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강-고전 9장 11-14(신령한 것)1508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9장 11-14절입니다. 신약성경 273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9:11-14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사도 바울이 소통되지 않는 이야기를 또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취지는 이렇습니다. “네 말 못 알아듣거든 신자 아닌 줄 알아라.” 이런 식으로, 약간의 배짱부리는 식으로 또 이야기를 해요. 사도 바울이 톡 쏘듯이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사람 끌어 모으는 것이 자신의 임무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근원적으로 자기의 임무가 없어요. 사도에게는 자기의 임무가 없고 그냥 주님의 임무가 자기를 그냥 사용할 뿐이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구원 문제에 대해서 자신은 이미 자기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어떻게 사람과 사람과의 대화를 시도해보려는 내용이 아닌 이유가 여기 신령한 것이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령한 것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언어로 일치되는 내용을 표현할 수 없어요. 이 신령한 것을.....,
인간의 언어로 일치가 된다면 그건 신령한 것이 아니고 육적인 것이 되는 겁니다. 신령한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언급을 한 것은 거기에 사도 바울이 미리 전제로 깔고 있는 어떤 사건이 있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신령한 것과 신령하지 않는 것이 완전히 최종적으로 분류가 된다는 거죠. 그 사건이. 다른 사건 가지고,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건 말고 그 외의 사건은 결코 신령한 것과 신령하지 않는 것을 구분할 기준이 못 됩니다.
사도 바울이 제시한 기준은 하나밖에 없어요.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나오는, 십자가가 니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를 꼬드기더냐? 그런 이야기 한다고요. 신령한 것들이 유행하는 세계에서 사도 바울이 제시한 신령한 세계와 신령하지 않는 세계를 최종적으로 이미 확정 지은 사건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 십자가 사건은 십자가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짜를 가짜로 폭로시키는 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 기능에 바로 사도 바울 자신이 지금 참여하게 된 거죠.
사람들이 말하는 신령한 것들을 사람들이 얼마나 원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자꾸 세계를 원하게 돼요. 이쪽 세계 말고 저쪽 세계over there, 저쪽 세계인데, 사람들은 자기 말고 다른 세계, 내가 딴 세계를 생각하기 마련이에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세계를 신령한 세계가 아니고 인간들이 살아있으면서 지어낸 세계라고 그렇게 간주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거기에 하나님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있는 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 의하면 그것이 가짜가 되는데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만이 유일하게 이쪽 세계와 신령한 세계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이라는 뭐냐 하면 인간을 죄로 확정 짓는 사건이거든요. 인간을 죄로 확정 짓는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돌아계신 분이 세상 죄를 지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세상 죄를 지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십자가 지신 사건이 우리에게 등장한다는 것은 인간들이 죽어서 천국 가겠다고 하는 것도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끄집어 낼 수 있는 모든 것은 죄가 되죠.
따라서 사도 바울의 말을 극단적으로 계속 밀어붙이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도 없고 뭐도 없냐 하면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없는데 믿기는 뭘 믿어요? 있어야 믿죠. 없는데. 사람들이 하나님이 있고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는 것은 자기가 끄집어낸 거짓말을 자기가 스스로 회수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을 이렇게 상상에 걸쳐놓고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자기가 소통이 되고 자기가 납득이 되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장래에 자신이 들어갈 좋은 자리를 미리 보험들 듯이 확보하겠다는 그러한 속성을 드러낸 겁니다. 그래놓고 자기를 해코지한다든지 자기가 꼴 보기 싫은 사람들을 어디로 다 모으냐 하면 지옥이라는 것을 만들어놓고 거기다 다 집어넣어요. 평소에 나에게 해코지 하고 나에게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그냥 보기만 해도 미운 인간들은 거기다 다 집어넣어요. 보통 결혼하신 아줌마들한테는 남편들이 거기 다 들어가죠.
그리고 무슨 짓을 하든지 나한테 잘해주고 나를 이뻐해주고 나를 사랑해준 쪽은 계속 살아야할 필요 때문에 다 같이 나와 함께 천국 다 보내고. 그러니까 이거는 백 사람 있으면 백 사람의 천국이 다 다르고 지옥이 다 달라요. 백 사람이 하나님 믿으면 하나님이 다 달라요. 사도 바울은 신령함 이란 그것이 그냥 신령함을 외친다고 신비주의나 신령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어떤 사건을 경유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 사건은 무슨 사건이냐, 인간의 자기 죽음 사건입니다. 근데, 인간은 자기 죽음을 요청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모든 것이 자기 살라고 하는 것만 나오기 때문에 자기가 의도적으로 죽고자 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나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인간에게 자살이라든지 또는 순교라는 것도 반드시 그 순교 뒤를 생각하거든요. 순교 뒤를 생각해보면 내가 순교했다 치고, 내가 너무 힘들어서 자살했다 치고, 그 뒤에 그 뒤를 생각하지 않는 자살이나 순교는 없다 이 말이죠.
그 뒤에, 죽고 난 뒤에 남아 있는 그 주인공은 누구냐? 지금 살아있는 자신이 주인공으로 거기에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걸 연속성이라 합니다. 자아의 연속성. 자아는 중단됨이 없다는 겁니다. 자아는 연속되는 거예요. 이 땅에서 교회 잘 다니면 나중에 천국 가서 교회 잘 다니는 내가 다시 천국의 제2의 인생을 사는 넉넉함과 그리고 편안함을 누리는 겁니다. 그것을 살아있는 내가 미리 꿈꾸게 되죠. 그거 내가 지어낸 거짓말입니다.
하여튼 내가 지어낸 거짓말이지만 인간은 거짓말이라도 좋아요. 소망 없이는 못 살거든요. 소망 없이는. 꿈이 없이는 못사는 거예요.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개념과 용어들 그리고 교회에서 설교 들었던 모든 것을 해가지고 그걸 나의 소망으로 집대성합니다. 나의 꿈으로 집대성해요. 나의 꿈과 소망으로 집대성하는데, 이 집대성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죄인 줄을 꿈에도 생각 못합니다. 죄인 줄을.
십자가를 제시하는, 사도 바울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는 단 한 개에요. 뭐냐 하면 신령한 자의 특징은 긴장하지 않는다, 긴장하지 않는 겁니다. 왜 긴장하지 않는가. 더 이상 자기를 안 바라보기 때문에 긴장하지 않는 거예요. 모든 긴장은 자기를 바라봄으로써 생겨나는 거거든요. 자기를 안 바라보니까 긴장할 필요가 없어요. 또 신령한 자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자기 선택을 하지 않아요. 이미 선택 당했기 때문에 선택할 필요 없어요.
드라마 보면 유명한 멘트 있잖아요. “나랑 밥 먹을래? 나랑 살래?” 소지섭이가 이야기했던. “나랑 밥 먹을래? 나랑 살래?” 이건 하나의 선택이란 말이죠. 이 선택이란, 선택이 잘못이 뭐냐 하면 매일 선택을 하는데 이 선택 된 것에 자신이 가두어집니다. 선택 된 것에 가두어져요. 가두어지면 그 가두어진 자기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긴장하기 마련입니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람이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나의 구원이라는 것은 애초에 없었다는 것을 이제는 받아들이는 겁니다. 나의 꿈, 나의 계획, 이것은 나의 오산이었고 나의 착오였다는 것을. 모든 성경 해석의 착오는 내 구원이 따로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내 구원, 내 세계, 내가 부처를 선택하지 않고 예수를 선택했기 때문에 내가 구원받는다면, 그 사람 나중에 치매 걸리면 지옥 갑니다. 치매 걸리면, 늙으면 지옥가요. 지금 분위기가 굉장히 어수선한데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천국은 나의 죽는 그 사건이 메아리 칠 때 그게 천국이거든요.
천국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내가 그리는 세계가 천국이 아니고 이미 우리는 천국을 만드는 작업장, 그 현장 속에 있어요. 우리는 공장 바깥에 나가면 천국인 줄 아는데 이미 천국을 만들어내는 공장안에 이미 우리가 포함되어 있어요. 거기서 천국도 나오고 지옥도 나오는 겁니다. 이게 자꾸 나의 세계라고 생각하니까 천국을 저 바깥에 세워두는데, 이것이 천국 만드는 주님의 세계라고 생각한다면 이 안에서 천국도 만들어지고 지옥도 만들어져요.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 하셨거든요. “천국은 너희 안에 있느니라” 너희 안에 있느니라, 예수님만 두고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들어온 그 자리,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 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지금 동영상이 켜지게 되면 동영상에 빠진 부분을 다시 할 거예요. 지금 신경 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조금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양해할 수밖에 없죠. 지금 이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곰곰이 새겨들어야 해요.
지금 이런 거거든요. 천국은 내가 죽은 그 현장이 천국이 되는 거예요. 에스겔 37장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드는데 뼈 골짜기에서 만들거든요. 근데 우리가 뼈라고 생각해서 이미 뼈가 되었다고 생각해봅시다. 뼈가 된 존재가 ‘천국 어디 있지? 내가 죽어서 저쪽 세계over there에 있을까?’ 라고 생각을 한다면 이것은 말은 살아있지만 주님 보시기에 뼈다귀에 지나지 않아요.
뼈들이 뭘 상상해도 좋아요. 왜? 그거는 가짜니까. 거짓말이니까. 오히려 뼈가 행세를 다하는 셈이에요. 내가 죽었다는 것을 다 보여주는 셈이에요. 지금 인간은 죽지 않아요. 인간은 죽어도 다시 불러내니까 인간은 영벌, 불멸합니다. 죽어도 무덤에서 다시 나오기 때문에, 다시 호출하기 때문에 죽지 않아요. 진짜 죽으신 분은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만 죽은 거예요. 예수님만 돌아가신 거예요. 예수님만.
따라서 주님께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사실은 죽어도 죽는 것을 모르면서 죽는 거예요. 우리는 안 죽는데, 우리가 죽는다고 하는 것도 가짜입니다. 자살한 것 다 헛수고에요. 안 죽어요. 자살해서 죽을 것 같으면 죽겠는데 다시 지옥에서 불러내니까 괜히 공연한 짓을 한 거예요.
우리가 흔히 말한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지금 죽음을 전제로 해서 살았다는 것을 대비해서, 삶과 죽음을 전제로 해서 난 지금 살아있는데 나의 몸은 죽는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죽음을 아는 경우에만 살았다가 말이 되는데 우리의 죽음이라는 것이 가짜거든요.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도 가짜에요. 이 가짜를 가지고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가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라고 이래 이야기하는 거예요.
진짜 죽음은 십자가 사건에 담겨있다고요. 사도 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니가 지금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내가 보기에는 죽어있는 것이다 이 말이죠. 죽어있는데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생겨난, 사흘 만에 부활한 부활의 영이 주어지게 되면 이거는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은 실상은 죽은 자이나 죽은 자라 할지라도 다시 산다, 진짜 제대로 살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판을 새로 짜는 거예요. 판을 어떻게 짜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을 들이대는 것은 판을 다시 새로 짜는 거예요. 우리 개념 자체가 잘못되었으니까, 이 개념 자체가 잘못되었으니까 이 개념의 살았다 죽었다는 개념을 새로 내리는 겁니다. 너희들은 진정한 죽음을 모른다는 거예요.
만약에 한번 상상해봅시다. “선악과 따먹지 마라 끝.” 이랬으면 어떡하겠어요? 선악과 따먹지 마라! 그걸로 끝났으면 아무 의미 없어요. “선악과 따먹지 마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래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이 말은 인간에게 어떤 선택을 말한 것이 아니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선택이라 하는 것은 거기에 갇혀버리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이 선악과 따먹는 순간 인간은 선악과에 갇혀버린 겁니다. 선악과를 갇혀있게 함으로 말미암아 유일하게 가두어지지 않는 분의 세계가 우리 가두어진 세계 바깥에 활기치고 마음대로 활개 치는 겁니다.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거예요. 우리를 이용하고 그게 신령한 거예요. 그게 신령한 세계에요.
그래서 복음을 아는 자나 신령한 자는 그냥 살면 돼요. 그냥 살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우리 몸에 이미 하나님의 구원이 장착되어 있습니다. 그 구원의 요소가 뭐냐 하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고 우리가 의도하지 않고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요소가 우리 몸에 있어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식욕이고 또 하나는 성욕입니다. 식욕과 성욕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온전하게 지배할 수 없어요.
따라서 우리가 지배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그것은 무슨 배후에 연결되어 있느냐 하면 말씀성취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씀성취와. 즉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는 고리가 그겁니다. 제발 좀 죄 좀 지어라! 그겁니다. 어떻게? 식욕으로 죄 짓고 성욕으로 죄 죄어라! 식욕과 성욕으로 죄를 지어라 그렇게 되면 너희가 온전하게 죄인인줄 알 것이다. 그리고 그 죄는 너의 선택에 의해서 감당되고 해소되는 것이 아니고 죄가 너를 지배한다는 로마서 5장의 말씀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7장도 하고 8장도 했습니다만, 사실은 7장, 8장을 넘어왔기 때문에 9장 되었습니다만, 7장, 8장진도 나가도 의미 없어요. 왜 7장 할 때 6장 잊어버리고 8장 할 때 7장 잊어버리고 9장 할 때 8장 잊어버리고 다 잊어버리는데, 그 고린도전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한 이야기는 이겁니다. 결혼이라 하는 것은 이거는 대책 없는 임시 땜빵이었다는 겁니다. 이제 기억나십니까? 결혼에 뭐 아름다운 것이 없어요. 땜빵이에요. 그냥.
동성애자들이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우리도 정식 부부사인 것을 인정해주세요.” 그거 데모하거든요. 동성애가. 제가 동성애 이야기도 전에 했는데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다시 하겠습니다. 이 동성애 문제가 간단해요. 뭐냐 하면 정식으로 남녀 사이가 부부해도 그게 죄가 돼요. 정상적이 남녀가 붙어도 죄가 되는데 동성애는 잽도 못되는데 뭘 정식 결혼해요? 정식 결혼해서 뭐 할 건데? 지금 정식인 부부도 이게 땜빵인데. 그거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얼마나 식욕과 성욕이 대단했으면 기껏 억누른다고 하는 것이 억눌러보는 정도.
그런데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너희들이 신령한 자냐? 복음을 알아? 그렇다면 아내 있는 자는 아내 없는 자같이 하라” 아내 있는 자는 아내 없는 자같이 하라, 이 무슨 뜻이겠어요? 돈 있는 자는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세상 형적은 다 지나간다. 왜 자꾸 죄인이면서도 결혼했다고, 그것도 순결하게, 혼전임신하지 않고 순결하게 결혼했다고 자신이 마치 죄인 아닌 것처럼 행세하느냐.
돈 있는 것 남한테 사회 기부하고 남한테 구제한다고 마치 돈을 제대로 쓴 것처럼 왜 행세하느냐. 돈 가졌거든 없는 자처럼 해라. 돈 모아놓고 착한데 쓰면 되지?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거예요. 교회가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것이 예수님의 정신이라고요? 이게 십자가 정신입니까? 그건 십자가 정신이 아니에요.
교회 나옴으로써 우리가 그동안 살았다는 것도 이거는 터무니없는, 이거는 그냥 덤으로 살았다는 것이, 그게 교회 정신이에요. 왜냐하면 십자가 밑에 모였잖아요. 십자가 밑에. 십자가 증거 해야 되잖아요. 형편상 사사기 강의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오늘 사사기의 일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되게 자비를 베푸는 것 같은데 오늘 본문과 관련이 있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죽으러 왔습니다. 남들 보기에 개인적인 죽음이에요. 예수님께서 그걸 보면서 계속 이야기해요. 내 죽음이 내 사적인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개인적인 죽음이 무엇으로 퍼지느냐 하면 사회적인 죽음으로 퍼져요. 심지어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뭐냐 하면 이 세상 멸망하게 되어 있어요. 멸망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죽었을 뿐인데 이 우주가, 별들이 떨어진다는 거예요. 해와 달이 빛을 잃어버리고. 그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해와 달이 떨어지고 별이 떨어진다는 말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지금 이 세상은 임시 땜빵이라는 겁니다. 하늘나라에 별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에 별이 붙어있는 거예요. 하늘에서 이렇게 떨어지니까, 마치 벽지에서 무늬가 떨어지는 것처럼. 이 현실 세계는, 창조 세계는 신령한 세계의 메아리고 일종의 얼룩무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게 신령한 세계거든요. 예수님의 신령한 세계를 이야기했다고요. 이 예수님의 이야기가 소통이 될 리가 없죠.
예수님의 이야기만 소통이 안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지시를 받은 사도 바울의 말도 이게 소통이 안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에, 소통이 안 되기 때문에, 도저히 육으로 설명이 안 되기 때문에 이렇게, 진짜 전기 나갔다 들어왔다, 동영상 꺼졌다 켜졌다 하는 가운데 이렇게 이상한 이야기를 계속 늘어놓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이게 이해가 원래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이해가 안 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쉽게 이해를 한 것으로 받아들여요.
그럼 어떻게 이것을 쉽게 이해를 하느냐 하면은, 복음으로 일하는 사람은 월급 받아도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말 맞습니까? 복음으로 일하는 사람은 월급 받아도 됩니까? 사도 바울이 이야기할 때에 신령한 것이라는 말을 끄집어내는 것은 그 신령한 것을 누가 독점할 수 없다는 이야기에요. 사도 바울이 신령한 세계에 속한 것 맞아요. 하지만 사도 바울이 신령한 것을 가지고 다룰 수 있는 입장에 있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어떤 인간이 복음 전하니까 돈 내라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개인의 죽음이 곧 사회의 죽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우주가 주저앉죠. 우주가 주저앉습니다. 하늘의 별들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난 뒤에 생명나무가 신령한 세계에요. 그러면 이 폭파하는, 붕괴되는 세계 속에 누가 살고 있는가? 바로 우리 자신들이 살고 있죠. 지금 우리 자신들이 뭘 하고 있습니까? 바로 성전이랍시고 교회 세우고 목사 세우고 월급주고 거기서 신앙생활하고 그걸 정당화하기 위해서 고린도전서 9장 거론하고 하는 거죠.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겁니다. 도대체 어디를 봐서 신자입니까? 어디를 봐서 신자이지요? 도대체 어디를 봐서 신령한 사람이죠? 진짜 신령한 사람은요, 내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데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게 나를 지배한다는 것을 아는 게 신령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더 이상 나에 대해서 어떤 희망이나 어떤 정당함을 꿈꾸지 말아야 된다는 것, 내가 착하게 살아서 그 대로 30배, 60배 열매를 추구하지 말아야 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신령한 사람이에요.
따라서 그런 기대를 못하고 나는 살면 살수록 죄만 증거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인생을 긴장하지 않습니다. 긴장하며 살아가지 않아요. 왜, 약점이 있어야 긴장하죠. 약점이 없는데. 내놓고 죄인인데 무슨 약점이 있어요. 그래서 개인의 죽음이 사회적 죽음 또는 우주적인 붕괴로 이어지면서 거기에 등장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대신해서 등장했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사람들의 종교에 의해서 죽었던 분이 우리 대표자가 되는 거예요. 그 대표자에 대해서 요한일서에 보면 나옵니다. 요한일서 5장 5절에 보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6절,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누구하나 등장하는데 굉장히 요란스럽죠.
여러분들 이 말씀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이 말을 부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공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누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렇게 하면 끝나잖아요. 근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 다음에 물과 피로 임하셨다. 이거 갑자기 물과 피가 왜 등장합니까? 물과 피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죽음과 관련되어 있거든요. 물은 물세례를 말하고 피는 십자가 죽으심, 피 흘리심을 말하거든요.
둘 다 인간의 죽음을, 이 세상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이 예수님의 등장으로, 신령한 세계의 등장으로 이 세상은 무너지게 되어 있고 붕괴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무슨 희망? 무슨 꿈을 꾸십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너지는, 동대구 공사장이 무너졌다는데, 동대구 공사장이 무너지듯이 이 땅에서 무너지면 돼요. 무너지는 식으로 살면 돼요. 긴장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두려워할 것 하나도 없고. 쫓기듯이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걱정할 것 하나도 없어요. 무너지면 돼요.
아니, 더 나갑시다. 무너지고, 무너진 그 위에 두 발 딛고 사시면 됩니다. 그것도 맨발로 딛고 사시면 돼요.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전에서 봉사하는 자는 성전 때문에 산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본문이 그거에요. 이 성전이 뭐하느냐 하면 이 우주의 중심입니다. 중앙부이고 중심이고. 성전에서 이 세상의 대표들이 모이고 이 세상을 대변해주고, 대변의 모델이 뭐냐 이스라엘이에요.
그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기 위해서 뽑힌 사람이 제사장이고 그 제사장이 있는 중심부이고 그 중심부에서 유일하게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유일하게 생명의 샘이 거기서 흘러나와요. 그 생명의 샘이 흘러나오기 위해서 그 중심부가 뭐냐 하나님이 지시한 죽음, 하나님이 아시는 죽음이 반복됩니다. 매일같이 아침저녁으로 어린양을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우리가 그 장소를 평소에 그리워하십니까? 아니면 외면하고 싶어요? 잊고 싶습니까?
평소에, 우리가 평소에 생활하면서 신령한 것을 안 찾아요. 언제 교회 나와 말씀 앞에서 그때 신령한 것을 찾지만 평소의 생활에서 신령한 것을 찾아 헤매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어딜 봐도 신자 아니에요. 이래 봐도 신자 아니고 저래 봐도 신자아니에요. 그러나 그 중심부가 따로 있거든요. 그 중심부를 가지고 구약에서는 성전이라고 합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나오는 것으로 살았어요. 문제는 지금의 성전이 살아있고 지금도 그 중심에서 일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전이 무엇입니까? 물으면 안 돼요. 성전이 어딨습니까? 물어야 돼요. 성전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전은 내가 내 생각 안 하는 그 순간에 비로소 성전이 있음이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성전이 나타남과 동시에 내가 그 성전에서 나를 세울 때 성전은 곧장 사라집니다. 그 자리에 근사하게 된 나 자신이 거기에 또 서 있어요.
이것이 바로 인간이 손으로 포착할 수 없고 인간이 내 소유로 잡을 수 없는 신령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잡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주 앞에 잡히면서 살아가고 있다. 내가 주님 앞에 잡히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하루하루 모든 움직임이 주님의 선택에 의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주님 앞에 갇혀있을지언정 내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선택에 내가 갇혀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 내가 그때 이과를 가야하는데 내가 괜히 문과를 가서 실패했다.’ 그런 쓸데없는 후회를 할 필요 없습니다. ‘아, 그때 나 좋아하는 남자있었는데 그 남자하고 결혼할 걸. 내가 좋아해가지고 완전히 나만 이용당했네.’ 그런 후회는 하지 마세요. 그것마저 사후적으로 주님의 선택이었어요. 그래야만 했습니다. 뭐, 멋있는 결혼했다고 해서 선택 안 할 줄 알아요? 후회 없을 줄 알아요? 인간의 본성은 인간의 현재 인생이 감당 못해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감당되지 못해요.
오늘 설교 말씀은 이렇습니다. 왜 감당 못하는 세계에서 살면서 왜 자꾸 욕심 부리면서 감당하려고 하느냐 이 말이죠. 이 세상 자체가 나와 더불어 무너지는데, 무너지는데 왜 거기서 나 혼자 살려고 하느냐 이 말이죠. 살 필요 없는데, 무너지면 같이 무너지면 되잖아요. 제가 분명이 약속드렸잖아요. 안 죽는다고. 안 죽어요. 죽어도 다시 마지막 때 인자가 무덤에서 다시 불러냅니다. 호출합니다. 안 죽습니다. 백 번 죽어도 안 죽어요. 공산당이 싫어요! 해도 안 죽어요. IS에 걸려 참수 당해도 안 죽어요. 상어한테 물려가지고 백체가 전부 다 흩어져도 안 죽어요. 신자라면 믿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안 죽는 이유가 바로 예수님이 있어서,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했기 때문에 안 죽어요. 그래서 이제는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마세요. 이미 구원에 참여된 상태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 내가 만들지는 않았지만 주어진 구원을 위하여 우리는 오늘도 교회에 온 겁니다. 동영상도 꺼졌고 에어컨 꺼졌고 정전도 되고 전기 기사도 불렀고 이래 된 거예요. 어떤 사람이 술을 먹는다고 술 취한다고 하는데 말은 똑바로 해야 돼요. 그 사람은 술 먹으면 개라고 하는데, 이게 잘못된 말이에요. 술 안 먹을 때 잠시 개 아니었을 뿐이죠. 잠시 개 아니었을 뿐이지 다시 술 먹으면 개 됩니다.
우리가 바른 행동하면 의인 같죠? 의인은 내가 죄인일까? 의인일까? 생각 안 할 때 의인이에요. 내가 의인일까? 내가 죄인일까? 생각할 때 이미 죄인이에요. 왜 자꾸 주님의 세계에서 나를 따로 구획합니까? 나를 따로 뽑아 세웁니까? 사도 바울이 이걸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신자 맞나? 너가 신령한 사람이냐?” 신령한 사람이 맞나? 를 묻는 겁니다. 레위기 6장 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나머지는 아론과 그 자손이 먹되 누룩을 넣지 말고 거룩한 곳 회막 뜰에서 먹을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일한다고 그들이 가져왔죠. 가져올 때 레위 제사장들이 “그래 너희들이 먹여 살려야지. 성전에서 일하는데. 나부터 살아야 너희들이 사는 거야.” 이렇게 해서 받아먹었습니까? 그 사람들은, 제사장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주는 게 아니에요. 이걸 누가 주느냐, 하나님한테 갖다가 하나님이 나한테 주의 일에 참여하라고 주는 거예요. 그래서 먹는 것도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먹는다고. 거짓말입니다. 살기 위해서 먹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먹고 싶어서 먹는 거예요. 먹고 싶어서 먹어놓고 핑계 댈 것이 없어서 살기 위해서 먹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살기 위해서 니 쳐 먹어라 하면 그것은 또 안 먹어요. 배부르다고. 놀고 싶어서 놀아놓고 내일을 기억하기 위해서 놀았다고 이렇게 핑계 댑니다. 꼭 핑계는 나를 집어넣을 때 다 핑계가 돼요.
주께서 먹여서 먹었는데 인간의 죄는 주한테 방향을 잡지 않고 누구한테 방향을 잡느냐 하면 나한테 방향이 와요. “나 살리기 위해서 주께서 주셨구나!” “아닌데?” 우리 살리기 위해서 주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를 살리는 겁니다. 주님이 살아있을 경우에만 우리가 살아있는 거예요.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은 내가 사는 것하고 의미가 달라요. 내가 사는 것은 죽음을 전제로 하고 사는 것이고 주님이 살았다는 것은 이미 부활의 세계, 신령한 세계에서 살았다, 그 세계를 위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양식을 준 겁니다.
따라서 그 양식은 그냥 양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의 생명이 양식이 되는 거예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신 주인공을 봐라. 그 분은 진짜배기 살아계신 분이다. 그게 신령한 것이에요. 그게 신령한 겁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의 긴장을 안 하려거든 종교를 떠나세요. 종교를 떠나버리면 자기 자신을 떠난 거거든요.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 돼요. 자기 자신을 따로 돌보지 않게 되면 돌보는 분이 따로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 돌보시는 분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분이에요. 그 세상 중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거든요.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가 감당치 못합니다. 따라서 주님을 내 맘대로 조종하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는 매일같이 주님한테 조종당하지 않고 조종으로 인도함을 받기 때문에 우리가 쓸데없는 나의 선택과 나의 결단을 믿지 마세요. 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나의 증인 되리라. 이 말씀을 주님이 양보나 취소할 것 같아요? 제가 믿기에는 우리가 죽는 한이 있고 우리가 지옥 가는 한이 있더라도 주님은 자신의 말씀을 양보하지 않았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절대로 어떤 경우라도 주의 말씀을 양보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저는 살겠습니까?” 라고 묻지 마세요. 왜냐하면 “저”라는 단어는 성경 전체에는 없거든요. 예수님께서 양보 안 하신 것에 대해서 우리가 흔쾌히 동의하시면 이미 주님의 능력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그냥 기계입니다. 기계는 언어가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언어는 하나의 껍질이고 페인트칠이기 때문에. 나중에 칠이 다 벗겨지게 되면 안에는 욕망의 권력구조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귀의 세계에요. “니 이러면 죽는데이~ 니 이러면 산데이~” “그래, 그래 내가 착해야지 그래야 살지.” 이것밖에 남지 않아요. 그거는 자기 권력구조밖에 남지 않습니다. 이게 자본주의 사회에요. 우리가 이 무너진 사회에서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over there, 이 바깥에 천국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니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뭘 얻을 줄을 모르고, 돈에 어쩔 줄을 몰라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길이 없어서 당황스럽고 하는 그런 모습 하나하나 속에서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데 니가 참여했다는 그것, 그 사실이 우리가 이미 신령한 자 속에 속한 사람으로서 지금 티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냥 사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령한 세계에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데, 우리는 수상하기 짝이 없이 뭔가 신령한 것을 내 소유로 삼으려고 시도를 해왔었습니다. 그것조차 다 엉터리고 거짓이고 위선이고 페인트칠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정작 우리는 이미 죄인 되어야 될 존재인 것을 받아들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