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강-고전 9장 6-10(밭가는 소처럼)1507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9장 6-10절입니다. 신약성경 273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9:6-10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사도바울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어떤 전제가 깔려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보내신 사도에 관해서 말씀을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부활했다는 소문이 있어요. 부활했다는 소문이 있다는 말은 예수님이 지금 안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살아 있다는 뜻이지요. 예수님이 살아 있는데 문제는 보이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보이지가 않습니다. 인간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존재에요. 사도가 말하기를 예수님이 지금 살아 있다. 그냥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일하고 계시다.
그리고 예수님이 일하고 계신 그 증거가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다. 살아계신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보이는 식으로 우리 사도를 이 땅에 보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말씀대로 일하고, 그 보이지 않는 분의 일도 말씀대로 일하는데, 사람들이 그 증거를 어디서 포착할 것인가? 보이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방식으로 주신 그들이 사도이고 따라서 사도와 말씀과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 사도들이 일하는 이것은 주의 말씀과 관련성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들이 활동하는 그 취지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8절에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라고 되어 있거든요. 사도본인이 바나바와 같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언급하면서 사도바울이 모세율법과 결부를 시키는 겁니다. 이렇게 결부시켜도 됩니까?
우리가 알기로는, 모든 말씀을 예수님과 연결시켜야지 사람한테 연결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 상식인데 사도바울은 자신의 활동도 말씀과 관련지을 수 있다고 하시면서 모세 율법을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세율법은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주보에 나와 있듯이 신명기 25장 4절에 나옵니다. 신명기라 하는 것은 어디서 주어졌느냐 하면,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그러니까 가나안 땅이죠, 광야, 또는 가나안 땅, 약속의 땅에서 필요하다고 준 겁니다. 약속의 땅의 가치가 뭐냐? 약속의 땅은 그냥 땅이 아니에요. 약속의 땅만의 특징이 있어요.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은, 약속의 땅 말고 다른 모든 땅에 대한 가치와 대립, 대조가 되는 의미가 피어나는 땅이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에 말씀을 줬다는 것은 약속의 땅에서 나오는 그 말씀 해석은 약속의 땅 외의 모든 세계에 대한 고발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 말이에요. 그래서 이 약속의 땅에서 벌어진 그 말씀의 마지막 최종적인 모습이 “다 이루었다.” 한 십자가거든요. 그래서 십자가 사건은 기존의 모든 인간들이 신을 찾는 그것을 거절하고 거부합니다.
인간들끼리 교제할 때는 말만 편하게 하면 좋은 교제가 되는데 인간이 각양제물과 헌금을 가지고 나오게 되면, 즉 ‘내가 이만큼 정성과 예물을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할 것이다.’라고 드려봤자 신이 안 받아요. 왜? 십자가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튕겨 나온다고요. ‘예배당 세워서 예배드리면 신은 영광 받을 것이다.’ 그것은 네 생각이고! 십자가사건이 그걸 튕겨내요. “어딜? 주제파악도 안 되는데 어디서? 말씀의 완성은 십자가지 너의 정성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너의 찬양이 아니에요. 너의 성의도 아니고 너의 착함도 아니라는 말이지요.
십자가가 튕겨내 버려요. “저리가!” 하고 밀어내요. 바로 그 십자가의 의미를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기 위해서 약속의 땅이 따로 설정이 되어 있고 그 약속의 땅을 구축하는데 필요한 용어가 신명기에 나오는 그 율법, 물론 모든 율법이 다 마찬가지지만,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찌니라.”(신 25:4)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그 말 자체의 의미가 뭐냐? 농사짓는 사람의 소가 주저부리가 심했던 모양입니다. 곡식을 떠는데 소를 가지고 하는 모양이지요. 그런데 소가 곡식을 떨면서 자꾸 주워 먹는 거예요. 과자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생산되는 과자를 계속 주워 먹으면 안 되잖아요. 아줌마들 배만 뚱뚱해지고.
그래서 소에게는 짚을 주고 곡식은 먹지 못하게 망을 씌운 겁니다. 그래서 보통은 망을 씌우기 마련이고 망을 씌우는 것이 당연한데 주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시기를 “곡식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운다는 것을 내가 알거든? 아는데 씌우지 마라.”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건 뭐냐 하면, “그 소가 하는 일, 소가 하는 일이 너희를 먹여 살리는 곡식을 생산하는 일이 된다.”는 겁니다. 10절에 보면,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소에게 망을 씌우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소 앞에 갑 질하지 말고 동업자라는 의식을 가져야 된다는 겁니다. 동업자. 왜냐하면, 소 너를 위해서 망 안 씌우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너로 인해서 같이 뭔가가 생산되는 것이 있는데, 그게 곡식인데 그 곡식의 고마움, 약속의 땅에서 나는 곡식의 고마움을 내가 너에게 같이 누릴 수 있는 여건이 되도록 해 주겠다, 하는 식으로 이해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지금 소나 우리나 그 하는 일이 하나님이 주시는 일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소망과 즐거움을 함께 누리자, 그런 겁니다.
소는 그저 부려먹기나 하자,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소야! 우리는 다 같이 지금 중요하고 고마운 혜택을 입고 있다, 는 것을 함께 받아들이자.” 라는 취지로 신명기의 말씀을 줬다는 거지요. 약속의 땅에서 소도 그냥 ‘너의 밑에 있는 소’라고 하지 말고 ‘주님이 주신 소’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모든 곡식도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서 나오는 곡식 자체 속에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포함되어 있기에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에게 소를 부리는 은혜를 주셨구나. 같이 즐거워하자.’라는 취지로 율법을 준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신약성경에 오게 되면, 이 신약에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되느냐 하는 거지요. 문제는 ‘곡식’ 이것이 문제거든요. 이 곡식이 뭐냐 하면, 구약 약속의 땅에서는 먹고 사는 양식을 곡식이라 했는데 여기 곡식은 뭐냐 하면, 생명의 원천입니다. 밥 먹고 살아도 죽으면 그것은 곡식이 아니에요. 재산이 수천억 되는데 지옥가면 그것은 곡식이 아닙니다. 지금 사도가 뭐예요? 설교 다시 할까요? 사도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일을 시켜서 일을 하는 자들이 사도에요. 사도는 사람에게 보이고 주님은 안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이 안보이기에 시답지 않게 여깁니다. “주님은 안 보이는데 뭐 그냥 옛날 사람이지.” 이렇게 하는데 사도가 말하기를 “아니야. 주님이 보낸 자들이 우리잖아. 주님이 보낸 자가 우리인데 우리가 어떤 식으로 일하는가 하면, 신명기 25장 4절에 나오는 그 취지에 따라서 우리는 소처럼 주님께 부림을 받는 입장에서 일하고 있고 너희들 눈에 지금 우리가 보이잖아. 너희 눈에 우리가 보이지? 이렇게 보이니 주님은 안 계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지금 살아 있잖아. 그러니까 주님 지금 살아 계신거야. 지금 말씀대로 세상이 움직이고 있는 거야.”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사도 입에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바로 곡식이 나온다 그 말이지요. 곡식이 나오니까 이것은 너희들이 취직하거나 창업해서 벌어들이는 돈하고 비교하지 말라는 거예요. 먹어도 지옥 가는 그런 돈하고 비교하지 말라는 거예요. 사도에게서 나오는 것은 지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지금 우리 안에서 일하고 있어서 비로소 생산된 말씀의 영생의 곡식인데 그게 뭐냐? 생명의 원천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생명의 원천을 그냥 우리한테 들려주면 되지?’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생명의 원천을 만들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전쟁을 했거든요. 누구하고 전쟁을? 역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사탄, 악마하고 전쟁을 했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그 곡식, 생명의 원천에 접근하려 들면 우리는 뭘 느껴야 되느냐? 아하, 우리가 영적전쟁 속에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겁니다. 영적전쟁에 속한 사람의 특징이 이런 고백이에요. “주님, 취직해서 이제는 밥은 먹고 사는데 이렇게 살 것 같으면 차라리 저를 죽여주옵소서. 이런 식으로 살 것이면 차라리 저를 일찍 죽여주옵소서. 이게 사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영생이고 이게 무슨 곡식입니까?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요.”
이럴 때 이 사람은 영적 전쟁을 감 잡고 있는 사람이고 뭔가 세상 생명의 원천은 돈과 관계 없다는 것, 생명의 원천은 세상에서 주는 곡식 말고 진짜 생명은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 생명은 어느 정도 되어야 되느냐 하면, 죽어도 상관없는 정도가 되어야 생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지금 그 곡식이 사도의 입을 통해서 나옵니다. 사도가 했다는 말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주님이 살아서 사도 속에서 그 일을 지금 생산하고 있는 거예요. 곡식이라 하는 것은 말씀이 심겨진 곳에서 열매가 나와야 돼요.
잘 아시다시피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나는 포도나무요”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포도나무는 반드시 열매를 언급하게 되어 있거든요. 이 열매라 하는 것은 말씀에 의해서 나오고 그 말씀은 바로 마귀가, 악마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그 마귀의 세력을 뚫고 거기서 죽음과 죄에서 승리하고 나온 그 열매, 그게 방울토마토인지 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도 저주와, 지옥과, 죽음과, 그리고 이 고통으로부터 이겨낼 수 있는 곡식을 먹을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 사도바울과 바나바가 하는 이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또 없습니다. 곡식이 중요한 거예요. 곡식이 이렇게 중요한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사도바울이 하는 것에 대해서 적극 협조가 되고 일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 준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지금 몇 번째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곡식이에요. 곡식 나오는 입을 틀어막지 말라는 그 말이에요. 힘들게 하지 말라는 그 말이거든요. 그런데 곡식이 안 나오는데도 거기에 생활비를 준다? 성경말씀대로 하게 되면, “곡식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세요. 삥 뜯기지 말고!”
어떻게 생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생명이 안 나오고, 복음이 안 나오고, 죽어도 상관없는 생명은 나오지도 않는 그런 설교가 나오는데 어떻게 그렇게 그런 교회에 돈을 냅니까? 이 말씀, 본문 때문에 한국교회 2백 년 동안 얼마나 삥을 뜯겼어요? 지금도 삥 뜯고 있어요, 지금도. 종로 5가 광장시장에 경비대장이라는 인간이 있어서 상인들한테 3천원~5천원의 삥을 뜯고 있었다는 거예요. 누가 신고를 했던 모양이죠. 경찰이 조사를 나와서 경비대장이라는 인간 포함해서 서너 명을 체포했어요.
상인들이 수년 동안을 그동안 당해오면서도 왜 말을 못했느냐? 만약에 저 인간들한테 잘못 보이면 자기 생계에 지장이 되고, 생계에 지장이 되면 자기애들 피아노 학원도 못 보내고, 태권도 학원도 못 보내고, 공부에 지장이 되고, 자기 생존, 생계에 지장이 있다 싶어서 ‘더러워도 그냥 2, 3천원 주고 만다.’ 그래서 삥 뜯긴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이 목사한테 왜 삥 뜯깁니까? ‘더러워라, 씨! 혹시라도 주의 종 잘못 건드려서 저주받으면 내 사업 망친다.’ 싶어서. 혹은 ‘죽어서 지옥 가면……’ 싶어서, 겁나서 삥 뜯기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고린도전서 이 본문을 이용해요.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이 말씀가지고 주장하기를 “내가 목사가 되어서 여러분에게 곡식을 주는데 저희들끼리 고기 먹어 가면서 잘 살고, 고급차 타고 다니고, 목사는 이렇게 시답지 않게 대접해서 어떻게 귀한 곡식이 나오겠는가? 최상급으로 대우를 해줘도 시원치 않을 판국인데. 장로들은 저희끼리 잘 먹고 잘 살고 호텔 드나들고 골프장 다니면서 자기교회 목사는 이렇게 천대하니 그래가지고 주의 저주 받지 않을 성싶어? 분명히 너희가 성경말씀을 믿는다면 여기 신명기를 인용해서 나오는 본문처럼,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하는 말씀처럼 목사에게 필요한 모든 경비는 달라는 대로 다 줘야지. 세미나를 간다 치면 차비부터 시작해서 모든 경비를 다 대줘야지. 그래가지고 어떻게 영생을 얻기를 원하는가? 나는 지금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야. 너희들이 믿는다는 이 성경말씀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내놔라.” 이거, 종로5가 광장시장 경비대장입니다. 삥 뜯긴 거예요. 양아치에요, 양아치.
양아치는 누구한테 삥을 뜯느냐 하면, 생명의 원천에 관심이 없고 생존의 원천에 관심이 있는 교인들한테는 양아치들이 와서 꼭 삥 뜯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싸움에 감이 잡히고 영적 싸움을 해야 되는데 육적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 ‘내가 가진 재산이 얼마고 내 가정이 얼마나 잘될 건가?’ 여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그 인간들에게 삥 뜯게 되어 있어요. 지금 삥 뜯는 이야기를 몇 번을 하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얼마나 속아 넘어가야 되겠어요? 지금 이 시간도, 지금 시각 11시 반, 이 시각에도 속고 있어요.
삥 뜯겨도 싸! 당연해요, 당연해. 제가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정리하는 것이 제 주특기니까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소, 일꾼, 곡식, 이 신명기의 율법개념은 예수님이 등장하면서 예수님이 일괄 가져가요. 순서를 잘 들어야 해요. 예수님이 신명기의 모든 말씀을 우리보고 이해하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가져가요. 가져가서 십자가에 올라갑니다. 올라가면서 그냥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사용하는 소, 일군, 곡식개념과 대조를 이루면서 그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주장이 납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방식으로 개념을 가져가서 십자가에서 그걸 다 완성을 하십니다. 그렇게 대조가 되고 인간으로서는 납득이 안 되는 방식으로 주님 부활하셔서 성령 보내실 때 십자가에서 완성된 개념으로 다시 성도에게 찾아오십니다.
찾아오시게 되면, 우리 속에 기존의 육적인 것에 남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 나 좋으라고 봤던 그 해석과 성령을 통해서 새로 주입된 해석이 날카롭게 충돌을 일으키면서 스파크가 일어나는데 그 스파크가 바로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야, 나같이 제 멋대로 해석하는 인간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이 되었구나. 나같이 나쁜 인간, 나밖에 모르는, 나 살 궁리만 챙기고, 하나님을 어떻게 이용해 먹을까, 그저 생존이나 연장해볼까, 하는 이 욕심쟁이도 진짜 성경말씀을 해석한 그 해석에 입각한 죄용서의 능력으로 내가 구원을 받았구나.’ 그게 바로 지금 주님께서 사도를 보내셔서 하시는 작업입니다.
이 해석자체가 왜 그런 일이 일어나야 되느냐? 이 세상 자체가 무형이잖아요. 아무 질서가 없어요. 질서가 없는데 질서를 따로 뽑아내버리면 인간위주의, 인간 좋으라고 있는 해석이 돼요. 세상 돌아가는 것이. 그러면 문제가 뭐냐? 이게 일치되지 않아요. 진짜 현실과 내가 생각한 이 현실과 일치되지 않습니다. 일치되지 않으면 그게 뭐냐 하면, 이게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 살면서 ‘착한데 왜 죽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방금 제가 한 이야기를 염두에 두세요. ‘내가 착한데 왜 죽지?’ 그걸 염두에 두세요. ‘내가 착한데 매사가 왜 내 뜻대로 안되지?’ 염두에 둘 것도 없는 것이 우리는 평소에 늘 그런 식으로 살아가니까. ‘착한데 날씨는 왜 덥지?’ 이런 식으로. 에베소서 6장을 보면 사도바울은 마지막 때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 6:11) 더운데 갑옷을 입으래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자, 사도바울이 이 이야기를 왜 합니까? 이 말씀을 보기 전에 우리의 생각은 뭐냐 하면, 지금 세 번째 이야기해요, ‘착한데 왜 내 뜻대로 안되지?’ 이거예요. 내가 착하잖아요. ‘내가 착한데 왜 매사가 내 뜻대로 안되는가? 내가 착한데, 성실한데. 게을러서 매 맞고 나쁜 짓을 해서 벌 받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성실하고 착한데 왜 매사가 내 뜻대로 안 되느냐?’ 그 말이지요. 뭘 입지를 않았어요. 복음의 옷을 입지를 않았거든요. “복음의 옷? 그런 거 왜 입는데? 왜 입어야 되는데?” 그거 왜 입어야 되는지 설명해 드릴까요? 그 ‘복음의 옷’을 왜 입어야 되는데요?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대표해서 가나안 약속의 땅에 줬어요. 다른 민족에다 비 뿌리듯이 준 게 아니고 약속의 땅에만 줬거든요. 약속의 땅에서 피어나는 의미는 약속의 땅 외의 다른 민족, 다른 지역에 있는 인간들의 의미와 대조를 이룹니다. 대조를 이루면서 대표적 의미가 돼요. 대조를 이루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에서 만든 민족과 주변의 민족과 싸움을 벌이게 하시는 겁니다.
수련회에서 해야 할 사사기의 내용을 미리 다하게 생겼어요. 싸움이 벌어지는 거예요. 왜 싸움이 벌어지느냐 하면, “너는 세상 잘못보고 있다.”는 거예요. 생명의 원천을 모른다는 겁니다. 생명의 원천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말을 고칠게요. 내가 어디서 탄생했는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내가 인간입니까? 그러면 인간이 어디서 출발했습니까? 어디서 태어났는데요? 나의 출처를 모른다니까요? 너희들은 너희의 출처를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안다는 겁니다. 이방인들이 “너희가 뭔데 너희가 인간의 출처를 알아?” “우리는 말씀을 받았다.”는 거거든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처도 몰라. 인생이 어디로 끝장나는지도 몰라. 그냥 중간부분밖에 모르는데. 자기 자신이 어디서 출생한지도 모르잖아요. 지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에 이스라엘 백성을 만들어서 말씀을 주신 것은 삽으로 완전히 뿌리 채 뒤집어 놓는 거예요. 이방나라는 말합니다.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은 세상 다 살아봐야 알지. 네가 나이 얼마 먹었다고 인생을 알아?” 라고 하는데 말씀 안에 세상 끝이 들어있거든요. 시작과 끝이 말씀 안에 다 들어 있어요.
말씀 안에, 우리가 다 안 살아봐도 아는 세상 끝 이후에 어떻게 진행되는가가 말씀 안에 들어 있고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누가 먼저 있었는가, 무슨 의도로 있었는가, 그것도 말씀 안에 들어 있어요. 그것을 다른 민족은 모르고 이스라엘 민족은 그 말씀을 받은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은 아이큐가 높습니까? 유대인들이 아이큐가 높다고 하는데 난 믿지도 않아요. 아이큐가 높은 게 아니고 그들도 똑같이 몰라요. 그들은 말씀 앞에서, ‘야, 이 말씀 줬으니 우리는 그냥 밥이나 먹고 생계나 유지하자.’ 그것뿐이에요.
시작이고 끝이고 간에 그것은 관심도 없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다른 민족은 말씀대로 안 살아도 그냥 방치하는데 이상하게 말씀을 준 이스라엘 민족은 그 때 그 때 마다 주께서 심하게 귀싸대기 때리고 맴매를 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잘 되는 것이 희한한 일이 아니고 너무 심하게 매를 맞는 것이 말씀에 입각한 희한한 기적이 되는 겁니다. 보통 사람들은 기적, 하면 잘되는 경우를 기적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매 맞고 얻어터지고 망하는 그것이 기적이에요. 그리고 그 기적가운데 최고의 기적은 요나의 기적이고 그 요나의 기적을 구현한 게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기적입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 기적이 최고의 기적이에요.
“나 봐! 죽잖아. 말씀대로 죽잖아. 부럽지?” 아무도 안 부러워했어요. 예수님 가신 길을 누가 부러워해요. 아무도 안 부러워해요.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은 무지몽매해요. 왜? 그들은 자기가 귀신의 놀이터라는 것을 알지를 못해요. 마귀의 놀이터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지를 못해요. 지난 광주강의에서 2천 마리의 귀신이 놀다간 청년 이야기를 했거든요. 아무도 몰라요. 내 안에 뭐가 들어 왔는지를 몰라요. 귀신이 나가고 난 뒤에는 알아요. ‘뭐 이런 게 다 들어왔나? 뭐 이런 게 들어왔어?’
왜 인간은 모르는가? 마귀가 말씀이 있는 뚜껑을 단단히 닫았어요. 우물의 뚜껑이에요. 원리 말씀이 보이지 않는 세계의 입구거든요. 그런데 말씀의 뚜껑을 닫았는데 그 뚜껑이 뭐냐? 선악과입니다. 선과 악의 뚜껑으로 마귀가 완전히 봉인을 해놓았어요. 아무도 못 열도록, 양초가지고 아예 숨도 못 쉬게 막아놓았어요. “모든 이 세상 질서의 의미는 다 인간 자신의 편리를 위함이다. 인간이 편리하게 사용하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복인 줄 알아라.” 이런 식으로 봉인을 해놓았어요. 그러니까 십자가라는 전신갑주가 필요치 않는 삶을 살면서도 이게 정상적인 삶이라고 마귀가 인간세계를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서 6장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라는 말이 불필요하게 만들어버리는 식의 인식으로 세상을 점령하고 말았어요. 마귀가 그렇게 한 겁니다. 왜 우리는 이걸 모르는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우리가 착하잖아요. 우리가 성실하잖아요. 이만하면 되었잖아요. 부모한테 효도하고 있잖아요. 부모한테 해코지 안하고 있잖아요. 이만하면 성실하고 착한 인간 맞잖아요. 착하면 복 주겠지요. 죽으면 천당 가겠고.
그걸 원천이라고 누가 이야기하던가요? 그것은 가나안 땅이 아니고 가나안 땅 주변에 있는 이방니라에서 그렇게 이야기했던 거예요. 지금 한국교회가 이방나라화 되고 말았어요.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뭡니까? 선악적인 윤리도덕 이야기해요. 착하면 복 주고 착하면 천당 간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 해놓고 곡식 떨어줬으니까 망 씌우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삥 뜯기고. 바보 같아요. 삥 뜯기는 것도 바본데요, 더 큰 바보는 세상의 진리, 세상의 원천, 세상의 궁극적인 것을 찾겠다고 자기 혼자 토굴 파고 숨어 있는 인간, “세상 다 더러워, 더러워. 세상 나 혼자 살래.” 이것은 더 바보에요.
일제시대에 나이 서른에 요절한 시인이 있어요. 박인환이라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지은 유명한 시를 제가 빨리 읽어볼게요.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미국으로 건너간 박인희라는 가수가 낭송했던 ‘목마와 숙녀’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 시에 나오는 버지니아 울프란 미국 동부의 그 버지니아가 아니고 사람 이름입니다.
여자인데요. 결혼할 때 남편한테, 내가 취직했으니 당신은 공무원 그만두라고 요구했던 여자입니다. 그 정도로 나를 사랑하면 나하고 결혼할 수 있다고 요구해서 결혼했더니 결혼생활 한 30년 하고 난 뒤에는 코트 주머니에 큰 돌멩이 주워 담고 바다에 빠져 자살한 여자에요. 이 사람이 거의 최초로 페미니즘, 남성중심주의사회에 반기를 들었던 유명한 여성이에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가 우울하고 허무주의에요. 그런데 박인환도 마찬가지에요.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이게 뭐냐 하면, 허무하다는 거예요, 인생이. 그런데 버지니아 울프만 허무하고 박 인환씨만 허무하고 박인희만 허무합니까? 허무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그 허무한 사람을 위한 안식처는 하나님이, 예수님이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허무 같은 소리하고 있네. 사는 게 허무하다고?” 허무한 것은 바보라서 그래요. 바보라서. 뭔가 마귀가 뚜껑을 닫았어요.
허무하다는 말 앞에 뭐가 붙어 있는지 알아요? ‘나는 착한데 왜 허무한가? 나는 착한데. 나는 그동안 착하게 살았는데 왜 허무하지?’ 그 착하다는 것, 그 뚜껑을 떼 내야 됩니다. 사도바울은 안착했던가요? 천하의 착한 사람,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착함의 밀폐된 공간에 뚜껑이 열리고 예수님이 직접 찾아왔어요. 찾아오니까 “나는 허무하다”는 말조차 할 자격이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이유 없는 구원이기 때문에.
이것을 사도바울이 알게 된 거예요. ‘허무하기 때문에 허무 안하기 위해서 교회 다니자. 사업이 안 되기 때문에 회복하기 위해서 교회 가자. 내가 나중에 죽어서 지옥가면 안 된다는 그 이유 때문에, 천국가기 위해서 교회 나가자.’ 이게 전부 다 허무주의의 일종입니다. 반드시 그 말 앞에는 뭐냐 하면, ‘나는 이 정도로 착해. 나는 착해.’ 그 착하다는 밀폐된, 밀봉된 뚜껑을 벗겨버리세요. 그걸 벗겨내야 돼요.
우리는 악하다, 착하다, 그런 말을 할 대상도 아닙니다. 착하니, 악하니, 어떠니, 무슨 소리를 구시렁대더라도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거절당합니다. “저리 가세요. 저리가! 저리가!” 가인의 제사처럼 “오늘 예배드리러 나왔습니다.” “예배 됐거든! 저리 가세요. 저리 가세요.” “주여, 이것은 헌금입니다.” “가져가세요.” “주여, 이것은 기도입니다.” “너 혼자 중얼거리세요.” 그냥 나오는 법이 없어요. 반드시 토를 달고 이유를 달고 나왔어요. “주님, 저 착하지요?” 그걸 달고 나오거든요. 그 착한 것 달고 나오게 되면 그것은 무엇을 동반하느냐? 사탄과 악마를 동반해서 주님 앞에 기어 나오는 식이 돼요.
다시 말해서 그 마음속에 귀신 한 열댓 명을 동반해서 나온 거예요. 귀신은 우리한테 부추깁니다. “야, 주님 앞이다. 착하다고 이야기해. 무릎 꿇고. 두 손 모으고.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야 받아주는 거야.” 제 아내에게 동영상을 보내준 게 있어요. 제 아내가 여러 번을 보는데 보면서 우스워서 숨이 막 넘어가요. 세 살쯤이나 되었을까 쌍둥이 같은데 할머니 흉내를 내요. 찬송가를 불러대다가 찬송이 끝났다 싶을 때 “아버지~! 주여~! 주여~!” 세 살 먹은 애 둘이서 경쟁하듯이 “주여~!” 하다가 그거 끝나면 다음 순서가 뭐냐 하면 “중얼중얼중얼!” 대체 무슨 소리인지. 그거 한 십초 하다가 다시 찬송 부르고.
그걸 문화라 합니다. 그걸 문화라고 해요. 기독교 문화는 누가 하느냐 하면, 착한 사람들이 해요. 착한 사람들이 하는 거거든요. 얼마나 착해요. 아버지를 부르고 주를 부르고 랄랄랄라 방언도 하고, 얼마나 착합니까? 그거 귀신이 노는 장소입니다. 귀신이 그렇게 노는 거예요. 목사들이 귀신하고 같이 놀게 해줬다고 소에 망 씌우지 말라는 거예요. 월급 올려달라는 거예요. 그게 삥 뜯긴 거예요. 왜? “널 착하게 해 줄 테니 돈 내면 더 착하게 해 줄게.” 그게 헌금이고 헌금을 빙자해서 그동안 거래를 해 온 거예요. 모두가 다 같이 착함의 경쟁마당을 만든 겁니다. 하나님 믿는 착함의 경쟁마당.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십자가의 전신갑주라든지 십자가 복음이라는 것은 없어요. 십자가 복음은 거절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이 본문을 이야기할 때, 결국은 예수님 십자가의 복음을 대하는 취지와 동일한 효과로서 이 말씀을 줬으니까 이것은 사도바울의 사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십자가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고린도전서 9장에 실어놓은 거예요. 그렇게 보셔야 돼요. 사도바울이 자신이 복음 전하는데 대우를 해달라는 그 취지는 뭐냐? 그것은 마태복음 7장 13절에서 16절의 내용과 결부시키면 딱 들어맞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에서 16절의 이야기는 뭐냐? 예수님께서 좁은 길, 넓은 길 이야기를 했지요.
좁은 길, 넓은 길 이야기를 했다는 말은 주님께서 이 세상을 두 조각내겠다는 뜻이거든요. 좁은 길 갈 사람 따로 있고 넓은 길 갈 사람이 따로 있는데 이유 없다. 제가 이유 없다는 말을 여러 번 사용하는 이유는 우리 쪽에서 말씀을 볼 때 그냥 맹탕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저 착하지요?”라고 보기 때문에 제가 이유 없다고 하는 겁니다. “저 착하니까 구원해 줄 거죠?” 할 때 주께서 마지막에 “구원에 이유 없다. 착하기에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야. 나쁘기 때문에 지옥 가는 것이 아니야.” 착해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닐 뿐더러 더 중요한 것은 악하기에 지옥 가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천국은 이유가 없는 거예요. 아무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냥 데려가면 데려가는 것이지 무슨 이유가 필요해요? 우리는 자꾸 이유를 찾아요. 취지를 찾아요. ‘착하니까 같이 살겠다고 데려가겠지.’ 자꾸 착함을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가 마귀의 놀이터기 때문에 평소에 선악적인 버릇이 그렇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좁은 길 넓은 길을 가는데 주께서는 이유가 없이 그냥 가도록 해요. 문제는 뭐냐 하면, 넓은 길로 갈 때에 거짓선지자들이 있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서 넓은 길 좁은 길을 이야기하고 그 뒤에 15절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양의 옷을 입었는데 노략질을 하는 이리인 것을 어떻게 알아요? 옷 자체가 양의 옷인데.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보고 지키라는 말씀이 아니지요. 그냥 “나 마귀” 이렇게 하면 알아보겠는데 양의 옷을 뒤집어썼다니까요? 옷에다 “예수 천당” 이렇게 써 놓으면 누가 알겠어요? 그냥 주의 종인 줄로 알지. ‘아, 저 사람이 곡식 떠는 소구나. 대우해 주자.’ 이렇게 속아 넘어갈 수 있다는 그 말이지요.
그러면 진짜 영생으로, 좁은 길로 인도하는 거짓선지자가 아닌 분은 누구입니까? 그것만 알면 되겠네요? 그것만 알면 돼지요. 누군데요? 예수님이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인도하는데요? “살지 말고 죽어라. 내가 살려줄게.” 오늘 설교의 결론은 간단해요. “그 따위 식으로 살지 말라. 차라리 내게 죽여 달라고 해라. 그러면 내가 죽여주마. 그리고 살려줄게. 죽여주시는 그 분이 살려주시는 분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다.” “왜 죽어야 되는데요?” ‘나는 착하지요?’하고 있으니까 자기 힘으로 자기 착함을 못 이겨요. 착한 마귀가 2천 마리 들어 있는데 무슨 수로 그 병을 고칩니까? 그 공주병을.
그러니까 고칠 생각하지 말고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죽이시는 분이 좋은 분이어야 돼요. 예수님이 죽여주셔야 되지 마귀가 죽이면 소용없고요. 예수님이 죽여주면 죽이시는 그 분이 우리를 살려줍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다른 말로 하면, “너를 거절하시는 분과 함께 그 거절을 수용해라. 현재 나를 거절하시는 분의 거절을 순하게 네가 받아들여라. ‘주여, 저 거절당해도 할 말 없습니다.’ 하고 받아들여라. 받아들이는 동시에 너는 이미 살았다. 왜냐하면 ‘내가 구원받는 것은 이유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는 고백이 입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것은 이유도 없어요. “내가 영생 얻는 것은 주님의 뜻이지 내 뜻이 아니었어. 내가 사도가 되고 내가 복음전파자가 되는 이것은 절대로 내 뜻 아니야. 착해서 구원받으려고 이 짓 하는 것이 아니야.”라고 전하면 그 사람이 오늘날 사도입니다. 오늘날 주의 소자입니다.
그렇다면 주변에서 그 이야기를 알아듣는 희한한 사람들이 있어요. “당신도? 나도 그렇던데?” 그러면 그들이 가나안 땅에 새롭게 조성된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들의 군집이고 집합체입니다. 오직 이유 없는 그리스도의 거저주시는 은혜로만 구원받는, 그리고 사도바울처럼 죽는 것이 소망이 되었기에 사는 부담에서 벗어난 자,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무슨 이유 때문에 삥 뜯겼는데, 살고자 하기에 마귀한테 속았는데 죽고자 하니 삥 뜯길 일이 없어 너무 좋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죽어야 되는데 날마다 살려내는 그 은혜가 십자가의 은혜인 것을, 이유 없이 살려내시는 사랑인 것을, 안 착해도 살려내는 그 은혜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