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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29강-음행과 구원(고전5;1-5) 15022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2. 28. 08:15
2015-02-22 12:41:30 조회 : 218         
   음행과 구원 150222 이름 : 이근호   
 
음행과 구원(고린도전서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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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02-22 13:35 
음행 

2015년 2월 22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5:1-5 

(5: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5: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5: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5: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인간은 누구나 음행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 세상 자체가 음행의 원리로 갖추어지고 돌아가는 음녀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하나로 통합시켜서 규정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저항하고 반발하는 세력들로 인하여 장악된 세상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그 속에 살고 있는 개개인을 통해서 그 음행적 성격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교회는 이런 사실을 놓치지 않습니다. 교회가 아닌 다른 상황에서는 음행을 가정의 행복이나 사회의 질서차원에서 처리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적인 시도는 영적 성질을 도외시한 처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음행한 사람이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음행하고서도 천국가고, 음행하지 않고서도 지옥 가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네들의 생각이 옳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막무가내로 하나님도 자신들의 의견에 동의해줄 것을 요구하는 식으로 억지를 부립니다. 

즉 음행 안한 사람만 천국에 가고 음행한 사람은 지옥가기를 원합니다. 단 본인이 생각하기에 본인이 음행한 적이 없다고 자신만만해 하는 사람들에게 즐거운 이야기가 되겠지요. 하지만 이런 생각은 인간들이 이미 음녀라는 이 세상에 푹 빠져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기에 나온 사상입니다. 

이 세상은 인간들끼리만 옹기종기 모여살면 되는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등장으로 벌써 판명이 났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냥 인간들이 옹기종기 모인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예언과 말씀을 실어나려는 그런 민족입니다. 마치 배가 지나가기 전에 바다는 고요하지만 막상 배가 물을 가르고 지나가면 바다의 속내가 노출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이 과연 음녀적인 세상이라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지나가면서 발생시키는 자국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 예가 민수기 25:1-3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압 신전을 모시는 여인들이 이스라엘 남성들의 마음을 휘어잡아 그들의 축제 마당에 참여시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이스라엘 남자들이 여인의 유혹에 넘어갔는가?’라고 묻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남자는 여성으로부터 유혹받을 만반의 마음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격이 떨어지고 높고 여부에 따라 당장 미혹 받고 아니 받는 상황이 일어날 수는 있어도 항상 지속적으로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신을 믿는 여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남자들을 유혹케 하신 이유는, 음행을 통해 이 세상의 진상을 살펴주시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영적 세계가 이스라엘 속에 어떤 식으로 스며들어오고 있는지를 밝혀주십니다. 즉 이스라엘은 기존의 인간들만의 현실 말고 다른 현실을 소개할 역할을 맡은 특수한 나라입니다. 인간들의 감정이나 이성이나 의지에 의해서 하나님의 법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와 좌절을 통해 그 현장에 영적 세계가 출현됩니다. 

이처럼 약속이 스며든 육체를 하나님께서 ‘몸’, 혹은 ‘언약의 몸’, 혹은 ‘약속의 몸’이라고 합니다. 이 몸 안에서 이 음녀의 세계에서 자기 백성을 구출시키는 바탕이 들어있습니다. 레위기 21:7에 보면, “그들은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을 취하지 말 것이며 이혼 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여호와께 거룩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이 품고 있는 ‘정결케 하는 피의 능력’으로 인하여 움직이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용서의 능력이 남성을 통해서 여성에게 전달되는 식으로 온 나라에 퍼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계시받은 남성의 품 안에서 비로소 여성은 구원된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20:14에 나오는,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 제 7계명은 20세 이상, 그리고 홍해를 건너온 자 남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런 남성 중심의 율법 수여는 기존의 계시가 없는 육과 육의 감정적 교류를 통해서 가정을 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의도를 지니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이 없이 남녀 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은 개인의 감정에서 출발한 것이라서 본인의 이름을 걸고 그 감정에 충실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참된 사랑’, ‘진정한 사랑’으로 보이지만 실은 음행입니다. 왜냐하면 육과 육의 만남이지 결코 몸과 몸, 즉 ‘약속의 내장된 몸’과 ‘약속이 내장된 몸’의 만남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사랑하는 상대를 그리워하고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 사랑 이루어지지 않으면, 즉 내 것 되지 아니하면 아예 세상을 하직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려거든 나를 위해 목숨바치라”고 말입니다. 잠언 19:1 4에 보면,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있어 부부 사이란 단순한 가정 행복 차원이 아니라 로마서 7장에 보면, 율법과 성령의 관계를 미리 당겨서 보여주는 사이입니다. 

가정이 아니라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에베소서 5:31-32) 이로서 간음의 반대말은 ‘보호’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계시를 보호하는 겁니다. 

이럴 때, 그 사람은 ‘언약의 몸’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미 이 악한 음란의 세계에서 구출받은 몸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복음이 빠지면 이는 육과 육의 애정관계에 불과합니다. 보호하는 것이 오로지 자기 자신의 잘남과 대단함과 우수함과 의로움 뿐입니다. 이것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설 수가 없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받듯이,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용서가 빠지고 그 대신의 본인의 가치를 챙기는 이 이방종교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고 이겨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의 몸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확인받는 처지에 있습니다. 즉 주입된 피로 인하여 구원받는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늘 증거하는 삶이
곧 복음을 보호하고 또한 복음으로 보호받는 성도의 참된 삶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몸이 주님이 다루시는 특수한 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놓치지 말도록 보호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2-23 13:58 
29강-고전 5장 1-5(음행과 구원)1502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5장 1-5절입니다. 신약성경 268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5:1-5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오늘 본문은 모든 인간들의 상식을 뒤 엎는 말씀입니다. 음행했으니까 지옥가야 된다는 이야기,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일관된 뜻이라고 알고 있는데 음행하는 사람의 영이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는다는 겁니다. 음행해놓고 구원 얻는 거예요. 음행해놓고 영생 얻고 음행해놓고 천국 가는 겁니다. 이 말씀은 음행하지 않았다고 여기는 자들이 지옥 간다는 그것도 아울러 우리에게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음행 안하고 지옥가고 음행하고 천국가고. 뭔가 손해 본다는 느낌, ‘이상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 실제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내용이 왜 이렇게 다르지?’라고 생각하게끔 하는 본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 모든 일을 인간들끼리 일단 정해놓고, 그 인간들끼리 서로 옳다고 장담해놓고 하나님한테 결재 받는 식으로 “하나님, 우리들 보기에 다 서로 의견일치 했습니다. 하나님만 남았습니다. 우리 생각이 옳지요?” 이런 식으로 윽박지르는 식으로 살아온 겁니다. 우리 인간들이 괜찮은 인간들이니까 괜찮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괜찮은 생각들,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하나님의 참 뜻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거예요. 그것은 자기 가치를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어서 그렇게 나오는데 그게 바뀝니다. 



인간들끼리 생각하는 그 자체,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만나버리면 인간의 뜻은 묵살되지요. 거짓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특히 여기 4절에 보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지 않고 주 예수의 이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이라는 것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저 하늘에 계시면서 일방적으로 이 땅을 만드신 그 하나님이 아니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그냥 신의 개념과 이 땅에 오신 하나님개념이 일치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정 반대되는 겁니다. 정 반대되기 때문에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근원적으로 문제 있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신이라는 것, 창조라는 것, 그리고 심판이라는 것, 구원이라는 것, 천국이라는 것, 이 모든 개념에 대해서 수정이 필요한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육신에서 나오는 그 욕구, 종교적인 욕망과 하나님의 뜻을 혼동하고 있어요. 같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르게 살면 천국 갈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르게 산다는 것이 자기를 지옥으로 보내는 그런 용도로 바르게 산다는 것을 인간들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래. 바르게 살아라. 그래서 지옥가거라.” 이런 조로 주께서 일한다는 것을 누가 상상하겠습니까? 바르게 살아도 천국 못 간다면 우리는 거기서 삐져서 “그러면 나는 내 맘대로 개같이 살겠습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진즉부터 그게 네 마음이잖아. 네 마음대로 살고 싶은 것이 네 마음이면서도 마치 너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네 마음은 감추고, 네 속내는 감추고 주의 말씀에 순종합네, 라는 위선과 허울로서 네가 살아왔다면 그 껍데기는 벗겨져야” 돼요. 그 벗기는 방법은 말씀으로 벗기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에 해당되는 말씀이에요. 



사람이 음행하지 않았다는 그 말은 대단히 위험한 말이에요. 음행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만큼 음행할 가능성이 많다는 뜻이에요. 앞으로 두고 보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특히 출애굽기 20장 14절에 보면 간음하지 말라는 거예요. 간음하지 말라. 십계명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간음하지 말라.”를 누구한테 이야기하느냐 하면, 20세 이상의 사람들에게 해요. 20세 이상의 남자 중심으로 언급을 했어요. 20세 이하, 예를 들어 두 살 먹은 애한테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 그게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애굽에서 나왔을 때 20세 이상 되는 사람들에게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언급을 했거든요. 그것도 남성중심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면 여성은 해당이 안 됩니까? 해당 되는데 일단 그 가정에 남성이라는 이름의 가장을 통해서 여성은 남편에게 전달받는 식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수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장치, 시스템은 전부 다 의미가 있는데 어떤 의미인가 하면, 음행이라는 것을 통해서 영적세계를 설명하시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예수님 이후의 모든 세계가 음녀, 음행하는 도시, 국가, 이렇게 봅니다. 



그것을 음녀 바벨론이라, 큰 성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하나의 도시로 규정을 하고
그 도시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과 능력들은
음행의 폭발에 의해서 벌어지는 상황들이라는 거지요.

프로야구부터 시작해서 모든 예능프로가 전부 다 음행에 속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물론 마지막 때 이 세상 전체가 음행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이미 구약에서도 하나의 예고편조로 흔적이 드러난 적이 있어요.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갔을 때 요셉은 그 음행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도망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젊은 요셉의 얼굴을 보고 너무 아름다우니까 동침하자고 꾀일 때에 요셉은 몇 번이나 거절했거든요. 생각해보세요. 어떤 늙은 할머니가 김 수현을 꾀인다고 할 때 김 수현이, 이 젊은 남자가 응하겠습니까? 자기 인생 망치는데. 그랬더니 그 때부터 요셉은 누명을 쓰고 지하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하나의 계기가 있었어요. 그 계기가 뭐냐 하면,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다는 그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는 겁니다. 더 중요한 것은 거기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거예요. “나는 음행을 안했으니까 천국 간다.” 이것은 말이 안 돼요. 



우리는 어떤 영역, 장의 개념, 어떤 필드개념을 생각해야 돼요. 내가 음행을 안했다는 것은 그 말은 그 만큼 음행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고 중요한 것은 음행이 그런 식으로 ‘나는 평생 동안 바람피운 적이 없으니까 천국 간다.’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이미 영적으로 연관됨이 없기에 영적세계로 이전할 수 있는 기회마저 허락되지 않는 불쌍한 사람이 돼버려요. “다 같이 음행해서 구원받읍시다.” 지금 그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20세 이하는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가정밖에 몰라요. 그러나 20세를 넘게 되면 드디어 세상과 접촉을 하게 됩니다. 접촉을 하면서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라는 겁니다. 떠미는 대로 떠밀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가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내 몸은 내 의지와 감정과 내 이성으로 통치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그 자체로 이것은 영적세계를 완전히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육적세계에요.
인간은 절대로 자기 몸을 자기가 관리하지 못합니다.
위험한 말이기도 하지만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기 몸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책임지지 마세요. 또 나왔다, 또 나왔어. 막 살라는 투의 그 시리즈가 또 나왔어요.
인간은 자기 일에 책임지지 마세요.
책임 안 져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어느 세계에 놓여 있는가를, 눈을 뜨고 그걸 보라는 거예요. 



‘지금까지 내 인생은 반듯하게 살아왔어.’라고 자기가 자기 몸에만 관심 두던 그 몸은
어항 속에 있는 금붕어처럼 어항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거예요. 물 없이 있는 물고기는 없어요.
뭔가 풍덩 빠져 있는 겁니다. 나를 빠트리고 있는 이 세계는 내가 이걸 감당할 수 없는 세계고
중요한 것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은 이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
그리고 그 세계 속에 있는 나를 주님은 어떤 식으로 건져냄에 성공하시는가, 그걸 봐야 돼요.
그래서 아버지의 첩과 음행했다는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일어나야 되고, 일어나고 있고, 또 내가 그 주인공이 될 수 있고,
우리 주변의 이야기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아, 나는 음행안하고 버텨야지.’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도대체 내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이 왜 요한계시록에서는 음행의 세계라고 하는가, 음행의 세계라고 설명을 해야 왜 영적인 설명이 되는지, 그 하나님의 논리의 코스를 우리가 파악을 해줘야 돼요. 민수기 25장에 보면, 이번 수련회 참석하신 분들은 아시지요, 민수기 25장 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하는데 바알을 섬기는 신전에 종사하는 여직원들이 나와서 이스라엘 백성의 남성들을 유혹해서 자기 신들에게로 휘둘리게 만들었어요. 음행입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0장 8절에 보면,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다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 모든 민족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의 계시를 몸에 싣고 다니는 수레 같은 존재, 국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통과하고 지나치면서 바깥에 있는 세상의 정체, 그 본질이 노출되게 되어 있어요. 



마치 고요한 바다에 배가 지나가면 물길이 갈라지면서 바다 밑의 물 색깔이 드러나는 것처럼, 파도가 일어나서 물이 갈라지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이 세상을 지나가는 하나의 배 같은 존재입니다. 계시의 배, 그 배가 지나가면서, 마치 의사가 수술하듯이 배를 가르면 그 안에 내장이 보이듯이 이스라엘이 가는 곳에서 이 세상 속내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음행이라는 것은 우리 보기에는 남녀 간의 문제로 보이지만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인간의 실상을 영적인 눈으로 보는 이 세상의 실상을 비춰주는 접점지점을 음행이라고 여긴 겁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특수한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언약의 백성이고 택하신 백성이다. 하나님이 함께 있는 백성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구약은 이스라엘 역사거든요. 구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음녀, 또는 음행을 설명할 때에 반드시 그 이방종교와 관련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잠언서 2장 50절에 보면, “내 아들아 어찌하여 음녀를 연모하겠으며 어찌하여 이방 계집의 가슴을 안겠느냐.” 여기 이방계집이라고 해서 신이 다른 민족의 여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와요. 이 말씀은 중국 사람이나 필리핀, 알래스카 사람에게 준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에게, 다윗의 자손에게 준 겁니다. 



너희들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가 품어져 있는, 계시가 함께 있으면서 그 계시가 에너지가 되어서, 계시가 원동력이 되어서 움직이는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겁니다. 다른 민족은 그런 것이 없어요. 다른 민족은 그냥 육적인 본성으로, 그냥 세상 그대로 물에 물 탄 것처럼 가지만 이스라엘은 그 색깔이 땅의 색깔이 아니고 하늘의 색깔, 비취색인가, 그런 색을 띄고 이 세상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다른 이방여인과 결혼한다는 것은 사적인 연애감정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종교가 다르다는 겁니다. 이방민족이 갖고 있고 작용하는 그 영적인 힘, 물론 악마지요, 그 영적인 힘에 너희가 같이 합세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잠언서 23장 27절에 보면, “대저 음녀는 깊은 구렁이요 이방 여인은 좁은 함정이라.”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그것은 늪에 빠지고 함정에 빠지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장차 우리가 나중에 보게 될 천국이냐 지옥이냐? 지옥이냐 천국이냐? 오른 편이냐 왼편이냐? 영원한 형벌이냐 아니면 영원한 복락, 행복이냐?’ 하는 그 결정에 대한 기준은 누가 갖고 있는가? 이스라엘이 갖고 있어요. 이 기준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이 다른 이방여인과 연애한다는 것은 뭘 무산시키는가 하면, 이스라엘이 내장하고 있는 ‘왜 우리는 천국갈 수밖에 없고 왜 우리는 영생 얻을 수밖에 없는가?’ 하는 그 기준을 무시한 것 밖에 안돼요. 왜 우리는 특별한 민족인지,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 민족인지 그 기준은 신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해서는 안 될 특별한 다른 기준이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걸 잊어버리고 이방 여인과 사적인 감정에 빠진다면 그것이 바로 음행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음행 안하고 지옥 가는 겁니다. 한쪽은 음행하고서 나중에 천국가고. 얼마나 불공평해요. 하나님이 일을 어떻게 하는지 본인 입으로 간음하지 말라고 해놓고는 왜 여기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는 말이지요. 그 이유는 우리가 그냥 속해 있을 뿐만 아니고 영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세상에 우리가 놓여 있는 겁니다. 



개인적인 욕구, 욕망, 그런 것으로 이 세상 현실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 세상 현실은 우리의 욕구나 욕망과 상관없이 이미 갖추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장만된 현실 속에 우리가 뒤늦게 뛰어든 것뿐입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우리가 심은 것이 아닙니다. 4월 5일 식목일에 우리가 심은 것이 아니에요. 이미 있는 것에 우리가 뛰어든 것뿐이에요. 그 선후, 순서를 분명히 하자는 거예요. 내가 있고 날 위해서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원래의 뜻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는 겁니다. 



이 순서가 바뀌게 되면 자기 일에 우환이 벌어지면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어요. 왜 하필이면 우리 집에서. 왜 하필이면 나에게. 자, 그렇다면 이 음행을 통해서 어떻게 영적 세계로 넘어가는가? 이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지요. 이게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음행하게 되는 이유가 인간을……, 제가 아까 언급했지만 출애굽기 20장 14절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그 십계명의 일곱째 계명을 주시는데 조건이 있어요. 20세 이상,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 남성중심으로,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몸 중심이에요. 하나님의 몸이라고 할 때는 이 신체 덩어리를 몸이라고 하지 않고 이 밧줄, 파이프로 하나님의 약속과 연관되어 있는 것을 몸이라고 합니다. 약속과 끊어진 것을 육이라고 해요. 제가 수십 번 이야기했습니다.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지요. 명절 지나면 다 잊어버려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조종 받는 것이 몸입니다. 이 몸의 특수성은 하나님의 계시가 거기에 삽입되어 있어요. 그래서 음행해도 천국 가는 그런 희한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몸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으면 약속은 절대로 약속을 포기하는 법이 없어요. 심지어 껍데기는 사탄에게 내어줘서 죽음에 넘겨준다 할지라도 영은 뽑아내는 겁니다. 마지막 날에 영을 살리시는 거예요. 예수님의 나라에 구원해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린도교회 그 사람들뿐만 아니고 음행해서 죽는 그 어떤 사람들을 통해서 거기에 합세한 사도바울이나 모든 사람들도 다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조종 받는, 약속에 의해서 특수한 신분으로서의 몸을 갖추었느냐를 묻고 있는 거지요. 



고린도교회에 “여러분, 여러분은 등허리 뒤에 주님의 약속의 파이프가 있지요? 하나님의 계시가 흐르고 있지요? 그런데 왜 여러분은 간음한 사람을 가지고 그냥 몸이 아니고 육적인 사람인 것처럼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그냥 넘어가십니까? 그렇다면 몸과 육의 차이점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아닌 사람의 차이, 하나님의 계시의 기준이 어떻게 드러나겠습니까?”라는 조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 간음이라는 것을 제가 남성중심이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상당히 이걸 설명하는데 어려움이 있어요. 남성중심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레위기 21장 7절에 보면, “그들은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을 취하지 말 것이며 이혼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지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사장이 결혼하거나 재혼할 때는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이나 이혼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은 여인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제사장이라는 것을 몸으로 규정하는 겁니다. 육이 아니고 몸으로 규정하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민수기 22장에 나오는 이야기, 이방 여인들이 지나가는 이스라엘 남성을 후려서 자기 신에게 빼돌렸다 했잖아요. 그걸 바알브올 사건이라고 하고 그걸 음행이라 하는데 그 때의 그 남성들이 물론 다 여호와를 믿고 애굽에서 나왔고 다 홍해를 건너 온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왜 그들이 그 여인들에게 다 휘둘렸을까요? 묻는 내가 나빠요. 사실은 질문하는 내가 나쁘지요. 왜냐? 남자니까. 남자니까 여인이 꾀일 때 휘둘리는 본성이 다 있습니다. 20세 이상 된 남성들에게는 다 있는 거예요. 질문하는 자체가 잘못이지요. 못생긴 여자가 꾀이는데 안 넘어갔다? 이것은 당연한 거고. 예쁜데, 꾀이는데 안 넘어갔다? 이런 남자 없습니다. 20대도 예쁜 것, 30대도 예쁜 것, 80대도 예쁜 것, 90대도 예쁜 것, 예쁜 것밖에 모르는 인간에게 예쁜 이방여인에게 휘둘리는 것, 그게 뭐가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까? 그게 당연한 거지요. 자연적인 현상이지요. 



남자는 여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쁜 여자를 원하는 거예요. 앞에 ‘예쁜’이 있어요. 그리고 여자는 남자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괜찮은 남자를 원해요. 앞에 ‘괜찮은’이 있어요. 육적인 요소를 가진 인간이 10년을 버티고 20년을 지리산에서 도를 닦아도 읍내에 내려가면 또 거기 다방에 가서 화장 덕지덕지한 아가씨가 옆에 와서 쌍화차 사달라고 하면 사주고 ‘낭만을 위하여’ 노래 흐르는데 꾀이면 다 넘어가는 거예요. 이것은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제사장이 이혼한 여인이나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을 취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제사장이 독점하고 있어요. 



세상이 어떻다는 것은 뻔히 압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이 어떻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뭔가 튜브를 통해서 용서라는 은혜가 들어가야 돼요. 그래서 음행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보호입니다, 보호. 보호해주는 거예요. 지켜주는 겁니다. 온 이스라엘이 제사장을 지켜줘야 돼요. 제사장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제사장을 통해서 쏙쏙 하늘에서 공급해 주는 게 있어요. 그게 피 용서입니다. 여러분 속에 복음이 있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여러분이 지켜줘야 돼요. 보호해 줘야 되는 겁니다. 그게 음행이 아닌 거예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성경에서 뭐라고 이야기해도 나는 내 사랑하는 사람이 유대교인지 이슬람이든 관계없이 나는 무조건 그 사람을 책임 질 거야. 나는 죽어도 좋아.”라고 합니다. 신명기 22장 2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아예 죽여 버리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사랑하는 사이 같으면 “까짓 거 하나님에게 죽임을 당해도 나는 그 여인을 사랑해.”라고 했을 때 어떻게 답변해야 됩니까? 저 여인을 위해서라면 지옥도 따라가겠다는데. 왜?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정말 그런 사랑 한 번 해 보고 죽으면 여한이 없겠지요. 



어떤 여자들은 남자한테 참 곤란한 질문들을 해요. “당신 어머니하고 내가 물에 빠지면 누굴 건질래요?” 이런 곤란한 질문을 해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어릴 때 그 곤란한 질문을 받다가 그걸로 끝난 줄 알았더니 이제는 여자를 만나서 여자한테서 그런 소리를 들어요. “내가 좋아, 엄마가 좋아?” 하는데 거기다가 내가 추가를 하겠습니다. “예수님하고 여자가 물에 빠진다면 누굴 건지겠습니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여자만 사랑하지 말고 죽도록 너를 구원한 주님을 위해서 살라는 것이고 이것이 영적세계의 원리거든요. 이것이 우리 속에 들어온다는 거예요. 



왜 제가 남성중심이라고 했느냐 하면, 여기에 나오는 간음, 음행이라고 할 때 항상 그것은 결혼한 유부녀를 두고 이야기해요. 다윗은 아내가 한 둘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지금 바람피워서 아내 삼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유부녀가 어떤 남자하고 통간하지 말라, 또는 남자는 유부녀와 통간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서 뭘 설명하느냐 하면, 영적세계의 영역으로 넘어가려는 의도를 굉장히 강하게 갖고 있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용서의 계시가 남성을 통해서 여성에게 전달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성을 통해서 여성에게. 



남성을 통해서 여성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남자가 일종의 메시아 같은 역할을 하는 거지요. 다윗 같은 경우에도 분명히 결혼했던 사람과 두 번째 결혼을 했거든요. 그 경우에는 일단 그 여자의 남편이 죽어줘야 돼요. 죽여주는데 누가 죽이는가 하면, 하나님이 죽여주고 그 다음에 과부된 그 사람과 다윗이 결혼합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어떤 여인이 남편과 혼인한 상태에서 다른 남자를 찾으면 간음이 되지만 남편이 죽고 난 뒤에 얼마든지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이 되지 않는다고 되어 있어요. 



육적인 우리가 들을 때는 이것이 사적인 결혼문제로 느껴지지요? 로마서 7장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거기서는 성령과 율법의 관계를 설명할 때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움직이는 계시라면 이스라엘의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를 설명하기 위한 계시의 도판, 계시를 그려내는 모자이크 같은 역할, 하나의 배열의 역할로서 그 위치를 갖고 있어요. 오늘날 우리와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사적인 사랑을 어떻게 불태우는가의 문제가 아니고 내가 내 안에 스며져 있는 이 구원의 복음을 어떤 식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대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이걸 지키라는 말이 아니에요. 너는 지금 이런 식으로 확인되어 있다는 확인절차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성도가 맞잖아. 너는 그러니까 구원 맞는 거야.” 그렇게 되는 거예요. 다른 민족에게는 그런 특수한 임무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미 영생 얻기로 작정된 사람이기에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계시가 들어가 있고 그 계시에 의해서 그 사람이 죽거나 살거나에 관계없이 그 사람은 영생 얻게 되어 있습니다. 천국 가게 되어 있어요. 그 사람의 역할 때문에 그런 겁니다. 



따라서 음행이라 할 때는 반드시 이것이 확인 차원이라, ‘아, 세상을 좋아하는 이것이 음행이구나.’ 또는 더 나아가서 나를 좋아하는 것이 음행이라는 겁니다. 사람은 자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자기 이름을 위한 연출이거든요. 평생 모든 인간이 자기밖에 모르니까. 그것이 음행이고 그것이 육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결혼하겠다는 그것이 뭐가 나쁜가?’ 그것이 음행이라니까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 거기는 아무 복음적인 요소가 없어요. 그저 돈 많고, 인물 잘 생기고, 성격 좋고, 날 사랑하고, 그래서 결혼했다. 그게 음행이라니까요? 그 앞의 조건에 뭐가 빠졌습니까? “나 죄인입니다.” 이게 빠져 있잖아요. 제발 날 죄인이라고 확인해 줄 그런 남자 만나고 그런 여자 만났으면 좋겠어요. 



그게 잠언서에 나옵니다. 잠언서 17장 14절에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슬기로운 아내는 어디서 온다고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 이 결혼 자체가 구출작전이에요. 결혼이 그냥 결혼이 아니고 이 음란한 세계에서, 큰 성 바벨론에서 사람을 건지는 방법 중에 하나가 결혼입니다. 여자들? 아니에요. 남자들. 남성 중심이니까. 남자가 복음 아는 여인과 결혼한다는 것은 곧 본인이 구원받는 계기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그래서 아내는 그냥 우리 일상의 사랑이 아니에요. 확인 차원이라니까요, 확인차원. 



확인차원이라고 하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요? 이렇게 이해하면 쉽습니다. 어떤 연세 많은 할머니가 국도에서 운전을 하는데 천천히 가고 있는 거예요. 뒤로 차가 줄줄이 밀렸어요. 경찰이 와서 “할머니! 왜 천천히 가십니까?” “여기 속도제한이 20킬로로 되어 있잖우.” 경찰이 살펴보니까 제한속도가 20킬로가 아니고 20번 국도에요. 그거 보고 천천히 간다고 한 거예요. 20번 국도에서 그 20은 속도를 얼마만큼 내라, 뭘 하라, 하지 말라가 아니라 이 도로는 20번 국도라고 확인차원에서 주는 거예요. 



오늘날 성도에게 이 두꺼운 성경전체는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또 복음이 나가네요. 지키는 것이 아니고 확인차원이라니까요, 확인차원. 그런데 그 할머니가 얼마큼 가다가 또 벌벌벌, 떠는 거예요. 아까는 20번 국도였는데 이번에는 210번 국도로 왔다는 거예요. 210번이니까 시속 210킬로로 달려야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은 확인차원이에요. 음행 안 해서 천국가야지, 이런 것은 없어요. 나는 음행했으니까 지옥 간다, 그런 것도 없어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아들은 음행이라는 이름의 쓸데없는 일을 한 겁니다. 아주 중요한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쓸데없는 일을 한 거예요. 이 세상 모든 바람피우는 일은 쓸데없는 일이에요. 사소한 일이라는 말이 아니고 진짜 중요한 일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뭐보다 중요한가? 죽음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거지요. 그게 뭐냐? 네가 죽어도 산다는 것을 왜 까먹어 버렸느냐는 거지요. 



바람피우는 것은 사랑 차원에서 했겠지요. 육적인 차원. 마치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꾀이는 것처럼 그런 차원에서 했겠지요. 그렇게 해 놓고 나는 이 여인을 위해서는 지옥까지 가겠다는 객기를 부릴 수도 있는 문제에요. 너무 사랑하니까. 그러나 진짜 이스라엘다운 것,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일하신 것은 개인이 어떻게 훌륭한가, 얼마나 한 여인에게 충성을 다 했는가가 아니라 네가 풍덩 빠진 이 세상 그 자체가 이미 네가 손 댈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저주하고 부인하고 버리는 그 세상 속에 풍덩 빠져놓고 남자하고 여자하고 사랑하는 그 일만 전부인줄 알고 있다는 말이지요. 



세상 드라마나 모든 노래들이 다 그래요. 잠시 조사를 해 봤는데, 실상 조사까지 갈 것도 없지만. “흔한 게 사랑이라지만 나는 그런 사랑 원하지 않아……, 변한 건 사랑이라지만 우리 사랑 이대로 간직하며 먼 훗날 함께 마주앉아 둘이 얘기할 수 있으면 좋아……” <묻어버린 아픔> 김동환. 또 이런 게 있어요. 음녀에 속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은 정상이고 자기 사랑을 떠나 일찍 죽은 그 사람은 오히려 안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편지를 천국에 보내는데 이렇게 보냅니다. “괜찮은 거니 어떻게 지내는 거야……비라도 내리면 구름 뒤에 숨어서 니가 울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만 하는 내게……” 조성모의 라는 노래의 가사에요.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거예요? 오겡끼데스까(거기 잘 계십니까)하고 똑같은 거거든요. “거기 잘 계십니까?” “니나 잘 계셔, 니나.” “……니가 없이도 나 잘 지내 보여 괜히 너 심술 나서 장난친 거지…….” 아, 참! 진짜 세상이 거꾸로 되었어요. 이쪽에서 저쪽을 보는 아닙니다. 저쪽에서, 천국에서 우리를 보는 그런 눈이 열려야 돼요. 그래서 음행은 지옥 가는 결정적인 기준이 아니고 쓸데없는 짓을 한 거예요. 음행은 “주님이여, 사랑해도 좋을까요?” 하고 자기 쪽에서 주님을 본 거예요. 



주님 쪽에서 볼 때는, 너는 네 육을 보호하지 말고 네 몸을 보호해야 돼요. 육이 아니고 몸을 보호해야 돼요. 김동환의 <묻어버린 아픔> 가사에 이런 것이 있어요. “……변한 건 세상이라지만 우리 사랑 이대로 간직……” 뭘 세상이 변해? 네가 변했지. 우리가 날마다 변하지요. 세상은 안 변해요. 세상은 음녀에요. 음행이에요, 그 자체가. 나밖에 모르는, 나의 사랑밖에 모르는. 드라마가 온통 그렇고 이 세상 자체가 전부 다 자기 사랑밖에 안 해요. 심지어 명심보감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자를 피하는 것은 화살을 피하는 것이다.” 한 번 피해보지. 피한다고 기도원에 올라가면 기도원에 권사님들 올라오는데. 어떻게 피합니까? “화살이다! 화살이다!” 여자 피하면 남자가 달려듭니다. 세상은 그 정도로 로마서 1장에 있듯이 개판입니다.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롬 1:26, 27) 



세상 전체가 저주받고 불의한 거예요. 세상 더럽다, 악하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정답 아니에요. 그것은 나만 착하다는 또 다른 표현일 수가 있거든요. 주께서는 그것이 아니고 “너도 마찬가지인데 너는 어떻게 거기서 건짐 받았느냐? 네가 이 세상에서 제사장이 되어야 된다.”  주님보다 더중요한 것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이해하지 아니하면 뒤에 나오는 고린도전서 7장 같은 경우를 설명하면 제가 욕을 얻어먹게 되어 있어요. “결혼하지 말고 혼자 지내라.”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함부로 이야기합니까? 결혼을 앞두고 선보러 다니는데 “혼자 지내. 결혼하지 말고 혼자 지내. 왜? 결혼하게 되면 주님을 덜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표현들이 뭐냐 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한테는 육이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우리가 몸이 된다는 거예요. 육이 아니고 몸이에요. 뭔가 우리 속에 우리가 보호해야 될 것이 있어요. 나를 구원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보호해야 됩니다. 우리가 보호할 능력은 없지만 주의 능력으로 보호케 하셔요.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저 여자 아니면 죽을 거야.’ 그렇게 하지 말고 ‘주님 아니면 죽을 거야.’ 왜 그렇게 못 바꾸느냐는 말이지요. 만약 어떤 여자를 너무 사랑하는데 그 여자 때문에 자기가 죽고자 한다면 그 여자가 정말로 슬기롭고 여호와가 파견한 여자라면 “당신은 날 위해 죽지 말고 주를 위해 죽어.” 이러한 바른 소리를 할 수 있어야 되겠지요. 



예를 들어 “나하고 주님하고 같이 물에 빠지거든 주님부터 건져. 나 건지지 마.” 이렇게 여자 쪽에서 먼저 나와 줘야 남자가 좀 심적인 부담을 덜 수 있잖아요. 마태복음 19장 12절에 보면,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가지고 노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지요. 사실은 이것이 모든 성도에게 다 해당되는 겁니다. 제가 가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에베소서 5장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결혼을 했든 안했든 우리 자체가 이미 교회입니다. 교회는 보호해야 될 것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주의 복음입니다. 이게 택한 백성이에요. 음행 했니 안했니, 그런 것으로 자랑질 하면 안돼요. 이미 우리가 육이 아니고 몸이라면 영적인 주님의 능력 속에 이미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아내 위해서 다이아반지 사주고, 그런 것은 우리 집에 없지만 하여간 그런 것 사주는 것보다도 복음 안에서 서로가 죄인이고 못난 사람이며 주께서 살린다는 것을 서로가 서로 안에 들어 있는 주님의 복음을 끄집어낸다면 그것처럼 이상적인 가정, 다시 말해서 이상적인 교회가 또 없을 겁니다. 자기 가정부터 교회되시기 바랍니다. 주님만 증거 되고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이거 언급해야 돼요. ‘내가 못났다는 것, 내가 못났는데 주님이 붙여주시니까 당신이 이렇게 빨래도 해주고 밥도 해주고 참 고맙다. 라면 하나 못 끓이면 어떤데? 내가 끓이면 되지.’ 그런 마음. 항상 자신에게는 과분하다는 그런 느낌, 그런 느낌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이미 그 가정 속에서 새록새록 봄날에 주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이 주의 능력이, 주의 천국이 영적인 차원에서 덮쳐져 있는 가정인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잘난 맛으로 자기가 훌륭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음행해도 천국 가는 사람을 보고 우리가 세상을 다시 돌아보게 하옵소서. 자기가 뛰어나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이미 음행함 속에서 같이 합세되어 있는 세상적인 인간, 육적인 인간을 주께서 복음 주셔서 건져낸다는 이 하나님의 작업을 한시도 놓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