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강-고전 5장 6-8(누룩)1503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5장 6-8절입니다. 신약성경 268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5:6-8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사도바울의 서신은 단어 하나하나가 ‘유월절 양’이라고 해서 옛날 애굽에서 나올 때에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더니만 ‘세상에!’ 사람이 죽지를 않았어요. 유월절 양의 피를 발라서 애굽에서 분리되었다는 것, 애굽사람과 이스라엘이 분리되었다는 말은 살았다는 말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죽지 않았다는 말이 적당합니다. 왜냐하면, 죽어야 합당하거든요. 하나님이 내왕하셔서, 왕림하셔서 애굽에 살던 사람을 다 죽이는데 ‘왜 우리는 안 죽입니까?’라는 질문이 성립돼야 돼요. 저 사람과 똑같이 하루 세끼 먹으면서 잠자고 이웃 간에 서로 친하게 지냈는데 하나님은 저 사람을 치는데 우리는 왜 안치는가, 물음이 그렇게 시작돼야 됩니다.
모든 물음은 주님의 사건을 시발점으로 해서 물음이 나와야 돼요. 그것은 어린양이 대신 죽었기 때문에 너는 살았다는 겁니다. 죽어야 되는데, 죽어야 되는데 어린양이 대신 죽었다는 겁니다. 이미 너는 나에게는 죽은 자로 처리하고 그 죽은 자로 처리하는 것을 죄 값을 치른 것으로 하나님께서 의미를 두시는 겁니다. 하나님 쪽에서 의미를 두는 거예요. 어린양이 죽은 것을. 양 잡기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잡았지요. 양을 잡아서 피를 내는 것은 다 그들이 했지요. 하지만 의미를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의미를 제공하십니다. 죄 값을 치른 것으로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유월절 어린양이라 하는 것은 인간세계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가 나온 겁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전에, 창조 전에 있었던 비밀이 하나님의 사건에 담겨서 이스라엘에게 찾아온 겁니다. 창조전의 비밀. 창조전의 비밀이 이미 인간세계, 이 자연세계에 왔다는 말은 창조가 안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날마다 창조라는 뜻이에요. 창조를 새로 개시한다는 겁니다. 어린양의 유월절과 더불어서 창조 전의 사실이 들어오면서 여기에 겸하여서, 짝이 되어서……, 그걸 짝패라 하는데, 장갑이나 신발도 오른 쪽과 왼쪽, 윷놀이도 윷 네 개가 짝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렇게 짝이 있어야 돼요.
창세전에 짝이 있었어요. 그 예수님과 짝패가 되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누룩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간세계에서는 여기 나오는 이 누룩이라는 의미를 사용할 수 없어요. 우리가 누룩이라고 할 때 제일먼저 떠오르는 것이 막걸리 담을 때에요. 빵이나 그 밖의 먹는 것을 생각하거든요. 예수님께서 창조주입니다. 창조주가 이 땅에 왔다는 것은 창조 전에 있었던 원리가 더불어 같이 오신 거예요. 그것을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이나 제자들이 알 수가 없지요. 알 길도 없고. 마태복음 16장 11절에, “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예수님께서 이런 말을 할 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막걸리 담는 사람입니까? 도가입니까? 양조장이에요? 아니잖아요. 예수님께서 창조 전에 이미 창조를 실시하려고 하신 창조주가 되시는 겁니다. 창조주가 되시면서 무엇과 같이 당겨서 오는가 하면, 창조를 하실 때의 그 원리를 같이 품고 오신 거예요. 우리 생각이야 ‘예수님이 너무 선하신 분이니까 천지를 창조했겠지.’ 주님께서 “아니야, 아니야. 그 창조 속에 누룩이 들어 있다.”고 하는 거예요. 말썽꾸러기가 들어 있어요, 말썽꾸러기. 악함이 들어 있었던 거예요. 악함이 없는 창조는 없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렇습니다. 누룩이라는 것은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고 하지요. 퍼진다, 커진다는 개념은 우리의 속에 있는 것이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발산되는 것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창세기 1장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천지창조를 했다고 하니까 평지처럼 평평한 대우주, 물리학이나 천문학을 배워놓으니까, 우주 속에 우리가 있다는 식으로 천지창조를 생각하는데 주님께서는 평평한 평지를 만든 것이 아니고 둥근 반죽을 만든 거예요. 창조를 반죽개념으로 생각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반죽개념으로 생각하시고 이 반죽개념이 외부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그 내부에 있는 누룩과 그 누룩과 짝패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그 희생에 의해서 누룩이 확산되고, 커지고, 변질되고, 변화되고, 색깔이 생기고, 누리끼리하게 되고. 세상을 그런 눈으로 볼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3장에 하늘나라를 설명할 때 여자가 가루 서 말을 가지고 반죽을 했는데 누룩이 있는데 그 누룩이 퍼져서 이렇게 하늘나라가 확산되었다고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주님이 어디에 재림하십니까? 감람산에 재림하십니까? 몇 시에 오십니까?” 이런 것은 창세기 1장을 모르기 때문에, 천지창조를 모르기 때문에 인간적인 발상을 가지고 그냥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부적으로 확산되고 퍼지는 겁니다. 누룩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커져가면서 세상은 자기본색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이 어디에 오십니까? 몇 시에 오십니까?” 하는 것은 그런 인식의 전제가 뭐냐 하면, “나는 여기 있는데 찾아가면 됩니까? 오늘은 며칠인데 몇 날이나 남았어요?” 그런 뜻이거든요. 그런 뜻이라 하는 것은, 내가 있는 위치, 내 주체의 위치, 시간과 공간적으로 지정된 자리, 이 자리를 통해서 하늘나라를 내가 상대해서 들어갈까, 말까를 내가 결정하겠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누룩이라 하는 것은 천지창조라는 외부의 눈이 이제는 우리 내부의 눈으로 삽입이 되어 있고 그것은 우리 자신이 분류하는 것이 불가합니다.
누룩이 확산되는 것을 우리가 족집게로 집어낼 수가 없어요. “요 누룩, 여기 있었네.” 이렇게 집어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외부에 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피할 수 있지만 그 외부의 원리가, 그 외부의 작용이 내부에 있다면 이 내부자체가 풍선처럼 커지는 그것만 남아 있을 뿐이지 우리가 어떤 흉터가 있다고 그것을 집어내고, 바이러스가 있다고 그걸 집어낼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누룩이 뭐냐 하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 창조에 반대하는 저항세력이에요. 그게 누룩입니다. 예수님의 창조의 원리에 저항하는 세력이에요. 그것이 저 우주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내부에 있는 거예요, 우리 내부에. 박쥐가 만약 마귀라면 우리는 박쥐를 박멸하면 됩니다. 살충제 뿌려서 다 죽이면 돼요. 마귀가 광야에 살고 있다면 우리는 광야에 땅을 사서 택지 개발하면 돼요. 광야를 전부 다 없애버리면 돼요. 나무를 심어서.
우리는 나 말고 내 밖에 나를 저해하는 마귀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누룩이라는 요소가 빠진 상태에서 내가 어떻게 한번 잘해볼까, 하는 그런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둥근 반죽이 되어버리면 반죽에는 뭔가 어떤 중심지점이라는 것이 없어요. 평지라면 내가 서 있는 그곳이 나의 중심지점이 돼요. 그 다음부터 바깥에 있는 것은 나에게 어떻게 유리한가, 불리한가, 이것만 따지면 되는데 우리가 반죽에 섞여버리면 내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우리는 몰라요. 내 요소가 이쪽에도 있고 저쪽에도 있고 저 표면에도 내 요소가 있고, 그렇게 있다는 말이지요.
북한 사람들이 나의 적이라고 여겼는데 만나서 일주일만 합숙하게 되면 친구 돼버려요. 내 동일한 요소가 저쪽 북한에도 있고 다 있는 거예요. IS라는 단체, 사람 죽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집단이 뿔 달린 괴물 같아도 막상 한 달간 같이 골프 쳐버리면 그만 친구 다 돼버려요. 그들의 사상을 이해하고. ‘그래, 미국이 너무 심하고 자본주의가 문제가 있다. 나도 그만 끼어들까? 알라를 위해서 목숨 바치는 것이 순교의 길이고 영생의 길이야.’ 이래서 짐 싸들고 갈 수 있어요.
내가 어떻게 잘 될까, 이것은 그 자체가 누룩입니다. 내가 잘 될까. 대체 인간이 언제부터 사는 권리를 주장하게 되었어요? 창조는 주님과 주님의 짝패 되는 누룩과의 투쟁의 현장이지 그 자리에 내가 왜 낍니까? “주님이여, 제가 뭘 하면 살겠습니까? 밥 먹고 살겠습니까?” 이렇게 묻는다는 것은 마치 나에게 살아야 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마치 내가 살 권리가 있는 것처럼 여기기에 그 착각 때문에 생긴 현상들이에요. 엽총가지고 쏘는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살고보자는 거예요. 무슨 권리로 살고자 하는 겁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분명히 단언합니다. 교회는 누룩이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저항하는 요소에요. 어떻게 저항하는가? ‘살고보자’로 모인 사람들이 교회에요. 하나님 믿고 살고보자. 예수님께서 코끼리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하마로 오신 것이 아니고, 박쥐나 염소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천사, 양으로 오신 것도 아니에요. 양, 코끼리, 박쥐, 이런 것은 나의 외부를 우리가 관찰할 수 있고 파악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누룩은 창세전의 내용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내장되어도 파악이 안돼요. 분류가 불가합니다.
파악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고 내 속에 누룩이 이미 장착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주님을 저항하고 주님을 싫어하는 요소가 온 몸에 퍼지게 되어 있어요.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오히려 우리는 주님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고 내 누룩을 보호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나의 개성, 나의 이름입니다. 나의 이름과 내 개성.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자존심만큼은, 자살하는 한이 있더라도 내 자존심만큼은 포기 못하겠다는 것, 그게 반 창조, 창조원리에 대들었던, 저항하는 악마적 요소입니다. 그 누룩이 오늘날 반죽에 작용해서 반죽 덩어리 속에 일부가 포함되도록 그렇게 조치가 된 겁니다.
마귀가 올 때, 또는 주님이 오실 때 어떤 외부인으로 온 것이 아니고 인간으로 왔거든요. 인간으로 왔다는 말은 주님께서 저 별나라에서 오고 달을 타고 오고, 그렇게 온 게 아니에요. 옛날 그리스신화에 보게 되면 메시아가 올 때는 별과 달과 연관해서 그런 것을 몰고 오는 식입니다. 태양이 지나가는 것은 신이 불마차를 타고 달리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어요. 미국의 인디언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날마다 희생을 드리지 아니하면 오늘의 태양은 떠오르지 않는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고칩니까?
“인디언님! 그게 아니고요. 태양계라는 게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백날 설명해도 안돼요. ‘내가 아침마다 희생 드린 덕분이 태양은 오늘 아침에도 뜨고 있다. 만약에 희생을 내가 늦잠자서 안 드리면 비가 온다든지 태양이 뜨지 않아서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 생각의 바탕이 뭐냐 하면, 신은 나에게 살 권리를 줬다는 일방적인 이야기입니다. 신이 인간에게 살 권리를 줬다면 하나님께서 출애굽사건을 일으켜서 유월절사건을 일으켜서 난데없이 애굽의 장자들을 다 죽일 필요가 없었어요.
주께서 찾아올 때는 누룩을 찾기 위해서 오신 거거든요. 그래서 ‘나는 누룩이 있든, 죄가 있든, 악마가 있든 무조건 살아야 돼.’ 이런 인간 다 죽여 버립니다. 그것은 창조의 원리에 위배되기에 그래요. 그래서 교회 다닌다는 것, 교회가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야 돼요. 일종의 자신의 누룩,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한 위선적인 집단이 아닌가를 생각해 봐야 됩니다. 딱 문 열고 들어서면 “주여, 살려주세요. 어쨌든 간에 기도할 테니 살려주시고 헌금할 테니 살려주시고 우리애가 잘되어야 되고…….” 전부 다 이런 것만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게 누룩인데. 그게 예수님이 하는 일과 창조에 반대되는 일인데.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식으로 창조를 했기에 살고자하는 것이 창조에 반대되는 겁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유월절 양이 나오지요. 오늘 본문에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얘들아, 여기서부터 46킬로 바깥에 거기에 지옥이 있으니까 너희가 그 근처에 가지 말라.” 이런 식으로 했다든지, “앞으로 일주일 후에 세상이 멸망하니 나와 함께 꼭 껴안고 있자.” 이렇게 한다든지, 아니면 벙커를 만들어서 물, 식량, 비상약품등을 챙겨서 환란 때를 대비하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안했거든요.
벙커 이야기가 나오니까 앞으로 3년 반 이후에 식품을 비축해야 마지막 때에 휴거된다는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그게 바로 누룩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십자가를 하나도 모르는 거예요. 그들이 믿는 십자가는 뭐냐? 자기 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누룩,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라는 것은 외부의 시선, 외부의 어떤 눈이 있어야 전체가 보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외부의 눈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주 안에 있기 때문에 외부에 나가서 내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안목이 없어요.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둥근 반죽으로 보지 않고 평지로 봐서 그 평지에 내가 서 있는 이것을 옴파로스, 이 세상의 중심으로, 배꼽으로 여기는 겁니다. 그리스신화는 그리스가, 아테네가 세상의 배꼽이라 여기는 것이고 중국은 자기나라가 세상의 중앙이라고 해서 이름도 중국이라고 했잖아요. 이슬람은 메카를 자기중심으로 보는 거고요. 유대교는 예루살렘의 제 3성전 짓는 그곳을 자기중심으로 보는 겁니다. 바로 그 시선이 누룩적인, 악마적인 시선입니다. 외부에 어디에도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없어요. 없으면서 피조된 자기가 중심이라고 우겨놓고 살려내라는 거예요. 자꾸 나를 살려내라는 겁니다.
그 때부터 종교가 시작되고 교회가 시작되고 소위 신앙생활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시작되는 겁니다. 자기의 생존의 기술배우기에 불과한 그것을 신앙이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사람이 내가 신앙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만약에 내가 신앙한다면 내가 신앙하는 내용을 내가 다 설명하고 이해를 해야 되는데 그것은 신앙이 아니고 네가 아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내가 믿는다고 할 때에는 “나는 내용에 대해서 다 모릅니다.” 했을 때만 믿음이라는 것이 성립돼요. 내가 믿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이것은 믿음이 아닌 거지요. 주께서 믿게 해 주셔야, 주께서 날 믿게 해주셔야 우리가 믿게 되지 내가 믿는 것은 전부 다 사기입니다. 거짓말이에요. 믿지 마세요.
우리가 아무것도 믿지 않고 있을 때는 남아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살려는 욕구밖에 남지 않습니다. 바로 주께서 그걸 원하는 거예요. “네가 예수,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을 핑계대면서 결국은 너 살려고 하잖아. 고백해. 너는 네가 살려는 그것이 전부지? 그렇지?”라고 들춰질 때 우리는 비로소 창조주에 의해서 창조 전으로 돌아가서 누룩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 우주외부에서 본 안목이 내 내부에서 나를 관찰하는 안목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 순간이. 이 순간이 얼마나 기쁜 순간인지 몰라요. 들통 나는 순간, 들켜버린 순간, 그 순간과 더불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날라 가는 겁니다.
죽이는 작업이 살리는 작업이라는 것을 알 때 그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며칠 전에 한국에서 남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 왔어요. 간통죄폐지. 나이트클럽에서 축배를 들었어요. 브라보! 율법에서의 해방일까요? 그 기쁜 축배 그거 뭡니까? 나는 이제 마음 놓고 살아도 된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는 이제는 내가 죽어도 괜찮다는 자유지 내가 사는 그것은 자유가 아니에요. 외부적시선이 내부적 시선으로 오면서 그 다음부터는 주께서 천지창조를 새롭게 만듭니다. 어떻게 만드는가? 그것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7절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시는 거예요.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는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인간중심은 이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너희는 여기에 가만 있거라. 여기서부터 46킬로미터 가면 마귀가 모여 있으니까 피해있으면 구원받아.”라고 하지를 않아요. 우리가 우리중심인 것을 아시면서 우리 중심이라는 그 시스템을 가지고 구원하지는 않아요. 그 시스템을 사용하기는 해요. “네가 중심이지? 그러면 나는 너를 누룩으로 간주해서 너 자체를 폭파시키겠다. 왜? 네가 중심이니까.” 눈만 뜨면 내가 사는 것만 생각하니까 아예 그걸 폭파시켜 버리는 거예요.
어떻게 하는가? 네가 주일을 지키고, 교회 오고, 헌금을 얼마를 해야 되고, 성경을 몇 장 읽고, 그것 다 폭파시켜버립니다. 몇 년간 교회 다녔고 내 직분은 목사고, 이런 것 다 폭파시켜 버려요. 신학박사니 뭐니 그거 다 폭파시켜버려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몸소 자신 속에 죄를, 누룩을 자기 안에 품고 오셨어요.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개인적으로 굉장히 놀라는데요. 어떤 점에서 생각할 때마다 놀라운가하면, 보통 창조라 한다면 인간만 창조한 것이 아니고 아까 동물, 돌, 코스모스, 들국화, 튤립, 이런 것도 다 만들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만 챙기지 말고 다른 것도 다 챙겨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우리가 알고 있던 자연세계가 그래요. 동양화를 보면 인간은 작게 그리고 자연은 크게 그리거든요. 그림 자체가. 동양화가 앞에서 이런 소리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인간은 아주 작게 점같이 그리고 대자연은 아주 크게 그려놓았습니다. 더불어서 함께 살아가는 거예요.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더불어서 함께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태백산맥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거대한 공룡으로, 혹은 용으로 오신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신화적 존재에요. 창조주께서 사람으로 오셨어요. 사람으로! 이게 얼마나 놀랍고 신기한 일이냐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서 해와 달과 별, 우리보다 더 빨리 달리는 치타, 이렇게 오신 것이 아니고 인간으로 오셨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창조에는 중심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 많은 세상, 천사도 있고 뭐도 있고 세상에 많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창조했다. 이 세상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고 누가 먼저 계셔서 그 분이 일방적으로 창조한 것이 맞거든!” 하는 유일한 증거가 뭐냐? 내가 사람이 된다면 그것은 바로 창조주가 분명히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되셨어요. 이 말은 사람의 변화가 창조의 중심이라는 겁니다. 더 논리를 뛰어넘어서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있는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 되기 위해서, 그래야 주가 되시기에 그렇게 하기 위해서 먼저 던져준 것이 사람이었다는 말이지요.
먼저 던져놓고 주께서는 그 사람 속에서 이 창조를 완성시킨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게 되면 우리 존재의 무게가 대단하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일 때 가볍게 여겨서 죽이는 것이 아니고 우주보다도 더 무겁게 여기기 때문에 꼭 죽여야 되는 겁니다. 죽여야 거기서 새로운 피조물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창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누룩 없는 새로운 창조가 만들어질 때까지 주께서는 마귀를 허용하고 누룩을 허용하신 겁니다. 그리고 그 누룩과 대판 싸움을 벌이시고 그 누룩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시고 그리고 부활하셔서 누룩 없는 새로운 피조물, 첫 번째 피조물로 등장해서 그 하나님의 형상, 예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짐으로써 창조 끝, 모든 것을 종결짓는 겁니다.
교회 와서 “어떻게 하면 삽니까?”라는 질문자체, 그런 교회자체가 애초부터 성립되지를 않아야 그게 참된 교회에요. “뭐하면 삽니까? 이러다 이 코너 끝나는 게 아닙니까?” 그러한 염려나 두려움 같은 것은 본인 스스로가 누룩이라는 황달이 너무 퍼졌다는 증거밖에 안돼요. 너무 퍼졌어요. 사람이 그만 누렇게 떠버렸어요. 누룩이 너무 퍼져가지고. 도무지 파악을 못해요. 천지창조가 왜 있는지를 몰라요. 별이 왜 있는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거지요. 인간은 왜 있는가? 인간 속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주님이 들어와서 새로운 피조물 되게 하기 위한 대상이기 때문에 인간은 중요한 겁니다. “네가 스스로 자살하지 마라. 내가 죽일게. 내가 죽일게. 살인하지 말라. 내가 죽일게.” 그래서 십계명에 보면 살인하지 말라고 했는데 ‘야, 주께서는 사람을 안 죽이는 모양이다.’ 천만의 말씀. 안식일 어겼다고 죽이고 무당 되었다고 죽여 버리고, 걸리기만 하면 다 죽여 버리지요.
주님의 언약으로 죽여야 언약으로 사는 겁니다. 그게 법칙이에요. 유월절 어린양, 죽음의 천사가 와서 집집마다 맏이를 다 죽이기 전에 집안의 장자가 미리 약 먹고 죽으려고 한다고 해서 그게 사는 것이 아니거든요. 네가 스스로 죽는 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내가 지금 너를 죽여주는 것은 너를 살려내기 위한 조치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해서 누룩을 누룩 없는 것으로 바꾸는데 이 설교에서 제일 어려운 문제는 어떻게 바꾸는가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바꾸는가? 보통 문제 아닙니다.
어떻게 바꾸는가에 대해서 마태복음 8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어떻게 바꾸는가? 일단 누룩의 특징은 뭐냐 하면, 퍼져나가기 때문에, 어떤 특정지점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퍼져나가고 커지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저항할 수 없다는 거지요. 갈라디아서 5장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가 된다는 말이지요. 창조 전에 이미 누룩을 집어넣었어요. “네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 죽음이 누룩처럼 작용해서 온 땅에 퍼지게 되면 우리 인간이 늙어 죽고 치매 걸려 죽는 것도 다 누룩의 영향으로, 죄 값으로 다 죽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보고 어떻게 닦달 낼 수는 없어요. “똑바로 해!” 뭘 어떻게 똑바로 해요? 퍼졌는데. 암세포가 온 몸에 퍼졌는데 정신 차린다고 암세포가 달아납니까?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는데? 암세포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데, 누룩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 누룩에 저항하고 이길 수가 있습니까? 없지요.
마태복음 8장을 보면서 아담이나 사울과 비교를 했어요. 아담의 경우는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찾아왔지요. 사울 같은 경우에도 다메섹으로 내려갈 때에 말 타고 가다가 떨어졌다는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주께서 먼저 호명을 했고 찾아와서 거기에 응답을 하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겁니다. 그런데 왜 저는 마태복음 8장을 거론하느냐 하면, 여기에 나오는 백부장은요, 8장 5절에 보면, “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이렇게 주님께서 하니까 백부장이 하는 말이,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이렇게 했다는 말이지요.
주님께서 칭찬하시기를,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렇게 언급을 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 예수님이 먼저 호명한 것이 아니에요. 백부장이 알아서 기었던 거예요. 알아서 기었어요. 알아서 모신 거예요, 예수님을. 백부장이 그렇게 한 것은 주의 말씀이 보통 말이 아니고 천지를 창조한 말씀이라는 겁니다.
호명해서 찾아왔다고 하니까 “주님이 저를 찾아온 적이 없는데 어떡하면 좋습니까, 목사님?” 이렇게 하시는데 여러 군데서 예수님께서 구원받는 그 메커니즘을 말씀에 뒀어요. 누가복음 16장에도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뭐냐 하면, 말씀을 봤고 그 말씀에 합당하게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백부장은 뭘 아느냐 하면, 자기가 중심이 아니에요. 자기중심을 철회하고 포기한 거예요. 자기에게 자기중심이 없어진 거예요. 자기 안에 자기가 중심으로 자리 잡지 않고 있습니다.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예수님마저도 말씀에 휩싸여 있었고 예수님 오시기 전에 이미 말씀 안에서 구원 받을 성도들이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러면 제가 내리는 결론은 이렇습니다.
천지를 창조할 때 하늘과 땅이 창조된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창조된 모든 구석구석 속에 주의 말씀이 살아 있다. 그리고 말씀을 쪼개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힘과 그리고 그걸 저항하는 누룩적이고 악마적인 요소가 모든 창조 속에 다 들어있다고 결론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은 죽습니다. 죄 값으로. 썩습니다. 누룩 때문에. 내 속에 있는 누룩 때문에 죽어야 되기에 죽어야 한다는 것이 말씀에 합당하다면 이것을 거슬러서 ‘살고 싶습니다.’하는 이것이 얼마나 악마적인 발언이고 잘못된 발상이냐는 말이지요. 누가 그렇게 가르쳤던가요? 세상은 썩어도 나는 안 썩어야 되겠다고 누가 그렇게 가르쳤던가요?
내 안에 있는 누룩이 그렇게 가르쳤고 ‘세상이 어찌되든 나는 무조건 살아남아야해.’라는 이것을 우리는 보호하고 그것을 지키고 그것이 나의 고집이 되고 개성이 되고 나의 주관이 되고 말았어요. 그렇지 않은 인간이 없습니다. 아무리 점잖고 도사 같은 인간도 건드리면 악, 하고 소리 나게 마련이에요. 부모자식간도 마찬가지고, 부부는 물론이고, 교인들 사이도 마찬가지에요. 성화되었다는 사람 둘이 붙여놓으면 안 성화된 사람 되고.
짝패가 들어 있는데, 누룩이 들어 있는데 그 누룩은 무조건 자기지킴이거든요. 자기사수에요. 자기밖에 몰라요. 그러니까 모든 피조물 속에, 모든 창조물속에 하나님의 창조주의 원리가 이미 담겨 있는 겁니다.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담겨 있는 겁니다. 그리고 늘 충돌이 일어나요. 현실이라는 것이 뭐냐?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실과 모든 다툼은 누룩과 누룩간의 다툼입니다. 1914년 6월 28일 날, 억눌렸던 것이 폭발하고 말았어요. 우리나라 이야기가 아니고 사라예보 바로 거기서. 보스니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저격했습니다. 눌리고 눌려 있는 것이 폭발해버린 거예요.
사람마다 고유의 시간이 있어요. 동시적인 사건이라는 것이 없어요. 각자 자기의 시간, 자기의 역사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 역사의 시간에 따라서 보는 현실이 다 달라요. 그걸 과학적으로 풀어놓은 것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라는 겁니다. 어떤 지점에 있을 때 그 지점에 흐르는 시간이 다 다른 거예요. 내 시간 따로 있고 네 시간이 따로 있고, 내 역사 따로 있고 네 역사가 따로 있어요. 그게 안 맞으니까 꾹꾹 참지요. 참다가 못 참으니까 엽총 찾아다가 쏴버리는 거예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너는 일찍 땅 팔아서 서울로 갔잖아. 나는 이 땅에 눌러 앉았으니까 백억 벌었지.” 이러니까 “형! 좀 나눠주소.” “왜 달라고 하는데?” 이게 뭐냐 하면, 억눌린 자기시간이 있었던 거예요. “아버지 재산인데 형이 다 가지면 안 되지.” 이것은 자기시간이거든요. 자기사수거든요. 엽총 사들고 다닐 것 같으면 살만큼 산다는 말이지요. 엽총 가지고 다녔으면 지프차 굴렸을 것이고 돈 푼깨나 가지고 살았으면서도 뭐가 또 필요해서? 정 돈이 없으면 엽총이라도 팔든지.
이게 뭐냐 하면, 모든 인간마다 자기만의 역사가 있어요. 자기만의 시간대가 있다고요. 그걸 남들이 안 알아주니 충돌이 일어나는 겁니다. 분노가 일어나고요.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황태자저격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1차 세계대전 때 무려 1400만, 군인과 민간인이 합해서 1400만이 죽었습니다. 억눌렸던 것이 가스처럼 폭발해버린 겁니다. 이 세상은 그러한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만 살고자하는 노후 된 지하가스관들이, 열 사람 같으면 열 개의 관, 천사람 같으면 천개의 가스관이 깔려 있는 거예요. 그게 이 세상입니다. “걸리기만 해 봐라.” “참지.” 참는 것은 화해가 아닙니다. 참는 것은 그냥 참는 거지요. 참는 것은 참을 뿐이에요.
그걸 충동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가스관, 또는 가스통을 짊어지고 가면서 각자 사는 인간들, 여기서 무슨 새로운 창조를 기대하겠습니까? 될 수가 없지요. 백부장의 이러한 믿음은 왜 제가 강조하는가 하면, 이 신앙의 형태가 장차 예수님 승천 이후에 모든 구원받은 자의 보편적인 상황이 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요한복음에서는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요 20:21) 왜냐하면 누룩은 보이지 않는 거니까. 내가 만약 5년 전에 기적을 봤다면 그 본 관찰자가 중심이 돼버리니까 그 사람은 자기가 본 그것을 믿는 방식이기에 이것은 누룩적으로 믿는 방법이 돼요. 그것은 옳은 믿음이 아닙니다. “내가 봤단 말이야. 내가 경험했단 말이야.” 그것은 안돼요. 그것은 자기중심을 계속 유지하고 있어요. 그러면 자기 시간대와 동일한 시간대가 아니면 그 사람을 핍박하게 될 겁니다.
아직까지 제가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이걸 바꾸는가 하는 거예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을 아는데 말씀이 이 땅에 와서 말씀이 이 세상에 역사하게 되면 말씀이 육신으로 왔기 때문에 주의 말씀도 우리 육신을 향하여 들어와요. 왜? 누룩이 우리 안에 들어 있거든요. 외부의 시선이 이제는 내부의 시선으로 바뀌어서 우리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을 들춰내는 방법을 주께서 사용하시는데 어쨌든 이유도 모르고 우리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게 말씀에 의하면 그냥 죄 값으로 죽는다고 되어 있고 우리는 분명히 죄 지은적도 없어요. 그런 기억도 없다는 말이지요. 그냥 밥 먹고 살려고 애쓰는데 그게 무슨 죄가 되겠어요?
유교, 불교의 문제가 뭐냐? 죄를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개혁주의신학도 문제고요. 모든 신학, 불교, 유교, 이 사람들이 죄를 모른다는 거예요. 왜 죄를 모르는가? 죄는 인간에게 파악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파악할 때 그 기준이 뭐냐 하면,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그걸 무조건 선으로 보기 때문에, 살아야 되겠다는 그 자체가 죄기 때문에 일단 사는 것은 의롭고 사는 것을 힘들게 하는 것은 다 죄라고, 이렇게 시작하니까 어떻게 죄를 알겠어요?
말씀으로 한다고 해도 말씀을 공부해버리면 그것이 내 것이 되니까 그것이 또 문제가 돼요. 나는 말씀 안다, 이것도 문제가 돼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방법이 뭔가? 알려 드려요? 예수님께서 인자로 오셨잖아요. 사람의 아들로 왔다는 말은, 인자를 보편존재로 만들어요. 보통사람으로 만들었어요. 창조주를 보통사람으로 만들고 그 인자가 십자가에 대신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죽으신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누룩이 사람 안에 들어 있다는 겁니다. 들어 있는데 인간은 그걸 스스로는 파악을 못해요. 그러면 주님이 파악을 하십니다. 어떻게 하시는가? 현실을 통해서 현실을 떼 내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현실을 통해서 가짜현실을 떼 내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제가 지금 한 달째 티눈이 여기 있거든요. 한 달째 티눈약을 바르고 있는데 낫게 될 때는 뭔가 톡 하고 떨어져 나올 거예요. 분명히 내 살이에요. 살아, 살아, 내 살아, 내 살이거든요. 분명히 내 살인데 그게 티눈이라, 박혀서 뽑히지를 않는 거예요. 누룩이 뭐냐 하면, 내 인생이고 내 역사고 내 시간관이고 찬란한 내 공로고 너무나 아까운 내 목숨들입니다. 그게 티눈이거든요. 그게 누룩이거든요. 그걸 떼 내실 거예요. 주님이 그걸 떼 내려고 하니 누가 저항하느냐? 내가 저항하는 거예요. “주여, 이렇게 나오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내가 죽습니다.” 경상도 말로, ‘와 이카십니까?’ “주님, 이러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나는 죽지요. 이거는 말이 안 됩니다.” 욥이 한 것처럼. “저놈들은 멀쩡한데 왜 나는 고생시킵니까? 이런 법은 없습니다. 이건 안 됩니다.” 우리는 티눈 못 뺀다고 버티고 있어요. 그게 누룩인데.
어떻게 하는가? 새로운 현실을 통해서 누룩이라는 가짜현실을 떼 내는 방식으로 합니다. 수요설교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오신 분들은 알지요. 바로 룻입니다, 룻. 모압으로 갔던 나오미가정이 모압여인을 만나고 거기서부터 하나님께서 나오미라는 이름을 바꿉니다. 우리의 이름과 우리의 개성이 이름이기 때문에 이름 자체를 바꿔버려요. 나오미에서 마라로. 나는 이제 기쁜 여인이 아니고 슬픈 여인이에요. 슬픈 여인. 나오미가 아니고 마라, 슬픈 여인으로 바뀌어요.
놀라운 사실은 낯선 현실이 나오미에게 다가옵니다. 분명히 몽땅 망해버린, 남편 죽고 아들들 다 죽고 망해버린 그 집안이 뭐가 좋다고 달라붙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달라붙는 사람이 나중에 다윗의 족보입니다. 다윗의 족보는 메시아의 족보에요. 메시아의 족보가 나오미에게 달라붙은 겁니다. 이것은 파스붙인 거예요. 티눈 빼는 반창고가 들어붙은 겁니다. 그 달라붙은 현실이 거머리처럼 떨어지지도 않네요. 누룩 빼낼 때까지 떨어지지 않습니다. 왜? 룻은 누룩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머니를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든 하나님이라면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이 맞습니다. 약속의 땅을 버리고, 기근 들었다고 약속의 땅을 버리고 모압 땅으로 갔던 그것을 주께서 용납하지 않고 다시 망하게 해서라도 기어이 약속의 땅에 합류시키는 하나님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 하나님이라면 망해도 좋습니다.”라고 따라붙은 사람이 룻이거든요.
메시아가 룻의 계통을 통해서 드디어 돌출해서 출현합니다. 누룩 속에서 메시아가 나오는 방법이에요. 죄 속에서 의가 나오는 겁니다. 이 허접스런 아무것도 아닌 내 몸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오는 거예요. 바로 유월절의 희생이 나옵니다. “피 때문에, 피 증거 하라고 살게 하시는군요.” 룻기 2장 7절에 보면, 룻이 밭에 떨어진 이삭을 줍습니다. 노동입니다. 결론 맺겠습니다. 노동이 주의 일입니다. 평소에 살아가는 것, 자식 낳고, 애 키우고, 교육시키고, 밥 먹고, 목욕탕 가고, 넘어져서 손 다쳐서 기브스하고, 이 모든 것이 주께서 주신 사건의 현실입니다. 모든 일상의 일들이.
룻이 이삭을 주울 때 하나님이 주신 이삭, 약속의 땅에서 줍는 이삭, 우리가 밥 먹을 때 일용할 양식을 주신 그 양식에 숟가락이 담겨서 내 입에 들어갈 때, “주여, 누룩 없는 새로운 피조물 만드는 작업을 주께서 하게 하시는군요. 그렇다면 까라면 까겠습니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이것이 내 작업이 아니고 주님이 창조의 작업에 우리가 합류된 것을 감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때의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특별한 일 없이 그냥 사는 그것이 신앙생활인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창세전에 일어난 그 사태가 우리를 점령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를, 주 예수님의 피의 용서의 능력을, 구원의 능력을 마음껏 나타내는 여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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