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강-고전 8장 7-13(양심의 담력)1507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8장 7-13절입니다. 신약성경 272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8:7-13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사도바울이 세상이나 사람을 대할 때 멸망이라는 코드, 멸망이라는 의미를 담고 상대방에게 다가갑니다. 상대방을 볼 때에, ‘잘 생겼느냐?’ 그런 것을 보는 것이 아니고 ‘저 사람이 멸망될 자인가? 아니면 멸망에서 벗어난 자인가?’ 그런 안목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고 세상을 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멸망은 무엇과 연관되어 있느냐 하면, 우상제물과 연관되어 있다는 거예요. 논리가 이래요. “당신은 멸망당합니다. 왜? 우상제물인줄도 모르고 먹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툭 이렇게 말을 던지는 거예요.
우리는 여기서 사도바울이 사회생활 잘하기를 기대하지 맙시다. 우리가 사도바울이 어느 회사에 취직하기를 기대하지 맙시다. 지금 사고방식이 희한해요. 보통 사람은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떤 이익을 줄 것인가?’ 그런 상업적 목적을 가지고 대하는데 그게 아니고 ‘저 사람이 멸망 받을까? 구원될 사람일까?’ 관점 자체가 인식 자체가 멸망을 앞장세우고서 상대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이미 사도바울은 멸망을 경험했고 거기서 벗어난 자의식을 바깥으로 그렇게 표출한 겁니다.
“나 구원 받았어요!”라고 떠들지 않더라도 세상 보는 안목이 바뀌게 되면 남들이 안 알아줘도 이미 그 사람은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늘 느끼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집 계약하려고 온 사람이 “계약금 이걸로 됩니까?” 하면 속으로 ‘당신 멸망 받았어요? 구원되었습니까?’ 그런 관점. 백화점 취직했는데 “안녕하세요, 고객님?” 할 때 그냥 하지 마시고 ‘이 사람이 멸망되었을까, 구원되었을까?’ 참 사회생활하기 힘들지요.
그런데 이 멸망을 사도바울은 우상숭배와 관련을 짓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이렇게 보면 됩니다. 어떻게 일상적인 것이 영적인 세계가 되는가? 우리가 보이게는 일상적인 것인데 사도의 눈에는 그것이 영적세계로 가득 차 있다는 것, 일상에서 영적으로 넘어가는 코스, 그 통로를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은근히 알려준 겁니다. “일상으로 보이는, 평범해 보이는 세상이 곧 그것이 영적 세계입니다.”라고 할 수 있는 그 모티브, 동기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으로 세상을 다시 보는 겁니다. 언약, 무슨 약 종류가 아닙니다. ‘언약’나오면 또 골치가 아프지요. 세상에서 통용 안 되는 용어를 썼기 때문에.
언약이 뭐냐 하면, 모세율법이라고 생각하면 되고, 그 율법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이 있는데 우상 섬기지 말고 진짜 하나님 섬겨야 돼, 라는 내용이 율법 안에, 다른 말로 하면 언약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으로 다시 세상을 조망한다는 것, 비춘다는 것은 이 세상이 단지 인간 대 인간 집합의 공동체가 아니고 이 세상을 있게 한 영적인 기운이 작렬하고 있는 겁니다. 영적인 기운이 작렬하기에 영적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만 멸망되지 않고 살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한 사람은 사도바울의 말대로 당연히 멸망당하는 거지요.
그런데 문제는 멸망당하는 사람이 자기가 멸망당하는 근거를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알지를 못해요. “멸망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세상 멀쩡한데, 잘만 돌아가는데 무슨 멸망이야?” 그것은 현재 영적인 것을 알지 못해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상제물 먹는 것을 조심하라.” 이런 언급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금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살지요?” “언약과 접촉하세요.” “언약이 뭡니까?” “참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처음부터 다루었던 원리원칙이었습니다. 그 원리원칙이 지금도 작렬하고 있습니다. 그걸 포착하세요.” “그걸 포착하게 되면 어떤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까?” “그걸 포착하게 되면 우상이 뭔가를 파악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상이라는 말은 상대방에 대한 무례한 태도일 수가 있어요. “네 신만 신이고 우리 신은 신도 아니냐?” 이렇게 무례할 수도 있지만 무례하고 뭐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뭘 내려주느냐, 하나님이 뭘 꽂아주느냐, 그게 중요하지요. “그러면 그 언약을 어디서 찾습니까?” 하는 질문은 당연한 거고요. 오늘 설교 제목이 뭐냐 하면, “양심의 담력”이거든요. 인간의 양심에다가 그걸 심어버린 거예요. 하나님의 개입인 겁니다. 양심이라는 것, 양심은 신의 계시의 내면화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말은 양심이라는 것은 내가 온전히 나를 장악하거나 점령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내가 나를 지배하고 싶은데 아무리 지배해도 내 손에 잡히지 않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으면서 나를 명령하는 그 무엇, 나를 지시하는 그 무엇, 그리고 나를 고발하는 그 무엇, 그 고발 자, 내부고발 자에요. 그게 양심이에요. 그리고 그 양심은 나를 수갑 채웁니다. 우리는 양심의 인질이에요. 부자 집 가스관 타고 올라가서 털고 도망치기 바쁜 그 와중에도 노숙자 보면 돈 만원 꺼내줄 수 있는 이 착함, 이거 어디서 나왔습니까? 양심입니다.
아무리 ‘나는 극한으로 악하고 싶다.’ 해도 내 악함에 기어이 장악되지 않는 그 미지의 무엇(x) 그것이 양심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양심의 나의 양심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는데서 인간은 불안한 겁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자체가요, 불안불안해요. 뭔가 알 수 없는 두려움인데 그 두려움에 대해서 한마디로 이렇게 질문할 수 있는 거예요. “혹시 약점 잡혔습니까?” 인생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알 수 없는 것에 약점 잡혀 사는 그런 형국’ 그게 인생입니다. 굳이 나쁜 짓 한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 나쁜 짓 한 것 같은 느낌, 이게 뭐지? 굳이 쫓길 만한 일을 한 것도 없는데 경찰관이 “어이!”라고 하면 “저 말입니까?”라고 화들짝 놀라는 이 버릇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아무리 봐도 나쁜 짓 한 적이 없는 사회에 나가면 콩닥콩닥 가슴 뛰는 이 편치 못한 기분, 이건 뭡니까?
약점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약점 잡혀서 문제에요. 약점과 약점 잡혔다는 그것을 구분합시다. 약점 잡힌 거예요. 그 약점 잡힌 것을 나름대로 해소하고자 우리는 내가 마지막 움키고 있는 선함의 아지트, 양심에다 호소를 하지요. ‘양심껏 살자. 양심아! 이제부터는 내가 양심껏 살게.’ 그러면 양심은 ‘갑자기 안하는 짓을 왜 해?’ ‘몰라. 그 이유는 모르겠어. 내가 어디 약점 잡힌 모양이다.’ ‘누가 약점을 잡았는데?’ 그걸 알면 해결하게? 그걸 모르니까 문제인 거예요. 자꾸 쫓겨 다녀요.
그런데 이 양심이라는 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이 못되는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양심 곱다고 해서 봄에 씨 뿌린 것이 가을에 수확할 수 있게 되는 겁니까? 내 양심 고우면 홍해가 갈라집니까? 내가 양심만 고우면 가뭄에도 갑자기 비가 막 내리는 거예요? 내가 아무리 양심 고와도 내 주변 일상에 어떤 변화를 유발시킬 힘이 없지요. 양심은 내가 정작 원하는 환경변화에는 전혀 맥을 못 추면서 자꾸만 나를 닦달 내는 거예요. 남한테는 쪽도 못쓰면서 나만 쥐고, “왜 나만 갖고 그래!”, 나만 쥐고 계속 흔들어대는 거예요. ‘네가 그래서야 되느냐?’ 그러면 우리는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 ‘최선 다하는 그 꼬락서니가 그거냐?’ ‘더 이상 뭘 어쩌란 말이냐?’ 그러다가 ‘그런데 너 지금 누구하고 이야기하는 거야?’ ‘몰라도 돼. 지금 나는 나하고 대화하는 거야.’ 이게 꿈의 대화인 거예요.
자꾸 이런 대화를 하는 이유가 양심이 귀찮으면서도 양심의 힘, 알 수 없이 저벅저벅 다가오는 그 힘을 본인이 애를 써서 막으려고 하는 거예요. 가위눌린 것 같아요. 공포영화에서 여고생이 복도에서 저벅저벅 걸어오듯이 산다는 모든 것이 공포스러워요. 정신 바짝 안 차리면 못 살 것 같아요.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해결합니다. ‘아하, 내가 약점이 많아서 그렇구나. 그렇다면 해결책은 장점을 키우면 되겠네.’ 이렇게 하는데 약점이 많아서가 아니에요. 약점 잡혀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 누가 잡았는데요? 모르지요. 누가 잡았는지를 모르지요. 본인이 잡히고 있으면서도 누가 잡았는지를 몰라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울산에서 성경공부하면서 가룟유다를 언급했는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가룟유다가 죽을 때 굉장히 깊은 의미를 가지고 죽었거든요. 마태복음 27장 3절에 보면,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가룟유다가 자살한 이유는 뭐냐? 뚜렷해요. “내가 죄 없는 사람을 죄 있다고 거짓 증언해서 팔리게 하는데 주도적으로 관여했다.” 여기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까 내가 참 잘못되었구나.” 잘못되었으면 잘못된 것이지 왜 스스로 죽습니까? 아, 이게, 이게 중요한 문제에요. ‘다들 잘못하는데 나만 잘못했어?’ 이러고 살면 되는데 잘못되었는데 왜 자살하느냐는 말이지요. 계속 잘못되었다고 추궁 받으면서 살면 되는데 추궁받기 싫다고 왜 자살하느냐는 말이지요.
그 불안한 양심을 누가 주관하느냐? 사탄이 주관하거든요. 양심의 끝에는 사탄이 있어요. 그리고 사탄은 선과 악 사이에 균열을 일으켜서 일치되지 못하게 합니다. 일치되지 못한데서 우리는 악에게 쫓기게 만들면서 결국은 죽게 만들어요. 사탄이 우리 인간에게 심어준 게 뭐냐?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는 그 인간으로 하여금 나를 만든 창조주를 향하여 창조물이 되레 반항하고 저항하고 비난하고 공격하도록 조치를 한 것이 사탄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너무나 점잖기 때문에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싶어 하지 욕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계속해서 또 계속해서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뭔가 자꾸 쫓기게 만들고 약점 잡혀서 벌벌 떨게 만들어서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나로 하여금 못 견디게 만드는 그런 실존, 그런 삶이라는 것으로 느끼게 만들어요. 따라서 탈출구는 하나밖에 없어요. 자살해서 죽으면 그만이에요. 그러면 내가 비난받지 않지요.
내가 못났다는 것에 내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것, 다시 말해서 내가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기회가 영원히 없어졌다는 사실을 내가 안다는 것이 얼마나 절망스러운가, 그 말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떤 해결책이 없다는 것, 없으면 없는 데로 살면 되는데 그 없다는 사실을 미리 당겨서 그것을 이미 알아챘다는 것이 나를 비참하게 만들잖아요. 내가 못난 것은 알아요. 내가 죄인인 것을 압니다. 하지만 뭐? 그게 전부에요. 대책이 없어요.
가룟유다에게 사탄이 임했습니다. 사탄이 임할 때 주님께서 가장 잔인하게 이야기했어요. 요한복음 13장 27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주님이 가룟유다보고 한 이야기가 아주 간단합니다.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이걸 쉬운 요즘말로 번역하면, “배고프냐? 밥 먹어라.”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잠 오나? 자라. 놀러가고 싶어? 차 몰고 놀러가.” 이거예요. 뭐 유난스럽고 큰 일 아니에요. 일상 해 왔던 일을 주께서는 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일이 공장의 컨베이어, 움직이는 선반이거든요. 저는 그것을 두고 주님이 우리의 일상을 보드 탄다고 이야기합니다. 길쭉한 판 대기처럼 된 것을 타고 노는 것, 스케이트보드, 혹은 서핑보드. 우리로 하여금 하게 하시고 주께서는 자기 몸을 거기에 실어버립니다. 그러면 마귀가 노리는 것은 “신이시여! 잘 보소서. 당신이 만든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한 인간이 당신을 저주합니다. 당신의 자존심, 당신의 명예는 날라 갔어요.” 이게 마귀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마귀가 파놓은 그 덫과 함정에 자진해서 자기 몸을 실어버렸습니다. 마귀는 뭐냐? “신이시여, 마귀 나만 버린 것이 아니에요. 이 사태를 보소서. 하나님이 만든 모든 인간이 당신을 버립니다.” 이게 사탄이 하나님에게 나름대로 대드는 무기거든요. 상황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만든 하나님이 “나도 버림받을게.” 해서 거기에 뛰어들어 버렸어요. 하나님을 약 올리기 위에 만든 덫에 하나님이 자진해서 빠져버렸어요. 그리고 십자가에서 하시는 말씀이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주여, 제가 버림받겠나이다.” 하는 뜻입니다.
마귀가 하나님을 벌 줄 수 있는 것은 끝났습니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그것이 마귀가 하나님께 주는 매인데, 징벌인데 하나님이 자진해서 그것을 자기징벌로 받아들였으니까 드디어 마귀한테 어떠한 유황불, 영원토록 유황불을 내려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되었어요. 마귀에 속한 자들이 지옥 가서 당하는 것은 그냥 세월 보내는 식으로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하니이다. 마땅하니이다. 마땅하니이다.” 하면서 영원토록 벌 받게 되어 있습니다. “마땅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을 몰랐었습니다. 나는 그냥 시원한데 앉아 계시는 하나님만 생각했지 내가 저질러 놓은 죄 속에 자진해서 들어오는 그런 하나님을 살아생전에는 몰랐었습니다.”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거들먹거리는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시고 찬미와 영광만 받으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만 생각했지요. 감추고 싶은 내 죄 속에, 나도 미처 모르는 죄 속에 주님이 나보다 먼저 뛰어들어서 아버지로부터 받는 모든 벌을 다 같이 받아내시는 그런 하나님, 그분이 바로 나를 창조했기에 우리는 마땅히 죄인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사전에 몰랐지요. 그걸 모르게 되면 지옥 가는 거예요. 내 주제를 모르면 지옥 가는 거예요. 내가 이 땅에 사는 것이 벌 받는 식으로 산다는 것을 모르면 지옥 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우리를 죽으라고 만들었다는 사실을 모르면 지옥 가는 거예요.
이 세상은 사는 곳이 아닙니다. 만약에 살려고 한다면 우리는 쫓깁니다. 벌벌 떨게 돼요. 우리는 약점 잡히게 됩니다. 이유도 모르는데 조금만 실수해도 사전에 막 고발 들어오는 것 같아요. 우리 주변에 파파라치가 한 2천명쯤 되는 것 같아요. 사진을 막 찍어대는 것 같아요. 자, 우리가 가진 이 약점 어떻게 할까요? 약점을 장점으로 바꿔야 됩니까? 설교 다시 해 봅시다. 지금 제가 뭐라고 했느냐? 중요한 말을 했어요. 양심이 곱다고 해서 세상이 안 바뀌어요. 양심 고와도 내가 원하는 현실로 안 바뀝니다. 내 인생이 안 바뀌어요.
양심은 오히려 나에게 닦달을 낸다니까요. ‘내가 기도해서 이렇게 되기를 원한다.’ 들어주기는커녕 양심은 ‘내가 세상이 바뀌기를 원하고 내 인생이 풀리기를 원한다.’는 그것마저 계속 닦달 내는 거예요. ‘너 지금 쫓기고 있지? 너 누구한테 약점 잡혔나? 왜 그렇게 당당하지 못해? 뭐가 아쉬워서 철야하고 뭐가 아쉬워서 새벽기도를 나가? 너 왜 그런 짓을 해? 왜 새벽기도 하나고 왜 교회 나가고 십일조는 왜 하는데? 지금 네가 쫓기고 있잖아. 그것으로 네가 보충하려고. 어떻게 신세 한 번 고쳐보려고. 네 미래를 좀 어떻게 해보려고 그러지?’ 이렇게 계속 닦달 내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치고 약점 없는 인간 없거든요. 기생 라합의 약점이 뭡니까? 누가 이야기해요. “기생 라합의 약점은 기생이라는 것이 약점이다. 창녀 짓을 한 것이 약점이다.” 그것은 네 생각이고! 그것은 네 생각이고! 주님 보시기에 기생 라합의 약점이라는 것은요, 구원을 잡아당기는 고리에요, 고리. 약점을 통해서 당겨 올리는 거예요. 낚시 줄로 걸어서 올리는 거예요. 그렇게 구원하시는 거예요. 약점을 자랑합시다.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가지고 멸망으로, 파탄으로 몰아넣습니다. 로마서 8장 이야기입니다. “누가 너를 고소하더냐?” 마귀는 양심을 가지고 계속 고소해요. 가룟유다가 얼마나 고소를 당했으며 얼마나 시달렸으면…… 자기 외에 두개의 주관이 있습니다. 자기라는 주관과 마귀의 주관, 그 마귀라는 주관에 얼마나 시달렸으면 나중에 피할 곳이 없으니까 스스로 자폭해 버렸어요. 너무 괴로우니까, 너무 시달리니까. 차라리 내가 죽으면 사탄아, 너는 나를 고발 못하겠지. 결국 해결책이 자폭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우리 입장도, 지금은 숨 쉴 만하니까 자살 같은 것을 생각 안하지만 극한의 순간에는 누구든지 자살을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키나 성격 같은 것은 관계없어요. 누구든지 그런 상황이 되면 그렇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편리를 위해서 가룟유다 처럼 자살의 잠재성이 많은 우리를 미리 앞당겨서 자살하게 만들어버렸어요. 그게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그동안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우리, 그 우리가 그리던 그 천국, 그 천국을 하나님께서는 무너뜨립니다.
‘천국이고 뭐고 당장 내 사는 것도 힘들고 내 맘도 괴롭다. 천국은 나중 문제다. 천국이고 뭐가 다 귀찮다.’ 죽어서 천당 가는 그것이 배부를 때는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그 천국도 무너지게 해요. 세례요한이 이야기한 것이 그겁니다. 천국이 무너진 이야기를 한 겁니다. 너희들이 천국을 기대하고 바라보면서 천국, 천국, 하는데 그 그리던 천국의 천장이 무너져버려요. 그 천국이 가짜였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하는 모든 소리는 고막 안에서 듣는 소리거든요. 그런데 고막이 찢어져버리면 비로소 신의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내가 나 살려고,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어쨌든 살아보려고 애 쓰는 이 삶 속에서, 악은 멀리하고 양심에 의해서, 오직 양심에 의해서 선함을 찾는 그 알 수 없는 쫓김, 약점 잡히면서 뭔가 나도 당당해지고 싶어서 기껏 하는 그 행위가 바로 그 행위거든요. “천국 있습니까? 믿습니다. 예수 있습니까? 믿습니다. 십자가 있습니까? 믿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런 것들을 수집해서 하는데 해봐야 쓰레기에요. 어떤 치매 걸린 80넘은 자매가 사는 빌라는 통째로 쓰레기통이 되었어요. 한 분은 죽었다고 기사 났잖아요.
이겁니다. 내 힘으로 내가 구원 받겠다는 거예요. 그걸 보고 마귀는 박수를 치고 있는 거예요. “조금만 더! 엔진 가동해야지. 열심을 내라, 열심을. 성경에 봐라.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했잖아. 선하게 행동해야지.” 디모데전서 나와요. 선한 양심을 버리지 말라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는 거예요. 그러면 가져야지요. 그런데 그 선한 양심은 어디에 써먹는데요? 내가 쫓기는데 써먹기 위해서. 그거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양심이 찢어져야 빛이 나오지요. 쉽게 생각합시다. 마귀가 인간을 지배할 때 양심만 빼놓고 지배했을까요? 천만의 말씀, 양심까지 포함해서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양심이 있다는 것은 인간이 영적존재라는 거예요. 믿든 안 믿든 간에 이미 영적존재에요. 죽으면서도 왜 죽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무조건 영적이에요. 인간에게는 여분의 것이 있어요. 인간은 자기가 깨닫는 것 이상의 여분의 것이 있다고요. 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아무리 따져도 여전히 남아 있고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다고요.
인간은 자기를 다 알지를 못합니다. 다 포섭할 수 없어요. 포용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영원토록 살기 위해서, 천국가기 위해서 하는 그 조치를 어긋나게 만들어요. 그런데 그 어긋남의 틈 사이에서 비로소 새로운 창조가 나온다니까요. 그 새로운 창조가 이겁니다. 과거에 시달리고 그것을 미래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우리,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우리는 숨 막히듯이 우리는 압축되고 있는 겁니다. 빈 패트병 찌그러지듯이. 우리는 과거 때문에 후회되고 미래의 일 때문에 밀리고, 거기서 찌그러들고 찢어지는 거예요.
찢어질 때 비로소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이 “아, 참 인간 만들기 힘들다.” 하시면서 나오셔서 “네 몸은 처음부터 찌그러지고 빠개지고 찢어지도록 만든 몸”이에요. 평생을 과거의 회한에 시달리고 미래의 헛된 희망에 앞당겨 시달리고, 거기서 예수님이 나오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네가 오늘 아침에 눈 뜨면 너를 위하여 새롭게 창조한 창조의 날인 것을 네가 기억하라. 왜냐하면 내가 날마다 새롭기 때문에.” 새로운 분이 세상을 창조할 때는 창조된 것은 항상 새로운 거예요.
새롭다는 말은 과거를 치워버리는 말입니다. 미래를 버려버리라는 말입니다. 너를 양쪽에서 압박을 가하던 과거도 애초부터 네 상상 속에서나 있는 것이지 없고, 미래라는 것도 원래 없는데 너를 너의 기억의 덩어리로 만들어 놓으니까 우리는 자기기억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 새로움이 나오는데 그 새로움이 언제까지냐 하면 그날 저녁까지입니다. “저녁이 되어 아침이 되니 그날이 첫째 날”이기 때문에.
제가 지금 웃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나 혼자 웃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할 때 첫 째 날, 둘 째 날……, 이게 뭐냐? 인간은 날 바깥으로 못 벗어나고 하루치만 준 거예요. 내일일은 내일 염려하고 내일 되거든 ‘오늘도 또 기적을 얻었구나.’ 하고 오늘 염려는 그 날에 족하다는 말이지요. 주기도문에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틀 치가 아니고 일용할 양식이에요. 인간이 뭐라고 생각하든 하나님은 자기 창조원리를 폭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걸 몰라서 그렇지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라.” 새 아침이 밝았네. 언제까지? 오늘 저녁까지만. 눈 감으면 본의 아니게 죽음에 빠집니다. 아까 교독문 읽었지요?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 사랑하는 자에게 죽음을 주시는도다. “자살? 네가 하지 마. 내가 죽일게. 어떻게? 언약대로. 하나님의 약속대로. 자살해서 죽으나 늙어서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미리 앞당겨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매일 저녁에 죽고 매일 아침에 새롭게 창조되는 그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너희에게 제공함을 너의 찢어진 양심이 알게 될 때 그걸 사자성어로 ‘선한양심’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선한 양심이에요.
그래서 “선한 양심이 뭡니까?” 물으면 자기를 고려하지 않는 것, 이게 선한양심입니다. 자신을 고려하지 않는 것. 자기 생각하지 않는 것. 선한양심입니다. 나 믿음 좋다 하면서 우상제물 맘대로 먹는 것, 너한테는 맞는데 타인이 왔을 때, 타인이 왔을 때는 네 믿음이 그 사람에게 작용하는 주님의 언약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그게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9절에 보면, 오늘 본문보다 더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주 난해한 말씀이 나와요.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이게 무슨 말이냐는 거지요.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고 남의 것이니.” 무슨 말이냐 하면, “네 양심? 네 양심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남을 위해서 네 속에 하루치만 들어 있는 남의 양심이야. 너를 위한 양심? 그런 것 필요 없어. 남을 위한 양심이야.” 남을 위한 계시용이다, 그런 뜻이거든요. 남을 위한 계시용, 언약용, 하나님의 약속. 결국 우리는 이 땅에서 죽어가면서 주님이 실려 있는 컨베이어시스템이에요. 주님이 나를 마차처럼, 리무진자가용처럼 사용해서 나를 타고가면서 남을 구원하는 수단으로서 나를 사용하는 겁니다.
코미디언이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연기할 때 아프지요. 하지만 관객들은 웃잖아요. 그 때 우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집에서 TV를 보고 있는 엄마, 아빠는 관심도 없고, 엄마입니다. ‘아이고, 내 자식이 돈 번다고 저렇게 남 웃기겠다고 고생하는구나. 무릎 안 깨졌나? 보약이라도 지어 먹여야지. 저렇게 망가져가면서도 살려고 하는구나.’ 그렇게 하지요.
마귀의 입장에서 보면 원래 우리는 ‘나를 위한 나’입니다. 나를 위한 나이기에 마귀는 그걸 한껏 이용했어요. “너 지금 잘 되고 싶지?” “그렇다.” “죽어서도 천국가고 싶지?” “그렇다.” “그렇다면 너는 선한 양심을 가져야 돼. 너는 선해야 돼.” 선해야 되니까 자꾸 쫓기는 거예요. 자꾸 살다보면 실수를 하고 죄를 짓고. 젊을 때는 정신 차리지만 나이 한 70넘으면 이것은 인간인지 뭔지 구분도 안돼요. 온갖 것이 다 실수에요, 실수. 말을 하면서도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든 것이 약점이 점점 더 많이 생기는데 문제는 약점이 있다는 게 문제가 아니에요. 약점 잡히는 것이 문제라니까요. 약점을 걸고 쳐들어오는 게 있다니까요? “네가 신자야? 네가 교인이야? 네가 예수 믿는 거야? 때려 치워. 자살해. 네가 무슨 신자야?” 매일 같이 이렇게 고발당하고 고소당하니까. 또 그 말이 맞기도 하고. 도대체 기도를 몇 시간을 해야 하고, 또 성경은 몇 독을 해야 하고, 헌금을 얼마를 교회에 갖다 바쳐야 되고, 교회는 몇 번이나 나와야 되고, 대체 뭘 어떻게 해야 돼요?
나중에 식사할 때 창문으로 보세요. 두 번째 걸린 플래카드에 보면 “백중사십일자장천도점찰기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팔공산 지장서원 981-0000” “백중사십일자장천도점찰기도” 무슨 암호도 아니고 이게 무슨 용어가 이런 게 있을까요? 그 내용을 쉽게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백중이란 음력으로 7월 보름인데 그 날에는 백가지의 곡식의 씨앗을 준비하는 우리나라 고대 풍습이 있습니다. 그게 뭐로 바뀌었는가 하면, 죽은 영혼을 천도, 떠도는 귀신들을 극락으로 보내는 특별 이벤트하는 날이에요. 그날 모아서 바로 보냅니다.
귀신이 떠돌면 떠도는 거지 왜 그렇게 하는가? 귀신이 떠돌게 되면 안 그래도 지금 밥 먹고 살기도 힘든데 자꾸 귀신이 와가지고 약점 잡고 괴롭히거든요. 사업을 하려고 해도 잘 안되고 땅 사놓으면 땅 값 내려가고 매사가 자꾸 꼬이는데 왜 자꾸 괴롭히냐 하면, “네가 왜 공덕을 쌓지를 않았느냐, 왜 남에게 착한 일을 안했느냐, 왜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느냐?” 자꾸 이런 식으로 괴롭히니까 그런 잔소리꾼을 빨리 보내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천도, 그렇게 보내는데 어떻게 보내는가? 낙태해서 죽은 영아들, 떠도는 영혼들을 위해서 점찰, 점을 쳐서 관찰합니다. 내가 별로 나쁜 짓을 한 것이 없어 보이는데 막대기를 던져서 점을 쳐서 ‘아, 내가 모르는 나쁜 짓이 있구나.’ 그걸 관찰해서 그 다음에 참회하는 기도를 하는 거예요. 물론 공짜가 아니지요. 그래야 절이 먹고 사니까. 점찰기도, 참회하는 기도를 통해서 귀찮게 하는 것들은 다 떠나게 하는 겁니다.
자, 방금 제가 예를 들었는데 이 예가 한 마디로 해서 뭐냐 하면, ‘내가 어떻게 하면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느냐?’ 그겁니다. 교회나 절이나 똑같아요. ‘어떻게 하면 내가 나에게 영향을 미쳐서 오늘 죽어도 천국갈 수 있느냐?’ 그겁니다. 이거, 사탄에게 쫓긴 거예요. 딱 하나입니다. 이 질문만 하면 돼요. “주여,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딱 그거 하나만 하면 돼요. 주께서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사탄에게 쫓기게 만들었습니다. 왜? 주님도 사탄이 만든 그 덫에 자진해서 들어갔는데, 창조주도 마귀가 만든 함정에 알아서 빠졌는데 우리가 뭐라고 안 빠져야 됩니까? 이 땅에서 빠져죽어 마땅하지요. 그런 마음으로 살면 돼요.
우리가 가는 곳이 십자가 가는 길입니다. 십자가 가는 그 쪽에서 뭐가 대기되어 있는가? 천국 가는 전세버스가 대기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빌립보서 3장에 보면, “내가 어찌하든지 십자가로 가서 어찌하든지 천국의 부활에 이르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십자가라 하는 것은 뭐냐? 내가 나한테 기대 걸지 않는 거예요. 더 쉽게 해 봅시다. 내 뜻을 세우지 않는 겁니다. 내 뜻, 내 기대를 아예 세우지 않는 거예요.
어떤 인생의 목적 같은 것을 세웠습니까? 미리 앞당겨서 다 헛것이라고 자포자기 하세요. 다 쓸데없는 겁니다. 쓰잘데기 없는 것. 꿈과 기대가 있으면요, 마귀한테 계속 콩닥콩닥 쫓긴다니까요? 밥을 먹어도 밥맛이 없고 밤에 잠을 자도 잠이 안와요. 쫓기니까. ‘내일 되면 좋은 날 되어야 하는데. 내일 되면 행복한 날이 되어야 하는데.’ 그게 쫓기는 거예요. 바로 그게. 내일 되어도 똑같아요. 제가 아는 진리는 뭐냐? ‘20대 때는 40대 되면 좋아지겠지.’ 되어 봤거든요. ‘60되면 좋아지겠지.’ 60 되어 봤어요. 나중에 60넘어보면 그 때도 또 쫓겨요. 70대도 계시는데 어떻습니까? 좋은 날 되었던가요? 거짓말입니다. 약점 잡히지 마세요. “내가 지난날의 동영상을 갖고 있다. 나에게 큰 거 석장 내놔라.” 그러면 여자가 하는 말이 “내가 지금껏 얼마나 힘들었는데?” “동영상 유포시키면 너의 모든 것이 무너진다.” “그래, 3억 먹고 이제 더 이상 찾아오지 마.” “그래, 더 이상 안 찾아가.” 이게 무슨 사랑이에요?
그게 뭐냐? 거기서는 퇴직한 형사에게 쫓기지만 우리는 도대체 누가 나를 이렇게 약점 잠아서 쫒는지 그 정체도 몰라요. 이유도 없어요. 무조건 몸이 무거워. 마음도 무거워. 마음의 병이라 하는 것은 과거의 기억에서 나와서 나를 옭아매는 병이에요. 과거는요, 우리가 살아온 게 과거가 아닙니다. 주께서 한 날 한 날 토막 내서 은혜주신 날의 집합이 과거에요. 그런데 왜 그 과거 앞에다 나를 붙입니까? 나의 과거, 나의 과거는 없습니다. 어제 저녁에 죽었어요. 오늘 새날입니다.
성격 좋다는 말은 다른 말이 아니에요. 과거를 생각하지 않고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성격 댓길이에요. 최고로 성격 좋습니다. 실컷 싸워놓고 TV보면서 웃는 것, 그게 성격 좋거든요. ‘무슨 일이 있었나?’ 근본적으로 내 양심 내 것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나도 내 것 아니에요. 옷 입었다. 주께서 그 옷 입으라고 준 거예요. 이 신발 사라고 주께서 그 신발 사게 하신 겁니다. 그 가방 주께서 사게 하신 거예요. 세일해서 사게 하신 거예요.
모든 것이 내 것도 아닌데 주님께서 오게 해놓고 내가 얼마나 평소에 마귀에게 쫓기는지 알도록 하기 위해서 ‘내 가방, 내 신발’이라고 해놓고 그래서 마귀의 함정, 마귀의 덫에 걸려들게 해놓고, 그래서 마음고생 직사하게 하게 해놓고, 그걸 찢어버리면서 그 장막, 내가 생각하고 내가 심어놓은 내 현실세계, 천국, 지옥, 이 모든 것이 매일같이 저녁과 함께 무너지게 하시는 겁니다. 다 무너지게 해서 “발걸음을 세시는 것도 주님, 머리카락 자라는 것도 주님, 그 동안 살아온 내 인생도 주의 것입니다.”라고 그 짧은 영점 몇 초 동안에도 잠시 반짝 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거예요.
끝으로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네온이 있지요. 그 네온이라는 가스로 만드는 것이 네온사인이거든요. 네온과 네온사인을 구분하세요. 네온은 가까이서 그냥 들여다보면 그냥 깜빡깜빡 거려요. 그런데 멀리서 보면 이미지입니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반짝반짝, “차 조심 길조심” 반짝반짝. 멀리서 보면 이미지로 다가오는 거예요. 하나의 픽셀, 모자이크의 부분. 우리는 나만 생각하니까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네온 + 사인’, 네온사인에요. 하나의 사인, 이미지입니다.
주께서 ‘너는 다른 쪽의 사인이고 나는 내 쪽에서 사인’이고 합치면 그리스도의 현실이 되는 겁니다. 어떤 현실, 주께서 마귀로부터 빠져나오는데 무사히 성공했다는 것, 부활로 탈출에 성공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집어넣어주면 우리는 이 땅에서 시달리면서도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그 찢은 그것을 통해서 주님 앞에 찬양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남을 위한, 주님을 위한, 타인을 위한 선한 양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계시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계시가 마귀로 물들어서 얼마나 우리를 시달리게 하는지, 힘들게 하는지, 날마다 죽고 싶은 마음밖에 없습니다. 그 죽고 싶은 마음도 나만 생각해서 나온 결과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십자가를 경유하면서 주를 위한 나 인 것을 새삼 발견해서 찬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