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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31강-내어 쫓으라 (고전5;9-13) 15030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3. 16. 07:31
2015-03-08 12:43:39 조회 : 363         
   내어 쫓으라 150308 이름 : 이근호  (IP:119.18.83.91)   
 
내어 쫓으라(고린도전서 5: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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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03-08 13:29 
내어 쫓으라 

2015년 3월 8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5: 9-13 

(5:9)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5: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5: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5:12)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5:13)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사람 사는 것이 고만고만합니다. 특별나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육신은 생물적으로 같은 조상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크기나 피부색이나 질병도 비슷합니다. 그래서 같은 인간들끼리의 ‘자식 낳기’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향하여 “내어 쫓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만한 권리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쫓아내는 자들은 무슨 권리로, 쫓겨나가야 하는 것은 무엇이 문제이기에 추방되어야 할까요? 윤리나 도덕의 기준보다 더 깊은 기준이 있습니다. 그 원천은 창세기 21:8-13에 나옵니다.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즉 아들이 아니기에 내어쫓아야 된다는 겁니다. 누가 아들쪽이냐 아니냐는 인간의 능력으로 알 길이 없고 하나님께서 약속에 준해서 일으킨 사건 안에서 파악이 됩니다. 그 사건은 바로 인간의 혈육에 자생된 능력으로 낳은 자식이냐 아니면 혈육의 능력이 배제된 증거를 가지고 태어난 자식이냐입니다. 

혈육적 안목으로 본다면 아브라함에 있어 이삭이나 이스마엘이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내어 쫓을 쪽’을 결정짓기 위해 출생 방식을 달리하십니다. 즉 ‘약속 없이 태어난 자식’‘약속 때문에, 약속의 품고 태어난 자식’이라는 구분된 상황을 만들어놓으시고 어느 한쪽만 ‘아들’이라고 규정하시면서 구원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들’이란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됨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도적으로 개입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아들 만들기의 작용이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 시대에서 본격적으로 작용합니다. 이는 ‘내어 쫓으라’가 쉴새없이 진행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혈육적 존재입니다. 그러니 무슨 수로 아들이 되겠습니까? 하고자 하는 행세가 다 영적이 아니라 육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율법을 홀로 다 가져가셔서 홀로 그 내용대로 아버지를 만족스럽게 달성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율법의 완성 상태는 ‘죽음의 보편성’이 갖추어집니다. 즉 ‘죽음’ 자체가 수면으로 노출됩니다. 부활이란 단순히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소생’에 불과합니다. 참된 부활이란 죽음을 취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전 세상을 ‘죽음의 세상’임으로 드러올려서 보여주시는 능력의 세계입니다. 

이 안에서 모든 인간은 ‘율법으로 인해’ 이미 죽은 자가 됩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공평합니다. 이제 누가 구원되고 아니되고는 인간의 손을 떠났습니다. 영생얻기로 작정된 자만 구원이 주어지게 될 뿐입니다. 인간들이 요구한다고 성사되는 것도 아니라 인간이 말씀에 순종하고 지킨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아들됨’도 인간이 관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아닌 자는 필히 천국에서 추방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란 중앙에 이 예수님이 기둥처럼 버티고 있는 영역입니다. 오로지 예수님만의 율법 완성으로 인해 발생된 그 ‘하나님의 의’의 능력으로 교회가 성립되고 유지됩니다. 

따라서 참으로 교회에서 추방된 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공로를 자기 행함으로 훼방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버티고, 동행하시는 그분이 어떤 일을 완수했는지 모르는 자들입니다. 자신들의 모든 행함이 무의미해진 그런 상황 속에 있음을 인정할 줄을 모르는 자들이 ‘쫓겨 나가야 할 자’입니다. 

이러한 추방 작업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시킬 디딤돌을 본인들이 마련하지 말아야 할 것을 요청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즉 자신의 죽음을 인지 못하는 자들은 필히 여전히 자신을 구원한 토대를 본인 속에 간직하려는 시도를 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참된 성도가 지니고 있는 바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발생된 흔적, 곧 십자가 흔적입니다. 

인간의 존재는 마치 습자기 같은 갈수록 얇아지게 되다가 나중에 닳아서 조용히 사라지게 됩니다. 문제는 그 용지에 적혀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글씨가 날로 확연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야 성도의 죽음은 말씀에 의한 죽음이기에 그의 부활은 본인의 노력 여부가 아니라 약속된 말씀에 의해서 부활임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결혼식을 하게 될 지혜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의 구분은, 하나님의 약속에 보는가 아니면 구원받게 될 자기 자신에 여전히 집착하느냐로 구분됩니다. 지혜로운 처녀은 기름에 주목합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처녀는 자신의 자기 관리 능력에 치중해서, 나중에 신랑 올때 쯤, 기름을 준비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양쪽 다 잠자고 있었고, 자신의 능력을 믿지 않는 지혜로운 처녀는 기름에 의해서 신랑과 해후하게 됩니다. 이것이 천국의 원리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과 동정과 배려와 격려를 포기하지 않고 있기에 예수님은 그런 육적인 요소에 대해서 배출구나 화장실을 만들어 매일같이 그런 것들을 쫓아 내십니다. 

그래서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기둥의 광택을 유지코자 합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에 인간들의 행함의 손 떼가 묻어서는 아니됩니다. 얼룩을 남겨서는 아니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말씀은 타인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바로 우리 육신에 새길 하나님의 영원한 글씨입니다. 이 글씨로 인하여 인간들은 자기 구원의 주도권은 행사할 자격이 없습니다. 

징계가 없는 자식은 사생아라 했습니다.(히브리서 12:8) 따로 말씀 지켜서 자기 의로 구원받고자 하는 것들은 배설물에 해당되는 요소입니다. 오로지 피의 용서만이 빛을 발해야 그게 교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힘으로 구원되려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원수 짓임을 자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3-09 22:59 
31강-고전 5장 9-13(내어 쫓으라)1503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5장 9-13절입니다. 신약성경 268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5:9-13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아멘은 했습니다만 성경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같은 말을 두 번 하면서 사귀라는 말인지 아니면 사귀지 말라는 말인지 분명치 않게 언급이 돼 있거든요. 나쁜 짓 하는 사람들과 사귀라는 말인지? 처음에는 “그들과 사귀라.” “알았습니다.” 그 뒤에는 “사귀지 말라.” 왜 한 입으로 두 말, 두 가지 다른 이야기가 나와 버렸지요? 그것은 세상을 하나의 원으로 본다면 그 원 안에 또 다른 원이 현실로 박혀 있다는 겁니다. 세상 전체의 원은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관리하시게 되지만 그 다음에 그 원 안에 있는 원, 하나님이 판단하는 그 안목이 그 원안에 있는 다른 작은 원안에 있는 사람들을 이미 확보해 있다는 겁니다. 



큰 원 안에 또 작은 원이 있어요. 우리가 그냥 평지로 보게 되면 큰 원안에 작은 원이 있는 것 같지만 옆에서 보면 큰 원과 작은 원은 서로 소통이 안 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에 보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라고 했잖아요. 하늘에 있다고 했으니까 우리는 하늘로 가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이 세상 안에 하늘이 있다는 거예요. 시민권을 가진 자가 함께 있다는 겁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 유행하는 노래가 있어요. “위, 아래, 위, 위, 아래……” 이렇게 부르는 노래가 있어요. 그 노래를 듣고 제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위, 아래는 이 세상에 같이, 함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성경말씀을 이야기하면서 마치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면서도 네가 주인노릇 다해도 괜찮아, 라는 것을 우리에게 시사하는 겁니다. 그리고 작은 원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는 거예요. 제가 어떤 사람한테 신앙생활 잘 하는지 아는 방법,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아는 방법은 딱 한 가지 밖에 없어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게 문제꺼리가 안 된다는 사람은 진짜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무슨 일이 벌어지면 얼굴이 시퍼래져서 ‘어쩌나, 이러다 이 코너 끝나는 게 아닌가, 지옥 가는 것이 아닌가?’ 염려로 벌벌 떨고 있는 그것은 내가 보면 정상이 아니에요. 



심각한 문제라는 것은 주님 보시기에 심각한 문제가 따로 있고 보통 인간들 보기에 심각한 문제가 따로 있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심각한 문제라 하는 것은 예수님 용서를 안 받아 주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에요. 그러나 예수님의 용서를 받아들인 사람한테는 더 이상 심각한 문제는 남아있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사랑을 받아들여서 오늘 죽어도 낙원에 가 있는 그런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심각한 문제가 전혀 없거든요. 없다면 주님께서 맘 놓고 그 사람에게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내요. 



남들이 “네가 놀랬지?” 하면 성도 당사자는 “그것가지고 놀래나? 그게 무슨 문제인데? 그것은 문제될 것이 없어.” 어느 정도로 문제될 것이 없느냐 하면, 김국환이 불렀던 노래가 있어요. 접시를 깨자는 노래가 있어요. 나이 드신 분들은 잘 모르실텐데. “접시를 깬다고 세상이 깨어지나.” 그런 노래가 있어요. 여자들은 앞치마 풀어버리고 밖으로 좀 나가고 남자가 집안일을 좀 하라고 설거지 독려하는 노래에요. “접시를 깨자~ 접시를 깬다고 세상이 깨어지나~” 뭐 그런 노래에요. 문제될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우리가 처리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처리했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 안목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다시 보세요.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뇌물 받고 횡령하는 사람)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이 말을 제가 방금 한 말로 고쳐버리면 그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 무슨 큰 문제가 안 된다는 그 말이에요. 놀랍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 별 문제 안 된다는 거지요. 그 사람과 안사귀려면 어디로 가느냐? 우리가 세상 밖에 나가야 되는데 우리가 왜 밖에 나가요? 저희들이 나가야지. 



그런 사람들과 사귀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만? 더 이상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한테는, 어떤 문제꺼리라는 것이 우리한테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한테는 이런 문제성을 안고 있는 사람과 사귀는 것이, 친구 먹는 그것이 큰 문제 아니라는 거지요. 그런데 어떤 것이 문제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하신 용서를 훼손하는 이것이 진짜 큰 문제가 되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11절에 보면,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형제라고 우기면서)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이런 사람들은 내어 쫓으라는 그 말이거든요. 



야, 이거 쫓겨날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더 쉽게 말해서 그거 내어 쫓는 것, 그거 심각한 문제 아니라는 겁니다. 자연스러운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자연스러운. 누구나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어요. 있는데 뭘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느냐 하면, 교회됨에 있어서 우리가 우상숭배 안하고 간음 안하고, 그래서 교회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유지하는 그 중심기둥은 다른 분이 턱, 하니 터 잡고 있기 때문에 그분이 하는 조치를 우리가 훼손 안해야 된다는 것, 그것이 유지된다면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도 아니면서 성도 흉내를 내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그래, 이제부터 내가 술 안 취하고 후욕 안하고 그래야지. 그래야 내가 구원받아.’ 이게 가짜에요. 이게 성도 아니에요. 자기 가치를 자기가 챙겨야 자기가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정말 들통 난 가짜신앙입니다. 제가 가락교회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창세기 그 다음에 바로 신약이 아니고 구약 거쳐서 신약이잖아요. 창세기 거치고 구약 있고 신약이 있다는 말은 구약에서 뭘 줬느냐 하면, 십계명을 비롯해서 많은 율법을 준 거예요. 율법을 주고 신약시대에 들어왔어요. 신약시대를 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끝과 함께 동해하시는 거예요. 끝 되시는 분이 함께 동행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가끔가다 재판을 했습니다.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잘난 체하면서 십일조하고 금식하과 구제했다고 할 때 주님께서는 “네가 지옥가거라.” 그런데 세리는 엎드려서 “제가 죄인입니다.” 하니까 “네가 천국이다.” 그렇게 재판했습니다. 가락교회에서 제가 그걸 수시모집이라고 했습니다. 수시로 선택해요. 그런데 구약을 거쳐 올 때 율법을 거쳐서 와요. 율법, 십계명을 통해서 로마서 3장의 말씀처럼 어떤 인간도 의로운 인간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다 드러난 겁니다. 이미 드러났어요. 



그래서 구원문제는 심각한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구원받아서 심각한 문제가 안 되는 것이 아니고 아무도 구원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나요. 기분 좋은 거예요. 자기만 나가면 기분 나쁜데 나 나가니까 기분 좋은 거예요.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예요. 주께서 아주 속 시원하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마태복음 5장에서 일점일획이라도 말씀 지키지 않으면 천국에 못갑니다. 바리새인들이 지킨다고 하지만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에 넣어주지 않아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양보가 없이 다 지켜야 됩니다. 



가락교회에서 설명했다시피 그 모든 말씀을 콩이라고 본다면 이 콩을 뭉치면 콩비지가 돼요. 이 비지를 쥐어짜요. 그걸 짜면 피가 나오는데 그 피가 바로 율법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외의 한 의를 마련하기 위해서, 천국은 넣어줘야겠고 사람은 말씀을 못 지키니까 죄인밖에 없고, 그래서 주께서는 율법을 혼자 지켜서 혼자 지킨 그 비지를 쥐어짜내니까 거시서 뭐가 나온다 이 말이지요. 그 엑기스, 완성의 엑기스를 짜서 그 율법외의 한의, 그걸 가지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는데 그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그 의안에서 우리가 죄 없는 상태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면서 뭘 아느냐 하면, ‘야, 진짜 하나님 보기에 심각한 것은 그 예수님의 피, 죄 용서, 하나님의 의의 달성, 그것이 하나님께 진짜 중요한 거구나.’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구원받는 것은 결코 심각한 문제가 아니에요. 그것은 자기 욕심에 불과하다니까요. 모든 인간이 죄인 되매 구원 받고 싶은 사람도 구원 못 받고, 구원 안 받고 싶어도 구원 못 받고, 똑같은 입장이고 형편이었는데 주님께서 마지막 아담 보내셔서, 아버지의 말씀을 다 이루셔서, 거기서 의를 생산해서, 생산된 의를 우리에게 성령으로 선물로 주니까 주님 보시기에 진짜 주님이 관심 두고 절치부심,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주님의 자존심을 걸고 한 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지요. 



그러고 난 뒤에 히브리서 12장 8절에 보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버지는 매 들고 나오신다는 거예요. 그 매가 뭐냐 하면, 바로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그것 때문에 매를 때리는 겁니다. 말씀을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그것 때문에 주께서 매를 가지고 치는 거예요. “정신이 있어 없어, 지금!” 이 구약에서 넘어오는 흐름을 모르고 그냥 성경 봐버리면 주께서 매를 때리는 이유가 말씀 안 지켜서 치는 줄 알고 반대로 오해를 해요. 



“사랑을 놓쳐버리고 네가 콩비지를 짠다고 난리야? 네가 뭔데 이걸 만들어? 주신 사랑도 감당 못하는 게. 네가 그렇게 잘났어?” 하면서 맴매하시는 겁니다. 그럴 때 ‘아버지가 계셨잖아, 아버지. 아버지가 있는데 내가 왜 아버지노릇 아들 노릇 혼자 다 하려고 했나? 아버지가 아들 되게 할 때만 아들인데 왜 아버지 빼놓고 내가 알아서 천국 가려고 시도했는가?’ 내가 천국 가려고 시도하면 아버지가 뭐가 됩니까? ‘내가 또 나댔어. 하여간 설쳐서 문제라.’ 본문에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를 구약 적으로 표현한다면 이스라엘 중에서 이방민족을 쫓아내라는 뜻이고 구약성전이 만들어졌을 때는 이방인들은 성전에 오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내어 쫓으라’의 원형은 오늘 본문이 아니라 이미 창세기 28장에 나옵니다. 그때는 간음이니 탐람이니 우상숭배니 그런 것이 없어요. 하나님의 기준에 의해서 진짜 내어 쫓을 자는 뭐냐?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둘이 나와요. 하나는 이스마엘인데 아브라함이 종인 하갈과 관계해서 낳은 자식입니다. 그 다음에 본처 사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 이삭이 있어요. 창세기 21장 8절부터 보면,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아들도 아니면서 먼저 태어났다고 아들 행세하는 것을 나는 못 참겠다. 저 종과 그에게서 난 자식, 여보! 내어 쫓읍시다.” 또 남자에게는 되도 않는 책임감 같은 것이 있잖아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물었어요. “하나님, 제 아내가 여종과 그 자식을 내어쫒으라고 하는데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닙니까?” 하니까 하나님 말씀이 12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라고 하신 거예요. 



천국은 인간적인 정으로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사람 속에 있는 양심 고운 사람이 갈 수 있는 나라가 천국이 아니에요. 인간이 양심 고와서, 정이 많아서 갈 것 같으면 주께서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키지를 않았습니다. 추방시켰다는 말은……, 추방시킨 정도가 아니고 또 들어올까 싶어서 아예 각목으로 크로스해서 못박아놓고 보초까지 세워서 절대로 못 들어가게 하시는 이유는, 천국은 이제부터 네가 넘보지 말라는 뜻이에요. 쉽게 말해서 구원받지 말라는 뜻입니다. 네가 구원, 구원, 구원, 한다고 해서 그게 십 원되는 것도 아니고 이십 원이 되는 것도 아니에요. 네가 구원 백날 외쳐도 그것은 네 몸부림에 지나지 않지 진짜 영생, 구원은 너의 요청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내가 따로 만들어서 내가 넣어주는 사람만 넣는다는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아들이어야만 돼요. 아들. ‘하나님이 만들었으면 다 아들이지.’ 그게 바로 종들이 생각하는 것이고 육신에 속한 자들, 인간의 타고난 죄에서 나온 바탕이 그 바탕이에요. ‘신이 창조주가 난 피조물이니까 알아서 책임지겠지.’ 그 발상이 바로 지옥 갈 발상이 되는 겁니다. 가인이 추수감사제를 드리면서 “받으소서.” 하면 하나님이 받아야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직접 만들어진 것만 받지 인간이 조금이라도 손댄 것은 안 받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의외로 간단해요. 남자들이 새 차를 사면 어떻게 합니까? 남자들 새 차 사면 그 다음부터 흠집 날까 싶어서 새벽마다 나가봐요. 혹시 누가 동전으로 긁어놓지나 않았는지. 바깥은 광택내고 안은 먼지 털고. 옛날 남성들이 말 사서 애지중지하듯이 요새 남성들은 차에다 그렇게 신경을 씁니다. 튜닝 새로 하고 신차 나왔다 살피고.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라는 그 기둥에 광택을 내라는 것이 교회의 임무라는 겁니다. 광택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게 신경 쓰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나한테 일어나는 어떤 문제, 그것은 심각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등 문제꺼리 아닙니다. 내가 아들 되게 했다면 그 아들 되게 한 피의 관계, 용서의 관계, 그것만 줄 창 광택을 내서 반짝반짝하게 만들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선물만 빛내면 되는 거예요. 선물만. 쉽지요. 



창세기 21장에서 언급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들이라는 것을 “네가 존재하나? 내가 만들었으니까 아들이지.” 이런 식이 아니고 아들 아닌 자를 미리 만들어요. 아들 아닌 자를 미리 만들어서 그냥 평소에 살아가면 발견되지 않는 것인데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어떤 새로운 사태가 벌어졌을 때에 그 벌어진 사태 속에서 아주 편하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는 그것을 다시 한 번 점검해보라는 겁니다. 너와 똑같이 생긴 인간이 저기에 있을 때,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고, 너도 세끼 밥 나도 세끼 밥, 요새는 내가 두 끼 먹습니다만, 다 똑같이 생겼는데, 성질도 같아,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생각도 비슷해, 전혀 다를 바다 없는데……아마 이스마엘하고 이삭하고 유전자검사해보면 99.9퍼센트 합치의견 나올 텐데요. 형제지간이에요. 아버지가 같으니까. 



그런데 같은데, 다 같은 운명이어야 마땅한데 왜 이 마땅함이 깨어지느냐는 말이에요. 어디서 깨지는가? 하나님의 개입, 약속의 개입으로 깨지거든요. “너는 안 된데.” 이스마엘이 있다가 “왜 안 된다는데?” “그것은 나한테 물으면 안 되지. 하여튼 무조건 너는 안 된데.” “그럼 너는?” “나는 된데.” “왜?” “나는 아들이래.” “네가 아들이면 나도 아들이다.” “너는 아브람의 아들이고 나는 아브라함의 아들이래.” 아브람이나 아브라함이나 둘 다 똑같은 아버지인데. 하나님께서 차이를 만들어요. 하나님께서 분열을 일으키고 균열을 일으킵니다. 



그 균열과 분열, 분열과 균열, 날마다 일상 속에서 반복해서 균열과 분열의 기준을 노출시킵니다. 그래서 이것이 구약에서 신약에 오게 되면……물론 구약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도 아브라함의 자식들의 갈등이 현실인 것처럼 신약도 마찬가지로 이것이 현실이에요. 현실 속에서 여러 가지 상황들을 만날 때 그 현실 속에서 저주라는 것이 새겨져 있는 사람,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끝장 보심, 그게 새겨져 있는 사람은 아들이고 그게 없는 사람은 그냥 되는대로 사는 사람이고 그렇습니다. 



그걸 가지고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에서 ‘날 건드리지 마라. 내가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십자가가 뭐냐 하면, 그 새겨진 하나님의 최종적 판단과 기준이 십자가에요. 또 집에 가셔서 십자가타투(문신)하지 마시고. 피부에 새기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나중에 신약과 구약을 통틀어서 보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아, 인간의 주체를 점점 더 얇게 만들어요. 얇게 만들어서 나중에는 투명하게 사라지는 습자지같이 만들어버립니다. 그런데 그 습자지, 용지는 사라지지만 그 글자는 점점 더 현실화되고 구체화되어서 커지게 되어 있지요. 



보통 용지가 있어서 거기에 글씨를 쓰는데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글씨부터 먼저 있고 그 글씨를 남기기 위해서 우리를 용지로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주님이 쓰시는 언약이라는, 약속이라는 글씨가 있는 사람은 아들이고 그것 없이 그냥 체중만 나가는 그 사람들은 아들 아니고 그래요. 하나님의 안목이 어떤 안목이냐가 중요한 겁니다. 글씨가 우선이고 용지는 점점 얇아지고 습자지처럼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확실한 자기약속과 자기달성, 자기 성취성, 이것이 우리가 얇아지면 얇아질수록 점점 더 확연하게 노출되고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성경에 나오는 예를 하나 들면,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천국비유를 말씀하실 때 신랑은 한 사람인데 결혼할 처자가 열 명인 예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다섯 명은 신랑과 함께 결혼식에 참석했고 나머지 다섯 명은 울면서 통곡하고 난리가 났어요. 그런데 이 본문의 의미가 뭐냐 하면,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그 기름을 준비했거든요. 신랑이 있음은 의미 없어요. 또 내가 있다는 것도 의미가 없고. 신랑 쪽에서 약속한 것이 의미가 있어요. ‘하나님이 계시겠지.’ 그게 뭔데? 아무 도움 안돼요. ‘내가 여기 있잖아.’ 그것도 도움 안돼요. 



계신다는 그 계시는 분이 우리에게 뭘 남기는가, 무슨 약속을 했느냐는 그 약속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겁니다. 지혜로운 처자들은 그 기름, 그 기름이 우리를 살린다, 그 기름이 우리를 신랑과 매치시켜준다, 그 기름에 종속된, 그 기름에 매여 있는 존재로서 그들은 기다린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신랑과 결혼하지 못하게 되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기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다음에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기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들어보니 어렵지요?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약속이 중요한데, 약속이 우선이고 그 약속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데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내가 살기 위해서 기름준비 하라고? 그까짓 거 기름준비 하지 뭐. 내가 살기 위함인데 어떤 방법이든 동원하지. 내가 구원받는다면 나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겠어.’ “기름준비 하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여기서 아주 재미나는 것이 있어요. 기름을 준비하려면 잠을 안자야 된다는 말이지요. 잠을 안자야 되는데 지혜로운 다섯 처녀나 어리석은 다섯 처녀나 전부 다 같은 인간이고 에너지는 다 같아요. 둘 다 잠을 잘 수밖에 없어요. 



기름을 준비 안 한 상태에서 ‘내가 깨어 있으니까 신랑 온다는 소리가 들리면 얼른 기름을 준비하면 되지.’라는 계산을 한 겁니다. 나의 깨어있음은 나의 관리 하에 있고 내가 정신만 바짝 차리면 주님 오시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고 여기는 그 정신력, 이것은 자기 자신의 정신력을 믿는 것이지 기름의 의미에 관심이 없는 거예요. 나만 살면 되니까. 그런데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나는 항상 부족하다. 내어쫒으라고 하지만 나는 언제든지 간음하고, 돈 좋아하고, 탐욕하고, 토색하고, 우상숭배하고, 그럴 가능성이 항상 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나에게 말씀 지킨다는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나에게 기대할 것 같으면 주께서 십자가 진 의의가 사라지거든요. 



자기 성실성, 자기가 말씀 잘 자키는 충실성, 주께 영광, 믿음, 이런 것은 믿음의 대상이 안돼요. 이런 것은 믿지 마세요. 이것은 탈납니다. 오직 나는 못났지만 기름이 중요하다, 해서 맘 푹 놓고 안심하고 잠을 잔거지요. Nessun dorma, 공주는 잠 못 이루고. 그 오페라(투란도트)를 보면 잠을 한 사람도 자면 안 되는데 다 잠을 잔거예요. 그 때 신랑 온다고 한 겁니다. 기름보다 더 중요하고 심각한 것은 없었다는 것을 하나님의 약속에 준해서, 하나님의 약속의 안목과 동일한 안목을 지혜로운 처녀는 받은 거예요. 



그런데 어리석은 처녀는 죽어서 천국은 가고 싶고 천국 가려면 내가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고 하는데 정신 바짝 차릴 때는 절대로 신랑이 오지를 않습니다. 오려고 하다가도 ‘몇 명이 정신 바짝 차렸네. 도로 가자.’ 하고 안 옵니다. 잠을 자야 그 다음에 와요. 그래서 자기 행위로, 자기 공로로 구원 못 받게 하기 위해서. 그래야 기름의 의미가 부각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께서 구약의 말씀을 지키면서 나타난 사건이 십자가사건입니다. 십자가부활 사건인데요. 



특히 부활사건이 뭐냐 하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부활이 아닙니다. 그것은 소생이라고 해요. 그리고 살아 있는 자를 살리는 것은 아직 죽지도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부활의 혜택을 입지 못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죽음 자체의 판을 노출시키고 드러내버리는 이것이 부활의 세계입니다. 죽음 판 자체, 살았다는 인간도 죽었고 죽었다는 인간도 죽었고 동일한 죽음의 세계, 말씀에 보면 모든 인간은 산자가 아니라 다 죽은 자다, 하는 그것을 들추어내는 거예요. 지하로 사라졌다는 고대 아틀란티스 대륙을 그냥 들춰내듯이. 



대서양 밑에 있다는 그 신화의 세계를 수면 밖으로 노출시키는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기피하는 그 죽음의 평지를 노출시키는 거예요. 드러내는 겁니다. 드러내게 되면 개인적으로 병들어죽는 것이 아니고 죽음 자체가 인간의 토대였고 삶의 기초였다는 겁니다. 그것을 십자가라는 사건으로 뱃지로 만들어서 달고 다닐 때 그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예수의 흔적을 가진 자에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천국 갈 때 천사가 묻습니다. 천국 문에 오니까 성도를 향하여 천사가 물어요. “너는 어디서 왔지?” “저는 대구에서 왔습니다.” 이런 소리해서는 안돼요. “저는 미국에서 왔습니다.” 이런 소리 하면 안 됩니다. 



“어디서 왔지?” 할 때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예수의 피를 묻히고 흰 옷 입고 왔습니다.”(계 7:14) 이것이 정답이에요. 네가 어디서 살다 왔느냐 하는 것은 의미 없어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예수님의 피를 묻히고 왔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말씀을 가지고 공부할 때 이왕 했으면 끝까지 해야 돼요. 지금은 그런 것이 없지만 신방 차리면 침 발라서 창호지 다 뚫어서 신랑신부의 첫날밤을 보려고 하잖아요. 인간이 아무리 침을 발라서 뚫으려고 해도 그게 안 뚫려요. 말씀의 끝까지 간다는 것은 성령의 안목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말씀의 끝이, 그 창호지가 뚫린다고요. 율법 바깥에 뭐가 있는지. 



뚫어보면 뭐가 나오겠어요? 예수님 피가 얼굴이 팍 튀어버리는 거예요. 그게 바로 천국이에요. 예수님의 피가 얼굴에 튈 때 그게 “다 이루었다.” 입니다. 그 이상은 없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서 백이면 백 다 오해하는 것이, ‘그래, 난 이제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술 취하면 내가 쫓겨나는 수가 있어.’ 이렇게 나온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십자가도 모르고 부활도 모르고 아들도 아닙니다. 성령, 양자의 영을 받은 아들도 아니고 아직 율법에 속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한 것은, 이게 신약시대라면, 이게 끝의 능력이거든요, 이 끝의 능력이 우리와 동행한다면 우리로 하여금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두 번 죽어야 돼요. 어제 거의 TV 안 보는데 얼른 보니까 두 번 죽는 사람이 나와요. 신화그룹 마도현 사장이 두 번 죽었어요. 신화그룹이라 하니 모르지요? <전설의 마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번 죽을 뻔 했고 식물인간 되었다가 2년 만에 깨어났는데 이 사람이 검찰조사 받다가 충격 받아서 또 죽어버렸어요. 바로 저게 복음이다. 두 번 죽이는 것. 어떻게 저게 드라마에 나오는가! 두 번 죽어요. 우리가 두 번 죽어야 돼요. 우리 육신이 죽는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한 번 더 죽어야 돼요. 



내가 내 관리하는 것, 그것 죽여야 됩니다. 내가 죽어서 부활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 있으면 나를 살리고자 했던 모든 안목이 죽어야 돼요. 나를 격려하고, 나를 동정하고, 나를 염려하고, 나를 껴안아주고, 나를 위로했던, 살아 있는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하는 그 모든 것이 죽어야 돼요. 이 세상은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니고 애초부터 나는 죽음 판 위에 놓여 있는, 죽음 판 위에 내 일생이 놓여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그런 죽음이 돼야 돼요. 애초부터 죽어 있었어요.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애초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숨 쉬고 있었던 거예요. 



지금 우리가 죽음의 판을 증거 하기 위해서 살아 있는 거예요. 인생이라 하는 것이 우리가 개인적으로 너무 자기에 치중하면서 힘들게 살아갑니다. 그냥 뛰놀면 되는데. 제가 아주 어릴 때에요. 젊은 사람들은 못 봤을 거예요. 아주 어릴 때인데 흑백영화가 나올 때인데 유명한 외화시리즈가 있었습니다. <타잔>이었습니다. 어릴 때 타잔 보면서 늘 조마조마했던 것이 있었어요. 타잔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나무줄기를 타고 건너가잖아요. 어린 마음에 걱정이 뭐냐 하면, 줄을 타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서 저쪽에 대기된 나무줄기를 타고 계속 가는데 만약에 저쪽 나무에 줄이 없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게 되게 걱정되는 거예요. 



그 뒤에 <스파이더맨>이 나왔거든요. 스파이더맨이 거미줄을 뉴욕 맨해튼의 빌딩에다 쏘는데 적당한 건물이 없으면 그대로 땅에 떨어져서 망신당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항상 디딤돌을 없애버려요. 꼭 타잔 같아요. “아, 이제 우리는 망했어.” 하는데 또 디딤돌을 새로 만드는 거예요. 그 디딤돌이 뭐냐?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버려야 될 것, 우리가 주님이라는 기둥을 매끈하게 만들기 위해서 버려야 하는, ‘내가 말씀 지켜서 내가 구원받겠다.’ 하는 이 오물, 이 흔적을 버려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가정집에 화장실이 있듯이 우리는 항상 화장실이 있어서 빼내야 돼요. 미나리 곁들여서 고기 구워 먹을 때 반드시 기름 빼내는 배출구가 있잖아요. 기름 빠지는 데가 있듯이 주님께서는 우리한테 ‘이제는 말씀 지켜서 구원 받아야지.’ 이거 빼내야 돼요. 이거 안 빼내면 안돼요. 왜 우리는 말씀 지키려 합니까? 이것이 바로 주께서 마련한 낯선, 예상 밖의 디딤돌이 아니고 내가 익히 아는 디딤돌, ‘이것 가지면 나는 구원 받는다.’ 하는 그 디딤돌이기 때문에 천국 가는 그 타잔의 밧줄을 안주시는 거예요. 그 밧줄 안주시면 우리는 “아아아~!” 하다가 추락하는 수가 있습니다. “어? 디딤돌이 없다.” 디딤돌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마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 그 때마다 주께서 주시는데 그 디딤돌이 해빙기의 저수지 얼음 같아요. 



해빙기에 저수지에 가보세요. 분명히 얼음을 딛었는데 뒷발 디딘 얼음은 벌써 꺼지고 있어요. 앞발은 아직 괜찮거든요. 괜찮다는 순간 꺼지기 시작하니까 얼른 발을 옮기잖아요. 늘 이렇게 분주하게 자꾸 이동시킨다는 말이지요. 주께서 디딤돌 되는 것을 늘 마련해주시고 장만해 주셔요. 어떻게? 말씀을 통해서 우리 속에 있는 그 오염된 것, ‘네가 어떤 존재기에 내가 피를 흘려야 되는가?’를 계속 증거 하기 위해서는 너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와 같이 ‘나는 깨어있어야 한다. 바르게 성화하면 돼.’라는 그것이 맴매, 할 수밖에 없는 종의 자식들, 지옥갈 수밖에 없는 요소가 기름처럼 매일같이 빠져 나옵니다. 



‘이만하면 되었다.’든지 내가 나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 제 말은 우리 자체가 오염되었다는 그 말입니다. 우리자체가 습자지처럼 얇아져야 되고.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나를 가지고 크게 새기기 위해서는 우리는 점점 사라져야 되는 겁니다. 여러분, 그림자라는 것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해가 만드는 거지, 주님께서 우리의 오염되고 숨기고 싶은 그림자는 그 때 그 때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제 설교 끝까지 잘 들어야 돼요. 이제 구원 받았다, 하다가는 우리가 점점 더 죄인 되는 겁니다. 



“이런 외인들은 추방되어라.” 하는데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추방되어야 하는 것은 매일 같이 우리의 그림자가 추방되어야 될 것입니다. 구원되었기에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그림자를 압니다. 그 그림자가 뭐냐 하면, ‘나는 이것저것을 아니까 내가 구원받는다.’고 여기는 그 그림자, 바로 내가 추방돼야 돼요. 내가 내 것, 내가 가진 것을 내가 믿고자 하는 그 육적인 흔적, “이것을 내어 쫓으라.” 할 때 그것이 아들의 합당한 자세가 아니라는 겁니다. 아들 만들기는 약속에 오염이 없고 흠집이 없어야 되는데 우리가 주님이 기둥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 내 손때가 너무 많이 묻었어요. 손때로 얼룩덜룩해요. 



내가 나를 너무 귀하게 여기고 나를 구원하려고 너무 애쓰다 보니까, 이게 나한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요, 나는 그런 사람 아니니까, 보편적으로 말해서 너무 내 구원에 신경 쓰다 보니까 온천지가 다 예수님의 피를 모독하는 얼룩, 땟물이 막 줄줄 흘러요. 더러워! 더러워! 



끝으로 한 말씀 드립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참 안 믿는 사람한테는 어려운 정도가 아니고 불가능한 이야기인데 세례요한이 옥에 갇혔습니다. 세례요한이 전에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분명히 이야기했는데 세례요한이 옥에 갇히고 난 뒤에 이상하게 염려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신 메시아인지 아닌지 굉장히 걱정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편으로 물었어요. “당신이 오실 메시아가 맞기는 합니까?” 물으니까 예수님께서 답을 보냈어요. 



마태복음 11장 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내가 오실 메시아라 하는 것은 누가 아느냐 하면, 자기를 소경, 문둥병, 귀머거리, 죽은 자, 가난한 자라고 자처하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만 내가 누군지가 보인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행복을 포기하면 비로소 내가 보인다, 예수님이 보인다는 거예요. 나의 행복을 포기하면. 그런데 이 귀머거리, 앉은뱅이, 이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이 예정한 것은 우리를 예정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끝을 예정한 겁니다. 끝 날의 그 보따리를 예정하신 거예요. 그 보따리가 우리와 함께 동행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보따리 풀어보면 창세전에 구원받기로 작정된 명단이 나와 있어요. 그게 예정된 거예요. 그 보따리가. 그런데 우리는 오점이 있어서 그 보따리를 내 보따리라고 여길 때 이건 맴매, 대상이 되는 겁니다. 갑자기 자기가 귀머거리가 안 되고, 소경이 안 되고, 선택의 여지가 생겨버리고, 나는 잘난 사람 되고, 가난한 사람이 아니고 부자가 되고, 그렇게 돼버려요. 



그러면 그것이 자기행복이 돼버려요. 이것은 자기 성공이 돼버립니다. 여러분, 구원에 실패를 해줘야 그것이 구원의 성공입니다. 창조란 파괴가 곧 창조에요. 실패 뒤에 성공이 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종의 자식들이 하는 소리고요, 실패가 곧 성공이에요. 실패 속에 성공이 있지 실패 뒤에 성공이 오는 게 아닙니다. “실패하세요. 하지만 성공할 겁니다.” 이건 이상한 소리에요. 지옥 가는 데 성공할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을 확정짓는 동행자가 있기 때문에. 수시모집이라 했잖아요. 이미 우리를 의인이라고 판정한 끝 되시는 분이 우리의 예정이나 판단보다 더 세고 우선되는 거거든요. 그분의 판단에 의해서 우리는 날마다 내 행복을 추구하는, 예수고 삼위일체니 그런 것을 다 끌어 모아서 내 행복을 추구하는 그 행복의 디딤돌을 완전히 해빙기의 저수지처럼 주저앉게 만들어버려요. 그걸 네가 내어쫒으라는 말이지요. 



날마다 우리의 육을 쫒아내야 돼요. 남 지적하면서 “너는 음행했으니 우리 교회에서 나가세요.” 그 ‘나가세요.’ 하는 손가락이 결국은 언젠가는 우리보고 해야 될 거예요. 그걸 그 때 가서 하지 말고 미리 나한테 해버리면 돼요. “나가세요.” 그 말을 “우리 같이 나갑시다.” 그렇게 해야 돼요. 



제가 어릴 때 신나게 본 영화중에 <용쟁호투>라는 영화가 있어요. 그 때는 교회도 안 나갈 때죠. 이소룡 주연 영화에요. 어떤 섬에 마약제조자가 있는데 거기서 무술대회를 한다는 겁니다. CIA요원인 이소룡이 가서 무술대회 하면서 악당을 제거한다는 내용인데 그 마지막 결투신이 온통 거울 방이에요. 이 소룡이가 한방 치면 자기가 자기를 보고 치는 거예요. 거울이니까. 그러면 어떻게 이기는가? 그 거울을 다 깨는 거예요. 거울은 나를 비추는, 남들 보기에 내가 어떨까, 그걸 깨는 거예요. 저 사람 보기에 내가 어떻게 보일까,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로 보일까, 그 거울을 다 깨는 거예요. 



다 깰 때 세상은 죽음의, 저주의 세상이 되고 그 중심에 광택 나는 그리스도의 피 묻은 기둥이 바로 교회가 되는 겁니다. 이제 내어 쫓으라는 그 의미란 특정인 누구를 내어 쫓으라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내어쫓을 요소가 가득 차 있고 나는 습자지고 이 말씀이 날마다 나를 얇게 만들어서 결국은 우리를 두 번 죽게 만들어서 살려내시는 그 작업을 주께서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해내시는 겁니다. 



얇아지세요. 밥을 먹는 쾌감도 괜찮지만 밥을 안 먹어서 속이 편한 쾌감도 괜찮은 쾌감이에요. 살 뺀다고 했는데 슬슬 먹어야 되겠어요. 뺄 만큼 뺐으니까. 가볍게, 자기 몸을 가볍게 하세요. 그리고 점점 더 가벼워지세요. 70킬로에서 65, 51, 점점 더 가볍게. 나중에 돌아가실 때는 2십 몇 킬로그램까지 점점 가볍게 하세요. 기름 쏙 빼세요. 나에게 종 같은, ‘나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 믿으니까 구원되겠지.’ 하는 그러한 되지도 않는 존재로, ‘신랑이 오는데 오면 나중에 깨우겠지.’ 하는데 절대로 깨워서 구원하지 않습니다. 



약속, 주의 십자가의 약속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약속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상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놓치고 잊어버리고 몰랐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성령이 와서 부활되고 보니 바로 우리가 저주받은 판위에서 자기만 챙기며 살았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약속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소급해서 하나님의 끝과 동행하면서 십자가 피로 의인된 것을 자랑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