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강-고전 8장 5-6(주님)1507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8장 4-6절입니다. 신약성경 272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8:4-6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세상에 우상도 있지만 하나님도 계시고, 또 예수님도 계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안 믿으면 어떻게 할까요? 우상도 안 믿고 신들도 안 믿을 뿐더러 하나님도 안 믿고 예수도 안 믿겠다면, 우리가 그렇게 나온다면 어쩔 건데요? 사도바울의 이것에 대한 공격, “나는 어떤 신도 믿지 않겠다. 예수도, 하나님도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했을 때 사도바울이 이 본문을 가지고 추궁할 수 있는 답변은 하나뿐이에요. “그렇다면 너는 네가 속한 현실을 곡해하고 있다.” 하는 겁니다. “네가 속한 현실은 너를 위한 현실이 아니고 ‘어느 것이 참된 신이었느냐?’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현실 판이었다. 네가 생각하기에 이 현실이라는 것이 너를 위한, 너를 살게 하기 위한 현실로 생각하지만 인간을 위한 현실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겁니다.
인간을 위한 현실 같으면 애초부터 인간은 죽음이 없어야 돼요. 왜 인간에게 죽음이 없어야 하느냐 하면, 인간은 계속 살고 싶으니까. 살고 싶은데 죽잖아요. 뭔가 살고 싶다는 이 시작이 마지막에는 죽음으로 끝나거든요. 그러면 그 죽음이 현실이 아닙니까? 죽음을 이 세상에서 내쫒을까요? 사랑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부모는 계속 살았으면 좋겠지요? 그런데 연세 많아지면 떠나잖아요. 먼저 돌아가셨잖아요. 그러면 계산 잘못했네요. 이 현실에 대해서 내가 살고 싶은 것은 내 마음이고 현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그야말로 고대 사람들이 지구를 볼 때 “멀리 가지 마세요.” “왜요?” “절벽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세상이, 이 지구가 절벽이 있는 채로 평평하게 있어서 멀리 나가면 떨어지는 것처럼 생각한 그것이, 지금이야 지구가 둥글다느니 어쩌니 하지만, 현실을 그대로 잘 반영해준 것이 돼요. “멀리 가지 마라. 떨어질까 무섭다.” 그러면 집에 있으면 내 영혼이 안전합니까? 집에 있으면 괜찮아요? 현실 자체를 사람들이 오해한 것은 나를 위한 현실로 생각을 하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 말고 누구를 위한 현실이라는 말인가? 나 좋으라고 있는 현실이지.” 거기에 대해서 성경은 말합니다. “네가 시작한 세상이 아니라면 너는 정신 똑바로 차려라. 이것은 누구로부터 시작한 현실인가? 참된 하나님, 창조주가 누군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시작된 현실이 현실이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자, 이분이 참된 신이야.’라고 보여주는 일들만 발생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야기하지요. “목사님 말씀이 맞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찾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을 알게 되면 우리는 영생을 얻겠네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을 빼놓고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거든요. 멀리서 찾을 것 없다는 겁니다. 너를 위해서 네가 있는 것이 아니고 참된 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보여주라고 네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네가 외부에서 어떤 사태, 어떤 현실을 찾을 생각을 하지 말고 네 자신부터 다시 한 번 돌아보라는 겁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데 성경전체가 다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를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성경전체가 우리 자신이 누군가를 알려주는 말씀이지만 그 가운데 이런 중요한 말씀들이 있어요. 마태복음 28장 6절에 보면,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다시 읽어봅시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우리가 터 잡고 있는 이 현실세계, ‘아, 대한민국’에 계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 같은 사람인데 어떤 분은 이 지구에 계시지 않고 나 같은 사람들은 죽자 하고 이 세상에서 계속 살아야 되고. 그분은 분명히 갈릴리 사람이고 유다나라에서 활동했는데 왜 유독 그분만은 여기에 계시지 않는 거냐는 말이지요. 그리고 이 마태복음 28장의 대화가 무덤에서 일어난 대화거든요. “그는 이 무덤에 계실 분이 아니고”라는 뜻입니다. 그 말을 풀이하게 되면, “너희가 사는 곳이 무덤이야.”라는 뜻이에요. “그분은 죽음을 벗어나야 될 분이고 너희들은 죽음에 갇혀 있는 존재다.” 그런 뜻이에요.
단순히 우리가 뭐냐를 모르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가 원치 않는 다른 지경, 다른 형국에 갇혀 있는 입장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갇혀 있다는 느낌을 못 받고 있거든요. 갇혀 있는 느낌을 못 받지만 의식은 어떤 의식이냐 하면, “어찌되었든 내 새끼는 먹고 살아야 한다. 어찌되었든 살아야 된다.”는 그겁니다. 하루 눈만 뜨면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어쨌든지 살아야지. 더 살아야지. 어디서? 이 세상에서.”
그런데 마태복음 28장 6절에 보니까 “그분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왜? 이 세상 자체가 무덤으로 의미가 확장되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지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많은 학자들,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수천 년 동안, 5천년 이상 철학적으로, 학문적으로 열심히 애를 쓴 그 결론이 성경에 보면 짧은 단락으로 표현되어 있어요. 학자들이 애를 쓴 것은 예를 들면 이런 거지요.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의식하는 존재다. 인간의 의식은 어디서 왔는가? 중세신학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의식을 줬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백날 하나님이 인간에게 의식을 줬다고 해도 실제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사람들이 그거 별로 신경 쓰지 않잖아요. 목사도 신학에 관심이 없는데 일반 교인들이야 신학에 관심이 있습니까? 관심사는 따로 있어요. 어떻게 내 가정 잘 추슬러서 밥 먹고 살까, 어떻게 살아남는가, 어떻게 수입을 올리는가, 거기에 관심이 있거든요.
20세기 초반에 마르크스라는 철학자가 있어요. 들어보셨지요? 그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질적 생활방식이 사회, 정치, 정신적 생활 방식의 조건이 된다.” 아주 짧게 이야기했지요. “물질적 생활방식이 사회, 정치, 정신적 생활 방식의 조건이 된다.” 내가 이 몸을 가지고 어떻게 돈 벌고 사느냐, 하는 이런 정신상태가 어디서 왔느냐? 사회에서 우리가 접하고 만나는 모든 사고방식 자체가 전부 다 ‘어떻게 하면 나는 물질로서 계속 목숨을 부지하느냐?’ 그것만 통용이 되고 소통이 되는 정신으로 완전히 덮쳐져 있다는 겁니다.
종교는 아편이고 중요한 것은 돈이라는 겁니다. 돈 밖에 더 있느냐는 거예요. 돈을 만들어내는 그 체제를 가지고 우리는 현실이라고 이야기를 하자. 왜? 새삼스럽게 이유를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어요. 다들 의식 자체가 다 그런 의식으로 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동의 안 할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요. 배부를 때나 종교고, 배부를 때나 철학이고, 배부를 때나 윤리 도덕이지 다급하면 “돈 빌려줘! 돈 좀 빌려줘!”
‘사람은 돈을 위해서 살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말은 맞아요. 그런데 하고 싶은 것도 자꾸 하다보면 지겨워요. 나중에 한 30년 근무한 뒤에 “왜 합니까?” 하면 “돈 벌려고 하지요 뭐.” 무슨 사명? 그런 것은 돈 앞에 팔아먹은 지 옛날이에요. “돈 벌어서 뭐합니까?” “살려고.” “언제까지 살 거예요?” “늙어 죽을 때까지.” “언제 죽습니까?” “내가 돈 버는 기능이 멈출 때.” 퇴직자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지요. 왜 사는가 싶지요.
그냥 일할 때도 사는 게 아니에요. 돈을 벌 때, 식구들한테 가장으로 대우받을 때 진정 사는 것 같고 그것 없으면 살아도 좀비 같아요. 괴물이고 귀신같아요. 사는 것으로 간주를 해주지 않습니다. 그것이 의식이고, 그 의식이 인간의 마음이고 그 마음 외에는 다른 마음이 없다는 거지요. 그런데 방금 내린 이 결론, 수천 년 이상 연구해서 내린 그 결론이 창세기 4장에 보면 아주 간단하게 되어 있어요. 창세기 4장에 보면 라멕이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23절부터 보면,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자기 자신을 건드리면)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러한 심상, 의식, 마음가짐, 사고방식은 누구한테 물려받았는가 하면, 그 앞에 있는 가인한테 물려받았어요. 왜냐하면 가인의 자손이거든요.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거든요. 죽이고 난 뒤에 내린 벌이 죽이는 게 아니에요. 살려두는 거예요. 왜? 살려둬야 그 의식과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이 아닌 다른 방식의 생활방식, 도시라는 것을 만들어서 자기를 사수하고, 힘을 규합하고, 그 자리에서 자식을 낳아서 라멕이라는 인간을 태생적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 세상 전체가 그래요.
하나님이 내린 벌이 뭐냐? 사는 게 벌이에요. 네가 그 사고방식 가지고 사는 그것이 내가 내린 징벌이라는 겁니다. 그 사는 바탕이 뭐냐? 힘입니다. 물리학에서 에너지입니다. 힘없이는 돈을 벌수가 없어요. “당신이 무슨 기능을 할 줄 압니까?” 이게 돈이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못합니다. 누가 돈을 주겠어요? 구걸도 아니고. 사회적의식이 개인적 의식이다. 따라서 인간은 사회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마라. 네가 원하는 것은 이제 하나밖에 없다. 이 통일된 힘만 인정되는 도시사회, 이 세상에서 네가 영웅이 되고 성공하는 것. 그렇게 되면 네가 힘을 끌어 모아야 되고 그게 바로 라멕의 반복이지요.
그게 바로 오늘날 우리가 보는, 두 자로 ‘현실’이라고 보는 그 현실입니다. 가인을 살려준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 안에, 대립되고 모순되는 두개의 정보를 인간의 몸 안에 심어서 세상에 확산시키고 퍼지게 만든 겁니다. 살짝 어려운데 설명해 드릴게요. 지난 시간에 출애굽기 4장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 하면, 모세가 지팡이를 던지니까 뱀이 되고 뱀을 집으니까 다시 지팡이가 되는 그 원리가 뭐냐? 또 모세가 품속에 자기 손을 집어넣었다 빼니까 멀쩡했던 손이 문둥병이 되어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모세에게 그런 기적을 베풀어 줬습니까? 그 의미가 뭡니까?”라고 사람들이 많이 물었을 것 같아요. 우리 교인들은 별로 묻지도 않지만.
어떤 강사가 말하기를, 공부할 때 처음부터 적으면 이것은 초짜고, 중간부터 적으면 이것은 중간쯤이고, 진짜 똑똑한 애는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안 적는다는 거예요. 우리 교인들이 다 그런 것 같아요. 아무것도 안 적어요. 뭔가 새로운 것 같은데 끝나고 보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는 것 같다는 거예요. 다 잊어버렸어요. 우리교회 처음 나올 때는 막 적다가 좀 지나면 아무것도 안 적어요.
출애굽기 4장 그 대목에서 뭔가 하나님의 목적이 있을 텐데 그 의미가 뭐냐 하는 거지요. 그 의미가 뭐냐 하면, “너에게서 네가 나오너라.” 하는 거예요. “사람아! 네가 사람에게서 나오너라.” 하는 말이지요. 왜? 너는 지금 뱀을 깔고 앉은 거예요. 지금 주님께서 장총을 들고 뱀을 쏘는데 인간은 자기가 깔고 앉은 것이 뭔지도 모르고 깔고 앉은 거예요. “왜 주님은 저보고 총을 겨눕니까?” “비켜라! 지금 쏠 거니까.” 너는 문둥병자고 네가 속해 있는 세상은 뱀이 다스리고 있다는, 즉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그 정보를 인간의 몸에 실어서 그것을 대외로 계속 번식시킨 겁니다.
번식시키니까 인간에게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가 계속 나오는 거예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죽음을 가지고 악마를 공격하는 무기로 삼기 위해서, 마귀가 아담을 내세웠기 때문에 아담마저 선악과를 먹게 해서 아담을 죽이고, 죽인다는 것은 다른 말로 쪼개고, 쪼갤 때 비로소 그 안에 이런 괴물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호두나 야자수는 깨야 먹을 것이 나오듯이. 우리는 우리 안에 무슨 괴물이 들어 있는지를 모르고 그냥 바깥에 힘만 축적하게 되면 그것으로 성공한 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출애굽기 4장에서 네 주제를 파악하라고 손 집어넣게 합니다. 네가 싸워야 할 대상이 바로 뱀의 후손, 뱀이라는 사실, 애굽이 단순히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뱀의 구체화된 형태에요. “네 눈에는 국가로 보이나? 내 눈에는 뱀으로 보이는데.” 그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살려두셔서 뱀이 구체화되는, 뱀이 이 땅에서 구체화될 때는 이런 식으로 자기 정체, 자기 실체를 드러내도록 가인의 후손을 그 역할로서 이용하신 거예요. 모든 인간이 이미 뱀의 지배를 받고 있기에 힘, 에너지, 그것밖에 모르지요. 힘이 있으면 그것이 진리인줄 알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인슈타인도 죽었는데요? 죽으면서 왜 죽는지도 몰라요. 상대성원리 백날 해도 죽잖아요. 왜 죽는지 몰라요. 행정고시 패스해서 행정연수원원장까지 올라갔지만 죽었잖아요. 중국까지 가서 왜 죽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에 두개의 대립되는 정보를 심었어요. 여러분이 아시지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아니면 양과 염소, 좋은 고기 나쁜 고기, 또는 알곡과 가라지, 성도와 비성도, 짐승에 속한 사람과 예수께 속한 사람, 이것은 성경 좀 본 사람은 다 아는 거예요.
대립되는 정보만이 아니고 문제는 그 대립이 있기 전에 모순이 있다는 겁니다. 이게 어려워요. 대립과 모순이 내부 층을 형성하고 있고 외부 층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 자본주의 사회, 돈 밖에 모르고 돈이 지배하는 사회가 있습니다. 그 틈, 경계선, 그것을 저는 양파껍질이라고 하는데 양파껍질이 맞닿은 그 경계선이 우리의 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찾아오게 되면 그 껍질을 벗깁니다. 대자연과 거기에 포함된 인간이 그 양파껍질 자리에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이 오게 되면 껍질을 홀라당 벗겨버려요.
병원에 가서 성형한다고 껍질이라도 벗긴다 치면 아프잖아요. 후시딩 연고라도 발라서 보호를 해야 되잖아요. 껍질 벗긴 그 부분은 병균에 대처할 수가 없기 때문에 빨리 연고를 발라서 딱지가 앉고 피부가 원상복귀 돼야 하잖아요. 주님의 말씀이 온다는 것은 우리 몸의 껍질을 자꾸 벗겨버려요. 벗겨야 내가 나를 관리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껍질 벗기는 주님의 작업이 나와요. 누가복음 16장 초반의 이야기를 흔히 교회에서 이렇게 부릅니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라고 이야기해요.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뭐냐 하면, 경리 사원이 회사 장부를 엉터리로 기록하다가 사장에게 들켰어요. 사장이 “당신 이번 달 까지만 일하고 나가세요.” 하고 퇴출시켰습니다. 평소에 장부를 조작한 인간의 그 행세가 어디 갑니까? 그러니까 그 남은 기간 동안에 장부를 들고 자기가 담당했던 거래처에 가서 회사에 큰 손해를 입힐 정도로 장부를 조작해버리지요.
“당신 아직 내가 회사에 있을 동안 우리 회사에 입금할 돈 절반으로 조작해 줄 테니까 나중에 내가 이 회사에서 쫓겨나거든 나 좀 챙겨주소.” 이런 식으로 조작을 했어요. 그러니 손해를 낸 그 회사에 더 큰 손해를 냈어요. 자기밖에 모르는 이 인간이 얼마나 나쁜 인간입니까? 누가 봐도 나쁜 인간인데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래야 살아남는다는 거예요. 그게 누가복음 16장에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이야기에요. 공자나 부처 같으면 이런 소리 못합니다. 예수님이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잘난 껍질을 벗기라는 그 말이지요. 잘난 껍질을 벗기면 불의한 청지기가 들어 있는데 너는 왜 그걸 몰래 감추고 있었느냐 그 말입니다. 바리새인이 그 소리 듣고 “저 분이 미쳤나? 저 불의한 것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 그러면 우리는 지옥가고?”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이것은 퉁, 하고 쇠뭉치로 치는 것처럼 “뭐야 이거? 이런 이야기를 우리보고 어떻게 납득을 하라고? 무슨 소리야?” 하고 칠 때 그러한 이야기를 모순이라고 합니다. 설명하고 싶어도 설명이 안 되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모순이고 모순이 끝나고 나면 대립이 돼버려요.
‘아하, 나에게는 나라는 것이 없구나.’ 하는 것, 주님께서 나에게서 나를 끄집어내서 던져버렸다는 겁니다. 그동안 주님의 몸을 가지고 내 몸이라고 우겼던 이 잘못된 사고방식이 사탄으로부터 주입된 의식이고 바로 마르크스가 말한 물질적 생활방식에 물들었기 때문에 ‘내 몸 가지고 돈 벌면 성공이다.’라는 그 의식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어릴 때부터 계속 품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수류탄이고 폭탄이에요. 빨리 나에게 내가 빠져나와야 돼요. 안 그러면 터집니다. 뭐 예수 믿고 뭐 하고, 그런 것 하지 마세요. 예수 믿고, 하나님 믿고 그럴 시간도 없어요. 그냥 나만 옷 훌렁 벗고 나오면 돼요. 양파껍질 벗기고 알맹이는 나오면 돼요. 그 알맹이 나오는 것을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라고 하고, 잃어버린 동전이라고 하고, 잃어버린 양이라고 하고, 16장에 들어가면 불의한 청지기라고 하는 거예요. 목욕탕에 불났어요. 옷 입을 시간 없습니다. 그냥 옷 벗은 채로 나와요. 바깥에서는 사진 찍든 말든 간에 빠져나오세요.
그동안 우리가 걸치고 있던 것은 뭐냐? 물질적 생활방식이었어요. 나를 상품으로 제공하고 그것으로 시장에 나가서 나를 사가는 인간에게 돈으로 회수해서 그걸로 살겠다는 겁니다. 하나님, 예수 믿는 것, 성도가 교회 다니는 것, 왜 왔습니까? 빠져나오기 위해서? 아니에요. 나에게 에너지와 힘을 더 구축하기 위해서 전능하다고 소문난 신을 믿은 겁니다. 그게 바로 우상이고 그게 사단의 집단, 악마의 집단이에요. 교회와 성당이. 절만 그런 줄 알아요?
분명히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에게 찾아왔습니다. 모세에게 찾아오기 전에 노아에게 찾아왔거든요. 노아에게 찾아올 때……, 아, 아침부터 이런 소리하는 것은 참 죄송한데, 이게 더러운 이야기지만 복음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집안 우세스런 이야기이도 한데요. 어릴 때 우리 집에 사는 식구가 열 세 식구였어요. 참 다복하지요. 우리 어머니하고 할머니는 이불빨래며 밥 해대고 도시락 싼다고 애 많이 먹었습니다. 그 때 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고생 정말 너무너무 했어요. 무슨 하녀도 아니고요. 옛날에는 다 그렇게 살았잖아요.
담요를 덮고 자는데 그게 표면은 멀쩡해요. 이런 이야기 꼭 해야 되나 싶은데 할 수 없어요. 겉은 멀쩡한 담요라도 그 담요를 들추면 이가 나오더라는 겁니다. 바깥에서는 안 보이는데. 주님께서는 노아홍수를 통해서 대자연이라는 담요를 벗겨버린 거예요. 담요를 벗기니까 자기를 지켜줄 수 있는 담요가 날라 가버렸어요. 그들은 우상을 섬겼다는 지적을 계속해서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후손인 셈과 함과 야벳이 각지에 흩어졌고, 흩어져서 하는 행세들이 옛날 노아시절에 하던 그 행세 그대로가 나중에 슬슬 풀어져 나오는 거예요. 창세기 12장에 들어가면 바벨탑 쌓는 것까지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 때부터 이미 우상이 있었어요. 우상이 있었다는 증거는 창세기 4장에서 라멕이 가인의 도시의 문명에서 힘이 지배할 때에 멀리선 온 작은 실마리처럼 아주 약하게 보이는, 등불로 치면 깜빡깜빡 거리는 듯이 보이는 그 이야기가 뭐냐 하면, 창세기 4장 26절, “그 때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실제로 주도하신 여호와께서는, 참된 신께서는 힘의 세계에서 힘도 못쓰고, 그냥 소수, 몇 되지도 않는 사람에게 깜빡깜빡, 꺼질듯한데 안 꺼지고, 켜졌는데 보면 또 꺼져있고, ‘저게 목숨이 붙어 있는 거야, 아닌 거야?’ 분간도 안 될 정도로 힘의 세계에서 너무나 미미한 존재로 깜빡이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입니다.
그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사람이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고 그 깜빡이는 그들마저 나중에는 땅의 사람들, 사람의 딸과 혼인해서 네피림이라는 힘의 용사들을 장식했습니다. 그들의 그러한 모든 신의 개념은 자연과 더불어서 함께 생존하겠다는 생존방식, 물질적 생활방식에 의거한 개념의 신을 찾은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라고 했거든요.
성경에 봐도 많은 신들이 나와요. 그모스(왕상 11:17), 금송아지. 기윤(암 5:26)이라는 신은 별. 네르갈은 사자(死者)의 신. 놋뱀(민 21장) 나오고, 느보(사 46:1)는 학문의 신. 느후스단(왕하 18:4)은 놋뱀. 니스록(왕하 19:35-37)은 앗수르의 큰 독수리. 닙하스(왕하 17:31)는 개. 다곤(다간 삼상 5:2)이라는 것은 반은 인간이고 반은 물고기, 블레셋의 신이거든요. 다르닥(왕하 17:31)이라는 것은 앗수르의 당나귀. 담무스(겔 8:14) 풍요의 신. 드라빔(창 31:19, 삿 18:20)은 가정신. 레판(행 7:47)은 하늘의 별을 신으로. 림몬(왕하 5:18) 태양신. 몰록(렘 32:35)은 모압의 불신. 므니(사 65:11-12)는 별신. 므로닥(렘50:2) 전쟁의 신. 밀곰(왕상 11:5), 암몬족속의 신. 바알신, 가나안의 바알신이 바벨론에 가면 벨이 돼요. 같은 신 바알브릿(삿 9:46). 숙곳브놋(왕하 17:30)은 여신. 쓰스와 헤메(행 14:12), 제우스 신이고 아남멜렉(왕하 17:31)은 달의 신. 아데미(행 19:27) 헬라의 다산의 여신. 아드람멜렉(왕하 17:31), 아시마(왕하 17:30) 염소. 아스다롯(삿 2:13)은 가나안 바알신의 마누라고 아세라(삿 3:7)도 마누라고, 아나트(렘 44:20) 하늘왕후, 이게 성경에 나오는 많은 신들이에요.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자연의 인격화에요. 자연과 더불어 영원히 살자는 겁니다. 그게 담요고 양파껍질이에요. 껍질에 우리도 같이 묻어서 나와야 돼요. 벗겨져야 돼요. 벗겨지게 되면 두 가지 정보밖에 없습니다. 뱀에 속했느냐, 여자에 속했느냐? 달랑 두개의 정보만 남아요.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몸을 나의 소유로 여겨서 그게 무슨 두꺼비집이라도 되는 양 그 안에 파 묻혀서 점점 기어들어가요.
요한계시록 3장 20절, 주께서 두드리면서 “거기 누구 계셔요?” 하면, “저리 가세요. 나 안 나갈 거예요.”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는데 나올 생각을 안 해요. “제가 알아서 예수 믿겠습니다.” 이래요.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내가 예수 믿을 테니까 내 껍데기, 이 몸이나 잘 간수해주세요.” 그저 몸의 간수, 건강, 행복, 출세, 영광, 나 빛나는 것…….
갈라디아서 3장에서 하는 말이, “너는 죄에 갇혀 있는 거야.” “제가 죄 지은 것은 있지만 착한 일도 했잖아요.” “그게 아니야. 네가 모르는 죄에 갇혀 있다. 네가 평생을 다 해도 모르는 죄에 갇혀 있다.”고 하는 겁니다. “네가 네 죄를 해결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네 자신에서 네가 나오면 된다.”는 겁니다. “내 자신에서 내가 나오면 이 몸은 누구 겁니까?” “주님 꺼야, 주님 꺼. 네 것 아니야. 이것은 주님 것이야, 주님 것.” 주인이 자기 것 찾아온 거예요.
서울 가락교회 강의 마치면 거기 사장님이 BMW로 저를 서울역까지 태워다 줘요. 스스로 알아서 충돌 방지하는 아주 스마트한 차인데 그 차를 타고 서울역까지 옵니다. 울산강의 하러 갈 때는 울산역에서 등대교회 목사님 차를 타고 가는데 그 차는 에어컨도 안 되는 거 같아요. 차창을 올리고 내리는 그것도 고장 나서 되지가 않아요. 그런데 어느 차가 편하냐 하면, 20년 되었다는 그 고물자동차가 편해요. 왜냐하면, BMW를 타면 차 안에 내가 있는 느낌인데 이 고물자동차를 타면 마치 차 밖에 내가 나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전혀 차를 안탄 것 같아요. 최고의 승차감이에요. 꼭 오토바이 탄 기분이에요. 완전 무방비라.
그러니까 울산의 그 목사님 차는 더 이상 나를 방어할 수 있는 어떤 여지가 없어요. 현실의 바람을 온 몸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그 BMW는 방어 장치가 너무 두꺼워요. 이 소리 했다고 또 안태워주면 곤란한데……. 하나님께서 노아홍수 때 하나님의 언약을 우리정보와 바꿔치기 하려고 하신 겁니다. 노아홍수 때 어떻게 살았는지는 신약에 나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끝! 끝이에요. 그런데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려면 자연이 안정이 돼야 돼요. 불안정하면 안돼요. 자연의 안정 속에서, BMW안에서 먹고 마시게 되면 이것이 사는 존재의 의미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4장에서 “여호와 이름을 불렀더라.”부터 해서 창세기 5장에 들어가면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계속 ‘죽었더라.’가 나오는데 에녹에 오게 되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살았더라.”가 나오는 거예요. 이게 바로 모순관계에요. “나는 죽어야 마땅한데 주여, 왜 저를 살려줍니까? 제가 예상도 못한 일이 왜 벌어집니까?” “그것은 내가 집어넣은 정보야.” 창세기 6장에서 그 정보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 대목을 제가 읽어드릴게요. 창세기 6장 17절,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담요를 다 벗겨냅니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그동안 죽음에 갇혀 있었다는 그 말이거든요. 그 다음에,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 노아한테는 방주로 들어가게 하고 오늘날에는 “예수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십자가가 네 안에 있느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같으면 ‘방주에 들어가는 것이 참 수월할거다.’ 그렇게 보이지요. 하지만 방주에 들어가게 되면 방주에 들어간 이 몸이 또 문제가 돼요. 철저하게 몸에서부터 나오면 좋은데 아직도 몸을 가지고 있으면 행함이 돼버려요. 행함 없는 구원이 되려면 이 현실이 나를 위한 현실이 아니고 그것은 내가 시작한 현실이 아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행함 없는 구원이 있다는 이유는,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이유는, 이 세상 현실의 시작을 네가 한 것이 아니고 내가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네가 새삼스럽게 십일조, 안식일, 목사 섬기기, 교회 다니기, 예배드리기, 이런 시도를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전도하기, 회개하기, 기도하기, 그런 게 필요 없다는 이야기에요. 갑자기 해방감을 느끼십니까? 기도도 내가 하고, 회개도 내가 시키고, 믿음도 내가 주고, 소망도 내가 주고, 학교에서 급식 주잖아요. 급식할 때 애들보고 음식 하라고 하든지 설거지 시키지 않지요. 그냥 식판에 타 먹기만 하면 되지요. 예수님은 새 언약이고 노아는 노아언약이고, 노아언약이 완성이 된 것이 새 언약이고 새 언약 되시는 분이 우리 속에 새 언약의 정보를 집어넣어버려요.
집어넣는 순간, ‘내가 그동안 마귀 짓 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내가 마귀 짓 해서 죽기를 무서워해서 벌벌 떨었구나.’ 죽는 것이 해방인데 죽음이 무서워서 피해버리면 우리는 언제 해방됩니까? 이래가지고 우리가 언제 해방돼요? “주여, 기도하면 더 살 수 있습니까? 헌금하면 더 살 수 있습니까? 오늘도 예배참석 했는데 그러면 밥 먹고 살 수 있습니까?” 맨날 뭘 하든지 간에 자연과 함께 살려는 것,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주께서 우리의 몸을 책임지시고 우리에게 사료 주듯이 솔솔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이게 주기도문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 기도 앞에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기도하지 말라는 것부터 먼저 나오지요. “그따위 식으로 기도하지 마라. 네가 백날 기도해봐야 네가 마귀 짓 밖에 더 하는가? 마귀만 나온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기도를 해라.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따라해!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주여, 일용할 양식만 주시면 내일은 못살잖아요.” 오늘 그거 먹고 밤에 죽으라는 그 말이거든요.
병원에서 약 주잖아요. “30분 후에 드세요.” 하면서. 그거 먹으면 그 약에 해당되는 효과만 보듯이 우리가 내일을 걱정한다는 이것은 이 세상과 일을 내가 시작한 것인 양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데 사랑이 뭐냐 하면, 우리 밥 먹여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죽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사랑이거든요. 어떤 사랑이라도 죽은 자를 살려내지 못하면 그것은 사랑이라는 말을 하지를 못합니다. 해서는 안 되지요. 남자 친구가 여자를 보고 “난 당신을 사랑해.” 그러면 여자는 물으세요. “죽은 나를 살릴 수 있느냐?” 남자가 “미쳤나?” 그러면 그것은 사랑 아니지요. “나 살기도 힘든데 너까지 챙기느냐?”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것은 사랑이 아니지요. 즐기는 거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탕자를 구원하듯이, 잃어버린 동전과 양을 구원하듯이 항상 우리를 극단으로, 죽음으로 몰아넣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안 죽어요. 오직 예수님만 죽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파도가 되어서 우리에게 넘쳐서 우리가 죽게 된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안에서 진짜 저주가 무엇이며, 죄가 무엇이며, 죽음이 무엇이며, 생명이 무엇인가, 십자가에서 나오거든요. 따라서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는 처음부터 죽도록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재료가 흙입니다. 오래 못가도록.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흙으로 만든 것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데 뭘 그렇게 군소리가 많으냐고 합니다. 이제는 하늘의 생명, 하늘의 형상,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하늘의 생명을 교체하기 위해서 이 흙으로 만든 구닥다리 몸은 죽어야 되는 겁니다. 그럼 자살할까요? 자살하면 안돼요. 언약이 와서 죽여야 돼요. 그럼 언제 죽이십니까? 지금 죽이잖아요, 지금 매일매일. 지금 죽는다는 말은 그 원인과 함께 있어야 돼요. 죽음이라는 그 결과가 있잖아요. 그 결과가 원인을 주워 모으는 겁니다.
주워 모으다 보니까 그 죽는 원인이 ‘유행가를 너무 좋아했다.’ 이것도 죽는 원인이고 ‘술 먹었다. 담배를 피웠다. 기도하면서 자기 욕심 챙겼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나를 죽이게 한 원인으로 수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수집하는 언약 적 손길, 언약 적 위력에 함께 죽을 때, 우리는 주와 함께 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주님을 위한 삶이에요. 주님이 보였던 사건, 무엇이 죽음이며 무엇이 생명인가, 무엇이 죽음이며 무엇이 생명인가를 위해서 우리가 보조적 기능으로 이 땅에서 지금 남은여생을 꾸준히 살려냄을 당하고 있는 겁니다. 살려지고 있는 거예요.
한순간도 주님은 우리를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놓치지 않았습니다. 자기 건데 왜 그걸 포기해요? 자기 것이기 때문에. 매순간 주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 거예요. 그게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말이냐? 이렇게 오해하지 마세요. ‘목사님 말씀 들어보니 이 세상은 마르크스의 말대로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사는 세상이구나. 따라서 힘이 있어야 왕이 되고 행세도 한다. 건드리기만 하면 죽여 버린다는 그것만이 진리로 통하는 세상이구나.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기 때문에 그렇게 안 살아야지.’
그렇게 안 살면 어떻게 할 건데요? 그렇게 안 살면 내가 나를 보호하는 셈이 되잖아요. 그런 것은 없어요. 우리로 하여금 그냥 그 세계에 내 던져지게 해요. “너도 똑 같아.” 다만 주의 이름을, 그 가운데서 비로소 제대로, 진정성 있게, 진짜 내가 사라진 입장에서, 주의 것이 된 입장에서 부를 수 있는 주의 이름만이 주의 이름입니다.
시편 9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시편 9편 6절, “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많다는 뜻이에요.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 오늘 본문 봅시다. 5절에,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여기 ‘한 주 예수님’이 나왔지요. 그 주가 시편 9편 6절에 보면, 성읍을 무너뜨린 분이거든요. 주님은 우리를 가지고 지금 전쟁을 하는 중이에요. 주께서 전쟁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살려주세요.”가 아니라 “나를 가지고 마음껏 전쟁해 주세요.” 그런 뜻이에요. 무슨 전쟁? 물질적 생활방식이 인간의 마음의 요건이 된다는 것, 인간의 의식으로 점령이 된다는 이 사실을 절실하게 마음껏 느끼면서, 대구든 전주든 어디 가든 마음껏 느끼세요, 돈 없이는 못산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면서 “주여, 여기서 내가 승리할 수 없었는데 이미 결과적으로 주께서 승리케 하셨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주님이 나의 주님이 되는 겁니다.
자, 끝으로, “목사님! 그래도 성도가 세상에서 살려고 하면 취직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승진 하려면 ‘나는 앞으로 전도사도 아니고 총리직 수행만 생각할 겁니다.’ 이렇게 해줘야 총리도 할 수 있는 문제고.(얼마 전에 국무총리 되신 분의 이야기입니다. 그 분이 침례교 신학교를 나와서 전도사로 일했거든요.)” 자, 이럴 경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성경에는 딱 해답이 나와 있어요. 그들만의 리그가 되게 하라, 하는 겁니다. 그들만이 노는 파티장이 되게 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요? 전에 고린도전서 1장에서 했습니다. 26절부터 보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결국 마지막에 “자랑하는 자는 오직 예수님만 자랑한다.”
따라서 우리끼리의 리그를 만들면 돼요. 뭐냐?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우리끼리가 나올 때 그게 바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들 리그에서 놀라고 하세요. 대자연과 함께. 우리는 우리들끼리, 다시 말해서 천하고, 못나고,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는데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거기서 탈피하게 되었음을 감사하는 새로운 리그, 메이저 리그, 마이너리그가 아니고 메이저리그. 그렇게 살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양과 염소로 노선이 다른 겁니다. 두개의 정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이 미력한 우리 몸을 가지고 주께서는 그 정보를 바깥으로 방출하게 하는데 이것을 가지고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수의 증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의 증인,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나의 증인이 되리라.”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똑바로 보게 하옵소서. 나 빼놓고 보지 않고 나를 포함시켜서 보게 하옵소서. 제발 나에게서 내가 빠져나오고, 사람에게서 사람이 빠져나오고, 이 무덤 같은 세상에서 새롭게 파견근무하고 있는 주의 백성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