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50강-자유자의 권리(고전9;1-5) 15071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7. 22. 07:41

2015-07-19 12:46:29 조회 : 188         
   자유자의 권리 150719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자유자의 권리(고린도전서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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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07-19 13:29 
자유자의 권리

2015년 7월 19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9:1-5

(9:1)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9: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9:3)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9:4)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9: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이질적인 추가인물’로서 사도 바울이 등장한다고 스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하고는 다르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다름’을 예수님에 의해서 주어진 사실을 인정하는 자들이 바로 ‘성도들’이라고 합니다. 즉 당신네들에 의해서 사도로 칭함을 받는 이 상황을 유발하면서 사도가 이 세상에 등장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사도가 발휘하고 발산하는 기능으로 인해 이 세상이 두 개의 상호 다른 속성으로 구분되어진다는 겁니다. 사도에게 속한 기능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 ‘자유’라고 합니다. 이 ‘자유’는 원래적인 ‘이질적 존재’인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인간들이 속해있는 이 세상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자유’가 들어오게 된 자를 ‘자유자’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런 자는 ‘예수님의 기능이 내부적으로 작용하는 자’가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만이 이 세상에 이질적인 자가 아니라 사도도 이질적이고 그리고 사도를 사도로 알아보도록 된 성도들도 함께 ‘이질적인 자’가 됩니다. 모두 예수님의 자유가 유발한 현상입니다.

예수님처럼 이처럼 여전히 이 세상에 이질적인 자들을 만들어내시는 이유는, 인간들이 자기 원천을 알지 못하고 그저 자연의 일부로서만 속해서 생계와 생존에 열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유, 곧 구출이 되지를 않고 있는 상태입니다. 환기통이 없이 답답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현대인들의 삶이 꼭 이런 양상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대자연에 속했다는 식으로 정리합니다. 왜 태어났는지는 모르는채, 살데까지 살다가 나중에 늙어죽어지면 대자연에 합류하면 그만이다는 겁니다. 과연 이것이 탈출이고 구원이요 자유일까요? 아닙니다. 마태복음 8:27에 보면,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제자들 자신들은 아무리 큰 소리쳐봤자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질 만무가 없는데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시니 담박에 잔잔해졌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대자연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행사하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에게 ‘궁극적인 자유함’을 제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일단 ‘대자연’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자연도 굴복한 예수님께서는 자진해서 십자가 죽음의 길에 나서시게 됩니다. 이는 대자연의 굴복당한 인간상보다 더 근원적으로 인간은 죽음의 세력에 붙잡아 있는 형국이라는 점을 말해주시는 겁니다. 즉 ‘죽음’으로 인해 인생의 의미는 끝나는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실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심판의 소리에 죽은 자들로 무덤에서 다시 살아 나와야 합니다. 좋든 싫든 말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인간의 존재를 죽이는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영원히 살려내면서 영원한 저주의 형벌을 가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내리치시는 저주를 위해서라도 영원히 죽지 말아야 할 존재가 곧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허락하신 바는, 바로 이 저주에서의 해방이요 자유입니다. 즉 대자연마저도 예수님께서 왜 자진해서 죽음의 힘 밑으로 굴복당해야만 하는 이유는, 궁극적인 자유인, 저주의 죽음과 형벌부터의 자유를 위함입니다.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행적인 고스란히‘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기능’의 내용이 됩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대자연의 일부로 생각하는데 거울보면 비쳐나오는 자신의 시각적 이미지가 곧 자기 자신의 전부라고 여깁니다. 그러니 인간은 자신을 영적 존재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는 처지입니다. 왜 태어났으며 왜 죽어야만 하는지를 모릅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인간에게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저주의 징후가 발생됩니다.

그것이 바로 ‘수치’입니다. ‘수치’는 인간이 스스로 억누를 수 없는 감정입니다. 누구나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은 누구나 원치않는 수치를 내뿜고 있기 때문입니다. 옷을 입었다고 수치가 근원적으로 소실된 것이 아닙니다. 단지 두꺼운 위장막 속에서 강하게 숨쉬고 있는 중입니다.

늘 발산되는 수치를 덮기 위한 아이디어가 악마로부터 유입된다. 이것이 바로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작업’입니다. 어떻게하든 본디 자기 자신을 선하게 유지하려고 합니다. 하자민 그런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아담의 형상’입니다. 죄의 밥이 되는 형상이고 죄 힘으로 꼼짝 못하게 잡혀 사는 형상입니다.

성도에게는 새로운 낯선 형상이 들어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죄 속에서 살면서 성립한 ‘하나님 형상’입니다. 이 속에서 죄를 의로 바꾸어주시는 기능이 들어 있습니다. 이 기능이 성도 내부에 작렬하게 되면, 아담의 형상을 그냥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의 형상’으로 교체되면서 뽑아냅니다.

바로 이러한 성령님의 작업에 대한 인식이 성도에게 나타납니다. 마치 치과치료하면서 혀의 움직임이 치료할 이를 가리면, 의사가 강제로 혀를 밀어내듯이, 성도의 삶이란 자신의 허물이 드러날 때마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종교적 의로운 행함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고 싶어 하지만 성령님께서 강제로 그 행함을 물리치시고, 죄의 근원을 그대로 노출시키십니다.

이 과정에서 진정한 은혜가 더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있는 모든 것도 다 회수하시는 작업인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진정은 ‘내 것’, ‘내 자식’, ‘내 가족’이란 기존의 형상에서는 요구할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자유가 들어와서 구원받은 자라면, 예수님이 당했던 고난을 함께 당하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11장에서 나와 있는 두 증인처럼, 그 증인들의 복음 전파를 통해서 이 현실 세계가 ‘애굽’이요 ‘소돔과 고모라 동네’요 예수님을 살해한 십자가 진 동네라는 사실을 증거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받을 권리’입니다. ‘권리’란 확정적 발휘를 나타냅니다. ‘미래에 예수님을 믿었다’는 표현처럼 마지막에 확정받은 사실을 앞서 발휘되고 있는 자들이 곧 성도입니다.

이들의 자유로운 삶의 여부는 예수님의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받고 핍박받는 현상이 일어난데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 이것이 바로 ‘고난받을 권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 자체가 영적 존재임을 알아야 영적인 존재로 자신을 다시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7-21 11:44 

48강-고전 9장 1-5(자유자의 권리)1507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9장 1-5절입니다. 신약성경 273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9:1-5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찌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사도가 특정인을 대상으로 자신의 사도됨을 알리는 장면입니다. 그런 대목인데 여기서 특정인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만 사도된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이 진짜 사도라고 믿을만한 사람까지 예수님이 공히 관여를 했다는 겁니다. “나 사도인데 알아 달라.”가 아니라 내가 사도인 것을 아는 능력까지 인간의 능력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거지요. 주께서 능력을 주셔서 “사도바울 당신이 사도 맞네.”라고 보증할 수 있는, 그것을 증거 할 수 있는 사람까지 주님이 관여하신 거예요.


그렇게 주님이 관여하게 되면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말이 뭐냐? 나나 당신들이나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보통사람이 아닌데 왜 다른 보통사람들과 같이 쓸데없는 것 가지고 염려하고 걱정하고 주눅 들고, 왜 그렇게 살아가느냐 그 말이에요.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가 있는데 그 자유 왜 활용 안하십니까?”라고 묻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주신 그 자유가 뭐냐? ‘자유자’가 뭐냐? 주님이 주신 자유라 하는 것은 추가적인 이질자로서 이 땅에 오신 주님의 행동거지, 마음상태, 사상, 그런 것을 가지고 자유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자유라 하는 것은 우리한테는 애초부터 없는 것이고 자유란 주님만이 홀로 갖고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사도에게도 주고, 그리고 “바울 당신이 사도가 맞습니다.”라고 하는 그 사람에게도 그 자유가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를 사도로 알아보는 사람 같으면 당신이나 나나 주님한테 공통적인 것을 받았습니다.” 하는 그 말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을 이 시간에 저와 여러분이 같이 보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필히 이런 생각이 들어야 돼요. “사도나 사도를 알아보는 성도들이 받았던 그 자유, 나한테는 없습니까? 나한테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겠어요?”라는 그런 질문이 필히 나와야 돼요. 다들 머리 좋으시니까 그런 질문이 나와야 됩니다.


그 자유 받았는지 아닌지 확정할 수 있는 그 모양은 뭐냐? 고난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고난 받을 수 있는 권리. 고난에 대해서 참는 권리가 아니고요. 인내하는 권리가 아니고요. 적극적으로 ‘아무나 받나, 고난을?’ 이런 기쁨과 자랑으로 고난 받는 권리를 이야기합니다. 이질적이어도 너무 이질적입니다. 사람은 자기 생계에 위협을 받을 그 때가 제일 괴롭거든요. 생계에 위협이 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도망치듯이 살아가는 게 인생인데 이 사람들, 성령 받는 성도는 반대가 되어서 고난 받는 권리를 행사하는 기쁨을 누리겠다는 겁니다. 권리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확정된 사항을 권리라 해요. 변동이 일어나지 않는 것. 권리행사라 하는 것은 내 속에 이미 뭐가 확정되어 있다는 겁니다.


뭐가 확정되어 있는가? 고난 받을 수 있는 권리가 확정되어 있다는 겁니다. 고난 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권리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웃습니다. “미쳤나? 웃기네.” 이렇게 합니다. “고난을 줄여야 행복한 인생 되는데, 가만있어도 더운데 거기에 고난 받을 권리까지 더한다면 대체 인생 망가지라는 말인가?”라고 비아냥댈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고난 받는 권리 안에 복음의 핵심중의 핵심이 들어 있어요. 그 핵심이 뭐냐? 그 핵심을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차마 질문 못하고 있는 그 질문을 제가 알고 있지요. 혹시 질문했다가 무식이 드러날 까 싶어 못하고 있는 그 질문이요. 이 겁니다. “목사님, 이 땅에서의 나와 천국 갔을 때의 나와 같은 나입니까, 다른 나입니까?” 그 질문. “이 땅에 있을 때의 나와 천국 갈 때의 나와 같은 인간입니까, 다른 인간입니까?” 그 질문. 차마 못하는 질문 제가 먼저 운을 뗍니다. 그 질문이 왜 중요한가? 이 땅에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 우리 교회에는 그런 사람 없는데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만약 천국에서 만난다면 그 순간부터 나의 천국 삶은 지겹고 짜증나는 삶이 되는 것이 걱정되어서 묻게 되지요.


저 사람 싫은데, 저 사람은 내가 가는 곳에 안 따라붙었으면 좋겠는데, 저 사람은 분명히 지옥 갈 것이라고 확정을 했는데 천국 가니까 그 사람을 만났어요. 그 때부터 나는 천국에서 지옥의 삶을 사는 겁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는 그 문제. 두 번째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자식을 사랑하는데 나는 천국에 와 보니 사랑하는 내 딸이 천국에 안 왔어요. 그럴 때 내가 과연 천국의 사람을 맘 편히 누릴 수 있겠는가, 하는 그 문제입니다. 내 딸은 지금 지옥에서 못 빠져 나와서 유황불에서 허덕거리고 있는데, 그렇게 내 사랑하는 딸 혹은 아들이 지옥에서 산다면 나는 차라리 어미의 심정으로 자식을 천국으로 보내고 대신 내가 지옥에 뛰어드는 것이 맘이 편할 거 같아요. 사랑하는 자식 지옥으로 보내고 천국에서 나 혼자 히히낙낙거릴 자신이 없어요. 그런데 천국은 그렇지를 못하거든요.계곡이 있어서 부자와 나사로처럼 한 번 가면 그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이 두 가지 문제를 종합한다면 “지금의 나와 그 때의 내가 동일한 인물입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지요. 그런 걱정거리가 깔려 있는 채 그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어미의 마음이란 게 참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지요. 이런 곤란한 문제가 있는데 누구도 운을 떼는 사람이 없어요. 제가 보기에는 이 교회사 2천년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어요. 천주교는 어떻게 하는가 하면, “걱정하지 마세요. 미사 넣으면 됩니다.” 하는 거예요. “딸 지옥 갔다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미사를 통해서 패자부활전식으로 기도하면 됩니다.” “그러면 신부님! 얼마 듭니까?” “2백만 원이면 됩니다.” 미사 넣으면 먼저 하늘나라 간 베드로를 비롯해서 성인들이 합력해서 지옥에 가 있는 자기 아들을 빼낼 수 있다는 거예요.


미사 못 넣으면? 못 넣으면 못 빠지는 거지요. 결국 돈 없이는 죽은 자식 구원도 못 받는 것이 됩니다. 그것 때문에 패자부활전을 하는 연옥이 있는 거예요. 개신교는 연옥설이 없는데 해결책도 없는가? 개신교는 하지도 못하면서 은근히 연옥 설 비슷한 것을 끄집어내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그 전단계로 있는 것이 중보기도입니다. “지옥 갔어요? 예수 이름으로 중보기도 하면 꺼내줄 수도 있는데요?” 문제는 이겁니다. 그게 내 딸이냐, 그게 내 아들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내 딸이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 뭐가 게재되어 있느냐 하면, “나는 저 딸을 내 딸이라고 할 권리가 나한테 있습니다.” 하는 권리문제가 게재되어 있는 겁니다. “저애는 내 아들입니다.” 남의 아들이 아니라 나한테 저 아들을 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권리가 나한테 있다고 그렇게 자부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오인, 이러한 착각이 이질적인 불순물이 인간 속에 이미 삽입된 결과라고 보는 겁니다. 이게 처음 창조한 그 인간 아닙니다. 처음에 인간 만들 때 죄 짓고 난 뒤에 인간은 죄를 지었지만 로마서 5장에 보면 그걸 달리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죄에게 당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죄를 지은 게 아니고 죄한테 속아서 당해버린 거예요. 죄는 악마에게 당한 겁니다. 설교 초반부터 기쁜 소식 나갑니다. 여러분은 악마에게 당했어요. 여러분은 책임 없습니다. 이거 기쁜 소식입니다. 팁으로 가져가세요. 우리 운명 내 잘못 아닙니다. 우리 책임 아닙니다. 자식 잘못 낳은 것 내 잘못 아닙니다. 뭔가 원인을 규명해야 돼요. 나를 이렇게 만들고 몰아넣은 다른 원인이 있습니다. 그 원인을 성경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죄 짓고 난 뒤에 대책이 없을 때에 몸에서 뭔가 피어나는 게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수치스러움이에요.


수치스럽다는 말은 이제는 내 몸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빠졌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 책임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내 책임 아닙니다. 수치스럽다는 그것을 감출 길이 없어서 만든 것이 옷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옷 입고 다니는 인간들은 전부 다 정신적인 장애인이에요. 그러면 옷 벗고 다닐까요? 옷 벗고 다니면 더 정신적 장애인이에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요. 수치스러움을 내가 가리는 방식이 기껏 그것인데 내가 가린다고 그게 가려집니까? 그게 가려져요?


드디어 죽음의 징후가 올라옵니다. 감기 걸리면 막 속이 아프듯이 기침이 나지요. 이게 감기 걸렸다는 징후입니다. 평소와 다르게 오늘 제 설교가 침착하잖아요. 지금 감기 걸려서 기침이 언제 터질지 모릅니다. 죽음의 징후는 부끄럽다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이 감당을 못해요. 부끄러움을 무엇으로 감당합니까? 부끄럽다는 것은 감기 걸리면 기침 나고 열나듯이 자연발생적이에요. 이 몸 자체가 우리의 조정의 대상이 안돼요. 우리의 관리대상이 안됩니다.


남자가 여자의 몸을 본다든지 벗은 몸을 접촉을 하면서 갑자기 몸이 흥분을 하는 이것은 자신의 윤리도덕과 상관없는 거예요. 어떤 개그프로에 보면 어떤 중이 여자를 보고 난 뒤에 갑자기 절을 해요. “나쁜 생각, 나쁜 생각……, 슬픈 생각, 슬픈 생각…….” 인위적으로 슬픈 생각을 해서 자기가 아직까지 점잖고 윤리적이라는 것을 드러내는데 몸 자체가 인간의 관리능력을 이미 벗어났습니다. 죽음의 징후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인간은 자기의 수치스러움, 부끄러운 것을 억지로라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발산되는 수치스러움을 잡아당겨서 점잖음과 착함으로 타협하려고 애를 쓰거든요.


그게 바로 행함이라는 겁니다
. 모든 인간의 행함은 선과 악의 구조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행함은 ‘이렇게 행동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의로운 것이 맞지? 복 받을만한 자격자 되지? 복 받을 권리가 있지?’를 포함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행위가 선악에서 나온 거예요. 그런데 그 행위가 무엇을 방해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새사람 만드는 일을 방해합니다. 그 새사람 만드는 일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은혜의 회수작용’이라고 합니다. 은혜를 회수해요. 은혜를 도로 가져가요. 은혜 주신 그것을 도로 가져가는 겁니다. 햇빛과 공기,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 우리의 생명, 이런 것들을 세월이 가면서 뜯어내버려요.


뜯어낼 때 우리는 그렇게 되는 것이 싫어서 꽁꽁 우리 자신을 감추면서 동원되는 것이 행함입니다. ‘나의 행함으로 나를 지키리라. 나의 행함으로 나의 건전함을 유지하리라.’ 성도한테는 어떻게 하는가? 성도한테는 우리 몸을 뜯어내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마귀를 동원해서 그 온전함과 의로움을 뜯어내요.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사람인데 

자신이 악하지 않다고 하니까 

마귀까지 투입시켜서 

기어이 “제가 유구무언입니다. 제가 의로운 게 없습니다.”

라고 하나님의 은혜의 회수작용의 행위에 대해서 동의하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회수하는 작용이 어떻게 되느냐? 동전으로 복권 긁듯이 긁어내지요. 표면을 긁어내게 되면 ‘꽝’이 나오든지 뭐가 나올 것이 아닙니까? 주께서는 우리의 몸을 긁어내요. 긁어내게 되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묻지도 않고 된 우리의 창조의 바탕이 된 것이 나옵니다.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에다 

흙으로 몸을 만들어서 

이걸 코팅한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몸, 인간 자기 자신은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내가 왜 이걸 따먹었는지,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지요. 인간은 영적인 존재기 때문에.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인 것은 모르고 그냥 눈에 보이는 모습만 챙기려고 하는 거예요. 이걸 시각적 이미지라고 하는데 인간은 항상 거울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정립해요. 라캉은 이걸 ‘거울단계’라고 해서 인간은 자기 모습의 시각적인 오인에 의해서, 착각에 의해서 그게 자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시각 때문에 뭘 놓치는가? 내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어떻게 자리 잡는가? 그걸 놓치는 거예요. 그런데 고맙게도 주님께서는 그 시각적 형상을 다 파냅니다. 긁어냅니다. 마귀를 동원해서 다 긁어내요. 다 긁어내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 있고 그것이 주님이 새로 집어넣은 형상으로 교체가 되는 겁니다. 새로운 형상으로 교체가 되는 것이 천국의 자아에요. 제가 처음에 질문했지요? “목사님! 이 땅의 자아와 천국 가는 자아와 동일합니까?” 동일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꿔치기 해놓은 그 형상에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의 영광스러운, 천사도 부러워하는 영광스러운 몸, 그 몸체와 형상을 결합시키면 그것으로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겁니다.


이게 성경에 있는 인간의 내막이에요. 그러면 지금은 뭡니까? 지금은 우리가 우리를 가리는 그것을 강탈하고 빼앗는 작업을 하시지요. 하나님의 형상이 변질되면 그것을 아담의 형상이라고 하는데, 조금 어렵지만 사람의 형상, 아담의 형상, 우리는 그 아담의 형상을 원래적인 내 형상인 줄로 알고 오해를 해서 막 붙잡습니다. 안 내놓으려고 해요. 주님은 자기 백성을 건지기 위해서 붙들고 있는 그 아담의 형상을 강제로 빼앗습니다. 이게 은혜의 회수작업이에요. 빼앗아버립니다.


인간은 자기 잘난 것을 전부 다 빼앗기게 되면 남는 것은 아담의 형상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만 남아요. 그동안 이렇게 살아온 것이 은혜로 살아온 것인데 은혜를 빼앗아 버리면 남는 것은 징벌과 저주 외에는 남는 것이 없지요. 성도도 늙어 죽습니다. 하지만 성도가 늙어죽는 거기에 개입된 분이 계신데 예수님께서 죄인 된 형상으로 오셔서 우리가 받을 모든 저주를 대신 받아버려요. 중간에 끼어들어서. 장차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을 것인데 미리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분이 죄인의 몸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받아야 될 아버지의 저주와 심판을 대신 다 받아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또 오해하는데, ‘나는 5년 전에 예수를 믿었다.’ 혹은 ‘나는 7년 전에 예수를 믿었다.’ 하든지 ‘나는 20년 전에 예수를 믿었다.’ 하는데 그것은 사실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20년 전에 예수를 믿었다 하지 말고, ‘나는 최종적인 나의 미래에 예수를 믿었다.’ 이렇게 해야 돼요. 이것은 문법적으로는 말이 안 맞아요. 미래는 ‘믿을 것이다’가 되어야 하는데 미래라고 해놓고 ‘나는 믿었다’고 과거로 해버리면 미래와 과거가 섞여서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그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를 성도한테는 이해가 되도록 집어넣는 거예요. 숨통 터지게 만들면 어떻게 되는가? 결국 우리는 그동안 처리 안 되는, 감당 안 되는 죄를 품고 살아 왔음을 들통 나게 만들어요. 그동안 마귀가 이불 두 채, 세 채, 한 여름인데도 막 뒤집어 씌워놓았으니까. 우리는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하니까 마귀가 시키는 그 자체가 두꺼운 이불이 되는 거예요. ‘그래, 새벽기도를 안 나가서 이런 벌을 받는구나. 새벽기도 나가야지.’ 새벽기도 안 나갈 때는 몰랐는데 새벽기도 나가면서부터 마귀가 무슨 생각이 들게 하는가? ‘30분이 뭐냐? 적어도 두 시간은 기도해야지.’ 그 때부터 두 시간을 합니다. 두 시간을 하는데 효과가 없거든요. ‘세 시간은 해야지.’ 안 되거든요. ‘금식도 해야지.’ 금식해도 안 되거든요. ‘그러면 전도해야지.’ 전도한다고 미쳐서 난리에요. 거리에서 기타 치면서.


마귀는 도대체 어디까지, 우리가 어디까지 해야 돼요? 제가 퀴즈를 내겠습니다. 삼계탕, 곤드레 밥, 연잎 밥의 공통점은? 못 들으신 분을 위해서 다시 냅니다. 삼계탕과 곤드레 밥과 연잎 밥, 이 음식들의 공통점은 뭘까요? 밥이 내부에 있다는 겁니다. 삼계탕은 닭 뱃속에 찹쌀밥이 들어 있으니까. 곤드레 밥도 그렇고 연잎 밥도 그렇고요. 우리는 죄를 임신했습니다. 배가 볼록해요. 우리는 죄를 임신한 거예요.


그 죄를 바늘로 터트려서 폭발시키는 것이 주께서 구원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죄를 임신한 그것을 누가 덮었는가? 세 겹, 네 겹, 이불가지고. 마귀가 덮었어요. 그게 마귀가 수치스러움을 덮어주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수치를 수치스럽게 온전하게 드러내고 가죽옷으로 바꿔치기 하는 것이 주님의 형상 바꿔치기 작업인데 우리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내가 납득이 되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게 종교고, 교회 다니기, 기도하기, 헌금하기, 이런 것들이 전부 다 내 부끄러움을 들키지 않기 위한 하나의 수작이지요.


주께서는 은혜를 회수하면서 새로운 은혜를 집어넣는데 우리는 기존의 은혜를 은혜라고 붙들고 있는 거예요. ‘저 자식은 내 자식이고 저 딸은 내 딸이고…….’ 자꾸 붙들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적절한 노래가 있습니다. 성령이 와서 마귀가 덮고 있는 그 두꺼운 이불을 다 뜯어내요. 우리 어머니가 교회 갈 때 되면 제 아내가 입던 옷 갈아입힌다고 애 먹습니다. 말끔하니 얼마나 예뻐요. 한 겨울에 입던 그 두꺼운 옷을 뜯어내는 거예요.


“♬정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줬지만 지금은 남이 되어 떠나가느냐.” 성령이 와서 마귀를 뜯어내게 되면 우리가 그동안 교회 20년 다녔다, 장로다, 목사다, 신학, 헌금, 이게 막 떠나가거든요. “정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줬지만 지금은 남이 되어 떠나가는구나.” 떠나가야 돼요. 떠나가야 된다니까. 그런 것 다 소용없어요. “♬이별의 아픔일랑 가져가다오. 아~얄미운 사람.” 종교가 무슨 소용 있습니까? 우리가 구원받는데. 교회 다니기가 무슨 소용이 있어요? 삼위일체와 신학과 교리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왜 그렇게 자기 자신을 위장하고 한 여름에 이불 세 채 네 째 덮고, 그 짓 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은 이 땅에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주님의 그 멘트가 우리에게 나올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왜 그 자유를 마음껏 누리지 못합니까? 주님은 마음껏 누렸는데. 주님은 마음껏 누렸잖아요. 주님의 생애를 보세요. “나?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야. 저리가. 난 죄인을 부르러 왔어. 내가 원하는 사람 내가 따로 골라낼 거야.”


풍랑이 입니다. 자연의 바람이 불어요. 사람들은 감당 못하지요. 자기로부터의 해방도 못하는데 자연의 해방은 어림도 없지요. 벌벌 떱니다. 그런데 주님이 바람과 바다를 향하여, “잔잔 하라!” 하니까 잔잔해졌어요. 잔잔해졌습니다.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그 위대한 분, 자연을 굴복시키고 자연을 다스리는 그 위대한 분이 마지막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뭐냐? 자진해서 죽는다는 거예요. 자진해서 죽음으로, 십자가로 갑니다. 자연을 다스릴 수 있는 분이 자진해서 죽음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지요.


진짜 해방, 진짜 탈출은 자연의 해방이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제가 처음에 자유를 뭐라고 했느냐 하면, 고난 받을 수 있는 권리, 권리라고 했는데요.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고 권리, 고난 받을 수 있는 권리라고 하거든요. 적극적용어로서.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다가가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죽음이 없어요. “힘든 인생 콱 죽었으면 좋겠다.” 그것은 네 욕심이고 네 마음이고. 이게 밟아도 안 죽네요. 이게 인간입니다. 이게 죽으면 괜찮아요. 죽으면 고통도 같이 사라지기 때문에 괜찮은데 세상에, 한 번 태어난 생명이 죽지도 않네요. 죽어도 나중에 선한 부활, 악한 부활로 다시 살아나요. 이게 밟아도 안 밟혀요.


부자가 지옥 가서 죽었다는 소리 들으면 참 좋겠는데 지옥 가서 죽은 게 아니고 지옥 가서 살아 있어요. 이게 문제에요. 지옥 가서 살아 있는 것이. 어디 가도 기존의 하나님의 형상, 나라는 것, 하나님의 형상이 어려우면 그냥 나, 주체, 나, 나가 살아 있다니까요? 지옥 가서 살아 있어요.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가서 살아 있다니까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현재 네가 갖고 있는 것, 탈출 불가한 것, 지옥 갈 너 자신을 네가 소중하다고, 귀하다고 그걸 네가 보호하고 있다. 마귀가 시키는 대로.” 그런 처지를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라고 한다면 “내가 준 자유가 있잖아.” 그 자유는 이 땅에서 사탄의 유혹과 능력으로부터 탈출하신 분의 형상이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은혜가 주어지게 되면 그 은혜는 빼고 박는 은혜거든요. 이빨 이야기입니다. 제가 요새 이빨 치료를 하고 있어요. 법원 앞에 강 치과라고 있는데 이게 간접광고가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잘해요. 벌벌 떨지도 않고 참 잘하는데. 그 의사선생님이 하는 말이 “이빨 뽑고 임플란트 해도 되는 뿌리 보니 아직 쓸 만하니 그냥 때웁시다.”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이것이 좋은 테마다, 해서 메모지 부탁해서 썼어요. ‘아, 주님은 헌 이빨 뽑고 새 이빨 주는 것이 주님의 구원의 방법이구나.’ 그런데 우리가 “내가 겸손할 테니, 내 마음 낮출 테니까 주께서 덧입혀 주옵소서.” 이것은 때우는 거라니까요? 의사선생님이 “때우는 것은 5년 못갑니다.” 이러거든요. 뽑고 다른 이빨을 집어넣어야 돼요. 때워 쓰는 기존 이빨은 안 된다는 거예요. 종교가 뭡니까? 겉모습만 신앙인척 때우는 거거든요. 이걸 통째로 뽑는 거예요. 뽑으려면 어떻게 하느냐? ‘나는 안 죽는다.’를 받아들이세요. 나는 어떤 경우에도 안 죽는다. 왜? 지옥 가서 영원히 살든지, 아니면 천국 가서 영원히 살든지, 그렇게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영적존재로 만들어버렸다. 악령에 동조해서 지옥 가는 영적존재든지, 아니면 천국 가서 주님과 함께 영광 받는 영적존재든지, 어쨌든 영적존재지 몸의 존재가 아닌 거예요.


그러면 우리 몸을 평가할 때 몸으로 평가하지마시고 자기 자신부터 영으로 평가하세요. “주여! 저는 아, 하고 입만 벌리겠습니다. 알아서 뽑든지 때우든지 맘대로 하세요.” 이빨 치료하는데 아, 하라고 해서 입 벌렸거든요. 치료가 한 시간씩 걸리니까 얼마나 아픈지. “혀에 힘주지 마세요.”라고 해요. 참 미치겠어요. 혀에 누가 힘을 줬다고? 치과에서 무리한 요구를. “혀에 힘주지 마시고요. 안 보입니다.” 누가 일부러 애먹이려고 한 적도 없는데 아프니까 자연적으로 혀가 그렇게 된 거예요.


“자기 행함 자랑하지 말고 십자가 자랑하세요.” 이게 마음대로 됩니까? 평소에 이 몸이 아, 하고 혓바닥을 들어 올리듯이 자기 수치를 가리려고 하는 것인데. 그러니까 의사선생님이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는지 강제로 내 혀를 눌러버려요. 성령께서 강제로 우리 혀를 눌러버리니까 시커먼 이빨이 그대로 드러나잖아요. 그게 바로 지금 교체작업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다는 징후를 드러내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 자랑 질 되고, 자기 믿음이 자랑 질 되고. 주께서는 강제로 그 혓바닥을 눌러버려서 “네 썩은 마귀 적 모습이 안 보이니까 좀 혓바닥 좀 내려라. 그 이빨 내가 통째로 뽑겠다.” 하는 거예요. 네가 아는 네 형상 뽑고, 아담의 형상 뽑고, 예수님 형상으로 집어넣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그 교체작업이 한창이라 하는 그것은 내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확인하는 방법은 뭐냐? 예수님과 함께 억울한 고난을 받는 사람이 주님의 형상으로 간주되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고난 받은 것, 설움 받고 외로움 당한 것, 핍박받고 오해당한 것, 그러한 것을 예수님이 통과한 이 세상에서 동일하게 받고 있을 때 우리는 마태복음 5장에 나와 있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구약 적 예로 들어볼게요. 구약에서 요나가 하나님의 말을 안 듣고 다시스, 스페인으로 도망치다가 풍랑이 일고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되니까 겁이 나서 “이중에 자기 하나님을 욕보인 사람이 있지요? 자수하세요. 빨리 자수하라니까!” 요나는 자고 있었어요. 다른 사람이 “혹시 당신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도망치고 있는 중 아닙니까?” “맞습니다.” “당신 때문에 우리 배 재수 없어서 지금 다 죽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니 요나가 자진해서 “저를 이 집단에서 빼내서 저 바다에 던지세요.”라고 했어요. “아이고, 그래도 되겠습니까? 너무 미안해서.” “미안할 것 없습니다. 내 잘못이니까.” 임플란트 있으니까 이 썩은 이빨 빼버리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요나를 바다에 집어던졌어요. 자,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게, 요나의 끝은 자기의 목숨 잃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입장에서는 요나의 목숨 잃는 것이 요나의 끝이 아니었어요. 왜? 요나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반드시 자기의 택한 백성에게 하나님의 새로운 형상으로서의 축복을 기대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기능과 용도로 사용하게 되어 있어요. 요나가 목숨 잃는 것으로 끝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큰 물고기가 와서 요나를 삼켰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요나는 토해졌습니다.


이것은 죽음으로부터 튕겨져 나와서 통통, 죽음 딛고 튕겨져 나와서 영생으로 나온 거예요. 통, 통, 통, 하고 튕겨져 나온 거예요. 성전을 향해서 기도했는데 성전에서 용서하는 능력이 나오거든요. 그 성전에서 나오는 용서의 능력이 요나의 죄를 용서하시면서 새로운 요나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이 보여줄 진짜 기적은 병고치고 귀신 쫓아내는 그런 것이 아니야. 요나의 기적밖에 없다. 너희들도 통, 통, 통, 해서 영생의 나라로 뛰어들기 위해서 내가 중간에 너희 속에 개입하겠다.”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개입하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내가 육적인 몸이 아니고 영적인 몸인 것’을 알게 돼요. 영적인 몸임을 알게 되면 그 영이라는 분, 예수님이 가는 코스대로 우리는 밟을 겁니다. 따라서 그 코스를 밟기 위해서 미래에 만날 예수님의 그 능력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돼요. 우리는 그 이빨 속에, 이게 말이 이상합니다만, 이빨 속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의 흔적이 뭡니까? 간단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당했던 시련과 고난을 주변 사람한테 듣는 것, 얻어터지는 것, 맞는 것, 이유 없는 비난과 곡해의 대상이 되는 것, 그 형상이 장차 천국 갈 새로운 형상에 속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죄도 없었으니 억울하지요.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의 모습이기에 받는 박해라면 우리는 배 볼록하게 죄를 품고 있으면서 용서 받는 입장에 있기에 우리는 그렇게 억울하지 않잖아요. 배 볼록하게 죄가 있으니까. 이걸 마땅히 저주해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주께서 중간에 나서서 그 많은 죄도 그 썩은 이빨 자체를 이미 죄를 용서했다는 사랑 가득한 내용으로 바꿔치기 해주니까 그 두 가지를 다 아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자유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나는 너희들이 아는 육적인 권리, 아내를 누린다, 생계를 위해서 월급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런 권리들이 있지만 나는 그런 권리 말고 다른 권리가 있는데 아내도 없고, 또 스스로 일해서 생계유지하는 그런 권리를 나는 즐겨 행사하고 있는 나 자신이 진짜 사도인 것을 너희들은 알아보지? 그렇지?”라고 하는 본문이 오늘 본문이에요. 이게 보통 자유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당했던 고난을 함께 당할 수 있는 그것이 권리인 동시에 은혜고 축복이에요. 인간의 힘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강제로 순교한다고 머리 들이민다고 순교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필히 되게 되어 있습니다.


끝으로 요한계시록 11장을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두 증인이 나옵니다. 아주 특이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합니다. 복음을 전파하니까 주변에 같이 살던 사람들의 색깔이 본래의 색으로 바뀌었습니다. 악마에 속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짐승이 나오고, 그 사람이 죽었던 곳이 소돔이고, 애굽이고,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지요.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9-10)


이 두 증인, 우리가 보기에 그냥 우리하고 똑같은 사람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영적으로 다루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성도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살면서 내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이 성경에 나오는 그 지명, 소돔, 애굽, 그리고 십자가 지신 곳으로 여러분은 이해되십니까? 자유인입니다. 주님의 자유가 여러분의 인생을, 운명을 지금 끌고 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달리 보세요. 세상은 전부 다 육적으로, “나 돈 얼마 벌었다. 난 앞으로 얼마를 더 살 거야.” 이렇게 모든 단어가 다 육적이에요. 영적이 아니고.


우리는 이야기합시다. “옛날에 나도 그런 썩은 이빨로 있었는데 주께서는 이 이빨을 바꿔 주시면서 ‘저게 바로 애굽이고 네가 사는 곳이 짐승의 세계이고 애굽의 세계이고 십자가 달린 곳이고 그게 소돔이다.’라는 것을 이제 알게 했다.” 하고 눈이 열릴 때 그 사람이 바로 주님의 자유가 들어온 주님의 자유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갔던 세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어버렸습니다. 주님은 주님이고 나는 내 인생이라고 이렇게 자기만 생각했는데 주의 성령이 임하니 한바탕, 하나의 세계이고 통합된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주님의 새로운 자아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체험적으로 아는 인생을 주셨사오니 감사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무엇이 진정한 은혜고 복인가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