 만들어? 우리는 끝이 되기 싫은데? 네가 뭔데 네 마음대로 끝을 맺어? 우리한테 허락을 맡아야지.” 이게 막 속에서 올라온다니까요.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들었다, 이렇게 주일학교 학생한테 이야기하면 “그러면 목사님,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어요?” 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
 


사람들은 말이 앞에 있고 그 말이 끄는 수레가 뒤에 있는 그런 논리만 꽉 차 있다니까요. 시작이란 말을 끄집어내도 내가 이해하는 시작으로 납득을 해야 되고 마지막을 이야기해도 내 허락 하에 마지막이 되어야 돼요. 우리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이 언제 자기 자신의 본색에 접근되느냐 하면 신을 밟고 신을 모독할 수 있어야 비로소 그 현장에 나의 진실한 면이 보입니다. ‘나는 이정도야.’ 신을 밟고 신의 모든 말씀마저 모독하는 그 즐거움, 그럴 때 그것이 진짜 인간의 자기본래 모습에 접근한 거예요.
 


우리가 이 덩어리를 숨겨놓은 거예요. 숨겨놓고 우리는 성경 보면서 믿는 척을 하는 겁니다. 사실은 자기 자신이 최고 인데. 로마서 1장 28절에 보면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후벼 파도 파이지 않는 저쪽 세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다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천지창조, 그 시작이 있어요. 그리고 끝이 있습니다. 마지막, 오늘 본문에 진노의 날, 날짜가 있어요. 그 중간에 십자가 있어요. 이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되어 있고 그 십자가는 뭐냐, 나중에 영생 얻을 것인가 지옥 갈 것인가 하는 그 갈림이 십자가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을 하나 빠트렸어요. 십자가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있어요. 십자가 져 놓고 하늘나라 승천하셔서 뭔가 하늘에서 특별히 제공한 것이 있습니다. 뭔가 주신 것이 뭐냐 하면 유리구슬 안의 세계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령 안’ 또는 ‘예수님 안’이라고 합니다. 유리구슬을 줘버리면 세상은 그대로 시작과 끝으로 가는데 이미 동글동글한 유리구슬이 세상 군데군데 생기면 그 유리구슬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십자가 안이고 성령 안이고 예수 안이에요. 그래서 제가 아까 로마서 8장에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다고 했잖아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유리구슬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정죄함이 없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유리구슬은 이쪽 세상, 망하는 세상에서 후벼 파봐야 자기 손톱만 빠지고 손가락에서 피만 나요. 이 유리가 보통 단단한 것이 아니거든요. 아무리 연구하고 신학공부하고 성경공부하고 예배참석해도 이 유리구슬의 그 안이 보이지를 않아요. 제가 이것을 투명한 막이라고 표현했는데 뻔히 보고 있어도 그 안에 들어갈 재주가 없어요. 제가 많은 신학 책들을 보면 그 신학자들이 유리구슬 안에 못 들어가고 그냥 바깥에서 구경만 하고 있는 인간들이에요.
 


예수님이 어떻고, 뭐가 어떻고 하는데 본인이 거기에 들어가 본적이 없어요. 왜 그런가,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야 예수님을 주시라 할 수 없다.’ 시작이 있습니다, 끝이 있습니다, 납득이 됩니다. 그 중간에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납득됩니다. 그 십자가에서 지옥가고 천국가고가 결정됩니다, 그것도 납득됩니다. 왜 그런가하면 십자가 안에 우리 죄가 모여서 그것을 주님의 솜씨로 뭐로 바뀌는가, 그 죄가 하나님의 의로 바뀌어서 그 의가 하늘나라 상달되어서 우리는 죄짓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명예와 영광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행동들로 엮여서 우리는 예수님께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같이 천국에서 모여 살게 됩니다, 이것도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이 말로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왜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시라고 할 수 없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설교에서 문제를 너무 확대시켜 놓아서 죄송합니다만 뿌리를 뽑을 때 확 뽑아야 되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문제거든요. 방금 우리가 성령이 안와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싶지만 그것을 알고 있는 내 문제는 어떻게 할 거냐, 그것을 알고 있는 내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말이지요. 본문 9절에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라고 되어 있고 10절 끝에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구분을 지어놓은 이유가 방금 제가 이야기한 조로 유대인들은 이미 교육을 시켜 놓았어요. 시나고그, 흩어진 자기 유대혈통들에게 이런 식으로 교육을 시켜놓았습니다. 교육이면 다 되는 거예요. 모르는 것도 반복해서 가르치다 보면 언젠가는 믿습니다, 할 수가 있다는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교육을 시켜 놓았는데 그렇게 교육 받은 자들이 진짜 예수님을 살해하고 말았어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메시아를 기다립시다. 알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오실 메시아를 환영합시다.” “좋습니다.” 라고 했는데 정작 메시아가 왔을때는 메시아를 기다리던 그 사람들에 의해서 메시아가 살해당한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말입니다.
 


이것을 요새말로 적용하면, “여러분, 우리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오실 메시아를 기다립시다.” “그럽시다.” “메시아는 좋은 분입니다.” “좋은 분이죠.” “자 그럼 기다립시다.” “그럽시다.” 했는데 그렇게 이야기를 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여 버렸다 그 말이지요.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말이지요. 예수님을 기다리고 믿는다고 자부했던 사람들이 예수를 죽여 버리는 이것을.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요. 아는 것을 믿는 것으로 그냥 대치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누구나 예수를 주시라고 할 수 없다는 이 말은 ‘예수님은 주입니다.’ 하는 이것은 누구나 어린애들이라도 가르치면 다 반복을 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은 누구에요?” “주님이세요.” “잘했어요.” 할 수 있는 거지요. 하지만 평소 일상생활에서 과연 내가 주인이냐, 아니면 진짜 예수님이 주인이냐, 그 문제는 우리의 능력을 벗어난 성령의 능력이 임해야 그것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본론 들어갑니다. 본론이 뭐냐,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로다, 그 구분하는 문제를 본론으로 잡고 들어갑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대로 메시아가 오는 것을 고대했던 사람들입니다. 다들 그렇게 알고들 있거든요. 그런데 기원전 586년에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합니다.
 


멸망할 때 선지자들, 그냥 선지자가 아니고 성신 받은 선지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너희들은 너희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망했다.” 말하기야 쉽지요. 너희가 믿는 예수님에 의해서 너희가 망했다, 이것은 말은 쉬운데 직접 대면해서 이야기해보세요. 굉장히 난처한 입장입니다. 이스라엘나라가 남과 북이 최종적으로 기원전 586년에 망했는데 망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위반해서 망했다는 것은 성신 받은 선지자의 주장이고 실제 백성들의 주장은 뭐냐, 힘이 없어서 망했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되려면 영토가 있어야 되고 똑똑한 지도자가 있어야 되고 인력자원이 있어야 돼요. 그 다음에 지하자원 같은 것들, 나라가 밥 먹고 살 수 있는 자원들이 풍부해야 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조직이고 단체고 뭐가 있어야 된다니까요, 돈이든 권력이든 아는 사람이든지 뭔가가 있어야 된다니까요. 다시 말해서 뭐든지 강해야 살아남아요. 모른 척 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뭐든지 강해야 살아남는다니까요, 강해야! 어디 가서 제가 한 소리 들었는데, 참 이 소리는 하지 말라고 했는데 또 해야 되겠네요. 어떤 대통령 후보가 사퇴한 것은 그 후보는 돈이 있는데 거기 붙어 있는 사람들은 돈이 없으니까 ‘내가 미쳤나? 내 돈만 다 빼먹게?’ 그래서 사퇴를 했답니다. 사람은 뭐가 있어야 된다고요. 이스라엘 나라가 자살한 것이 아니잖아요. 보다 강한 나라에게 망했다는 것은 승자는 강한 것이고 패자는 뭐든지 약해서 패자가 된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성신 받고 하나님의 천상회의에 참석해서 진리, 진리, 진리를 외친 선지자들이 “너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망했다.”고 백날 천 날 이야기해도 당사자들은 ‘약해서 망했지, 강했다면 망했겠는가, 약해서 망한 거지, 약해서!’ 맨 날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런 인간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를 나오고 천당을 가요? 마음 자체가 ‘나도 하나님께서 강하게 해 주시면 나도 잘 믿는데.’ 그게 지하자원처럼 안에 내장되어 있는데 거기 무슨 예수가 필요하고 하나님이 필요합니까? 그저 강한 것만 필요하고 그것뿐이지요.



예레미야 4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참 성경말씀에 충격적인 내용이 많지만 이 내용도 충격적입니다. 예레미야가 그냥 선지자가 아니라 천상회의에 참석한 사람이에요. 이미 하늘나라 회의에 참석하고 나서 밑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이거든요. 사람들은 그 말 듣지도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말씀대로 안 지키면 여러분은 망합니다. 말씀에 의해서 망하고 말씀에 의해서 흥합니다.”라고 하니까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내가 당신 말이 맞는지 한 번 시험적으로 믿어봤다.” 요새 말로 하면 내가 교회 한 번 나와 줬다, 그 말이거든요. “우리가 교회를 안다니고 다른 신을 섬길 때는 만사가 형통했다. 가정 잘되지, 애 공부 잘하지, 돈 잘 벌지, 사업 잘되지. 모든 것이 풍부하고 복을 받았는데 우리가 다른 신을 철폐하고 당신이 말한 그 여호와를 믿는 순간 우리는 졸지에 가정도 안 돼, 사업도 안 돼, 애 공부도 못해, 돈도 안 벌려, 이거 당신이 책임질 거야?” 하고 나온 거예요. 그것이 예레미야 44장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많은 대목이 있지만 여러 대목 중에서도 이 대목이 굉장히 짜릿해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지만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맞아죽은 이유가 여기에 나와 있어요.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정녕히 실행하여 우리의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방백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대저 그 때에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렘 44:17,18)
 


숨어 있는 우리의 본심, 감출 수 없는 우리의 본심, 진짜 내 모습, 지금 하나님은 우리의 본심을 끄집어내서 살짝 유도한 거예요. “믿습니다!” “내가 네 말에 안 속는다.” “진짜 믿습니다.” “안 넘어간다, 안 넘어가. 진짜로 이야기해 봐라.” “진짜로 믿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진짜 믿습니다.” “안 넘어간다니까. 네가 사람 속이듯이 나를 속이려고 드는데 나는 안 속는다. 솔직하게 이야기 해봐.” “혹시나 하나님 믿으면 모든 일이 잘 될까 싶어서.” “그렇지! 그런 이야기를 왜 이제서 하느냐.” 사람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가 믿어지지 않는데 특히 믿어지지 않는 것이 뭐냐,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이 만들어졌고 말씀대로, 말씀을 위배하면 망한다고 할 때 이스라엘백성들이 생각한 것이 뭐냐, 믿습니다, 한 것은 혹시나 한 것이고 실제 본심은 뭐냐, 말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만들어 낸 거예요.
 


말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만들어서 서로 소통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어떻게 그 수단으로 사용되는 언어와 단어가 오히려 나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내가 만들어 냈는데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운명을 결정하고 집어 삼킬 수 있는 자격이 과연 있는가, 그 말입니다. 그것이 도저히 믿어질 수가 없는 거예요. 말이라 하는 것은 우리에게 편리하라고 도움이 되라고 만들어 놓았는데 그 말, 신에게 하는 말이라도 인간이 만들어 놓은 말이지요, 하나님께 바치는 말도 우리가 소통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았는데, 그래서 내가 내 말의 창조주인데 어떻게 만들어진 말이 창조주 행세를 해서 그 말을 안 들으면 내가 망한다니, 그것은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거예요.
 


어떻게 말에서 나의 영생이 튀어 나오는가, 그것이 논리적으로 수용할 수가 없는 겁니다. 기원전 900년경에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둘로 나누어 졌어요. 솔로몬이 우상 신을 옹호해서 북쪽나라는 이름을 정통성 지킨다고 해서 이스라엘로 붙이고 남쪽나라는 유다와 베냐민지파가 모인 것인데 유다지파를 따서 이름이 유다가 되었거든요. 북쪽 나라 아합 왕 때에 나라가 잘 되었어요. 아합 왕이 국력을 더 키우기 위해서 이웃나라 공주와 결혼합니다. 지중해 북쪽 현재 시리아 쪽에 페니키아, 즉 베니게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에 공주가 있었어요. 우리는 공주 하면 다 백설 공주 생각해서 착하고 예쁜 줄 아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공주 이름이 이세벨입니다. 공주의 딸이 있는데 그 딸 이름은 아달랴입니다. 성경에서 천하에 악한 두 여인이 이세벨과 그 딸 아달랴로 나옵니다.


그 이세벨과 아달랴가 바알이라는 종교를 수입해서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를 완전히 망쳐놔 버렸어요. 이것은 성경 이야기에요, 성경 이야기. 그런데 성경을 덮고 이세벨과 아달랴를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 보세요. 과연 그 여자가 나쁜 여자일까요? 그 여자를 나쁘다고 질책할 수 있는 기준이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아직도 남아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 이세벨과 아달랴를 나쁘다고 결정짓는 것은 성경에 의해서만 나쁘다, 저주받을 여자라고 되지 오늘날 일반인의 안목에서는 전혀 나쁜 여자가 아니에요. 안 나빠도 너무 안 나빠요. 기업의 CEO에 현실파악 잘하고 나라를 살리기 위한 구국의 여인이고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서 나라를 키워보려고 애썼던 훌륭한 사람입니다. 경제가 중요하지 종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거든요. 그 중요한 경제를 위해서 종교도 양보할 수 있는 열린 마음, 열린 정치, 얼마든지 이것이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나라가 이 여편네 둘 때문에 망했다는 거예요. 그 여자들이 바알종교를 섬겨서 남쪽도 북쪽도 다 망했다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 하나님 믿는다, 마지막과 끝을 믿는다, 심판을 믿는다, 백날 나불거려도 그 여인이 정말 나쁘다고 출발할 수 있는 그런 인식이 과연 우리에게 있느냐는 말입니다. ‘유대인들 생각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우리가 지키겠습니다. 지키면 우리는 복을 받습니다.’ 그 논리가 너무나 단순명쾌하고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지키겠습니다. 지키면 우리는 복을 받습니다.’
 


그들이 뭘 놓쳤느냐하면, 그렇게 생각했던 우리가 말씀을 주신 진짜 하나님을,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우리 손으로 쓸데없는 존재라고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뒤까지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는가?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지키겠습니다. 복 받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예수님을 죽게 했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잘 나가다가 마지막에 네 번째가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보고 말씀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네 속에는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안 들어있는 것처럼 하고 있는데 사실은 네 속에 그것이 들어있다, 그것을 핀셋으로 집어내기 위해서 말씀을 주신 거예요. 간단한 문제에요. 백날 예수님 좋아한다고 해도 실은 안 좋아하는 거예요. 그것을 집어내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여러분, 구원 받는 것 쉽지요? 병든 자라야 의사가 필요하다고 했지요. 병원 갈 때 폼 내고 갈 필요 없습니다. 병원에 가서 보게 되면 병원 올 때 화장 짙게 하고 오는 사람 별로 없어요. 다른 모임에 갈 때는 광내고 가지만 병원에 갈 때는 대가 후줄근하게 입고 와요. 병원에 올 때는 자기가 병자라고 티를 내고 와요. 이것은 주님에게 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속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는 이것이 안 뽑힙니다. 좀 일이 잘 풀리고 잘 될 때, 교회에서 사랑해주고 인정해 줄 때는 주님 잘 믿는 척 하지요. 하지만 교회에서 욕이나 먹고 삐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이고 뭐고 다 싫어요.
 


내가 왜 남한테 욕이나 얻어먹고 있나, 이런 부아만 난다 그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유도해 나가십니다. 요즘 들어서 가을 지나 겨울 되니까 내가 나이 먹는 것은 슬프지 않은데 자식이 늙는다는 것이 그렇게 슬퍼져요. 자식 대신 내가 다 늙었으면 좋겠어요. 자식은 옛날 그대로 파릇파릇하게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자식마저 늙어갈 때 부모로서 감당이 안 돼요. 이 바보야! 왜 늙느냐! 나만 혼자 늙고 내가 다 담당할 테니 너는 옛날처럼 안 늙고 아프지 말라는 말이지요. 유대인들은 자기 죄를 감추기 위해서 종교, 요새 말로 하면 교회죠, 교회를 통해서 자기 죄를 페인트 칠 하듯이 감추는 것에 급급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5절에 보세요.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마음이라 하는 것, 형상이 없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이념입니다. 이념이라 하는 것은 마음으로 표현되는 거예요. “나는 네 형식, 종교적인 것, 교회 다니는 것, 그것을 나는 안 본다. 네 마음이 자발적으로 ‘빼내주세요. 아, 나는 왜 하나님을 싫어하는지 모르겠어. 좀 빼내주세요.’ 라고, 사실은 빼 낼 수도 없어요. 다만 ‘이것을 그대로 가져가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와 만나게 해 주옵소서.’”하는 그 마음. 이 껍데기가 내가 아니라 진짜 나는 아닌 척 하는 그것이 내 모습인데 이런 인간, 그것을 이미 익히 아시고 십자가 앞에 마차를 말의 앞에 두는 것처럼, 말이 앞에 있고 마차가 뒤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차가, 십자가가 먼저 있고 그 뒤에 형식을 주장하는 유대인,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 밥만 챙기고 똥만 싸대는 헬라인, 율법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날 때부터 하나님을 안 좋아하는 그 마음이 티눈처럼 박혀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이 마음조차도 이것이 하나님의 의의 재료가 된 다는 것에 제발 즐거워하고 감격케 하여 주옵소서, 라는 겁니다. 우리보고 고치라는 말이 아니고 “이것도 혹시 필요하시면 빼내가 주세요. 정죄함이 없다는 그 말씀에 돋보이게 하는데 이 정죄 받을 이 짓이 필요하다면 드리겠습니다.”하는 그 자발성. 중요한 것은 우리의 행동이 아니고 마음이 중요한 겁니다. 마지막 때에 “너 그냥 두면 망한다.” “그렇다면 이 마음 빼내주세요.”라는 마음, 어떻게 해도 이것은 껍데기고 진짜 마음은 주님을 싫어하는 이 마음밖에 없으니, 그저 주님을 이길 때 인간답다, 라는 이 따위 생각밖에 없으니 이것을 주 앞에 재료로 드리겠습니다, 이것도 주께서 정죄함이 없다 했으니 그것마저 죄가 안 된다 했으니 그 즐거움이 나의 자발성으로 이어지게 하소서.
 


유대인들은 형식으로, 법대로 했습니다. 시키면 했습니다. 마음이라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에요. 사랑하는 마음이라 하는 것은 말릴 수가 없습니다. 마치 짝사랑하는 것 같아요. 밥은 먹는데 살이 찌지 않을 정도로 예수님에 대한 그 고마움과 사랑, 어느 누가 진짜 내 마음을 알겠습니까?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자기만 혼자 알지요. 주께서는 ‘네가 안 그래도 내가 다 안다.’ 하시고 십자가 피 흘려서 우리에게 들이대십니다. 그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그것이 바로 기쁜 소식, 복음이라고 한 겁니다. 마지막 때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그 중간에 복음이 나타났으니 그 복음은 십자가고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고집부리지 않고 회개하면 영생이 있을 것이라, 너의 모든 행위는 네 마음이 곧 행위로 이어진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저 나 잘되는 것, 그것이 축복이라고 여겼는데 주님의 결정적인 말씀에 의해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그 말씀이 축복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디 가더라도 그 말씀이 늘 우리 속에 살아 있는 유리구슬처럼 주와 함께, 말씀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어디서나 함께 있는 성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