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롬1장 28-32(내어버려두사)1211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장 28-32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0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28-32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성경은 사람을 천국에 보내준다는 책인 줄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천국은 이렇다, 갈래 말래, 사실 이것만 물으면 그만이거든요. ‘천국에 나를 넣어주기만 한다면 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거기에 올인 할 의사가 있습니다. 그러니 천국은 어떻게 가는가만 알려주세요.’라고 우리가 나올 수가 있어요. 사실 천국만 간다면, 천국에 갈 수만 있다면 우리가 어떤 낭패나 손해 같은 것도 사실은 손해가 아니에요. 이익 본 겁니다. 천국만 간다면 남는 장사 한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천국입니다. 들어가세요.’라고 하면 갈 용의가 되어 있는데 오늘 본문 같은 이야기는 왜 여기에 적혀 있느냐는 말이지요.
우리 자신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가 왜 여기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천국은 출입구만 구경하면 안 되고 거기서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모든 드라마나 연속극에 보면 결혼으로 끝나잖아요. 결혼한 다음에 어떻게 사는가는 언급을 안 해요. 드라마 마지막에 ‘드디어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행복했습니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천국은 천국 속에서 살만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사전작업이 뭐냐 하면, 이 땅에서 천국 가는 그것이 다가 아니라 천국에 가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 만들기 작업이 천국 가기 전에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 작업을 위하여 선택, ‘너는 택하신 사람’이라는 호칭을 붙여 가면서 작업에 나섭니다. ‘너는 저쪽 부류와 다른 거야. 너는 저쪽으로 빠지면 안 돼. 너는 천국 가는 그 자체가 능사가 아니라 천국 가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을 여기서부터 훈련받고 지시받고 살아가는 특수한 사람이기에 그런 훈련을 받고 있는 겁니다. 그 훈련 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겁니다. 여기 28절에 보면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라는 언급을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다 맘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마음속에 두기를 싫어한다는 말을 노골적으로 누가 내 귀에다, 내 마음에다가 이야기를 해 준다는 것은 벌써 천국 가기 위한 준비 작업이 개시된 겁니다.
‘자, 한번 뚫어 봐?’ ‘저희 마음’이라는 말이 나오고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구멍을 뚫는 겁니다. 무슨 구멍이냐, 우리의 내면 속으로 들어오는 주사바늘 같은 거예요. 주사바늘로 뚫어서 우리 내면에 통로를 만들어놓고 거기서 우리 내면에 있는 것을 빨대로 쏙쏙 빨아내 보면 나오는 것이 뭐냐, 29절입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이게 쏙쏙 빨려나오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내면에 구멍을 뚫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덧대기 바빴고 추가적으로 자꾸 소유하기에 바빴지 자기 내면에 구멍 뚫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걸 해서 뭐할 건데요? 왜 구멍을 뚫지 않는가? 사람은 실용성이 있어야 돼요.
사람이 사는 이유는 동기부여입니다. 모티베이션(motivation)이라 하는데 사람은 자기의 소망과 희망과 기대를 계속 만들어내 가면서 그것을 뒤쫓아 가는 방식으로 사는 용기나 힘을 생각하는 거거든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우리 바깥의 환한 세상을 근거로 해서 ‘세상이 이렇게 환하다. 그리고 아마 천국은 세상이 이렇게 환한 것보다 더 환할 것이라고 산정을 하는데 그것은 가짜 천국입니다. 천국은 어디를 통하느냐하면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내가 지금 환하다, 멋있다. 그러니까 천국은 내가 더 멋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직통으로 영역을 확장해서 천국이 아니라 이 내면에 주사바늘로 구멍을 뚫어버립니다.
구멍을 뚫어서 우리가 어디로 통과하느냐하면 스스로 자기의 더러운 내면을 경과하고 그것을 통과해서 나오는 장소가 천국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천국을 이야기할 때 먼저 십자가를 지셨잖아요. 십자가 지신 이유가 우리 죄를 대신 져서 십자가라는 말은, 진짜 너의 면목이 어떤 식으로 해결을 봐야 되고 그래서 그 해결 본 너를 천국으로 데려갈 수가 있는 겁니다. 청와대 대통령 만나러 가는 촌의 아줌마가 자기 아들 데려가려 하는데 보니 옷도 더럽고 머리도 안 감고 목욕도 안한지 오래되어서 냄새도 나고 꾀죄죄하거든요. 청와대에 대통령 만나러 가는데 그냥 갈 수 있습니까?
애는 대통령 만나러 간다고 자기 원피스 들고 설치고 있는데 원피스고 투피스고간에 다 버리고 목욕탕에 강제로 데려가서 목욕을 시키는데 애가 자지러지듯이 우는 거예요. “나, 이럴 것 같으면 대통령 안 만나! 청와대 안가! 대통령 만나는 게 뭐가 이렇게 힘들어!” “가만있어 봐. 씻어야 돼. 왜 이렇게 말이 많아?” 엉덩이 때려가면서 목욕 시키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는 청와대 대통령과의 만남은 나 있는 그 모습 가지고 그냥 만나면 된다고 어린애는 생각했지요. 그런데 자기 몸에서 냄새 난다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는 겁니다. ‘이 몸 그대로 신난다. 청와대 제일 높은 분 만난다.’ 그저 좋아 했지요.
하지만 자기 몸이 더럽다는 생각을 먼저 해야 됩니다. 사람들은 전부 다 자기가 건전하다고 여기기에 이 건전한 인간이 건전한 하나님을 만나는데 하등 하자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단정들을 지어요. 그런데 막상 하늘에 있는 우리 하나님 보시기에는 영 아니라는 말이지요. 아니어도 너무 아니고 영 아니에요. 엉터리라는 말이지요. 왜 우리가 영 아닌 존재냐? 마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말씀을 그렇게 하셨어요. 바리새인들이 손 씻고 발 씻고 자기 나름대로는 깔끔 떨고 있어요. 깨끗하게 살겠다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겉만 깨끗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러운데.‘라고 하면서 그 뒤에 나오는 항목들이 있어요.
16절에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여기에 하나 더 추가를 한다면 ‘사람에서 나온 그것이 매일 같이 더럽게 한다.’ 어제까지 괜찮아도 오늘 어떠한 사태를 만나면 그 사태로 인하여 또 더럽게 되는 거예요. 로마서 1장 우리가 보았던 이 본문 말씀이 우리가 보기에 아직까지 우리에게 해당이 안 되지요. 아직까지 우리는 살만 하니까. 하지만 사기를 당했다든지 생활이 곤궁해졌다든지 어떤 위협을 당하게 되면 이런 복수심을 나타낼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께서 이야기하기를 속에서 나온 것이 뭐냐,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부부사이에 아내가 남편한테 굉장히 시달림을 받는다든지 남편이 아내한테 큰 실망을 당할 때 자연적으로 눈을 바깥으로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안에서 만족을 채울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어떤 상황이 주어지게 되면 내가 속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있는 그 무엇이 평소에 나를 이런 식으로 조성해 내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덮고 넘어가는 쪽으로 살아 온 거예요. 아무 소리 하지 마라, 이렇게 덮는 채로 끝나는 겁니다.
주님은 그 뚜껑을 들추려고 하고 우리는 ‘보지마세요. 볼 것도 없습니다.’ 눌러 덮는 거예요. 평생 교회 다니면서 누르는 방법만 배운 거예요. 아닌 척 하는 방법만. 그리고 우리는 멋진 내가 멋진 하나님 만나는 것만 생각하는 겁니다. ‘이 세상은 아름답다. 천국은 더욱 아름답겠지.’ 천만의 말씀, 아름다운 천국 같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질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카메라 들고 왔을 거예요. 한 대도 아니고 몇 대씩 걸치고 와서 하나는 동영상 찍고 하나는 스냅사진 찍어가면서 ‘야, 세상이 아름답지만 좀 미흡하구나. 내가 더 멋진 아름다운 세계를 준비해 놓았으니 날 따라오라.’ 이렇게 했으면 될 문제인데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십자가는 내가 먼저 시범을 보여줄게.’ 예수님이 십자가 진 것이 공동체 때문에 죽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천기누설 같은 건데요. 예수님이 스스로 동맥 끊고 이런 짓 안했어요. 공동체를 유지하려고 들었기 때문에 죽은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서 자기 속을 까발리지 못하고 대충 넘어가는 것은 공동체가 우리를 그렇게 교육시켰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몸이라는 것은 나의 추억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추억도 함께 깃들어져 있어요. 어린 나이에 죽어버리면 자기는 편할지 모르지만 키워준 부모의 아픔과 기억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몰라요. 우리 몸이 우리 몸이 아니고 공동체의 몸입니다.
그래서 가족이라는 것이 그렇게 소중하게 지키려고 그토록 애를 쓰는 거예요. 아빠, 엄마, 자식들이 오순도순 있는 것이 행복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왜 그것이 행복하냐 하면 가족 바깥에서 용납되지 않던 모든 것들도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가정에 들어오면 온실처럼 모든 것이 다 용서가 돼요. 방구를 뀌어도 용서가 되고 젓가락질과 숟가락질도 반대로 해도 좋은 소리로 “얘야, 여기서는 그래도 바깥에서는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 하고 바로잡아 주고 챙겨주고, 모든 것을 용납하니 무슨 천국이 또 따로 있겠습니까? 나의 모든 것을 다 용납해주니 그것이 바로 천국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더러운 세상에서 그나마도 천국 하나 꾸려보겠다고 결혼했고 가정을 꾸몄고 마음을 하나로 모은 겁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이라고.
하지만 그 천국이 울음바다로 변하는 순간이 오는데 그것이 바로 가족 중에 누군가 죽어버리는 순간입니다. 메멘토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격언이 있어요. 우리는 죽음을 그냥 내치면서, 멀리 하면서 살아있는 것들이 행복하게 되고자 애써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일종의 불꽃놀이 같은 겁니다. 불꽃이 올라가는 그 순간만큼은 굉장히 화려하게 보이지요. 그런데 불과 5초, 길게 가면 10초만 지나면 다시 캄캄한 공허한 하늘만 남습니다. ‘뭔가 방금 봤는데 그게 뭐였지? 뭐가 저기서 번쩍였지?’ 번쩍이고 난 뒤의 허전함이 더욱 더 사람을 허무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다시 쏘아 올립니다.
제가 전에 내당동 일동 언덕위에 살았는데 토요일 오후 8 시만 되면 우방랜드에서 불꽃놀이를 해요. 3층 옥상에 올라가서 그것을 봅니다. 공짜로 구경하니까 좋지요. 그런데 끝나고 나면 다시 허전해 지더라는 말입니다. 불꽃놀이를 왜 하는가, 너무 허전하기에 잠시라도 그 허전함을 잊을까 싶어서 축제를 벌이잖아요. 예수님이 우리를 천국 보내는 전략은 그러한 일시적이고 한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에서 탈피하여 연속성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연속성은 그렇게 불꽃 놀이하듯이 잠시 잠깐 기쁨 주고 돌아서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아예 우리 내부를 파고 들어와요. 내부에 파고 들어오면 우리 내부에는 더러운 것만 가득 차 있다는 말입니다.
더러운 것만 가득 차 있는데 그 더러운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에 뭐냐, ‘우리 마음이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겁니다. 이 표어 만들어서 액자 만들어서 집에 걸어놓아야 됩니다. “얘들아, 이리 오너라. 당신도 오고 다 와.” 매일 같이 아침 밥 먹기 전에 쳐다보는 겁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아멘” 세상에 인간에 대해서 이렇게 정확하게 표현한 구절은 없어요. 이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보고 남자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나쁘다고 하면 안 되잖아요. 여자 보고 ‘네가 여자로 태어나서 나쁘다.’ 하면 안 됩니다. 여자로 태어나서 여자인 것을 가지고 그것을 나쁘다고 하면 안 되고 남자로 태어난 것을 두고 나쁘다고 하면 안 되잖아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동안 감추어놓은 우리의 본 얼굴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것을 액자로 해서 거울삼아 쳐다보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는가? 하나님 당신이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다고? 아이고 놀래라.’ 이것이 바로 우리의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교회 다닌다고 해서 이것이 안 바뀝니다. 바뀌면 불꽃놀이 돼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불꽃놀이를 연속성으로 만드는 거예요. 불꽃놀이, 잠시 믿음 좋았다가 사그라졌다가 하는 이것은 불꽃놀이고 자기가 자기한테 속아 넘어가는 겁니다.
‘아, 나 진짜 믿음 좋아.’ 하다가 어떤 일이 있으면 ‘내가 믿는 자가 맞아?’ 자기가 자기한테 헷갈리는 겁니다. 그것 말고 주님께서는 “가만 있어봐라. 내가 너를 연속성으로 만들어줄게. 자꾸 까불지 말고 가만있어 봐. 너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해.” 이게 바로 연속성이에요. 그 늪을 우리가 통과해서 천국을 가는 겁니다, 건방지게도.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줘도 튕겨 나온다는 거예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기존 교회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말씀이다.’ 하거든요. 그 말 맞습니다. 맞는데 ‘그것을 지켜야 영광 된다.’ 하는데 그 말도 맞아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데 문제는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왜 그것을 자꾸 안 가르치고 있습니까?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케이, 맞아요. ‘율법은 지키라고 준 것이다.’ 그것도 오케이, 맞습니다. 그런데 구원받는 방식은 율법을 행함으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룩한 것은 맞는데 그 거룩한 말씀을 지킴으로써, 행함으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구원 받을 것 같으면 예수님 오실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 뜻은 예수님을 앞장세워서 왜 예수님이 꼭 필요할 수밖에 없는가를 주변에 율법을 깔아놓고 도드라지게 보여주시는 거예요.
뭘 행하려고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괜히 그것은 네 기분에 불과한 거예요. 우쭐대는 그 기분, 나도 얼추 주님 모습 닮아가지, 자기 스스로 자기한테 술 취하듯 취하고 싶은 충동, 교회라는 학원에 한 50년 다녔으면 뭔가 발전이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스스로 동기부여를 해서 꾸며낸 조작된 거예요. 그런 것은 환상의 이미지에 불과한 겁니다. 늘 생각할 것은 뭐냐 하면, 우리는 행함으로, 말씀지킴으로 절대로 구원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지금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거 모르면 너무 돌아와요. 돌아도 모로 돌아와요. 교회 가서 막 지키려고 해요. ‘말씀만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하는 식으로. 성경말씀에 오늘 같은 말씀을 주신 것은 개과천선하라는 뜻이 아니고요, 네가 똑바로 하고 바르게 하라, 그런 뜻이 아니에요. 사람은 어떤 상황이 주어짐에 따라서 이럴 수밖에 없는 현상들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몸이 하나의 성경책이게 되는 거예요. 성경책만 성경책이 아니고 우리 몸이 성경책이 되어서 성경책에 기록된 대로 우리가 그렇게 증거물로 동원되는 것이 우리 몸이고 우리 인생입니다. 평생을 우리를 들어서 이 성경말씀은 ‘과연 우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원래 좋아하지 않는구나. 옳다구나! 그렇구나! 성경말씀이 맞네!’라고 우리 입에서 토해내게 만드는 겁니다.
12월 초 대구성경모임을 강구에서 한다는 계획이 있는 모양입니다. 강구에 가면 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꽁치 말린 것이 있어요. 과메기인데 그게 죽 말려 있는 것을 보고 ‘저 과메기가 말려져 있는 상태에서 과연 바다를 생각할까?’ 과메기가 되면 바다를 잊어야 되는 겁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히 꽃게 조림처럼 말씀으로 졸여버려요. 통조림을 만든다 할까요, 우리를 말씀으로 절여서 깡통에 담아버려요. 우리가 생각했던 천국, 예쁜 나라, 멋진 행복의 나라, 잊으라는 말이지요. 오늘 본문 끝에 보면 31절, 32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어떤 사람이 사형을 받는다면, 우리 생각인데요, 사형을 받는 것과 아예 안 태어난 것과 차이점이 뭘까요? 어떤 사람이 태어났는데 나쁜 짓을 해서 사형 받았다. 그래서 그 사람은 사형 받고 처형 되어서 죽었다. 6개월이나 1년 뒤에 보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그 사람이 잠깐 있었는데 없어졌다는 것 하고 아예 안 태어나서 우리 곁에 없는 것과의 차이점이 뭘까, 그것을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 집에 쥐가 있으니까 쥐를 이용해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쥐가 있었는데 옆집으로 이동해서 그 다음부터 쥐 소리가 안 들리는 것과 아예 우리 집에 쥐가 나타나지도 않았던 것과의 차이점이 뭘까요? 아예 우리 집에 쥐가 안타나나면 우리 집은 괜찮은 집으로 스스로 판정을 내리는데 쥐가 들어와서 우리 집에 있는 것 먹을 것 다 뜯어먹고 먹을 것이 없어서 옆집으로 가버리면 그동안 우리 집에는 쥐가 좋아하는 것을 방치했다는 증거물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어차피 죽으면 없어지는 것,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오해들을 하시는데 이렇게 우리가 태어나면서 나중에 죽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사형 받아 죽게 됨으로 우리를 사형이라고 신고하고 통고하는 그 무엇, 우리는 없어져도 우리는 사형 받으라고 통보하는 그 통보는 살아 있는 것이 맞잖아요. 말씀은 살아 있잖아요. 말씀만 살아 있으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제가 신학교 1학년때 이 말씀 듣고 충격에 휘말린 적이 있습니다. 너무 과장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진짜 충격에 휘말렸어요.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렇게 죽 나오는데 3절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지었다고 여기는 것, 존재한다고 여기는 모든 것은 그가 다 손봐서 생겼다는 거예요. 그것을 보고 충격 받은 것이 뭐냐, 그렇다면 나는 없어져도 말씀이라는 분이 계시면 그 분이 나를 또 만들어내면 되잖아요. 그 전에는 내가 버텨서 안 죽으려고 애쓰면서 거기에 예수까지 믿어가면서 ‘주여, 예수 믿으니까 날 죽이지 마세요.’라고 고집과 집착으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고 애썼다고 이 요한복음 1장 2절, 3절 말씀을 보니까 번지점프 하듯이 나에게서 그냥 손을 놔버려도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믿는 거예요, 이것을!
그 전에는 내가 나한테 이만큼 착함의 성과, 교회 다녀서 열심 내는 그 노동의 댓 가, 이런 것을 내가 쥐어야 그런 것이 나를 살린다고 여겼는데 차라리 이것을 툴툴 털어버리면, 물론 내가 털어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주의 말씀이 오셔서 완전히 우리를 무장해제 시켜버리면, 무장해제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우리 내부에 구멍 뚫어서 다 빨아내버리니까 그렇게 우리 내부가 들통이 나게 되면 오히려 그것이 주께서 이미 천국갈만한 사람으로 일을 벌이신 것이다, 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은 겁니다. 이제야 고백합니다만 제가 신학교 갈 때는 구원받기 위해서 필요한 실적과 재주와 기술들, 역량들을 갖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교회 부흥사들 오게 되면 부흥사들에게 뭘 배우느냐? 어떤 사람이 기도를 해서 암이 나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기도 재주도 있어야 되지요. 어떤 정도로, 암 까지는 아니어도 감기정도는 낫게 할 수 있는 기도역량도 있어야 되는 겁니다. 어떤 장로는 헌금을 안했다가 사업이 망하고 난 뒤에 헌금 듬뿍하고 난 뒤에 사업이 원상복귀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헌금도 아낌없이 할 수 있는 배포, 여유, 자비심, 그런 것도 필요하고요. 그러니까 하나하나 놓치면 안돼요. 아까 나온 기도도 빠지면 안 되지요? 기도 빠지면 안 고 그 다음에 헌금 기술, 그리고 자기만 구원 받으면 염치없잖아요. 우선 가까운 자기 일가친척부터 전도해서 교회 데리고 와야 되는 그것도 빠지면 안돼요. 전도기술도 가져야 돼요.
그리고 먼 나라는 못가니까 그것은 선교비로 대충 충당하면 돼요.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총 맞을 일 있습니까? 안 되거든요. 먼저 간 사람에게 선교비 보조하면서 선교에 동참했다는 성과도 챙겨야 되고……, 챙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그 중에 또 있는 것은 교회 올 때는 양복 빼 입고 와야 된다는 것도 있고, 이렇게 챙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계속 새로운 기술 연마의 노력을 할 수밖에 없어요. 이것도 버리면 안 되고 또 계속해서 채우고 채워서 ‘완벽하지는 않아도 이만하면 하나님이 섭섭다 하지는 않겠지.’라는 것을 계속 채워나가야 되는데 요한복음 1장 3절에 보니까 ‘네가 너를 건지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건진다.’는 거예요.
그런데 말씀이 건진다는 그 티는 어디서 나느냐, 네가 그동안 헛짓 했다는 것을 다 까발려 내는, 우리 외부가 아니고 내부를 CT촬영하듯이 까발리는 그 작업 자체가 이미 구원 대상자가 되었다는 그 증거가 되는 거예요. 보통 병원에는 X-선이나 CT촬영해서 질병이 확인되면 약을 주잖아요. 그런데 구원받는 이 예수님의 나라에서는 약은 없고 계속 촬영만 해요. 네 속이 이렇다, 네 속이 이렇다, 계속 찍기만 해요. 왜,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우리가 행한 것은 어설퍼요. 다 어설프다니까요. 전부 다 자기 의, 자기 자랑거리로 다 바뀌어요. 무장해제 시킨다니까요, 무장해제.
이 로마서 본문에 나오는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라고 나오는데 평소에 이런 것을 모토로 해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경험 못하고 가정에서 온실처럼 자란, 청소년이나 초등학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왜냐, 그들은 깨끗하고 착하게 살고 ……, 계모의 학대에 시달리고 언니들의 구박을 받으면서 늘 다락방에 살면서 집안청소만 하던 그 애한테 어느 날 천사가 초대권과 신발을 줘서 파티 장에 갔는데 그 뒤에 어쩌고저쩌고……, 항상 이렇게 꿈을 꾸는 것이 소년 소녀들입니다. 항상 누구보다도 착하고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예쁜 마음, 그리고 사랑이 넘치는 마음, 그렇게 하면 이 땅에서 복을 안 받으려고 해야 안 받을 수 없도록 복이 온다는 소박한 욕심 아닌 욕심을 생각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해당이 안돼요.
하지만 그 애들이 사회라는 공동체, 결혼하고 난 뒤에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밥 먹고 살기 위해서 뛰다 보면 이렇게 어떤 경우에는 무정할 수밖에 없고 무자비 할 수밖에 없고 어떨 때는 분쟁과 사기와 악독과 추악에 공통적으로 공유해서 말려들 수밖에 없어요. 거기서 발을 뺄 수가 없는 겁니다. 집단적으로 사기를 치는데, 회사가 사기를 치는데 나는 안치겠다고 버티면 나가야 되지요. 다 행복한 가정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은 어느 정도로 우리 내부를 촬영해 대냐 하면, 아빠 엄마와 딸 세 식구가 행복하게 사는데 거기에 예수님이 들어오면 그 때부터 불행입니다. 예수님 하신 말씀입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마 7:37)다고 합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7:34)고 합니다.
가정의 날 그런 것을 설교해야 돼요. 다른 시시한 것 하지 말고 가정의 날에 그런 것을 설교해야 된다니까. 예수님은 X-레이 찍으러 오신 분이에요. ‘이렇게 해서 천국가면 행복할거야.’ 그거 아니에요. 통과를 해야 돼요, 통과를. 우리 외부로 확장하고 또 확장해서 나로호 로켓 쏘아 올리는 식이 아니고 우리 내부로, 내부로 들어오는 거예요. 우리가 미처 몰랐던 내부. 왜, 우리라 하는 이것은 실제가 아니고 내부가 조성해 낸 것이 결과적으로 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내부를 통과할 때 사형에 해당된다고 하잖아요. 이 사형에 해당된다는 것에 대해서 ‘사형, 그거 뭐, 전기쇼크 받는다든지 혹은 약물 먹고 죽으면 그만이지 뭐.’ 이렇게 생각하는데 우리 인간이란 공동체에서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면 제가 성경구절을 읽어드릴 테니까 사형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에스겔 5장 8-10절에 보면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너를 치며 이방인의 목전에서 너의 중에 벌을 내리되 네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내가 전무후무하게 네게 내릴찌라 그리한즉 너의 중에서 아비가 아들을 먹고 아들이 그 아비를 먹으리라.” 사형입니다. 우리는 주사 맞고 전기쇼크로 죽는 그것을 사형인줄 알지요. 하나님의 사형은 그것이 아니에요. “아비가 아들을 먹고 아들이 그 아비를 먹으리라.” 차라리 그냥 목을 졸라 죽이지. 사형이라는 것이 뭐냐, 내가 살기 위해서 나의 사랑하는 자들도 나를 위해서 제거대상이 되는 사태 속에서 우리가 그것을 생생하게 온 몸으로 느끼게 만들어서 우리는 죽을 때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왜 내가 죽을 놈이냐 하는 것을 혹독하게 만끽하면서 죽게 하시는 방법을 주께서 사용하시는 겁니다.
‘내가 산다는 것이 남에게 이렇게 피해를 줬구나. 나는 그냥 내가 산다, 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정답은 나는 살아야 된다, 라는 것으로 내가 그동안 살아 왔었구나.’ 사랑한다, 베푼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이 말은 다 나만 살리기 위한 하나의 술책이고 얍삽한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것을 다 들춰내는 작업을 실시를 함으로써 천국이라는 것은 일체 자기 자랑 못하고 오직 나 같은 인간도 구원됩니까, 라는 놀라움으로 연속되는 세계, 나 같은 인간도 이런 축복의 혜택을 입게 되다니 세상에 이런 놀라운 경우가 있습니까, 라고 감동하는 이것이 천국이에요.
제가 지난 대구강의에서 홍해 이야기를 했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건너오고 보니까 자기들만 달랑 건너온 것이 아니라 건너오려고 시도한 무리가 또 있었어요. 그런데 애굽군대의 시체, 애굽군대가 날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칼과 병기와 갑옷들이 해변에 널려져 있었던 거예요. 그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래서 ‘대체 우리가 뭘 건너온 거야?’ 우리 권사님은 아시지요? 뭘 건너왔습니까? 세상에, 죽음을 통과한 거예요, 죽음을. 누구나 죽이는 그 홍해바다를 어찌 나는 안 죽고 버텨왔느냐는 말이지요. 뒤따라오는 애굽군사들은 다 죽었는데.
우리가 지금 살아온 이것이 하루하루 죽음을 통과하는 여정입니다. 우리 주변에 천국 못가는 시체들이 널려 있어요. 그것도 자기 행함으로 자기를 번듯하게 하면서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들, 윤리 도덕으로 도 닦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교회도 많지만 절에 가면 많아요. 절에 가도 많고 향교에 가도 많고 공자왈, 맹자왈, 하는 사람들 많아요. 얼마나 자기가 선하고 원숙하며 자비를 베푸는지, 하는 사람들, 그런 시체들이 주변에 널려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 속에 구멍을 뚫어놓고 거기에 윤리 도덕을 흘려 보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를 거기에 흘려보냅니다.
암석에 구멍을 뚫어서 물질을 주입해서 폭파하듯이 계속 주님의 십자가를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아무리 사람이 완벽 또 완벽해도 십자가 앞에서 완벽할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그 피를 넣어준 것은 피를 믿으라, 가 아니라 피 때문에 너는 지금 통과하고 있다는 거예요. 피가 발리면 그 피 때문에 우리가 통과되는 거예요. 제가 하는 이 이야기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홍해바다를 건너온 사람은 어린양의 피가 묻어 있기 때문에 건너온 겁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너무너무 간소하고 너무 간단해요. 너무 단순하고 간결해요.
피로 인하여 살리라. 예수의 피로 인하여 모든 더러운 것은 다 씻어지리라. 아들이 아비를 먹고 아비가 아들을 먹고, 이것은 완전히 집안이 개판이 되어버렸지요. 아버지가 어린 아이 먹고 아들이 아비를 먹는다는데 아비가 아마도 치매인 모양입니다. 힘이 없으니 묶어놓고 먹었겠지요. 이런 패륜적이고 참혹한 지경을 만들었는데 그럴 때 우리가 얼마나 반발하겠습니까? “이렇게 배운 만큼 배우고 고상하고 나는 이래 뵈도 목사인데 목사가 어떻게 자기 자식을 삶아먹겠습니까 이런 일은 천하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우리의 본색은 불꽃놀이가 아니고 나도 손댈 수 없는 연속성을 갖고 있어요. 그 연속성이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27, 28절에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해놓고 그 뒤에 29절부터 보면,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점점 더한 소리가 나옵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 7:33-37)
범죄 하면 눈 빼라고 하는데 눈이 달린 채로 있으면 여자를 볼 때마다 음란할 수밖에 없으니까 아예 눈을 빼는 쪽이 좋다는 거예요. 오른쪽 한눈 빼면 나머지 한 눈은 음욕을 품지 않습니까? 남은 나머지의 왼쪽 눈이 더 번쩍번쩍 할 거예요. 이 모든 결과가 사형이라고 하지요. 산상설교의 이 말씀을 하시면서 주님께서 누가 토 달까 싶어서 초반에 단정을 지어놓았어요. 내 말을 하나라도 어기면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이것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 받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차라리 그냥 말씀에 맡겨버리라는 말입니다. X-선을 찍을 때 기사가 우리에게 부탁합니다. 손을 뒤로 돌리라고 하는 거예요.
사람이 손을 가지고 뭐든 하는데 손을 뒤로 돌려버리면 우리는 그냥 사진판에 가슴을 댈 뿐이에요. 열중쉬어 자세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는 사람들의 자세로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항상 사형, 죽음이 함께 할 때 그 가정은 의외로 생각지도 못한 행복이 거기서 나옵니다. 부부가 둘 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의외로 주님의 사형, 주님의 죽으심, 메멘토모리, 죽음을 기억하면서 같이 살아버리면 의외로 둘 다 행복해져요. 왜, 둘 다 고집을 안 부리니까. 둘 다 열두 살 애들처럼 하니까. 부부사이에 고맙다는 것, 감사하다는 말 외에 다른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양말 벗은 발로 가리키면서 “재떨이 가져와” 이런 것은 있을 수가 없지요. 그런 식으로 재떨이를 지시하는 그 다리를 잘라버려라, 하는 것을 알고 있다면. 모든 것이 잘릴 일인데 뭘 지시하고 뭘 명령해요? 그저 고맙고 감사하고 그저 천사 같고 그렇지요. 이것은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지금 생각을 잘못 가져서가 아니라 타고난 거예요. 이것은 어쩔 수가 없어요. 생겨먹은 것이 우리는 살인과 투기와 분쟁과 악독과 무자비, 모든 것이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는데 생겨먹은 것이 그거예요. 피부껍데기만 살짝 벗겼을 뿐인데 피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아예 안에 들어 있어서 계속 생산되는 것이 다 나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이 말씀을 주께서 왜 하셨는가? 죄인을 부르러 와서 의인되게 하기 위해서는 죄인 됨이라는 인간을 새롭게 구성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죄인인데 네가 아는 죄인 말고 하나님이 보는 안목에서의 죄인을 새로 구성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재편성하라고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얼마나 즐거운 말씀입니까? 비로소 나는 이런 인간이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와서 죄인을 위해서 피 흘려서 그 피로 말미암아 죽음을 통과해서 천국에 가기 때문에 그 죄인 만드는 작업을 우리 손에 맡기지 않은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죄인 만드는 것을 우리 손에 맡긴다면 우리는 날마다 죄라는 것을 억지로 지어야 돼요. 하기 싫어도 죄를 지어야 되고 강도질해야 되고 살인해야 돼요. 그런데 그럴 필요 없어요. 주께서 어떤 상황을 주어지게 하면 그 상황 속에서 우리는……, 본문 30절에 보면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그 다음에 뭔가 “자랑하는 자요” 동창회 셋만 모이면 자랑 질 밖에 더 합니까? 구역예배 때 모이면 자랑 질 밖에 더해요? 이것은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줘요. 연속성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냥 살던 그대로 사세요. 결론은 또 똑같은 결론이라. 그냥 그대로 사시면 우리는 자기 자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맞고 우리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욕하는 사람이 맞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죄인을 구속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누가 우리의 껍데기를 벗겨줍니까?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죄인 되게 하셔서 그 죄인 되게 하시는 예수 믿으라, 가 아니라 죄인 되게 하시는, 그 껍데기를 벗기는 그 자체가 이미 주님께서 손대고 있는 겁니다. 피 묻은 손으로 대니까 껍데기가 벗겨지는 겁니다. 갓 바위에 가 보세요. 전부 다 빈다고 바빠요. 수능 때문에 빈다고 바빠요. 성당가도 그렇고 교회 가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할때마다 잘난 체 하는 것이 쏟아져 나와요.
그런데 그런 것 하지 않더라도 말씀 앞에서 다시 한 번 주님께서 이야기합니다. “제발 너한테 손을 그냥 놔 버려라.” 그냥 번지점프 하는 거예요. 공중에서 두 팔 벌리고 그냥 몸을 던지는 거예요. 태양을 향하여 몸을 던지는 옛날 그리스영웅들처럼 몸을 던져버리는 겁니다. 몸을 던지게 되면 존재는 굉장히 가벼워지고 내가 몰랐던 이 세계가, 이 공동체가 나에게 강요한 것이고 공동체가 압력을 가한 것이고 공동체가 조작해서 공동체가 원하는 인간 되라고 나에게 그동안 주눅 들게 만들었다는 악한 세력을 우리는 파악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천국이 더 좋은데 이 세상에 맞는 인간되기 위해서 그동안 쓸데없는 노력을 한 겁니다. 기 안 죽기 위해서. 그런데 주님의 방법은 율법의 행함이 아니에요. 착한 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네 모습을 그냥 주님의 X-선 앞에 맡기시면 거기서 행복이 나옵니다. ‘대체 나에게 무슨 일을 하신 겁니까?’ 어떤 CF에 나오지요. 치킨 맛보고 나서 “대체 여기에 무슨 짓을 한 거야?” 하는 것처럼 ‘도대체 주님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어떻게 나 같은 인간도 천국을 다 갑니까?’라는 소스라치듯 하는 놀라움, 그것이 주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을 만들지를 않았고 주님이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모든 생겨난 것이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졌는데 그 중에 하나 우리가 끼어있었습니다. 그 끼어있는 우리를 천국사람 만들기 위해서 작업을 해 오셨고 그 덕분에 우리는 십자가 피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나 같은 인간도, 나 같은 강도와 창기와 세리도 피로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사실, 더 이상 우리 자신에게 어떤 행동을 가하지 않도록 주께서 지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